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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평점 :
최근,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추천하는 책들을 많이 읽게 된다. 이 책도 그렇게 걸려든 책이다. 신형철에, 무려 『그리스인 조르바』라니.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도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라, 오호. 신나게 주문해 놓고는 다른 책들의 홍수에 휩쓸려 묻어 두었다. 주문한 것도 잊었더랬다. 서가에 책을 꽂을 때, 나름의 규칙을 두고 꽂는 편인데-한국 문학과 해외 문학의 서가가 다르고, 보통은 작가별로 꽂아둔다- 이 책은 뜬금없이 박완서 서가에 꽂혀있었다. 새로 출간된 박완서의 책을 읽고 꽂아두려고 갔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뽑아들었다. 아. 그래, 나 이 책 주문했었지.
책 뒤의 소개 문구를 읽어본다. 저명한 작가인 ‘나’가 20년간 집안일을 돌봐준 가정부 ‘에메렌츠’를 추억하는 이야기. 오호. 보통 이러면 작가인 ‘나’가 괴팍해야 하는데 가정부가 괴팍하단다. 조르주 벨몽이 쓴 『나의 프루스트 씨』류의 책인가. 에메렌츠와 셀레스트 알바레는 어디가 닮고 어디가 다른가 보자.
책을 펼쳐서 작가 소개를 본다. 서보 머그더. 헝가리 작가란다. 어라. 헝가리. 헝가리는 동유럽에 위치한 국가로 2차 세계대전 초반에는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이력이 있는 공산 국가다. 내가 아는 헝가리에 대한 정보는 그 정도. 익숙하지 않은 국가다. 잠깐은 체코와 헷갈렸을 정도로. 그런데 나, 이 헝가리 출신의 작가 중 아는 작가가 있다. 산도르 마라이. 크리스토프 아고타. 아는 정도가 아니라 꽤 좋아하는 작가다. 이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신형철의 안내대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아니 책의 시작은 악몽과 살해에 대한 고백이다. 오, 가정부 에메렌츠를 죽였단다. 괴팍한 가정부라고 했으니 얼마나 괴팍했길래 살해까지. 이건 흥미진진한 스릴러인가. 에메렌츠는 댄버스 부인 류였던 건가. 살해의 고백으로 책을 시작한 화자는 곧 에메렌츠와의 첫 만남부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화자인 ‘나’는 “새 집에서 더 많은 가능성과 함께 책상에 더 오래 붙어 있고, 수도 없이 집을 비워야 하는 과외의 의무도 져야 하는 전업작가로 전향(p. 12)”하게 되었기에 집안일을 돌봐줄 누군가를 찾는다. 옛날 학교 친구가 소개해 준 에메렌츠는 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남자관계도 없고, 사람들에게 선물 주기를 매우 즐긴다. 무엇보다 “집안일의 대가로 지불하는 돈은 그녀에게 별반 중요하지 않으니 우리가 그녀의 마음에 드는 것이 중요(p.13)”하단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입장이 뒤바뀌는 거다. 에메렌츠는 며칠에 걸쳐 화자 부부에 대한 평판을 수집한 다음에야 일을 수락하는데, 급료와 근무시간 마저 자기가 정한다. 그러니까, 다른 일들-공동주택의 관리인-을 하는 중간 비어있는 시간에 와서 일을 할 건데, 이 ‘변덕스러운 근무 시간은 놀랄 정도의 성과를 동반’해 나를 놀라게 한다.
두 사람은 천천히 친해진다. 첫 만남에서 화자의 남편(아마도 같은 작가이거나 최소한 학자일 법한)에게는 ‘주인님’ 이라는 칭호를 바로 사용하지만
에메렌츠에게는 내 남편에 대한 호칭만 있었을 뿐, 그녀에게 나는 여성작가도, 부인도 아니었다. 그녀의 삶에 마침내 내가 자리매김하기 전까지, 그녀의 관계망 속에서 내가 누구이며, 나에게 적합한 호칭은 어떤 것인지 그녀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그 기간 동안, 나에 대해서는 어떤 호칭도 없었다.
p. 19
그렇게 약 5년간, 화자 부부에게는 에메렌츠가 필요하지만, 에메렌츠에게는 굳이 가까이 둘 필요가 없었음에도 화자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함께 한다. 그러다 화자의 남편이 폐종양 수술을 받았고, 수술이 끝난 직후 기진맥진해 진 화자가 홀로 집에 들어갔을 때 에메렌츠는 화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제외되었음에도 지친 화자를 돌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열어 보인다. 그리고 남편이 수술에서 잘 회복되던 무렵의 크리스마스날, 화자는 강아지 비올라의 생명을 구하고 그것으로 에메렌츠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던 것 같다. 비록 강아지 비올라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화자를 ‘주인마님’ 이라고 칭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묘한 긴장을 가지고 이어진다.
그 어떤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든, 그녀의 눈에 공구들을 돌리고 조이지 않는 남자들은 모두 기생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질서를 다루는 그 총경은 제외하고. 각종 구호들로 연설하는 부인들도, 처음에는 나를 포함하여 빵을 축내는 사람들이었다.
(p. 149-150)
처음에는 만성적인 노동 기피자를 대하듯 우리들도 낮춰보았던 에메렌츠도 우리집의 문지방을 넘으면서는 반감이 약해졌는데, 우리가 두드리고 있는 것이 기계(타자기 말이다)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우리가 밥벌이를 하는 데 작은 기여를 한다고 스스로를 확신시켰기 때문이다. ‘에메렌츠의 세상에는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p.154) 말하자면 에메렌츠는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이고 화자 부부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빗자루질을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에메렌츠의 반감과 경멸은 매우 두드러지지만 그것이 화자 부부에 와서는 약해진다.
왜 자신과 그렇게나 다른 내게 그녀가 집착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의 어떤 면을 그녀가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내가 아직 젊었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운명적으로 뒤엉켜 있으며, 예측불가능한 감정인지를 나는 철저히 분석할 수 없었다.
(p. 163)
화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에메렌츠는 화자에게 애정을 가졌고, 그 애정은 에메렌츠 평생의 신념(빗자루질에 의한 구분)도 대충 뭉뚱그릴 수 있을 정도의 애정이었다. 이유가 없었기에 더욱 강력해 질 수 있는 것이 애정이다. 끝내 에메렌츠는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자신의 집, 닫힌 문 너머를 나에게 열어보인다.
당신에게 이것들을 맡긴 것, 당신을 여기 안으로 허락한 것, 이 이상 더 많은 것을 당신에게 줄 수는 없네요.
(p. 231)
그것이 에메렌츠에게는 가장 강력하고 절실한 애정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끝내 에메렌츠는 나를 “머그두슈카” 라고 부른다. 오직 부모님만 사용하던 호칭으로 나를 부른 거다. 에메렌츠는 엄마가 딸을 사랑하듯 화자를 사랑했다.
신형철은 이 소설을 천천히 세 번 읽었다고 소개한다. 여기까지 읽었더니 신형철이 왜 세 번이나 읽었는지 이해가 된다.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앞에서 그저 넘겼던 서술들, 짧은 문장들이, 작가는 물론 알고서 그렇게 배치했겠으나 독자는 무심코 넘겼던 구절들이 갑자기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덤벼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에메렌츠가 화자에게 끊임없이 다그쳤던 것처럼.
당신은 얼마나 바보 같은지요! 죽은 사람에게는 이미 모든 게 마찬가지예요. 망자는 제로예요. 영이에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못하는 거지요? 그 정도 나이면 충분한데도 말이에요
(p.314)
이 쯤 되면 책을 앞으로 허겁지겁 돌려보게 되는 것이다. 아아. 나는 얼마나 많은 구절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인가. 작가가 보물을 배치하듯, 책의 구석구석에 비치해 둔 그 많은 애정들을.
당신은 모든 것에 대해 나와는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천만가지, 그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은 배웠겠지만 그런데도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당신이 쓸데없이 눈을 부라린다고 해도, 완전히 나의 것이 아닌 사람은 나에게 필요 없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으세요? ............ 그 사람을 남편으로 원했기에 내가 그를 친구로 삼지 않은 것인데, 마치 태어나지 않은 자식처럼 나에게 굴지 마세요. .............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그곳에 당신을 허락한 것도 잊지 말아요. 내 안에 더 이상은 없으니 이 이상 더 줄 게 없어요.
(p. 235-236)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영화 《일 포스티노》로 유명한 책의 마지막 부분이 떠올랐다. 칠레 쿠데타가 일어나고, 집에 감금된 노벨문학상 수상자 네루다에게 쏟아지던 전보들. 우체부 마리오는 그 전보를 직접 전달할 수 없어 외어 와 읽어준다.
“아옌데 대통령 죽음에 공분과 애도. 정부와 국민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 씨에게 망명지 제공. 스웨덴.”
“다음”
네루다는 눈자위에 그림자들이 어리는 것을 느꼈다. 그 그림자들은 거센 물줄기나 질주하는 유령들처럼 유리창을 산산이 부수고, 모래사장 위에서 스멀스멀 몸을 일으키는 희미한 몸뚱어리들과 어우러지고 싶어 하는 듯했다.
“멕시코 정부, 시인 네루다 씨와 가족에게 비행기 제공. 조속한 내왕 바람.”
마리오는 낭송은 했지만 이미 시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우석균 역, 민음사, 2004, p.156
죽음을 앞 둔 시인에게 전해진 무의미한 구조 신호. 안전에 대한 그 완벽하고 거대한 약속이 오히려 얼마나 무심하고 슬펐던가. 이 책의 마지막 부분도 그와 비슷하다. 병원에 누워있는 에메렌츠를 두고 문학상을 수상하고, 해외 문인 회의에 참여했던 나. 그 무의미함이라니.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책이다. 그 외 무엇도 아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해가 된다. 4백쪽이 안되는 소설을 4천 쪽짜리 대하소설인 양 읽어야 했다는 신형철의 말이. 4천 쪽만큼의 감정이 4백 쪽에 응축되어있다는 그 말이.
전 세계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7700만에서 8천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헝가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1300만명 정도다. 변방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어 사용자의 약 1/6 수준이다. 변방 중의 변방이다. 그 적은 수의 사람만이 사용하는 헝가리어로, 1987년에 출간된 이 책이, 2015년에 뉴욕타임즈 올해의 책이 되고, 그로부터 또 4년이 지나 2019년 한국에 출간된 이유는 그 4천 쪽만큼의 감정 때문이다.
당신은 유다예요. 그녀를 배신한 거예요.
p. 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