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은 날 : 2023. 12. 22

 

헤밍웨이의 여섯 단어로 유명한 소설이 있다. 이것이 실화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도 있고, 이 소설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이야기도 분분하지만, 그 여섯 단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풍성하고 여운이 길다.

헤밍웨이는 수식어를 배제한 짧은 문장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인데(소설가 김훈은 그의 문장을 뼈다귀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이라 평한 바 있다.) 영미문학사에서 그러한 문장을 구사한 최초의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래서일까, 다른 작가들 및 평론가들과 10단어 미만의 단어로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내기를 했고, 그는 여섯 단어의 소설을 써 내어 그 내기에 이겼다고 한다.(다른 버전으로는 친구와 술자리에서 6단어 만으로 사람들을 울릴 수 있는가에 대해 내기를 했고, 헤밍웨이는 냅킨에 이 짧은 소설을 써서 친구를 울렸다고)

 

그 여섯 단어의 소설이 이것이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이 여섯 단어, 세 줄의 문장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위력적이다. 무엇도 서술하고 있지 않음으로 되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임신을 기다리며 아이의 신발을 구입하는 부부의 설레임, 임신이 된 것을 알았을 때 아기 신발을 선물 받았을 기쁨, 아이는 사산되었을 수도, 태어났지만 신발을 신을 필요가 있을 때가 되기 전에 죽었을 수도 있다. 아이의 신발을 팔아야만 할 만큼 가난한 부부였을 수도 있고, 단지 집안에 남아있는 아이의 흔적을 견딜 수 없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하여 누군가에게 파는 것일 수도 있다.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엄마 또는 아빠,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상대방은 싸웠을까, 그로 인해 관계가 멀어졌을 수도, 같은 아픔을 공유하면서 그 관계가 더 밀착되었을 수도. 무엇을 상상하건 독자의 자유이고 각자의 상황으로 이 문장을 풀어내면서 우리 안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절제의 힘이다.

 

지난 연말에 클레어 키건의 소설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맡겨진 소녀이처럼 사소한 것들. 사실 맡겨진 소녀가 나왔을 때 만 해도 딱히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시끄러울 정도로 여기저기서 말을 해 댔다. 뭐라더라. 출간 8일 만에 조선일보 올해의 책으로 선정이 되었다던가. 알라딘의 광고 문구였다. 아니 대체 뭐 어떤 소설이길래 이렇게들 시끄러운가 싶어 두 권을 함께 구입했고 연달아 읽었다.

 

맡겨진 소녀를 읽는 내내 황순원의 <소나기>를 생각했다. 아마 책 날개에 있던 출간 이래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아일랜드에서는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잡았다는 문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 교과서에 실릴만한 깔끔하고 단정하게 잘 쓴 소설이네. 마치 <소나기>처럼. 뺄 곳 하나 없고 덧붙일 것 하나 없이 완전하고 완결된 매끈한 소설. 절제된 묘사와 풍부한 은유. 마지막 장면의 중의성은 압권이었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다산책방, 2023, p.98

 

내가 경고한 가 나를 안고 있는 킨셀라 아저씨라면 아빠가 오고 있으니 이만 당신의 감정을 추스르라는 말일 것이다. 너와 나의 감정을 나의 생물학적 아빠에게 들키지 말고 오롯이 당신과 나의 비밀로 간직하자는 이야기. 그리고 두 번째 부른 아빠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들려주는 호칭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나의 진짜아빠. 라는.

 

내가 경고한 가 우리-나와 나를 안고 있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다가오고 있는 나의 생물학적 아빠라면 잠시 그곳에 멈추라는 경고일 것이다. 나를 안고 있는 이 사람과 내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니 그곳에 멈추라는. 그리고 두 번째 부르는 아빠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나의 생물학적 아빠가 오고 있으니 감정을 추스르자고.

 

작가는 이 중의성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장면을 열어 둘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독자의 상상에 맡김으로써 이 장면의 이야기를 훨씬 풍성하게 만들어 낸다. 내가 경고한 가 누구냐에 따라 아빠를 부르는 어조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이것을 음성으로 듣지 못하고 문자로만 읽기에 독자는 그 어조를 마음껏 상상해 낼 수 있다. 나와 킨셀라 아저씨와 아빠의 표정이 묘사되지 않았기에 더욱 풍부해진다. 경고하는 아빠와 부르는 아빠라니. , 이 작가 천재로세.

 

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전작만큼 서술을 절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제목 그대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만을 하는 것으로 거대한 중심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오히려 부각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주인공 빌 펄롱은 부유한 미망인 미시즈 윌슨의 집 가정부로 일하던 열여섯살 엄마의 미혼자녀로 태어난다. ‘펄롱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엄마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그 집에 지내며 일할 수 있게 해 줬다. 펄롱이 태어난 날, 아침에 엄마를 병원에 데려가고 또 둘을 함께 집으로 데려온 사람도 미시즈 윌슨이었다.’(p.15-16) 가족은 펄롱의 엄마를 버리지만 미시즈 윌슨은 그 모자를 거둔다. 그렇다고 뭐 엄청난 선행을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일자리와 잘 곳을 제공했을 뿐. 미시즈 윌슨의 덕에 그럭저럭 잘 자라 지금은 아내도 있고 딸도 다섯이나 둔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 펄롱은 자신의 친부가 누구인가 하는 거대하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두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p.22)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p.24) 사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빈 주먹으로 태어나 최악의 환경에서 그래도 안정된 직장과 직업, 아내와 다섯 딸을 둔 안정을 일궈낸 소시민 빌 펄롱은 현재 자신이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지 알고 있고 이 안정이 사실은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있는지도 알기에 더욱 조심하며 살려 한다. 그럼에도 그는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p.44) 버섯 공장에서 일하던 때의 반복된 일상에 가슴이 쿵 내려 앉았던 기억을 아내와 공유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욕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의 그러한 소시민적 일상의 반복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은 크리스마스 즈음 방문하게 된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들 때문이다. 아마도 그에게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었을. 어머니가 받았던 미시즈 윌슨의 건조하지만 차갑지 않았던 호의와 돌봄이 그 소녀들에게는 없었다. 그는 드디어 어리석은 욕구를 참지 못하고 아내 아일린에게 그 소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아일린은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 아일린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p.55) 라고.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고, 당신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p.57)이었던 미시즈 윌슨이 아니니까. 그리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아일린과 비슷할 것이다. 식당의 미시즈 케호가 그렇듯. “정말 열심히 살아서여기까지 온 빌 펄롱을 그녀는 열심히 일깨운다. “그곳하고 세인트 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 뿐이라고.”(p.106)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 쉽게 일어난다는 말의 구체화 버전이다. 네가 조금만 잘못한다면 네 딸들은 세인트 마거릿 학교가 아니라 수녀원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그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 뿐이라고.

 

그러나 펄롱은 끝내 수녀원 소녀를 외면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의 저녁, 수녀원 소녀 세라를 구해 집으로 데리고 오던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p. 119-120)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을 했던 그는 그제야 드디어 알게 되는 것이다. 미시즈 윌슨이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

 

극소의 세계와 극대의 세계는 닿아있다. 미시즈 윌슨의 그토록 사소한 것들이 진짜로 사소한 것들이었을까. 한 인간을 구하는 것은 한 세계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p.121)는 말로 이 소설은 끝이 나지만 아마도 펄롱의 그 순진한 마음과 믿음은 쉽게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와 수도원 사이의 담장이 펄롱의 삶 안에서 유지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자신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결말이 따뜻하게 읽히는 것은 미시즈 윌슨이, 네드가, 미시스 케호가 보여주는 사소한 것들의 역설이 펄롱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p.1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