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어 보이
닉 혼비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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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읽기 좋은 소설이었다.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란 쓸쓸한 법이어서, 아주 괜찮은 소설이 아니고는 나를 위로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유쾌한 기분을 가지고 싶어 선택한 책이었고, 그 선택은 적절하고도 탁월하였다. 뭐랄까, 여러모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풍기는 소설이랄까. 크리스마스처럼 가볍고 유쾌하며 가슴 한켠이 따뜻해 오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풍기는 데는 주인공 윌 프리먼의 캐릭터 탓이 가장 크다.

우리 고전소설에서는 이름으로 사람의 미래를 보여주는 명명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예를 들자면 춘향(春香:봄의 향기-아름다운 여자), 몽룡(夢龍:꿈에 용을 보다-과거 급제의 암시) 이런 식의 이름으로 주인공의 외모와 성격과 이야기의 미래까지도 결정짓는 것이다. 그런 이론으로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재미있다. Will freeman.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이름을 가진(뭐, 주인공 이름의 철자가 저게 아니라면 배째라. 날 더러 어쩌라고. ^^) 주인공은 36살의 부유하고 쿨한 백수다.

윌이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작가는 잡지책을 펼쳐 자신의 쿨 지수(指數)를 세는 윌을 보여줌으로써 주인공 윌의 평소 생활 패턴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그러니까 윌의 평소 생활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자고, 옷 한 벌에 300파운드(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도대체 얼마지? 외국 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면 이 돈이 얼마나 큰돈인지 알 수가 없으니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이상의 돈을 쓰고, 머리 자르는데 최소한 20 파운드의 돈을 쓰고, 적어도 5장 이상의 힙합 앨범(36살에 말이다.)을 가지고 있고, 엑스터시(마약)를 복용한 적이 있고, 일년 연봉은 4만 파운드(그러니까, 이게 얼마냐구.)가 넘고, 죽도록 일'만' 할 필요도, 솔직히 일'을' 할 필요도 없는, 그런 (본심을 털어놓자면)부러워 죽겠는 백수다. 정말 유명한 캐롤 하나를 작곡한 아버지 덕분에 그는 하루의 시간을 주체 못해 꽉 막힌 런던 도로를 드라이브하는 별난 취미까지 가지고 있다.

36살이 된 나이에 너바나를 듣고(왜 들으면 안되지?), 결혼은 끔찍하고 아이는 혐오스럽고(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이루어 놓은 거라고는 남성잡지에서 자신을 쿨하다고 판명해준 사건 정도일 뿐(음, 이건 좀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룩해 가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이지만 윌은 자신의 삶이 상당히 만족스럽다. 가끔, 모든 사람들이 다들 출근해 버린 오전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역일 때도 있지만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못할 정도가 되면 차를 몰고 나가 꽉 막힌 런던 시내를 드라이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현대사회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사회에 편입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낙오자라고 하기는 힘들고, 단지 자라서 어른이 되어 어른의 사회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결혼, 직업, 아이, 책임 등으로 대변되는 성인의 사회에서 그는 자유롭기를 원하며, 충분히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작가 닉 혼비는 그렇게 살아가는 윌이 그다지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왜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건데?" 라고 묻는 듯 하다.

만약 이 소설이 그런 윌의 이야기로 그쳤다면 소설의 가치는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처럼 유쾌한 소설이라는 데는 별 변함이 없겠지만 크리스마스처럼 따뜻한 소설이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소설은, 이미 어른이지만 어른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윌의 이야기와 아직도 아이이지만 어른이 되기를 외부에 의해 강요당하고 있고 스스로도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마커스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가며 두 사람의 차이를 점점 좁혀가고 두 사람이 서로를 닮아 가는 것을 중심 축으로 전개된다.

조울증인 채식주의 히피 엄마 아래에서 살아가는 마커스는 덕분에 괴짜로 보인다. 실제로도 괴짜인 셈이고.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지만 엄마 피오나는 그를 이해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고 그는 엄마가 그를 이해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단 둘이니까, 버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처음 윌에게 접근하는 단 하나의 이유 역시 홀로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꽤나 가슴 아프다. 마커스의 선하고 어른스러운 성품은 그의 집에서 벌어지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드러난다.

「윌은 마커스가 착한 아이라고 제대로 알아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그냥 괴짜에다 골칫거리 꼬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다른 면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애는 착했다. 윌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순종적이고 불평이 없다는 면에서 착한 게 아니라, 마음가짐 자체가 착했다. 쓰레기 같은 선물더미를 바라보면서 그걸 엄마가 사랑으로 정성스럽게 골랐다는 사실을 꿰뚫어 볼 줄 알았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반쯤 남은 유리컵을 보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뭐 이런 것도 아니었다. 마커스의 컵은 정말 철철 넘치도록 가득 차 있었고, 누군가 그에게 세상에는 이렇게 북슬북슬한 스웨터와 악보 따위는 부모의 면전에 던져버리고 닌텐도를 내놓으라고 떼쓰는 아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면 정말로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모를 것이다.」
닉 혼비, 『About a Boy』, 문학사상사, 2002, p. 202


하지만, 마커스의 그러한 장점은 93년에 초등학교 5학년인 그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착하지만, 뭘 어쩌라는 말인가. 마커스의 그러한 성품 덕에 그는 친구들에게 사탕세례를 당하고, 운동화를 빼앗기고 놀림을 당하고, 얻어맞는다. "어른"이자 "엄마"인 피오나는 자신의 확고부동한 삶의 철학 때문에 마커스의 문제가 그에게 그야말로 '실존적 문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착하고 어른스러운 마커스는 그것을 엄마에게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마커스의 문제를 알아차리고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이'이자 '남'인 윌이다.

윌의 옆에서 열심히 퇴행을 거듭한 마커스는 떼쓰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기겁하던 아이에서, 노래를 부르려는 엄마에게 "아, 제발, 엄마. 그것만은 참아 줘."라고 이야기를 할 줄 알게 되고, "왜 그러니. 넌 노래하는 거 좋아하잖아. 조니 미첼 좋아하면서." 라고 이야기하는 엄마에게 "난 싫어. 이젠 아냐. 나는 빌어먹을 조니 미첼을 증오해."(p. 339)라고 쏘아붙일 줄 알게 된다.

윌이 마커스를 만나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웠다면 마커스는 윌의 덕분에 아이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 좀 더 만사를 편안하게 보게 된 것 같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윌은 적어도 한 가지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밖에 내어 말하는 건 현명하지도 못하고 친절하지도 못한 일일 터이다. 사실 요즘의 마커스는 그리 다루기가 어렵지 않았다. 친구들도 있었고, 스스로 자기 일을 해결 할 수도 있었고, 일종의 껍데기가―그러니까 그 껍데기는 방금 윌이 허물 벗어버린, 그런 껍데기였다―생겼다고나 할까. 그는 김이 빠지고 평범해졌으며, 다른 열두 살짜리들처럼 떠들썩하고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이다. 윌은 그의 껍데기를 잃고, 그의 쿨함을 잃고, 거리를 잃어버린 채 겁에 질려 상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레이첼과 함께 있어야만 했다. 피오나는 마커스의 커다란 일부를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외상환자 병동과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살게 되었다. 마커스는 자신을 잃어버렸지만, 학교에서 무사히 신발을 신고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같은책, p.338-339


작가는 어른이 된 윌의 성장 역시 성장이라고 말하고, 아이가 된 마커스의 변화 역시 성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지 변화에 찬사를 보낼 뿐, 어른이 되는 것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닌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흔히 하는 이야기들처럼,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당시에는 유행가였다- 라는 말 그대로 지금은 '세월'이 덧칠해 주는 무게를 가지지 못한 갓 태어난 명작 같은 책이 한 두 권 나오는 데, 이 소설 역시 그렇다.

닉 혼비는 썩, 괜찮은 작가다. 가벼운 소재들에서 날카롭고 무게감 있는 삶에 대한 통찰을 잘 이끌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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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
강인숙 지음 / 삶과꿈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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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의 책을 읽는 것은 그렇지 않은 책보다 훨씬 재미있게 느껴진다. 특히 그 작가의 개인적인 말투나 취향, 성격 등에 관해 알고 있을 때는 책에서 느껴지는 육성이 더욱 생생하고 선명해 지는 것이다. 이 책은 나의 대학 교수님이자 영인문학관 관장님이신 강선생님의 최근작이다.

강선생님의 수필들은 상당히 재미있다. 선생님 특유의 자분자분한 말솜씨에 다양한 견문과 경험, 지식 등이 더해져 읽다보면 그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통찰에 쉴 새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이 책 『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에서도 선생님의 그러한 글솜씨는 유감없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것은 선생님의 표기 방법이다.

100달러→100불, 스팽글→스팡글, 피카소→삐까소, 게르니카→게르니까, 콩코드 광장→꽁꼬르드 광장 이런 식의 고풍스러운 발음을 그대로 살려 쓴 여행기는 한층 더 맛깔나고 재미있다. (우리 선생님은 고딕을 끝끝내 "꼬직"이라고 발음하신다. ^^) 뿐만이 아니다. 정육점이 아닌 "육고간" 이라는 표현이라든지 하는- 이제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옛날식 표현법들이 가끔 나와서 재미있게 만든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다른 곳에 있다.

우리 선생님은 4개 국어(일본어,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를 하시고, 서양 중세사에 능통하시고, 국문학에 불문학을 부전공 하셨다. 이러한 박식함이 이 책에서는 화려하다 할 만큼 잘 드러난다. 각 지역에 갈 때마다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특색, 가르시아 로르까와 헤밍웨이와 같은 문학가, 이슬람에 대한 지식들이 적절한 곳에서 교차되며 나와, 일견 여행 안내서 같은 느낌을 주는 여타의 다른 기행문들과 구별을 짓는다.

이러한 박식함과, 동행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네 명의 자매라는 데서 오게 되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 나이 먹은 것에서 오는 삶에 대한 통찰과 빠지지 않는 유머 등등이 이 책을 더욱 아름답게, 따뜻하게 만든다. 읽고 있으면 머리는 꽉 차 오르고, 가슴은 훈훈해져 오는 느낌이랄까.

선생님께서 직접 찍으신 사진들이 칼라로 여러장 삽입되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우리 선생님 책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참- 아름다운 책이다. 참, 참 많이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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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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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고, 간단하고, 가볍고, 조금 짜증스럽고, 좀 많이 황당한- 소설이다.

확실히 바나나는, 상상력 자체가 이질적이다. 이걸 독특함이라고 해석해야 하나.

종교집단에 가까운 집단의 지도자인 할머니, 그 집단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안에서 자란 나 마오짱, 딸과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수많은 남자들을 침실로 끌어들이는 어머니, 갓난아이를 인도에 버리고 가는 하치의 부모, 하치와 동거를 하는 여고생 <엄마>, 명상을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인도로 가야만 하는 하치. 열 일곱, 첫 상대는 집안의 중년 남자였다- 라는 마오짱, 마오짱과 <엄마>의 느닷없는 동성애적 행위.

이런 것들의 조합을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가. 일본 내부의 성적 문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르포드라마? 그렇게 이야기해도 하나 손색없을 것 같은 이야기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구나, 이 소설은 성적 문란이 주가 된 것이 아니야. 라고 이야기들 하겠지.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은 거냐, 라고 묻고 싶어지게 만든다, 늘, 바나나는.

재작년에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을 했던 『툼레이더』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말도 안 되는 설정과 황당한 우연을 억지로라도 말이 되게 이어 붙이기 위하여 "제비꽃의 요정"이라는 존재를 등장시킨다. 예를 들면, 졸리(라라 크로포드)가 정글에서 길을 잃어 헤메고 있으면 짜잔, 하고 등장해 길을 가르쳐주는 식이다. 라라 크로포드가 어떻게 길을 찾게 되나를 설명할 재간도 설명할 생각도 없어 뵈는 감독에게는 아마, 최고의(또는 최후의) 선택 아니었을까.

바나나의 소설에는 늘 그러한 "제비꽃의 요정"이 등장한다. 말도 안 되는 설정의 틈을 연결 지어 주기 위하여, 주인공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하여. 개연성 획득을 위한 노력은 머리가 아파 하기 싫으니, 일종의 신끼가 있었던 할머니의 유언을 통해 만난다는 황당한 설정(이걸 신비스럽다고 해 줘야 하는 건가.)을 통해 하치와 마오짱을 만나게 해 놓고, 이제 작가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골치 아픈 일은 모두다 그놈의 "제비꽃의 요정" 에게 맡겨놓고!

그러니까, 바나나의 소설에서 취할 점은 그 '뜬구름 잡는 이야기' 밖에 없다. 그리고 바나나의 가치는 그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있다. 바나나의 글은 구체적이고 질박한 대신 섬세하고 감각적이다. 이 소설에서는 처음부터 '생활'이 거세되어 있다. 황당한 상황의 제시, 현실에서 유리된 인물들의 제시를 통하여 바나나는 반대로 '생활'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색다른 사랑, 독특한 사랑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색다르고 독특하고 현실에서 유리된 이야기를 통하여 현실의 가치,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난감하다. 바나나를 싫어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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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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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상처를 더욱더 남에게 보일세라 꼭꼭 싸안고 가는 일련의 행위다.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련의 상흔들, 또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덧나지 않게 덮어놓고 조심스레 외면하는 나날들. 결국 삶이란- 메마른 사막을 짐까지 지고 묵묵히 지나는 낙타처럼 조용한 견딤에 다름 아니다.

한강의 첫 소설집이기도 한 이 책에는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각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각의 상처를 싸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아이 둘을 데리고 동반 자살을 하려 했던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나와, 어미와 아비가 차례로 죽고, 의붓 어미의 친정을 외가로 삼아 살아야 하는 자흔의 동거를 담은 소설 《여수의 사랑》, 아비가 죽은 직후, 동네 아이들에게 맞아 죽은 동생을 보아야 했던 인규(《질주》). 자신으로 인하여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일란성 쌍둥이를 보며 살아가던 동걸(《야간 열차》), 사생아로 태어나 미쳐 죽은 생모를 보고 삶을 내동댕이쳐 버린 재헌(《저녁빛》), 아내는 집을 나가고, 심장병을 앓다 죽은 딸을 둔 황씨와 가난한 어머니와 여동생을 버리고 도망쳐 두 번 다시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된 정환(《진달래 능선》), 순진했기에 사기를 당하고 혈육에게서조차 경원시 되어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는 나, 영진(《어둠의 사육제》).

이 인물들에서 보이는 바, 한강의 작중 인물들은 모두 '가족관계'의 파탄, 또는 가족 누군가의 죽음 등이 원인이 되어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가족이 무엇이던가. 가족은 한 인간의 영원한 안식처, 사회에서 거칠게 투쟁하며 상처 입은 인간이 편안히 쉬며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는 곳이 아닌가. 그 가족관계가 상처의 원인이 된다면 그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 불가가 되고 만다.

이러한 인물들은 모두 험난한 세상을 고아처럼 외롭게 떠돈다. 그들의 고통은 '희망 없음'에 있으며, 한강은 상처받은 인물들을 제시하여 그들의 지난한 삶을 그려낼 뿐 작중인물의 누구에게도 상처 치유나 회복의 희망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끝끝내 힘겨운 '견딤'만이 남는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자신의 이러한 '상처'에 저항하지 않는다. 극복하려는 의지도 없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꿋꿋하게 견디어 나갈 뿐이다.

모든 소설이 인생의 전환점이나 해법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단지 이렇게 상처의 벌건 속살을 보여줄 뿐 그것을 덮고 아물리려 노력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는 아무래도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그저, 상처가 이렇게 있으니 그것을 견디라고만 말한다. 그것뿐, 이라고 한다.

서정적인 문장들의 갈피갈피에 숨어있는 상처의 기록들.

작가 한강이 이러한 상처에 희망을 던져주기 까지는 앞으로도 몇 년, 이라는 지난한 세월이 흘러야만 한다. 그녀는 2002년이 되어야 비로소 상처의 극복과 치유를 이야기 한다. 『그대의 차가운 손』이라는 장편소설을 통하여.

70년에 소설가 한승원의 딸로 태어나 93년에 등단한 천재적이라면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작가. 24-25살, 젊은 작가의 희망없이 치열한 내면을 보여주는

썩, 괜찮은,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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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사랑
린다 하워드 지음, 김선영 옮김 / 신영미디어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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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에서는 결코 사랑의 순결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only one 또는 just one!을 외치지요. 사랑의 순결성, 사랑의 운명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작가는 과거의 사랑을 과감히 '착각'으로 돌려세우는 놀라운 행동들을 합니다. 다른 장르 소설들의 유연한 태도에 비하면 몹시 경직되어 있고 유아적이라 아니할 수 없지요.

일례로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박완서의 《그리움에 관하여》라는 소설에서는 새로이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는 노년의 남녀 두 사람에게 각각 과거의 사랑을 인정하는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가는 유연성을 보여줍니다. 과거에 깊이 사랑하였기에 현재에 또다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로맨스에서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내사랑(주인공)"을 만나는 순간 과거에 했던 것들을 "착각이었어!"라고 밀어붙여버리는 과감성을 보여줍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식이지요. 과거에 서로를 보고 불꽃이 파바박 튀지만, "아닐거야!"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다른 사람과 살아간다. 그러나 그 과거의 불꽃을 잊지는 않고 있다가 현재에 다시 만나게 되면 불꽃에 화약과 장작을 던져넣는 것이 되는 셈이랄까요.

로맨스에서는 그런 식으로 사랑의 순결성을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심장이 하나이듯, 사랑도 하나, only, 또는 just one이 로맨스라는 장르내에서의 사랑의 유일한 본질이 됩니다.

물론, 과거의 연인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기야 하겠습니다만. 과거의 연인이 아주 싸가지 없고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에 대한 애정을 싸그리 없애 버리게 되고, 과거의 연인이 착하고 순한 사람이었다면, "친근하고 편한 것이 나는 사랑인줄 알았어~ 그런데 이남자(또는 이여자)를 만나보니 아니야~"가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로맨스 소설에서 굳이 사랑의 순결성을 주장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확실히 그로 인하여 '착각'이 되어 버린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열받지요. 그야말로 니가 하면 로맨스, 내가 하면 불륜이냐? 라고 덤비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

요 근래, 제가 읽은 린다 하워드의 소설 세편은 이러한 just one에 관한 강박증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설입니다.

[마지막 약속]에서 그레이는, 페이스가 아직도 많이 어릴 때에 불빛에 비친 페이스의 몸매에 불끈(^^ 어디가?)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불꽃의 파바박, 이지요. 그 이후로 어떤 여자도 페이스와 비슷한 자극을 그레이에게 준 남자는 없습니다.

[사라의 사랑]에서 롬 매튜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아내 다이앤과의 결혼식장에서 사라를 보고 또 불끈(^^) 합니다. 그 이후에도 수영장에서 우연찮게 보고 또 불끈(^^) 합니다. 그는 내내 사라에 대해 신경이 거슬려 하지요.

[내사랑 에반젤린]에서 에반젤린 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미망인이지만, 죽은 남편에 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였기에 가지는 호감'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나이가 먹은 뒤, 스스로의 심리에 대한 해석을 내리지요.

이런식으로, 로맨스의 작가는 "두번의 사랑"을 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변명 꺼리를 만들어 둡니다. 그러니까, just one이 되어야 하는 사랑의 순결성을 파괴하지는 않았다는 변명을 하게 되는 거지요.

이러한 사랑의 순결성은 자녀에 대한 사랑에 가서는 또 달라집니다. 물론 이성간의 사랑과 자녀에 대한 사랑의 문제이기는 하겠습니다만.

롬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사라에 관해서는 "다이앤이 당신을 준비해 준 거라고 생각해"라고 유연하게 받아들였던 롬은 아이에 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힘들게 덮어놓은-아물려놓은, 이 아니라- 상처를 덧들이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은 과거를 부정하고 잊는 것으로 순결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자녀에 대한 사랑은 현재(또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순결성을 유지하려 합니다.

그것은, 로맨스에서 유지하고자 하는 사랑의 순결이, 오직 남녀간의 사랑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은, 자녀, 양자녀, 의붓자녀, 동생, 조카 등등으로 확대되어 거의 위아더 월드, 수준이 되는 것이 또한 로맨스의 특징이니까요.

이랬건 저랬건, 다시 사라의 사랑으로 돌아가 보지요.

다이앤과 사라는 어렸을 적부터의 친구입니다.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다이앤은 직업여성이 되는 것이 꿈이고, 사라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남편을 훌륭히 내조하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롬의 출현으로 두사람의 꿈은 정반대로 실현되고 맙니다. 롬이라는 영향력 넘치는 이 남자는, 다이앤을 자신의 가정으로 들어앉혔고, 사라를 다른 누구도 사랑 할 수 없는 여자로, 결국 직업여성이 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그런 상태로 5-6년이 흘러, 세사람의 관계는 조심스런 외면으로 평형상태를 유지하게 되는데 그만, 다이앤과 두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어버립니다.

가족을 잃어버린 한 남자와, 가족과도 같았던 친구,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들, 내가 사랑하는 친구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사랑 할 수 있었던 아이들을 잃은 여자가 서로를 위로하다 사랑에 빠집니다.

여기서부터 작가는, 약간,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사실 사랑의 순결성과, 과거의 가정이 완벽했음을 병행시키기란 과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나는 "그때는 다이앤이었고, 지금은 사라야."라고 한다면 롬의 심리 상태는 좀 더 쉽게 와 닿았을 겁니다. 하지만, 작가는 끊임없이 "다이앤이었을 때도 사라였다."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것을 주입받은 독자는 아이를 거부하는 롬의 마음이 이율배반적이라고 느끼게 되지요.

결국, 자신이 놓은 덫에 자신이 치이는 꼴이라고 할까요?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아이의 임신-출산 과정을 통해 소설 전체가 흔들거리고 있는 것은 작가의 이러한 이율배반성 때문입니다.

모든 로맨스 작가들이, 조금만 과거의 사랑에대해 관대하고 유연해 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게 되었던 소설입니다.

ps. 그러나 또, 웃기게도, 로맨스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그 just one, only one 때문이니까요. 결국은 포기할 수 없는 이율배반성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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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2-03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의 로맨스 소설이라니! 한번 읽어 보고 싶은데 '품절'이로군요. 흐음..

아시마 2009-12-03 11:05   좋아요 0 | URL
린다 하워드는 주디스 맥노트와 더불어 로맨스 소설의 지존, 본좌급이죠. 음하하하하, 나 이 책 있어요! (난 왜 맨날 책 가진걸로 자랑질이 하고 싶을까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