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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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가 보면 어떤 사람의 '깊이'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깊이'란 재능과는 관계없는-(물론 '깊이 내려갈 수 있는' 것도 재능이기는 하다. 기본적으로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랄까, 그 사람의 지금 현주소를 보여준다고 할까.

깊이가 얕아서 매력적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는, 지금은 얕으나 앞으로 깊어질 사람이고, 또 하나는 본디 깊으나 스스로 얕음을 택한 사람이다. 김영하는 전자에 해당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란, 조금 웃기지만. 확실히 고난 없이 자란 사람은 빨리 어른이 되지 못한다. 어떤 일이건,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고난 없이 자란 사람의 이해의 폭은 좁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왕따를 당해본 자 만이 왕따의 고통을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의 힘으로 하여 현재 왕따를 당하고 있는 자를 배려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간단한 이력사항만을 가지고 남의 인생에 관하여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김영하는, 안정된 집안에서 잘 성장하여서, 명문대학을 재수도 없이 괜찮은 학과에 들어가 대학원까지 잘 마쳤고, 중간에 재수의 경험도 없는 똑똑한 사람이더라, 라는 것으로 그의 인생에 그늘이 없으니 그는 이해의 폭이 좁을 것이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은 김영하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다, 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해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상처를 드러내거나 숨기거나 두 가지가 있는데, 글쓰기는 보통 전자의 방식으로 행해지게 마련이다. 상처를 까발려 나의 고통을 치유하는데 글쓰기의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방식 역시 가능한 법이니까, 그의 산문에서 그의 상처가 드러나지 않더라, 라는 것으로 그를 상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은 가볍고 유쾌하다. 유쾌해서 유쾌하기 보다, 가벼워서 유쾌하다. 그의 가벼움은 원태연 같은 부박함의 가벼움은 아니다. 깊어질 가능성을 내포한 가벼움이다. 그는 아직 '아이(자라기를 아직은, 스스로 거부한 것 같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가벼움을 택한 것이고 언젠가 '어른'이 되면 깊은 글을 보여줄 것 같은 가벼움이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유쾌하게 즐겁다.

또 하나, 그의 글을 읽는 것의 즐거움은 그의 똑똑함에 있다. 그는 글의 깊이나 무게대신 유쾌한 지성을 택했다. 그의 문체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글의 구성능력이나 글 전체를 관통하는 사유까지, 그는 상당히 똑똑한 사람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랜 세월 갈고 닦아 가지게 된 시골 농부의 삶의 성찰이나 깊이는 없는 대신 주변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천재소년의 똑똑함과 지성이 있다. 둘 중 하나라도 가진 게 어딘가, 싶다. 그리고 그 똘똘함을 바탕으로 언젠가는 깊어지겠지, 싶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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