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컷 : 북디자이너의 세번째 서랍
김태형 외 지음 / 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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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책이었다. 그 반은 표지 탓인거 같았다. 묵직한 박스종이 같은 게 덧대어져 너무 힘을 주는 듯한 인상이었다. 북디자이너들의 책이라더니 한껏 욕심을 부렸구나 했다.

그런데,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 손가락은 어느새 B자 모양을 쓰다듬고 있었다. 선택받지 못한  B컷들이 가득 들어있을 디자이너들의 세번째 서랍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 무수한 B컷들이 모여 이 표지의 묵직한 B자를 만들어낸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다. 하루에도 수백권씩 쏟아져나오는 책들의 저마다 다른 얼굴들에는, 이러한 숨겨진 얼굴들이 숨어 있겠지. 개중에는 A컷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B컷들도 많았고, 익숙한 책의 B컷이 나오면 새 표지를 손에 들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다른 표지로 이 책이 나왔더라면, 책을 읽은 나의 감상도 달라졌겠다 하면서.

 

태어나지 못한 무수한 B컷들을 보면서, 이들을 창조해내고 또 버려야하는 북디자이너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다.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붙어있는 북디자이너들의 인터뷰를 천천히 한 자 한 자 읽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 내가 가져보지 못한 마음을 표현하는 글이었으니, 또박또박 읽어내야 하는 게 당연했다. 책 표지에 있어서 글자체가 갖는 의미, 사진이나 일러스트의 선택, 전체적인 구조의 안정성. 모두 새로운 이야기였지만, 그동안 나를 감동시키곤 했던 책 표지들을 떠올리니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책을 읽고 텍스트를 뿌리로 삼아 디자인을 키워간다는 디자이너의 말이었다. 원고를 물고 늘어지면 어느 순간 이미지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디자이너의 말은, 무척이나 기분좋은 말이었다. 책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책을 사랑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이 표지를 만들었다는 셈이니까.

 

우리반에는 책을 진짜 좋아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 한 달에 제출하는 독서기록장이 평균적으로 8권은 된다. 이 녀석 기록장에 코멘트 달아주는 게 일주일 내내 나에겐 숙제이다. 읽는 책도 다양해서 한국고전부터 현대문학까지, 예술부터 과학까지 분야도 가지각색이고, 특히 쥘 베른을 좋아해서 출판된 책들은 두루 읽은 것 같다. 대한민국의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이 한달에 8권씩 책을 읽는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공부도 성실히 하는 녀석이라 생각만큼 오르지 않는 성적에 눈물이 날 것 같은 친구인데,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어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 녀석이 떠올랐다. 책을 좋아하는 그 친구가 그려내는 책 표지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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