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톰 후퍼란 분이 영화를 잘 만드시는 분은 아닌데 대중의 마음을 읽는 기술은 좀 있으신 거 같다. 한국감독으로 치면 이준익 감독같은 느낌이랄까. 깊이는 좀 부족한데 대체적인 정서를 느끼게는 한다. 식상해서 안 볼까 했는데 다들 난리라..대세에 합류. 아무런 기대 없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괜찮음. 한가지 큰 불만은 뮤지컬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곡이 형편없음. 대사에 그냥 리듬감을 좀 준 정도다. 앤 해서웨이의 독창(앤 해서웨이는 얼굴만 이쁜 배우가 아니었다!), 코제트, 마리우스, 에포닌의 애절한 삼중창 정도만 인상에 남는다.

 

2. 위고가 위대한 이유는 역사라는 피해갈 수 없는 거대한 서사시 속에 개인을 녹여내는 힘 때문이리라. 이러저러한 이유로 혁명 과정을 꽤 유심히 봤고 영화가 지루한 면이 있기에 스크린을 보면서 여러가지 잡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 자베르를 보면서 든 생각을 좀 적어야겠다.

 

자비 혹은 기부의 실체란 뭘까. 요즘 기부문화가 대세다. 재능 기부까지.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자비심이란 뭘까. 자비는 두 얼굴이다. 자베르는 그 두 얼굴의 전형이다. 자베르는 자비란 없는 절대악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그는 신심이 충만하고 그가 속한 조직에 충성을 다하는 제도권 내에서는 절대선을 집행하는 인물이다. 자베르는 한 사회 내에서 규정한 법과 문화의 관점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다. 모두가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의심하며 고민한다면 세상은 혼돈 속에 빠질지로 모른다. 그는 종교와 법이 정한 이분법에 절대 복종하는 질서정연한 인물이다. 그런데 질서의 원천은 뭔가.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쳐야하는사회 질서에 다수가 따라야하나. 자베르가 법의 힘을 알았을리 없다. 자베르의 경험은 그를 순한 양으로 칭할 수 있다. 그래서 압잡이가 더 무서운 법다. 법에 절대 복종이란 무자비 혹은 무의식적 절대악와 동의어일 수 있다. 장발장은 자베르와 대립되는 인물이다. 장발장은 법을 어기지만 궁극적인 인간애를 지닌 자비로운 인물이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법을 어기기도 한다. 법 제도 아래서 그는 늘 범법자여서 도망자 신세다. 그는 제도에 희생자일 수 있는 두  인물 코제트와 마리우스를 살려낸다. 진정한 자비나 기부는 가까이에 있는 이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닐까.

 

우리 기부 문화는 좀 왜곡된 면이 있는 것 같다. 기부가 기득권의 덕목이 돼버려서 갖춰야하는 자격조건이 된 기분이다. 기업가만이 아니라 소비자도, 노동자의 고통에는 무자비한 물리적, 정신적 폭력으로 대응하고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선행을 선전하는 행위를 보면서 씁쓸하다. 나는 늘 내가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연민과 슬픔 등의 공감이 가짜 감정이라 부끄러운데 영화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짜 감정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혁명과 봉기가 일어난다. 혁명은 많은 순수한 피를 필요로한다.  그네공주님 당선 후 노동자들은 자살로 봉기한다. 바리케이드 뒤에 낙원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으로라도 혁명의 바리케이드를 지켜달라고 절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폴리티컬 마인드 - 21세기 정치는 왜 이성과 합리성으로 이해할 수 없을까?
조지 레이코프 지음, 나익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이 기대하고 낙관적이었던 대통령 선거는 허무한 결과로 끝났다.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당선 확실이란 글자를 보고도 다음날 아침에는 뭔가 다른 일이 있을 거란 기대로 일찍 잠자리에 들어버렸다. 희망은 대체로 절망과 짝궁이어서 아침부터는 절망이 이어지고 말도 하기 싫었다. 이러저러한 분석 기사를 읽고 50대의 투표율과 투표성향에 경악과 동시에 이해 모드로 변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받아들일 수 밖에 어쩌겠나. 근데 알고나 좀 당하자, 하는 기분.

 

조지 레이코프는 인지과학자로 뇌의 프레임화를 정치에 적용하는 학자로 유명하다. 노동자들은 왜 그들의 이익과 반하는 투표를 하나를 분석한다. 그의 요점은 이렇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의 작동원리와 다르게 이성은 감정에서 나오며 적절한 감정은 합리적이다. 전반적 이성은 무의식적이고 이 무의식적 이성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사고는 경험적이고 패턴을 가지고 있다. 이 패턴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즉 우리의 사고는, 믿고 있듯이 성찰적이 아니라 반사적이다. 참여정부 시절 집값이 자고 일어나면 올라서 모두들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달랑 집이 한 채인 사람한테 집이 재산 증식 수단이 아니라 대출금 이자를 바쳐야하는 애물단지인데도 마이너스라고 보지 않고 허구적 수치 상승에, 사람들은 부자가 된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어찌보면 미친 집값이라고 욕하면서도 모두가 장밋빛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집 한 채만 있으면 든든한. 사람은 이렇게 비이성적 존재다.

 

50대가 박근혜에게 표를 던진 이유는, 그러니까 비이성에 기초한 반사적 사고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나 주장하는 개념이 같다. 자유, 평등, 공평성, 기회. 유권자 역시 이런 개념어를 올바른 지향점으로 받아들인다. 언어에는 자의적 해석이란 게 있다. 모두 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보수와 진보, 그리고 유권자들은 각각 다르게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은 불합리한 결정체여서 실제 행동에서는 양가적 태도를 갖는다. 노인복지, 아동복지가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복지 기반이 자신이 내야하는 세금으로 이루어져야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평등, 공평성이란 말은 갑자기 다른 해석으로 다가온다. 현재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 혹은 현재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기울인 개인적 노력이 보상받지 못한 채 갈취당하는 느낌이 들어 평등과 공평은 길을 잃고 불평등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과거에 들인 노력과 시간들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를 위해 나누어야하나, 이런 논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정치적인 승리는 언제나 개인의 이익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란 환상에서 사람들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택했다. 대통령이 개인을 부자로 만들 수 없었다는 걸 알았지만 사람들의 이성은 여전히 작동하지 않는다. 박근혜한테 표를 던진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문재인은 개인의 재산을 빼앗을 거 같기 때문이다. TV토론회에서 문재인은 증세하겠습니란 말을 또박또박 말했다. 50대는 실제로 등록금을 내야할 사람들이며 대출받아 장만한 아파트를 가지고 있지만 집값은 뚝뚝 떨어지고 고령화 시대에 미래는 불안하기만 하다. 국가한테 받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중산층한테 증세는 곧 개인 재산 약탈이라고 프레임화 되어있다. 객관적으로 노인, 아동복지와 노동자의 최저임금 보장이 이루어져야하지만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면서까지 지켜내고 싶진 않은 가치다. 50대는 왜 모두 보수로 돌아섰는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정희의 태도도 심심찮게 패인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정희의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정희를 보면서 많은 노동자와 중산층이라고 믿는 서민이 안도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은, 바람직한 가치와 실행 가능한 공약 이전에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에 안심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번 대선 전에는 레이코프의 프레임화에 반신반의했다. 이전의 선거들이 정책보다는 프레임화에 집중한 선거인 면이 있기 때문에 정책선거전략이라면 좀 다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번 선거는 내가 봐 온 선거 중 가장 정책에 집중하는 선거였는데 결과는 패배다. 레이코프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은, 개인의 이익과 공익을 바라보는 사람의 비율이 거의 반반지점에 도달했다는 점. 내 세대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위해 표를 던지는 첫세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 위험한 희망을 품으며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


댓글(3)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새누리지지자들을 위한 변설들
    from 木筆 2014-05-21 11:48 
    weekly님 올린 글은 미리 보았습니다. 성향의 차이를 지적하더군요.(합리적인 절차를 밟아나가는 일처리에 상대적으로 편안해 하는 성향과 그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성향의 차이) 정진석후보와 안희정후보가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비해 박근혜대통령과 친분을 통해서라도 복철사업을 관철 해내겠다는 비교에 대한 분석이 인상깊었습니다. 님이 말하신 위계를 중시한다는 말을 권위, 조지 레이코프가 말한 엄격함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말씀하시니 폴리티컬 마인드가 생각
 
 
2014-05-21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넙치 2014-05-21 12:3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글 잘 읽었습니다.^^

여울 2014-05-26 14: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진지한 영화고 진정성도 있기에 함부로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고문 장면이 실제 상황처럼 적나라해서 귀도 막아보고 스크린을 외면도 해봤지만 영화 내내 나도 같이 칠성판에 올라가 있는 느낌ㅜㅡ

 

영화 내용 보다는 역사 영화나 역사를 다루는 영화에 대해서 좀 끄적여볼테다. 역사가들은 역사 영화를 대체로 싫어한다. 부정확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역사적 사건을 낭만화하는 게 그 이유다. 영화는 역사가의 것이 아니고 역사는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라고 로버트 A. 로젠스톤이 말했다) 5.18을 다루었던 <화려한 휴가>가 비판받았던 이유기도 하다. 역사는 모두의 것이다. 역사는 과거다. 과거는 겪은 이한테는 생생하지만 겪지 않은 이한테는 지루하다. 모든 역사를 다룬 영화에는 과거를 주목하게 하는 미덕이 있다. <광해>를 보고 궁궐에 관한 책을 읽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서울 한복판에 붙박이처럼 있는 창덕궁, 경복궁, 덕수궁이지만 궁궐에 관한 책을 찾아 읽게 만든 건 바로 한 편의 상업영화다. 궁궐을 통해 다른 각도에서 조선사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는 무수히 많다. 모두 반전 영화에 속하지만 전쟁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영화도 있고 전쟁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 영화도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는 영화보다 더 전쟁의 상흔을 심도있게 다룬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후세의 부채와 고통스런 역사에 대한 성찰과 집단 의식의 극복을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문맹인 한나와 미성년자의 사랑이 소재가 된다. 연애 소설로 볼 수 있겠고 나처럼 역사 소설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뉘른베르크 재판란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게 되었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면 좀 더 찾아보는 건 물론 보는 이의 몫이기도 하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지만 세계대전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의 세부적 사항들이 영화화 되거나 소설로 바뀔 때 개인의 감성과 지성에 호소하는 보편성이 있다. 보편성을 위해서 세부적 디테일을 왜곡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디테일을 포기하고 보편성을 얻을 것인가 보편성을 포기하고 디테일한 특수성을 얻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역사를 다룬 영화나 소설을 봐야할 사람은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역사서를 볼 것이다. 역사서를 보지 않는 나같은 일반인이 대상이라면 역사를 다룬 영화나 소설은 디테일에서 타협하더라도 최소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의문을 유발해야하는 화술을 써야하지 않을까. 그동안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보편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게 시대적 상황도 있었지만 보편성을 끌어내는 작업의 부족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뭐 이제 시작인 것도 같다. 과거 박통의 치적과 비판이 학계 논문에서는 종종 언급되었지만 대중의 의식 속으로 발걸음으로 옮기기 시작한 건 이번 대선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이 제작되면 걸작도 나오겠지.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남영동 1985>는 관객한테 사실을 체감하게 한다. 한 방에 배정된 고문팀들. 그리고 이어지는 강도 높은 각종 고문. 고문을 하면서 이루어지는 고문관들의 일상적 잡담이 아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한 사람한테 가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aint236 2012-12-1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 영화입니다. 시대에 대한 불편함, 인간에 대한 불편함... 이 영화를 가지고 성기가 노출되어 19금으로 해야한다는 발상을 하신 분들은 누구인지 모르겠네요. 거기에 대한 관심은 전혀 가질 수 없습니다. 차라리 영화가 너무 잔인하고 불편해서 19금으로 해야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말입니다.

넙치 2012-12-22 22:33   좋아요 0 | URL
일괄적 규제의 한계겠지요. 불편하지만 알아야하는 진실..
 

 

 

 

 

 

 

 

 

 

 

 

한가할 때는 재밌는 영화가 없더니 바쁘니까 볼 영화가 수두룩하다. 다른 건 다 놓쳐도 하네케 감독의 영화만은 꼭 사수하려고 일주일 전에 예매했다. 예매한 보람이 있게 영화는 매진이었다. 근데 개봉이 19일. 조바심 안 쳐도 곧 볼 수 있는 영화라니 기쁨이 반감. -.-

 

<가디언>지에 하네케 감독에 관한 글이 실렸다. "설명하는 거 싫어하고 헐리우드 영화가 제시하는 빠른 답안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내가 하네케 감독한테 충성을 바치는 이유기도 하다. 하네케 감독은 인간의 정신적 폭력 기제 작동 원리를 들여다 보는데 집중한다. 아무르란 제목을 보고는 하네케 감독 답지 않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했다. 역시나 충격적인 반전이 있고 정말이지 건조하고 군더더기 없이 오랜 반려자에 대한 사랑을 묘사한다. 요즘 사랑에 대한 전형을 미디어가 끊임없이 세뇌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는 오딧세우스처럼 용맹해서 사랑의 장애를 극복하고 사랑을 위한 모험 중에도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는 독심술도 있어야한다. 종교인이나 베풀 수 있는 끊임없는 자애와 배려를 줄곧 봐 온 터라 낭만이 빠진 사랑 이야기는 사실 좀 암담하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 온 아내(안느)의 마비증세. 식탁 앞에서 숟가락 드는 것조차도 힘들다. 한때 단정하고 우아한 피아니스였지만 현재는 대소변도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힘든 상태. 딸은 엄마를 보고 눈물을 보이지만 자잘하고 구질한 일상을 함께 버텨낼 인내심을 보이기 보다는 무기력한 현대 의학을 질책한다. 아버지(조르주)는 자신과 엄마가 하루를 어찌 보내는지 딸한테 말한다. 밥을 먹네 안 먹네 실랑이를 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한다. 늘 옆에 있는 딸이 어머니를 환자로 인식하는 반면에 아버지한테 어머니는 환자가 아니라 돌봐야할 한 식구로 들어오는 것 같다. 자신의 몸도 거동하기 불편해 보이는 조르주가 안느를 돌보는데 그게 책임감이든 사랑이든 혹은 동시대를 살아 온 연대감이든 조르주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안느를 잘 이해하고 있다. 점점 굳어가는 몸으로 숨을 쉬고 남이 떠 넣어주는 밥을 먹는 게 고통일 수도 있다는 걸.

 

두 사람은 같은 연배이고 나이드는 게 어떤 것인지 안다. 두 사람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다르다. 이들은 아직 젊고 나이듦이 일으키는 변덕이나 횡포를 재앙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 두 사람을 둘러싼 방문객이 여러 명있다. 딸과 사위, 안느의 제자, 그리고 두 간호사, 가정부. 사위와 제자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요?"하고 문는다. 질문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위로와 염려를 담은 발화였지만 듣는 이한테 이 말을 폭력이다. 안느는 "나이가 들면 어느 날 갑자기 한쪽 몸이 마비가 되기도 하지."하고 쏘아붙인다. 간호사가 모두 나이팅게일처럼 아픈 이를 대하진 않는다. 한 간호사는 어쩌다 보니 방문간호사가 되었고 그건 그녀의 생계다. 환자를 돌보는 시간을 채우고 그 시간만큼 받는 돈에 관심이 더 많다. 물론 하네케 감독은 설명하지 않고 돈을 받으며 막말하는 간호사와 화난 조르주를 보여준다.

 

병든 이를 보는 주변인의 시선은 아무래도 자의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아픈 이는 하루 아침에 약자가 돼서 비정상인 취급을 받아야하고 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찰스 부코스키 소설을 한 번 읽어 봐야겠다고 결심한 건, 벤트 해머의 <삶의 가장자리>란 멋진 제목의 영화를 보고다. 맷 딜런이 껄렁한 알코올 중독자로 나와 주신다. 제목만큼 영화는 멋지진 않은데, 나는 감독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뭐랄까, 최하위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맷 딜런이 연기는 잘 했지만 깊은데서 나오는 고뇌나 울림이 없다고 해야할까. 벤트 해머 감독의 연출 코드가 그닥 내 취향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원작인 찰스 부코스키의 <잡역부>는 무언가를 담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영화로 보고 소설로 읽을 만큼 애정있는 게 아니라 <잡역부>말고 다른 작품 <우체국>을 선택했다.

 

<우체국>을 읽고나서의 내 느낌은, 벤트 해머가 소설을 아주 잘 영상으로 전달했다는 것. 알콜에 의존하는 인물한테서, 개똥철학이라도 좋으니, 일종의 철학, 혹은 먹물이 든 거 같은 느낌을 좀 기대했었나보다. 하지만 <삶의 가장자리>에서 보여준 맷 딜런의 2% 부족한 영혼은 소설 <우체국>에서도 그대로다. 유사 비트 세대라고 하는데 비트 세대면 비트 세대지 유사는 뭔가. 주인공 치나스키가 고정적인 일자리를 원해서?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흡족할 때는, 대체로 작가의 통찰력 있는 목소리가 들어가 있을 때다. 미국 현대 문학을 잘 안 읽어서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지금까지 읽어 본 편견으로는, 상황 묘사 글이 대부분이었다. 상황 묘사만으로도 인물의 성격이나 사유 체계를 짐작할 수 있긴 하지만 미국식 상황 묘사는 소시지 없는 핫도그라고 할까. 좀 밋밋하고 결정적인 맛이 빠져 있다.

 

치나스키는 (누구나 그렇지만)생존을 위해  최소한만 일한다. 이 소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건, 미국에서 우체국 직원의 계급적 위치다. 우체국은 누구라도 직원으로 받는다. 알콜 중독자도. 이 말은 집배원이 선망하는 직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험을 보장 받아도 잡역부와 같아서 150명-200명이 같은 동기로 입사해도 몇 년 후에 서너 명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최하위 노동자 계급의 삶을 사는 치나스키의 블로그식 일기를 읽는 느낌이다.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과 우체국 관리자들의 싸이코패스 기질이 한 축이고 치나스키의 여자를 만나서 "떡을 치는" 사생활이 또 한축이다. 어떤 비전이나 계획, 미래는 술과 함께 사라지고 그날그날을 근근이 산다. 나는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사회 구성원이어서 그런지 미래를 버리고 현재를 탕진하는 사람들 보면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다. <삶의 가장자리>를 보고 부코스키의 소설을 집어들게 된 것도 미래란 단어를 안드로메다에 보낸 주인공 때문이다.

 

이 책이 시작 되기 전에 "이 책은 허구이며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란 말이 적혀있는데 소설 속 치나스키 혹은 작가의 정신 세계를 가장 잘 함축했다.

 

........나이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일부러

흥청망청 살았던

수많은 삶 중에

 

일부러

흥청망청

살았던

부끄러운 삶은

죄이다.

 

<친절해져라>라는 부코스키가 쓴 시 중 일부란다. 사람이 일부러 흥청망청 살았던 걸 깨닫는 순간, 삶을 위해 주어진 순간이 없진 않을까. 치나스키를 객관적으로 일부러 흥청망청 살았다고 말할 순 없다. 나도 별반 다를 게 없으니까. 많은 시간을 생존을 위해 일하고 남는 시간을, 쉬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흥청망청 보내니까. 치나스키한테 쉬는 행위는 술을 마시는 거고 나는 가끔 영화를 보거나 책장을 들추는 일 따위므로. 영화를 보거나 독서를 하는 일이 술을 마시는 일보다 시간을 잘 사용하는 거라고 누가 그러나. 자신을 위해 사는 건 다 똑같은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