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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찰스 부코스키 소설을 한 번 읽어 봐야겠다고 결심한 건, 벤트 해머의 <삶의 가장자리>란 멋진 제목의 영화를 보고다. 맷 딜런이 껄렁한 알코올 중독자로 나와 주신다. 제목만큼 영화는 멋지진 않은데, 나는 감독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뭐랄까, 최하위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맷 딜런이 연기는 잘 했지만 깊은데서 나오는 고뇌나 울림이 없다고 해야할까. 벤트 해머 감독의 연출 코드가 그닥 내 취향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원작인 찰스 부코스키의 <잡역부>는 무언가를 담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영화로 보고 소설로 읽을 만큼 애정있는 게 아니라 <잡역부>말고 다른 작품 <우체국>을 선택했다.
<우체국>을 읽고나서의 내 느낌은, 벤트 해머가 소설을 아주 잘 영상으로 전달했다는 것. 알콜에 의존하는 인물한테서, 개똥철학이라도 좋으니, 일종의 철학, 혹은 먹물이 든 거 같은 느낌을 좀 기대했었나보다. 하지만 <삶의 가장자리>에서 보여준 맷 딜런의 2% 부족한 영혼은 소설 <우체국>에서도 그대로다. 유사 비트 세대라고 하는데 비트 세대면 비트 세대지 유사는 뭔가. 주인공 치나스키가 고정적인 일자리를 원해서?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흡족할 때는, 대체로 작가의 통찰력 있는 목소리가 들어가 있을 때다. 미국 현대 문학을 잘 안 읽어서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지금까지 읽어 본 편견으로는, 상황 묘사 글이 대부분이었다. 상황 묘사만으로도 인물의 성격이나 사유 체계를 짐작할 수 있긴 하지만 미국식 상황 묘사는 소시지 없는 핫도그라고 할까. 좀 밋밋하고 결정적인 맛이 빠져 있다.
치나스키는 (누구나 그렇지만)생존을 위해 최소한만 일한다. 이 소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건, 미국에서 우체국 직원의 계급적 위치다. 우체국은 누구라도 직원으로 받는다. 알콜 중독자도. 이 말은 집배원이 선망하는 직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험을 보장 받아도 잡역부와 같아서 150명-200명이 같은 동기로 입사해도 몇 년 후에 서너 명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최하위 노동자 계급의 삶을 사는 치나스키의 블로그식 일기를 읽는 느낌이다.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과 우체국 관리자들의 싸이코패스 기질이 한 축이고 치나스키의 여자를 만나서 "떡을 치는" 사생활이 또 한축이다. 어떤 비전이나 계획, 미래는 술과 함께 사라지고 그날그날을 근근이 산다. 나는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사회 구성원이어서 그런지 미래를 버리고 현재를 탕진하는 사람들 보면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다. <삶의 가장자리>를 보고 부코스키의 소설을 집어들게 된 것도 미래란 단어를 안드로메다에 보낸 주인공 때문이다.
이 책이 시작 되기 전에 "이 책은 허구이며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란 말이 적혀있는데 소설 속 치나스키 혹은 작가의 정신 세계를 가장 잘 함축했다.
........나이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일부러
흥청망청 살았던
수많은 삶 중에
일부러
흥청망청
살았던
부끄러운 삶은
죄이다.
<친절해져라>라는 부코스키가 쓴 시 중 일부란다. 사람이 일부러 흥청망청 살았던 걸 깨닫는 순간, 삶을 위해 주어진 순간이 없진 않을까. 치나스키를 객관적으로 일부러 흥청망청 살았다고 말할 순 없다. 나도 별반 다를 게 없으니까. 많은 시간을 생존을 위해 일하고 남는 시간을, 쉬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흥청망청 보내니까. 치나스키한테 쉬는 행위는 술을 마시는 거고 나는 가끔 영화를 보거나 책장을 들추는 일 따위므로. 영화를 보거나 독서를 하는 일이 술을 마시는 일보다 시간을 잘 사용하는 거라고 누가 그러나. 자신을 위해 사는 건 다 똑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