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영화고 진정성도 있기에 함부로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고문 장면이 실제 상황처럼 적나라해서 귀도 막아보고 스크린을 외면도 해봤지만 영화 내내 나도 같이 칠성판에 올라가 있는 느낌ㅜㅡ
영화 내용 보다는 역사 영화나 역사를 다루는 영화에 대해서 좀 끄적여볼테다. 역사가들은 역사 영화를 대체로 싫어한다. 부정확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역사적 사건을 낭만화하는 게 그 이유다. 영화는 역사가의 것이 아니고 역사는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라고 로버트 A. 로젠스톤이 말했다) 5.18을 다루었던 <화려한 휴가>가 비판받았던 이유기도 하다. 역사는 모두의 것이다. 역사는 과거다. 과거는 겪은 이한테는 생생하지만 겪지 않은 이한테는 지루하다. 모든 역사를 다룬 영화에는 과거를 주목하게 하는 미덕이 있다. <광해>를 보고 궁궐에 관한 책을 읽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서울 한복판에 붙박이처럼 있는 창덕궁, 경복궁, 덕수궁이지만 궁궐에 관한 책을 찾아 읽게 만든 건 바로 한 편의 상업영화다. 궁궐을 통해 다른 각도에서 조선사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는 무수히 많다. 모두 반전 영화에 속하지만 전쟁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영화도 있고 전쟁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 영화도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는 영화보다 더 전쟁의 상흔을 심도있게 다룬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후세의 부채와 고통스런 역사에 대한 성찰과 집단 의식의 극복을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문맹인 한나와 미성년자의 사랑이 소재가 된다. 연애 소설로 볼 수 있겠고 나처럼 역사 소설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뉘른베르크 재판란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게 되었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면 좀 더 찾아보는 건 물론 보는 이의 몫이기도 하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지만 세계대전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의 세부적 사항들이 영화화 되거나 소설로 바뀔 때 개인의 감성과 지성에 호소하는 보편성이 있다. 보편성을 위해서 세부적 디테일을 왜곡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디테일을 포기하고 보편성을 얻을 것인가 보편성을 포기하고 디테일한 특수성을 얻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역사를 다룬 영화나 소설을 봐야할 사람은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역사서를 볼 것이다. 역사서를 보지 않는 나같은 일반인이 대상이라면 역사를 다룬 영화나 소설은 디테일에서 타협하더라도 최소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의문을 유발해야하는 화술을 써야하지 않을까. 그동안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보편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게 시대적 상황도 있었지만 보편성을 끌어내는 작업의 부족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뭐 이제 시작인 것도 같다. 과거 박통의 치적과 비판이 학계 논문에서는 종종 언급되었지만 대중의 의식 속으로 발걸음으로 옮기기 시작한 건 이번 대선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이 제작되면 걸작도 나오겠지.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남영동 1985>는 관객한테 사실을 체감하게 한다. 한 방에 배정된 고문팀들. 그리고 이어지는 강도 높은 각종 고문. 고문을 하면서 이루어지는 고문관들의 일상적 잡담이 아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한 사람한테 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