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할 때는 재밌는 영화가 없더니 바쁘니까 볼 영화가 수두룩하다. 다른 건 다 놓쳐도 하네케 감독의 영화만은 꼭 사수하려고 일주일 전에 예매했다. 예매한 보람이 있게 영화는 매진이었다. 근데 개봉이 19일. 조바심 안 쳐도 곧 볼 수 있는 영화라니 기쁨이 반감. -.-
<가디언>지에 하네케 감독에 관한 글이 실렸다. "설명하는 거 싫어하고 헐리우드 영화가 제시하는 빠른 답안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내가 하네케 감독한테 충성을 바치는 이유기도 하다. 하네케 감독은 인간의 정신적 폭력 기제 작동 원리를 들여다 보는데 집중한다. 아무르란 제목을 보고는 하네케 감독 답지 않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했다. 역시나 충격적인 반전이 있고 정말이지 건조하고 군더더기 없이 오랜 반려자에 대한 사랑을 묘사한다. 요즘 사랑에 대한 전형을 미디어가 끊임없이 세뇌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는 오딧세우스처럼 용맹해서 사랑의 장애를 극복하고 사랑을 위한 모험 중에도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는 독심술도 있어야한다. 종교인이나 베풀 수 있는 끊임없는 자애와 배려를 줄곧 봐 온 터라 낭만이 빠진 사랑 이야기는 사실 좀 암담하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 온 아내(안느)의 마비증세. 식탁 앞에서 숟가락 드는 것조차도 힘들다. 한때 단정하고 우아한 피아니스였지만 현재는 대소변도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힘든 상태. 딸은 엄마를 보고 눈물을 보이지만 자잘하고 구질한 일상을 함께 버텨낼 인내심을 보이기 보다는 무기력한 현대 의학을 질책한다. 아버지(조르주)는 자신과 엄마가 하루를 어찌 보내는지 딸한테 말한다. 밥을 먹네 안 먹네 실랑이를 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한다. 늘 옆에 있는 딸이 어머니를 환자로 인식하는 반면에 아버지한테 어머니는 환자가 아니라 돌봐야할 한 식구로 들어오는 것 같다. 자신의 몸도 거동하기 불편해 보이는 조르주가 안느를 돌보는데 그게 책임감이든 사랑이든 혹은 동시대를 살아 온 연대감이든 조르주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안느를 잘 이해하고 있다. 점점 굳어가는 몸으로 숨을 쉬고 남이 떠 넣어주는 밥을 먹는 게 고통일 수도 있다는 걸.
두 사람은 같은 연배이고 나이드는 게 어떤 것인지 안다. 두 사람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다르다. 이들은 아직 젊고 나이듦이 일으키는 변덕이나 횡포를 재앙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 두 사람을 둘러싼 방문객이 여러 명있다. 딸과 사위, 안느의 제자, 그리고 두 간호사, 가정부. 사위와 제자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요?"하고 문는다. 질문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위로와 염려를 담은 발화였지만 듣는 이한테 이 말을 폭력이다. 안느는 "나이가 들면 어느 날 갑자기 한쪽 몸이 마비가 되기도 하지."하고 쏘아붙인다. 간호사가 모두 나이팅게일처럼 아픈 이를 대하진 않는다. 한 간호사는 어쩌다 보니 방문간호사가 되었고 그건 그녀의 생계다. 환자를 돌보는 시간을 채우고 그 시간만큼 받는 돈에 관심이 더 많다. 물론 하네케 감독은 설명하지 않고 돈을 받으며 막말하는 간호사와 화난 조르주를 보여준다.
병든 이를 보는 주변인의 시선은 아무래도 자의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아픈 이는 하루 아침에 약자가 돼서 비정상인 취급을 받아야하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