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봤을 때, 너무 좋았지만 며칠 후 왜 좋은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지난 주에 다시 한 번 봤다. 왜 좋은지에 집중하면서...

 

먼저 영화 형식이다. 내가 혼란을 일으킨 부분이 영화적 언어 때문인 것 같다. 어찌보면 영화 언어를 잘 사용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혀 영화적이지 않다. 프레임 안에 짜여진 시각적 이미지가 영화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각화를 차용하고 있다. 즉 프레임을 구성하는 방식은 평면 회화적이고 활동 사진이 아니라 스틸 사진 같다. 색감이나 구도, 롱쇼트든 클로즈업이든 프레임을 구성하는 방식은 자극적이어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이 자극이라는 게 관습을 깨는 방식이다. 가령 롱쇼트가 보통 롱테이크로 이루어질 경우 어떤 정서를 유발하기로 되어있고 그 정서를 지속하기 위한일종의 목적을 갖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롱쇼트는 찰라고 금방 클로즈업으로 들어와서 인물이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마음이나 머리가 바쁜 게 아니라 눈이 바쁠 수 밖에 없다. 눈은 빠르게 바뀌는 이미지들을 뒤쫓아 헐떡인다. 마치 예쁜 사진첩을 보고 계속 감탄하면서 허겁지겁 넘긴 느낌이랄까. 첫 관람 후의 감상이다.

 

그리고 두번째 관람. 근사한 사진첩을 휘리릭 한번 넘겼으니 이제 앞으로 되돌아와서 마음에 드는 사진에 멈춰서 음미할 시간이다. 한 작가의 동상(아마도 슈테판 츠바이크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앞에 한 여인이 서서 그 작가에 대한 존경심으로 시작하고 끝이 난다. 존경심을 표하는 행위에 우리는 왜 거부감이 없을까. 이 영화 전체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고도 하겠다.

 

이 영화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라고, 아마도 벤야민이 말했을 거다. 현재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황량함을 말하기 위해서는 호텔의 과거 전성기를 알 필요가 있고 과거 전성기를 말하다보면 호텔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호텔을 통해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호텔 관리인, 관리인을 사랑한 여인, 그리고 관리인을 롤모델로 삼은 난민 소년. 매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휴가를 보낸 국경 근처에 사는 한 부유한 노파는 전재산을 호텔 관리인한테 상속하고 관리인은 그로 인해 전시에 국경을 넘어 기차여행을 하고 쫓기고 결국 감옥에 갔다 탈출하는 모험을 한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호텔은 관리하기 힘든 애물단지가 되어 정부에 넘기고 호텔을 상속 받은 꿈 많던 소년은 노인이 되어 스산한 호텔 로비에서 홀로 앉아 시간을 보낸다. 그 노인의 과거를 궁금해 하는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이 영화다.

 

사람한테 다시 한번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 바로 타인한테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를 의미있게 듣는 사람이 있을 때, 노인은 잠시지만 청년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의 삶에 호기심을  갖는 갖는 태도를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기억을 더듬게 자극하는 누군가가 바로 작가이고, 영화다. 책을 읽으며 영화를 보며 남의 이야기를 읽으며 사실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와 마주하게 되고 이따금씩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처럼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아 노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청년을 갖는 건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노인은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주는 청년을 만났지만 우리는 그런 청년을 만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한테는 책과 영화가 필요하고.

 

덧. 영화가 끝날 때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자막이 나온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마치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전혀 관심없던 인물도 츠바이크의 시선을 거치면 그 인물에 대한 어떤 감정이 개입하게 된다. 이 영화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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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4-14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리뷰를 쓰면서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서 고심했는데, 이 글에 있네요. 활동사진과 스틸사진. 맞아요. 이 영화는 확실히 스틸사진의 연결 같은 느낌이 있어요. 현대의 영화들이 어떻게 하면 사진을 스무스하게 연결시킬까(그러니까 활동시킬까)를 고민했다면 이 영화는 스틸을 공들여서 찍은 다음에 일부러 그 연결을 분절시키는 것 같아요. 현대영화들의 관습들을 일부러 지키지 않음으로써 고전으로 돌아간다,..넙치님 글이 그 부분들 정확하게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글을 읽으니, 다시 한번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이..

넙치 2014-04-16 00:16   좋아요 0 | URL
이 영화는 형식이 내용을 좀 가리는 면이 있는 거 같아요. 다시 봐도 형식이 아니라면 내용으로 까일 영화가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좀 했어요. 유쾌한 모험이긴 한데 정신적으로는 뭔가 2% 부족한 느낌이었어요. 오늘 <나의 삼촌>을 보면서 더욱더 그런 생각이 강해지더라구요-.-;;
 

 

 

 

 

 

 

 

 

 

 

 

1. 4월 매주 화요일, 아트나인에서 자크 타티 영화를 상영한다. 행복하다. 한 십 여 년 만에 다시 보는데 청정한 웃음을 유발하는 영화다. 구리지 않고 슬랩스틱하면서도 억지스럽지 않은 웃음을 짓게 한다. 바로 이런 점이 윌로씨의 힘이겠지.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영화다. 재밌기도 하고.

 

2. 말대로 영화는 윌로씨의 휴가 기간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휴가가 소재인 영화를 짧고 화려한 휴가 시스템을 지닌 한국인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프랑스 휴가 시스템을 이해하기 전에 나는 가장 신기했던 게 호텔 투숙객들이 세 끼를 모두 호텔에서 먹는 장면이었다. 식사가 준비되면 학교 수업종처럼 웨이터가 종을 친다. 종소리가 울리면 해변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호텔 입구를 향해 일시에 전진한다. 호텔 로비이자 식당은 투숙객들이 만들어가는 작은 세계다. 매일 아침부터 잠들때까지 해변과 호텔 실내에서 마주치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밥은 같이 먹고. 물론 다른 테이블에서지만. 아무튼 지금도 이런 장면은 여전히 신기하다.

 

3. 이 영화는 그러니까, 한달이나 휴가를 갈 수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휴가를 어찌 보내나, 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휴가를 온 사람들이 한 작은 마을 해변가에 있는 한 호텔에 모인다. 이름도 해변호텔Hotel de la Plage. 아침에 일어나 체조를 하거나 신문을 보거나 일광욕을 하거나 하는 모습이다. 끊임없이 프레임과는 별개로 아이들이 소리치며 노는 소리, 멀리서 일어나는 소리, 누군가 문을 열고 닫는 소리도 이미지만큼이나 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다. 이미지가 소리와 결합하면서 휴가지의 들뜬 분위기가 완성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풍경이 단조로움을 피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윌로씨의 마임적 행동이다. 윌로는 사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트러블메이커다. 그가 있는 곳에서 자잘한 사건이 일어나고 웃음을 유발한다. 물론 함께 지내는 이들의 반응을 세세하게 담았다면 관객이 마냥 편하게 웃을 수만을 없었을 것이다. 한밤 중에 폭죽 창고에서 실수로 폭죽을 터트리는 소동을 벌이면 호텔방 창 불이 하나 둘 씩 켜지는 것으로 윌로씨와 휴가를 함께 하는 이들의 반응을 생략한다. 호텔방 창에 불이 하나 둘 씩 켜지면서 안에서 일어날 짜쯩을 상상하게 되기에 더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4. 또 하나, 감독의 다음 영화들에서 다루는 물질문명 비판의 전조가 <윌로씨의 휴가>에서도 보인다. 많은 에피소드들이 자동차를 중심으로 벌어진다. 휴가객들은 총성같은 소리를 내는 자동차를 몰고 나타난다. 마을에는 레저용으로 말들이 있다. 사람은 신문물에서 편리함과 옛것에서 향수와 휴식을 추구하는 양면성을 지녔다. 조용한 휴식을 위해서 소란함을 이용하는 비논리적 사고를 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우리가 휴가를 필요로 하는 마음과 휴가를 준비하고 떠나는 과정을 보면 합리적 휴가란 영원히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동차는 윌로씨의 휴가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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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장 커의 영화를 꾸준히 봐 왔고 지아 장 커가 관심있는 부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급변하는 중국 사회를 비관적으로 담는다. 진지해도 낙관적일 수 있는데 그의 영화는 언제나 비관적 저울에 올라가 있다. 지방 소도시들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몰개성화와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거대 자본에 희생되는 순박한 개인사를 들여다 봐 왔다.

 

천주정. 한자에 취약하기에 영어 제목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악의 손길>이 떠올랐다. <죄의 손길>.... 영화는 한마디로 기괴하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옴니버스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정보 없이 영화를 보니까, 등장하는 인물들이 언제 만나서 한 가지 이야기로 수렴되나 유심히 봤는데 인물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냥 작은 에피소들의 나열이고 생경한 구성이었다.

 

다만 한 가지, 폭력에 대한 공감도 변화다. 최근에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있었고 복잡한 일 속에는 사람이 중심이기 마련이다. 내가 가장 당황스러웠던 점은, 몰상식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였다. 내가 최소한 상식적이라고 착각하고 있기에, 내가 설정한 상식선 밖에서 행동하는 실제 인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매우 난감했다. 설득이나 호소의 말을 무의미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몰상식한 인물과 극한의 맞딱뜨리는 상황에 처한다. 직원의 배당금을 가로채는 촌장과 기업총수, 산재로 인한 직원의 병가조차도 임금에서 가져가는 공장 시스템과 공장장, 평온한 얼굴을 하고 강도질을 하는 남자,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우나 프론트 직원을 돈으로 사려는 파렴치한. 이들을 대하는 인물들의 선택은 극단적이다. 살인과 자살. 나는 폭력에 대한 증오로 불타올랐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이성과 언어며 이성과 언어를 안 사용하는 해결책에 부정적 시선을 보냈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성과 언어는 이성과 언어를 인정할 수 있는 부류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라고 노선을 바꾸게 되었다. 내가 사용하는 수단을 상대가 무시할 때는 결국 영화 속 인물들 처럼 폭력이 차선의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공감은 공감이고 영화는 아쉬운 점이 많다.

 

불연속을 연속으로 만드는 게 감독의 역할인데 감독은 스타일을 바꾸면서 이야기까지도 고개를 기우뚱하게 하는 기묘한 관점으로 끌고 간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배경이 아웃 포커싱으로 처리되면서 인물 클로즈업이 주로 사용된다. 인물들이 처한 고립된 극한 상황을 담기에 적절한 방법일지 모르겠지만 결국 인물들이 다각적 사고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아 장 커 감독의 문제의식은 그대로이지만 영화 언어적으로 변화를 모색하는데는 실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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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4-14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넙치님은 지아장커의 그간 영화들에 비해 살짝 실망하신 듯...? 저는 이거 봐야지, 봐야지 하고 있다가 결국 지나갔네요. 지금 볼려고 찾아보면 상영하는 곳이 있을라나..지아장커의 무협이라니 봐둬야 하는데..

넙치 2014-04-16 00:17   좋아요 0 | URL
대체 누가 무협영화라 했나요? 이런 걸 무협영화라하다니, 정신세계 의심스러워요@.@ 그간 보여준 지아장커 감독만의 섬세한 관찰이 살아지고 활극으로 나아간 거 같아, 네, 저는 아쉽더라구요...(아트나인에서 아직도 상영중이랍니다)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김효정 옮김 / 까치 / 201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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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에 있는 아줄레주 뮤지엄에 페르디난두 페소아 시인이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을 현대적 선을 이용해 타일에 그린 그림이 있다. 페소아 시인이란 걸 몰랐는데 네이버 블로그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포르투갈로 여행 가기 전에 포르투갈 문학을 좀 검색했지만 주제 사마라구가 쓴 번역본 밖에 찾지 못했다. 한국에 포르투갈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머나먼 나라다. 리스본이란 지리적 위치는 상당히 은유적이다. 아득한 곳에 위치한다. 접근성이 좋지 않고 젊은 혈기 혹은 일 때문이 아니라면 가기 몹시 힘든 도시에 속한다. 접근하기 힘들다는 건,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다. "어느 날, 나이가 들면, 보르도에 실제로 도착하는 것보다 보르도를 꿈꾸는 것이 더 좋거니와, 더 진실하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116쪽)

 

리스본은 상징적 도시였는데 리스본에서 고작 며칠 빈둥거렸는데 리스본은 실제가 되면서 아련함이 모두 가신 도시가 돼버렸다. 적어도 내겐. 문학은 사라진 상징을 부활시키는 힘이 있다. 불과 몇 달 전 기억 속에 있는 리스본은 간이 안 된 재료로 한 요리를 먹은 느낌을 지니게 했는데 멀리 떨어져서 그곳의 속살을 잘 아는 이들의 글을 읽으면 내가 아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바뀌면서 또 다른 꿈과 몽상의 공간으로 슬금슬금 그 지위를 회복한다.

 

페소아 시인이 남긴 유일한 산문이라는 일기를 읽으며 리스본은 미지의 도시로 거듭 태어난다. 그럴수밖에 없는 게, 어떤 도시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그 도시를 진정으로 겪은 이의 몽상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비논리적 비유에 읽어내기 힘들다가 중반이 넘어가면서 페소아는 시인이고 시인의 정체성을 인정하게 된다. 낮에는 회계장부를 기입하느라 숫자들의 세계에 빠져있고, 혼자 있는 시간에 리스본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의식의 흐름을 좇아 기록하다. 혼잣말인 이 중얼거림을 인내심있게 따라가다 보면 강한 연대의식을 갖게 된다. 대체 말도 안 되는 연대의식의 정체는 뭐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한 도시에서 생활 터전을 잡고 살 수 밖에 없는 안정감과 나란히 찾아 오는 권태로 찾게 되는 탈출 방법. 관찰과 몽상.

 

"감성의 지식은 인생 경험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역사가 아무것도 가르치는 것이 없듯이, 인생의 경험도 아무것도 가르지지 않는다."(117)

 

포르투갈어가 주는 느낌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리스본행 야간 열차>에 몸을 실었던 문두스처럼 포르투갈어에 다가가고 싶다. 나는 시를 읽지 않지만 아니 시를 읽지 못하지만 언젠가 시를 읽고 싶다. 포르투갈에 다가가고 싶은 것처럼. 아울러 불안한 영혼의 글을 읽는 건 정말이지 크나큰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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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4-0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밤..이 기가막힌 봄의 밤..넙치님의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의 행복해지는 리뷰를 읽습니다..~~

넙치 2014-04-01 01:41   좋아요 0 | URL
새벽숲길님의 리뷰에 댓글 달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댓글이 안 달아져요.ㅠ.ㅠ 제 컴의 문제일 수도...이 책 지난 달에 샀는데 잊고 있었다 새벽숲길님 글 읽고 맞아, 나도 샀었지...하면서 부랴부랴 찾아 읽었어요.^^;;

2014-04-01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1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착한시경 2014-04-01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스본행 야간열차 읽고~ 불안의 책도 구입했던 기억이 나네요^^ 리스본행 야간열차...너무 아름다운 책이예요~ 오랫만에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넙치 2014-04-01 23:14   좋아요 0 | URL
리스본행 야간열차 저도 감명 깊게 읽었어요. 울림을 주는 소설이어서 읽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1-1. 지난 주말에 타로점을 봤다. 타로점을 보면서도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세 벌의 다른 카드가 있었고 타로점괘는 세 번 모두 불안의 시기를 거쳐 변화를 필요로 하고 안정으로 접어든다는 일반론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타로점을 본다는 게 무언가 불안 요소가 있고 듣고 싶은 말은 희망이니. 타로 카드를 읽어주는 분께 내 이런 삐딱한 마음이 전달될까봐 조신하게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마지막에 카드 점괘가 신빙성이 있나요, 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면서 소심하게 내 불신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주술로 통칭할 수 있는 것들의 힘은, 주술을 행하는 주체가 아니라 주술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에 있다. 믿으면 그럴 듯하게 들리고 안 믿으면 헛소리일 뿐이다.

 

2. 김금화 개인사를 통해 한국 무속통사를 다룬다고도 할 수 있다. 접근 방법이나 영화적 기법 자체가 완성도가 있다. 김금화 씨의 구술로 이어지는 내레이션 속에 재연 배우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또 실제로 김금화 씨가 재연 배우들과 같은 프레임에 등장하기도 하면서 연대기적 서술에 변화를 준다. 한국독립영화를 보면서 답답했던 것들이 한번에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개인사의 질곡에 녹아있는 한국근현대사의 물결이 잔잔하게 전달된다.  

 

3.  어릴 때만해도 하얀 깃발을 단 무속인의 집을 이따금씩 보곤 했는데 어느 순간에 하얀 깃발은 다 사라졌다. 굿이나 무당이란 말은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어릴 때보다는 사물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의 가짓수를 늘리고 굿이란 것 자체가 텔레비전에서나 보는 희귀한 것이다 보니 부정성이 희미해졌다.  그러면 무속에 대한 내 인식 변화는 순전히 내 노력에서 나온걸까? 그럴리가. <만신>을 보다보면 우리 대중이 무속을 하나의 전통 고유 문화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잘 담았다. 어떤 문화가 생성되고 발전해서 번영을 누리기까지는 사회적 환경이 존재한다. 무속은 80년대 이전 까지는 일제 식민시기, 한국전쟁을 거쳐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하에 미신이고 뿌리 뽑아야할 대상이었다. 그러다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탄생하면서 그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단이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한국의 전통문화로의 관심을 쏠리게 하는 거 였다.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박정희 정권 시절 부정했던 걸 새정권에서 옹호하면서 단절과 쇄신을 부각하려는 정치적 시도는. 아무튼 그래서 '국풍81'이란 전국 행사로 나라가 소란했던 걸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러면서 무속, 특히 굿에 대한 시선이 바뀌고 방송에도 출연하면서 무속의 이미지는 점차 친근해지면서 하나의 의식으로 발전하는 대전환을 맞는다.

 

4. 그리하여 굿은 미신이라기 보다는 기원을 하는 일종의 축제처럼 대중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굿을 하는 장면을 실제로 기록한 장면을 영화에서 많이 사용한다. 김금화 씨가 굿을 하면서 하는 소리가 화면을 지배하는데, 이 분의 목소리가 그렇게 구슬프게 들릴 수가 없다. 어제 후배가 프랑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만 들으면 눈물이 난다면서 동영상을 보내왔다. 늙은 육체가 해석하는 가사 전달의 힘이라며. 나이가 들어 안 보이던 게 보고 안 들리던 게 들리는 게 종종 있다. 김금화 씨의 가락은 노래라기 보다는 음유시인처럼 읊조리는 말이다. 대체로 혼을 달래는 거라 내용은 처절하고 애잔하다. 김금화 씨의 문하생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 고유의 목소리를 전수할 수는 없는 거 처럼 보인다. 이 분의 소리를 녹음이라도 해야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독특한 음색을 지니고 있다. 안달루시아에 가면 플라멩코를, 리스본에 가면 파두를 들으라는 공식을 만든 거처럼, 한국에 오면 김금화 씨의 공연을 봐라, 하는 공식을 만들어야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김금화 씨 사후에도 굿판은 전통 보존 노력으로 이어질테지만 공연 단계까지 갈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1-2.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자신의 소신과 주관을 지지해 주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무언가가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일 수도 있고, 지니면 기분 좋은 단순한 물건일 수도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사실 주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가장 무서운 주술은 지름신이다. 질러라 그러면 평안을 얻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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