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지난 주말에 타로점을 봤다. 타로점을 보면서도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세 벌의 다른 카드가 있었고 타로점괘는 세 번 모두 불안의 시기를 거쳐 변화를 필요로 하고 안정으로 접어든다는 일반론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타로점을 본다는 게 무언가 불안 요소가 있고 듣고 싶은 말은 희망이니. 타로 카드를 읽어주는 분께 내 이런 삐딱한 마음이 전달될까봐 조신하게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마지막에 카드 점괘가 신빙성이 있나요, 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면서 소심하게 내 불신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주술로 통칭할 수 있는 것들의 힘은, 주술을 행하는 주체가 아니라 주술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에 있다. 믿으면 그럴 듯하게 들리고 안 믿으면 헛소리일 뿐이다.
2. 김금화 개인사를 통해 한국 무속통사를 다룬다고도 할 수 있다. 접근 방법이나 영화적 기법 자체가 완성도가 있다. 김금화 씨의 구술로 이어지는 내레이션 속에 재연 배우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또 실제로 김금화 씨가 재연 배우들과 같은 프레임에 등장하기도 하면서 연대기적 서술에 변화를 준다. 한국독립영화를 보면서 답답했던 것들이 한번에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개인사의 질곡에 녹아있는 한국근현대사의 물결이 잔잔하게 전달된다.
3. 어릴 때만해도 하얀 깃발을 단 무속인의 집을 이따금씩 보곤 했는데 어느 순간에 하얀 깃발은 다 사라졌다. 굿이나 무당이란 말은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어릴 때보다는 사물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의 가짓수를 늘리고 굿이란 것 자체가 텔레비전에서나 보는 희귀한 것이다 보니 부정성이 희미해졌다. 그러면 무속에 대한 내 인식 변화는 순전히 내 노력에서 나온걸까? 그럴리가. <만신>을 보다보면 우리 대중이 무속을 하나의 전통 고유 문화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잘 담았다. 어떤 문화가 생성되고 발전해서 번영을 누리기까지는 사회적 환경이 존재한다. 무속은 80년대 이전 까지는 일제 식민시기, 한국전쟁을 거쳐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하에 미신이고 뿌리 뽑아야할 대상이었다. 그러다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탄생하면서 그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단이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한국의 전통문화로의 관심을 쏠리게 하는 거 였다.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박정희 정권 시절 부정했던 걸 새정권에서 옹호하면서 단절과 쇄신을 부각하려는 정치적 시도는. 아무튼 그래서 '국풍81'이란 전국 행사로 나라가 소란했던 걸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러면서 무속, 특히 굿에 대한 시선이 바뀌고 방송에도 출연하면서 무속의 이미지는 점차 친근해지면서 하나의 의식으로 발전하는 대전환을 맞는다.
4. 그리하여 굿은 미신이라기 보다는 기원을 하는 일종의 축제처럼 대중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굿을 하는 장면을 실제로 기록한 장면을 영화에서 많이 사용한다. 김금화 씨가 굿을 하면서 하는 소리가 화면을 지배하는데, 이 분의 목소리가 그렇게 구슬프게 들릴 수가 없다. 어제 후배가 프랑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만 들으면 눈물이 난다면서 동영상을 보내왔다. 늙은 육체가 해석하는 가사 전달의 힘이라며. 나이가 들어 안 보이던 게 보고 안 들리던 게 들리는 게 종종 있다. 김금화 씨의 가락은 노래라기 보다는 음유시인처럼 읊조리는 말이다. 대체로 혼을 달래는 거라 내용은 처절하고 애잔하다. 김금화 씨의 문하생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 고유의 목소리를 전수할 수는 없는 거 처럼 보인다. 이 분의 소리를 녹음이라도 해야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독특한 음색을 지니고 있다. 안달루시아에 가면 플라멩코를, 리스본에 가면 파두를 들으라는 공식을 만든 거처럼, 한국에 오면 김금화 씨의 공연을 봐라, 하는 공식을 만들어야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김금화 씨 사후에도 굿판은 전통 보존 노력으로 이어질테지만 공연 단계까지 갈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1-2.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자신의 소신과 주관을 지지해 주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무언가가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일 수도 있고, 지니면 기분 좋은 단순한 물건일 수도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사실 주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가장 무서운 주술은 지름신이다. 질러라 그러면 평안을 얻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