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심과 이타심의 경계를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자기의 이익보다는 다른 이의 이익을 더 꾀함"이라고 네이버 국어사전에 이타심의 정의가 나와있다. 하지만  진화심리학에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의 이익을 꾀한다고 본다. 나는 진화심리학을 믿는다. 즉 동기는 이기심이지만 타인을 이롭게 하는 부차적 행위를 낳는게 이타심인데,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게 과연 뭘까?

 

이 다큐는 어떤 이유로 사진을 찍었는지 알 수 없지만 15만장이나 되는 방대한, 하지만 훌륭한 사진을 찍고도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의 이야기다. 감독은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알리려는 시도로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더불어 비비안 마이어의 특이한 개인적 삶에 강하게 끌린다. 그녀가 살아생전에 알았던 이들은 입을 모아서 "괴짜eccentric, bizarre, weird"란 형용사를 사용한다. 감독은 비비안 마이어의 그 독특한 행적을 추적하고. 그녀의 일대기 재구성으로 그녀의 삶이지만 철저하게 당사자가 배제된 타자의 시선으로 이루어진 비비안 마이어의 일대기다.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감독이 비비안 마이어의 일생을 추적하고 재구성하면서 과연 비비안 마이어를 위해서 영화를 만든걸까, 하는 의문이 올라왔다. 자신이 열정을 가지고 추구하는 인물의 궤적에 대한 기본적 애정이 보이지 않고 센세이셔널한 스캔들 중심으로 구성하는 경향이 짙었다. 다큐멘터리는 사실, 사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든 이의 주관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 다큐에는, 그러니까 감독이 보는 비비안 마이어다. 그가 그녀의 사진이 인정받기를 바라는 이유는 뭘까.

 

감독이 퍼즐조각을 맞추며 공개한 마이어의 일생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특이한 외모로 베이비시터로서 살았고 아마도 성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이며, 말년에는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살았다. 마이어 엄마의 고향까지 찾아가는 열의를 보이지만 그가 마이어의 삶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태도로 타자화 시킨다. 미지의 작가를 발굴하는 흥분과 열정보다는 자신이 누군가를 발견했고 그 발견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큰 것처럼 보였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사랑보다는. 적어도 이타심처럼 보이는 이기심이어야하지 않나. 하지만 역으로 그런 뻔한 거짓말보다는 대놓고 이기적인 게 나을듯도 싶고. 누군가를 배려하고 공감한다는 게 과연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 점점 더 회의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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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누가 내니의 사진을 가져갔나
    from free-floating ennui 2015-07-25 23:03 
    오늘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을 보러 갔더니 BBC에서 만든 70분 짜리 다큐 Who took nanny's pictures?를 상영해줬다. 존 말루프가 만든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보다 훨씬 격조있는 관점으로 비비안 마이어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다. 존 말루프의 다큐를 보고 있노라면, 본인이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낸데 대한 열광으로 가득차있다. 그 열광은 그에게 가져다 줄 부와 명성, 즉 잿밥에 관심이 있어보인다. 어찌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프레이야 2015-05-30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다큐를 보고 여러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들더군요. 말루프의 사진집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 안에 셀프포트레이트들이 말없이 말하는 것들.

넙치 2015-06-01 10:39   좋아요 0 | URL
아, 사진집도 있군요. 전시 소식도 있던데..비비안 마이어란 작가를 알게 해 준 것에는 감사하지만 알리는 방식이 참...^^;;

yureka01 2015-05-3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 있는 사람 인터뷰해도 그사람 다 모르죠... 전부와 전무...그 사이의 이해와 공감이 있을 뿐이니까요.

넙치 2015-06-01 10:44   좋아요 0 | URL
네, ˝전부와 전무 사이의 이해와 공감˝ 절대 공감이에요.

팬 1 2015-05-3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 단어, 한 줄 넙치님의 날카로움이 언제나 돋보여요. 조심해야 할 부분 정말 맞습니다..

넙치 2015-06-01 10:43   좋아요 0 | URL
하하.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봐 주시니까.^^;;
전 못된 구석이 있어서 더 조심해야해요.ㅜㅡ

 

1.

가족력으로 조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여자 이야기다. 어느날 갑자기 불청객으로 찾아오는 병. 그리고 병을 대하는 자세. 기억은 한 개인을 구성하는 결정적 요소다. 엄마의 자궁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나와 빛을 처음 대한 날을 우리는 생일이라고 한다. 생일을 잊어버지 않으려고 매일 기록하는 여자. 무엇을 좋아했는지 안 떠오를까봐, 그리고 마지막 기억까지 지워지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못할까봐, 극한 상황이 되면 수면제 다량복용법 동영상까지 노트북에 넣어 놓는 여자. 수치심이나 삶에 대한 의지까지 잊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육체는 기능할 수 있다. 사는 건 기능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2.

미국 영화는 가족을 다루는 방식에 강박증이 있다. 고난은 모두 함께 해서 이겨내야한다는 성서론적 관점이 지배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가 계속 떠올랐다. 비슷한 소재를 다뤘는데 정말 다른 관점으로 사실적이고 감동적이다. 개인은 가족 구성원이기 전에 별개의 개인이다. 남편, 딸, 그리고 딸의 남편이 아내, 엄마, 장모의 병을 바라보는 입체적 관점을 제시한다. 그 속에 실재하는 직관이 들어있고. <스틸 앨리스>는 병이란 고난마저도 스펙터클화해서 동화처럼 만드는 경향이 있다. 깊이가 없다는 말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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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5 0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15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15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18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19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2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얼 보고 읽은 후 안 끄적이기 시작하니까, 계속 안 끄적이게 되는자연스러운 현상 발생. 거미줄을 좀 걷어내보자.

 

"친밀함이 뭔지 모르는 구두쇠 부자 늙은이" VS 가진 것 없어서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하지만 사랑이 뭔지 아는 패기 넘치는 청년의 맞짱 뜨기 쯤? 노인이 이런 말을 한다. 장부가 아니라 다른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고. 노인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평생 장부만을 읽은 노인이 하인이 읽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신의 위치에 도전한다. 신은 만물을 창조했고 인간의 행동까지도 통제한다. 떠도는 소문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노인의 야심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

 

가난한 청년과 나이든 여성에게 돈을 주면서 자신이 짠 이야기대로 하룻밤 사랑을 할 것을 제안한다. 두 사람이 제안을 받아들일 때는 노인의 힘, 즉 돈이 지닌 권력이 작용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후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청년과 여자는 진짜 사랑에 빠진다. 단 하루일지라도. 두 사람이 욕정에 불타는 밤을 보낼거라고 가정한 노인은 다음날 아침 처참한 말을 듣는다. 소문이 진실이 되었으니 청년에게 이제 배를 타고 다니면서 소문을 내라고 말하지만 청년은, 절대로 말하지 않고 혼자만 그 사실을 간직하겠다고, 하고 가버린다. 청년의 멘탈 갑일세. 인간의 마음은 신도 통제할 수 없고 돈도 통제할 수 없고. 오직 인간 고유의 것이니.....과연 그럴까, 싶지만 믿어보기로.

 

덧. 노인이 두 사람이 한 방에 들어가 있을 때, 청년에 대한 시기심을 드러내는 말이 있다. "너희는 밤에 잘 때 무릎도 안 아프고" 이 지나가는 말에 공감지수 급상승. 후배 왈, 원래 나이들면 엉뚱한 곳에서 감동받는다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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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을 보러 DDP에 갔었다. SNS에 근사한 사진들이 넘쳐나서 건물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컸다. 동대문역사공원1번 출구에 섰더니 대략 난감했다. 입구는 조그많고 둥근 지붕이 사람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하늘도 잘 안 보이고 출입구도 잘 안 보이고. 일단 구멍을 찾아 전시관을 무사히 찾았다. 친구가 도착 전이라 둘레길이라 이름붙인 길을 따라가봤다. 건물이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건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건축물 같았다. 널직한 길을 따라가는데 볼 것이 흰벽과 흰바닥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곡선이라 전방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리하여 나는 바닥과 벽에 가느다란 금이 수도 없이 나 있는 걸 발견했다. 볼 거라곤 이것 뿐. 이러다 곧 무너져서 대형참사로 이어지는 상상까지 나아갔다. 마치 길을 잃고 찾아 헤매는 악몽의 소재로 쓰이면 좋을 구조였다.

 

나는 건물이 특히 미술관이 이렇게 인간배척적인데 깜짝 놀랐다. 전시를 보고 잡담도 하고 무언가 생각도 좀 정리하고 하는 공간이 있어야하는 게 아닌가. 미술관 카페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차 한 잔 하는 기분이 얼마나 근사한데. 미술관 옆 카페는 창고처럼 붙어있고 의자도 등받이 없는 어수선한 임시장소 같았다. 주객이 전도된 매우 안 좋은 건축물의 예시이다.

 

2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동 시절을 마감한단다. 불편한 점이 아주 없는 게 아니지만 일단 극장 앞이 널직한 옥상이라 시원하다. 주로 흡연자들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빈공간을 남기지 않는 소비주의 사회에서 공간을 비워놓는다는 건 엄청난 발상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역시 테이블과 의자가 많이 놓여있다. 멀티플렉스가 의자에 얼마나 인색한지. 기껏해야 불편한 의자를 넓은 공간에 어수선하게 놓는다. 주변은 카페  천지고 안락한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전략이기도 하다. 씨네큐브만해도 의자에 너무 인색해서 미리 도착하면 있을 곳이 없다. 아트시네마의 언제나 남아도는 테이블과 의자. 이 잉여로운 공간만으로도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단순한 소비행위가 아니라 문화행위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는데 공간도 중요하지 않을까.


아트시네마가 서울극장으로 새둥지를 튼단다. 그리고 잉여로운 시간을 보낼 공간인 라운지를 만들기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관심있으신 분은..요기로.

http://www.funding21.com/project/detail/?pid=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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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3-2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끊었지만, 저도 아트시네마 옥상에서 인사동 내려다보면서 담배 꽤나 피웠어요. 영화 보고 나와서 다음 영화 기다리면서 한대 빼어 물면 어찌나 그렇게 좋던지요. 서울극장에서나마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DDP는 겉에서 볼 때도 그닥이었는데, 안에는 더 비호감인 모양이군요.

넙치 2015-03-27 14:36   좋아요 0 | URL
소격동에서 낙원동으로 옮겨왔을 때 정 안 갈 거 같았는데 서울극장으로 이전한다는 말을 들으니, 모르는 사이에 낙원동도 꽤 정들었던 거 같아요. 요즘은 예전만큼 잘 안 가게 되지만 제가 할머니 되서도 남아있었으면 좋겠어요.

DDP는, 제겐 좀 충격적인 공간이었어요.@.@
 

재밌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야봤다. 해맑은 동화같은 느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동화로 넘길 수 없게 현실을 에둘러담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접근한다. 하루 아침에 (아마도) 아빠 피자가게, '피자헉'이 망하고 망한 흔적을 보여주는 작은 밴에서 어린 남매와 엄마가 떠돌이로 살아간다. 일주일 후에 돌아오겠다던 남편은, 아빠는 몇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지소는 근사한 생일파티를 친구들한테 보여주기 위해 집이 필요하다. "평당 500만원"이란 문구에 분당 옆 평당이란 동네에 500만원 짜리 전셋집을 얻기 위해 개를 납치하기로 한다. 잃어버린 개를 찾아주고 사례금을 받아 평당 동네에 집을 사려는 계획이다. 웃음 유발지점이 현실을 모르는 아이의 시선에서 비롯되는데 웃다보면 아이들의 비현실적 대화는 현실을 은유하고 있어서 감독 천재네, 하는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 만약 이 상황을 어른으로 치환한다면 아마도 스릴러나 장르영화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고 별로 기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사례금을 노리고 개를 납치하려고 하는 이유는, 친구들한테 부러움을 받는 생일파티를 열기 위해서다. 지소보다 한 달 전에 집에서 생일파티를 했던 아이가 지소한테 묻는 질문은, 너희집 우리집보다 더 커, 였다. 이 단순 비교 대화 속에 타자의 시선에 의존적인 한국사회의 단면이 투영되어 있다. 물질적 부는 상대적이다. 소유욕은 환경에 의해 자극받는 경향이 있다. 지소는 보란듯이 파티를 열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개와의 교감을 통해 남매는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타인의 것을 훔치고 누리는 행위 속에는 다른 누군가의 눈물이 들어있다. 아이들한테는 개였지만, 현실에서는 나 이외의 약자고. 약육강식의 길을 정주행하다가 아이들은, 정주행을 가능하게 하는 연료의 비윤리성을 눈치채고 문득 좌회전을 한다.

 

노숙자로 살아가는 이가 딸이 보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못 만나겠다고 하니까, 뭐가 부끄럽냐고, 현답을 한다. 영화는 동화답게 해피엔딩이다. 영화 속 인물 중 가장 강한 인물로 나오는 개 주인이 아이들을 위해 500만원에 전세를 내어준다. 요점은 이거다. 물질적 잉여를로 축재를 하는 계급이 필요한 만큼만 갖고 그 잉여분 필요한 누군가한테로 온정을 담아 나눠주면 금고는 조금 비겠지만 마음은 가득차게 되는 것. 물론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덧. 토요일 오후 아트나인은 한산했다. 봄이 오니 어두컴컴한 극장 보다는 밖으로 나가는게 더 어울리는 오후였다. 자리를 찾았더니 옆에 네 식구가 이이 앉아있다. 여자는 젖먹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남자는 대여섯살 쯤 되는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젖먹이를 데리고 극장에 올 정도로 절박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쉽지 않았을 선택에 당황했지만 불편해하지 말고 너그럽게 받아들여야지,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자 여자는 젖병을 꺼내 아이한테 젖을 먹였고 아이는 힘차게 우유를 먹었다. 그 쌕쌕거림을 들으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우유를 다 먹은 후에 아이는 (당연히) 가만있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아이 안는 자세를 이리저리 바꿨다. 극장이 아니라 어느 대합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어서 뒷자리를 둘러보고 빈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는 간간이 칭얼대고 소리를 크게 몇 번 질렀다.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 아이를 안고 어르곤했다. 영화 후반부에 대여섯살 된 아이는 일어나서 어둠속을 걸어다녔다. 어느 누구도 아무말 안 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온 부부의 용기를 인정하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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