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atcher in the Rye (Mass Market Paperback, 미국판) - 『호밀밭의 파수꾼』원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 Little Brown & Company / 199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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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자가 쓴 리뷰에서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되어서 이 책을 처.음. 읽는다면 샐린저에게 만정이 떨어질 수 있다고. 다행도 열 일곱살에 처음 읽고 나이들어 다시 읽어서 만정까지는 아니지만 정이 조금 떨어진건 사실이다. 하드보일드한 문체는 사실 조금 거슬린다. 십대의 말투라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모든 문장에 and all을 붙이고, ..kills you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편집증처럼 여겨진다.

또 거슬리는 부분은 여동생 피비에 관한 홀든의 시선이다. 마음 둘 곳 없는 세상에서 피비는 유일한 돌파구인데 심리적이면서도 육체적이다. 소아 성욕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이유는, 홀든이 피비를 소통의 대상으로 삼지만 쌍방향이 아니라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홀든은 단지 마음 속에 떠오르는 말을 무조건 뱉을 필요가 있었다. 상대의 조언이나 대화가 필요하기보다는 자신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줄 상대가 필요했다. 어른도 종종 그렇듯이 말이다. 이때, 피비가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몸짓을 하는지에 열광하는 훌든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홀든의 삼 일간의 방황기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순수했던 열일곱 살의 기억 속에는 없던 것들이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홀든의 심리상태에 대해 친구와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던가! 홀든과 같은 또래의 친구와 나 역시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것, 혐오스러운 것들로 가득했었다. 여드름 짜는 행위, 거울만 보는 멍청한 미끈이, 여자아이들이 데이트 상대를 고르는 기준 등등 우리가 나름 진지하게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홀든은 꽤 근사한 녀석이었다. 근사한 구석이 아직 있기도하다.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을 잘 알고 자조하는 모습, 딴에는 어른인 척해보지만 누가 봐도 십대인줄 알아챌 수 있는 말과 행동...

젊음의 특징은 손쉬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 천부의 자질일지도 모르지만 거의 낭비에 가까울 정도로 성급한 삶에 대한 충동이라고 까뮈가 말했다. 홀든의 삼일 간의 긴긴 방황은 젊음만이 누릴 수 있는 삶에 대한 격렬한 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나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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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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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은 환경이 바뀌어서 적응하느라 심리적으로 무척 분주했다. 조용히 앉아서 한 해를 정리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시간의 흐름을 서류철에 묶어서 분류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똑같이 보냈다. 돌이켜보면,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그 변화를 마주했을 당시에는 변화인줄 모르고 지나쳤던적이 대부분이다. 오랫만에 안부를 주고 받는 지인들에게 늘 난 똑같은 대답을 한다. 난 항상 똑같아. 한 선배가 어느날 문득, 항상 변화를 꿈꾸는 네가 오늘은 부럽구나, 하는 문자를 보내왔을 때도 난 항상 제자리에 있어, 하고 답장을 보냈다.  

 
2008년 첫 주도 정신없이 지나가버렸다. 하루하루가 모여서 한 해를 이루고 한 해가 모여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걸 이룬다는 걸 알면서도 하루하루를 습관적으로 살고 있다는 걸, 가끔 깨닫고, 더 가끔 끔찍해하면서 더더 가끔 반성한다. 에너지는 예전만큼 왕성하지도 않아 덤덤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든 경험을 쌓는 일이 축복받은 일이라고 가슴으로는 생각하면서도, 머리로는 포기와 체념을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머리를 숙이면 가슴이 보이는데 머리는 앞만보고 가슴과 더 멀어지고 있다. 그래도 머리만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를 저절로 피하고 싶다. 그들에게서 내 모습의 일부를 보기도 하지만 따뜻한 가슴을 가진이들과 가끔씩 기울이는 술잔이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허삼과 매혈기>에 홀딱 반해서 집어든 <인생>. 위화는 서문에 이런 말을 썼다. "나는 <인생>이 눈물의 넓고 풍부한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위화 소설의 힘은 바로 절망의 부재다. 인생은 푸구이란 노인의 일대기이다.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사위와 손자까지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면서도 푸구이는 슬프지만 계속 살아야한다. 사랑하는 이를 모두 잃은 삶 속에 기쁨이 존재할까, 싶지만 푸구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홀로 지낼 수 밖에 없었지. 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래 살 줄 누가 알았겠나. 나는 여전히 그 타령이야. 허리도 자주 쑤시고 눈도 침침하지만 귀는 아직 쓸만하지...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나는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네. 내가 죽을 차례가 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으면 그만인 거야. "
 

모든 절망을 딛고 얻은 푸구이의 관조적 자세는 애처롭지만 살아가면서 배워야할 지혜가 아닐까. 이제 늙은 자신의 곁에 남은 건 자신을 닮은 늙은 소 한마리 밖에 없지만 푸구이는, 그래도 계속 살아갈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지만 포기해야하는 일을 분류하며 때로는 나 자신을 다독이며 또 때로는 어깨를 툭치며 격려하기도 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걸 본다. 먼 훗날 이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푸구이처럼 미소지을 수 있다면, 그러면 된거라고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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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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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작가에 관한 기억은 이렇다. 어느 해(검색해보니 96년이라고 나와있다) 동아일보 1월1일자 신문에서 그녀의 등단작 <불란서 안경원>을 흥미롭게 읽었다. 안경원에서 유리문을 통해 바라 본 세상을 읽으면서 관찰자적 입장이 가질 수 있는 거리감에 끌렸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읽었던 소설은 <식빵 굽는 시간>. 식빵을 굽고 식빵의 냄새를 묘사하면서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서술방식에 또 한 번 끌렸다. 그 후 <불란서 안경원>이란 소설집을 읽었지만 두 작품만큼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는 지난 달, 알라딘이 발행하는 잡지, 스쿱에서 그녀에 관한 에세이를 읽었다. 한 화가가 말하는 그녀였다. <혀>는 이런 기억의 연상작용을 통해 궁금증을 유발했다. 어떤 소설일까. 함께 주문했던 책들 중 제일 먼저 집어들었다.

<혀>를 즐겁게 읽을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 침이 고이는 소설을 쓰려고 했다는데(후기에) 내 입안의 침은 고이기는 커녕 마른다. 난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욕망이 없는 건조한 인간일거다.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에 너무 맛있는 음식이란 없고 음식은 배고프다는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차원적 도구일 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 하나는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고로 길게 묘사되는 요리 재료들과 레시피에 어찌 침이 고이겠는가. 소설 속 비유들은 이런 재료들에 대한 기본적 애정이 있어야 안타깝기도 하고 심장이 부풀어 오르기도 할터. 쩝.

2. 플롯. 그녀의 소설 세 편은 모두 닮아있다. 이미 헤어진 사랑에 대한 기억 조각들을 나열한다. <불란서 안경원>이 그라는 존재를 어렴풋하게 드러냈고, <식빵 굽는 시간>은 좀 더 선명하게 그를 드러냈고, <혀>에서는 노골적으로 그를 드러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가의 생각도 바뀌고 소설을 쓰는 방식도 바뀌었듯이, 나도 변했다. 끝난 사랑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말하는 소설에는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사랑은 가고 오기 마련이며 사랑이 오지 않아도 사람은 독해서 잘 살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요리장면 사이사이에 회상 또는 이야기처럼 삽입되는 방식은 상당히 속도감있지만 그 속도감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실 단순하다. 책 한 권이 그러니까 '나'의 일기에 가깝다. 남의 일기를 읽는 건 그 사람을 알고 있고 나와 관련있을 때나 재밌다. <혀>의 그녀 '나'는 철처한 허구 속 인물처럼 다가온다.

3. 분명히 섬세하고 감각적이긴 하지만 이건 아니야, 하는 소설이다. 내겐. 오히려 난 <식빵 굽는 시간>에서의 그녀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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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가치 비트겐슈타인 선집 7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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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을 읽고 호기심이 일었고, 검색해보니 비트겐슈타인 선집이 나와있는 걸 발견했다. 사실, <HOW TO READ...> 시리즈를 우습게 보았고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지침서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횡재한 것 같다.

이 책은 선집 7권 중 마지막 권인데 제목처럼 문화와 가치라기 보다는 여러 가지-음악, 종교, 글쓰기 혹은 문체, 사람의 본성, 건축, 영화 등등- 에 대한 개인적 단상들이다. 제목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확한 것도 아니다. 이 제목은 피터 윈치가 영어로 옮겼을 때 붙인 것으로, 그대로 사용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처럼, 저자의 의도된 글쓰기가 아닌 사적인 글을 읽으면서 독자는 저자의 머리 속으로 성큼 들어갈 수 있다. 그의 머리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빗장을 여는 많은 문장 중 한 문장을 보면, 

"내가 책을 쓰려는 의도 없이 나 홀로 생각할 때면, 나는 주제의 주위를 뛰어 돌아다닌다. 이것이 나에게 자연스러운 유일한 사고방식이다. 일렬로 계속 생각하도록 강제당하는 것은 나에게는 고통이다. 내가 지금 도대체 그런 일을 시도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아마도 전혀 가치가 없는 사고들을 정리하는 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

이런 문장을 통해 대가들도 사유와 글쓰기를 힘들어 했다는 걸 확인한다. 그의 문장이 너무 단정적이어서 때때로 반감이 들기도 하지만 사유하는 힘은 근면과도 관련있다는 말을 마음 속에 선명하게 각인시켜 두었다.

인상적인 점은 종교와 건축에 관한 부분이다. 무신론적 관점을 짐작할 수 있는데 서양의 종교는 동양의 유교사상과 비슷해서 그 고민의 깊이를 진정으로 아는 건 불가능하고 그저 어렴풋하게 헤아릴 뿐이다. 본래 수학과 철학, 과학과 철학이 밀접한 관계가 있고, 두 학문은 경계가 거의 없었다. 수학자나 과학자가 철학을 말은 뼛속 깊이 전해져 온다.

내가 뭐 철학자가 될 수도 없고 철학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힘이 원천봉쇄된 채 태어났다고나 할까. 여러 대가들이 말했듯이 근.면.에 방점을 두고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다보면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오지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여러 책들 사이를 기웃거리고 있다. "오직 정신에 의해서 부풀려진 텅 빈 고무풍선임을 보여 주어햐 하는 창피한 노릇"만은 적어도 피할 수 있기만을 열망하면서 말이다.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값진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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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살라딘
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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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 십자군에 관한 마지막 독서로 기록될 것이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책장을 넘겼지만 중반을 넘기면서 언제 결말을 보게 되나 남아있는 책장의 두께를 계속 가늠했다. 책장이 줄어드는 아쉬움보다는 여전히 읽어야할 두께를 버거워하면서. 이야기체인데도 이갸기 구조의 밀도는 떨어져서 각 챕터가 한 편의 독립된 이야기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인데, 장점인 동시에 소설로서는 단점일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살라딘의 일대기가 중심이지만 살라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좀 구체적인 역사소설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했지만 역사소설보다는 이야기 소설에 가깝다. 아니 아랍의 역사를 잘 모르니까 단정은 할 수 없지만 그런 것 같다. 서술방식이 유태인 서기인 이븐 야쿠브가 술탄과 그의 주변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이슬람교도의 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으로 유태인을 내세운 것은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고, 또는 작가가 후기에서 썼듯이 이슬람 왕국에서 유태인이 호의적 대접을 받았다는 걸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븐 야쿠브는 술탄과 술타나(술탄의 조강지처를 이렇게 부른다)에 대한 존경을 여러 번 표현한다. 난 참 의도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븐 야쿠브가 술탄에게 바치는 맹목적 열정과 존경이 평면적이다. (난 호전적인 걸 좋아하는 걸까?)

내가 살라딘의 이야기에서 지식적으로 더 얻은 것 아쉽게도 거의 없다. 아마도 작가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어떤 문제점을 던져주기보다는 그들의 인간적 면모에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초점을 맞춘다. 그가 후기에서 브레히트의 말,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를 가엾이 여겨라"를 인용했듯이 영웅 살라딘의 모습도다는 인간 살라딘을 그리고 싶어했는지 모르겠다. 여러 전투에 임하면서 흔들리는 모습과 어린 시절 성에 대한 호기심, 자신에게 술탄의 자리를 넘겨준 숙부와의 애잔한 관계가 잔잔한 물결처럼 펼쳐진다.

며칠 전, 텔리비전에서 방영된 한 다큐에서 타리크 알리 작가의 모습을 보았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푸근한 그의 외모처럼 이 소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도 외모와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종교 이슬람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 몇 번 등장한다.

"여러분의 종교는 지상의 쾌락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경전에만 의지해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얻은 제국들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줄 하디스를 만들어내도록 권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하디스는 많은 부분이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어느 쪽을 믿을지는 누가 결정합니까?"(192)

"우리 종교의 추진력은 성교가 아니라 신과 믿는 자 사이의 관계요. ...알라는 최고의 상인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가 셈하는 것의 일부라고 할수도 있소. 모든 것을 셈하지. 모든 것을 재고. 결국 인생이란 이익도 보고 손해도 보는 장사요. 신자는 알라께 대출을 해준다고 할 수 있지,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슬람의 낙원에서 차지할 자리에 대해 미리 돈을 치른다는 거요. 알라는 마지막 셈을 할 때 장부책을 꺼내놓고 사람들이 한 행동을 읽어보고 세심하게 평가를 하오. 모든 사람에게 제 몫을 주려는 것이지. 이것이 우리 종교요. 우리 세계의 영향력을 나타내지." (195-196)

종교는 사람이 필요해서 만들었고 결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어떤 대의명분도 자신의 피부로 체감하지 못한다면 하찮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 싸우려면 그 싸움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진정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거요."(516)라고 했듯이, 서구에서는 십자군 전쟁, 아랍인의 입장에서는 프랑크 족의 침입은 모두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비록 그 명분이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할지라도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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