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 글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하여』에
소중한 코멘트 남겨주신 분들께 정중한 사과의 말씀드립니다.
그 글, 고민 고민하다가 지웠거든요.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하는 미덕으로 함께 어울려 살자고 말하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제 글을 스스로 볼 때마다 쓰린 맘만 쌓이더군요.
너무도 소중하고 감사한 코멘트들이어서 그것만이라도 남기려고도 했었죠.
하지만 생각의 끝에선 감사한 여러 님들의 맘글에서도
조그만 파문이 일렁이더군요.
그러면 못된 짓이란 걸 알면서 그러고 말았네요.
그렇지만 님들의 따뜻한 마음은 제 가슴에 영원히 간직하게 될 거예요.
조금 서운하시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다시 한 번, 죄송함과 감사함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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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gool 2004-05-2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의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죽 마음이 어수선하셨으면.. 그리하셨을까... 어쨌든 빨리 정리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

Laika 2004-05-2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해결되시길...^^

nrim 2004-05-20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stella.K 2004-05-2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위해 기도할께요. 힘 내세요!

superfrog 2004-05-20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사실 음주 페이퍼였죠? 글쵸? 제가 많이 해봐서 알아요..;;
헛.. 아니라구요... 그럼 죄송.. ^^;;

진/우맘 2004-05-2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여흔님에게 너무 큰 일이 닥쳐서...게다가 글의 분위기가 너무 아련해서...퍼온...글인가? 고개만 갸웃거리다 나갔네요. 얼른, 잘 해결되시길 바랍니다. 힘 내세요.

물만두 2004-05-2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합니다. 님 다시 한번 화이링!!!

김여흔 2004-05-2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다 잘 되겠죠. 전화위복을 기대해보겠어요.
힘 내겠습니다.
님들도 힘찬 하루 보내시구요.

2004-05-23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자

 

당신이
나를 보지 못할 것 같았어요.

당신은 너무나도 빛나고 있어서,
당신은 늘 바빠 보여서,
당신 옆에는 용감한 여자가 많아 보여서 ...
나를 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어요.

고등학교 때, 나를 아껴 주시던 선생님이
그런 이야길 해주신 적이 있죠.
나는, 그늘 같은 사람이라고.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그늘은 여름이면 더위에 지친 사람이 찾아드는 곳이니까.
하지만 난 그말이 슬펐죠.

그늘이 좋은 건, 그 때뿐이잖아요.
너무 뜨거운 계절이 아니면
나를 찾는 이는 없을 테니까.

못난 소린 건 알지만, 혹시 ...
혹시 ... 당신이 사는 곳이 너무 뜨거워서,
너무 빛나게 눈부셔서,
그래서 나를 찾았나요?
그늘 같은 나를 ... 그런 건가요?

... 왜 .. 나를 좋아하게 됐나요?

 


 

 

남자

 

당신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거든요.

우연한 기회였어요.
점심시간이었죠.

모두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농담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 당신은 연필을 깍고 있었죠.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어요.
도로록 소리가 나는 칼을 들고,


연필을 깍고 있는 모습,
커피를 마시는 내내 지켜봤어요.

당신은 연필을 다 깍더니
부스러기가 담긴 종이를 곱게 반으로 접어

휴지통에 버렸죠.
그러곤 자리에 돌아가서
연필로 뭔가를 쓰기 시작했어요.

나는 ...
나도 모르게, 당신 옆으로 점점 다가갔어요.
아마도 ...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들을 수 없었죠.
내가 다가가는 걸 눈치챈 당신이
수첩을 덮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거든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 그 순간, 당신의 수첩을  펼쳐 보았어요.
그리고 그 수첩에서
내 이름을 보았죠.
백 번도 넘게 쓰인 내 이름.

나는 서둘러 수첩을 덮고,
복도로 뛰쳐나갔어요.

그랬더니, 당신은 ... 긴장한 탓인지,
땀에 젖은 손을 옷에 쓱쓱 비비며
복도에 서 있었죠.

그 때부터였어요.

소리없이 나를 지켜봐 주던 사람,
연필로 내 이름을 쓰던 사람,
그러면서 나를 피해 도망치던 사람,
... 당신은 그런 사람이잖아요.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지곤 했어요.
햇살이었죠.

나는 그렇게
당신을 좋아하게 됐어요.


이미나『그 남자 그 여자 中〔왜 나를 좋아하게 됐나요?〕』

 


동네엔 나보다 한 살 많은 누나가 있었는데,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부터 나를 무척이나 챙겨주었었다. 그 누나가 내게 연필 깍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등교길 마다 친누나처럼 내 손을 꼭 쥐고 교실 문 앞까지 따라와 주었었다. 그런 그 누나, 3학년 때쯤인가 가족과 함께 어느 도시론가 전학을 갔더랬다.

그 누나와 나와 지우개연필에 관한 잊히지 않는 추억 하나.
살가운 목소리로 내게 보여주던 모습.
연필 깍는 칼로 슥슥, 그리고 연필심을 사각사각, 난 아직도 그 소리가 생생하다. 특히 연필 끝에 매달린 자그마한 지우개를 애지중지 하면서 그것이 실수로 떨어져 나가 버릴 때면 어찌나 속상하던지 ...

그 추억 때문인지 그 후로도 볼펜이나 사인펜 보다도 촌스럽게 보일지도 모를 연필로 끄적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서른을 넘긴 지금도 문방구에서 지우개연필만 발견하면 몽땅 사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하니(실은 몇 번 그리 했지만). 웃기는 건 누군가 아끼는 사람이 생기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슬쩍 " 너 이거 가져 " 하면서 지우개연필 하나를 던져 준다는 거다. 받는 이야 뭐하는 짓인가 하면서 가지고 다니다가 잃어버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 빌려주고 까맣게 잊기도 하여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따금 번거롭다는 걸 뻔히 알만한 사람이 애써 연필을 깍아 쓰는 모양을 보면, 그냥 와락, 안아주고 싶어진다. 그런 사람은 분명 예쁜 맘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연필심을 세심히 다듬는 그 맘엔, 그 연필로 쓰여질 글에도 고스란히 그 정성 그대로 남겨질 테니까.

그런데,

서른을 넘기고 또 몇 년을 더 넘긴 어느 날,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런 건 중요치도 않아. 그 사람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알기나 할까.

그 사람,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참 예뻐.

그 마음 참 예뻐.

 

 

 
Photo    Melody-K『눈길 한번 안주네요』
Write    김여흔
Music    아낌없이주는나무『내겐 너무 이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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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18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ㅏ...ㅇ ㅏ.... 아름다운 밤이군요. 스피커가 꺼져 있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지만. 내일, 환한 날 다시 와서 들으면, 이런 느낌은 안 들겠죠?

superfrog 2004-05-1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그때, 거기서 제게 지우개연필 건네주신 분이 여흔님이셨군요?!!!
저 잘 쓰고 있어요!!^^

Laika 2004-05-1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깍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깍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

문득 어렸을때 좋아했던 이해인님의 시가 생각나네요...

연필은 깍을때 소리도, 쓸때의 사각거리는 소리도 참 좋은것 같아요^^


김여흔 2004-05-1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럼 그때 그 분이 ... ^^

김여흔 2004-05-1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새 라이카님께서 글을 남기셨네요. ^^
그러고 보니 알라딘엔 연필 좋아라 하시는 분들이 참 많군요.
해인 수녀님 시, 고마워요.

stella.K 2004-05-1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프보단 연필이 촌스럽긴해도 랑만적이긴 하죠!

잉크냄새 2004-05-1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연필하면 떠오르는 것이 국민학교때 글쓰기 대회 나간것이 떠오릅니다.
한자루 가져간 연필이 바닥에 떨어져서 심이 부러졌죠. 칼은 없고 급한 마음에 이빨로 물어뜯고 책상에 돌려가며 비빈후 작성했는데 그래도 장려상 받은 기억이 납니다.
연필...특히 지우개 달린 연필...반갑네요.

2004-05-18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4-05-1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안 믿으시는 거죠? 그때 거기서 두 자루 주셨잖아요..!! 지금도 잘 쓰고 있답니다..^^



비로그인 2004-05-18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알라딘은 사랑을 싣고> 한 편을 보는 듯 합니다...
여흔 님과 물장구치는금붕어 님의 해후....눈물 없인 볼 수 없군요...훌쩍~ ^^*

superfrog 2004-05-1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근데 여흔님이 부끄러워서 도망가셨나봐요..^^;;

비로그인 2004-05-1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장구치는금붕어 님! 음, 라이카 님의 서재에서 들은 바로는, 사이비 점을 봐주시다 들통나셔서 도피(?)하신 것 같은데요? ^^ 이를 어쩌나....

stella.K 2004-05-19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볼 땐 그럴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모르긴 해도 수도에 정진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여흔님, 나와요. 괜한 오해 받지 말고!

superfrog 2004-05-1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중히 간직했던 할부를 꺼내 보여드렸건만.. 저리 야멸차게 외면하시다니.. 흑! ㅠ.ㅜ

nugool 2004-05-20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저한테는 이렇게 많이 주셨잖아요... ㅋㅋㅋ

울 진형이가 유독 지우개 달린 연필을 좋아해요. (저두요 ^^)

그래서 지우개 달린 연필이 많다지요.


김여흔 2004-05-27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
 


마저도 행복하세요, 당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여
진청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단 꿈에 마음은 침식되어
깨지 않을 긴 잠에 든다.

내게도 이름이 있었다 한들
이미 잊은 지 오래인 노래
아아아 부서진 멜로디만
입가에 남아 울고 있네.

검푸른 저 숲 속에도
새들은 날아들고
아아아---
아아아---
깨지 않을 긴 잠에 든다.

내게도 이름이 있었다 한들
이미 잊은 지 오래인 노래
아아아 부서진 멜로디만
입가에 남아 울고 있네.

붉게 멍울 진 마음에는
일상도 꿈도 투명하여
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깨지 않을 긴 잠에 든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여
진청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단꿈에 마음은 침식되어
깨지 않을 긴 잠에 든다.

 

 

 


    그림    이수동『그녀의 꿈』
Music    김윤아『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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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5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4-05-1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그림도 노래도 참 좋으네요. 잘 듣고 보고 빠졌다 갑니다~~

김여흔 2004-05-16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또 찾아주셨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셨는지요?
반갑구요. ^^

김여흔 2004-05-1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가사요, 작사, 작곡 모두 김윤아가 했네요.
이번 앨범 참 맘에 들더라구요. 잡다한 기교없이 깔끔하다 싶기도 하고 ...^^
 

홀씨님께서 2003-10-05일에 작성하신 "<마을 편지 12> 나팔꽃과 멋진곰의 결혼식"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마을 편지 12> 나팔꽃과 멋진곰의 결혼식


개천절에, 논산에, 나팔꽃과 멋진곰의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나팔꽃과 멋진곰은 나팔꽃처럼 예쁘고, 멋진곰처럼 당당한 대안초등학교(http://www.kyfreeschool.org/)의 부부 샘입니다.

겨자씨, 피씨, 홍화씨, 올리브씨가 동행했습니다.

이 신랑신부는 풀씨네 사람들과는, 지난 8월 원주 가나안제2농군학교에서 10박11일동안 동거하며 공부한, 호주 크리스탈워터스 생태마을 전문가 과정인 퍼머컬쳐 디자인 코스 3기 동기생의 인연입니다.

내년 봄 신축예정인 파주 신교사를 생태적으로 만들고 가꾸어보려는 멋진 생각을 실천해보려는 대안 샘들입니다.

이런 인연으로, 풀씨네 아홉풀씨들이 마을에 오기 전까지 일했던 이장(http://www.e-jang.net)과 그 일을 함께 해보기로 의기투합되어 있기도 합니다.

신부를 아직은 누나로 부르기도 하는 신랑 멋진곰의 고향인 논산까지 내친 김에, 일부러 짬을 내, 가보고 싶던 고을, 강경까지 시찰했습니다.

일제시대 관공서, 금융조합 건물 을 비롯한 적산가옥들로 중부권 수탈의 역사적 현장을 드라마틱하게 간직하고 있는 강경 젓갈장터는, 그냥 건들거리며 골목골목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태백산맥을 다 읽으면, 벌교에 갈겁니다.

중부권의 강경, 남부권의 벌교는 일제시대 강요된 상업중심지로, 민중 수탈의 현장으로 자꾸 오버랩이 됩니다.

우리의 역사, 희망의 역사, 자랑스런 역사를, 그 씨앗을, 마을에서 싹틔우려고 합니다.
물론, 말처럼 거창하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그게 더 어렵습니다.

나팔꽃과 멋진곰도, 우리의, 희망의, 자랑스런 대안학교를, 이제 부부로서, 더욱 힘차게 가꾸어나갈 것입니다.


결혼을, 아니 정확하게는, 결혼식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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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씨님께서 2003-09-24일에 작성하신 "2003. 9. 23. 화요일 - 깊고 푸른 밤, 하늘가득 별은 빛나고"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아침나절 예정대로 교육장을 청소했다. 마른걸레로 복도 마루를 밀며 먼지를 털어냈다. 청소를 하며 뒤를 돌아보면 마음이 개운해진다. 청소를 하면 마술을 거는 듯 걸레가 닿는 곳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다. 무엇이건 손과 마음이 부지런히 닿지 않고는 빛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가구나 살림살이를 보면 살림하는 아낙의 솜씨를 대충 알 수가 있다. 바지런한 아낙의 집기는 늘 빛이 나지만 게으른 아낙의 살림살이에서는 늘 퀴퀴한 먼지가 날린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나는 사람이 있고, 손끝이 닿는 곳마다 부서지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세상을 빛나게 하는 손을 가져야 할지니... 스스로 아름답게 살 수 있어야 가능하리라.

학교 마당에는 잔디가 심어져 있다. 올 봄에 족구장을 빼고는 넓은 마당에 모두 잔디를 심었는데 잘 정착했다. 줄을 맞추어 심어진 잔디는 남은 공간으로 팔을 뻗고 있다. 내년쯤이면 운동장을 전부 덮을 듯 하다. 웃자란 놈들을 낫으로는 베기가 어려웠다. 박 선생이 창고에서 잔디 깎는 기계를 가져왔다. 창고에는 없는 것이 없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모든 것이 다 나온다. 일부는 황토방 뒤에 쌓아놓은 나무를 정리해서 자르고 일부는 하교 주변의 잡초를 뽑았다. 낫으로 베고 손으로 뽑으며 학교는 점점 깨끗해졌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갈 무렵 양복을 입은 사람 둘이 찾아 왔다. 뺀질뺀질한 일로 평생을 살아 왔을 듯 한 전형적인 공무원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다. 박 선생 대신 기계를 잡았다. 일은 수월하지만 소란스런 기계음과 석유냄새가 반갑지 않다. 그래도 말끔하게 정리된 운동장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을 먹고 작은 방에 불을 넣었다. 아궁이 앞에 앉은 짚씨는 이제 불 때는 일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다. 불길이 이젠 제법 잘 들인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주변에 지저분한 것을 태우고 싶어졌다. 아궁이 주변에 있는 쓰레기와 젖은 신문을 태웠다. 마지막 비질로 주변의 찌꺼기마저 몰아넣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그런 과정에서 손바닥에 가시가 들었다. 불을 다 들이고 사무실에 내려와 사과씨가 손에 든 가시를 빼주었다. 올리브씨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서로를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이 고맙다.

저녁 9시가 넘어서 불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밤낚시를 가잔다. 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이건 기회가 있을 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마침 준기 씨가 시간이 있어서 함께 가기로 했다. 불씨와 준기 씨, 그리고 나만 슬쩍 갔다 올까 하다가 알리지 않고 가면 서운하다는 소리를 들을 듯 했다. 함께 가자고 했더니 여러 명이 동조했다. 홀씨, 불씨, 사과씨, 올리브씨, 짚씨, 준기 씨까지 모두 7명이다. 부득이 차를 2대 가지고 가야 했다. 도구를 챙겨 천천 야영장에 도착했다. 불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두움이다. 정말 오랜만에 이런 어둠을 접한다. 구름한점 없는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진다.

도시의 불빛도 없어서 주변을 둘러싼 산과 하늘에 경계가 없다. 산이 하늘이고 물이 하늘로 혼연 일체가 된 어둠이 머리 위에서만 별빛을 쏟아 내리고 있다. 모래 벌을 지나 자갈이 그득한 강가에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웠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별을 그득히 이마에 얹고 밤낚시를 해 보는 일은 처음이다. 오기를 잘했다고 다들 말을 보탠다. 밤이 깊어갈수록 별은 선명해지고 여기저기서 고기를 낚았다는 얘기가 들린다. 빠가사리가 많은 물인 듯 하다. 전부 빠가사리만 잡힌다. 다들 출출한지 라면 타령을 한다. 준비해온 물에 라면을 끓였다. 이런 분위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또한 술이지 않은가? 대포알 한발을 터뜨리니 새벽 1시가 되었다. 주변을 정리하고 물가를 떠나려니 다들 아쉬운지 더 추워지기 전에 한번 더 오자고들 한다. 후일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대포알 한방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사과씨가 2차대전을 일으키자고 부추긴다.

집에 도착하니 남은 사람들은 다들 잠이 들었는지 불이 꺼져있다. 조용히 부엌문을 열고 2차대전을 시작했다. 오랜 얘기로 밤은 깊어가고 새벽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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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5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05-15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씨네 이야기를 읽다보면, 항상 서로를 배려하는 풀씨 식구들의 예쁜 모습을 훈훈히 느낄 수 있어요..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이고 하는 밤 낚시....그 뒤에 이어지는 대포 두 방....
어둠이 짙어가는만큼 영글어가는 풀씨 식구들 간의 정.... ^^

김여흔 2004-05-15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풀씨네 모임 있는 날인데 못갔네요. 홍화씨는 동강에 가셨다는데 일을 잘 된 건지 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