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당신이
나를 보지 못할 것 같았어요.

당신은 너무나도 빛나고 있어서,
당신은 늘 바빠 보여서,
당신 옆에는 용감한 여자가 많아 보여서 ...
나를 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어요.

고등학교 때, 나를 아껴 주시던 선생님이
그런 이야길 해주신 적이 있죠.
나는, 그늘 같은 사람이라고.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그늘은 여름이면 더위에 지친 사람이 찾아드는 곳이니까.
하지만 난 그말이 슬펐죠.

그늘이 좋은 건, 그 때뿐이잖아요.
너무 뜨거운 계절이 아니면
나를 찾는 이는 없을 테니까.

못난 소린 건 알지만, 혹시 ...
혹시 ... 당신이 사는 곳이 너무 뜨거워서,
너무 빛나게 눈부셔서,
그래서 나를 찾았나요?
그늘 같은 나를 ... 그런 건가요?

... 왜 .. 나를 좋아하게 됐나요?

 


 

 

남자

 

당신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거든요.

우연한 기회였어요.
점심시간이었죠.

모두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농담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 당신은 연필을 깍고 있었죠.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어요.
도로록 소리가 나는 칼을 들고,


연필을 깍고 있는 모습,
커피를 마시는 내내 지켜봤어요.

당신은 연필을 다 깍더니
부스러기가 담긴 종이를 곱게 반으로 접어

휴지통에 버렸죠.
그러곤 자리에 돌아가서
연필로 뭔가를 쓰기 시작했어요.

나는 ...
나도 모르게, 당신 옆으로 점점 다가갔어요.
아마도 ...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들을 수 없었죠.
내가 다가가는 걸 눈치챈 당신이
수첩을 덮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거든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 그 순간, 당신의 수첩을  펼쳐 보았어요.
그리고 그 수첩에서
내 이름을 보았죠.
백 번도 넘게 쓰인 내 이름.

나는 서둘러 수첩을 덮고,
복도로 뛰쳐나갔어요.

그랬더니, 당신은 ... 긴장한 탓인지,
땀에 젖은 손을 옷에 쓱쓱 비비며
복도에 서 있었죠.

그 때부터였어요.

소리없이 나를 지켜봐 주던 사람,
연필로 내 이름을 쓰던 사람,
그러면서 나를 피해 도망치던 사람,
... 당신은 그런 사람이잖아요.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지곤 했어요.
햇살이었죠.

나는 그렇게
당신을 좋아하게 됐어요.


이미나『그 남자 그 여자 中〔왜 나를 좋아하게 됐나요?〕』

 


동네엔 나보다 한 살 많은 누나가 있었는데,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부터 나를 무척이나 챙겨주었었다. 그 누나가 내게 연필 깍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등교길 마다 친누나처럼 내 손을 꼭 쥐고 교실 문 앞까지 따라와 주었었다. 그런 그 누나, 3학년 때쯤인가 가족과 함께 어느 도시론가 전학을 갔더랬다.

그 누나와 나와 지우개연필에 관한 잊히지 않는 추억 하나.
살가운 목소리로 내게 보여주던 모습.
연필 깍는 칼로 슥슥, 그리고 연필심을 사각사각, 난 아직도 그 소리가 생생하다. 특히 연필 끝에 매달린 자그마한 지우개를 애지중지 하면서 그것이 실수로 떨어져 나가 버릴 때면 어찌나 속상하던지 ...

그 추억 때문인지 그 후로도 볼펜이나 사인펜 보다도 촌스럽게 보일지도 모를 연필로 끄적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서른을 넘긴 지금도 문방구에서 지우개연필만 발견하면 몽땅 사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하니(실은 몇 번 그리 했지만). 웃기는 건 누군가 아끼는 사람이 생기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슬쩍 " 너 이거 가져 " 하면서 지우개연필 하나를 던져 준다는 거다. 받는 이야 뭐하는 짓인가 하면서 가지고 다니다가 잃어버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 빌려주고 까맣게 잊기도 하여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따금 번거롭다는 걸 뻔히 알만한 사람이 애써 연필을 깍아 쓰는 모양을 보면, 그냥 와락, 안아주고 싶어진다. 그런 사람은 분명 예쁜 맘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연필심을 세심히 다듬는 그 맘엔, 그 연필로 쓰여질 글에도 고스란히 그 정성 그대로 남겨질 테니까.

그런데,

서른을 넘기고 또 몇 년을 더 넘긴 어느 날,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런 건 중요치도 않아. 그 사람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알기나 할까.

그 사람,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참 예뻐.

그 마음 참 예뻐.

 

 

 
Photo    Melody-K『눈길 한번 안주네요』
Write    김여흔
Music    아낌없이주는나무『내겐 너무 이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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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18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ㅏ...ㅇ ㅏ.... 아름다운 밤이군요. 스피커가 꺼져 있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지만. 내일, 환한 날 다시 와서 들으면, 이런 느낌은 안 들겠죠?

superfrog 2004-05-1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그때, 거기서 제게 지우개연필 건네주신 분이 여흔님이셨군요?!!!
저 잘 쓰고 있어요!!^^

Laika 2004-05-1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깍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깍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

문득 어렸을때 좋아했던 이해인님의 시가 생각나네요...

연필은 깍을때 소리도, 쓸때의 사각거리는 소리도 참 좋은것 같아요^^


김여흔 2004-05-1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럼 그때 그 분이 ... ^^

김여흔 2004-05-1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새 라이카님께서 글을 남기셨네요. ^^
그러고 보니 알라딘엔 연필 좋아라 하시는 분들이 참 많군요.
해인 수녀님 시, 고마워요.

stella.K 2004-05-1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프보단 연필이 촌스럽긴해도 랑만적이긴 하죠!

잉크냄새 2004-05-1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연필하면 떠오르는 것이 국민학교때 글쓰기 대회 나간것이 떠오릅니다.
한자루 가져간 연필이 바닥에 떨어져서 심이 부러졌죠. 칼은 없고 급한 마음에 이빨로 물어뜯고 책상에 돌려가며 비빈후 작성했는데 그래도 장려상 받은 기억이 납니다.
연필...특히 지우개 달린 연필...반갑네요.

2004-05-18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4-05-1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안 믿으시는 거죠? 그때 거기서 두 자루 주셨잖아요..!! 지금도 잘 쓰고 있답니다..^^



비로그인 2004-05-18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알라딘은 사랑을 싣고> 한 편을 보는 듯 합니다...
여흔 님과 물장구치는금붕어 님의 해후....눈물 없인 볼 수 없군요...훌쩍~ ^^*

superfrog 2004-05-1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근데 여흔님이 부끄러워서 도망가셨나봐요..^^;;

비로그인 2004-05-1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장구치는금붕어 님! 음, 라이카 님의 서재에서 들은 바로는, 사이비 점을 봐주시다 들통나셔서 도피(?)하신 것 같은데요? ^^ 이를 어쩌나....

stella.K 2004-05-19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볼 땐 그럴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모르긴 해도 수도에 정진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여흔님, 나와요. 괜한 오해 받지 말고!

superfrog 2004-05-1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중히 간직했던 할부를 꺼내 보여드렸건만.. 저리 야멸차게 외면하시다니.. 흑! ㅠ.ㅜ

nugool 2004-05-20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저한테는 이렇게 많이 주셨잖아요... ㅋㅋㅋ

울 진형이가 유독 지우개 달린 연필을 좋아해요. (저두요 ^^)

그래서 지우개 달린 연필이 많다지요.


김여흔 2004-05-27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