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1100여일’ 기륭 조합원 권명희씨의 죽음
암투병 숨기고 농성하던 사람
“함께 못해 미안하다”던 사람…
 
 
한겨레 최원형 기자 김도성 피디
 








 

» 암으로 세상을 떠난 기륭전자 비정규직 권명희씨를 추모하며 지난 27일 기륭전자 정문에서 연 노제에서 기륭전자분회의 옛 조합원이 울면서 분향하고 있다. 사진 취재영상팀 김도성 피디
 
“비정규직 차별 없는 세상으로 편히 가소서….”

‘정규직으로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1000일 넘게 싸워온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암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났다. 비정규직의 차별에 맞섰던 평범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앞에 시민사회 단체들뿐 아니라 누리꾼과 사회 각계의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5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전국금속노동조합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권명희(45)씨가 세상을 떠났다. 권씨는 2년 전 위암에 걸린 사실을 안 뒤에도 틈틈이 노조 농성장을 찾아 동료들과 함께 투쟁을 계속했으나 병마만은 끝내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27일 서울 구로구 가산다지털단지 기륭전자 정문 앞에서 기륭전자분회가 권씨를 기리는 작은 노제를 올렸다. 노제에는 이랜드 일반노조 등 장기투쟁을 함께 해온 노동단체와 각종 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 등에서 나온 100여명이 참여해 권씨의 죽음을 추모했다. 다음 아고라 등을 통해 소식을 접한 누리꾼 20~30여명도 이날 노제를 찾았다. 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등 천주교 단체들도 이날 오후 기륭전자 앞에서 권씨를 애도하고 기륭전자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미사를 열었다.




지난 2004년부터 기륭전자에서 파견직 노동자로 일하던 권씨는 회사 쪽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다가 2006년 1월 해고됐다.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해고되고 넉달 뒤인 같은 해 5월. 그는 동료들이 걱정할까봐 발병 사실을 숨기고 외롭게 병마와 싸우면서도, 몸이 조금 나아질 때마다 모자로 야윈 얼굴을 가린 채 농성장에 나타나 동료들과 함께했다. 이달 초 회사 쪽과 집중교섭을 펼치며 ‘복직’ 가능성이 점쳐졌을 때엔 남편한테 “동료들과 함께 다시 일할 수 있다”고 말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권씨와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했던 김소연 분회장은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발병 사실이 알려지자 ‘(투쟁을)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던 사람”이라고 전했다. 남편인 최동철씨는 “우리도 힘들게 살았지만 아내는 ‘더 힘든 사람도 있다’며 달마다 아동·장애인 단체에 기부를 해왔다”며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작업장에서 매일 밤 늦게까지 힘들게 일했는데, (회사가) 그런 사람을 내쫓다니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울먹였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문제는 9월 초 “조합원 10명에 대해 자회사의 협력사에 1년 기간으로 고용해주겠다”는 회사의 제안을 노조가 거절한 뒤 아직도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우문숙 민주노총 대변인은 “권씨의 죽음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지닌 고용 불안 등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라며 “아무 희망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풀어야 할 다급한 숙제”라고 되새겼다. 김소연 분회장은 “가시는 길이 쓸쓸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많은 분들이 애도의 뜻을 보내주셨다”며 “끝내 정규직 노동자가 되지 못하고 눈을 감은 권씨의 한을 꼭 풀겠다”며 눈물을 삼켰다.

글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취재영상팀 김도성 피디 kdspd@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평화로운 시골 고등학교, 어느 날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다. 우연히 화장실에 있던 두 명의 절친한 친구. 청교도적이고 답답한 시골을 벗어나고픈 날라리 다이아나와 착실한 모린. 그녀들 앞에 최악의 질문이 당도한다. 총기난사범은 두 친구 사이의 생과 사를 갈라놓을 질문을 던진다.

"너희들 둘 중 하나만 죽일거야? 누가 죽을까?"

 

영화의 소재는 '학내 총기난사사건'이다. 그렇지만 '총기 자율화와 규제'의 역사,정치적 관계를 파헤친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또한 영화사 홍보문구처럼 '최대의 스릴러'도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반전을 알고 영화를 봤다. 영화 전체를 미리 알고 본 것이나 다름없을 패착이다.  스토리가 마지막 반전을 향해 달리고 있는 영화에서  미리 예방 백신을 맞고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처음에 나는 '영화가 시시해졌다' 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스토리와 반전의 강박으로 부터 벗어나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실제로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두 번째 보는 시선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바딤 패릴만 감독은 CF, 뮤직비디오 감독 답게 감각적화면 구성을 통해 'ZEN'적인 느낌을 주는 영상을 보여준다. ('선'이 아니라 'ZEN' 이라고 쓴 점을 알아서 읽어주시길...)  또한 시적인 영상과 어울리는 단출한 피아노 선율 역시 간간히 귀에 들어올 정도로 시의절절하다.

이 영화는 편집과 구성이 돋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웰 메이드'란 말을 붙여도 손색이 없다. 영화<메멘토>가 기억을 소재로 뛰어난 구성의 힘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면 <인 블룸> 역시 그에 못지 않다. 전자가 필름 느와르적인 어두운 정사가 지배적이었다면 <인 블룸>은 빛 속에 숨겨져 있는 그림자를, 현재 속에 숨어있을 미래를 시적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전시되는 고통' 앞에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꿈이 아니었을까? 미래는 오늘의 꿈이 아니었을까?

** 나는 아이 때문에 영화를 자주 보지 못한다. 그래서 고르고 골라야 한다. 데이트 하며 '우리 할일도 없는데 영화나 볼까?' 하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본 영화는 모두 좋다.(니체 같지 않은가? ^^) 물론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인 블룸> 곧 영화관에서 내려간다. 당신이 '불법다운로드' 애호가가 아니라면 서둘러야 할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08-09-29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있으면 정말 영화는 땡이죠. 전 둘째가 생기면서 바로 코앞에서 하는 국제영화제를 한 번도 못갔어요. 1회때부터 거의 매일 2-3편을 보면서 죽쳤었는데.... 지금은 옆지기 아픈 이후로 3달짼가 극장구경도 못했네요. 인블룸도 보고싶은 영화였는데 놓치겠죠? 우리 동네에 dvd가 깔려줄라나? ㅠ.ㅠ

드팀전 2008-09-3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vd로 곧 나올거에요..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과 만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중이 나에게 자극이나 영감을 주는 데 도음이 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나는 청중이 너무 싫습니다. 청중을 구성하는 개개인이 싫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중으로서의 청중이 싫습니다. 그들은 괴로움을 주며 나는 그런 법칙에 따르길 거부합니다. "

                                                                  글렌 굴드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 중에서

바흐 파르티타 NO 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Jade 2008-09-2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에 저를 홀리는 구절이 꽤 있었지요.

슈나이더 평전 읽고는 사진 때문에 저 책이 탐났는데, 저 책 읽은 후엔 DVD가 탐나서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어요..-_-;;




2008-09-28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을 탐구하는 일본만화의 거장, 우라사와 나오키의 세계

영화 <20세기 소년>덕에 일본 만화에 문외한인 내가 우라사와 나오키를 알게 되었다.<20세기소년>은 분량의 압박으로 잠시 접었고 최신작인 <플루토> 5권을 봤다. 계속 연재중이다.

<플루토>는 '아톰'을 만든 '데츠카 오사무'에 대한 오마주이자 '아톰'의 '스핀 오프'다.(왠 외국어가 이렇게 많은가?) 데츠카의 아들은 '아톰'의 재활용에 동의를 해주며 나오키에게 '데츠카'와 맞서라라고 조건을 내세웠다고 한다. (만화 뒤편 후기에 나온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어서 드라마에 속도감이 있다. 세계 7대 로봇과 관계자들이 살해당한다. 물론 7대로봇에는 아톰도 들어 있다. 그리고 주인공인 게르히트 형사도 7대 로봇중에 하나이다.  맥거핀인지 중요한 '복선'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사건의 단서들을 계속 배치하고 있다. 주제는 몇 몇 SF영화나 소설에서도 나왔음직한 것들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패러디도 나온다. 반전 메시지도 등장하고 인간/로봇의 구분을 통해  '인간됨'이라는 존재론적 질문도 한다. 신이 사라진 자리를 매울 수 있다고 믿는 '완전한 이성'에 대한 근대 비판도 등장한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철학적 문제들을 깊이 다루지는 않지만 그 끝자락을 하나씩 풀어낸다.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 2006.10.27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를 보았다면 아마도 동의할 것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를 능가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을. 일단 보면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여간해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주지 못하는 진한 여운까지 남겨준다. <해피!> <마스터 키튼> <20세기 소년> 등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어떤 장르의 걸작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최근 또 하나의 걸작 <플루토>의 단행본이 나오면서 우라사와 나오키가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 최고의 ‘초일류 스토리텔러’인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세계로 들어가보자.

일본 만화세대의 결정체, 우라사와 나오키




1960년에 태어난 우라사와 나오키는 일본 만화의 세례를 한껏 받고 자라난 세대다. 어린 시절에는 <철완 아톰>의 데즈카 오사무와 <사이보그 009>의 이시노모리 쇼타로에 푹 빠져들었고, <야구짱! 도카벤>과 <터치>로 대표되는 스포츠 만화와 <도레미 하우스>(메종일각) 등 러브코미디의 전성시대도 만끽했고,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가 이끈 새로운 만화의 물결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대학 시절 내내 만화서클에서 습작을 했던 우라사와 나오키는, 졸업 뒤에는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할 생각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출판사 소학관에 취직할 생각으로 면접에 나갔던 우라사와는 자신이 그렸던 만화를 가져갔다. 혹시 취직에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만화를 본 편집자가 공모를 제안했고, 우라사와는 82년 소학관 신인 코믹대상에서 수상하면서 만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우라사와 나오키를 메이저 작가로 끌어올린 작품은 86년에 발표한 <야와라!>였다. 반드시 그려보고 싶었던 ‘의사’ 이야기가 거부된 뒤, 편집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언뜻 떠오른 ‘여자 유도’의 아이디어가 바로 채택되어 연재에 들어갔다. 여자 유도 선수가 국민적인 아이돌 스타가 되고, 라이벌과 승부를 겨루면서도 결국은 ‘협동하는 인간’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야와라!>는 일본 서민의 정서를 탁월하게 잡아낸 작품이었다. 여자 테니스 선수를 다룬 <해피!> 역시 <야와라!>의 맥을 잇는 걸작이었다. <야와라!>와 <해피!>는 누구나 즐겁게 볼 수 있고, 누구나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보편적인 작품이다.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의 세계 <마스터 키튼>


<야와라!>와 <해피!>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정한 작품이라면, <마스터 키튼>과 <몬스터>는 휴머니즘을 주장하면서도 잔인한 세상을 고발하는 선이 굵은 만화다. 가쓰시카 호쿠세이가 스토리를 쓴 <마스터 키튼>은 고고학자이며 보험조사관인 마스터 키튼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연구에 전념하고 싶지만 생계 때문에 보험조사관으로 일하는 마스터 키튼은 발굴된 단서를 분석하여 가설을 만들고, 다시 증거를 찾아 가설을 증명하는 고고학의 방법론과 지식 그리고 SAS 교관을 지내며 익힌 전투기술을 활용하여 갖가지 범죄를 해결한다. 키튼은 탐욕으로 빚어진 범죄를 증오하지만, 어쩔 수 없이 범죄에 빠져든 인간들에게는 한없는 연민을 보낸다. <마스터 키튼>은 휴머니즘적인 시선으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를 응시한다. 다시 보면 <마스터 키튼>은 <몬스터>와 <20세기 소년>을 예고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몬스터>의 덴마가 꿈꾸는 모든 이에게 평등한 휴머니즘이 담겨 있고, <20세기 소년>의 켄지처럼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인정하면서 강해지는 키튼이 있다. 또한 키튼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접하는 이국적인 풍경과 풍물이 아주 세세하게 그려져 있는 <마스터 키튼>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이 확립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독일의 어떤 소설 이상으로 독일의 풍경을 자세히 그려놓았다고 평가받는 <몬스터>의 성실한 ‘리얼리즘’은 <마스터 키튼>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다.

<몬스터>로 향하는 길은, 우라사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우라사와는 <몬스터>가 ‘원래 나 자신의 세계’였다고 말한다. 섬세하고 복잡한 매력을 지닌 <몬스터>는 참혹한 인간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비관적인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나 <지뢰진>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우라사와는 강단있는 모범생이다. 우라사와가 ‘데뷔할 때부터 가슴에 품고 있었던’ <몬스터>에 대한 일본 독자들의 반응은 ‘미스터리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묘하다. 요한이라는 살인마는, 자신의 손으로 살인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는 타인의 마음을 조작하여 살인을 저지르게 한다. 그것은 이미 인류가 수없이 해왔던 방식이다. 불안을 조장하고, 가공의 적을 설정하여 증오하게 만드는 것.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방식도 바로 그것이었다. 요한은 사람들 누구나에게 존재하는 ‘악’을 끌어내고, 덴마는 그 악을 치유하려 한다.

인간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질문 <몬스터>


<몬스터>에는 심오한 세계가 있다. 요한의 정체를 파고들어가면 동독에서 진행되었던 ‘인간 개조’ 실험이 밝혀진다.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진지하고, 끈질긴 질문이 시작된다. 심오한 철학적 질문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의 소중한 세계가 펼쳐진다. 여러 사람들의 드라마가 동시 진행되고, 동시 다발적으로 사건이 벌어지며 중층적으로 사건들이 포개진다. 한 사람이 움직이면 거기에 연루된 전원의 정신적 상태와 정황이 함께 흘러간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단지 요한의 행적과 그를 쫓는 한 남자의 치열한 싸움만을 그리지 않는다. <몬스터>는 덴마가 추적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전개한다. 주연 이상으로 가슴을 울리는 조연들의 구슬픈 이력과 적재적소에 딱 들어맞는 역할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아주 사소한 조연들, 때로는 못된 인간들에게까지 친절하게 손을 내밀어준다. 그들이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준다. <몬스터>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녀노소의 다성적인 드라마’, 다르게 말하자면 ‘대하’ 만화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굳건한 휴머니즘을 담고 있는 수일한 인간 드라마를 그려내는 작가다. 단지 기발한 상상력과 압도적인 필력, 현란한 사건을 뛰어넘어 우라사와의 작품에는 머리와 가슴을 함께 울리는 ‘만화적 지성’이 있다.

꿈과 삶의 궤적을 그린 대작 <20세기 소년>


<20세기 소년>은 사이비 종교집단이 세계를 장악하는 과정과 그 비밀을 파헤치려는 ‘보통 사람’들의 싸움을 그린 SF만화다. <20세기 소년>은 어린 시절의 꿈이 악몽으로 재현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소년의 꿈과 어른들의 추억, 현실과 미래 그리고 가상세계를 세밀하게 엮어낸다. <20세기 소년>에서도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미스터리 이상으로 등장인물들의 구구한 삶의 궤적이다. 누가 누구를 배신하고,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믿고, 누구를 죽이고 등등. <20세기 소년>은 너무나 대작이어서 이야기가 흔들거리는 경향도 있고 끝을 맺기도 힘들겠지만, 우라사와 나오키는 일본 내에서도 대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로 꼽힌다. ‘대장편을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고, 발군의 능력’을 현재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과 적절한 템포를 유지하고 끌어가는 센스에 찬탄하게 된다. 우라사와의 작품은 일본 만화의 한 경지를 보여준다.

<철완 아톰>의 나오키식 변주 <플루토>



이번에 출간된 <플루토>

우라사와는 자기 자신을 “과거의 작품에 트리뷰트를 바치며, 과거의 유산을 조작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DJ”라고 평한다. 우라사와는 일본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처럼 인간에 대한 희망의 시선을 절대로 거두지 않는다. 그러나 우라사와의 시대는, 데즈카의 시대와 다르다. 이미 변혁의 꿈은 사라졌고, 세상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라사와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신념이 <플루토>로 이어진다. <플루토>는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의 한 에피소드인 ‘지상최대의 로봇’을 변주한 만화다. 자신의 말처럼, 전설적인 거장의 세계관을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연주한 만화인 것이다. 야심차게 시작된 <플루토>는 ‘얼핏 명랑해 보이는 <철완 아톰>의 내면에 흐르고 있던 문제의식과 비장함을 끌어낸 작품’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먼 미래가 배경인 <플루토>는 로봇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만화다. 인공지능을 통해 로봇이 점점 인간이 되어가는 시대. 심지어 잠재의식이 존재하고 꿈까지 꾸는 로봇들은 도대체 인간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로봇은 인간을 살해할 수 없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하지만 8년 전 인간을 살해한 로봇은 딱 한번 등장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의 인공지능은 완벽했다. 그런데 완벽한 인공지능이라면, 결국 인간과 동일해진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을 살해하는 인간처럼, 완벽한 로봇은 인간을 살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인간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게릴라


그것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모든 작품에서 공통된 질문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모든 작품은 인간애를 지향한다. 단순히 인간은 선한 존재이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단선적인 휴머니즘이 아니다. ‘그래도 게릴라 정신은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우라사와 나오키는 현실의 악몽을 끔찍하게 보여주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한다. 그런 치열함과 성실함이 우라사와 나오키를 초일류 작가로 만든 힘이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지금까지 계속 전진해왔다. 순수했던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했던 <마스터 키튼>의 휴머니즘이 <몬스터>에서 더욱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다면, <20세기 소년>과 <플루토>에서는 미래를 예견하면서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한때 우리사와 나오키의 만화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 단정하다는 점이었다. 일탈이나 광기가 없이 지나치게 숙련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우라사와 나오키는 일탈 없이도 자신의 세계를 더욱 장대하고 심오한 영역으로 끌어가고 있다. 우라사와는 자신의 세계에 만족하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이 던진 질문을 끊임없이 추적하는 거장이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과거와 미래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맑고 건강한 눈으로 참혹한 세계를 지켜보는 거장이다.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ephistopheles 2008-09-23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0세기 소년이 이렇게 각광을 받아도 그의 작품하면 "마스터 키튼"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람혼 2008-09-2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라사와 나오키는 진지한 무게와 탄탄한 구성이 정말 최고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승주나무 2008-09-24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스터 키튼에 놀라고 몬스터에 경악했었죠~~
20세기 소년도 그 필이군요.. 만화 먼저 보고 영화는 나중에 봐야겠습니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
박호성 지음 / 책세상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자본주의의 쓰디쓴 바다에 사회 개량적인 레몬을 한 병씩 부어서 사회주의의 달콤한 바다로 변화시키려는 환상적 노력일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는 동네 아이들이 발로 차는 깡통같다. 우파는 ' 기회주의적 빨갱이'라고 해드락을 하고 좌파는 '개량주의적 변절자'라고 암바를 건다. 그 역사적 기원도 깊다. 앞에 인용한 로쟈 룩셈부르크가 직접적인 예이다. 좌파의 '백가쟁명' 시대라고 할 만한 제 2인터내셔널 시기,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 ?> 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개량주의적 중도파'에 대해 파워슬램(로프반동을 이용하여 아래에서 들어 360도 던지는 기술)을 시도한다.

링 위에서의 난투극, 그리고 그 승부의 결과는?  20세기를 어떤 형태로든 변형된 자유민주주의, 현실사회주의(스탈린주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로 한 지붕 세 가족을 만들었다. (여기서 한 지붕은 유럽의 지붕이다.)

한국이라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80년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고민한 '좌파' 들은 마르크스주의 학습에 열기를 보였다. (이 열기의 문제점은 이 책에도 지적되고 있다. 학문적 조급증에 대한 비판이다.)  90년대 스탈린주의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그 비판과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 에 대한 관심이 잠깐 일었다. 하지만 역시 '깡통' 취급 받았다. 윤건차는 <한국 현대 사상의 흐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로 '?' 를 쳐놓았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법하다. '사회민주주의'의 '개량주의' 에 대한 '좌파'내의 공격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한국 좌파 내의 '이념적 선명성'에 대한 강조와 그에 따른 분위기는 '개량'에 대해 날끗을 세웠다. 그래서 '개량주의=변절자' 라는 도식으로 공격하기 용이하다. 이 책의 저자 역시 현실에서 '개량주의'가 그런 의미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몇 년전 부터 '사회민주주의'의 연대도 생겨나고 숨어 있던 '사민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종의 '징후' 같다. 패배를 모르는 신자유주의의 광풍과 그 전도사(아니..장로던가) MB정권이 오히려 '사민주의' 에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더이상 대안이 없어보인다'는 절망적인 현실인식이  '사민주의'라는 '개량'에 대해 한 번쯤 더 관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앞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좀 지나치게 나아가는 사람들은 'MB만 아니라면'주의자가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사민주의'를 현실적 대안으로 생각 하게끔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혁명적 변혁'에 대해 현실적으로 정리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민주의' 를 비판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사민주의'는 이미 '자본주의의 패배불가능성'에 대해 인정한 것, 즉 '대안부재론'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사회민주주의'는 국정 교과서에서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하나로 그려진 적이 있다. 물론 국정 교과서는 '사회민주주의' 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애용한 말은 '복지국가'였다. 그래서 지금도 진보적인 대중들에게 '복지국가'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쯤으로 여겨진다. 이 말은 다시금 정리해 보면, (정치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하기 힘든) 한국의 진보대중들은 '사회민주주의'에 '친화적'이다. 독일 사민당의 사민주의 전형이 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살펴보자. 대략적으로 이 책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에 나온 부분을 정리하면

1) 결정론적 사고,세계관적 동질성의 폐기  2) '혁명'을 거부하는 개량주의  3) 부르주아 질서 안에서의 가치 실현 4) 의회주의와 사회적 법치국가에 대한 신봉  4) 사회적 전 영역의 민주화 5) 사회적 국가 추진 5) 사회적 다원주의 6) 혼합경제

듣고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진보적 대중들은 '그래. 나는 이제부터 사회민주주의자 내지는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궁금하면 이 강령을 가지고 "예/아니오" 테스트를 해보시라..^^...재밌는건 어느 정당의 '강령'을 가지고도 예스가 많게 나온다.^^ 강령이란게 중요한 부분이지만 신학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

사민주의에 대한 논쟁을 여기서 다 하는 것은 무리다. 이 책은 주로 제 2인터내셔널기를 중심으로 사민주의의 탄생과 논쟁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런 논쟁은 따지고 보면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현재도 인터넷 등에는 그런 논쟁이 치열하다. 진보신당 내에서 평등파 그룹의 도발적 문제제기와 주대환의 '구좌파 척결론' 등이 그런 것이다.  나는 그동안 여러 번 한국 정당운동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 '진보정당의 대중화'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한 자릿수 득표율은 한국정치의 기형적인 보수화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그걸 욕만 한다고 아침이 오는가?  내 개인적 생각이지만 과거 운동권중심의 강철대오는  '진보정당의 대중화'에 저해가 된다. 정당은 하나의 정파가 아니다. 한 정당의 강령은 중요하지만 한 정당 안에는 다양한 이념그룹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만 한다. 내가 민주노동당을 또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고 집행부나 당의 어떤 방향에 반드시 박수를 보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차이의 임계점이 오면 갈라 설 수 도 있다. 반대로 당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안고 가야하는 의무도 있다.  1891년 게오르크 폰 폴마의 개량주의적인 '엘도라도선언'에서 당에 대한 부분을 나는 현실정치적 입장에서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종파와 학파는 절대성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요구를 실행가능성과 상관없이 내세우기만 하면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일하는 정당은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

이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종파와 학파의 비판도 겸허히 수용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분당과정에서 회사의 한 직원이 내게 물었다. "어...진보신당 지지하시나 봐요. 그러면 PD파인가 보네"  "...^^;"  무식한 친구가 신문 보고 웃자고 한 이야기였지만 발끈 해서 '아...무슨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에는 전부 NLPD만 있는 줄 알아요." 라고 대답했다. 거기에는 사민주의자, 자율주의자, 생태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진보적 자유주의자, 반 한나당주의자 ...별별 사람이 다 있는거에요"  난 지금도 이 생각이 맞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도가니탕 같은 민주적인 '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이 성공하려면 '사회민주주의당'을 선언해야하는 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진보정당의 대중화' 에 분명히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꼭 그래야하는 가에서는 아직 고민 중이다. 왜냐하면 당 강령이나 지향때문에 진보정당 대중화가 느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가 라는 문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진보정당들이 대중화에 성공하려면 분명히 좀 더 '대중적인 시각'과 '대중적인 정치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2002년 <사회비평>이 주도한 대담에서 진중권은 '진보정당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과감히 '사민주의정당론'을 이야기했다. 당시 진중권은 '민노당이 당당히 사민주의 강령'을 내걸야야 된다는 쪽이었다.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 정치에서 성공한 '좌파' 이념이 '사회민주주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중권= 사회민주주의자' 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이념에 사람이나 현실을 맞춘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대충 이 정도 이야기하면 진보적 인사라면 '사회민주주의'를 해야할 것 같다. 그렇다. 야만적 자본주의 하에서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이라고는 부실한 한국에서 공공성의 확보와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데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나 싶다. 이 책의 저자도 말하는 '이념적 과격성'은 주머니에 넣어두고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념적 과격성'에 대해서는 나도 참 할 말이 많다.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사이에 '국가'문제는 중심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었다. 이걸 좀 빌려오자.  진보적인 사람들 중에 의외로 '국가 폐지론자'가 꽤나 있다. 지난 시절 '국가폭력'에 대한 '상흔' 때문이다. 또 '국가주의/국가'를 구분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좌파의 경우 마르크스의 '국가폐기론'(그는 국가를 부르주아 지배도구로 보았으니) 과 '포스트주의'의 영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장 많은 것은, 이것 저것 다 떠나서  존 레논의 '이메진' 에 영향을 받은 ' 무정부주의적 낭만주의자'이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의  '진보'를 물리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면 이제 완전히 이론상 모순적이 된다. '현재 폭력적인 자본주의 하에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국가의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 차원은 다르지만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나온 것 역시 독일 사민당 내의 '이론적 과격성'과 '현실적 개량' 사이의 이론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베른슈타인은 후자의 이론적 통일성을 모색해 낸 것이다.)

뭐 어쩌라는 것인가? 나올 수 있는 궁색한 답변은 '장기적으로 국가를 없애고 그 전까지는 이윤에 눈 먼 사기업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의 기능을 강화한다.'  차라리 사민주의처럼 '국가=중립' (이것도 말도 안되는 접근이다.) 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맑스가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책의 저자는 '이념적 과격성'이 좌파 내에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주로 '골방좌파'들을 타깃으로 하였지만 이것이 꼭 '골방' 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가장 혁명적인 사람들은 술자리에 있다. 그들은 가끔 '전쟁으로 전 인민의 절반'을 죽이기도 하고, '청와대에 확 불질러서 MB를 쥐포'로 만들기도 한다. 뭘 못하겠는가?   

잠시 삼천포로 갔다 왔다. 다시 '사민주의'로 가자. 그럼 복지국가를 만들 '사민주의'에 대한 확신이 들었는가? 그렇다면 ....그런 확신에 찬물을 끼얹자.

책의 저자 역시 사민주의의 자체 모순에 대해 스스로 누차에 걸쳐 말한다. 여러번에 걸 등장한다. 사민주의자가 스스로 '자기모순'이 있다고 강조한다면 이건 그냥 겸손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자본주의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회적 분배를 위해 자본주의 소수에 호소해야하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저자 역시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제3의 길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민주적 개량주의는 '사회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말한다. 물론 사회민주주의 내부에도 우파와 급진파가 나뉠 수는 있지만 기본적인 모순은 동일하다. 전통적인 사민주의에 대한 지적처럼 사민주의는 '분배' 차원에만 집중하고 있다. '복지' 라는 개념 자체가 '평등한 분배'이다. 그러면 여기서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코헨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중에 대한 착취의 결과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착취의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사민주의를 주장하는 저자 역시 이 말이 사회민주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사민주의자들도 공장내에서의 노동자들의 의사결정권 확충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자본가의 양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 결국 자본주의와의 대결을 최소화하려는 사회민주주의의 모습 말이다.

그외에도 현실적 사민주의적 성취를 이루어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분석도 들어 둘 만하다. 사민주의는 경제적으로 보자면 케인즈주의적 실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성진의 <케인즈주의인가? 21세기 사회주의인가?> 에서는 '사민주의'가 유럽에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세계경제의 호황기'에 두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석유파동이후 세계 경제는 불황의 그래프를 따라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민주의의 중심이 될 '노사의 평화로운 조합주의'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또한 그 경제 활성화 시기는 영구전쟁경제(냉전)에 힘입은 바 크다. 다시 재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금융자본주의의 세계화에서 일국내의 사회민주주의적 실천 역시 예전만큼 편안하지 못하다. 스웨덴 모델같은 경우도 이미 절정을 지나간 것이고 그것이 다시 반복될 수 있는 정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웨덴 모델에 대한 사이크의 분석은 재미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웨덴의 순사회적 임금이 '제로'에 가까왔다는 것이다. 즉 벌어서 세금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합의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뜻하는 바는 또 있다. 바로 사회복지정책의 재원이 실제 노동자의 지갑에서 전부 나왔다는 것이다. 자본/노동의 계급적 소득재분배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 내부의 분배라는 점이다.  

하여간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다분히 이론적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겠으나 현실 정치와 정세 그리고 변화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어도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은 꾸준히 이루어지는데 동의해야만 한다. 홍세화는 사회주의/사민주의의 논쟁에 대해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부산 가는데, 대구 쯤 가서 어디로 갈라질 지 이야기해도 되는데 미리 창원갈지 마산갈지 가지고 싸운다.'라고 말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이념적인 틀이 현실을 먼저 재단해서 준비해 놓을 수는 없다.  

책에 대한 이야기 하자. 책 제목이 책의 중요한 두 부분을 나누어서 이야기 해준다.<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 즉 하나는 사회민주주의의가 역사적으로 걸어온 길(배경, 태동, 성장, 논쟁, 실패, 재도약, 국가간 비교 등) 을 보여준다. 그리고 후반부는 우리나라에서 사민주의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책 서문에서 '저널리스틱한 접근'과 '아카데믹한 접근'을 병행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이론의 상아탑 주의대신 이론의 '공설시장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취지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는 독자의 몫이지만 비교적 쉽게 쉽게 씌여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전반부 '사민주의의 역사'는 간략하면서도 이론적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쓰고 있다. 이 점은 책의 후반부에 대해서도 기대를 갖게 한다. 그렇지만 책 후반부는 바람빠진 풍선 같다. 이 글들이 '민노당의 의회진출'이라는 지지난 총선의 흥분된 분위기를 바탕으로 씌여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보다는 글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이라는 것에 이르지 못하는데 궁극적 한계가 있다. 저자는 결론에서 '제 2의 민주화 운동'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복지국가 체계와 3생의 정치' 등을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교과서의 마지막 장같은 모습이다. '이래 저래 하여 밝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자."라는 식이다. 전반부의 거대한 이론적 영역을 일괄적으로 요약하는 것이-이미 나와 있는 사실들이니까- 학자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부분만 요약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전반부만 읽도록 권하고 싶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8-09-22 16:43   좋아요 0 | URL
'로자 룩셈부르크'인데요.^^

드팀전 2008-09-22 17:32   좋아요 0 | URL
뭐 별로 차이를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쓴다면이야..ㅋㅋ

로쟈 2008-09-22 21:26   좋아요 0 | URL
'로자(Rosa)'와 '로쟈(Rodya)'이니까 차이가 없는 건 아니죠. 안 그래도 제가 오해를 많이 받아서...^^;

드팀전 2008-09-23 09:14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그런 의중인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라스콜리니코프님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5:40   좋아요 0 | URL
사회민주주의 논쟁은 19세기말 20세기 초엔 일급의 논쟁가들이 가담했기 때문에 그 때를 다루면 박력이 있지만 최근의 지나치게 개량화된 뒤의 역사는 다소 맥이 빠지니까 저자로서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저도 말은 많이 들었지만 북구 사민주의는 아직 책을 안 사 놨거든요.계급과 민족문제를 다룬 책들도 룩셈부르크-베른슈타인-카우츠키 논쟁,레닌-카우츠키 논쟁,그 뒤에 반파시즘을 둘러싼 코민테른 논쟁 이런 식으로 다루지 현대사민주의를 다루진 않아서 따로 전후 사민주의에 관한 책은 사지 않았어요.유용한 글 잘 읽었습니다.

드팀전 2008-09-29 09:11   좋아요 0 | URL
^^ 주요한 논쟁의 근거들은 그 시기에 거의 다 다루어진 듯 합니다.그나마 대처리즘에서 어떻게든 살겠다고 나온 '제3의길'논쟁이 -친자본경향에 더 가까와진 지평에서 나온- 최근의 사민논쟁이 아닐까 싶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2 12:37   좋아요 0 | URL
최근에 트로츠키 주의자인 토니 클리프 부자가 영국노동당,특히 블레어를 엄청나게 비판하는 영국노동당사를 펴냈더라구요.굳이 좌익이 아니라 해도 블레어같은 사람이 노동당 출신이라니 이상하죠.대처의 아류인 것 같은데...

드팀전 2008-10-02 15:28   좋아요 0 | URL
사민주의 역사에서 보면 영국 노동당 역시 기본적으로 비마르크스주의 의회주의에 뿌리를 두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안이 없다'는 담론적 지배상황에서는 '대처리즘'과 '노동당 내 우파담론' 사이에 그런 친화성도 나올 수 있을 법합니다. 결국 '연속적 개량'은 소실점에서 그들이 싸우려는 대상과 동일해질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기도 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3 00:39   좋아요 0 | URL
40-50년대의 영국 노동당 브레인이던 토니,라스키 등의 책을 읽으면 노동당 냄새가 꽤 났는데 제3의 길인가 그런 것은 통 노동당스럽지가 않아서 뭐 저래...하는 생각만 들죠.대처가 요즘은 망령이 들었다네요.상태가 점점 심각해져가고 있답니다.철의 여인도 세월엔 어쩔 도리가 없나봐요.

드팀전 2008-10-03 21:03   좋아요 0 | URL
^^ 대처는 집권할때부터 망령이있던것 같아요. MB정권의 기본적정서는 대처리즘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물론 당시 영국과 현재의 한국이 '공공성'에 대한 정치권의 인식, 세계 경제의 상황,사회영역의 발전정도등에서 현격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같은 취급을 할 수는 없지만요.
그런 점에서 MB와 현정권실제들은 더 골때리는 거지요. 전 개인적으로 진보의 연속 패배를이해하기 위해 대처리즘(레이거니즘)의 당시의 성공-물론 그 실패가 지금 드러나고있는 금융 시장의 붕괴지요-을 살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신자유주의가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변하지 않을 경험이라고 절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역사 속에서 힘들의 작용에 의해 특정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한시적 경향이라는 점을 알게되면 '영원한 절망'같은 것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역사가 주는 교훈에 대해 늘 민감해야 할 듯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3 22:21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가 대처리즘을 숭배하면서 대처 전기도 새로 나오고 하더군요.이 방면엔 박지향 씨가 앞장서더군요.박 씨도 한때 대처를 싫어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게 아니라면서 대처리즘을 옹호하는 선두에 섰죠.이 양반이 노동운동과 영국사를 전공해서인지 상당히 치밀한 논리를 전개하죠.대처리즘의 기본적인 경제정책을 알아보려고 맥아더 점령 당시 일본에 실시한 덧지라인을 공부하고 있어요.대략 재정과 세금정책을 알기 위해서입니다.덧지는 트루먼의 전권위임을 받고 일본에 파견되어 강력한 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는데 대처리즘과 유사한 것 같아요.

드팀전 2008-10-04 16:01   좋아요 0 | URL
^^ 안그래도 제가 지금 기파랑에서 나온 박지향의 책을 보고 있습니다. 스튜어트 홀의 책을 보기 위한 앞 단계로 보는 성격이 강하지요. 몇 달 전에 동아TV에서 하는 <세기의 위대한 여성>중 대처편도 관심을 가지고 봤었지요.대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박지향의 책 서문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예전에 자기는 영국좌파에 영향을 받았지만 지금은 아니다..그리고 젊은 날 믿었던 진실을 아직도 믿는 다는 건 철부지들이나 하는 짓이다..라는 식으로 '좌파유아론'같은 뉴라이트들의 상투적 글을 서문에 쓰고 있습니다.
뉴라이트의 어머니로서 대처를 다루고 있지만 대처의 한계에 대해서도 살짝씩 언급합니다. 박지향이 칭찬하는 특징들은 다른 측에서 보면 공격할 수 있는 대목이 되기도 하구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MB정권의 연속집권입니다.대처의 보수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들은 비판하고 '타산지석'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그럴 가능성이 짙어보입니다.어쩌면 이 정권 말기에 발생할 사회적 혼란을 더 강력한 '대처리즘'으로 돌파하려는 세력들도 나올 수 있겠구요. 대처가 계급적 갈등을 '애국주의'와 '전통적 도덕관'으로 돌파했던 것 처럼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4 23:35   좋아요 0 | URL
홀이 이데올로기론을 다루는 학자라 좀 어렵더라구요.그가 쓴 대처리즘의 승리를 다룬 책도 저는 못보고 그런 건 계급배반 투표로 생각해서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정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박지향 씨의 제국주의라는 책을 보면 영국의 최근 제국주의론이 소개되어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제국주의가 착취했다는 학설은 잘못된 것이다...제국주의 노선을 걸었다고 영국이 이득본 것도 없다...그런 식이더군요.하여튼 영국인들도 제국주의 정당화하는 기질을 아직도 못버렸어요.존 키건의 2차대전사를 보면 용감한 전투는 다 영국군이 하고,영국은 침략전쟁을 안 했다나...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노골적으로 하더라구요.

드팀전 2008-10-05 23:27   좋아요 0 | URL
이모티콘으로 비웃음은 어떻게 그려야하는지...^^
대처가 이용한 것이 '대영제국'에 대한 향수를 북돋는 '애국주의' 였잖아요. 보수당 내부에서도 반대하던 '포틀랜드 전쟁'같은 것에 국민여론은 흔쾌히 동의를 했지요. 뉴라이트들의 전술은 '우기다 보면 언젠가는 진실이 된다' 라는 장기적 계획인 것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7 16:58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 계간지 시대정신 여름호에 박지향 씨가 대처의 경제정책에 대해 논문을 썼는데 결론은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했더군요.외모와는 달리 영 과격한 주장을 하더라구요.

드팀전 2008-10-07 18:13   좋아요 0 | URL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지는군요.^^ <해방전후사 재인식>을 비롯해서 교과서포럼까지 역사를 중심으로 한 뉴라이트의 난동이 시끄럽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34   좋아요 0 | URL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직접적인 뉴라이트 냄새는 안 나는 논문도 많아요.탈 민족주의 계열의 논문들도 있구요.<시대정신>은 좀 더 우파 이데올로기 냄새가 강한 글이 많이 실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