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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
박호성 지음 / 책세상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자본주의의 쓰디쓴 바다에 사회 개량적인 레몬을 한 병씩 부어서 사회주의의 달콤한 바다로 변화시키려는 환상적 노력일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는 동네 아이들이 발로 차는 깡통같다. 우파는 ' 기회주의적 빨갱이'라고 해드락을 하고 좌파는 '개량주의적 변절자'라고 암바를 건다. 그 역사적 기원도 깊다. 앞에 인용한 로쟈 룩셈부르크가 직접적인 예이다. 좌파의 '백가쟁명' 시대라고 할 만한 제 2인터내셔널 시기,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 ?> 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개량주의적 중도파'에 대해 파워슬램(로프반동을 이용하여 아래에서 들어 360도 던지는 기술)을 시도한다.
링 위에서의 난투극, 그리고 그 승부의 결과는? 20세기를 어떤 형태로든 변형된 자유민주주의, 현실사회주의(스탈린주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로 한 지붕 세 가족을 만들었다. (여기서 한 지붕은 유럽의 지붕이다.)
한국이라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80년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고민한 '좌파' 들은 마르크스주의 학습에 열기를 보였다. (이 열기의 문제점은 이 책에도 지적되고 있다. 학문적 조급증에 대한 비판이다.) 90년대 스탈린주의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그 비판과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 에 대한 관심이 잠깐 일었다. 하지만 역시 '깡통' 취급 받았다. 윤건차는 <한국 현대 사상의 흐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로 '?' 를 쳐놓았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법하다. '사회민주주의'의 '개량주의' 에 대한 '좌파'내의 공격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한국 좌파 내의 '이념적 선명성'에 대한 강조와 그에 따른 분위기는 '개량'에 대해 날끗을 세웠다. 그래서 '개량주의=변절자' 라는 도식으로 공격하기 용이하다. 이 책의 저자 역시 현실에서 '개량주의'가 그런 의미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몇 년전 부터 '사회민주주의'의 연대도 생겨나고 숨어 있던 '사민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종의 '징후' 같다. 패배를 모르는 신자유주의의 광풍과 그 전도사(아니..장로던가) MB정권이 오히려 '사민주의' 에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더이상 대안이 없어보인다'는 절망적인 현실인식이 '사민주의'라는 '개량'에 대해 한 번쯤 더 관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앞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좀 지나치게 나아가는 사람들은 'MB만 아니라면'주의자가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사민주의'를 현실적 대안으로 생각 하게끔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혁명적 변혁'에 대해 현실적으로 정리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민주의' 를 비판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사민주의'는 이미 '자본주의의 패배불가능성'에 대해 인정한 것, 즉 '대안부재론'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사회민주주의'는 국정 교과서에서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하나로 그려진 적이 있다. 물론 국정 교과서는 '사회민주주의' 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애용한 말은 '복지국가'였다. 그래서 지금도 진보적인 대중들에게 '복지국가'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쯤으로 여겨진다. 이 말은 다시금 정리해 보면, (정치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하기 힘든) 한국의 진보대중들은 '사회민주주의'에 '친화적'이다. 독일 사민당의 사민주의 전형이 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살펴보자. 대략적으로 이 책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에 나온 부분을 정리하면
1) 결정론적 사고,세계관적 동질성의 폐기 2) '혁명'을 거부하는 개량주의 3) 부르주아 질서 안에서의 가치 실현 4) 의회주의와 사회적 법치국가에 대한 신봉 4) 사회적 전 영역의 민주화 5) 사회적 국가 추진 5) 사회적 다원주의 6) 혼합경제
듣고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진보적 대중들은 '그래. 나는 이제부터 사회민주주의자 내지는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궁금하면 이 강령을 가지고 "예/아니오" 테스트를 해보시라..^^...재밌는건 어느 정당의 '강령'을 가지고도 예스가 많게 나온다.^^ 강령이란게 중요한 부분이지만 신학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
사민주의에 대한 논쟁을 여기서 다 하는 것은 무리다. 이 책은 주로 제 2인터내셔널기를 중심으로 사민주의의 탄생과 논쟁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런 논쟁은 따지고 보면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현재도 인터넷 등에는 그런 논쟁이 치열하다. 진보신당 내에서 평등파 그룹의 도발적 문제제기와 주대환의 '구좌파 척결론' 등이 그런 것이다. 나는 그동안 여러 번 한국 정당운동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 '진보정당의 대중화'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한 자릿수 득표율은 한국정치의 기형적인 보수화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그걸 욕만 한다고 아침이 오는가? 내 개인적 생각이지만 과거 운동권중심의 강철대오는 '진보정당의 대중화'에 저해가 된다. 정당은 하나의 정파가 아니다. 한 정당의 강령은 중요하지만 한 정당 안에는 다양한 이념그룹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만 한다. 내가 민주노동당을 또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고 집행부나 당의 어떤 방향에 반드시 박수를 보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차이의 임계점이 오면 갈라 설 수 도 있다. 반대로 당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안고 가야하는 의무도 있다. 1891년 게오르크 폰 폴마의 개량주의적인 '엘도라도선언'에서 당에 대한 부분을 나는 현실정치적 입장에서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종파와 학파는 절대성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요구를 실행가능성과 상관없이 내세우기만 하면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일하는 정당은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
이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종파와 학파의 비판도 겸허히 수용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분당과정에서 회사의 한 직원이 내게 물었다. "어...진보신당 지지하시나 봐요. 그러면 PD파인가 보네" "...^^;" 무식한 친구가 신문 보고 웃자고 한 이야기였지만 발끈 해서 '아...무슨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에는 전부 NLPD만 있는 줄 알아요." 라고 대답했다. 거기에는 사민주의자, 자율주의자, 생태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진보적 자유주의자, 반 한나당주의자 ...별별 사람이 다 있는거에요" 난 지금도 이 생각이 맞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도가니탕 같은 민주적인 '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이 성공하려면 '사회민주주의당'을 선언해야하는 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진보정당의 대중화' 에 분명히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꼭 그래야하는 가에서는 아직 고민 중이다. 왜냐하면 당 강령이나 지향때문에 진보정당 대중화가 느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가 라는 문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진보정당들이 대중화에 성공하려면 분명히 좀 더 '대중적인 시각'과 '대중적인 정치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2002년 <사회비평>이 주도한 대담에서 진중권은 '진보정당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과감히 '사민주의정당론'을 이야기했다. 당시 진중권은 '민노당이 당당히 사민주의 강령'을 내걸야야 된다는 쪽이었다.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 정치에서 성공한 '좌파' 이념이 '사회민주주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중권= 사회민주주의자' 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이념에 사람이나 현실을 맞춘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대충 이 정도 이야기하면 진보적 인사라면 '사회민주주의'를 해야할 것 같다. 그렇다. 야만적 자본주의 하에서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이라고는 부실한 한국에서 공공성의 확보와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데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나 싶다. 이 책의 저자도 말하는 '이념적 과격성'은 주머니에 넣어두고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념적 과격성'에 대해서는 나도 참 할 말이 많다.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사이에 '국가'문제는 중심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었다. 이걸 좀 빌려오자. 진보적인 사람들 중에 의외로 '국가 폐지론자'가 꽤나 있다. 지난 시절 '국가폭력'에 대한 '상흔' 때문이다. 또 '국가주의/국가'를 구분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좌파의 경우 마르크스의 '국가폐기론'(그는 국가를 부르주아 지배도구로 보았으니) 과 '포스트주의'의 영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장 많은 것은, 이것 저것 다 떠나서 존 레논의 '이메진' 에 영향을 받은 ' 무정부주의적 낭만주의자'이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의 '진보'를 물리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면 이제 완전히 이론상 모순적이 된다. '현재 폭력적인 자본주의 하에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국가의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 차원은 다르지만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나온 것 역시 독일 사민당 내의 '이론적 과격성'과 '현실적 개량' 사이의 이론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베른슈타인은 후자의 이론적 통일성을 모색해 낸 것이다.)
뭐 어쩌라는 것인가? 나올 수 있는 궁색한 답변은 '장기적으로 국가를 없애고 그 전까지는 이윤에 눈 먼 사기업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의 기능을 강화한다.' 차라리 사민주의처럼 '국가=중립' (이것도 말도 안되는 접근이다.) 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맑스가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책의 저자는 '이념적 과격성'이 좌파 내에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주로 '골방좌파'들을 타깃으로 하였지만 이것이 꼭 '골방' 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가장 혁명적인 사람들은 술자리에 있다. 그들은 가끔 '전쟁으로 전 인민의 절반'을 죽이기도 하고, '청와대에 확 불질러서 MB를 쥐포'로 만들기도 한다. 뭘 못하겠는가?
잠시 삼천포로 갔다 왔다. 다시 '사민주의'로 가자. 그럼 복지국가를 만들 '사민주의'에 대한 확신이 들었는가? 그렇다면 ....그런 확신에 찬물을 끼얹자.
책의 저자 역시 사민주의의 자체 모순에 대해 스스로 누차에 걸쳐 말한다. 여러번에 걸 등장한다. 사민주의자가 스스로 '자기모순'이 있다고 강조한다면 이건 그냥 겸손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자본주의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회적 분배를 위해 자본주의 소수에 호소해야하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저자 역시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제3의 길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민주적 개량주의는 '사회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말한다. 물론 사회민주주의 내부에도 우파와 급진파가 나뉠 수는 있지만 기본적인 모순은 동일하다. 전통적인 사민주의에 대한 지적처럼 사민주의는 '분배' 차원에만 집중하고 있다. '복지' 라는 개념 자체가 '평등한 분배'이다. 그러면 여기서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코헨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중에 대한 착취의 결과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착취의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사민주의를 주장하는 저자 역시 이 말이 사회민주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사민주의자들도 공장내에서의 노동자들의 의사결정권 확충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자본가의 양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 결국 자본주의와의 대결을 최소화하려는 사회민주주의의 모습 말이다.
그외에도 현실적 사민주의적 성취를 이루어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분석도 들어 둘 만하다. 사민주의는 경제적으로 보자면 케인즈주의적 실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성진의 <케인즈주의인가? 21세기 사회주의인가?> 에서는 '사민주의'가 유럽에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세계경제의 호황기'에 두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석유파동이후 세계 경제는 불황의 그래프를 따라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민주의의 중심이 될 '노사의 평화로운 조합주의'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또한 그 경제 활성화 시기는 영구전쟁경제(냉전)에 힘입은 바 크다. 다시 재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금융자본주의의 세계화에서 일국내의 사회민주주의적 실천 역시 예전만큼 편안하지 못하다. 스웨덴 모델같은 경우도 이미 절정을 지나간 것이고 그것이 다시 반복될 수 있는 정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웨덴 모델에 대한 사이크의 분석은 재미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웨덴의 순사회적 임금이 '제로'에 가까왔다는 것이다. 즉 벌어서 세금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합의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뜻하는 바는 또 있다. 바로 사회복지정책의 재원이 실제 노동자의 지갑에서 전부 나왔다는 것이다. 자본/노동의 계급적 소득재분배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 내부의 분배라는 점이다.
하여간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다분히 이론적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겠으나 현실 정치와 정세 그리고 변화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어도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은 꾸준히 이루어지는데 동의해야만 한다. 홍세화는 사회주의/사민주의의 논쟁에 대해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부산 가는데, 대구 쯤 가서 어디로 갈라질 지 이야기해도 되는데 미리 창원갈지 마산갈지 가지고 싸운다.'라고 말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이념적인 틀이 현실을 먼저 재단해서 준비해 놓을 수는 없다.
책에 대한 이야기 하자. 책 제목이 책의 중요한 두 부분을 나누어서 이야기 해준다.<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 즉 하나는 사회민주주의의가 역사적으로 걸어온 길(배경, 태동, 성장, 논쟁, 실패, 재도약, 국가간 비교 등) 을 보여준다. 그리고 후반부는 우리나라에서 사민주의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책 서문에서 '저널리스틱한 접근'과 '아카데믹한 접근'을 병행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이론의 상아탑 주의대신 이론의 '공설시장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취지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는 독자의 몫이지만 비교적 쉽게 쉽게 씌여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전반부 '사민주의의 역사'는 간략하면서도 이론적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쓰고 있다. 이 점은 책의 후반부에 대해서도 기대를 갖게 한다. 그렇지만 책 후반부는 바람빠진 풍선 같다. 이 글들이 '민노당의 의회진출'이라는 지지난 총선의 흥분된 분위기를 바탕으로 씌여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보다는 글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이라는 것에 이르지 못하는데 궁극적 한계가 있다. 저자는 결론에서 '제 2의 민주화 운동'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복지국가 체계와 3생의 정치' 등을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교과서의 마지막 장같은 모습이다. '이래 저래 하여 밝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자."라는 식이다. 전반부의 거대한 이론적 영역을 일괄적으로 요약하는 것이-이미 나와 있는 사실들이니까- 학자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부분만 요약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전반부만 읽도록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