哭....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에 초강수…와이티엔 조합원 6명 해고
임장혁 돌발영상 팀장 등 6명은 정직

노조, 긴급 조합원 총회 열고 논의중
 
 
한겨레 이문영 기자
 








 

» 구분홍 사장의 출근저지 등으로 인해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23명의 심사가 열리기로 한 서울 남대문로 와이티엔 본사 회의실 앞에서 노조원들이 징계위원회 위원들의 회의실 출입을 막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와이티엔>(YTN)이 6일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을 벌여 온 노동조합원 6명을 해고했다. 와이티엔 사용자 쪽이 노조의 구본홍 사장 출근 저지투쟁 81일 만에 조합원 해고라는 ‘초강수’를 둠으로써 와이티엔 노사 대립은 한층 격렬한 양상을 띨 것으로 보인다. 노조는 즉각 긴급 비상총회를 열고 투쟁 수위 강화를 결의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와이티엔은 이날 인사위원회를 열고 노종면 노조위원장을 포함한 전·현직 위원장과 노조 간부 등 6명을 해임했다. 또 임장혁 돌발영상팀장 등 6명에 대해서는 정직, 8명은 감봉, 13명 경고라는 대규모 징계를 단행했다. 사쪽이 인사위원회에 회부한 33명 전원을 징계한 셈이다.

경영진은 이날 오후 사내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노동조합은 주총 이후 80여일 동안 사장의 출근을 저지하는 등 언론 역사에 전례 없는 불법 투쟁을 계속해 왔다. 회사는 불가피하게 징계라는 자구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며 “앞으로도 노조의 불법 행위를 관용하지 않을 것이며 법과 제도에 의존할 것”이라고 밝혔다. 권오진 와이티엔 홍보심의팀장은 “인사위원회가 상벌규정과 단체협약을 근거로 징계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와이티엔 사쪽은 지난달 24일부터 인사위원회를 열어 조합원 33명에 대한 징계 절차를 밟아 왔다. 노조는 인사위원회가 징계 대상자들의 출석소명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으며 징계사유를 조작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날 저녁 열린 긴급 조합원총회에서는 회사의 징계를 비판하는 격앙된 발언들이 이어졌다. 노조는 향후 앵커까지 참여하는 ‘공정방송’ 배지·리본의 방송노출, 그간 유보해 왔던 총파업 돌입 등 이후 투쟁방향을 놓고 4시간30분에 이르는 장시간 토론을 벌였다. 노조는 우선 출근저지투쟁의 강도를 높이되, 파업 돌입 등 추가 투쟁방안은 집행부에 일임하기로 결정했다. 노종면 위원장은 “7일부터 구본홍씨가 와이티엔 사옥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하는 것을 시작으로 투쟁수위를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공채 전 기수가 참여하고 있는 단식투쟁도 이날로 중단하고 향후 노조의 지침에 따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전국언론노조는 성명을 내고 “와이티엔 조합원 징계는 전체 언론인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이날 부로 이명박 정권 퇴진투쟁을 선언하고 총파업을 포함한 전면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문영 권기순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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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0-07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ㅛㅛ 왜 자꾸 글이 커지면서 짤리는거야...MB만 속썩이는게 아니군.

마노아 2008-10-07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관리에서 레이아웃을 2단으로 바꾸세요. 복사해올때 프레임도 같이 복사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드팀전 2008-10-07 13:48   좋아요 0 | URL
복사한 것 말고...그냥 쓴 글도 커져보이는건 왜일까요???

마노아 2008-10-07 19:47   좋아요 0 | URL
제 모니터에는 글자 커보이지 않거든요. 그냥 평소랑 똑같아요.
다만 기사 같은 경우는 오른쪽이 잘려보여요.
근데 이건 계속 그랬거든요. 다단을 2단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하고 싶은 충동이 자주 일었죠^^;;;;
혹시 익스플로러 창 맨 위에 보기-텍스트크기가 '크게'로 설정되어 있나요?
그게 아니라 알라딘만 유독 크게 보인다면 알라딘 서재지기님께 문의를^^;;;;
 
중간은 없다 -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
박지향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에 대해 읽은 것은 사실 다른 목적에서이다. 실은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를 읽기 위한 정지작업이다. 스튜어트 홀의 책을 사두고 서가에서 잠시 대기시켜놓고 있었던 어느날, 우연히 동아TV에서 하는 <세기의 위대한 여성-대처>편을 보게되었다.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대처리즘'에 대해  상식적인 몇 가지 외에 별반 아는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다 아는 '작은 정부, 민영화, 노조 탄압, 포클랜드 전쟁' 정도가 내가 떠올리는 단어들의 전부였다. 결국 그 프로그램은 책 읽기의 순서를 살짝 바꾸었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원제목은 The Hard to Road to Renewal: Thatcherism and the Crisis of the Left-를 읽고 뭔가 새롭게 하려면 '대처리즘' 을 꼴보기 싫다고 통과시켜버려서는 곤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나는 시간에 덜 쫓긴다면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가 쓴 주요 저작들도 보고 싶다. 당신같은 좌파 끄트머리가 왠 하이에크냐구 ? ^^  웃어야지 뭔 말이 필요하겠냐.)

'대처리즘'의 그림자 처럼 따라다니는 말이' 뉴 라이트'다.(한국의 뉴라이트도 결국 그 연원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대처리즘'을 '신자유주의'의 킥 오프 사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나는 가끔 '신자유주의 절망론'을 겪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신자유주의'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뚝 하고 떨어져서 앞으로도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공포의 괴물처럼 생각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니면 그 반대로 '신자유주의'에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공개화형 시키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보거나 말이다. 나는 두가지 생각 모두에 동의할 수 없다. 그건 대중적인 경제학 책 몇 권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처는 '대안은 없다'라고 말했지만, 불행히도 그 담론 역시 시대의 산물이고 역사와 함께 변해가는 무엇일 뿐이다. 좌파 학자인 마샬 버먼이 자주 인용하는 마르크스의 말을 떠올려보자. .... "모든 굳어진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 미국발 금융 위기를 두고 신자유주의의 몰락이니 뭐니 호들갑이다. 나는 그렇게 금융자본주의가 쉽사리 꼬리를 내릴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하지만 단 한가지 'There is no alternative' 라는 지배담론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희망의 단초쯤은 주리라고 생각한다.

대처리즘이 착종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전후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합의의 정치'시대가 있었기때문이다. 그 시대는 경제 사상으로 보자면 '케인즈주의의 시대' 이고 정치적으로 보자면 '변혁의 시대'였다. 대처가 이 시대에 축적된 모순들을 일거에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대처리즘'이고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다.

대처리즘의 핵심은 '시장 자유주의'와 '복고적 도덕주의' 이다. 그녀는 영국에서 사회주의의 잔재를 없애는 것에 정치인생을 걸었다.세계의 제국이던 영국이 전후 2등 국가가 된 것은 전적으로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정책과 그에 기본적으로 동의를 해 준 보수당의 태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잔재를 없애는 데 대처가 쓴 처방은 '자유방임주의'였다. 이를 통해 대처는 너덜 너덜 해진 '유니언 잭'을 다시 당당히 세우고자 했다. 대처는 기본적으로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자수성가한 사람이였고, '확신의 정치가'였다. 대처가 사회이념적으로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던 것은 근면,성실, 자존과 같은 영국적 보수가치를 회복하는 것 만이 국가의 보호아래 타락와 우유부단함으로 추락하고 있는 영국을 살리는 길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녀는 급진적인 보수이념을 가지고 영국 재건에 나선다. 그녀가 주창했던 것들은 '대처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상식책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것들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MB정권 하에서 하나씩 보여지고 있어서 신문을 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너무 똑같은 것들이어서 따로 적기가 귀찮을 정도다.

대처는 일단 시장의 복원을 외친다.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국가는 그런 기회만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이어서 규모의 민영화 작업이 벌어진다.  물론 국영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비효율성은 어떤 형태로든 관리되어야 한다. 대처는 과감한 매각과 통폐합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실업자수는 대폭으로 증가한다.) 대처는 흔히 말하는 기본적인 공공재의 개념조차 무너뜨릴 만큼 과감한 민영화를 시도했다. 수돗물의 민영화도 대처시대에 나온말이다. 철도 민영화는 대처 시기에 토대를 닦고 메이어 시대에 이루어졌다. 대처에게 '노조'는 '무찔러야할 적'이었다. 대처 집권기에 중대한 싸움이었던 광산노조와의 싸움에서 대처는 '철의 여인'의 이미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그녀는 기마경찰까지 동원해서 광산노조를 제압한다. 사석에서 '어떻게 세금을 내는 국민에게 기마경찰을 보낼 수 있소이까? 라는 질문에 대처는 더 당당히 '다음번에는 탱크를 보내려고 했습니다.'라고 맞선 일화는 유명하다. 대처는 대학 교수들과 공영방송 BBC를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객관성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책에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MB정권이 한국의 공영방송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과 유사하다.)

대처의 혁명적 목표는 단지 시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대처는 기본적으로 의식혁명까지를 염두에 두었다. 좌편향적인 영국의 전통을 우향우 시키는 것말이다. 대처는 여기에 대중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섞는다. 임대 주택의 판매, 민영화한 공기업 주식에 대한 참여, 소득세의 감면등을 통해 '계급'의 개념을 '소비'의 개념으로 바꾸어 버린다. 즉 모두가 쁘띠 브루주아가 되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동계급 중 다수가 주식을 소유하고, 경기 회복과 더불어 생활수준이 나아진다. 대처 임기 말기에는 전통적인 계급 투표가 상당시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비율상으로는 계급투표율이 높기는 하지만 유의미한 변화인 것은 사실이다.

이 책에는 대처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한다. 개인적으로 대처가 임기말로 갈 수록 제왕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상의 특성을 보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국 대처를 보수당 내부에서 내치게된 결과를 낳았다는 것 등을 말한다. 또한 소득세의 감면등으로 상징되는-현재 종부세 인하를 떠올리는- 대처의 경제정책들이 빈부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점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 지점에 시선을 하나만 꼽아 넣어도 책 몇 권이 나올만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극심한 빈부격차의 발생 아니던가? 저자는 물론 간략하게 이부분을 짚고 넘어간다. (처음부터 이 저자의 이념적 지향을 알고 있기때문에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성 싶다.) 이런 부분들은 자주 등장한다. 포틀랜드 전쟁 부분을 살펴보자. 포클랜드 전쟁은 보수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이가 많았던 사건이다. (우리나라 독도의 주권문제와는 엄청나게 다르다.) 아르헨티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영국 함대가 출동한다. 이 섬은 영국에서 1만3천 KM떨어져 있고 아르헨티나로부터는 480KM 떨어져 있는 영국인들도 잘 모르는 그런 섬이었다. 영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그 섬의 영국계 주민들에게 아르헨티나와의 동화책을 권장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의 군비절감 목적으로 남대서양 함선이 물러남에 따라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국내 정치적 목적의 침공을 감행한다. 외교적 채널을 더 가동해보자는 일각의 의견은 뒤로 하고 대처는 함대를 급파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챙취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것은 '영웅적인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평가한다. 그 전쟁에서 255명이 죽고 777명이 부상당했다.또 아르헨티나 측은 650명이 죽었다. 대처의 '영웅적인 행동' 때문에 말이다. '철의 여인' '전사 여왕' 대처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죽었어야 할 지는 의문으로 남겨두자. 저자는  결과적으로 대처의 '가장 멋진 순간'으로 평가한다. 과연 그것이 '가장 멋진 순간'일 수 있을까? 

책의 저자는 마지막에 '우리에게 대처는 언제나타날 것인가?' 라며 한국판 대처의 출현을 염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대처는 필요하지 않다. 대처의 영국과 현재의 한국은 억지로 짜맞추고 싶겠지만 두 나라는 논의의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지난 시절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한다.마치 대처가 '합의의 시대'를 척결해야할 사회주의 시대라고 말하며 칼을 간 건 처럼 말이다. 당시 영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케인즈-베버리지 모델이 공론으로 모아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황인가? 노조 가입률이 10%수준인 나라가 노조가 정치를 좌우하는 나라라고 말한 과거 영국과 비교될 수 있을까? 계급 정당의 역사가 수백년이 된 나라와 이제 꼬리를 감추며 계급정당임을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을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주의 종주국'과 아직도 식민지의 영향력이 잔존하는 나라가 같은 나라일까? 거기에 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대처가 주장하는 '도덕' 조차 없다. 아마 한국의 보수주의자가 먼자 도래를 기대해야 할 것은 '대처'라기 보다는 '도덕'일지도 모른다.

 대처가 실업자 수의 폭동임계점 수준까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변혁을 위한 성장통이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 사회에 축적되어 있는 사회안전망의 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사회적 안전망은 멸치잡은 그물처럼 촘촘한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최소한 고래정도는 막아야 하지 않아야 그물 아닌가? 그런데 한국의 앞바다에는 널널한 그물 피해 떠다니는 고래들이 물반 고래반이라고 한다. 대처가 '이제는 개인이 개인을 구제해야한다' 라고 말할 때 한국은 해방 이후 부터 계속 '개인이 개인이나 가족이 구제'해 왔다. 오죽하면 아이들까지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노래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대처'를 염원하는 것은 도대체 앞뒤를 제고 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하기사 대처 역시 '살놈 살고 죽는 놈이야 어쩔 수 있나' 하는 식이었으니 별로 신경쓰일게 없을 것이다. 그런 걸 '시장 자유주의'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야만적 자본주의' 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언젠가는 우리 역사에도 대처같은 이가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진정 더 필요한 것은 먼 훗날 말을 타고 나올 대처 같은 이가 비판해야할  '대처의 적들' 아니겠는가? 비루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실업자들을 구제하고, 비정규직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을 제도적으로 방어하고, 노인이나 장애인들에게 삶을 이어갈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이라는 무한경쟁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낙오한 사람들을 품어낼 수 있는 그런 지도자 말이다.   

이 책에서 -아마 스튜어트 홀도 그런 의미였겠지만- 내가 읽고 싶었던 것은 대처리즘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한국이 처한 현실이 흘러가는 방향을 미루어 짐작하고 그에 대한 좌파진영의 대처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대처가 적들을 어떻게 자신의 상승요인으로 활용하는지,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의 전술, 대중 정서의 어떤 맥락들을 짚어내는지 하는 점들은 한국의 진보진영도 타산지석해야할 부분이 많다. 한가지 책에서 좀 아쉬운 것은 포틀랜드나 광부노조파업,인두세,유럽연합 문제등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까지 들어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대처리즘의 몇 가지 기본 아이템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그런 고찰들이 더 책을 풍부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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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54   좋아요 0 | URL
박지향의 대처 전기를 드디어 읽으셨군요.스튜어트 홀의 책이 어려울 것 같아서 제가 대신 읽은 것은 레이건과 대처의 시대 때의 역사 쓰기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하비 케이<과거의 힘_ 역사의식,기억과 상상력>이었습니다.그다지 두툼하지 않은 책이니 한 번 참고해 보세요.

드팀전 2008-10-08 17:27   좋아요 0 | URL
네...강유원의 소개로 알게된 책이었습니다.관련 페이퍼도 한 장 올렸더랫지요.책에 관련된 건 아니었구요..지금도 보관함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요.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9 16:40   좋아요 0 | URL
강유원 씨가 교수가 되기 전에 추천하던가요? 개인적으로도 아는 분인지요?

드팀전 2008-10-09 18:23   좋아요 0 | URL
전 강유원씨의 얼굴도 잘 모릅니다.^^ 지금 교수인가요? 그 분이 <미디어 오늘>에 고정적으로 글을 올리는데 책소개를 겸해서 말이지요. 그 기사에서 본 책이 노이에님이 말하신 하비 케어의 <과거의 힘>이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10 15:20   좋아요 0 | URL
예...한동안 회사원으로 지내다가 교수자리가 나서 이제 제도권으로 갔다네요.하비 케이의 그 책에 나오는 레이건의 사고방식에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더군요.얼마전 대처도 칠레의 피노체트 구명운동 나서고 그랬죠.얼마 안 있어서 피노체트는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지만...
 
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명환.김엘리사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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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군부의 최종 승인을 필요로 한다."  

뜬금없이 '왠 반동적인 발언인가?' 하는 의심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쪽에서는 군대를 없애자고 퍼포먼스를 하는 마당에 말이다. 그리고 '군정종식' 을 외치던 YS,DJ 도 대통령 한 번씩 다 해먹은 이 시대 이 땅에서 말이다.

먼저 이 말을 해명하기 위해 두 가지 전제를 이야기 해야 겠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요즘 유행하는 '문화혁명'이나 신비주의적인 '의식혁명'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혁명은 가끔 모든 혁명적 좌절을 '영속혁명'의 대의 아래서 '성공'으로 치장하는 신학적인 측면이 있다. 이것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대의를 잊지 않기 위한 전술로 효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여기서 '혁명'은 고전적 의미의 '정치 권력'의 전복이나 소유와 관련있는 '클래식한 의미의 혁명'이다. 두번 째로 이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산층 진보'의 '이데올로기적 과격성'을 잠시 덮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다. 추락의 낭떨어지에서 줄타기를 하는 다른 모든 중산층들 처럼. 그러므로 굳이 이를 폄하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단 '중산층 진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공중부양'으로 정치시키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의외로 모니터 상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실재보다 훨씬 당당하게 급진 좌파적이며 아나키스트적인 흥분을 많이 목격하곤 한다. 자기주장이 담는 내적 모순에 대한 이론적 성찰은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흥분파'는 한 줌의 '군부' 가 어찌 '혁명'의 위대한 기치를 좌우할 수 있느냐고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정초적 흥분' 만 정돈하고 본다면 이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부가 마지막 도장을 찍어 주어야 한다. 군부가 혁명 성패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귀에 거슬리게 들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혁명 세력들은 외부 무력에 상응하는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 혁명이다. 아니면 최소한 군부가 혁명적 시기에 중립 내지는 유보적 입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치명적으로 실패한 예가 바로 살바도르 아엔데의 칠레다. (칠레의 역사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아리엘 도르프만에게 '슬픈 칠레'는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작품들은 탯줄을 통해 다시 그 역사적인 칠레와 연결된다. 여정은 칠레라는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역사와 그 안의 사람들이라는 보편성 으로 승격된다. 대충 여기까지만 들어봐도 이 책이 요즘말로 'COOL' 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프라다를 입은 악마'도 등장하지 않고 '쇼퍼홀릭'들도 나오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TV화면을 통해 이미지로 소비되는 -수잔 손택식으로 말하자면- 고통받는 타인의 모습들이 모두 주인공이다. 첫번재 희곡 <과부들>에서는 남편과 자식을 군부에 빼앗기고 찍소리도 못하는 과부들이 나온다. <죽음과 소녀>는 성고문 피해자가 등장한다. <경계선 너머>에서는 하루 아침에 이산가족이 되는 노부부가 나오고 <연옥>은 입에 담기 힘든 범죄를 저지른 남녀가 무간지옥에서 들려주는 귀곡성이 흘러나온다.

나태한 현실을 고발하는 '리얼리즘'을 '진보'와 등치시키는 사람들은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겠냐만은-이런 읽을 거리에 관심을 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반쪽이다. 이 책은 '자연주의'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말은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형식 사이의 전통적인 미학관을 보여준다.

"실제 인간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므로 역사적인것이지만 동시에 직접적인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명하는 재현의 미학적,문법적 법칙을 따른다." 

이 희곡집에 등장하는 네 편의 희곡은 역사의 핏빛 강물 위에 떠 있다. 특히 아픈 역사로 점철된 한국민에게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글들이 한 자 한 자 우리들의 언어로 씌진 듯 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등장인물들이 많은 <과부들>은 아프카니스탄의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흙냄새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훨씬더 비의적이다. 검은 강물 사이로 떠오르는 사라진 사람들과 연속적인 사건들은 마치 스릴러를 보는 긴박감을 준다. 그러면서 인물들 사이의 다층적인 입장과 갈등들이 오래되 고성을 타고오르는 덩쿨처럼 뒤섞인다. 강물에 떠오른  한 구의 시체를 두고 그 안에서 모두 실종된 자기 가족의 얼굴을 읽어내는 장면은 묵뚝한 슬픔이 가진 보편성으로 독자까지 끌어들인다. 이 작품은 결국 한 편의 연극을 위한 대본임에도 읽고 나면 말없는 강물의 묵묵함처럼 대하드라마를 본 듯 한 느낌을 준다.

네 편의 희곡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또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은 역시 <죽음과 소녀>이다. <과부들>이 '쿠르릉 쿠르릉' 거리는 어두운 강물 소리를 계속 귓전에 남기면서 진행된다면 이 작품은 계속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의 제1 주제로 양 쪽 귀를 괴롭힌다. (그의 작품이 상당히 청각적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경계선 너머>는 포성으로 <연옥>은 소리가 없는 '무음'으로 청각적이다.) 이 작품<죽음과 소녀>는 94년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에이리언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를 기용하여 <진실>이란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영화 첫 장면과 끝장면에 공연장에서 슈베르트를 듣고 있는 시고니 위버가 나온다.

이 작품은 현실적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정녕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그냥 '정의로운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가 나쁜 놈들 입에서 진실을 말하게 하면 된다.' 라는 단순함으로는 이런 딜레마들을 헤쳐나갈 수 없다. 과거사 위원회로 뽑힌 운동경력이 있는 남편과 남편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문의 후유증을 안고 사는 여자, 그리고 정말 고문 협력자였는지, 아니면 아니었는지 끝까지 모호하게 남겨진 의사. 이들 세 명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진실'과 '정의' 그리고 '현실' 을 둘러싼 다층적인 양상을 목도하게 한다. 아내의 '사적복수론'과 그를 설득하려는 남편의 '역사 처벌론'은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대목들이다. 독자들은 아내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의 현실적 논리는 결코 외면할 수 없다. 마치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던지는 문제를 다시 재현하는 듯 하다. 결국 이들은 절충안을 찾는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가 과거의 수인이 되지 않고 어떻게 과거를 살아 있게 할 것인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진실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한가?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는 얼마나 죄죄를 짓고 있는가?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 중 가장 큰 딜레마는 ,민주적 안정을 만들어내는 국민적 합의를 깨지 않고 어떻게 이런 쟁점들과 씨름할 것인가? "

나는 아리엘 도르프만이 <죽음과 소녀>에서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그래. 이게 '정의야' 이렇게 하면 해결 돼. 나머지는 부차적이야" 라고 1분쯤 생각하고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명품족'만큼이나 혐오한다. 아니면 천재성에 질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소녀>에서의 문제 의식은 <연옥>으로 이어진다. <연옥>은 처음에 읽다보면 '뭐야..이게 어찌 되는거야' 라고 운전대를 어디로 잡아야하는지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은 아니지만 시공간도 모호하고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남녀가 서로 비켜가면서 이야기하는 부분들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건이 무엇인지를 앞선 작품들처럼 한 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 <연옥>은 정신병동의 하얀빛 처럼 환한 매력을 선보인다. 그리고 책을 다 덮고 나면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연옥>을 꼽을 수 밖에 없다. <연옥>은 정치사적 상흔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리엘 도르프만이 지속적으로 부여 잡고 있는 '진실과 화해 그리고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사이코드라마와도 같은 형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를 치유하는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본 사이코 드라마이다.)    

<연옥>의 배경은 말 그대로 '연옥'이다. 처음에는 이 배경조차 이해가 되지 않아서 허발질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배경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저 하얀 방이라고만 무대를 설정한다. 남녀는 일종의 '무간도'와도 같은 '연옥'에 와있는 것이다. 작가가 후기에 그곳이 단테적인 연옥이 아니라 불교적인 공간이라고 말한 것은 이 장소가 '윤회'를 준비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회'에 앞서 남녀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작가가 평소 즐겨찾는 주제를 풀어나갈 자리로 본 것이다. 주인공들은 서로를 심문하는 위치에서 '스스로의 정화'를 요구한다. '정화'되지 못하면 끝없이 이 '중음'의 공간에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  딱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어. 윤회는 끝이 날까?

여자: 네가 그녀를 치유할 수 있다면, 그럴거야.

 극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서로 뫼비우스띠처럼 얽힌다. 단순히 한 사람의 심문자가 피심문자가 되는 성질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로서 심문자가 되기도 그 반대역을 맡기도 한다. 이들은 서로가 연속되는 연할 속에서도 서로를 감추며, 속인다.

여자" 나는 너의 담당 사건이야. 너의 유일한 담당 사건이지, 내가 돌아가면, 너도 돌아가는 거야.내가 지워지면, 그들이 너도 지워버릴 걸.맞지?

 작가는 극의 끝으로 다가가면서 그들의 인격너머에 있는 그곳가지 서로 닿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중적인 심문/재판은 연기를 하는 자들의 인격을 붕괴시키고 그들의 자아를 가린 베일을 찢어버리는 방법이다."

나는 인간은 결코 그 지점까지 닿을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베일을 벗는 다는 것은 그걸 작동하는 또 하나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곳은 '공백'이다. 어떻게 '공백'을 언어로 밣혀낼 수 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자신에게나 타자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으나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작업이다. 어쨋거나 작가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에서 이 극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에게는 '소통'의 일종의 희망이다. '폭력과 공포와 배신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첫 단초는 '소통'으로 부터 찾아야 한다는 낙관적인 믿음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를 질문이라고 말한다.

"어제 우리에게 가해진 경악할 일들이 우리가 내일 다른 사람에게 저지르는 공포를 불러오는 이 때, 내가 희망하는 바는 적어도 이 희곡이 비난과 분노의 순환을 감히 어떻게 깨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매력적인 점 중에 하나는 각 편 마다 작품 속 인물들이 태어나는 산고와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문제 의식들을 작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혹 '이런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구나' 하는 지점을 작가의 입을 통해 만날 때는 정답을 맞추고 우쭐해진 소년같아진다. 그러나 내가 더 크게 위안을 받을 때는 가끔은 현실의 언어난수표 속에서 내가 언어로 형상화하지 못했거나, 차마 이해받지 못할 두려움에 말하지 못하는 질문들에 작가가 촉수를 뻗어있을 때, 나는 가끔 그럴 때 '외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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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공효진을 좋아한다.

드라마<네 멋대로 해라>때부터 좋았다.물론 그때 함께 나온 양동근,이나영도 좋아한다.

올 가을 한국영화에 작은 웃음을 던져줄 영화가 공효진의 <미쓰 홍당무>가 아닐까 싶다.

'불타는 고구마'처럼 '홍당무'는 안면홍조증이 있는 공효진의 별명이다.

공효진은 좀 스토킹한다.^^ 유부남인 고등학교 선생님을 말이다. 물론 이들은 지금 같은 학교 선생이다. 공효진은 러시아어 선생인데 학교에서 비인기교과로 몰려서 중학교 영어선생으로 강등당한다. 영어는 하나도 모르는데...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계 아주 예쁜 후배 교사이다. 이 백여시 같은 후배는 공효진이 짝사랑하는 선생님에게도 꼬리를 친다.

이 영화에서 공효진의 대사는 압권이다. 예쁘지 않아서 서러움 받았거나, 평범하게 생겨서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던 모든 여인네들의 한을 풀어준다. 

공효진의 화장대 거울에는 ' 1등을 하지 말자' 라는 구호가 붙어 있다. 왜냐구....'아유...욕심도 많으셔..세컨드면 됐지!"

"달나라에 두번 째로 발을 디딘 사람이 누구인지 아셔? 남극점에 두 번째로 도착한 사람이 누군지 아셔?....동계올림픽 &*$$&$%^%^$ 에서 2등한 사람이 누군지 아셔? " ...." 그봐..1등만 기억하는거야... 천박하게 스리..." 

영화는 신인 이경미 감독이 만들었다. 공효진이 평범한 여인네들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사자후를 내뱉고 감독과 둘이 훌쩍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경미감독은 박찬욱감독의 연출부시절부터 빛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데뷔작의 제작을 박찬욱감독이 맡았다. 또 카메오로 잠깐 출연하기도 한다. 봉준호도 출연한다.

내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예쁘게 생긴 여자 후배에게 "야..넌 저런 설움 안당하고 살았잖아. 친구랑 둘이 다니면 남자들이 다 너만 쳐다보지? 남자들이 너한테 다 잘해주지? 그러니까 저 심정을 모를꺼야." 했더니....와우...사회밥 좀 먹었다고 반론이..." 선배님도 그런 대접 안받아봐서 모르잖아요." 그런다..... 이게 기분 좋기도 하면서 또 '어..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도 들고 그랬다. 그래서 기껏 내가 한 말이 "야...너도 이제 사회생활 좀 했구나."였다. 바보같은 질문하면 이렇게 '어'될 수도 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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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0-0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완전 기대중인 영화. 포스터를 보면서, 아, 저 영화는 꼭 볼테다! 다짐했던. ㅎㅎ
저도 공효진 너무 좋아해요 ^_^ 작년에 '고맙습니다' 보면서 더욱 급 사랑 모드.

드팀전 2008-10-06 09:46   좋아요 0 | URL
부산영화제에 공효진이 왔던데...

니나 2008-10-05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네 멋대로 해라에서 (예쁜?ㅋ)이나영한테 "너 같은 년들은 믿음이란 걸 몰라" 라고 지랄하던 공효진을 잊을수가 없지요-

드팀전 2008-10-06 09:51   좋아요 0 | URL
^^ "이쁜 것들 다 묻어버리고 싶어." 영화 카피잖아요.
그런데 이것과 관련해서 글을 하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도 합니다.
'이쁜 것들에 관한 이데올로기...ㅋㅋㅋ'
영화는 단지 예쁘다/안예쁘다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같진 않구요.외모지상주의와 1등주의가 결합된 현재의 문화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전 사실 그 안에 들어있는 '가부장적인 남성주의'가 핵심으로 보입니다.
예쁜 여자들도 결국 그 안에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구요...실제 실력이 있음에도 실력보다 외모같은 것으로 자신의 능력이 폄하되는 경우도 있구요.예를 들어 예쁜 여자가 일을 잘하면...'그녀의 능력'보다 '그녀의 외모'때문이라고 생각하지요. ^^

하루(春) 2008-10-06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랑 전도연, 하정우 나오는 영화 보고 싶은데... 하긴 '놈놈놈'도 사운드트랙만 갖고 있고 영화는 언제 볼지 기약이 없기는 매한가지군요. ^^;;

드팀전 2008-10-06 09:52   좋아요 0 | URL
dvd가 있잖아요.^^ 요즘은 극장에서 내리면 한 달 안에 나오기도 하던데
 
글렌 굴드,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 예술 거장 시리즈 1
브뤼노 몽생종 지음, 임동현 엮음 / 모노폴리(monopoly)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해 글렌 굴드의 새 음반이 출시되었다. 죽은이의 개인 창고에서 발견된 새로운 음원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재탕'이었다. 새 음반은 55년 글렌 굴드의 첫 레코딩 <골드베르크 변주곡>를 리메이크 한 것이다. 통상적인 구분을 위해서 '젠프 음반' 이라고 한다.  '젠프'는 리메이크에 사용된 컴퓨터 시스템의이름이다. 이 음반은 55년 모노로 녹음된 음원을 컴퓨터로 데이팅화한 것이다. 굴드의 타건, 패달링, 음량 정도를 그대로 수치화하여 '야마하' 피아노로 다시 녹음한 것이다. (55년 녹음은 애칭이 '치클링'이었던 스테인웨이 피아노 아니었나 싶은데...'치클링'은 굴드 생전에 사망 신고가 내려졌고, 이후 굴드가 찾은 것이 '야마하' 피아노로 알고 있다. 정확히 잘 모르겠다) '음악 재현의 수량화'라는 측면에서는 거의 혁신적 방식이다. 이 작업은 모노를 스트레오로 듣는다는 꿈을 이룬 것 이외에 다양한 미학적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것은 글렌 굴드의 음악인가?" 에는 전문가들과 음악팬들 사이에 이견이 많다. 미학관 전체를 반영해서 답해야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 "글렌 굴드 라면 자신의 과거 녹음이 이렇게 복제되어 재생산되는 것에 동의했을 것인가?" 에는 비교적 쉽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에 나오는 굴드의 인터뷰를 보자.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만 있다면, 2백군데를 연결해서 하나의 곡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계적인 수단으로 만들어진 연주를 속임수라고 이야기하는 사고방식에는 짜증이 납니다. 환상이나 조작을 최대한 이용해서 이상적인 연주를 만들어냈다면, 그 일을 멋지게 해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실황 공연을 싫어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기벽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음악 미학과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 부차적인 부분에서는 언론들의 입방아가 만든 스캔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책 초반부에는 굴드가 그의 괴이한 행동들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글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여름에도 코트를 입고 다닌다.' '썩어빠진 의자를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등등..이런 가십들을 제외하고도 글렌 굴드가 좀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터 30대에 라이브 무대에서 은퇴하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32살에 공연장 밖으로 몸을 빼냈다. 사실 비범한 30대피아니스트라면 국제적 인지도를 높여 나가며 세계를 무대를 누비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런데 그런 나이에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이것은 '무대 공포증'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음악 예술에 대한 글렌 굴드의 '미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대개 클래식 연주가들은 '실황 연주'를 '레코딩'보다 '진정성' 있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음악이라는 시간적 예술이 갖는 '1회적 재현'에 대해 아우라를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음악가들은 '실황/스튜디오'를 병행하면서 부와 명성을 쌓는다. 간혹 나타나는 극단적인 '레코팅 혐오가'-예를 들어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같은-역시 '레코드형 인간' 글렌 굴드 만큼이나 희귀하다.

굴드가 음악을 대하는 방식은 다분히 북구의 수도승 같다. 그는 음악팬들을 위해서도, 무대 앞의 관객을 위해서도 음악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음악은  그를 통해 져핸되어야 하는 신의 형상과도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고요'가 필요하다. 청중의 피드백이라던가, 흥분과 광기 같은 것은 '음악의 음악' 을 만들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과 만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나는 실제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연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기술의 발전(예를 들자면 '매체 저장기술'이나 '매스 미디어'의 도입같은) 불러온 예술사회학적 변화에 대한 그의 신념을 말한다.

" 음악이란 개인적 형태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악이 집단요법으로서, 또 그것과는 다른 어떤 공동체험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그리고 연주자까지도- 명상 상태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위에 앉은 2999명의 사람과 함께 이런 상샅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글렌 굴드는 결코 피아니스트로만 머물 수 없는 인간이었다. 대개의 위대한 연주자들은 '악기의 사제'가 된다. 면벽수도하는 심성이 있지 않으면 거장이 되기 힘들다고도 한다.(물론 간혹 날라리 천재들도 나온다.) 글렌 굴드 역시 이런 수도회 소속이다. 하지만 그는 매일 매일 예배하고 묵상하는 전형적인 수도승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는 레코딩 전에 48시간 동안 피아노를 손에 대지도 않는다고 한다. 또 피아노에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더 좋은 음악을 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윌리엄처럼 이것 저것 들쑤시고 다녀야하는 수도승이다. 글렌 굴드가 라디오 다큐멘터리나 글쓰기,작곡등에 더 깊은 관심을 갖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그렇지만 그가 가장 잘한 것은 '피아니스트'였다.)  글렌 굴드 역시 피아노에 자기를 가두어 놓기에는 몸이 근질 근질 거렸을 게다. 간혹 TV에 나와서 웃음을 주시는 임동창 선생처럼 말이다. 임동창은 자신이 뭐하는 사람인가 물으면 "그냥 임동창이오"라고 답한다고 한다. (요즘은 빡빡머리 그보다 그의 아내가 더 유명해진 듯 하다)

글렌 굴드는 피아니스트이면서 피아노적인 음악을 싫어했다. 여기서 피아니노적인 음악이란 것은 -그는 낭만주의 음악을 주로 말하는데-'화성적'인 음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굴드 스스로 이에 대칭적인 의미로 '대위법적 음악가'라고 칭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그가  피아노를 위한 작곡가다로 할만한 '쇼팽, 슈만, 리스트" 를 싫어했던 것은 논리적 귀결상 당연해 보인다. 그는 이들 음악에 별다른 매력을 못느끼고 설령 녹음을 하더라도 통념을 벗어나는 해석을 보여주었다.(그의 쇼팽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물론 후기 낭만주의시대에 브루크너나 말러 같은 이들이 폴리포니에 대한 가능성을 확장한다. 하지만 그 시대는 '오케스트라의 시대'였다. 그 위대한 작곡가들은 피아노를 위한 곡에 그다지 애정을 쏟지 않았다. 결국 글렌 굴드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자신이 넘어서야 하는 도구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서 피아노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서 음악을 성취해 나아갔다. '피아노 음악' 을 포기하는 댓가로 '음악'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그도 좋아하는 작곡가들이 있다. '바흐-베토벤-리하르트 슈트라우스-쇤베르크' 등이다. 그에게 쇤베르크는 현대판 바흐였을 따름이고 20세기의 베토벤같은 경계인이었다. 현대음악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읽어 둘 만하다.( 단 내가 쇤베르크나 베베른에서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에 책 후반부에 나오는 글렌 굴드의 현대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제대로 이해했나 의심은 간다.)

글렌 굴드는 '경계선'에 서 있는 인간이었으며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다.

"나는 항상 '세기말적'인 사람에게, 한 시대의 마지막에 있으면서 그 작품 속에서 언뜻 대립된 두가지 경향을 화해시키는데 성공한 사람에게 생생한 애정을 품어 왔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테크닉적으로 가장 큰 애정을 품는 사람은 바흐지만 정신적으로는 올랜드 기번스' 라고 말한다. (글렌 굴드의 기번스/버드 음반은 아주 좋다.) 이는 자신의 '자아 이상'을 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역시 세기말 속에 살았던 음악가였다. 또한 하나의 이름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시대와의 소통'을 위해 '시대와의 단절' 을 자청하는 형용모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지성'과 '순수'라는 양발 엔진을 부착하고 차가운 겨울 하늘 나는 조종사와도 같았다. 아무도 선뜻 가보지 않았던 그 코발트 빛 고독 속에서 그는 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을까?  

글렌 굴드, 그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그는 살아서 음악가였으며 이제는 전설이 되어간다. 

첨언))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는 2부로 구성된 인터뷰집이다. 앞의 인터뷰는 실제 인터뷰 모음이고 2부는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편집된 실제 인터뷰이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글렌 굴드의 전기나 그를 다루는 글에서 몇 번 언급된 것들이다. 전기작가들도 결국 그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를 구성한 셈이었을테니까. 번역자는 음악전공자이다. 그러므로 글렌 굴드가 말하는 음악 이야기와 미학적인 부분에 대한 선이해는 어느 정도 믿어도 좋을 것 같다. 문제는 그의 국어이다. 좋은 번역은 기본적으로 외국어에 대한 이해와 충분한 국어능력이 필요하다. 하나만 갖추면 TRAS..라는 단어의 양방향적인 어원이 무색해지지 않는가? 원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고, 인터뷰 특성상 회화체로 중언부언 했을 가능성도 있다. 말이란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잠깐씩 첨삭도 하고 다른 단어들을 끼워넣기도 하고... 하지만 번역하지 않은 단어들도 있고( 예를 들어 굴드의 '퍼스펙티브'..한 단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퍼스펙티브'라면 최대근사치의 단어를 찾아야 한다.) 또 국문법에 어색한 문장들도 간혹 읽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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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14 14:21   좋아요 0 | URL
굴드에 관한 오스왈트(Ostwald)의 평전을 읽으며 그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간 너무 명성이 부풀려진 연주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요. 지금은 처음의 선입견을 많이 없애고 많은 피아니스트 가운데 독특한 존재로 그를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와 그의 연주를 좀 더 균형 있게 바라보기 위해 이 책도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여전히 그가 남긴 말들 가운데 몇몇은 전혀 수긍할 수 없지만요.)

드팀전 2008-11-14 18:00   좋아요 0 | URL
그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이 않을겝니다.굴드리언들을 빼놓고는요. 말씀 하신 대로 '독특한'피아니스트였지요. 그 독특함이 튀기위함이 아닌 음악과 사회와의 관계 내지는 미학에 대한 깊은 자기 사유에서 나왔고 또한 보편성을 얻을 수 있었다는데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굴드적인 미학관이 여전히 소수적인 가치로 평가받는 것은 여전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