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명환.김엘리사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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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군부의 최종 승인을 필요로 한다."  

뜬금없이 '왠 반동적인 발언인가?' 하는 의심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쪽에서는 군대를 없애자고 퍼포먼스를 하는 마당에 말이다. 그리고 '군정종식' 을 외치던 YS,DJ 도 대통령 한 번씩 다 해먹은 이 시대 이 땅에서 말이다.

먼저 이 말을 해명하기 위해 두 가지 전제를 이야기 해야 겠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요즘 유행하는 '문화혁명'이나 신비주의적인 '의식혁명'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혁명은 가끔 모든 혁명적 좌절을 '영속혁명'의 대의 아래서 '성공'으로 치장하는 신학적인 측면이 있다. 이것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대의를 잊지 않기 위한 전술로 효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여기서 '혁명'은 고전적 의미의 '정치 권력'의 전복이나 소유와 관련있는 '클래식한 의미의 혁명'이다. 두번 째로 이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산층 진보'의 '이데올로기적 과격성'을 잠시 덮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다. 추락의 낭떨어지에서 줄타기를 하는 다른 모든 중산층들 처럼. 그러므로 굳이 이를 폄하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단 '중산층 진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공중부양'으로 정치시키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의외로 모니터 상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실재보다 훨씬 당당하게 급진 좌파적이며 아나키스트적인 흥분을 많이 목격하곤 한다. 자기주장이 담는 내적 모순에 대한 이론적 성찰은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흥분파'는 한 줌의 '군부' 가 어찌 '혁명'의 위대한 기치를 좌우할 수 있느냐고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정초적 흥분' 만 정돈하고 본다면 이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부가 마지막 도장을 찍어 주어야 한다. 군부가 혁명 성패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귀에 거슬리게 들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혁명 세력들은 외부 무력에 상응하는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 혁명이다. 아니면 최소한 군부가 혁명적 시기에 중립 내지는 유보적 입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치명적으로 실패한 예가 바로 살바도르 아엔데의 칠레다. (칠레의 역사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아리엘 도르프만에게 '슬픈 칠레'는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작품들은 탯줄을 통해 다시 그 역사적인 칠레와 연결된다. 여정은 칠레라는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역사와 그 안의 사람들이라는 보편성 으로 승격된다. 대충 여기까지만 들어봐도 이 책이 요즘말로 'COOL' 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프라다를 입은 악마'도 등장하지 않고 '쇼퍼홀릭'들도 나오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TV화면을 통해 이미지로 소비되는 -수잔 손택식으로 말하자면- 고통받는 타인의 모습들이 모두 주인공이다. 첫번재 희곡 <과부들>에서는 남편과 자식을 군부에 빼앗기고 찍소리도 못하는 과부들이 나온다. <죽음과 소녀>는 성고문 피해자가 등장한다. <경계선 너머>에서는 하루 아침에 이산가족이 되는 노부부가 나오고 <연옥>은 입에 담기 힘든 범죄를 저지른 남녀가 무간지옥에서 들려주는 귀곡성이 흘러나온다.

나태한 현실을 고발하는 '리얼리즘'을 '진보'와 등치시키는 사람들은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겠냐만은-이런 읽을 거리에 관심을 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반쪽이다. 이 책은 '자연주의'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말은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형식 사이의 전통적인 미학관을 보여준다.

"실제 인간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므로 역사적인것이지만 동시에 직접적인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명하는 재현의 미학적,문법적 법칙을 따른다." 

이 희곡집에 등장하는 네 편의 희곡은 역사의 핏빛 강물 위에 떠 있다. 특히 아픈 역사로 점철된 한국민에게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글들이 한 자 한 자 우리들의 언어로 씌진 듯 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등장인물들이 많은 <과부들>은 아프카니스탄의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흙냄새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훨씬더 비의적이다. 검은 강물 사이로 떠오르는 사라진 사람들과 연속적인 사건들은 마치 스릴러를 보는 긴박감을 준다. 그러면서 인물들 사이의 다층적인 입장과 갈등들이 오래되 고성을 타고오르는 덩쿨처럼 뒤섞인다. 강물에 떠오른  한 구의 시체를 두고 그 안에서 모두 실종된 자기 가족의 얼굴을 읽어내는 장면은 묵뚝한 슬픔이 가진 보편성으로 독자까지 끌어들인다. 이 작품은 결국 한 편의 연극을 위한 대본임에도 읽고 나면 말없는 강물의 묵묵함처럼 대하드라마를 본 듯 한 느낌을 준다.

네 편의 희곡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또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은 역시 <죽음과 소녀>이다. <과부들>이 '쿠르릉 쿠르릉' 거리는 어두운 강물 소리를 계속 귓전에 남기면서 진행된다면 이 작품은 계속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의 제1 주제로 양 쪽 귀를 괴롭힌다. (그의 작품이 상당히 청각적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경계선 너머>는 포성으로 <연옥>은 소리가 없는 '무음'으로 청각적이다.) 이 작품<죽음과 소녀>는 94년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에이리언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를 기용하여 <진실>이란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영화 첫 장면과 끝장면에 공연장에서 슈베르트를 듣고 있는 시고니 위버가 나온다.

이 작품은 현실적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정녕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그냥 '정의로운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가 나쁜 놈들 입에서 진실을 말하게 하면 된다.' 라는 단순함으로는 이런 딜레마들을 헤쳐나갈 수 없다. 과거사 위원회로 뽑힌 운동경력이 있는 남편과 남편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문의 후유증을 안고 사는 여자, 그리고 정말 고문 협력자였는지, 아니면 아니었는지 끝까지 모호하게 남겨진 의사. 이들 세 명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진실'과 '정의' 그리고 '현실' 을 둘러싼 다층적인 양상을 목도하게 한다. 아내의 '사적복수론'과 그를 설득하려는 남편의 '역사 처벌론'은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대목들이다. 독자들은 아내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의 현실적 논리는 결코 외면할 수 없다. 마치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던지는 문제를 다시 재현하는 듯 하다. 결국 이들은 절충안을 찾는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가 과거의 수인이 되지 않고 어떻게 과거를 살아 있게 할 것인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진실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한가?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는 얼마나 죄죄를 짓고 있는가?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 중 가장 큰 딜레마는 ,민주적 안정을 만들어내는 국민적 합의를 깨지 않고 어떻게 이런 쟁점들과 씨름할 것인가? "

나는 아리엘 도르프만이 <죽음과 소녀>에서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그래. 이게 '정의야' 이렇게 하면 해결 돼. 나머지는 부차적이야" 라고 1분쯤 생각하고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명품족'만큼이나 혐오한다. 아니면 천재성에 질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소녀>에서의 문제 의식은 <연옥>으로 이어진다. <연옥>은 처음에 읽다보면 '뭐야..이게 어찌 되는거야' 라고 운전대를 어디로 잡아야하는지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은 아니지만 시공간도 모호하고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남녀가 서로 비켜가면서 이야기하는 부분들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건이 무엇인지를 앞선 작품들처럼 한 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 <연옥>은 정신병동의 하얀빛 처럼 환한 매력을 선보인다. 그리고 책을 다 덮고 나면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연옥>을 꼽을 수 밖에 없다. <연옥>은 정치사적 상흔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리엘 도르프만이 지속적으로 부여 잡고 있는 '진실과 화해 그리고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사이코드라마와도 같은 형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를 치유하는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본 사이코 드라마이다.)    

<연옥>의 배경은 말 그대로 '연옥'이다. 처음에는 이 배경조차 이해가 되지 않아서 허발질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배경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저 하얀 방이라고만 무대를 설정한다. 남녀는 일종의 '무간도'와도 같은 '연옥'에 와있는 것이다. 작가가 후기에 그곳이 단테적인 연옥이 아니라 불교적인 공간이라고 말한 것은 이 장소가 '윤회'를 준비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회'에 앞서 남녀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작가가 평소 즐겨찾는 주제를 풀어나갈 자리로 본 것이다. 주인공들은 서로를 심문하는 위치에서 '스스로의 정화'를 요구한다. '정화'되지 못하면 끝없이 이 '중음'의 공간에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  딱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어. 윤회는 끝이 날까?

여자: 네가 그녀를 치유할 수 있다면, 그럴거야.

 극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서로 뫼비우스띠처럼 얽힌다. 단순히 한 사람의 심문자가 피심문자가 되는 성질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로서 심문자가 되기도 그 반대역을 맡기도 한다. 이들은 서로가 연속되는 연할 속에서도 서로를 감추며, 속인다.

여자" 나는 너의 담당 사건이야. 너의 유일한 담당 사건이지, 내가 돌아가면, 너도 돌아가는 거야.내가 지워지면, 그들이 너도 지워버릴 걸.맞지?

 작가는 극의 끝으로 다가가면서 그들의 인격너머에 있는 그곳가지 서로 닿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중적인 심문/재판은 연기를 하는 자들의 인격을 붕괴시키고 그들의 자아를 가린 베일을 찢어버리는 방법이다."

나는 인간은 결코 그 지점까지 닿을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베일을 벗는 다는 것은 그걸 작동하는 또 하나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곳은 '공백'이다. 어떻게 '공백'을 언어로 밣혀낼 수 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자신에게나 타자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으나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작업이다. 어쨋거나 작가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에서 이 극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에게는 '소통'의 일종의 희망이다. '폭력과 공포와 배신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첫 단초는 '소통'으로 부터 찾아야 한다는 낙관적인 믿음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를 질문이라고 말한다.

"어제 우리에게 가해진 경악할 일들이 우리가 내일 다른 사람에게 저지르는 공포를 불러오는 이 때, 내가 희망하는 바는 적어도 이 희곡이 비난과 분노의 순환을 감히 어떻게 깨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매력적인 점 중에 하나는 각 편 마다 작품 속 인물들이 태어나는 산고와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문제 의식들을 작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혹 '이런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구나' 하는 지점을 작가의 입을 통해 만날 때는 정답을 맞추고 우쭐해진 소년같아진다. 그러나 내가 더 크게 위안을 받을 때는 가끔은 현실의 언어난수표 속에서 내가 언어로 형상화하지 못했거나, 차마 이해받지 못할 두려움에 말하지 못하는 질문들에 작가가 촉수를 뻗어있을 때, 나는 가끔 그럴 때 '외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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