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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은 없다 -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
박지향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에 대해 읽은 것은 사실 다른 목적에서이다. 실은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를 읽기 위한 정지작업이다. 스튜어트 홀의 책을 사두고 서가에서 잠시 대기시켜놓고 있었던 어느날, 우연히 동아TV에서 하는 <세기의 위대한 여성-대처>편을 보게되었다.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대처리즘'에 대해 상식적인 몇 가지 외에 별반 아는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다 아는 '작은 정부, 민영화, 노조 탄압, 포클랜드 전쟁' 정도가 내가 떠올리는 단어들의 전부였다. 결국 그 프로그램은 책 읽기의 순서를 살짝 바꾸었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원제목은 The Hard to Road to Renewal: Thatcherism and the Crisis of the Left-를 읽고 뭔가 새롭게 하려면 '대처리즘' 을 꼴보기 싫다고 통과시켜버려서는 곤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나는 시간에 덜 쫓긴다면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가 쓴 주요 저작들도 보고 싶다. 당신같은 좌파 끄트머리가 왠 하이에크냐구 ? ^^ 웃어야지 뭔 말이 필요하겠냐.)
'대처리즘'의 그림자 처럼 따라다니는 말이' 뉴 라이트'다.(한국의 뉴라이트도 결국 그 연원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대처리즘'을 '신자유주의'의 킥 오프 사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나는 가끔 '신자유주의 절망론'을 겪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신자유주의'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뚝 하고 떨어져서 앞으로도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공포의 괴물처럼 생각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니면 그 반대로 '신자유주의'에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공개화형 시키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보거나 말이다. 나는 두가지 생각 모두에 동의할 수 없다. 그건 대중적인 경제학 책 몇 권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처는 '대안은 없다'라고 말했지만, 불행히도 그 담론 역시 시대의 산물이고 역사와 함께 변해가는 무엇일 뿐이다. 좌파 학자인 마샬 버먼이 자주 인용하는 마르크스의 말을 떠올려보자. .... "모든 굳어진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 미국발 금융 위기를 두고 신자유주의의 몰락이니 뭐니 호들갑이다. 나는 그렇게 금융자본주의가 쉽사리 꼬리를 내릴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하지만 단 한가지 'There is no alternative' 라는 지배담론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희망의 단초쯤은 주리라고 생각한다.
대처리즘이 착종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전후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합의의 정치'시대가 있었기때문이다. 그 시대는 경제 사상으로 보자면 '케인즈주의의 시대' 이고 정치적으로 보자면 '변혁의 시대'였다. 대처가 이 시대에 축적된 모순들을 일거에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대처리즘'이고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다.
대처리즘의 핵심은 '시장 자유주의'와 '복고적 도덕주의' 이다. 그녀는 영국에서 사회주의의 잔재를 없애는 것에 정치인생을 걸었다.세계의 제국이던 영국이 전후 2등 국가가 된 것은 전적으로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정책과 그에 기본적으로 동의를 해 준 보수당의 태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잔재를 없애는 데 대처가 쓴 처방은 '자유방임주의'였다. 이를 통해 대처는 너덜 너덜 해진 '유니언 잭'을 다시 당당히 세우고자 했다. 대처는 기본적으로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자수성가한 사람이였고, '확신의 정치가'였다. 대처가 사회이념적으로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던 것은 근면,성실, 자존과 같은 영국적 보수가치를 회복하는 것 만이 국가의 보호아래 타락와 우유부단함으로 추락하고 있는 영국을 살리는 길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녀는 급진적인 보수이념을 가지고 영국 재건에 나선다. 그녀가 주창했던 것들은 '대처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상식책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것들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MB정권 하에서 하나씩 보여지고 있어서 신문을 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너무 똑같은 것들이어서 따로 적기가 귀찮을 정도다.
대처는 일단 시장의 복원을 외친다.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국가는 그런 기회만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이어서 규모의 민영화 작업이 벌어진다. 물론 국영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비효율성은 어떤 형태로든 관리되어야 한다. 대처는 과감한 매각과 통폐합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실업자수는 대폭으로 증가한다.) 대처는 흔히 말하는 기본적인 공공재의 개념조차 무너뜨릴 만큼 과감한 민영화를 시도했다. 수돗물의 민영화도 대처시대에 나온말이다. 철도 민영화는 대처 시기에 토대를 닦고 메이어 시대에 이루어졌다. 대처에게 '노조'는 '무찔러야할 적'이었다. 대처 집권기에 중대한 싸움이었던 광산노조와의 싸움에서 대처는 '철의 여인'의 이미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그녀는 기마경찰까지 동원해서 광산노조를 제압한다. 사석에서 '어떻게 세금을 내는 국민에게 기마경찰을 보낼 수 있소이까? 라는 질문에 대처는 더 당당히 '다음번에는 탱크를 보내려고 했습니다.'라고 맞선 일화는 유명하다. 대처는 대학 교수들과 공영방송 BBC를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객관성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책에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MB정권이 한국의 공영방송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과 유사하다.)
대처의 혁명적 목표는 단지 시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대처는 기본적으로 의식혁명까지를 염두에 두었다. 좌편향적인 영국의 전통을 우향우 시키는 것말이다. 대처는 여기에 대중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섞는다. 임대 주택의 판매, 민영화한 공기업 주식에 대한 참여, 소득세의 감면등을 통해 '계급'의 개념을 '소비'의 개념으로 바꾸어 버린다. 즉 모두가 쁘띠 브루주아가 되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동계급 중 다수가 주식을 소유하고, 경기 회복과 더불어 생활수준이 나아진다. 대처 임기 말기에는 전통적인 계급 투표가 상당시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비율상으로는 계급투표율이 높기는 하지만 유의미한 변화인 것은 사실이다.
이 책에는 대처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한다. 개인적으로 대처가 임기말로 갈 수록 제왕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상의 특성을 보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국 대처를 보수당 내부에서 내치게된 결과를 낳았다는 것 등을 말한다. 또한 소득세의 감면등으로 상징되는-현재 종부세 인하를 떠올리는- 대처의 경제정책들이 빈부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점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 지점에 시선을 하나만 꼽아 넣어도 책 몇 권이 나올만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극심한 빈부격차의 발생 아니던가? 저자는 물론 간략하게 이부분을 짚고 넘어간다. (처음부터 이 저자의 이념적 지향을 알고 있기때문에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성 싶다.) 이런 부분들은 자주 등장한다. 포틀랜드 전쟁 부분을 살펴보자. 포클랜드 전쟁은 보수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이가 많았던 사건이다. (우리나라 독도의 주권문제와는 엄청나게 다르다.) 아르헨티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영국 함대가 출동한다. 이 섬은 영국에서 1만3천 KM떨어져 있고 아르헨티나로부터는 480KM 떨어져 있는 영국인들도 잘 모르는 그런 섬이었다. 영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그 섬의 영국계 주민들에게 아르헨티나와의 동화책을 권장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의 군비절감 목적으로 남대서양 함선이 물러남에 따라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국내 정치적 목적의 침공을 감행한다. 외교적 채널을 더 가동해보자는 일각의 의견은 뒤로 하고 대처는 함대를 급파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챙취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것은 '영웅적인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평가한다. 그 전쟁에서 255명이 죽고 777명이 부상당했다.또 아르헨티나 측은 650명이 죽었다. 대처의 '영웅적인 행동' 때문에 말이다. '철의 여인' '전사 여왕' 대처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죽었어야 할 지는 의문으로 남겨두자. 저자는 결과적으로 대처의 '가장 멋진 순간'으로 평가한다. 과연 그것이 '가장 멋진 순간'일 수 있을까?
책의 저자는 마지막에 '우리에게 대처는 언제나타날 것인가?' 라며 한국판 대처의 출현을 염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대처는 필요하지 않다. 대처의 영국과 현재의 한국은 억지로 짜맞추고 싶겠지만 두 나라는 논의의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지난 시절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한다.마치 대처가 '합의의 시대'를 척결해야할 사회주의 시대라고 말하며 칼을 간 건 처럼 말이다. 당시 영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케인즈-베버리지 모델이 공론으로 모아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황인가? 노조 가입률이 10%수준인 나라가 노조가 정치를 좌우하는 나라라고 말한 과거 영국과 비교될 수 있을까? 계급 정당의 역사가 수백년이 된 나라와 이제 꼬리를 감추며 계급정당임을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을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주의 종주국'과 아직도 식민지의 영향력이 잔존하는 나라가 같은 나라일까? 거기에 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대처가 주장하는 '도덕' 조차 없다. 아마 한국의 보수주의자가 먼자 도래를 기대해야 할 것은 '대처'라기 보다는 '도덕'일지도 모른다.
대처가 실업자 수의 폭동임계점 수준까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변혁을 위한 성장통이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 사회에 축적되어 있는 사회안전망의 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사회적 안전망은 멸치잡은 그물처럼 촘촘한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최소한 고래정도는 막아야 하지 않아야 그물 아닌가? 그런데 한국의 앞바다에는 널널한 그물 피해 떠다니는 고래들이 물반 고래반이라고 한다. 대처가 '이제는 개인이 개인을 구제해야한다' 라고 말할 때 한국은 해방 이후 부터 계속 '개인이 개인이나 가족이 구제'해 왔다. 오죽하면 아이들까지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노래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대처'를 염원하는 것은 도대체 앞뒤를 제고 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하기사 대처 역시 '살놈 살고 죽는 놈이야 어쩔 수 있나' 하는 식이었으니 별로 신경쓰일게 없을 것이다. 그런 걸 '시장 자유주의'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야만적 자본주의' 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언젠가는 우리 역사에도 대처같은 이가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진정 더 필요한 것은 먼 훗날 말을 타고 나올 대처 같은 이가 비판해야할 '대처의 적들' 아니겠는가? 비루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실업자들을 구제하고, 비정규직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을 제도적으로 방어하고, 노인이나 장애인들에게 삶을 이어갈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이라는 무한경쟁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낙오한 사람들을 품어낼 수 있는 그런 지도자 말이다.
이 책에서 -아마 스튜어트 홀도 그런 의미였겠지만- 내가 읽고 싶었던 것은 대처리즘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한국이 처한 현실이 흘러가는 방향을 미루어 짐작하고 그에 대한 좌파진영의 대처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대처가 적들을 어떻게 자신의 상승요인으로 활용하는지,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의 전술, 대중 정서의 어떤 맥락들을 짚어내는지 하는 점들은 한국의 진보진영도 타산지석해야할 부분이 많다. 한가지 책에서 좀 아쉬운 것은 포틀랜드나 광부노조파업,인두세,유럽연합 문제등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까지 들어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대처리즘의 몇 가지 기본 아이템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그런 고찰들이 더 책을 풍부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