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에카테리나 궁전이란다.

차를 지하주차장에 넣지 않아서였을까?  운전대에 손이 얼어붙는지 알았다. 그다지 춥지도 않았건만 마음 속의 냉기가 손끝을 운전대보다 더 차게 만들었나 보다.

냉냉한 출근길. 심란한 마음으로 또 한 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마음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진단한 현재 내 가장 커다란 문제다.

불가의 코끼리를 비유하자면.. 지금 내 마음 속에는 미친 코끼리가 날뛰고 있다. 

"마음의 코끼리가 풀어지면/ 무간지옥의 해를 입히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미친 코끼리도/ 이만큼 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라디오를 틀었다.

하차투리안의 <가면무도회> 중 왈츠가 흘러나왔다. 유명한 곡이고 나 역시 좋아하는 음악이다.일주일 정도 겨울 속으로 여행을 다니고 싶다. 불가능하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더 강렬한 법이다. 그리고 그 고통 역시.

러시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국내 항공사가 러시아 취항을 홍보하면서 광고음악으로 이 곡을 쓴 적이 있어서 더 그랬을지도

 '엑설런트 인 플라잇'

최근에 이 곡은 빙상장에서 들을 수 있다. 김연아는 쇼트프로그램에서 생상의 곡을 쓰고 있고 프리프로그램에서는 림스키코르샤코프를 쓴다. 그녀의 라이벌 아사다 미호는 하차투리안을 쓴다. 나 역시 김연아를 응원하긴 하지만 사실 그 둘의 연기를 더 응원한다. 맞수가 있다는 것은 관객에게 더 큰 재미를 준다. 어설픈 스포츠 애국주의에 휩쓸리지만 않는다면 최선을 다한 두 열정의 연기를 100% 즐길 수 있다. 

오늘은 하루 종일 하차투리안의 왈츠가 내 귀신송이 될 듯 하다.

 

 아사다 미오의 프리

 

 

김연아의 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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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황홀 - 보이는 것의 매혹, 그 탄생과 변주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눈의 황홀>에 자극 받아서 두 편의 영화를 봤다.그리고 LP 한 장의 기억을 떠올렸다.

첫번째 영화는 <브이 포 벤데타>이다. 영화에는 독재자의 상징이 등장한다. 검은 바탕에 붉은 '로렌의 십자가'.크리스마스 씰에 있는 전봇대 같은 십자가라 생각하면 된다. 책의 저자 마쓰다 유키마사는 영화 속의 이 상징이 나치의 그것만큼 강렬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유는 나치의 하겐크로이츠는 나선형의 운동감을 고양하고 있고 있는 데 반해 영화 속에서는 그런 이미지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나치에게 중요한 것은 '상승을 향한 운동감' 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지보다는 메시지의 현재성때문에 마음에 남는다. 특히 주인공 V의 대사( V는  종종  세익스피어의 대사들도 매력적으로 인용한다.<멕베드>,<십이야> 등) 들이다.

"가장 큰 잘못은 정부이고 댓가를 치룰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 것은 여러분입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두려웠던 거죠. 전쟁,테러, 질병....수 많은 문제가 연쇄작용을 일으켜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켰죠....공평함, 정의, 자유가 단순한 단어가 아니며 관점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요."  

V가 앵무새 국영방송국을 점령하여 방송한 내용이다. 

또 하나의 영화는 개봉 중인 작품이었다. 타셈 싱의 <더 폴>이다. 나는 이 영화의 예고를 보고 과거에 본 영화를 떠올렸다. 제니퍼 로페즈가 나왔던 <더 쉘>이다. 미장센과 영상미학에 유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 알아봤더니 같은 감독의 작품이었다. 속길 잘하는 눈이지만 늘 그런 것 만은 아닌 듯 하다. <더 폴>의 스토리는 별 볼일 없다. 영화는 정말 색의 즐거움에 봉사하는 작품이다. 색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음을 글로 표현하는 것 만큼 난감하다. 특히 타셈 싱의 영화의 색은 원초적인 색의 충돌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영화는 별로 일지 모르지만 그 색을 보기 위해서 컴퓨터나 DVD로 봐서 곤란한 영화다.

 마쓰다 유키마사의 <눈의 황홀>은 백과사전 같은 황홀함을 준다. 책의 디자인 부터가 범상치 않다. 책의 옆면 (책의 배)를 48미리정도 펼쳤을 때 좌우로 나타나는 인물이 다르다. 서점에서 봤을 때부터 눈길을 사로 잡았다. 책의 배라는 단어도 사실 처음 알았을 뿐 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책 중에서 책의 배에 그림을 집어 넣은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물론 어린 시절 교과서나 참고서에는 이름도 써놓고는 했다.그걸 아직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 <눈의 황홀>이라는 것은 출판사가 정한 제목인데 원제목은 <기원의 이야기, 디자인의 시선>이다. 일본어 제목이 책의 내용에 비중을 둔 것이라면 우리의 책제목은 책의 이미지에 더 높은 비중을 둔 것이다. 작가가 디자이너 출신이고 이 책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기원과 변화' 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제목도 나쁘지 않다. 

책은 우리가 흔히들 '상징'이나 '표시' 또는 '디자인 패턴' 등으로 알고 있는 시각적인 결과물들의 역사를 계보적으로 쫓아가 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런 '시각물'들은 자연발생적인 것도 있고, 문화적인 것들도 있다. 저자는 이런 시각 이미지들이 다른 이미지가 더해짐으로써 팽창하기도 하고 의미가 역전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몽상'이라는 개념으로 말하려고 한다. 여기서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개념인 '오브제'나 '레디 메이드'같은 것들도 '몽상'의 이름으로 설명된다.

앞서 말했듯이 <눈의 황홀>은 백과사전같은 느낌을 준다. 이 말은 다양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주제와 정보들이 눈을 어지럽히기도 한다는 말이다. 책은 '쌍'이라는 관념, '속도와 시각의 변화', '직선과 사각형의 탄생', '반전하는 이미지들', '섞는다는 행위',' 가둔다는 것' '오브제' 등 시각문화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종횡무진 펼친다.

특히 저자는 '근대의 시각'의 기원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근대의 시각'은 또한 현재 우리들의 시각문화의 기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된 철도 문화에 대해 저자가 여러번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연원에서 이다. 이 책에는 빅토르 위고의 편지가 인용된다. 위고가 기차 차장을 통해 본 것을 묘사한 장면이다. "밭 언저리에 핀 꽃은 이미 꽃이 아니라 색채의 반점, 아니 오히려 빨갛고 하얀 띠일 뿐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근대적 '추상'의 한 예로 발견한다. 이 근대적 추상의 극단에서 저자는 유명한 밀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인용한다. 저자의 시각은 기술문명의 발전과 함께 달라지는 시각의 철학에 주목한다. 다시 한번 철도를 이야기 하자. 철도는 자연에 없는 직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철도의 속도는 추상을 만들어 낸다. 속도는 폭력을 동반한다. 속도는 '자기를 잃는 것'이라는 폴 바릴리오의 말을 통해 저자는 시각 문화의 변화와 함께 근대성의 문제를 넌지시 독자에게 던진다. 바릴리오는 "파시즘이 전체주의였던 것은 철두철미하게 속도 체제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빠른 속도에 의탁할 수 밖에 없는 속도의 시대는 사실 모든 것을 추상화 해버린 시대인 셈이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 클럽>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민들레를 구경하기 위해 야구공 찾기를 포기한 아마추어 선수' 다. 속도의 추상에서 민들레 꽃 잎 하나 하나에 시선을 두기 위해서 우리는 근대의 '속도 강박'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다. 걸으면 우리는 다른 것을 본다.또 멈추면 우리는 다른 것을 본다. 그것은 '볼 견'을 넘어서 '볼 관'이 되는 것이다. '응시'가 되는 것인 셈이다. 

이 책 <눈의 황홀>은 마치 오래된 창고에 쌓아둔 물건을 뒤적이는 즐거움을 준다. 언제 거기 있었는지 모르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는 기쁨 같은 것 말이다. 저자의 시각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인문학적 사고의 든든함은 지적인 포만감 같은 것을 준다. (배부른 자의 불만처럼 나는 이 '포만감'에서 오히려 일종의 '결핍감'을 느낀다.) 서양의 수직문화와 대비되는 일본의 수평문화, 원근법과 일신론이야기, 메르카토르도법과 중국의 우주관, 스트라이프의 변천사, 앙상블라주와 섞는 것의 역사, 책의 글자체를 둘러싼 논쟁들, 변형을 뜻하는 '데모르메'이야기...무궁무진하다. 미술사에서 한 번쯤 접해본 내용들일 수 있지만 다채로움으로 인해 충분히 그 약점을 상쇄한다.

포만감 속에 약간 부족한 탄닌이 끝까지 아쉽기 하다. 하지만 책의 기획, 참신한 디자인, 잘 배치된 사진, 동서양 문화의 비교, 흥미를 끌만한 시각 정보의 역사들을 생각해보면 'Well-made book' 이다.  책에 대한 자긍심과 고집으로 한 해 한 권씩만 만들어 낸다는 저자 일인 출판사의 철학 역시 후광효과를 발휘한다.  

 이제 <눈의 황홀>이 건넨 문제의 LP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할 때이다. 이 책에는 레드 제플린의 앨범 <프레즌스>에 나오는 오브제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이 오브제는 나를 잠깐 미치게 했다. 내가 레드 제플린의 앨범을 사모으기 시작한 것은 고1때 쯤이었다. 비록 오래된 일이지만 나는 그 앨범에서 오벨리스크풍의 네모난 기둥을 본 적이 없다.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창고 속에 봉해져 있는 박스를 뜯어서 확인해야 하나?  결국 그런 번잡한 과정을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약간은 비겁하며서도 설득력 있는 가설로 이런 불편함을 잠시 미봉해 두었다. 옛날에 라이센스 음반을 낼 때는 앨범 자켓이 공륜에 의해서 수정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오지 오스본의 2집<diary of mad man>음반 LP에는 원래 있는 피흘리는 오스본이 없다. 레드 제플린의 5집 음반<house of the holly>만 해도 아이들이 옷벗고 신전을 기어가는 사진은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미봉책은 사실 만족스럽지 못하다.

"내 기억이 맞아서 만약 검은 기둥이 앨범에 없었다면 도대체 왜 그걸 지웠을까?". 다시 질문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 그 앨범 자켓이 그 기둥이 있었던가"

눈은 믿음직 하지 못한 동료이며 기억은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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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최승호, 대설주의보, 민음사, 199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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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한 해다. 과거형으로 말할 수 없어서 더 없이 그렇다. '대설주의보'로 인해 이름 없는 산골이나 쓸쓸한 섬 마을에 한 동안 갖혀있고 싶다.

 인간을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아 넣는 것은 '인간의 죄업'가 아니라 '실수' 라는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리스 서사시에 나타난 운명론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 나에게 벌어지는 일들로 사실 그 싹이 오래전부터 싹터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한 '실수' 에 대한 일련의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과율로만 보자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피치 못하게 전선의 앞 쪽에 놓여지고 있다. 아니 전선이 나를 손짓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전에 들리는 것은 귀청을 찢는 반복적인 포성이다. 가장 좋은 길은 양손으로 포성을 막는 것이다. 아니 최소한 안들리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묵묵히 밥을 하고 식기를 닦고 매일 같이 성경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타고 나기를 그렇게 타고 나질 못했다. 세상의 정치사회적 흐름은 은유법으로가 아니라 직설 화법으로 나를 조인다.  

언젠가 실용서적에서 '운'을 불러들이는 방법 중에 '나쁜 생각은 그 단어조차 하지 말라' 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러니까 '혹시' '행여' 이런 생각들은 결국 '부정'을 하더라도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는 마음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그것을 지키지 않았기때문일지도 모른다.

공장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공장'은 아주 넓은 개념이고 이 바닥에서 즐겨쓰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월급쟁이이고 또 노동자이지만, 맑스적 의미에서 '소외된 노동자' 는 아니다. 그나마.. 즉 비물질 노동자다.  하지만 올 한해 나는 공장 노동자가 되라는 말을 수 없이 들으면서 견디어왔다. 그것은 일종의 '직업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며 또 '삶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모두 '생존 위기론' 속에 파묻힌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이라는 금칙 앞에 다른 모든 가치는 무릎을 꿇거나 과거의 나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받는다.

주변에는 이런 정체성은 개나발이라고 믿으며, 개인의 욕심만 채워가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에 당연히 그럴싸한 시대론과 허위론이 자신의 욕망을 포장한다. 그런 인간들은 사태가 호기일때는 무임승차로 편승하며 위기일때는 결정적으로 버스가 곤두박질치도록 바퀴에 흠집을 내는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본인들은 그저 조금만 축재한 것이라고, 조금만 이기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뿐이다. 사실 내가 있는 이 조직은 도의적으로 없어져야 할 것에 가깝다. 원래 목적이 그 가치를 잃은지 오래다. 이제 남은 것은 허황된 슬로건과 조직원들의 생존을 위한 이기, 그리고 권력의 지속을 위한 상층부의 욕망이 회오리처럼 결합된 변종의 것들이다.

한 해동안 아기가 크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 했던 날도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부서지는 모래성의 꼭대기 서서에서 매일 매일 발 밑을 침식하는 검은 파도를 바라보는 심정의 나날들 속에 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해방을 위한 '자기구타' 에서 멈칫거리고 있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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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비전 1 - 서구 정치사상사에서의 지속과 혁신 정치와 비전 1
셸던 월린 지음, 공진성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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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광우병'과 별로 상관이 없다. 아이들의 작은 손에까지 '미친 소를 먹고 싶지 않아요'라는 피켓이 들려진데는 광우병이 도화선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뒤늦게 광우병의 의학적 위험성에 대해 따져보고 '촛불'과 연결시키는 것은 죽은 아이 고추 만지는 짓이다.(물론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 )  '촛불'은 초기 단계에서 '광우병의 과학적 증거'라는 -사실은 공학적이란 말을 쓰고 싶다.-틀거리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그것은 현 정부의 '정치의 부재' 상황에 대하여 대중이 '정치적 인 것' 으로 대항한 것이다. 촛불의 전개 과정에서 보여준 -앞으로도 지속될- 이명박의 결정적 한계는 언제나 정세 파악에 둔하다는 것이다. 시장 가서 배추 파는 아줌마와 눈물의 포옹을 한다고 정세 파악이 되는게 아니다. 한국민에게는 불행하게도 대통령의'정치철학' 이란게 밑바닥 수준이다 보니 배멀미는 기본이고 난파 상황까지 걱정해야 한다. 그의 정치적 좌우명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자'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그의 자세도 촛불때와 거의 유사하다. 

앞서서 '촛불'을 '정치적인 것'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요즘 말이 많은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 말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칼 슈미트의 말을 끌어오자면 '정치적인 것'이란 인간 존재의 근원적 특징이며 '갈등과 적대'의 개념이다. 최근에 내한한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을 창조해 가는 무엇으로 전제한다. 그러면서 본래의 정치를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정치와 비전>의 저자 셀던 월린에게도 '정치적인 것'이라는 주제는 책의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그렇지만 월린은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정치적인가?' '주어진 행위나 상황을 정치적이라 부르려면 그것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가?' 라는 질문들을 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윤곽을 말한다. 그렇지만 정확한 대답은 없다. 월린은 '무엇이 정치적인가를 보존하는 작업이 어렵다. 는 것이 이 책의 기본주제라면서 독자의 분발을 유도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에 대해 몇 가지 기본적인 전제들을 제공하기는 한다. 먼저 '정치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대해 갖는 관계'이다. 예를 들어 '권위' 라는 정치적 용어가 있다고 하자. 이 용어는 개념적으로 혼재되어 사용된다. '아버지의 권위', '통치자의 권위' 등등... '정치적인 것'을 말할때 '아버지의 권위' 는 분명히 공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사적인 개념이다.(사적 권위가 또 어떻게 정치적으로 구성될 수 있나는 다른 문제이다.) '정치적인' 권위는 그것이 공통의 속성에서 고려된 사회의 이름으로 표명된다는 의미에서 다른 형태의 권위와 구분된다.  '공통된 것'은 또한 유동적이며 '교차적'이기도 하다.저자가 정치철학의 범주를 다루는 부분은 유비한다면 '정치적인 것'의 개념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정치철학의 범주를 바라보는 월린의 관점은 '연속성'과 '유동성'이다. 정치철학은 어떤 천재 하나가 발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물줄기에서 '재발견'한다. 저자는 구체적인 정치사상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서구 정치사상의 전통이 두가지 모순된 경향을 드러내왔다고 말한다. 하나는 과거로의 무한한 회귀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누적의 경향이다.  이런 '지속과 누적 경향' 속에서 정치철학의 범주는 유동성을 갖는다. 즉 그 경계의 다층적인 침투로 인해 불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고전시대의 정치는 '선'이라는 지고의 가치에 대한 위상이 중요한 문제였다면 근대의 정치에서는 '경제'의 문제가 정치철학의 내파에 직접적인 자극이 된다.

셀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의 1장에서는 이런 서양정치사에서 드러난 정치철학과 정치의 추상적이며 개괄적인 설명이 돋보인다. 대중들은 읽기를 싫어하지만 정치철학의 이론화가 갖는 의미와 그 효용성, 정치 사상의 전통과 혁신,정치철학과 정치이론사이의 관계 등등. 1장에서 거론하는 주제 하나 하나가 모두 숨이 가쁠만큼 거대한 것들이며,또 기본적인 것들이다. 원래 짧은 질문들이 훨씬 어렵우며 긴 대답이 필요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그런면에서 정치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1장을 수시로 곱씹어 보라고 제안하는 역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렇다면 수 천년의 서구 정치사상사를 한 타래로 묶는 저자의 이론적 줄자는 무엇일까? 저자는 서구정치사를 '정치적 혼돈으로 부터 정치적 우주'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정치체계는 '질서'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인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와 '철인'을 통해, 중세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교황의 권위'를 통해 그러기를 원했다. 저자는 정치철학의 주제가 대체로 이렇게 정치를 질서의 요구와 양립할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저자는 1장 '비전과 상상력' 장에서 대상과 사건에 대한 기술적 설명으로의 비전과 달리 '상상적인 것'으로의 비전을 제시한다. 정치 사상가들은 이런 상상력이 이론의 필수적 요소로 믿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론가들이 역사를 초월하고자 할 때 쓰는 요소였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삶을 상상적으로 재질서화하는 것이었다. '비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월린은 '운동의 정치'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그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 공격하면서 '도전과 반응'이라는 정치사의 연속성 속에 '운동적 참여'에 높은 가치를 둔다. 그를 규정하는 한 단어로 '참여의 정치철학자'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성 싶다. 여기서 역자의 후기에도 나오는 '버클리와 시카고학파'의 차이가 드러나는 듯 하다. 셀던 월린은 '참여민주주의' 지향적인 버클리파의 주도자였다. 경제학에서 시카고는 밀턴 프리드만의 통화주의로 이름높다. 정치학에서도 시카고의 학품은 버클리와의 비교를 통해 이해되는 정도다. '운동의 정치'에 조금은 비관적인 최장집이 시카고대학 출신이란 것은 안다. 그것이 서로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추상적이며 개념적인 1장을 끝으로 <정치와 비전>은 익숙한 순서에 의해 서구정치사상을 따라 간다. 연대기적 구성이긴 하지만 학자들의 정치철학을 하나씩 집어서 입어 넣어주는 스타일은 아니다. 각 시대의 중요한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어떤 이론적 함의와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앞서 강조한 일련의 '연속성과 비전'의 차원에서 수 천 년 역사의 정처철학사에서 중요한 지점에 새롭게 구성되어지는 정치이론의 지형도를 그려내고 있다.

<정치와 비전>을 읽다보면 어떤 흐름의 단절성 같은 것을 느끼기 어렵다. 그 점이 커다란 장점이다. 연속성에 대한 저자의 철학과 함께 이행기-저자는 그런 말을 쓰지 않았지만-에 대한 배려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서구정치사상사의 시작은 플라톤으로 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플라톤을 정치철학의 아버지의 위치에 올려놓으면서도 또한 정치를 철학에 종속되게 만든 것으로도 본다. 몇 가지 문제점들이 제기되는데 저자는 플라톤 철학의 중추적 약점으로 정치적인 것의 관념과 정치의 관념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본다. 쉽게 말하면 '선의 이데아'에 대한 복종은 '조정'이라는 의미의 '정치'와는 별로 상관없는 개념이다. 흔히들 플라톤을 말한때 '절대권력'에 대한 옹호자 정도로 취급하는 논점이 지난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물론 월린 역시 플라톤이 '사심없는 절대권력'이라는 쟁점적인 문제를 던져놓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모델은 먼 미래에 레닌의 '사심없는 혁명엘리트'로 이어진다.월린은 플라톤의 철학자가 공동체의 선과 참주정의 방지라는 현실적인 목적에서 나온 것임을 말한다. 그렇지만 너무도 빨리 플라톤의 철학은 비판에 직면한다.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의 능동적 통치집단과 수동적 공동체 사이의 경계를 비판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의 일원성이 아니라 선의 다원성이라는 측면에서 시민의 입법적 기능과 개인의 권리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정치와 비전>의 1권은 고대 정치철학을 다루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하여 근대 정치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에서 마무리된다. 애써 근대적 이성의 특징이라는 구획짓기를 통해 구분해 보면 책의 구성은 이런 셈이다.

1) 고대 시기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2) 제국의 시기 : 스토아  3) 중세 시기: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퀼라스 5) 종교 개혁의 시기 : 루터와 칼빈.

흥미로운 시각은 제국의 시기와 종교 개혁의 시기이다. 독립적으로 긴 시점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이행기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특히 셀던 월린은 제국의 시기를 서구정치철학사의 암흑기로 꼽는다. 흔히들 중세를 사회적으로 암흑기라고 보는 관점(이것도 최근에는 수정되고 있다.)과 다르다. 스토아학파의 탈정치적 이론들은 우주론적인 질서 속에 정치를 깡그리 말아넣고 말아버렸다는 것이다. 월린은 아예 이렇게 말한다 "가공할 만한 권력 앞에서 철학의 자랑스런 전통은 비굴한 무력감으로 추락했다." 정치와 영성의 문제를 혼돈하여 상호 침투시켜 버리는 초월적인 뉴에이지적 흐름에 대한 수 천 년전의 예로 보아도 될 법하다. (솔직히 내가 너무 자주 이야기해서 스스로도 지겹다. 네그리의 말처럼 다시 '제국'의 시대가 오고 있는 증거 같기도하다.) 월린은 폴리스의 쇠퇴가 정치사상의 분석단위를 없앴으며 삶의 비정치적 성격에 집중하면서 정치사상이라고 통용된 것 역시 비정치적이며 도덕철학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중세의 초기 기독교는 이런 망해버린 정치철학을 복원한다. 물론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와 '교황'이 있었다. 오히려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학을 세속에 설명하는 과정에서 고대철학의 정치철학 전통을 이용하게 된다. 그러면서 정치철학의 전통들을 지속시켜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모델은 상당부분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유사하며 일신론은 신과 그의 대리인 교황의 절대권과 연결된다. 아우쿠스티누스와 아퀼라스의 교회-사회에 대한 정체성, 신학론등은 나름대로 논리적 흐름이 있기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만하다.

셀던 월린이 루터와 칼빈에 대해 큰 분량은 아니지만 한 장을 할애했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흔히 근대정치학의 시작을 마키아벨리로부터 찾기 때문에 <군주론>부터 읽는다. 그런데 특정한 관점에서 -이것은 대중들의 참여관점이다- 마키아벨리나 홉스가 가지고 있지 못한 부분을 루터와 칼빈이 보여준다고 제기한다. 전자는 모두 소수의 정치입안자들에 대한 제안자들이었다. 반면 루터와 칼빈은 급진적 정치철학의 아이디어를 대중소구한 행동가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까지 나온다. "홉스는 가망 없이 고전적이었고, 루터는 불길하게도 근대적이었다. "저자는 루터를 중세 교회 권력으로부터의 정치 사회로의 탈출을 목적으로 했던 급진적 평등주의자도 본다. 그런데 교회로부터의 저항은 당연히 정치권력에 지나친 기대를 낳게 된다. 즉 과거 교회 질서의 척결이라는 이름으로 좌편향성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는 한계를 갖는다. 칼빈은 '질서'의 이름이 교회와 정치 사이에 공통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가치하에서 이 둘 사이의 미묘한 결합을 시도한다. 칼빈의 몇가지 이론들은 이런 조화에 대한 신학적 답변들이다. 칼빈은 교회 질서와 정치 질서를 모두 독립되게 인정했으며 루터와 달리 공동체의 자율에 대해 반대했다. 여기서 월린은 칼빈의 이념 속에서 이성과 정치절 삶 사이의 연관성을 읽어낸다. 즉 이성이 정치적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이게 뭐 대단한가 싶다면 타임머신을 타 보든가..) 이것은 이성과 정치간의 고전적 관계의 복원인셈이다. 기독교가 '신국'의 이름으로 포기했던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상이 다시 등장한다. 물론 칼빈 역시 교회(프로테스탄트)에 우위를 두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정치와 비전>은 사실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다. 첫 판이 1960년대 나왔으니 말이다. 구판은 홉스를 거쳐 자유민주주의와 조직이론이라는 장에서 끝이 난다. 월린은 현재의 증보판을 내면서 새로운 장을 추가한다. 니체와 마르크스를 추가하고 탈근대민주주의까지 이야기를 끌어온다. 마르크스는 경제라는 관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니체는 전체주의와 탈근대의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밝힌다. 원래 이 책은 첫번째 판가 추가판으로 해서 두 권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번역판은 3권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중 1권 만이 번역된 셈이다. 그러니 아직 추가 증보판에서 월린이 다루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지금으로서는 목차와 월린의 증보판 서문을 통해서 그 맥락을 짚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월린은 초판과 다른 위치에서 증보판을 썼다고 밝힌다. 냉전이라는 '삶권력적'상태에서 정치철학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그리고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지배하에서 어떤 관계들이 형서되는지를 말한다고 한다.  미국을 이념형으로서 '전도된 전체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또한 서문은 새로운 세기의 단절을 탈근대적 권력으로의 이행으로 읽으면서 제국과 정복을 대신하는 '우세'라는 개념을 통해 합의와 지배 반복하는 과정을 쫓는다고 말한다.

어떤 결론을 쓸 까 하다가...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런 책은 공부하는 이들을 제외하곤 많이들 읽지 않으려할테니,이런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해야겠다.' 그러다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생각났다. 흔히들 이책을 '군주에게 아부하고 권력을 위해 잔인한 짓도 불사해야 한다는 비도덕적 책'이라 말한다.(맞는 말이다. 모든 핵심이 다들어 있다. 군주,권력,정치방법론,도덕의 문제..)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궁금해지는 것이다. '왜 그런 모진 책이 교양 목록에 들어가 있는지, 왜 그게 근대정치철학의 첫 번째 교과서인지?' 이런 긴장의 가장 간단한 원인은 '맥락'의 결여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맥락'을 위해서 '정치철학사'를 뒤적여야만 한다. 셀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은 공동체를 위한 참여의 건강성에 대한 긍정과 정치사의 맥락을 모두 짚어주는 훌륭한 책이다. 2권과 3권이 빠른 시일내에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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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12-10 12:05   좋아요 0 | URL
로쟈님과 함께 양질의 책을 훑어주시는 드팀전 님의 서재에 자꾸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저와 코드가 딱 맞아서 그런지 드팀전 님이 추천해주신 책을 자꾸 사보고 읽게 됩니다. ㅎㅎ

결론에서 마키아벨리를 말씀하셨는데, 마키아벨리와 한비자를 비교해서 읽고 싶은 욕구가 치미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승주나무 올림^^

드팀전 2008-12-11 10:13   좋아요 0 | URL
한 해가 다가고 있군요. 코드가 맞나요 ?^^ ㅋㅋ 글쎄..그건 두고 보죠.저 역시 좋은 리뷰에 늘 감사드립니다.

마립간 2008-12-18 23:29   좋아요 0 | URL
왜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을까요?

드팀전 2008-12-20 01:31   좋아요 0 | URL
^^ 정말 궁금하신건가요?
정치는 그리고 선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게임이라는 것만 말씀드리지요.
대중정당의 권력순환론부터 10가지도 넘게 그 이유를 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저보다는 <창비>,<황해문화>,<비평>같은 계간지들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와우...... 출근 길에 뭔가 하얀게 떨어져서 긴가 민가 했는데....

ㅋㅋㅋㅋ

부산에 눈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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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8-12-05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엔 왠만해서 눈이 잘 안 온다고 하던데, 어젠 아이마냥 좋으셨겠습니다.^^

바람돌이 2008-12-0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말예요. 왠일이래요?
저도 조금전에 나가서 애들이랑 팔딱팔딱 뛰다가 들어왔답니다. ㅎㅎ

마노아 2008-12-0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뭐? 하다가 '부산'에 방점이 찍히는군요! 축하해요^^ㅎㅎㅎ

순오기 2008-12-05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체로 눈을 보기 어렵다는 부산이라 눈이 오는 게 뉴스가 되는군요.
부산에선 첫눈이었나 봐요~ 축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