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최승호, 대설주의보, 민음사, 199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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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한 해다. 과거형으로 말할 수 없어서 더 없이 그렇다. '대설주의보'로 인해 이름 없는 산골이나 쓸쓸한 섬 마을에 한 동안 갖혀있고 싶다.
인간을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아 넣는 것은 '인간의 죄업'가 아니라 '실수' 라는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리스 서사시에 나타난 운명론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 나에게 벌어지는 일들로 사실 그 싹이 오래전부터 싹터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한 '실수' 에 대한 일련의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과율로만 보자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피치 못하게 전선의 앞 쪽에 놓여지고 있다. 아니 전선이 나를 손짓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전에 들리는 것은 귀청을 찢는 반복적인 포성이다. 가장 좋은 길은 양손으로 포성을 막는 것이다. 아니 최소한 안들리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묵묵히 밥을 하고 식기를 닦고 매일 같이 성경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타고 나기를 그렇게 타고 나질 못했다. 세상의 정치사회적 흐름은 은유법으로가 아니라 직설 화법으로 나를 조인다.
언젠가 실용서적에서 '운'을 불러들이는 방법 중에 '나쁜 생각은 그 단어조차 하지 말라' 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러니까 '혹시' '행여' 이런 생각들은 결국 '부정'을 하더라도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는 마음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그것을 지키지 않았기때문일지도 모른다.
공장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공장'은 아주 넓은 개념이고 이 바닥에서 즐겨쓰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월급쟁이이고 또 노동자이지만, 맑스적 의미에서 '소외된 노동자' 는 아니다. 그나마.. 즉 비물질 노동자다. 하지만 올 한해 나는 공장 노동자가 되라는 말을 수 없이 들으면서 견디어왔다. 그것은 일종의 '직업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며 또 '삶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모두 '생존 위기론' 속에 파묻힌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이라는 금칙 앞에 다른 모든 가치는 무릎을 꿇거나 과거의 나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받는다.
주변에는 이런 정체성은 개나발이라고 믿으며, 개인의 욕심만 채워가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에 당연히 그럴싸한 시대론과 허위론이 자신의 욕망을 포장한다. 그런 인간들은 사태가 호기일때는 무임승차로 편승하며 위기일때는 결정적으로 버스가 곤두박질치도록 바퀴에 흠집을 내는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본인들은 그저 조금만 축재한 것이라고, 조금만 이기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뿐이다. 사실 내가 있는 이 조직은 도의적으로 없어져야 할 것에 가깝다. 원래 목적이 그 가치를 잃은지 오래다. 이제 남은 것은 허황된 슬로건과 조직원들의 생존을 위한 이기, 그리고 권력의 지속을 위한 상층부의 욕망이 회오리처럼 결합된 변종의 것들이다.
한 해동안 아기가 크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 했던 날도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부서지는 모래성의 꼭대기 서서에서 매일 매일 발 밑을 침식하는 검은 파도를 바라보는 심정의 나날들 속에 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해방을 위한 '자기구타' 에서 멈칫거리고 있기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