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비전 1 - 서구 정치사상사에서의 지속과 혁신 정치와 비전 1
셸던 월린 지음, 공진성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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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광우병'과 별로 상관이 없다. 아이들의 작은 손에까지 '미친 소를 먹고 싶지 않아요'라는 피켓이 들려진데는 광우병이 도화선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뒤늦게 광우병의 의학적 위험성에 대해 따져보고 '촛불'과 연결시키는 것은 죽은 아이 고추 만지는 짓이다.(물론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 )  '촛불'은 초기 단계에서 '광우병의 과학적 증거'라는 -사실은 공학적이란 말을 쓰고 싶다.-틀거리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그것은 현 정부의 '정치의 부재' 상황에 대하여 대중이 '정치적 인 것' 으로 대항한 것이다. 촛불의 전개 과정에서 보여준 -앞으로도 지속될- 이명박의 결정적 한계는 언제나 정세 파악에 둔하다는 것이다. 시장 가서 배추 파는 아줌마와 눈물의 포옹을 한다고 정세 파악이 되는게 아니다. 한국민에게는 불행하게도 대통령의'정치철학' 이란게 밑바닥 수준이다 보니 배멀미는 기본이고 난파 상황까지 걱정해야 한다. 그의 정치적 좌우명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자'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그의 자세도 촛불때와 거의 유사하다. 

앞서서 '촛불'을 '정치적인 것'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요즘 말이 많은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 말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칼 슈미트의 말을 끌어오자면 '정치적인 것'이란 인간 존재의 근원적 특징이며 '갈등과 적대'의 개념이다. 최근에 내한한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을 창조해 가는 무엇으로 전제한다. 그러면서 본래의 정치를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정치와 비전>의 저자 셀던 월린에게도 '정치적인 것'이라는 주제는 책의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그렇지만 월린은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정치적인가?' '주어진 행위나 상황을 정치적이라 부르려면 그것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가?' 라는 질문들을 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윤곽을 말한다. 그렇지만 정확한 대답은 없다. 월린은 '무엇이 정치적인가를 보존하는 작업이 어렵다. 는 것이 이 책의 기본주제라면서 독자의 분발을 유도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에 대해 몇 가지 기본적인 전제들을 제공하기는 한다. 먼저 '정치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대해 갖는 관계'이다. 예를 들어 '권위' 라는 정치적 용어가 있다고 하자. 이 용어는 개념적으로 혼재되어 사용된다. '아버지의 권위', '통치자의 권위' 등등... '정치적인 것'을 말할때 '아버지의 권위' 는 분명히 공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사적인 개념이다.(사적 권위가 또 어떻게 정치적으로 구성될 수 있나는 다른 문제이다.) '정치적인' 권위는 그것이 공통의 속성에서 고려된 사회의 이름으로 표명된다는 의미에서 다른 형태의 권위와 구분된다.  '공통된 것'은 또한 유동적이며 '교차적'이기도 하다.저자가 정치철학의 범주를 다루는 부분은 유비한다면 '정치적인 것'의 개념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정치철학의 범주를 바라보는 월린의 관점은 '연속성'과 '유동성'이다. 정치철학은 어떤 천재 하나가 발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물줄기에서 '재발견'한다. 저자는 구체적인 정치사상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서구 정치사상의 전통이 두가지 모순된 경향을 드러내왔다고 말한다. 하나는 과거로의 무한한 회귀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누적의 경향이다.  이런 '지속과 누적 경향' 속에서 정치철학의 범주는 유동성을 갖는다. 즉 그 경계의 다층적인 침투로 인해 불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고전시대의 정치는 '선'이라는 지고의 가치에 대한 위상이 중요한 문제였다면 근대의 정치에서는 '경제'의 문제가 정치철학의 내파에 직접적인 자극이 된다.

셀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의 1장에서는 이런 서양정치사에서 드러난 정치철학과 정치의 추상적이며 개괄적인 설명이 돋보인다. 대중들은 읽기를 싫어하지만 정치철학의 이론화가 갖는 의미와 그 효용성, 정치 사상의 전통과 혁신,정치철학과 정치이론사이의 관계 등등. 1장에서 거론하는 주제 하나 하나가 모두 숨이 가쁠만큼 거대한 것들이며,또 기본적인 것들이다. 원래 짧은 질문들이 훨씬 어렵우며 긴 대답이 필요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그런면에서 정치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1장을 수시로 곱씹어 보라고 제안하는 역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렇다면 수 천년의 서구 정치사상사를 한 타래로 묶는 저자의 이론적 줄자는 무엇일까? 저자는 서구정치사를 '정치적 혼돈으로 부터 정치적 우주'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정치체계는 '질서'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인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와 '철인'을 통해, 중세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교황의 권위'를 통해 그러기를 원했다. 저자는 정치철학의 주제가 대체로 이렇게 정치를 질서의 요구와 양립할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저자는 1장 '비전과 상상력' 장에서 대상과 사건에 대한 기술적 설명으로의 비전과 달리 '상상적인 것'으로의 비전을 제시한다. 정치 사상가들은 이런 상상력이 이론의 필수적 요소로 믿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론가들이 역사를 초월하고자 할 때 쓰는 요소였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삶을 상상적으로 재질서화하는 것이었다. '비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월린은 '운동의 정치'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그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 공격하면서 '도전과 반응'이라는 정치사의 연속성 속에 '운동적 참여'에 높은 가치를 둔다. 그를 규정하는 한 단어로 '참여의 정치철학자'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성 싶다. 여기서 역자의 후기에도 나오는 '버클리와 시카고학파'의 차이가 드러나는 듯 하다. 셀던 월린은 '참여민주주의' 지향적인 버클리파의 주도자였다. 경제학에서 시카고는 밀턴 프리드만의 통화주의로 이름높다. 정치학에서도 시카고의 학품은 버클리와의 비교를 통해 이해되는 정도다. '운동의 정치'에 조금은 비관적인 최장집이 시카고대학 출신이란 것은 안다. 그것이 서로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추상적이며 개념적인 1장을 끝으로 <정치와 비전>은 익숙한 순서에 의해 서구정치사상을 따라 간다. 연대기적 구성이긴 하지만 학자들의 정치철학을 하나씩 집어서 입어 넣어주는 스타일은 아니다. 각 시대의 중요한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어떤 이론적 함의와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앞서 강조한 일련의 '연속성과 비전'의 차원에서 수 천 년 역사의 정처철학사에서 중요한 지점에 새롭게 구성되어지는 정치이론의 지형도를 그려내고 있다.

<정치와 비전>을 읽다보면 어떤 흐름의 단절성 같은 것을 느끼기 어렵다. 그 점이 커다란 장점이다. 연속성에 대한 저자의 철학과 함께 이행기-저자는 그런 말을 쓰지 않았지만-에 대한 배려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서구정치사상사의 시작은 플라톤으로 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플라톤을 정치철학의 아버지의 위치에 올려놓으면서도 또한 정치를 철학에 종속되게 만든 것으로도 본다. 몇 가지 문제점들이 제기되는데 저자는 플라톤 철학의 중추적 약점으로 정치적인 것의 관념과 정치의 관념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본다. 쉽게 말하면 '선의 이데아'에 대한 복종은 '조정'이라는 의미의 '정치'와는 별로 상관없는 개념이다. 흔히들 플라톤을 말한때 '절대권력'에 대한 옹호자 정도로 취급하는 논점이 지난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물론 월린 역시 플라톤이 '사심없는 절대권력'이라는 쟁점적인 문제를 던져놓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모델은 먼 미래에 레닌의 '사심없는 혁명엘리트'로 이어진다.월린은 플라톤의 철학자가 공동체의 선과 참주정의 방지라는 현실적인 목적에서 나온 것임을 말한다. 그렇지만 너무도 빨리 플라톤의 철학은 비판에 직면한다.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의 능동적 통치집단과 수동적 공동체 사이의 경계를 비판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의 일원성이 아니라 선의 다원성이라는 측면에서 시민의 입법적 기능과 개인의 권리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정치와 비전>의 1권은 고대 정치철학을 다루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하여 근대 정치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에서 마무리된다. 애써 근대적 이성의 특징이라는 구획짓기를 통해 구분해 보면 책의 구성은 이런 셈이다.

1) 고대 시기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2) 제국의 시기 : 스토아  3) 중세 시기: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퀼라스 5) 종교 개혁의 시기 : 루터와 칼빈.

흥미로운 시각은 제국의 시기와 종교 개혁의 시기이다. 독립적으로 긴 시점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이행기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특히 셀던 월린은 제국의 시기를 서구정치철학사의 암흑기로 꼽는다. 흔히들 중세를 사회적으로 암흑기라고 보는 관점(이것도 최근에는 수정되고 있다.)과 다르다. 스토아학파의 탈정치적 이론들은 우주론적인 질서 속에 정치를 깡그리 말아넣고 말아버렸다는 것이다. 월린은 아예 이렇게 말한다 "가공할 만한 권력 앞에서 철학의 자랑스런 전통은 비굴한 무력감으로 추락했다." 정치와 영성의 문제를 혼돈하여 상호 침투시켜 버리는 초월적인 뉴에이지적 흐름에 대한 수 천 년전의 예로 보아도 될 법하다. (솔직히 내가 너무 자주 이야기해서 스스로도 지겹다. 네그리의 말처럼 다시 '제국'의 시대가 오고 있는 증거 같기도하다.) 월린은 폴리스의 쇠퇴가 정치사상의 분석단위를 없앴으며 삶의 비정치적 성격에 집중하면서 정치사상이라고 통용된 것 역시 비정치적이며 도덕철학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중세의 초기 기독교는 이런 망해버린 정치철학을 복원한다. 물론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와 '교황'이 있었다. 오히려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학을 세속에 설명하는 과정에서 고대철학의 정치철학 전통을 이용하게 된다. 그러면서 정치철학의 전통들을 지속시켜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모델은 상당부분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유사하며 일신론은 신과 그의 대리인 교황의 절대권과 연결된다. 아우쿠스티누스와 아퀼라스의 교회-사회에 대한 정체성, 신학론등은 나름대로 논리적 흐름이 있기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만하다.

셀던 월린이 루터와 칼빈에 대해 큰 분량은 아니지만 한 장을 할애했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흔히 근대정치학의 시작을 마키아벨리로부터 찾기 때문에 <군주론>부터 읽는다. 그런데 특정한 관점에서 -이것은 대중들의 참여관점이다- 마키아벨리나 홉스가 가지고 있지 못한 부분을 루터와 칼빈이 보여준다고 제기한다. 전자는 모두 소수의 정치입안자들에 대한 제안자들이었다. 반면 루터와 칼빈은 급진적 정치철학의 아이디어를 대중소구한 행동가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까지 나온다. "홉스는 가망 없이 고전적이었고, 루터는 불길하게도 근대적이었다. "저자는 루터를 중세 교회 권력으로부터의 정치 사회로의 탈출을 목적으로 했던 급진적 평등주의자도 본다. 그런데 교회로부터의 저항은 당연히 정치권력에 지나친 기대를 낳게 된다. 즉 과거 교회 질서의 척결이라는 이름으로 좌편향성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는 한계를 갖는다. 칼빈은 '질서'의 이름이 교회와 정치 사이에 공통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가치하에서 이 둘 사이의 미묘한 결합을 시도한다. 칼빈의 몇가지 이론들은 이런 조화에 대한 신학적 답변들이다. 칼빈은 교회 질서와 정치 질서를 모두 독립되게 인정했으며 루터와 달리 공동체의 자율에 대해 반대했다. 여기서 월린은 칼빈의 이념 속에서 이성과 정치절 삶 사이의 연관성을 읽어낸다. 즉 이성이 정치적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이게 뭐 대단한가 싶다면 타임머신을 타 보든가..) 이것은 이성과 정치간의 고전적 관계의 복원인셈이다. 기독교가 '신국'의 이름으로 포기했던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상이 다시 등장한다. 물론 칼빈 역시 교회(프로테스탄트)에 우위를 두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정치와 비전>은 사실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다. 첫 판이 1960년대 나왔으니 말이다. 구판은 홉스를 거쳐 자유민주주의와 조직이론이라는 장에서 끝이 난다. 월린은 현재의 증보판을 내면서 새로운 장을 추가한다. 니체와 마르크스를 추가하고 탈근대민주주의까지 이야기를 끌어온다. 마르크스는 경제라는 관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니체는 전체주의와 탈근대의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밝힌다. 원래 이 책은 첫번째 판가 추가판으로 해서 두 권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번역판은 3권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중 1권 만이 번역된 셈이다. 그러니 아직 추가 증보판에서 월린이 다루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지금으로서는 목차와 월린의 증보판 서문을 통해서 그 맥락을 짚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월린은 초판과 다른 위치에서 증보판을 썼다고 밝힌다. 냉전이라는 '삶권력적'상태에서 정치철학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그리고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지배하에서 어떤 관계들이 형서되는지를 말한다고 한다.  미국을 이념형으로서 '전도된 전체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또한 서문은 새로운 세기의 단절을 탈근대적 권력으로의 이행으로 읽으면서 제국과 정복을 대신하는 '우세'라는 개념을 통해 합의와 지배 반복하는 과정을 쫓는다고 말한다.

어떤 결론을 쓸 까 하다가...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런 책은 공부하는 이들을 제외하곤 많이들 읽지 않으려할테니,이런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해야겠다.' 그러다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생각났다. 흔히들 이책을 '군주에게 아부하고 권력을 위해 잔인한 짓도 불사해야 한다는 비도덕적 책'이라 말한다.(맞는 말이다. 모든 핵심이 다들어 있다. 군주,권력,정치방법론,도덕의 문제..)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궁금해지는 것이다. '왜 그런 모진 책이 교양 목록에 들어가 있는지, 왜 그게 근대정치철학의 첫 번째 교과서인지?' 이런 긴장의 가장 간단한 원인은 '맥락'의 결여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맥락'을 위해서 '정치철학사'를 뒤적여야만 한다. 셀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은 공동체를 위한 참여의 건강성에 대한 긍정과 정치사의 맥락을 모두 짚어주는 훌륭한 책이다. 2권과 3권이 빠른 시일내에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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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12-10 12:05   좋아요 0 | URL
로쟈님과 함께 양질의 책을 훑어주시는 드팀전 님의 서재에 자꾸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저와 코드가 딱 맞아서 그런지 드팀전 님이 추천해주신 책을 자꾸 사보고 읽게 됩니다. ㅎㅎ

결론에서 마키아벨리를 말씀하셨는데, 마키아벨리와 한비자를 비교해서 읽고 싶은 욕구가 치미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승주나무 올림^^

드팀전 2008-12-11 10:13   좋아요 0 | URL
한 해가 다가고 있군요. 코드가 맞나요 ?^^ ㅋㅋ 글쎄..그건 두고 보죠.저 역시 좋은 리뷰에 늘 감사드립니다.

마립간 2008-12-18 23:29   좋아요 0 | URL
왜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을까요?

드팀전 2008-12-20 01:31   좋아요 0 | URL
^^ 정말 궁금하신건가요?
정치는 그리고 선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게임이라는 것만 말씀드리지요.
대중정당의 권력순환론부터 10가지도 넘게 그 이유를 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저보다는 <창비>,<황해문화>,<비평>같은 계간지들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