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연대....

이명박이 100만명의 촛불집회보다 실제적으로 더 골머리를 앓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화물연대의 파업일지도 모른다. 효율성측면에서 보자면 말이다. 화물연대의 이익 집단적 행동을 더 큰 단계로 전화하는 것 역시 그래서 필요하다. 화물연대는 지난 번에 감만항 앞에서 '미국 소 출하 반대 결의'를 했다.

비버리 실버의 <노동의 힘>에는 세계적으로 노동운동에서 운송사업의 강력한 힘과 교섭력을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쉽게 말해서 유통네트워크는 한 지점에 결절점이 생기면 모두 붕괴될 수 있다. <노동의 힘>에서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현재의 지식기반 시스템 역시 그런면에서 취약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1870년부터 1996년 사이에 모든 산업부문에서 일어난 전체 노동소요 건수에서 운송사업의 노동소요는 평균 35%에 달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해당시기 제조업이 21%,광업 18%이다.) 

-상대적으로 운송노동자들은 강력한 작업장교섭력을 보유해 왔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특히 운송노동자들의 작업장은 그들이 속한 유통망 전체라는 것을 개념화하면서 이 사실이 훨씬 더 분명해질 것이다. 오컨대 운송노동자들의 작업장 교섭력은 그들의 행동이 고용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재화,서비스,승객 등을 목적지까지 전달하지 않아 앞뒤 흐름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나온다.  기존 운송망의 교란과 새로운 운송망의 개발이 "상이한 지점에 위치한 자본가들의 상대적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운송산업에서는 노동자의 강력한 작업장교섭력을 상쇄하는 공간 재정립을 고안하기가 쉽지 않다. 데이비드 하비는 " 도로,철도,운하. 공항등은 그것 자체에 체현된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고서는 옮겨질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동성을 확보하려는 자본이 상대적으로 부동하는 운송산업에 투자해야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빚어진다.

-국가의 규제는 다른 산업보다는 운송산업 내 노동소요의 동학에 훨씬 더 중심적이고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원활히 기능하는 운송체계가 자본축적에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 국가가 운송산업의 노동소요에 재빨리 광범위하게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가령 모든 국가들에서 철도 노동자들은 합법적 권리를 획득한 최초의 노동자들에 속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권리가 채택됨과 동시에 철도 노동자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률도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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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6-15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물연대를 처음 언론에서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물류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는 화물연대의 구호, '저 분들 대단하구나' 하고 바라보고 있어요.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고 있어서 그것이 구호로 나타나는 것이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구요.

드팀전 2008-06-15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자가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가장 큰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셈이겠지요. 전 화물연대의 투쟁이 단일한 목적-즉 조합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으로만 끝나지 않고 이명박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강력한 견제의 연대를 꾸려주길 기대합니다. 조합의 이기주의적 특성상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는 그냥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기때문이지요.


글샘 2008-06-16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직 부산 지명이 낯서시구만... 감천항 아니고 감만항입니다.
철도 같은 곳은 노조가 가능하지만, 우리나라 화물차들은 개인사업자여서 '연대'일 뿐이지요. 지금처럼 먹고 살기 어렵지 않으면 어지간해서 뭉치기 어려운 분들인데... 너무 열악한 현실을 귀막은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더군요. ㅠ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약속을 안 지키는 미친 정부.

드팀전 2008-06-16 09:19   좋아요 0 | URL
오타군요...
연대라는 이름이 나온 것도 '특수고용노동자'를 어떡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특수고용노동자가 어떤 과정에서 만들어졌는지 보실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그리고 '노동자성'문제까지도 말이지요. 이문제가 명확해야지 비정규직문제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화물연대말고도 여러종류의 화물 운송 관련 단체들이 있습니다.그 단체들은 일종의 협회같은 것들이지요.그래서 현재로서는 단일한 노조를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종사자들 역시 정부가 만들어준 사업자/노동자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화물연대가 씨앗이 될 가능성은 있습니다.화물차들을 '개인사업자'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조금 더 한걸음 나아가서 봐주시길 권합니다.
 
다시 그람시에게로
칼 보그 지음, 강문구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그람시 하면 떠오르는 '헤게모니'다.  나는 '헤게모니'하면 먼저 두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하나는 그 단어를 처음 접했던 대학 신입생때 일,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기말인가, 세기 초인가 월간조선 조갑제가 '그람시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라고 곡을 외쳤던 칼럼이다.

대학 들어가서 처음 들었던 수업에서 강사는 '헤게모니'란 말이 있는데 아냐고 물었을 때, 찍기 세대인 우리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강사는 칠판에 축구장을 하나 그렸다. 그리고 가운데 하프라인을 그렸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그리고 '헤게모니'는 모두 축구장에서 알게된 용어다. 나중에 같은 과 딴따라 동기는 락 밴드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헤게모니'였다. 그 친구는 아직 결혼도 안하고 기타 치고 있다.

네이버 검색에 친절하게 나오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그대도 옮겨보자.

"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 Prison Notebooks》에서 계급간의 관계, 특히 부르주아계급이 노동자계급에게 행사하는 통제의 의미로서 헤게모니를 설명하였다. 그가 말하는 헤게모니는 한 계급이 단지 힘의 위력으로써만이 아니라 제도, 사회관계, 관념의 조직망 속에 동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다시 말하면 성공적인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의 이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종속집단인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 또는 상식적이며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당시 '동의'라는 말과 '상식적으로 받아들인다' 라는 말은 대학 신입생인 내게 자다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 만큼 충격적이었다. 저 말은 내가 지금 믿고 내가 지금까지 따라왔던 '상식'이라는 토대가 사실은 일부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봤던 조갑제의 칼럼에 배꼽을 잡았던 기억도 난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조갑제는 소련의 붕괴 이후 갈피를 못잡고 있는 좌파들이 신좌파라는 이름으로 그람시라는 유령의 깃발 아래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해하고 가장 잘하는 저질스런 방식으로 그람시에 대해 설명했다. 아마 결국 폭력혁명하자는 맑스파의 불순분자들의 중간 오야붕쯤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배꼽 찾는데 한참 걸리게 해준 사람은  카랑카랑하던 진중권이었다. 그는 먼저 조갑제에게 애써서 좌파들이나 보는 그람시를 읽어준 노고에 감사했다. 그런데 진씨는 조씨가 헛다리도 한참 뒤에 잡고 있다고 비웃었다. 뒷북도 저정도면 예술수준이라는 것이다. 좌파들은 오래전에 그람시를 떼고, 푸코와 데리다를 건너 들뢰즈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뭐 뒤의 학자들이 더 대단하다는 것은 아니라 조갑제의 놀라운 발견이 사실 구태의연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갑제 선생은 결국 21세기 명동거리에서 환한 얼굴로 유레카를 외치며 '지구가 둥글다고...너희들 몰랐지...지구가 원형이란 말이야" 라고 외치신 거다.

 그런데 조씨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내가 21세기가 시작된지 8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그람시를 봤다. 결정적인 계기는 '촛불집회'였다. 촛불집회의 긍정성에 대해서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 그 한계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촛불 집회의 결말이 어떡게 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신 최초의 '무중심성'과 '소박한 시민참여'에 대한 뜨거운 거리의 흥분이 성찰의 벽에 부딪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명박산성 앞에서 5시간 토론을 했다는 것도 사실 그 집회가 대중동원력을 가지면서 예견되었던 일이다. 나는 책방의 서재 앞을 어슬렁 거리다가 구석탱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는 칼보그의 <다시 그람시에게로>를 골라들었다. 얇은 책이다. 요즘 두꺼운 책보느라고 심신이 지쳤는데 두께도 시의적절하고 내게 며칠 전부터 그람시가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영민해보이는 청년 그람시의 사진이 있는 1만 5천원짜리 위의 책이 아니다. 91년도에 나왔던 3천5백원짜리 책이다. 역자와 제목, 출판사,저자가 같은 걸로 볼 때 동일한 책이다. 다른 것 보다 먼저 45%가량 상승한 책 값에 놀라게 된다. 하기야 내가 대학들어 갔을 때 생맥주 500cc 한 잔에 5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람시의 이론이 가진 위치는 맑스의 경제주의적 속성과 레닌의 전위당 중심의 자코뱅적 성격을 극복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보그의 말대로 하자면 경제적 성향이 강했던 맑스의이론에 정치의 우위성을 부각시킨 것이 레닌이다. 그리고 그 지평을 이어받돼 한층더 다층적인 차원과 개방적인 차원에서 맑시즘을 비약시킨 것이 그람시다. 그람시는 엘리트주의적인 레닌의 혁명론에서 조금 더 비켜나있다. 물론 그 역시 조금 다른 차원에서 당의 역할에 대해 중요시했다. 하지만 레닌의 당이론과 조금 성격이 다르다. 그람시의 혁명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혁명은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포괄하는, 즉 총체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접근때문에 그람시를 '문화혁명' 주창자로 만든 것이며 우리 강사 선생은 '문화론'시간에 그람시를 언급한 것이다.

 그람시는 혁명적 변혁을 창출해내는데 있어서 의식의 역할을 누구보다 강조했다. 이것은 역사적 결과물일 수 도 있는데 -길게 이야기하기 힘든 -'제2인터내셔널'의 테제에 대한 그람시 안티테제적인 성찰로 볼 수 있다. 그람시는 맑스의 국제주의에 대해서도 '지향으로의 국제주의'와 '현실적으로 민족주의' 동원의 힘을 구분했다. 즉 교조적으로 국제주의를 지지하지만은 않았다는 뜻이다.그람시에게 지배계급의 청룡도가 '헤게모니'라면 피지배계급의 장팔사모는 '대항 헤게모니'이다.그는 지배계급과 전체 인구의 다양한 부문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유대를 끊어버릴 것을 요구했다. 내가 이번 촛불 집회를 보면서 지속성을 갖는 일종의 '대항 헤게모니'로 확산되기를 바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람시는 헤게모니가 두 단계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먼저 지배적인 기존 체제의 허위적 세계를 관통하는 단계,그리고 인간해방을 목표로하는 새로운 사상과 가치의 세계를 창조하는 단계. 이번 촛불집회가 첫 번째 단계에서 짱돌 하나 던졌다면 이것이 더 큰 세계로 확산될 수 있도록 도모하는 것,그렇게 하기 위해 진보진영이나 그람시가 중요시 여기는 '유기적 지식인'들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야하는 것, 내가 이즈음에 그람시를 떠올렸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람시적인 의미에서 이번 촛불집회는 결코 '기동전'이 아니다. 이것은 '자발적이고 소아적인 투쟁'이다. 하지만 그람시는 과거 교주주의자들과 달리 이런 투쟁의 다양성에 대해 긍정했다.그람시를 비맑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는 그가 계급이라는 일원성보다는 시민이라는 다층성에 더 큰 주목을 했기때문이다. 그람시의 목표는 대중적이고 유기적인 혁명적 변혁 모델의 비전을 정형화하는 것이었다.그는 선재투쟁이라는 개념과 평의회,블록 등의 개념을 통해서 일상적 삶의 변혁혁을 포괄하는 혁명이론을 만들어낸다. 또한 과거 맑스주의자들이 벌였던 오류를 지적하면서 피억압계층의 '자발적' '초보적' 소요의 움직임을 높이 평가한다. 항쟁의 초기에는 불가피하게 '비순서적'이고 또한 '모순적'일 수 박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항쟁의 최초 단계부터 '외부적'조정 없이 일관된 발전노선을 따르기를 기대하는 것은 교조적이라고 비판한다. 이번 집회의 문제점은 바로 그 역에 있다. 촛불집회의 시민적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불행히도 '외부적' 조정 자체를 배타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말이다.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그런 것과 맞닿아 있다. '어떻게 맹아적인 대중투쟁을 효과적으로 쌓아올릴 수 있을까? ' 하는 문제 말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시애틀 반세계화 시위를 경험하고 '자발적으로 시위하고 또 어느 정도 지나자 알아서 시위를 철수'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중심성'의 시위가 갖는 한계를 지적했다. 그물론 촛불집회의 성격과 양상을 그람시의 시대적 맹아와 동일시해서는 절대 안된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과거 역사에 비추어- 이런 대중의 힘의 규모를 파악하고 현 정세를 정확히 읽어 그 역량을 최대치화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하지 못한 힘들에 대해 또 가차없는 보복을 가해왔다. 그람시는 피억압계급의 대변자가 되면서도 또한 다른 계급과의 관계의 앙상블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중재자로 '유기적 지식인'이란 개념을 창출한다. 이들은 하늘에서 뚝떨어지는 것은 아니다.이것은 그람시가 생산의 영역보다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의 싸움을 준비했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는 개념인셈이다. '유기적 지식인'은 '대항 헤게모니'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성이 강조된다.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의 총체적 형태를 '당'으로 파악했다.

  그람시에게는 대중적인 것과 엘리트적인것, 구조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것, 이론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이 모두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나는 이번 촛불 집회에서 무너진 '정치'에 대한 분노로 '정치'를 부정하는 낭만적 레토닉을 많이 만난다. 그 대신 흥분에 찬 '시민적 순수성'에 대한 환호가 그자리를 채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최고의 사상서들은 사실 문학적으로 씌여졌을지라도 '문학'으로 분류되진 않는다. '비폭력적인 시민들의 순수성'은 좋으나 그것만으로는 결국 부족하다. 나는 이번 촛불집회가 그람시가 말하는 유기적인 융합을 통해서 찻잔 속의 태풍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돌아선 자리에 남은 것은 추억뿐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리고 소박한 시민적 혁명이 전화되어 앞으로도 지속될 수많은 신자유주의적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에 '대항 헤게모니'의 단초가 되주길 바란다. 그람시는 현실의 비참을 의지로 낙관하라고 했다.그런데 지금 거리에서 쏟아지는 현실의 낙관이 현실의 변혁이 될 수 있으려면 어떤 지향이 필요한가가 중요한 시점이다. 드디어 대책회의가 주도적으로 토론을 통해 방향을 결정하려는 듯 하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결론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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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6-15 11:22   좋아요 0 | URL
이번 촛불 집회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진중권과 노회찬 등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방송의 역할이 아닐까 합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의 힘도 크구요. 6월1일 폭력진압이 그대로 묻혀버렸다면... 이런 큰 파장을 몰고오진 못했겠지요.
그람시가 전선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런 파장이 큰 운동에 대해선 그람시가 펄쩍 뛰면서 놀랄 일이 아닐가 싶습니다.
한나라당으로 가고, kbs로 모이는 힘을 주는 것은 주최측이 아닌 인터넷 방송과 인터넷 상의 토론장이니 말이지요.
몇 명의 '선택된 시티즌'만이 참여하던 직접 민주주의가 이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의 직접 민주주의로 발현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중고생의 참여는 '우발적'이었다기보다는 '주체적'이었던 것 같구요.
학교 현장에 있는 저로서는 주체적인 학생들을 별로 찾아볼 수 없지만 말입니다. ㅠㅜ

드팀전 2008-06-15 12:33   좋아요 0 | URL
그람시가 말하는 혁명과 운동의 궁극적 지향은 '일상의 혁명'을 포함하는 사회주의 혁명입니다. 그람시 같으면 지금의 현상에 감격하기 보다는 이런 파장을 어떡게 하면 '헤게모니적 전환'까지 이어갈 수 있는 가 하는데 신경을 쓰겠지요.그람시의 계획은 촛불집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보다 더 큰 변혁의 비전입니다. 시대가 다르고 정세가 다르기때문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그 아이디어가 온고지신의 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람시의 이론적 비전과 이번 시위의 지금까지 나타난 현상과 또 앞으로 가능한 형태의 결과에 대해 같은 지평으로 이야기할 수 없을 듯 합니다. 그람시는 볼세비키 혁명을 목도한 세대입니다. 촛불집회가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러시아 혁명과 맞먹을만 할까요...^^

turk182s 2008-06-24 03:16   좋아요 0 | URL
촛불을 네그리하고 맞대는 글은 많이보았는데 그람시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군요..덕분에 잘읽었습니다. 촛불은 진화하리라고 봅니다..예전에 미선효순보다는 지금의쇠고기 촛불이 더 의미가 크잖아요,,비록 요즘 집회참여자숫자가 하강하고있지만 이런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 나중에 총체적 경제난국시 다시한번 거리로 나서게 되겠지요..그때는 지금처럼 얌전하지많은 않을겁니다. 사실 지금의촛불주도는 일반서민들보다는 그래도 먹고살만한 중산층들들이 주도적이라고봅니다.그러니까 계급적으로 30-40대 대기업직원,전문직종사자, 아이들 먹거리로 예민한 그들의 주부들,,거기에 이미 소규모자영업자로 내몰린 고학력 출신자들의 분노가 경제적인상황과 맞물려 터졌다고봅니다. 아직은 님말대도 헤게모니적인 투쟁이아니지만 조심스레사태를 지켜보면 민영화,임투,등등 노조들의 참여가 본격화되면 다시한번 새로운 양상이 될거라고봅니다. 68혁명도 고딩과 대딩들이 시작했지만 중간에 노동계급이 대거참여해서 양상이 바뀌듯이 말이죠,,뭐 끝에 노조가 배신을? 때리며 끝나긴했지만..
 

지난 주 한겨레 21에서 <쓰촨성을 보듯 북한을...> 이런 기사를 읽었다. 굶어죽는다는 것...세계의 비참이다.

정당을 비롯해서 6군데 정도 돈을 내고 있는 듯 하다. 만약 내가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져 하나씩 중단해야 할 경우를 생각해 봤다. 먼저 취소할 기부부터 정리해봤는데... 결론적으로 가장 끝까지 남을 것은 '긴급구호지원'이나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 지원' 이다. 왜냐하면 '배고픔'에는 좌와 우가 남과 북이 따로 없기때문이다. 특히 기아로 어린이들이 죽어야하는 상황에서 정권이 어떻니 전략이 어떻니 하는 것은 좀 아니다.

 나는 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아이들의 죽음에 울컥해진다. 그러면 가끔 어떤 사람들은 국내에서 기아로 허덕이는 아이들이 많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비참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 절대적 식량 부족의 문제라기 보다는 제도적 분배장치와 구석구석까지 살필 수 있는 자원과 시스템의 부재가 가장 크다. 즉 정치의 문제이지 절대적 부족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도 얼마나 평범한 사람들의  멀쩡한 음식들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는가...패밀리 레스토랑은 주말에 예약하지 않으면 1시간 기다리기는 기본이다. 북한은 현재 그렇지 않다. 절대적 식량 부족은 객관적 사실이다.

나는 북한정권을 지지하지도 않고 일말의 애정도 없다. 프랑켄슈타인 정권이다. 그렇지만 쌀을 보내주면 북한 정권만 배불리게 한다는식의 조중동논리와 그걸 마치 무슨 정치적 혜안을 가진 합리적 사람인양 착각하는 분들께는 분노한다.

나는 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 죽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북한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아파하며 지원한다. 그 아이들이 이 고비를 잘 넘겨서 언젠가 예찬이와 만날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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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6-1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안그래도 요즘 북한 아이들 소식에 마음아파하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저도 힘을 보탤게요.

글샘 2008-06-1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din.co.kr/booknamu/2136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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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ㅜㅜ

화물연대가 파업에 들어갔다. 나는 조금 전 '민노총 파업 찬반투표'를 하고 왔다.

"소에게는 풀을 우리에게는 꿈을 언론에는 자유를"

 개인적으로도 좀 아는 분의 거취를 두고 아고라에서 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부산 동의대학교 신태섭 교수다. 이명박 정권이 하는 짓이 이렇다.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검색해서....^^ 거저 얻는 것 보다 검색이라는 노력을 통해 찾아봐야쥐.. ^^

철강코일을 가지고 프레스작업을 하는 공장에 잠시 다녀왔는데...공장 안의 기계 소리는 옆에 사람의 목소리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날씨가 더우니 공장 아저씨들은 귀마개도 안하고 그냥 일을 하신다. 외국인 노동자도 언뜻 보이고...

하루 종일 똑같은 표정으로 프레스에서 찍혀나오는 물건들을 소음 속에서 옮기는 일을 할게다.

맑스의  '소외' 와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거대한 기계 굉음 속에서 파동을 만들어서 내 신경을 자극했다. 굉음은 살갗을 자극한다.공장의 위압적인 지붕은 산소를 희박하게 만든다.

나는 내가 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감사했다...또 그 굉음이 주는 공포감을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백면서생들과 선량한 시민들을 생각했다. 현장주의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대신 거리의 감격, 거리의 현장감 만큼이나 공장의 현장에 대해 알고 '노동의 시대'가 접혔느니, 비물질노동의 시대가 되었느니 하는 말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짧은 공장 견학에 뭐 대단한 걸 발견한 양 깝친다고 욕할 수 도 있다. 인정한다.

그래서 함께 욕 먹자고 권하는 거다. 나만큼 욕을 먹거나 나보다 조금 더 먹거나...

아프님이 하던 거 따라해본다. 아프님이 서울거리에서 바쁘시고..나는 뭐 ...논다. 축제가 노는거 아니더냐  ^^     

폭력론/비폭력론, 중심성/무중심성....다 역사에 나오더라. 무중심성에 대한 찬사가 이제 슬슬 무중심성의 한계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다. 지난 주 였던가...이택광은 글에서 나오미 클라인의 시애틀 반세계화시위의 집산과 해산과정의 경험을 예로 들며 '포스트모던' 시위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번 시위가 마땅한 성과가 없이 사그라든다면 '반동'과 '허무주의'가 더 크게 만연할 것이 분명하다. '포스트모던' 시위에 대한 예측도, '허무주의'에 대한 예측도 모두 내가 한게 아니다. 역사가 과거로부터 알려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코맥 매커시의 작품이 나왔다. 야호!!  알라딘 메인페이지에 당당히 등장했다. 나는 어제 문득 이 책을 발견하고 소풍가서 보물찾은 듯-단 한번도 못찾았다- 환호했다. 올해 본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 작품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 소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의 감격이 잊혀질 때쯤 보려고 의도적으로 미루어두었다. 나는 숙제하듯 영화/소설을 번갈아 보는 방식에 별 재미를 못느낀다. 왠지 '틀린 그림찾기' 하려는 듯 한 강박증이 발동할까봐서 이다. 그래서 <로드>도 영화화 되고 있다는데 이건 소설을 먼저 보고 영화를 기다리면 될 듯 하다.   

<88만원 세대>는 히트작이다. 이제 '88만원세대'는 거의 사회학적 용어로 쓰이는 듯 하다. 나는 <88만원세대>를 읽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회정치적 의식이 박약한가 보다. 몇 몇 이유는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더 강하게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알라딘의 <이유>님의 리뷰가 가장 재미있었다. 이 책의 설명을 보니 '식민지를 만들지도 못하는데 제국주의가 되고 싶어하는 대한민국' 이라는 말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개화기 한국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량치차오의 생각들이 여전히 근대의 이름으로 한국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평범한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은 그걸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중증 환자일 뿐이다.

아...<자본>이다. 이 책은 붉은 성경이다. 하지만 '성경 무오류주의자'들은 기독교에서도 그렇듯이, 붉은 교도들 내에서도 광신도들 뿐이다. <자본>은 이론적이고 어떤 경향들을 말한다. 마녀의 유리구슬처럼 자본과 역사의 변증법에 대해 일거수일투족을 예측하지 않는다. <자본>은 끊임없이 읽히고 또 그만큼 재구성되고 비판과 반비판된다. <자본>은 역사 속에서 끊이지 않는 샘물과도 같이 매번 무수한 상상의 열매를 가능케했다.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노동자와 그들의 저항이 사라지지 않을 것 처럼,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이 책의 이름도 기억될 것이다. 안면이 있는 분의 독어원본 최초 번역이어서 더 좋고 또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더 애정이간다. 

불가코프의 작품은 로쟈님이 꼽은 <20세기 러시아 문학작품 리스트>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곧 읽을 책의 목록 속에 꽤 오래 있었다. 다른 책들에 밀린 감도 있지만 로쟈님이 새로운 번역본이 나온다고 속삭여주셨기 때문이다. 어차피 번역비교를 하면서 읽지는 못하기 때문에 구번역과 신번역이 뭐가 더 좋은지 알 수는 없다. 가끔은 오래된 번역이 훨씬 나은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래도 새 책이 나왔으니 새 책에 끌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어차피 이 책을 몇 종씩 가지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여름 휴가때쯤 볼까 싶기도 하구...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작가 올리버 섹스의 책이다. 이 사람의 현직은 컬럼비아대학 신경정신 임상학 교수. 음악 애호가라고 한다. 책 제목이 인상적인데 '뮤직'과 '필리아' 의 합성어이다. 즉 '음악에 대한 사랑' 이 인간의 본원적 속성이라는 점을 말한다. 하루라도 음악을 듣지 않는 날이 없는 사람으로서 혹할 수 밖에 없다. 사진 속 인물이 저자가 아닐까 싶은데 사진에서 음표가 마구 날아온다. 여름에 나는 클래식을 자주 듣지 않는다. 여름은 '재즈와 맥주'의 시간이다.아 술 이야기하니까 다시 취하는 것 같아..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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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6-13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흣. 저는 지난주 바빠서 한 주 쉬었어요. 내일은 회사가고. -_- 일요일에나 종합해서 한번 올려야지.

드팀전 2008-06-13 22:56   좋아요 0 | URL
^^

가넷 2008-06-1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나와서 많이(?) 읽혔던 빨간책은 중역이였나요?...

드팀전 2008-06-13 22:58   좋아요 0 | URL
김수행 교수님 책은 영어중역이었다고 하더군요..

mong 2008-06-14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는 지금 읽고 있어요.
드팀전님 리뷰가 궁금해지는데요? ^^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언제고 다시 읽고 싶어요.
여름은 '재즈와 맥주'의 시간에 심하게 공감해요
저도 맥주를 잘 마시면 더 좋을텐데요 흑

드팀전 2008-06-14 22:52   좋아요 0 | URL
몽님이 먼저 리뷰를 쓰실 듯 하네요

낭만인생 2008-06-19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재미있네요.. 잘 읽고 갑니다.
 

“한국 변혁운동 과학화, ‘자본’에 답 있다”
국내번역 2개뿐…원전 제대로 다뤄 ‘문헌적 정본’ 겨냥
“사회모순 해결 향한 노동운동·촛불집회의 과학적 무기”
 
 
한겨레 한승동 기자 이종근 기자
 








 



 
올해 봄 <교수신문>이 학회지와 계간지 편집위원들을 상대로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단연 카를 마르크스(오른쪽 사진)의 <자본론>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만큼 자본론은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존재다. 하지만 자본론만큼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을 찾기가 드문 저작도 흔치 않을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일 노동운동사를 공부하고 1991년부터 동아대에서 강의해온 강신준(54) 교수(경제학·왼쪽)가 <자본>(1-1, 1-2. 도서출판 길 펴냄)이란 이름으로 마르크스의 주저를 다시 번역해 냈다. “국내총생산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들어간 경제대국에 인류지성사의 최상급 고전 반열에 든 <자본> 번역본이 겨우 2개뿐이라는 건 초라한 일일뿐더러,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낙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가 저문 지 20년에 가깝고 ‘퇴물’ 취급을 당한 마르크스가 강단에서조차 거의 사라져버린 우리 현실에서, 왜 지금 다시 <자본>인가?


마르크스 ‘자본’ 번역한 강신준 교수


“그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문헌적 정본 만들기인데, 이 땅에선 아직 제대로 된 독일어 원전 번역본이 없었다. 이론과실천사가 낸 <자본>은 이른바 ‘운동권 빵잽이’ 6명이 번역을 나눠 했는데, 그 번역초고 최종점검이 내 손에 맡겨졌다. 제1권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부분만 손봐서 냈고, 제2권과 3권은 내가 1990년까지 따로 번역했는데 그나마 모두 절판됐다. 영어판 중역본인 비봉출판사판도 한계가 있다. 독일 관념철학을 토대로 한 변증법적 유물론 부분은 매우 논리적이다. 영어로는 이 부분을 옮기기 어렵다.”

또 한 가지 의미는 우리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노동운동에 문제가 많다.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건 최근 민주노동당이 둘로 쪼개질 때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이 주로 인적 갈등 때문에 갈라섰다는 점이다.”


‘과학의 문제’ 강조한 마르크스





<자본>이 나온 배경을 생각하면 그것은 더욱 문제가 된다. 19세기 유럽에서 번성한 노동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특히 1848년 혁명 때는 파리와 빈이 노동자들 적기로 뒤덮이고 정규군이 쫓겨날 정도였는데도 실패한다. 왜? “마르크스는 그때 결론을 내렸다. 세상의 변화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다, 과학적 논리를 토대로 삼고 과학의 지렛대로 무장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실패한다고.”

우리 노동운동도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변혁운동의 최고급 활동이 정당운동이다. 유럽에선 최근의 민주노동당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강령 논쟁이 벌어진다. 강령이란 노동운동의 과학적 프로그램이다. 잘못됐으면 바꾸든가 삭제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 논란에도 강령 차원의 논쟁은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진행된, 그 엄청난 동력을 지녔던 노동법 개정투쟁 때도 과학적 프로그램이 없었다.”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그것은 17세기 이전에는 없던 ‘역사적으로 특수하고 이상한’ 가난이었다.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가 왜 가난한가? 그것은 노동력 상품의 부등가교환 때문이며, 노동운동의 실천적 과제는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다. 교환이 사회적 합의과정이라면 교환을 바로잡는 방법도 사회적 합의에 따라야 한다. 이 사회적 합의란 다수에 의한 결정을 뜻하며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실행이다.”

촛불시위도 그런 맥락에서 의미를 짚어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정치부문의 민주주의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달성됐으나, 경제부문은 대혁명으로 권력을 쥔 부르주아의 독재가 확립됐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맛본 대중이 경제부문의 민주주의도 요구하게 되는데, 이 경제적 민주주의가 바로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는 1929년 대공황 이전까지 독재 상태로 방치됐으나 대중의 저항과 내부모순 때문에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케인스 체제는 바로 이런 내부모순을 완화하기 위한 과두체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임노동세력으로 구성돼 있는데, 원래 금융자본이 제일 힘이 세다. 케인스 체제는 이 세 세력이 힘을 나눠 갖도록 국가가 강제한 것이다. 2차대전 뒤 30여년간 이 체제는 번영을 구가했다. 그런데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수익률이 떨어진 금융자본이 균점을 깨고 자신이 우위에 서는 자연상태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게 신자유주의고, 그것은 민주주의 붕괴와 독재 상태로의 복귀로 귀결됐다. 지금 한국의 촛불시위는 경제학적으로 보면 거기에 대해 다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가 확실히 발을 빼고 조정역할을 방기하는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추구한다. 촛불시위는 거기에 대한 저항이다.”


경제부분 과감하게 풀어 써


결국 노동운동이나 촛불시위나 불합리한 모순으로 고통당하는 현실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바로잡자는 것이고,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실천이며, <자본>은 그것을 위한 과학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게 강 교수 생각인 셈이다.

그는 사실상 독재를 합리화한 민주집중제 따위를 들고 나온 볼셰비즘을 반쪽 사회주의, 사이비 사회주의라 비판했다. <자본> 번역출간의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레닌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자본>엔 신자유주의에 대한 답도 들어 있단다. “노동자의 임금을 산업자본이 빼앗아 가고 산업자본의 이윤을 이자 형태로 금융자본이 또 빼앗아 간다. 이자라는 건 기생소득이다. 기생소득이 숙주소득을 넘어서면 붕괴한다. 그런데 우리 기업 중에 별로 이익을 내지도 못했으면서 빚을 내서 주주에게 배당하는 빚잔치를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게 신자유주의다. 빚내서 배당하는 신자유주의는 애시당초 시한부 생명이었다. 우리는 그 다음을 논의해야 한다. <자본>은 그 다음 구상에도 필수적이다. 촛불시위 이후도 대비해야 한다.”

번역은 쉽게 읽히게 만든다는 데 역점을 두었다. 특히 경제 부분은 과감하게 풀어서 우리식으로 옮겼다. “‘상품’ 등 제1권 앞부분은 논리적이고 철학적이어서 딱딱하지만, 중반 이후 공장법 등 역사적 사례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만큼 생생하고 재미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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