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 : 음탕한 계집
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양지영.손재석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표지가 도발적이다.그동안 책들고 돌아다니기 무안했다.<플레이보이>지를 들고 돌아다니는 뻔뻔한 사람이란 인상을 줄까봐 지레 조심했다.그래서 항상 책의 뒤편이 바깥을 향하도록 들고 다녔다.하지만 한두번 실수도 있었다.주차장 아저씨 한테 월주차 끊어줄때다.지갑에서 돈 뒤적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워첼의 '퍽 유'하는 겉표지를 노출하고 말았다. 주차장 아저씨의 표정은 진짜 압권이었다.만화같았으면 '띠윙...퍽'하면서 쌍코피가 조르르 흘렀을 것이다.아저씨는 영수증 끊어줄 때도 내 옆구리에 끼인 책을 흘깃 흘깃 훔쳐봤다.책의 부피와 공사다망함이 겹쳐 거의 이십여일만에 책을 다 읽었다.두가지 이유로 마음이 홀가분하다.숙제를 다 마친 가벼움과 더이상 책 표지를 돌리고 다닐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번거로움으로 부터의 자유때문이다.

책의 들어가는 글이 상당히 길다.초반부터 '이걸 계속 봐야 하나?"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미국 저널리스트 글을 볼 때 느껴지는- 산만함이란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 낯선 접근들 때문이다.흔히 내가 곤란을 겪는 것들은 '변죽때리기'방식이다.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애둘러서 주제의 윤곽을 보여주는 방식은 가끔 혼란을 야기한다.애두르는 방식은 사실 공유된 문화의 점성에 비례하여 효과가 배가된다.타문화권에 있으며 또 번역을 통한-번역가의 자질이 또 개입되는 -이런 상황에서 애두르는 글쓰기가 효과를 발휘하기 보다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들어가는 글부터 워첼은 수많은 영화배우과 문학인,사건사고의 피해,피의자들의 실명을 거론한다.대개 하고자 하는 말은 거론 된 여성들의 왜곡된 삶과 그들을 억압한 마초적 사회의 한심함에 대한 것이다.읽는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그 예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또는 얼굴이라도 한번쯤 본 기억이 있다면 재미있을 수 있다.하지만 전혀 그녀들의 삶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경우 여기 등장하는 이름들은 실체를 갖지 않는 문자외에 별 의미가 없어진다.물론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에 대해 알지 못하는 독자의 지식수준을 책할 수도 있다.하지만 미국의 명사들에 대해 일반인들이 알면 얼마나 알 것인가.엘리자베스 테일러,비비안 리,마돈나,쉐어,드류베리모어.....이정도에선 반가와진다.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에이미 피셔,앤 색스턴,실바아 플라스,릭 골드슈타인.... 물론 책을 따라가다 보면 주요인물들의 경우 얼핏 그림이 잡힌다.하지만 무수히 등장하는 유명,저명,인기인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읽을 수 밖에 없다. 또 한가지 책 번역의 문제도 책읽기를 더디게 하는 일등공신이다.우리 문장에 주어부 다음에 쉽표로 끊어지는 형용사부가 4-5개 들어가고 서술부가 나오는 문장이 어디 있는가? 어떨 때는 서술어를 보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이거 주어가 어디지?"하고 주어 찾으러 거슬러 올라가야한다.대여섯줄 올라가서 보면 거기에 주어가 숨어있다. <타임><뉴스위크>등의 에세이를 대학다닐때 공부삼아 읽어본 사람이면 알것이다.이런 류의 에세이에는 쉼표로 문장을 끊어서 수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한국문장에 옮기고 있다.이런 경향은 책 말미로 오면 점점 심해진다.

이제 책 내용을 좀 보자.책의 첫장에서 워첼은 <삼손과 데릴라>의 성경이야기를 시작한다.삼손을 망친 여자 데릴라에 대한 변론이다.그녀의 지적은 생각없이 받아들였던 성경 이야기의 성정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팜프 파탈의 원조가 되어 버린 데릴라는 "한밤중"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여성에 대한 두려움,여성성으로 인해 야성을 잃어버리는 남성성의 탈취에 대한 우려.이러한 불안감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여성은 마녀로 여우로 악마로 규정된다.워첼은 반문한다.'남자들이 한 여자로 인해 붕괴될 만큼 그렇게 허약했는가? 그걸 인정하는 것인가? '라고 말이다.그녀는 삼손의 예를 들며 파탄의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는 것은 남자 자신들의 실책을 덮어두고 무마해버리려는 희생양 정책일 따름이라고 결론 짓는다.워첼의 이야기는 조금더 현대로 올라온다.에이미 피셔라는 10대 소녀의 이야기-피셔는 유부남 애인을 둔 10대소녀로 그의 부인을 죽이려했다-를 통해 언론과 사회가 이 사건의 핵심을 왜곡한 것에 대해 통렬하게 비난한다.이야기는 남자들의 소녀취향과 이에 자발적으로 빠져드는 10대 소녀들의 심리에 대해 말한다.사회심리학자 길리건화 브라운의 <교차로>를 인용한 10대 소녀들의 정서적 아노미상태는 아주 인상적이었다.너무 긴 이야기라 전부 다 쓸 수는 없지만 그 설명이 아주 설득력이 있다. 워첼은 힐러리 클린턴이 아내라는 위치로 자신을 숨기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한다.항간에 떠도는 힐러리가 페미니스트라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한다.또 수년전 외신 기사의 절반을 차지한 OJ심슨 사건에 대해서도 말한다.피해자인 니콜 브라운과 그녀의 가족이 살인교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즉 팔아넘기기식 결혼과 아내 폭력에 대한 침묵이 그들 사이의 숨겨진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긴긴 이야기 끝에 엘리자베스 워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마돈나의 말속에 있다."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만 제대로 가르친다면 남자에 대해서는 가르칠게 없을 거예요" 워첼은 사회적 억압과 편견 속에서도 경험을 넓히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친다.여성이 가진 욕망이나 성적 능력 역시 자신의 한부분임을 인정하고 여자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론적 페미니즘서가 아니다.오히려 저널리즘적인 페미니즘책이라고 봐야한다.미디어속 인물들이나 유명인들이 여성문제의 사례로 등장하는 것이 과연 일반성을 가질 수 있을 지 의문이된다.여성이 공통적으로 받는 억압이란 측면에서 보면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하지만 개별 여성이 받는 질적 억압과 계급적 억압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얻을 수 없다.워첼이 가진 저널리즘적 가벼움과 미국 사회의 실용적 관심이 여기에 한 몫한다.신문에 난 대중문화 기사 읽 듯 즐겁게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글래머러스한 -표지를 본다면-저자의 상대적으로 가벼워보이는 문제의식은 현재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여성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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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4 18: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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