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의 세계사 히스토리아 문디 4
윌리엄 맥닐 지음, 김우영 옮김 / 이산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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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가 정복하기 전 멕시코 문명권의 인구는 2500만 명에서 3000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아스텍 제국을 정복할 때 코르테스가 거느렸던 군대는 600명 미만이었다. 아스텍 최후의 왕 몬테수마(1480-1520)는 처음에는 스페인 사람들을 신이라고 믿었을지 몰라도, 직접 상대해본 다음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처음 본 말과 화기(火器)는 놀라움과 공포의 대상이었겠지만 일단 무력충돌이 시작된 다음에는 스페인군의 군마나 총포의 위력이 대단치 않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정복자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복도 마찬가지였다. 먼 바다를 건너 신대륙까지 원정할 수 있었던 스페인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은 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문명이 갖는 각별한 매력이나 스페인이 보유한 기술적 우위만으로 원주민이 오랫동안 고수해온 생활방식이나 신앙을 송두리째 저버리게 한 까닭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하다. 멕시코와 페루의 전통적인 종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시카고대학 역사학과의 윌리엄 맥닐 교수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전염병’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코르테스의 승리 비결

 

스페인 정복 직전 아메리카 원주민의 총인구는 1억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렇게 많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코르테스의 정복을 계기로 원주민과 유럽인이 함께 섞여 살기 시작한 지 50년도 되지 않은 1568년에 멕시코 인구는 코르테스가 상륙하던 당시의 10퍼센트에 불과한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감소세가 둔화되긴 했지만 그 후 50년 동안에도 인구는 계속 줄어들어 1620년에는 약 160만 명이라는 최저치에 도달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인구는 아주 조금씩 늘어났을 뿐이다.

 

인구가 이토록 엄청나게 줄어든 원인은 유럽인들이 가져간 병원균에 있었다. 코르테스는 1520년에 아스텍 군대에 쫓겨나 점령지였던 테노치티틀란(오늘날의 멕시코시티)에서 퇴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코르테스가 퇴각한지 넉 달 후 테노치티틀란에 천연두가 발생했다. 코르테스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던 지휘관을 비롯해 수많은 아스텍인들이 죽어갔다. 천연두를 처음 경험한 아스텍인들은 전염병의 공포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천연두에 대해 유전적 또는 후천적 면역력이 전혀 없었으므로 질병이 발생한 초기에 인구의 25-30%가 죽어나갔다.

 

무수히 죽어가던 원주민들의 눈에 기이해 보인 현상이 하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질병이 원주민만 죽이고 스페인인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같은 감염증이라도 과거에 그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집단에는 피해를 주지 않지만, 경험한 적이 없는 집단에 침입하면 감염자 상당수의 목숨을 앗아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일방적인 현상은 엄청난 심리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초자연적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전투를 벌이는 양자 중 어느 쪽이 신의 은총을 받고 있는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특히 코르테스가 퇴각한 뒤 발생한 천연두는, 스페인군을 공격했던 자들에 대한 신의 징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결과 아스텍인들 중 일부가 코르테스에게 자진해서 복종하기로 했고, 스페인군은 그들의 도움으로 테노치티틀란을 다시 정복할 수 있었다.

 

만일 그 때 천연두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코르테스 원정군은 승리를 얻기가 더욱 힘겨웠거나 어쩌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피사로의 페루 침략도 마찬가지였다. 멕시코에서 발생한 천연두는 1525년경에 잉카제국까지 침범했다. 그 결과는 아스텍에서 일어났던 것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잉카 제국의 왕은 군대를 지휘하던 도중 천연두에 걸려 죽었고, 왕위계승자마저 사망해 적통을 이을 후계자가 없어져버렸다. 결국 내란이 일어나 잉카 제국의 정치구조가 결정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피사로와 그 부하들이 쿠스코에 도착해 잉카의 보물을 약탈해갔다. 그들은 이렇다 할 군사적 저항도 받지 않았다.

 

침략자를 일방적으로 두둔한 신

 

스페인인들과 원주민들은 전염병을 신이 내린 무서운 징벌이라고 믿었다. 역병을 신의 노여움으로 해석하는 것은 <구약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이었다. 치명적 전염병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원주민의 종교 역시 신들이 인간에 대한 노여움을 행동으로 나타낸다고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스페인인은 어렸을 때 이미 이 병에 감염된 적이 있어서 실질적인 면역력을 갖고 있었다. 양측이 역병의 원인을 똑같이 종교적으로 해석했다면 신이 일방적으로 침략자들만 두둔하는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기독교도의 신뿐만 아니라 아스텍의 신들마저 백인 침략자의 모든 행위를 인정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아연실색한 원주민들로서는 스페인의 우월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 수도 적고 행동도 잔인하고 비열했지만, 스페인인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아메리카의 전통적인 권력구조는 무너졌고, 원주민들은 오랫동안 숭배해온 신들을 버렸다. 스페인인이 숭배하는 신의 우월성이 유감없이 입증된 마당에 전통적인 원주민의 신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종교, 사제단, 생활양식이 존속되기는 어려웠다. 이런 분위기는 집단개종으로 이어졌고 선교사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성직자, 총독, 지주, 광산주, 징세인 등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명령하면 원주민은 순순히 복종해야만 했다. 신과 자연의 섭리가 한결같이 원주민의 전통과 신앙을 저버리는 마당에 저항할 무슨 근거가 남아있었겠는가.

 

물론 전염병만이 원주민 공동체 붕괴의 유일무이한 원인은 아니었다. 침략을 당한 후 원주민들은 절망감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스페인인의 군사행동, 대규모 공사를 위해 강제 징집된 노동력에 대한 스페인인의 학대도 전통적 사회구조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그러나 폭력이나 잔혹행위가 원주민 인구 급감의 ‘주된 요인’은 아니었다. 조세납부자이자 노동력이기도 한 원주민의 인구 감소는 스페인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원주민 사회를 파괴시킨 주범은 분명 전염병이었다.

 

인구의 3분의 1을 희생시킨 천연두가 창궐한 뒤 1530-1531년에는 멕시코와 페루에 홍역이 번졌다. 15년 후인 1546년에는 발진티푸스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발생했다. 1558-1559년에는 인플루엔자가 아메리카대륙을 휩쓸었다. 16세기와 17세기 내내 디프테리아와 유행성이하선염, 그리고 두 가지 치명적 전염병인 천연두와 홍역이 간헐적으로 계속해서 발생했다. 원주민을 보호하려는 스페인 선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인구의 90% 이상이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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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틀 매드니스 -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지음, 표정훈.김연수.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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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전 세계의 고전을 거의 다 갖춘 서재를 가진 남자가, 다른 한쪽에는 딸을 열셋이나 둔 남자가 있다. 과연 이 둘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이 질문에 대해 필립 호퍼(1898~1984)는 ‘딸을 열셋 둔 남자’가 더 행복하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행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탐욕 가득한 순간들을 겪어야 하는 수집가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그는 질투와 좌절의 고통에 몸서리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진정한 수집가가 아니다.” 필립 호퍼는 하버드 칼리지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도서 기증자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랠프 엘리스 2세는 열다섯 살 때부터 조류학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찌나 미친 듯이 책을 모았던지, 32세 되던 1940년에 어머니는 그를 요양소로 보내버렸다. 아들이 집안 재산을 다 날려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미치지는 않았다.”는 진단과 함께 엘리스는 곧 요양소에서 나왔고, 다시 예전보다 더욱 열심히 책 사냥에 나섰다. 1945년 그는 자신의 책을 모두 캔자스 대학에 기증했다. 기증의 대가로 엘리스가 대학 측에 요구한 것은, 애장서들을 보관할 수 있는 보금자리와 자신을 위한 사무실뿐이었다. 캔자스 대학 측은 그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엘리스는 어느 호텔 방에서 폐렴으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역사 속에 등장한 애서광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필사본 수집가인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몬테펠트로(1422~1482)는 자신이 소장한 책은 반드시 펜으로 쓰인 것이라야 하며, 그 밖의 다른 것은 수집가를 부끄럽게 만든다고 여겼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유행의 물결을 타고 있던 인쇄본은 그의 서재에 결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책이 대량생산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역사적 전환기에 종종 목격할 수 있다. 1980년대 콤팩트디스크(CD)가 널리 보급될 무렵 엘피(LP) 애호가들이 보였던 냉소적 반응, 21세기 초 디지털 카메라가 확고한 대세로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필름카메라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일부 사진가들의 모습과도 닮아 보인다. 


2005년 다국적 미디어조사기관인 ‘NOP월드’가 세계 30개국을 대상으로 주당 독서시간을 조사한 결과 세계 평균 독서시간은 6.5시간이며 인도인이 주 평균 10.7시간으로 1위를, 그중 한국인의 독서시간은 3.1시간으로 평균시간의 절반에도 못 미치며 30개국 중에서 최하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책 읽는 시간이 세계 꼴찌를 달리는 우리 처지에서 보면, ‘개도 안 먹는’ 책을 수집하는 일에 미쳐버린 ‘애서광’들의 이야기는 낯설고 신기하기만 하다.


자기 재산을 써서 책을 사들인다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대학도서관 같은 공공기관의 소장 도서를 몰래 도둑질해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컬렉션’을 만드는 애서광도 있다. 스티븐 블룸버그(1948~ )는 20세기 최대의 책 도둑이다. 그는 북아메리카 전역의 268개 도서관에서 모두 2만3,600여 권의 책을 훔쳤는데, 지역별로는 미국 내 45개 주를 비롯해 캐나다의 두 개 주까지 포함된다. 그 일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하버드 대학, UCLA, 듀크 대학, 미네소타 대학, 뉴멕시코 대학, 코네티컷 주립도서관, 워싱턴 주립대학, 미시간 대학, 위스콘신대학 등등……. 훔친 책의 무게는 19톤에 달했다.


블룸버그는 미네소타 대학 도서관에서 그 대학 교수의 신분증을 훔친 다음, 전문 연구자를 사칭해 다른 도서관들을 자유롭게 이용했다. 도서관에는 품이 넉넉한 옷을 입고 들어가, 그 안쪽에 꿰매어 붙인 커다란 주머니에 책을 숨겨가지고 나오는 수법을 썼다. 일단 책을 고르면 대출카드 봉투를 떼고, 장정 안쪽에 있는 도서관 스티커도 떼어낸다. 책 속에 혹시 경보장치가 있는지 확인한 다음, 도서관 인장표시를 지우기 위해 책모서리를 사포로 문지르고 나서 페이지를 다시 모아 풀로 붙인다. 빼돌린 책은 엘리베이터에 싣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책이 워낙 많아서 트럭에 싣는 것도 큰일이었는데, 블룸버그는 지나가던 학생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목록별 수집’ 방식으로 책을 훔쳤다. 특정 주제들을 정해놓고, 그 주제와 관련된 ‘모든 책’을 완벽하게 수집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자료 컬렉션’―‘블룸버그 컬렉션(!)’―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업자의 고발로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훔친 책은 시가로 무려 2천만 달러에 달했지만 책을 훔친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체포된 후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의료시설에 감금당했을 때 같은 시설에 있던 마피아 두목이 물었다. “재주도 좋은 놈이 보석도 아닌 책 따위를 훔쳤느냐?” 블룸버그는 대답했다. “팔기 위해 책을 손에 넣은 게 결코 아닙니다. 다만 책을 갖고 있을 생각이었지요.”


블룸버그는 물론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애서광들이 역사와 문명에 끼친 공헌은 대단하다. 그리스 고전 필사본을 찾아내기 위해 유럽 곳곳의 수도원 도서관을 찾아 헤맨 ‘최초의 근대인’ 페트라르카(1304~1374)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탈리아 인문주의는 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저히 다스릴 수 없고 채워지지도 않는 욕망 하나’를 갖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책을 향한 욕망’이었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28개국을 대상으로 도서관 현황(2001∼2002년 기준)을 분석한 결과, 미국 하버드대는 1518만1349권, 예일대는 1111만4308권, UC버클리는 957만2462권에 이르는 장서를 자랑했다. 일본 도쿄대도 811만2335권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 가운데 장서가 가장 많은 서울대는 249만3919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 경북대(211만5085권), 연세대(187만6233권), 고려대(171만5170권) 등의 순이었다.


장서의 양도 문제지만 질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여러 해 전 논문 자료 수집을 위해 숱한 국내 대학도서관들을 일일이 찾아다닌 경험이 있다. 그러나 서울 시내 주요 대학도서관의 모든 자료를 다 합쳐도 논문 한 편 작성할 수 없다는 참담한 결론에 도달했다. 필요한 자료의 절반도 구할 수 없었다. 국내 도서관 자료로는 연구 활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하긴 몇몇 대학도서관의 도서구입 행태를 보면 납득 못할 일도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대학도서관에는 장서 수를 채우기 위해 ‘킬로 그램당 얼마씩’ 쳐서 사들인 싸구려 책들이 서가에 꽂혀있다. 이러고도 입으로는 ‘지식강국’을 말한다. ‘애서광’ 육성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라도 나와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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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자서전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조성기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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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거장이자 영혼의 의사였던 카를 융(1875-1961)의 자서전은 네댓 살 유년시절부터 시작한다. 그는 집 앞에 혼자 앉아 모래장난을 하다가 챙이 넓은 모자에 길고 검은 외투를 입은, 마치 여자 옷을 입은 남자 같은 형상이 걸어오는 것을 보는 순간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공포로 어쩔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예수회 수도사(Jesuit)다!”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영어사전에서 ‘Jesuit’를 찾아보면 ‘예수회 수도사’와 더불어 ‘음험한 책략가, 음모가’라는 풀이가 나온다. 형용사형인 ‘Jesuitical’에는 ‘교활한, 음험한, 궤변적인’이란 뜻풀이가 나온다. 개신교 전통을 지닌 영어권에서의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스위스 출생이지만 개신교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난 융은 가톨릭의 이미지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 며칠 동안이나 융은 소름끼치는 공포 때문에 수족을 꼼짝할 수 없었다. 물론 그는 나중에 그 검은 형상이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가톨릭 수도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습적 종교와의 결별

11세부터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융에게 신은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경험이었다. 신의 존재는 관념, 즉 생각해서 고안해낸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에게 신의 존재는 마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벽돌과도 같이 너무나 분명했으며, 신은 적어도 그에게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경험이었다. 압도적인 체험을 한 융은 목사인 아버지의 설교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하는 말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전혀 믿지 못하거나 소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처럼 진부하고 공허하게 들렸다. 그는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정말 이해하고 있을까?”라는 의심도 생겼다.

교회는 융에게 점점 괴로운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뻔뻔스럽다고 할 정도로 큰소리로 신에 대한 설교를 했지만, 융은 아무도, 심지어 목사까지도 그 비밀을 모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정말로 신의 비밀을 아는 자라면 그 비밀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을 그토록 진부하고 감상적인 표현으로 더럽힐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더 이상 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적어도 융에게 그곳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완전히 혼자라는 것을 느꼈다. 종교 문제에 관해 그는 누구와도 대화의 접촉점을 찾을 수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소외감과 불신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 그는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의 빛과 어둠은 비록 중압감을 주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사실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종교

김나지움 시절(10대 후반) 그는 아버지와 종교문제로 언쟁을 벌이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어떤 특별한 문제가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서는 가장 명백한 체험이었던 신에 대한 체험을 아버지가 갖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융은 아버지가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신앙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융은 아버지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교회와 그 신학적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는가를 보았다. 융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신학자들 중에 ‘어둠을 밝히는 빛’을 자기 눈으로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만일 그들이 그 빛을 보았다면 ‘신학적인 종교’를 가르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융 부자가 처한 종교적 상황은 근대 유럽의 세속화의 한 예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럽 사회는 중세의 ‘종교 문화’에서 근대의 ‘종교 신앙’으로 변화를 겪었다. 종교 문화가 타성적인 인습과 규범인 데 반해, 종교 신앙은 개개인의 숙고된 믿음이며, 내세와 신의 권능에 대한 긍정을 말한다. 종교 문화에서 종교 신앙으로의 이행은 ‘넓이’에서는 많은 부분을 잃었지만 그 대신 ‘깊이’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숙고된 개인적 신앙은 습관으로서의 종교에 비해 한층 높은 안정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수’는 줄어들지만, 대신 ‘정예화’를 수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화’는 ‘종교적 부흥’과 항상 양립이 가능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신앙심과 세속화는 반비례했다. 하나가 내려가면(세속화가 만연되면) 다른 하나는 올라간다(신앙심은 고양된다). 역사학자 헥스터는 그것을 ‘시소 이론(see-saw theory)’이라고 이름 지었다.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1907년 2월 빈에서 융과 프로이트(1856-1939)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오후 1시에 만나 무려 13시간이나 그야말로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융은 프로이트를 일컬어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무척 총명하고 예리하며 어느 면에서나 괄목할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가 이상할 정도로 성이론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융에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항상 비종교성을 강조해온 프로이트가 일종의 ‘교리’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잃어버린 ‘질투하는 신’ 대신 ‘성욕’이라고 하는 또 다른 강압적인 형상을 슬쩍 바꿔 넣은 셈이었다. ‘성적 리비도’가 ‘숨은 신’의 역할을 대신 맡은 것이다.

이러한 변신은 프로이트에게 이로운 점이 있었다. 성이론이라는 새로운 원리는 과학적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고, 모든 종교적인 부담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합리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두 대극, 즉 ‘야훼’와 ‘성욕’은 결국 동일한 것으로서 단지 명칭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프로이트는 잃어버린 신을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찾았다. 융은 프로이트에게서 또 다른 교조주의를 발견한 것이다.

융은 프로이트와 다른 견해를 피력한 책을 집필하면서 이것이 그와의 친밀한 관계를 희생시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두 달 동안이나 글을 쓰지 못하고 갈등으로 괴로워했다.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숨겨야 할 것인가, 두 사람의 친교가 깨지는 모험을 할 것인가? 결국 그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고, 예상대로 그것은 프로이트와의 친교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융의 친구들은 대부분 떠나갔다. 사람들은 그의 책을 ‘쓰레기’라고 대놓고 말했다. 늘 이런 식의 외로운 선택을 했던 그는 고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죽기 2년 전 융은 BBC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기자는 융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수백만 시청자들은 융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긴장하며 기다렸다. 융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신을 압니다.”

<만들어진 신>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무신론 근본주의자 리처드 도킨스는 융을 과연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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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자작나무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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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출신의 세르베투스(1511-1553)는 신학의 돈키호테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종교적으로 과열된 시대에 살면서 감히 삼위일체설을 부인했으니 가톨릭과 개신교의 가르침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도망자 신세가 된 그는 프랑스에서 본명을 숨기고 살았다. 누구와도 정신적으로 교류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는 자신의 신학적 확신을 편지로나마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불행하게도 이 눈먼 사람이 신뢰를 바친 사람은 칼뱅이었다.


1546년 그는 저서 <그리스도교 회복>의 원고를 칼뱅에게 우편으로 보내면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가 원고와 함께 보낸 편지에는 “교황 이론의 일부인 삼위일체와 유아세례가 악마의 교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둘 사이에 편지가 몇 번 오간 뒤, 칼뱅은 그와 절연하고 그가 보낸 원고를 보관했다. 칼뱅은 이 때 ‘이단자’ 세르베투스를 죽일 것을 결심한다.


1553년 칼뱅은 보관해오던 세르베투스의 원고와 편지를 대리인을 통해 슬그머니 가톨릭 종교재판소 측에 넘겼다. 개신교 지도자가 가톨릭교회의 스파이 노릇을 한 셈이다.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원수인 가톨릭을 이용해 ‘이단자’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손 안 대고 코 풀려던 칼뱅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세르베투스가 감옥에서 도망친 것이다.


몇 달 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세르베투스가 돈키호테처럼 하필이면 제네바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칼뱅의 명령으로 즉각 체포되어 이단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만장일치로 산 채로 불태워지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그것은 모든 형벌 중 가장 가혹한 것이었다. 잔인성으로 이름 높은 중세에도 대개 사형수들은 화형대에 묶이기 전에 미리 목이 졸려 있거나 아니면 마취된 상태였다. 그런데 개신교 최초의 이단자 처형이 가장 끔찍한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불길 속에서 고통스럽게 외쳤다.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칼뱅의 세르베투스 처형은 볼테르의 말대로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다. 그것은 개신교 본래의 이념을 부정한 사건이었다. 사실 ‘이단자’란 개념 자체가 개신교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개신교는 모든 사람에게 성서 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를 인정했다. 실제로 루터, 츠빙글리 등은 종교개혁 운동의 아웃사이더나 극단론자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폭력적인 조치에 대해서도 분명한 거부감을 보였던 것이다.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불태워 죽임으로써 개신교가 쟁취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단번에 없애버렸다. 이 폭력으로 그는 단숨에 가톨릭교회를 능가해버렸다. 가톨릭교회는 독자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단 한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울 때까지 천 년 이상을 망설였다. 그러나 칼뱅은 통치한지 겨우 몇 십 년 만에 개신교의 명예를 짓밟았다. 도덕적인 면에서 그의 행위는 에스파냐의 가톨릭 종교재판 창시자 토르케마다의 모든 비행보다도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장로교가 다수를 점하는 한국 개신교는 칼뱅을 위대한 종교개혁가요 장로교의 창시자로서 일방적으로 우상시해왔다. 말끝마다 ‘칼뱅주의’를 내세우며 ‘정통’을 들먹이는 개신교의 독선적인 모습에서, 칼뱅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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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흉내만 내면 뭐해, 문제의식이 있어야지”
승계호 미국 텍사스대 인문학 석좌교수 인터뷰
 

2007년 06월 11일 (월) 09:49:05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반세기 이상 나는 서양철학을 이해하고자 했다.” 승계호 美 텍사스(오스틴)大 석좌교수(74세, 사진)는 ‘나’라는 말 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타자에 기대어 주장하지 않는 노학자의 자신감이랄까. 서울나들이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려는 승 교수를 붙잡고 물었다. ‘한국 인문학에 대한 나로서의 의견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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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한에서 한국의 철학자를 두루 만난 승 교수는 정부의 인문학 진흥방안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거, 그거 그래서는 안돼요.” 그는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다. “인문학은 문화를 정화하는 일이오. 문화를 정화하는 게 뭐요. 무엇보다 우리말을 정화하는 것에서 출발하지요.” 말 정화를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는 곳에서 자금이 지원된다고 인문학이 발전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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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인문학 연구 소용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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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워진 우리말”에 대한 그의 강연이 쏟아졌다. “기자 선생, 아(아래아)리나래가 뭔지 아시오” 오리가 많은 강, 압록강. “중국 문자가 들어와서 우리의 원래 말이 더러워졌어요. 뫼란 말이 있는데도 산이라고 씁니다. 원래 백두산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 ‘어제’는 우리말이 있지요. 그럼 ‘내일’은 우리말로 뭐요. 없잖아요. 원래 없었겠어요. 없어 진거요. 사라진 거요. 죽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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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나 영어에 대한 생각도 비슷했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일본문화를 떨어내자는 말을 합디다. 正義가 뭐요. 일본에서 받아들인 정의는 천황권위의 질서를 의미하지요. 얼마나 부끄럽소. 사회정의는 공정한 거잖아요. ‘고른 뜻’ 이렇게 쓰면 얼마나 좋소. 뭐 요즘에는 지도자를 리더라고 부릅디다. 그거 독자(reader)잖아요. 외국어조차도 일본을 통해서 이중번역 돼 들어오는 수준인데 어떤 문화가 만들어 질 수 있소. 우리말도 제대로 못쓰면서 인문학연구가 무슨 의미가 있소. 거기에 돈 줘서 문화정화도 제대로 못하면 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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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을 이었다. “한국 성형수술 기술이 최고지요. 아름답게 하려는 건데 꼭 서양사람 모습으로 얼굴이며 몸을 만들고 있어요. 아름다워지는 것은 본성에서 나와야지, 그러려면 말의 본성이 아름다워져야지요. 한국 인문학은 서양사람 얼굴을 만드는 성형수술 같은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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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동안 만났던 한국의 철학자들에 대한 쓴 소리도 이었다. “철학회에서 칸트니 플라톤이니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왜 그런지 물어봤지요. 한 학자가 그런 이름을 따야 권위가 선답디다.” 이 대목에서 그는 껄껄 웃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옛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거죠. 왜 자기 이야기할 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합니까. 지금 하는 꼴은 허섭이오.” 10년 전부터 포스트모던 유행이 불었다고 귀뜸했다. “것도 그래. 서양처럼 근대사를 거쳐서 나오는 건데, 한국은 근대 경험이 없잖아. 마치 구교도 없는 곳에서 종교개혁을 한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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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학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거라 말했다. 하지만 승 교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더 큰 문제는 학자들이 문제의식이 없어요. 문제의식이 있어야 의제도 설정하고 해결책도 찾을 거 아니오. ‘인문학 위기’가 아니라 본질을 못 찾고 잘못 연구해왔던 거요. 우리 자신의 본체도 깨닫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적인 연구를 하느냐는 거요. 우리말로 우리 생각을 내뱉을 수도 없는 수준에서 서양철학을 흉내 내면 뭐하나요. 이거 미장문화요. 누가 그랬고 누가 그렇다는 식으로 모방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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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대한 비판은 생활의식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한국 많이 변했죠. 어리둥절해요. 아파트들 전부 넓게 지어 지냅디다. 그런데 창문만 열어보면 얼마나 더러워요. 그런 더러운 도시 속에 아름다운 아파트는 없지요. 차도 큰 차만 타고 다니더군요. 길은 좁은데 어떻게 그래요. 차에 맞게 길을 어떻게 맞춰요. 길에 맞게 차를 맞춰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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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학에서 부는 ‘세계화 바람’에 대해 물었다. “그거 세계화 아니잖아요. 솔직하게 써야지요. 미국화잖아요. 세계화라면서 태국에 관심 있나요. 제 나라 말도 제대로 못 배운 아이들에게 유학 보내고 영어 가르치고, 도대체 무슨 소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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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융합’과 같이 학문을 전체적인 지적활동으로 보자는 말에 대해 승 교수는 “좋긴 하고, 학자들이 그런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독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쉽게 말 못하잖아요. 학문 한 가지하기도 힘듭니다. 통섭 학문하는 사람은 천만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할 겁니다. 진짜 그거 하려는 사람은 무서워서 엄두가 안 나는 그런 겁니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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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교수 일만 제대로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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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에서 그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내게 그런 걸 물어요. 교수님은 아직도 평교수입니까라고. 학계에 있는 친구들 말을 들으면 학자들이 교수가 되고 싶어 하고, 그것도 서울대 교수가 되고 싶어 하고, 장관되고, 국무총리되고 이래야 교수 제대로 하는 거고, 그게 소망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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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교수는 후예양성을 학자의 최고 덕목으로 쳤다. “후예를 기르는 것은 평교수가 하는 일입니다. 장래의 인물을 기르는 이런 성직이 어디있소. 신문에 논설 쓰고, TV 스타가 되려고 하지 말고 평교수 일을 명예롭게 생각해야 해요. 장래에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의 인생관과 일생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나요. 그런 일을 하는 평교수가 이제 賤職이 돼 버렸어요.” 교직이 성직이라는 말과 함께 이어지는 논란이 노동조합이다. “교수 노조를 반대하지 않아요. 교수들 대우가 시원치 않아서 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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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교수는 옷에 낀 먼지를 털어내듯 시원스럽게 말을 떨어내고 간다고 했다. “교수는 진리를 실천하는 거지, 인기에 영합하려면 교수 할 필요 있나. 한 마디만 하지요. 교수는 교수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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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교수는 1995년 한국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한 이후 12년 만에 방한했다. 이번에는 가족들과 함께 보름간 서울에서 머물면서 다양한 한국의 철학자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완전하게 알아들을 때까지, 상대방의 말을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팽팽하게 대화했다. 영어가 섞여 나오면 우리말로 무슨 의미인지 도리어 물어보고 가능한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면지를 꺼내 그림을 그려 설명하고 상대방 팔을 붙들고 흔들면서 설득했다.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할 때는 흥분에 도취해 체면을 던져두고 일어서서 방방 뛰기를 서슴지 않았다. 젠체하지 않는 모습이 담백해 보였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승 교수의 아내가 걱정했다. 막말해도 되냐고. 승 교수는 웃으며 답했다. “뭐, 내일이면 가는데.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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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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