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자작나무 / 1998년 4월
평점 :
품절
에스파냐 출신의 세르베투스(1511-1553)는 신학의 돈키호테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종교적으로 과열된 시대에 살면서 감히 삼위일체설을 부인했으니 가톨릭과 개신교의 가르침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도망자 신세가 된 그는 프랑스에서 본명을 숨기고 살았다. 누구와도 정신적으로 교류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는 자신의 신학적 확신을 편지로나마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불행하게도 이 눈먼 사람이 신뢰를 바친 사람은 칼뱅이었다.
1546년 그는 저서 <그리스도교 회복>의 원고를 칼뱅에게 우편으로 보내면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가 원고와 함께 보낸 편지에는 “교황 이론의 일부인 삼위일체와 유아세례가 악마의 교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둘 사이에 편지가 몇 번 오간 뒤, 칼뱅은 그와 절연하고 그가 보낸 원고를 보관했다. 칼뱅은 이 때 ‘이단자’ 세르베투스를 죽일 것을 결심한다.
1553년 칼뱅은 보관해오던 세르베투스의 원고와 편지를 대리인을 통해 슬그머니 가톨릭 종교재판소 측에 넘겼다. 개신교 지도자가 가톨릭교회의 스파이 노릇을 한 셈이다.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원수인 가톨릭을 이용해 ‘이단자’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손 안 대고 코 풀려던 칼뱅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세르베투스가 감옥에서 도망친 것이다.
몇 달 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세르베투스가 돈키호테처럼 하필이면 제네바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칼뱅의 명령으로 즉각 체포되어 이단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만장일치로 산 채로 불태워지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그것은 모든 형벌 중 가장 가혹한 것이었다. 잔인성으로 이름 높은 중세에도 대개 사형수들은 화형대에 묶이기 전에 미리 목이 졸려 있거나 아니면 마취된 상태였다. 그런데 개신교 최초의 이단자 처형이 가장 끔찍한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불길 속에서 고통스럽게 외쳤다.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칼뱅의 세르베투스 처형은 볼테르의 말대로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다. 그것은 개신교 본래의 이념을 부정한 사건이었다. 사실 ‘이단자’란 개념 자체가 개신교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개신교는 모든 사람에게 성서 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를 인정했다. 실제로 루터, 츠빙글리 등은 종교개혁 운동의 아웃사이더나 극단론자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폭력적인 조치에 대해서도 분명한 거부감을 보였던 것이다.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불태워 죽임으로써 개신교가 쟁취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단번에 없애버렸다. 이 폭력으로 그는 단숨에 가톨릭교회를 능가해버렸다. 가톨릭교회는 독자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단 한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울 때까지 천 년 이상을 망설였다. 그러나 칼뱅은 통치한지 겨우 몇 십 년 만에 개신교의 명예를 짓밟았다. 도덕적인 면에서 그의 행위는 에스파냐의 가톨릭 종교재판 창시자 토르케마다의 모든 비행보다도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장로교가 다수를 점하는 한국 개신교는 칼뱅을 위대한 종교개혁가요 장로교의 창시자로서 일방적으로 우상시해왔다. 말끝마다 ‘칼뱅주의’를 내세우며 ‘정통’을 들먹이는 개신교의 독선적인 모습에서, 칼뱅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