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흉내만 내면 뭐해, 문제의식이 있어야지”
승계호 미국 텍사스대 인문학 석좌교수 인터뷰
 

2007년 06월 11일 (월) 09:49:05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반세기 이상 나는 서양철학을 이해하고자 했다.” 승계호 美 텍사스(오스틴)大 석좌교수(74세, 사진)는 ‘나’라는 말 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타자에 기대어 주장하지 않는 노학자의 자신감이랄까. 서울나들이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려는 승 교수를 붙잡고 물었다. ‘한국 인문학에 대한 나로서의 의견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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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한에서 한국의 철학자를 두루 만난 승 교수는 정부의 인문학 진흥방안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거, 그거 그래서는 안돼요.” 그는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다. “인문학은 문화를 정화하는 일이오. 문화를 정화하는 게 뭐요. 무엇보다 우리말을 정화하는 것에서 출발하지요.” 말 정화를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는 곳에서 자금이 지원된다고 인문학이 발전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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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인문학 연구 소용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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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워진 우리말”에 대한 그의 강연이 쏟아졌다. “기자 선생, 아(아래아)리나래가 뭔지 아시오” 오리가 많은 강, 압록강. “중국 문자가 들어와서 우리의 원래 말이 더러워졌어요. 뫼란 말이 있는데도 산이라고 씁니다. 원래 백두산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 ‘어제’는 우리말이 있지요. 그럼 ‘내일’은 우리말로 뭐요. 없잖아요. 원래 없었겠어요. 없어 진거요. 사라진 거요. 죽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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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나 영어에 대한 생각도 비슷했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일본문화를 떨어내자는 말을 합디다. 正義가 뭐요. 일본에서 받아들인 정의는 천황권위의 질서를 의미하지요. 얼마나 부끄럽소. 사회정의는 공정한 거잖아요. ‘고른 뜻’ 이렇게 쓰면 얼마나 좋소. 뭐 요즘에는 지도자를 리더라고 부릅디다. 그거 독자(reader)잖아요. 외국어조차도 일본을 통해서 이중번역 돼 들어오는 수준인데 어떤 문화가 만들어 질 수 있소. 우리말도 제대로 못쓰면서 인문학연구가 무슨 의미가 있소. 거기에 돈 줘서 문화정화도 제대로 못하면 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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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을 이었다. “한국 성형수술 기술이 최고지요. 아름답게 하려는 건데 꼭 서양사람 모습으로 얼굴이며 몸을 만들고 있어요. 아름다워지는 것은 본성에서 나와야지, 그러려면 말의 본성이 아름다워져야지요. 한국 인문학은 서양사람 얼굴을 만드는 성형수술 같은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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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동안 만났던 한국의 철학자들에 대한 쓴 소리도 이었다. “철학회에서 칸트니 플라톤이니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왜 그런지 물어봤지요. 한 학자가 그런 이름을 따야 권위가 선답디다.” 이 대목에서 그는 껄껄 웃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옛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거죠. 왜 자기 이야기할 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합니까. 지금 하는 꼴은 허섭이오.” 10년 전부터 포스트모던 유행이 불었다고 귀뜸했다. “것도 그래. 서양처럼 근대사를 거쳐서 나오는 건데, 한국은 근대 경험이 없잖아. 마치 구교도 없는 곳에서 종교개혁을 한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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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학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거라 말했다. 하지만 승 교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더 큰 문제는 학자들이 문제의식이 없어요. 문제의식이 있어야 의제도 설정하고 해결책도 찾을 거 아니오. ‘인문학 위기’가 아니라 본질을 못 찾고 잘못 연구해왔던 거요. 우리 자신의 본체도 깨닫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적인 연구를 하느냐는 거요. 우리말로 우리 생각을 내뱉을 수도 없는 수준에서 서양철학을 흉내 내면 뭐하나요. 이거 미장문화요. 누가 그랬고 누가 그렇다는 식으로 모방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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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대한 비판은 생활의식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한국 많이 변했죠. 어리둥절해요. 아파트들 전부 넓게 지어 지냅디다. 그런데 창문만 열어보면 얼마나 더러워요. 그런 더러운 도시 속에 아름다운 아파트는 없지요. 차도 큰 차만 타고 다니더군요. 길은 좁은데 어떻게 그래요. 차에 맞게 길을 어떻게 맞춰요. 길에 맞게 차를 맞춰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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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학에서 부는 ‘세계화 바람’에 대해 물었다. “그거 세계화 아니잖아요. 솔직하게 써야지요. 미국화잖아요. 세계화라면서 태국에 관심 있나요. 제 나라 말도 제대로 못 배운 아이들에게 유학 보내고 영어 가르치고, 도대체 무슨 소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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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융합’과 같이 학문을 전체적인 지적활동으로 보자는 말에 대해 승 교수는 “좋긴 하고, 학자들이 그런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독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쉽게 말 못하잖아요. 학문 한 가지하기도 힘듭니다. 통섭 학문하는 사람은 천만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할 겁니다. 진짜 그거 하려는 사람은 무서워서 엄두가 안 나는 그런 겁니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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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교수 일만 제대로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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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에서 그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내게 그런 걸 물어요. 교수님은 아직도 평교수입니까라고. 학계에 있는 친구들 말을 들으면 학자들이 교수가 되고 싶어 하고, 그것도 서울대 교수가 되고 싶어 하고, 장관되고, 국무총리되고 이래야 교수 제대로 하는 거고, 그게 소망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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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교수는 후예양성을 학자의 최고 덕목으로 쳤다. “후예를 기르는 것은 평교수가 하는 일입니다. 장래의 인물을 기르는 이런 성직이 어디있소. 신문에 논설 쓰고, TV 스타가 되려고 하지 말고 평교수 일을 명예롭게 생각해야 해요. 장래에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의 인생관과 일생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나요. 그런 일을 하는 평교수가 이제 賤職이 돼 버렸어요.” 교직이 성직이라는 말과 함께 이어지는 논란이 노동조합이다. “교수 노조를 반대하지 않아요. 교수들 대우가 시원치 않아서 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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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교수는 옷에 낀 먼지를 털어내듯 시원스럽게 말을 떨어내고 간다고 했다. “교수는 진리를 실천하는 거지, 인기에 영합하려면 교수 할 필요 있나. 한 마디만 하지요. 교수는 교수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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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교수는 1995년 한국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한 이후 12년 만에 방한했다. 이번에는 가족들과 함께 보름간 서울에서 머물면서 다양한 한국의 철학자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완전하게 알아들을 때까지, 상대방의 말을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팽팽하게 대화했다. 영어가 섞여 나오면 우리말로 무슨 의미인지 도리어 물어보고 가능한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면지를 꺼내 그림을 그려 설명하고 상대방 팔을 붙들고 흔들면서 설득했다.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할 때는 흥분에 도취해 체면을 던져두고 일어서서 방방 뛰기를 서슴지 않았다. 젠체하지 않는 모습이 담백해 보였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승 교수의 아내가 걱정했다. 막말해도 되냐고. 승 교수는 웃으며 답했다. “뭐, 내일이면 가는데.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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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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