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자서전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조성기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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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거장이자 영혼의 의사였던 카를 융(1875-1961)의 자서전은 네댓 살 유년시절부터 시작한다. 그는 집 앞에 혼자 앉아 모래장난을 하다가 챙이 넓은 모자에 길고 검은 외투를 입은, 마치 여자 옷을 입은 남자 같은 형상이 걸어오는 것을 보는 순간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공포로 어쩔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예수회 수도사(Jesuit)다!”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영어사전에서 ‘Jesuit’를 찾아보면 ‘예수회 수도사’와 더불어 ‘음험한 책략가, 음모가’라는 풀이가 나온다. 형용사형인 ‘Jesuitical’에는 ‘교활한, 음험한, 궤변적인’이란 뜻풀이가 나온다. 개신교 전통을 지닌 영어권에서의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스위스 출생이지만 개신교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난 융은 가톨릭의 이미지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 며칠 동안이나 융은 소름끼치는 공포 때문에 수족을 꼼짝할 수 없었다. 물론 그는 나중에 그 검은 형상이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가톨릭 수도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습적 종교와의 결별

11세부터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융에게 신은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경험이었다. 신의 존재는 관념, 즉 생각해서 고안해낸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에게 신의 존재는 마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벽돌과도 같이 너무나 분명했으며, 신은 적어도 그에게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경험이었다. 압도적인 체험을 한 융은 목사인 아버지의 설교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하는 말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전혀 믿지 못하거나 소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처럼 진부하고 공허하게 들렸다. 그는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정말 이해하고 있을까?”라는 의심도 생겼다.

교회는 융에게 점점 괴로운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뻔뻔스럽다고 할 정도로 큰소리로 신에 대한 설교를 했지만, 융은 아무도, 심지어 목사까지도 그 비밀을 모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정말로 신의 비밀을 아는 자라면 그 비밀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을 그토록 진부하고 감상적인 표현으로 더럽힐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더 이상 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적어도 융에게 그곳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완전히 혼자라는 것을 느꼈다. 종교 문제에 관해 그는 누구와도 대화의 접촉점을 찾을 수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소외감과 불신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 그는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의 빛과 어둠은 비록 중압감을 주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사실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종교

김나지움 시절(10대 후반) 그는 아버지와 종교문제로 언쟁을 벌이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어떤 특별한 문제가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서는 가장 명백한 체험이었던 신에 대한 체험을 아버지가 갖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융은 아버지가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신앙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융은 아버지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교회와 그 신학적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는가를 보았다. 융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신학자들 중에 ‘어둠을 밝히는 빛’을 자기 눈으로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만일 그들이 그 빛을 보았다면 ‘신학적인 종교’를 가르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융 부자가 처한 종교적 상황은 근대 유럽의 세속화의 한 예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럽 사회는 중세의 ‘종교 문화’에서 근대의 ‘종교 신앙’으로 변화를 겪었다. 종교 문화가 타성적인 인습과 규범인 데 반해, 종교 신앙은 개개인의 숙고된 믿음이며, 내세와 신의 권능에 대한 긍정을 말한다. 종교 문화에서 종교 신앙으로의 이행은 ‘넓이’에서는 많은 부분을 잃었지만 그 대신 ‘깊이’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숙고된 개인적 신앙은 습관으로서의 종교에 비해 한층 높은 안정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수’는 줄어들지만, 대신 ‘정예화’를 수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화’는 ‘종교적 부흥’과 항상 양립이 가능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신앙심과 세속화는 반비례했다. 하나가 내려가면(세속화가 만연되면) 다른 하나는 올라간다(신앙심은 고양된다). 역사학자 헥스터는 그것을 ‘시소 이론(see-saw theory)’이라고 이름 지었다.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1907년 2월 빈에서 융과 프로이트(1856-1939)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오후 1시에 만나 무려 13시간이나 그야말로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융은 프로이트를 일컬어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무척 총명하고 예리하며 어느 면에서나 괄목할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가 이상할 정도로 성이론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융에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항상 비종교성을 강조해온 프로이트가 일종의 ‘교리’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잃어버린 ‘질투하는 신’ 대신 ‘성욕’이라고 하는 또 다른 강압적인 형상을 슬쩍 바꿔 넣은 셈이었다. ‘성적 리비도’가 ‘숨은 신’의 역할을 대신 맡은 것이다.

이러한 변신은 프로이트에게 이로운 점이 있었다. 성이론이라는 새로운 원리는 과학적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고, 모든 종교적인 부담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합리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두 대극, 즉 ‘야훼’와 ‘성욕’은 결국 동일한 것으로서 단지 명칭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프로이트는 잃어버린 신을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찾았다. 융은 프로이트에게서 또 다른 교조주의를 발견한 것이다.

융은 프로이트와 다른 견해를 피력한 책을 집필하면서 이것이 그와의 친밀한 관계를 희생시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두 달 동안이나 글을 쓰지 못하고 갈등으로 괴로워했다.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숨겨야 할 것인가, 두 사람의 친교가 깨지는 모험을 할 것인가? 결국 그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고, 예상대로 그것은 프로이트와의 친교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융의 친구들은 대부분 떠나갔다. 사람들은 그의 책을 ‘쓰레기’라고 대놓고 말했다. 늘 이런 식의 외로운 선택을 했던 그는 고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죽기 2년 전 융은 BBC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기자는 융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수백만 시청자들은 융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긴장하며 기다렸다. 융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신을 압니다.”

<만들어진 신>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무신론 근본주의자 리처드 도킨스는 융을 과연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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