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 매드니스 -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지음, 표정훈.김연수.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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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전 세계의 고전을 거의 다 갖춘 서재를 가진 남자가, 다른 한쪽에는 딸을 열셋이나 둔 남자가 있다. 과연 이 둘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이 질문에 대해 필립 호퍼(1898~1984)는 ‘딸을 열셋 둔 남자’가 더 행복하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행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탐욕 가득한 순간들을 겪어야 하는 수집가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그는 질투와 좌절의 고통에 몸서리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진정한 수집가가 아니다.” 필립 호퍼는 하버드 칼리지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도서 기증자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랠프 엘리스 2세는 열다섯 살 때부터 조류학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찌나 미친 듯이 책을 모았던지, 32세 되던 1940년에 어머니는 그를 요양소로 보내버렸다. 아들이 집안 재산을 다 날려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미치지는 않았다.”는 진단과 함께 엘리스는 곧 요양소에서 나왔고, 다시 예전보다 더욱 열심히 책 사냥에 나섰다. 1945년 그는 자신의 책을 모두 캔자스 대학에 기증했다. 기증의 대가로 엘리스가 대학 측에 요구한 것은, 애장서들을 보관할 수 있는 보금자리와 자신을 위한 사무실뿐이었다. 캔자스 대학 측은 그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엘리스는 어느 호텔 방에서 폐렴으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역사 속에 등장한 애서광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필사본 수집가인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몬테펠트로(1422~1482)는 자신이 소장한 책은 반드시 펜으로 쓰인 것이라야 하며, 그 밖의 다른 것은 수집가를 부끄럽게 만든다고 여겼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유행의 물결을 타고 있던 인쇄본은 그의 서재에 결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책이 대량생산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역사적 전환기에 종종 목격할 수 있다. 1980년대 콤팩트디스크(CD)가 널리 보급될 무렵 엘피(LP) 애호가들이 보였던 냉소적 반응, 21세기 초 디지털 카메라가 확고한 대세로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필름카메라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일부 사진가들의 모습과도 닮아 보인다. 


2005년 다국적 미디어조사기관인 ‘NOP월드’가 세계 30개국을 대상으로 주당 독서시간을 조사한 결과 세계 평균 독서시간은 6.5시간이며 인도인이 주 평균 10.7시간으로 1위를, 그중 한국인의 독서시간은 3.1시간으로 평균시간의 절반에도 못 미치며 30개국 중에서 최하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책 읽는 시간이 세계 꼴찌를 달리는 우리 처지에서 보면, ‘개도 안 먹는’ 책을 수집하는 일에 미쳐버린 ‘애서광’들의 이야기는 낯설고 신기하기만 하다.


자기 재산을 써서 책을 사들인다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대학도서관 같은 공공기관의 소장 도서를 몰래 도둑질해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컬렉션’을 만드는 애서광도 있다. 스티븐 블룸버그(1948~ )는 20세기 최대의 책 도둑이다. 그는 북아메리카 전역의 268개 도서관에서 모두 2만3,600여 권의 책을 훔쳤는데, 지역별로는 미국 내 45개 주를 비롯해 캐나다의 두 개 주까지 포함된다. 그 일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하버드 대학, UCLA, 듀크 대학, 미네소타 대학, 뉴멕시코 대학, 코네티컷 주립도서관, 워싱턴 주립대학, 미시간 대학, 위스콘신대학 등등……. 훔친 책의 무게는 19톤에 달했다.


블룸버그는 미네소타 대학 도서관에서 그 대학 교수의 신분증을 훔친 다음, 전문 연구자를 사칭해 다른 도서관들을 자유롭게 이용했다. 도서관에는 품이 넉넉한 옷을 입고 들어가, 그 안쪽에 꿰매어 붙인 커다란 주머니에 책을 숨겨가지고 나오는 수법을 썼다. 일단 책을 고르면 대출카드 봉투를 떼고, 장정 안쪽에 있는 도서관 스티커도 떼어낸다. 책 속에 혹시 경보장치가 있는지 확인한 다음, 도서관 인장표시를 지우기 위해 책모서리를 사포로 문지르고 나서 페이지를 다시 모아 풀로 붙인다. 빼돌린 책은 엘리베이터에 싣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책이 워낙 많아서 트럭에 싣는 것도 큰일이었는데, 블룸버그는 지나가던 학생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목록별 수집’ 방식으로 책을 훔쳤다. 특정 주제들을 정해놓고, 그 주제와 관련된 ‘모든 책’을 완벽하게 수집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자료 컬렉션’―‘블룸버그 컬렉션(!)’―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업자의 고발로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훔친 책은 시가로 무려 2천만 달러에 달했지만 책을 훔친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체포된 후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의료시설에 감금당했을 때 같은 시설에 있던 마피아 두목이 물었다. “재주도 좋은 놈이 보석도 아닌 책 따위를 훔쳤느냐?” 블룸버그는 대답했다. “팔기 위해 책을 손에 넣은 게 결코 아닙니다. 다만 책을 갖고 있을 생각이었지요.”


블룸버그는 물론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애서광들이 역사와 문명에 끼친 공헌은 대단하다. 그리스 고전 필사본을 찾아내기 위해 유럽 곳곳의 수도원 도서관을 찾아 헤맨 ‘최초의 근대인’ 페트라르카(1304~1374)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탈리아 인문주의는 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저히 다스릴 수 없고 채워지지도 않는 욕망 하나’를 갖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책을 향한 욕망’이었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28개국을 대상으로 도서관 현황(2001∼2002년 기준)을 분석한 결과, 미국 하버드대는 1518만1349권, 예일대는 1111만4308권, UC버클리는 957만2462권에 이르는 장서를 자랑했다. 일본 도쿄대도 811만2335권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 가운데 장서가 가장 많은 서울대는 249만3919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 경북대(211만5085권), 연세대(187만6233권), 고려대(171만5170권) 등의 순이었다.


장서의 양도 문제지만 질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여러 해 전 논문 자료 수집을 위해 숱한 국내 대학도서관들을 일일이 찾아다닌 경험이 있다. 그러나 서울 시내 주요 대학도서관의 모든 자료를 다 합쳐도 논문 한 편 작성할 수 없다는 참담한 결론에 도달했다. 필요한 자료의 절반도 구할 수 없었다. 국내 도서관 자료로는 연구 활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하긴 몇몇 대학도서관의 도서구입 행태를 보면 납득 못할 일도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대학도서관에는 장서 수를 채우기 위해 ‘킬로 그램당 얼마씩’ 쳐서 사들인 싸구려 책들이 서가에 꽂혀있다. 이러고도 입으로는 ‘지식강국’을 말한다. ‘애서광’ 육성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라도 나와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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