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목을 친 남자 - 프랑스혁명의 두 얼굴, 사형집행인의 고백
아다치 마사카쓰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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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 다가서는 방법에는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자전거도로, 골목길 등등 다양한 길이 있을 겁니다. 이 책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골목길을 걷듯이 프랑스혁명의 실체로 이끌어주는군요. 역사적 실존인물인 사형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1739-1806)에 관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사료들을 충실히 소화했기에 역사적 근거는 넉넉합니다.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주인공의 생몰 연대를 보셨다면 벌써 눈치 채셨지요? 맞습니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처형한 바로 그 사형집행인입니다. 당시 54세였군요. 사형집행인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 딜레마를 꼼꼼하게 짚어주고 있는 책입니다.


일본에는 서양 역사를 이렇게 흥미로운 필치로 서술하는 작가들이 많아서 부럽습니다. 저도 이런 글 쓰고 싶은데 작가적인 재능이 없어서 실망입니다. 작가는 도쿄대학 불문과 출신이고, 역자는 사학과 출신입니다. 본문에서 인용합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같은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귀족이라면 참수, 일반 서민은 교수형을 받는 등 신분에 따라 처형방법이 달랐다. 이는 법률에서 보장하는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기요틴은 법으로 인간의 평등이 선언된 이상 신분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처형방법이 동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사형 방법은 평등해야 한다.→ 인권을 존중하는 새로운 시대에는 야만스럽고 잔혹했던 과거의 처형방법을 인도적인 방식으로 개선해야 한다.→ 사형수의 고통을 최소화하면서도 신속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도적 처형방법은 목을 절단하는 것이다.→ 검을 사용하여 참수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도, 단칼에 목을 베지 못할 경우 사형수의 고통이 더욱 커진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계로 확실히 절단해야 한다.→ 목을 절단하는 기계, 즉 기요틴이 고안된다.

기요틴은 순식간에 죄수의 목을 절단하는 장치이며, 목이 잘리는 순간 다량의 피가 분출한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기요틴은 더없이 잔혹하게 보일 테지만, 이 처형 기구를 구상한 사람들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인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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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하멜
김영희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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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하멜을 읽었다. 소설가이자 국제문제 대기자인 김영희의 최신작이다. 1653년 효종 4년에 제주 해안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 일행은 조선에서 억류 생활을 하다가 1666년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했다. 13년 세월은 한국과 서양 사이에 최초의 만남이 이루어지던 역사적 시간이었다. 우리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던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하멜의 조국 네덜란드는 조선보다도 작았지만 당대 유럽 최강국이었다.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대의 항구이자 20세기 미국의 월스트리트에 맞먹는 유럽의 경제 중심지였다. 당시 유럽이 보유한 선박의 4분의 3이 네덜란드 국적이었다. 그들의 배는 5대양을 누비고 다닐 만큼 크고 성능도 좋았다. 러시아의 개혁 군주 표트르 대제가 신분을 숨기고 조선 기술을 배워간 곳도 네덜란드였다. 프랑스 역사가 브로델의 말처럼 17세기 유럽사의 주인공은 네덜란드였다. 이 무렵 네덜란드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쓰고 있었고, 유대인 스피노자는 렌즈를 연마하면서 철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막강한 제해권을 바탕으로 북아메리카 허드슨 강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중심지를 뉴암스테르담이라 칭했다. 17세기 후반 영국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네덜란드와 경쟁을 벌인 끝에 이 도시를 장악하고 이름을 뉴욕으로 바꾸기 전까지 뉴암스테르담은 번영을 누렸다. 네덜란드인은 바타비아(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대만, 일본 등과도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이면서 아시아 무역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우리가 수십 년 전 겨우 눈 뜬 세계경영을 그들은 이미 17세기에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하멜 일행은 선진국 선원답게 제각기 기술 한가지씩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지식은 조선에 쓸모가 큰 것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술, 소총·대포 제작, 축성, 천문학, 의술 등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효종과 그의 신하들에게는 그들의 쓸모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었다. 한양으로 끌려온 세계 일등 선진국 선원들은 기껏 국왕 호위에 장식품으로 동원되고, 사대부 집에 불려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주면서 푼돈을 벌었다. 작가 김영희의 말처럼 조선 조정이 그들의 표착을 계기로 넓은 세상에 눈을 뜨고 미래를 준비했더라면 그 후 한국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선조에서 효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국왕과 신료들은 무능한데다 국제 감각도, 역사의식도, 국가 전략도 없었다. 못난 조상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닮지 말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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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 POWER made easy - 미국 대학 최고의 영단어 명강의 WORD POWER made easy
노먼 루이스 지음, 강주헌 옮김 / 윌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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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대학 시절 이 책에 도전했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원서)이었는데 꼬박 한 달을 투자해서 앞 부분 절반을 읽었다. 정말 힘들어서 마저 다 읽을 수 없었다. 포기했다. 하지만 헌책 속표지에 쓰인 전 주인의 글을 읽고 용기를 냈다. "너무나 어려워서 읽을 수 없는 책이라서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 너는 포기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겠어." 오기가 생겼다. 결의를 다지고 다시 읽었다. 한달을 더 투자해 나머지 절반을 다 읽었다.

 

책을 독파한 후 첫머리에 있는 테스트 문제를 풀어보니 그새 실력이 부쩍 늘어있었다. 스스로 영어 실력이 늘어난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 후 두번째 읽을 때는 한달이 걸렸다. 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된 것이다. 그리고나서 한번 더 읽었다. 20대에 모두 세 차례 이 책을 정독했다.

 

영어의 그리스어, 라틴어 어원을 제시함으로써 그에 연관된 영단어를 2, 30개씩 한꺼번에 암기하도록 하는 놀라운(!) 효과를 안겨주는 이 책은, 영어를 비롯한 서양 언어의 성립 배경에 대한 언어학적 지식을 습득케 하는 부차적인 미덕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요컨대 영어의 한문(漢文)인 그리스어, 라틴어를 익힘으로써 그에 연관된 수십개의 다른 단어들을 대량 암기하는 대단히 효과적인 영단어 암기 비법을 전해주는 책이다.

 

후배들에게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책을 대학 시절 꼭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따르는 후배는 거의 없었다. 어찌 하겠는가?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는 것은 말의 몫인 것을...

 

영어 문장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준 것이 가장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영어권에서 난해하다고 손꼽히는 고전을 몇 권 번역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책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생활 영어나 주절거리는 수준이 아닌, 영어권에서 가장 학문적으로 진지한 텍스트를 읽어내고자 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발판으로 삼으실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친절한 해설까지 겸한 책이라서 읽기에 한결 수월할 것이다. (예전엔 일일이 콘사이스 찾아가며 고생스럽게 읽었다.) 알라딘에서 선물용으로 구입했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 구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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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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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오르후스(덴마크 제2의 도시)에서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하는 43살의 안네가 무척 흥미로웠다. 오랫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면서, 무신론자들이 대개 임박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안네가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안네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걱정과 불안으로 마음이 망가져서 죽음을 가장 힘들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니계수를 바탕으로 경제적 평등을 살펴보면 덴마크는 세계 2위, 스웨덴은 4위다. 소득 평등이 가장 잘 이루어진 상위 20개국 중 대다수도 역시 종교의 세력이 미약한 곳이다. ...세계 경제포럼에 따르면, 스웨덴의 경쟁력은 세계 3위고, 덴마크는 4위로 그 뒤를 잇고 있다. 20위권 국가 중 종교의 세력이 강한 곳은 미국(6위)뿐 다른 나라들은 국제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모두 종교성이 약한 곳이다.

#정치가와 공무원의 청렴도 면에서 덴마크는 세계 4위, 스웨덴은 6위며, 역시 상위 20개국 중 대다수가 비교적 종교성이 약한 곳이다. 가난한 나라를 위한 자선 행위를 살펴보면 덴마크는 2위, 스웨덴은 3위고, 세계 최빈국들에 가장 많은 원조를 하는 20개국 중 많은 나라가 확연히 비종교적이다.

#내가 지금까지 확고하게 밝히려고 한 것은, 지구 상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들이 가장 건강하고 성공적인 나라들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물론 상관관계가 곧 인과관계는 아니다.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나라들이 지금처럼 성공적이고 건강한 사회가 되는데 비종교성이라는 '원인'이 반드시 존재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종교의 '부재'가 사회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독일의 싱크탱크인 한스뵈클러슈티프퉁은 최근, 사회적 정의의 확립에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근거로 각국의 순위를 매겼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

#만약 이 세상에 가장 '안전하고 견실한' 사회가 있다면 비교적 세속적인 덴마크가 바로 그런 곳일 것이다. 
 
===읽고난 소감
1. '서양=미국'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오래된 고정관념을 산산조각내버리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책. 세상은 넓다. 
 
2.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주는 책. 기독교는 '빛과 소금'으로 자처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가장 미약한 덴마크와 스웨덴이 가장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이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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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음식문화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3
맛시모 몬타나리 지음, 주경철 옮김 / 새물결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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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비경작지(saltus)―에 높은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키빌리타스(civilitas)의 반대 개념이었다. 키빌리타스는 어원으로 볼 때 도시(city)와 연관된 개념으로서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 질서를 뜻한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이상적 생활공간은 ‘도시 주변에 질서정연하게 조직되어 있는 시골지역’이었다. 로마인은 이 공간을 아게르(ager)라 불렀으며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비생산적 땅인 살투스(saltus)와 엄격히 구분했다. 로마 문화에서 비경작지는 부정적 개념이었다. 숲은 주변적 공간이자 배제된 공간으로서 추방당한 주변적 인물들만이 그곳에서 음식을 구한다. 로마인은 이른바 지중해식 음식 유형을 발달시켰다. 그것은  곡물을 재료로 한 빵과 죽을 비롯해, 포도주, 기름, 채소 등 채식류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약간의 육류, 특히 치즈를 곁들이는 방식이다. 염소와 양은 고기보다는 주로 젖과 털을 얻기 위해 길렀다.


그러나 야만인(barbarians)의 생산 양식과 가치 체계는 완전히 달랐다. 켈트족과 게르만족은 수 세기 동안 중부 유럽과 북부 유럽의 삼림을 휘젓고 다니면서 처녀지와 비경작지를 이용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숲에서의 사냥, 채취, 방목 등은 그들의 생활에서 중심적인 일이었다. 빵과 죽 대신 육류가 그들의 음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빵 문화와 고기 문화의 대결


‘로마’ 세계와 ‘야만’ 세계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가치, 이데올로기, 생산 체제 등이 모두 다르다. 그 간극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며, 두 세계가 2천 년이나 섞여 살았음에도 모든 차이를 없애지는 못했다. 유럽은 오늘날에도 그 심층적 차이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서기 5, 6세기에 시작된 두 문화의 융합 과정에 의해 상당한 정도의 상호접근이 일어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게르만족이 유럽의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되어가자 게르만 문화와 심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게르만족은 ‘비경작지와 야생 상태의 자연’에 대해 그리스․로마의 전통과 대조적인 새로운 시각을 정립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인간 활동의 한계가 아니라 ‘사용해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 결과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영국, 독일, 프랑스 북부 지역 등지에서는 7, 8세기부터 숲을 추상적 면적 단위로 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돼지를 몇 마리 키울 수 있는가로 나타내는 관행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숲의 크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로마의 전통에서는 참나무 숲을 보고 제일 먼저 돼지 사육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고기가 음식 가운데 가장 높은 가치를 갖게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빵이야말로 가장 영양가가 높은 음식으로 간주되었지만, 5세기 이후에 나온 음식에 관한 책들은 고기에 우선권을 주었다. 고기가 중요하다는 점은 특히 지배계급에서 강조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고기는 권력의 상징이며,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생성하는 도구였다. 반대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겸손의 표시이거나 지배층으로부터 주변부로 밀려났음을 알리는 표시였다. 이것은 프랑크족의 법령집에서 ‘무장 해제’와 ‘육류의 금식’을 같은 차원의 것으로 본다는 데에서도 확인 된다. 고기는 인간에게 가장 잘 맞는 자연스러운 음식이었다.


만일 유럽이 기독교화의 과정을 밟지 않았더라면 빵이 과연 문명의 상징으로서의 지위를 갖는지에 대한 의문마저 제기되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 속에서 빵은 포도주와 함께 중심적인 상징이 되었다. 빵과 포도주는 성찬식의 기적을 상징하는 신성한 음식이었다. 특히 빵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일찍이 정통 그리스도교 편에 섰던 프랑크족은 북유럽에 로마․그리스도교적 음식 모델을 전파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들이 아리우스파 이단을 누르고 ‘진정한’ 믿음을 확고히 했음을 기록한 글들에서 포도주는 정치적․문화적 정당성을 얻어내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9세기에 기록된 한 문헌에서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이자 프랑크족의 지도자인 클로비스(466-511)는 아리우스파인 알라리크와 싸울 때 포도주의 힘을 빌려 전쟁을 수행할 힘과 열정을 얻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수도원’ 모델과 ‘귀족’ 모델의 대립


음식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 역시 크게 변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절제가 최상의 미덕이었다. 음식은 기쁜 마음으로 즐기되 탐욕스러워서는 안 되며, 풍성하게 제공하되 허세를 부려서는 안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게르만 문화와 켈트 문화에서는 ‘대식가’를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엄청난 폭식과 폭음이야말로 동료들에 비해 ‘동물적인’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유럽에서도 특히 만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지역에서는 절제의 미덕이 통용되지 못했다. 동물적인 힘, 육체적이고 근육질의 힘이 강조되었다.


서기 888년 이탈리아 귀족 스폴레토 공작 구이도가 프랑스 왕위 계승 후보로 초대되었다. 사람들은 ‘프랑크족 관습에 따라’ 그에게 많은 음식을 내놓았다. 그러나 구이도는 소량의 식사에 만족했고,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 왕위 선출권자들은 무엇보다도 왕성한 식욕이야말로 국왕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비잔틴 황제 니케포루스 포카스는 야채와 검소함을 사랑했기에 경멸받아 마땅했으며, 작센의 오토는 ‘결코 검소하지 않았고 평범한 식사를 경멸했는데’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반면 아일랜드 콜룸바누스 수도원 같은 북유럽 수도원의 규정은 금식 등에서 엄격하다 못해 가혹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먹는 것을 세속적 가치 가운데 최고로 치는 사회와 관계를 끊으려 했다. 수도원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육류를 피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육류가 지배계급의 음식 중 가장 귀히 여겨지게 되면서 이것이 더욱 엄격하고 강박적으로 되었다. 수도원 문화는 지배계급과 반대되는 가치를 표현하기를 열망한 것이다.


중세초기 유럽사회에 나타난 음식에 대한 태도에는 대립적인 여러 모델들이 보인다. 그러나 이 모델들은 일종의 순환고리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하게 된다. 예를 들면, ‘로마’ 모델과 ‘야만인’ 모델 사이의 양극성은 ‘수도원’ 모델과 ‘귀족’ 모델 사이의 양극성으로 대치되었다. 이들 사이의 힘겨운 다툼의 목표는 문화적 헤게모니였다. 그 안에서는 사회 윤리적 가치가 종교적 도덕성과 부딪히고, 자발적 가난의 주장이 권력의 주장과 부딪혔다.


이 책은 단순한 ‘음식의 역사’가 아니다. 저자는 음식의 재료나 조리 방법 등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라는 주제를 중심에 놓고 그것과 연관된 사회의 다양한 국면들을 보고자 한다. 예컨대 어느 특정한 음식이 그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는가 배척당했는가, 그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와 태도가 어떠했는가 등이 이 책에서 다루는 중요한 문제들이다. 다시 말해 음식을 매개로 한 삶의 양태와 의식의 문제, 즉 넓은 의미의 문화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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