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남자들이 행복이라는 말에 가장 근접할 때는 게임이나 취미처럼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무언가에 몰입할 때일지도 모른다.
 남자들의 행복을 이해하게 되면 여자들은 한 남자와 오랜 관계를 지속할 때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될 소외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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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벽파의 칼끝이 연일 채제공을 겨누자, 그는 도성 밖에 나가 살며 숨을 죽였다. 채제공은 이제 끝났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목숨을 거둬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권력의 속성은 무섭다. 큰 권력이 흔들리면 새 줄서기가 시작된다. 잡고 있는 줄이 썩은 동아줄로 판명난 뒤면 너무 늦다. 문제는 썩은 동아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 때 일어난다. 뒷감당을 할 수 없는 데다 배신자 낙인까지 찍힌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숱한 정객들이 단 한 번 판단의 결과로 아예 사라지거나 화려하게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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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로 다른 꿈이 만나는 꼭짓점에 천주교가 있다. 도는 존재하는가? 세상은 나아지고 있는가? 희망이 있는가? 주리와 주기로 한 100년쯤 싸우고, 3년 복을 입느냐 1년 복을 입느냐로 몇십년 다투는 사이에 수많은 목숨이 스러지고 정권의 향배가 갈렸다. 그러고 나서는 인성과 물성이 같으냐 다르냐로 또 한 100년을 싸웠다.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와 대명 의리의 유령이 그 배후에 있었다.
그게 그렇듯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인가? 그들이 말하는 도와 리는 백성들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실록에는 굶주린 백성이 자식을 바꿔 잡아먹었다는 기사가 실리고 있었다. 가뭄 끝에 홍수 나고, 홍수 뒤에 전염병이 돌았다. 추수할 것도 없는 빈 들판 너머에서 극강의 한파가 몰아닥쳤다. 그 와중에도 위정자들은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의 수탈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게 나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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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내 인생도 그랬다. 내 삶은 글에 빚졌다. 예고 없는 고통의 시간대를 글을 붙들고 통과했다. 크게 욕망한 것 없고 가진 것 없어도 글쓰기 덕에 내가 나로 사는 데 부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학인이 지독히도 삶에 휘둘렸던 자기 체험을 글로 정리하고 나서이렇게 말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에 품위를 부여해 주는 일이네요." 그 말이 뭉클했다. 조지 오웰이 바랐던 "보통 사람들의 생래적 창조성과 품위가 발현되는 세상"을 글쓰기가 돕는다고 믿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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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의 문장은 사납지만 예리했다. 통찰이 빛났다. "힘든 노동을 좋아하고 신속하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지만 너희들 모두는 너희 자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근면이라는 것도 자신을 잊고자 하는 도피책이자 의지에 불과하다" 라는 니체의 말에 속내를 들킨 듯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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