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다몸은 열대 산악지대에 널리 자생하고 있는 관엽수로 열매를 향신료로 이용한다. 열매는 타원형으로 녹색을 띄고 있다. 카르다몸은 여러 종이 있는데 모두 생강과로 맛은 조금씩 다르다. 가장 품질이 좋고 대중적으로 쓰이는 것은 말라바르 지방에서 재배된 종류이다.

카르다몸은 가장 오래되고 귀한 향신료 중의 하나로 사프란, 바닐라 다음으로 고가이다. 11세기에 노르망디인에 의해 영국에 전해져, 중세와 튜더왕조시대에 많이 쓰였다. '향기의 왕'이라고 불리며 카레요리 외에 고기나 생선요리, 소스, 드레싱, 피클, 파이, 빵, 케이크 등의 제과, 제빵류 및 리큐어의 향을 더하는데 쓰인다. 고가의 향신료이기 때문에 중동에서는 손님을 접대할 때 극진히 대접한다는 의미로 커피에 넣기도 한다. 북유럽 특히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주로 빵이나 케이크, 피클에,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필라프나 카레요리에 쓰인다.

카르다몸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때문에 호흡기 질환에 좋고, 유제품 알레르기 증상을 중화하며 신장에도 좋다. 카르다몸은 향이 쉽게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분말상태보다는 통째로 소량씩 구입하는 것이 좋다. 특히 분말에서 장뇌 향기가 나는 것이 신선하고 좋은 것이다. 원산지는 인도이고, 주산지는 인도, 스리랑카,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탄자니아 등이다.

-- 네이버 백과사전. 그런데 실제로 어떤 향일지 전혀 감이 안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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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네이버 백과 사전에서.

이 사진은 어쩐지 박제 같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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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

 10·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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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등화()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이다. 옛날에서는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양반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지에 흡착근이 있어 벽에 붙어서 올라가고 길이가 10m에 달한다. 잎은 마주나고 홀수 1회 깃꼴겹잎이다. 작은잎은 7∼9개로 달걀 모양 또는 달걀 모양의 바소꼴이고 길이가 3∼6cm이며 끝이 점차 뾰족해지고 가장자리에는 톱니와 더불어 털이 있다.

꽃은 6월 말∼8월 말경에 피고 가지 끝에 원추꽃차례를 이루며 5∼15개가 달린다. 꽃의 지름은 6∼8cm이고, 색은 귤색인데, 안쪽은 주황색이다. 꽃받침은 길이가 3cm이고 5개로 갈라지며, 갈라진 조각은 바소 모양이고 끝이 뾰족하다. 화관은 깔때기와 비슷한 종 모양이다.

수술은 4개 중 2개가 길고,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삭과이고 네모지며 2개로 갈라지고 10월에 익는다. 중부 지방 이남의 절에서 심어 왔으며 관상용으로도 심는다.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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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서(九書)

  • 독서 讀書: 책을 읽음.
  • 간서 看書: 책을 봄.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책을 읽음.)
  • 장서 藏書: 책을 간직함.
  • 초서 抄書: 책의 내용을 뽑아 옮겨 씀.
  • 교서 校書: 책을 바로잡음.
  • 평서 評書: 책을 비평함.
  • 저서 著書: 책을 씀.
  • 차서 借書: 책을 빌림.
  • 폭서 曝書: (좀 먹는 것을 막기 위해) 책을 햇볕에 쬐고 바람을 쏘임.

- 이덕무.

 

 

 

 

이서구(李書九)

한시()의 4대가로 알려졌던 조선후기 문신 겸 학자. 오언고시()에 능했으며 《장릉지()》, 《춘추()》, 《정조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으로 《척재집》, 《강산초집()》가 있다.
본관 전주()
척재 ·강산()
별칭 자 낙서()
활동분야 문학
주요작품 《척재집》 《강산초집()》

본관 전주(). 자 낙서(), 호 척재(惕) ·강산(). 177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 ·지평을 거쳐 승지 ·대사간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왕명으로 《장릉지()》 《춘추()》 《정조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명문장가로서 특히 시명()이 높아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한시()의 4대가로 알려졌으며, 오언고시()에 능했다. 문집으로 《척재집》 《강산초집()》이 전한다.

- 네이버 백과사전

이서구(李書九)의 유서 이야기

조선 순조 때에 李書九라는 우의정이 있었다. 학문이 높고 지식이 많고 앞일도 내다볼 수 있는 분이었다. 마음이 청백해서 벼슬이 우의정까지 올랐지만 모은 재산이라고는 별로 없어 살아가기가 넉넉지 못했다. 이 분이 운명할 때 자손과 조카들이 모여와서 終身하는데 그때 이서구는 "내가 평생에 자손을 위해서 송곳 세울 만한 농토도 남겨놓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너희를 위해서 秘書 한 장을 남겨 놨으니 이것을 잘 두었다가 급한 화가 있거든 그때 떼어 보고 잘 처리하라"하고 그리고 그만 운명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서 자손들은 그 비서 속에 무엇이 쓰여 있는가 궁금해서 한 번 봤으면 하고 모두 상의해 가지고 비서를 떼어 봤다. 그랬드니 비서를 또다른 봉투에다 넣놨는데, 그 위에는 "급한 화가 있기 전에는 떼어 보지 말라고 했는데 급한 화도 없는데 왜 떼어 보느냐. 너희가 부모 대접을 소홀히 하다가는 더 큰 화를 면치 못하리라"고 쓰여 있었다. 이런 글이 있어도 자손들은 이왕 떼 보든 차이니 더 뜯어보자 하고 또 한 겹을 뜯어 봤다. 그랬드니 "한 번도 과한데 어찌 두 번이나 부모의 유교를 어기느냐. 너희가 부모의 말을 위반하면 다음 참화를 면치 못하리라"고 쓰여 있었다. 자손들은 그만 겁이 나서 더 이상 떼어 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몇 해 지나서 이서구의 증손이 살인죄로 고양골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가족들이 모여서 이 일을 어찌 하나 하고 의논하는데, 이집에서는 이보다 더한 참화가 어디 있겠느냐 하고 그 비서를 떼어 봤다. 그랬더니 거기에 이 봉서를 이 길로 고양 성주에게 드리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즉시 비서를 가지고 고양 성주한테 갖다올렸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이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고양 원은 이서구가 명망 높은 재상이고 미래사도 아는 분임을 알았지만 자기한테 보낼 봉서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무슨 봉서일고 하고 뜯어 보니 그 봉서에는 "성주 이하 관속들은 하나도 남지 말고 모두 동헌 뜰 아래로 내려서서 보아라"고 쓰여 있었다. 군수는 이걸 보고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 양반이 하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서 모두 동헌 뜰 아래로 나갔다. 그랬더니 별안간 동헌 대들보가 부러져 떨어져 내려왔다. 사람들은 다 나와 있어서 사람은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 군수는 놀래며 봉서를 또 한번 뜯어 보니 "免爾棟樑禍 活我三世孫:이란 글이 쓰여 있었다. 그대들은 대들보에서 치일 화를 면해 주었으니 내 증손을 살려 주오 하는 뜻이다. 군수는 이서구의 비서 때문에 여러 인명이 살았기 때문에 이서구의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서구의 증손을 살려주었다.

(출처 : '이서구의 유서' - 네이버 지식iN)

백탑

http://blog.naver.com/shintoro/10006617412

탑골공원 안에 아직 남아 있었다니.. 꼭 한 번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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