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지평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3
제임스 힐튼 지음, 이경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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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1년 중국 정부는 운남성 중전(中甸)을 샹그릴라[샹그리라]로 개명하였다. 제임스 힐턴의 소설에 나오는 동명의 지역과 여러 면에서 가장 유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제임스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은 어떤 작품인지?

동양 사회에서 이상향의 대명사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서구 사회에서 그것은 유토피아에 해당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상향은 말 그대로 이상향이기에 가치를 지닌다.

힐턴이 이 소설을 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가 사회적, 문화적 혼란에 빠졌을 때다. 소위 이 시기를 문학계에서는 ‘잃어버린 세대’ 또는 ‘길 잃은 세대’로 일컫는데, 전통적 가치관이 전쟁으로 일거에 무너짐에 따른 정신적 위기의 심각함을 지칭한다. 따라서 힐턴의 이 소설도 결국은 서구에서 상실한 이상향의 자치를 동양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모색의 한 과정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하필 샹그리라를 중국 티벳 동부에 비정하였는가? 20세기 초까지 서구는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세계 각지를 재발견하였다. 이제 세계의 웬만한 곳은 모두 탐사가 끝났고, 아프리카와 광대한 유라시아의 내륙 오지만이 미답사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밀림 지대는 문명사회로 설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결국은 이국적인 문화와 종교를 지닌 독자적인 문명지역, 히말라야와 곤륜 산맥의 험준함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죽음의 방패로 둘러싸여 접근이 어려운 티벳 지역이 보다 설득력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작가의 모국인 영국이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인도와 가깝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정보를 얻기 용이한 측면도 있다.

여하튼 이 소설은 인물과 사건이 주인공이 아니다. 샹그리라의 존재가 작품의 핵심이다. 독자는 샹그리라의 위치, 운영, 가치관, 사람들에 대해 마치 미지의 곳을 탐험하는 기분으로 등장인물들과 함께 서서히 접근해 가며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생경하지만 그윽한 분위기에 젖어든다.

등장인물 중 유독 콘웨이가 샹그리라의 후계자로 지목받는 것은 당연하다. 일찍이 옥스퍼드의 수재였던 그는 다재다능한 능력과 출중한 외국어실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의 비인간성에 환멸을 느끼던 중 자신의 지향과 일치하는 샹그리라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의 사고방식은 이미 탈 서구, 친 샹그리라적이었고, 그는 ‘세계의 광기’(P.92)를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는 최고를 이상으로 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에 자주 비속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P.60)

그런 그에게 샹그리라는 점점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존재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샹그리라에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은 거짓없는 진실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는 앞날이 대단히 매력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긴 고요하고 평온한 나날...태양은 떠올랐다가 사라진다...즉 깊은 고요함, 원숙한 예지, 명석한 추억의 매력 등을 얻게 될 것이오...” (P.199)
승정과의 대화에서 승정은 콘웨이에게 샹그리라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주며 그곳에 머물러 일원이 될 것을 권유한다. 승정이 묘사한 모습은 당대 서구의 ‘전쟁이나 욕망과 잔학 행위’와 대조적이다.
“즉 그는 예지에 있어서가 아니라 저속한 정열과 파괴의 의지에서 점차 강화되어가는 나라들을 보았소.” (P.203)

샹그리라의 매력은 너무나 확실하다.
“‘푸른 달’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모든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연못을 스쳐 흘러나오는 하프시코드의 은방울 같은 단조로운 곡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풍경과 음악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P.228)

샹그리라는 단순한 이상향이 아니다. 샹그리라는 인류의 예지와 미덕을 파괴에서 보존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독서와 음악과 명상과 더불어 지내며 멸망해가는 시대의 덧없이 우아한 것을 보존하고 그 저속한 정열이 타버린 뒤 인류가 필요해 마지않는 예지를 찾아 구할 것이오. 우리는 소중히 보존하고 후세에 양도해야 될 유산이 있소.” (P.205)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은 종결되지 않았다. 이미 자체에 더 큰 전쟁의 배아를 잉태하고 있어 세계는 알지 못한 어둠과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다.
“아마 세상이 아직 보지도 못하던 폭풍우가 되겠지요. 무력으로 안전할 수 없고, 권력에 의지해도 구할 수가 없고, 과학의 힘으로도 해명이 안 될 것이오, 모든 문명의 꽃들이 짓밟히고 모든 인간 거대한 혼미 속으로 던져질 때까지 폭풍우는 불어 날뛸 것이오.” (P.252)

세상이 어두울수록 샹그리라의 존재 의의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멋진 곳에서 지내는 삶은 제법 훌륭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콘웨이는 막판에 맬린슨과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 차기 승정으로 샹그리라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로 한 그는 무슨 연유로 그곳을 떠나는가?

샹그리라는 이상향이다. 이상향은 상상과 관념 속의 산물일 뿐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현실 세계에 나타난 그 순간, 이미 이상향의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 샹그리라에 대한 맬린슨의 인식을 단순히 젊은 서구인의 어리석음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상향의 불가능성과 불완전성을 인식하였다.
“이런 곳은 박살이 나야 돼요. 불건강하고 불결해요. 더구나 당신의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만약 사실이라면 더욱 구역질이 나요!...더러워요...” (P.269)

맬린슨과 로첸의 관계에 대하여 듣는 순간 콘웨이는 결심을 한다. 로첸에 대한 단순한 질투심의 표출은 아닐 것이다. 그는 샹그리라가 오래 존속하지 못할 것을 알아차린다. 완벽한 이상세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 그것을 로첸의 행위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는 현실과 최초로 직면했을 때, 모든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꿈이 이미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다...아무리 자신이 분기해보아도 자신의 상상 세계의 회랑이 충격을 받아 비틀려나가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각은 붕괴되고 모든 것이 폐허로 화하려 하고 있었다.” (P.275)

샹그리라에 대한 콘웨이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맬린슨과 로첸과 더불어 탈출을 시도한다. 간난신고 끝에 목숨을 부지하고 정신을 되찾은 후 그는 다시 혼자서 샹그리라를 찾아가려고 시도한다. 그의 시도가 성공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닌가. 언제나 현실과 이상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는 존재. 샹그리라는 머나먼 곳일 수도 있고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다.

제임스 힐턴은 당대 서구인들의 마음을 뿌리부터 흔들어놓는데 성공하였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갈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대중의 호기심에 영합하지 않고 이상향의 미묘한 이중성의 진실을 갈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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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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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김애란이라는 작가가 마음에 든다. 그의 문체와 스타일이 흥미롭다. 그는 설렁탕에 나오는 싸한 깍두기같은 존재다. 고만고만한 작가들이 그러저러하게 끄적이는 글에서 그의 글은 한층 빛을 발한다.

<달려라 아비>에서부터 그의 개성은 마니아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신작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작과 동질감을 자아낸다. 언제나 무대는 중하층의 평범한 가정과 개인. TV 드라마의 배경이 대체로 부유한 상류층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일부 여성작가들의 골드 미스급 솔로 생활과도 차이는 뚜렷하다. 소설의 배경이 이렇게 침침함은 그것이 소설 구성에서 유리한 연유인지 아니면 원래 소설가들이 가난한 탓인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김애란의 글쓰기는 무겁고 울적하지 않다. 어깨가 축 처질만한 일도 그의 손끝에 걸리면 '그래도 한번 힘을 내볼까'하고 사뿐히 발을 내디딜수 있도록 바뀐다. 놀라운 능력이다. 슬픔과 고통을 슬쩍 빗겨나서 발아래 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여유, 그것은 단순한 상상력만으로 그려낼 수 있지 않다. 그 점이 그의 장점이자 내가 좋아하는 특질이다.

'도도한 생활'은 반지하방에 들어앉은 피아노라는 소재를 사용한다. 반지하방이 어떤지 경험해 본 사람은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피아노에 어울리지 않으며, 피아노에 나쁜지를. 그래도 생활은 남루할지언정 자존심은 도도하게 지켜야 한다. 우습지만 웃을 수 없는 내용. 그래서 슬픔이 더욱 강조된다. 절묘한 엮음의 미학.

'침이 고인다'는 이미 창작과비평에서 읽은 바 있다. 학원강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주인공. 불쑥 찾아온 학교후배. 마음약한 그는 원룸에 후배를 들이고 만다. 풍선껌을 씹으며 어릴적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후배는 그때를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인다고 한다. 버림받음과 침의 관계.후배는 다시 침이 고이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그에게는 부담이 되기 시작한다. 혼자있는 자유로움, 나만의 것이 점차 사라지면 옆의 존재는 부대끼는 법. 사회생활로 심신이 지쳐있는 그에게 후배의 생리자국은 도화선이었다. 같은 여자인데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계기에 불과함을 알려준다. 그에게는 후배랑 같이 지내는게 불편하다는 암묵적 사실. 후배가 떠난 자신의 방에서 모처럼 여유있게 영화도 다운받는 모습은 오히려 개체적 삶에 익숙하고 편안해하는 현대인의 삶을 잘 드러내준다.

'성탄특선'은 시니컬하다. 가난하기에 오누이가 방 하나에 살고 있는 상황. 여동생은 애인과 마음졸이지 않는 멋진 성탄맞이 섹스를 하고자 이리저리 시내를 헤맨다. 그런데 성탄대목에 보텔은 모두 동이 나고 아침이 다되어 겨우 추레한 여인숙 방을 구할 수 있을 뿐. 거기서 몸을 섞을 기분이 나지 않아 아침일찍 귀가한다. 여동생은 괴롭고 지쳐있지만, 오빠는 처음 같이 보내는 성탄의 시간이 과히 나쁘지 않다. 확실히 보다 젊은층의 성의식은 많이 변모했나보다. 결혼과 상관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것도 이십대 후반의 여성작가의 글에서. 하긴 전에 읽은 정이현의 작품도 그러했지만. 이걸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노력을 해야 하나 아니면 일부 문학에 등장하는 에외적 현상의 과대포장일까. 하여튼 젊은층의 성풍속도라는 점에서 재밌다.

김애란은 어린 작가다. 그의 글에서는 경쾌함과 싱싱함이 뿜어나온다. 이런 싱싱함은 다른 누구도 아닌 김애란 만의 미덕이다. 시간이 지나 그가 변하듯 그의 글도 변화하겠지만 후에 이런 미덕을 상실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계속 김애란을 좋아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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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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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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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구입한 가장 큰 이유는 작가가 나와 동시대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7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걸 보니 작품성은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선택의 결과를 한마디로 평한다면? 탁월한 선택은 아니었다.

소설의 핵심적 시대 배경이 되는 1991년 5월. 그때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훈련 초기라 TV나 신문같은 매체는 접근조차 할 수없는 암담한 시기. 한편 덕분에 머릿속은 말끔해졌다. 어느덧 훈련도 중기로 접어들고 드디어 처음으로 훈련소 외부교정을 나가는 날이었다. 열심히 구령에 맞추어 군가를 복창하고 팔 다리를 흔들면서도 모두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기에 여념없었다. 그리고 길가 전봇대에서 '강경대 사건'라는 단어를 보았다. 흠, 근처 강경에도 대학이 있었군. 그런데 무슨 사건이 터졌나? 학내 분규? 그후 강경대 사건은 내 오랜 마음의 빚이었다. 사회가 그리 시끄러운데 신병 훈련을 핑계로 아무 생각없이 그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는. 그것은 역사의 큰 줄기를 망각한 것과 진배없었다.

광고 카피를 보고 옳거니 손뼉을 쳤다. 드디어 잃어버린 의미를 되찾는 순간이구나. 전반부의 운동권 대학생 커플의 소꿉장난에서 시대적 정서상의 동질감을 발견하고 잠시 대학시절을 떠올리기도 하였는데. 후반부에서 급반전을 이루면서 소설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내 눈에는 이길용/강시우가 등장하는 부분부터 지나친 작위성이 개재되었다는 느낌이 계속되었다. 이길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정민의 삼촌. 이들의 조우와 인연이 절묘하게 엮이고 비껴가는 장면에서 갑자기 지나친 주제의식의 과잉으로 문학의 본질적 측면이 훼손됨을 느낀다. 문학은 문학 자체로 빛을 발해야 한다. 작가는 너무 서두르지 않았는가. 좀더 곰삭이는 편이 나았을 듯 하다. 아니면 좀 더 분량을 늘여 여유를 갖고 세부 기술에 할애하였다면, 또는 곁가지를 치고 줄기 그 자체만으로 들이대던가.

전반부의 주인공인 나는, 후반부에서 이길용/강시우의 행적을 그리는 조역으로 물러난다. 결국 이길용/강시우의 행적과 사상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아야하는가. 무슨 의미를? 파란만장한 삶에서 참과 거짓, 장주와 나비가 혼재하는 인생의 분별 불가능성을?

작가는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운동권에 대하여 마음의 부채를 지닌 듯하다. 세계 변혁을 꿈꾸고 사회의 부조리를 일소하는 원대한 희망. 그것이 공산주의의 몰락과 운동권의 퇴조,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개개인이 파편화되고 왜소해지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거대 담론이 자아내는 신비한 색채, 그것에 환상을 품었는가. 어쩌면 작가의 내면에 드리워진 그늘을 햇살에 드러내어 한 시기를 정리하는 의도도 있는 듯.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 모르겠으나 이 소설을 통해 마음의 꺼림칙함을 벗어버리려는 나의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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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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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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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잘 팔린 소설이다. 표지디자인도 그러하고 소재와 주인공도 많은 젊은 여성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음에 틀림없다. 나중에 TV 드라마의 소재로 삼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바로 직전에 읽은 소설과 이것과는 상대적 측면에서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차이를 보여준다. 남과 북, 고정간첩이 등장하는 대척점에 30대 초의 미혼여성의 삶과 사랑이 펼쳐진다. 그리고 지향점은 결혼으로 이어진다. 비록 오은수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문득 <오만과 편견>이나 <이성과 감성>이 떠오르는 것은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소설이 다루고 있는 주된 테마의 공통성일 것이다.

오은수를 포함한 소위 삼총사는 평범하다고 할 만한 사랑의 귀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도피처로 결혼을 하였다가 곧 이혼한 재인. 깨어진 첫사랑을 다시 만나 이제는 자식있는 이혼남이 된 그에게 다시 끌린 유희. 이렇게 오은수의 친구는 사연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오은수 자신은 어떠한가. 한동안 7년 연하의 대학생과 동거 비슷하게 지냈으나 결국 나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진다. 그리고 노처녀로 남는 게 두려워 재미는 없지만 무난한 남자와 결혼하려고 서두른다. 이들 세 친구의 모습을 우리 시대 미혼 여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섣부른 오해는 금물이다. 소설의 극적 효과를 위해 한 자리에 모았을 뿐이다.

도시의 독신 커리어 우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으로 무의식중에 절감한다. 얼핏 화려한 나날. 하지만 한 겹 안으로 들어가면 오은수처럼 불안감에 젖어 있다. 한해 두해 흐를수록 기회를 상실하고 영원히 뒤처질 것 같은. 이윽고 화려한 연애 시절을 뒤로 하고 이제 평생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가 필요해지는 시점. 여기서 요즘 여성들의 변화된 성의식을 느낄 수 있다. 신체건강한 성인여성으로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의 책임하에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관념. 여기에는 필요시 자발적인 유혹도 포함된다.

오은수가 김영수와 결혼에 성공했다고 치자. 그들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낼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아마 오은수 부모와 같이 처음엔 밋밋하지만 무난한, 나중에는 서로 남남처럼 지낼 것이다. 그것은 결혼을 화려한 싱글의 퇴락을 구해줄 피난처로 삼는데 연유한다. 남들도 다 하고 그냥그냥 살아가니까 별 고민없이 나도 하련다. 이것의 어려움은 상호간의 노력없이는 만족스러운 결혼생활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재인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김영수와 깨진 것은 오은수에게 다행이다.

오은수와 태오의 결합은 불가능하였을까? 아마 태오가 영화판에 쫓아다니지 않고 공부와 취업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가능하였을 것이다. 사실 오은수와 여러모로 궁합이 맞는 이는 태오가 아니던가. 오은수는 사랑과 꿈만으로 인생을 올인 할 나이는 아니다. 반면 태오는 아직 실현여부에 대한 큰 고민없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바를 시도할 나이다. 이 둘의 비극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런 면에서 과감히 자신의 소망에 충실하려는 유희가 당장은 바람직할 수도 있겠다. 수술로 풍만해진 가슴을 당당하게 내밀며 뮤지컬 오디션에 또다시 도전할 것이다. 하지만 내일은 어떨까? 유희는 내일도, 모레도 당당할 수 있을까?

여성이 독자적 주체로서 자리잡으려면 여러 요인을 충족시켜야 될 것으로 본다. 경제적 독립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심리적(정신적) 자주성이다. 요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의 하나가 평상시에 당당한 여권을 주장하다가 어떤 순간에는 남성에게 미루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지적이다. 결혼을 탈출구로, 도피처로 여기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당당하다면 늦게 하는 것과 아예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의연한 태도를 취해야 할 텐데 아직까지는 그러하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유희가 어쩌면 '당장은' 바람직할 수도 있다고 한정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유로 재인이 비록 아픔을 한번 겪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정도를 밟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이 도시는 외관상 눈부시게 화려하다. 거리에는 명품과 고급레스토랑으로 넘쳐난다. 게다가 온갖 치장을 아끼지 않는 선남선녀들은 왜 그리 넘쳐흐르는지. 하지만 파티가 끝나고 새벽의 거리에 나가보라. 거기에는 삭막함만이 흩어져 있다. 지난밤의 흔적은 악취가 되어 제대로 숨을 쉬기 어렵다. 골치가 지끈거린다.  구석에는 쓰레기와 함께 신문지를 덮은 노숙자들이 아직 다른 세상의 감미로움에 젖어 있다.

달콤한 나의 도시라! 첫입은 달콤할지언정 뒷맛은 쓰디쓰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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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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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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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읽고 나서 관심이 간 소설이다. 솔직히 문예지의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이렇게 모르고 있던 작품에 인지의 빛을 던져준 공로만은 인정하게 된다.

스토리는 엉뚱하면서도 터무니없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아직 첨예한 대치가 계속되는 분단국가라는 데 있다. 남파 고정간첩이었던 주인공이 스스로 간첩이라는 사실마저 입고 살던 그가 거의 이십년이 다 되어 급작스레 소환통지를 받으며, 만 하루동안에 겪게되는 내외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리 썩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사실 또한 그러하다.

그럼 이 소설의 미덕은 무엇일까? 철저한 이중구조가 주는 대비와 그 속의 모순과 갈등이다. 간첩이자 소시민인 주인공, 본디 조국은 북이지만 현재는 남에서 뿌리내린채 살고 있다. 평화로와 보이지만 사실은 붕괴 직전의 부부관계. 부인 기영과 교사 소지, 학생 아영을 통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 풍토. 그래서 이 소설은 독자에게 기쁨과 즐거움 보다는 거북함과 착잡함을 안겨준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바라면 두말할 나위없이 성공작이다.

특히 마리와 대학생 성욱과 그 친구 간에 벌어지는 삼각정사의 묘사는 한편으로는 우리 소설의 표현 한계가 많이 넓어졌다는 놀라움과 더불어 소위 '야설'을 연상시킬 정도다. 하긴 어둠속에서 벌어지는 부패를 덮어 가리는지 백주대낮에 드러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기영에게 북도 나름대로 살 만한 곳이다. 조금더 불편하고 조금덜 자유롭지만 말이다. 그래서 처음 명령을 확인한 후 그는 월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만약 그가 혼자였다면 아마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빛'의 영역은 딸 현미에게 있다. 어쩌면 현미는 이 곳에서 유일하게 내내 긍정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의 밝음은 기영은 남에 붙들어 놓는데 일익을 하였으면 또한 진국에게서 철이를 떼어놓게 될 것이다. 기영과 마리의 완전히 까발려진 관계가 장차 어찌 수습될지는 모른다. 다만 현미의 눈에는 간밤에 부모가 섹스를 했던가 아니면 다툼을 벌인 것으로 생각될 따름이다.

타이틀이 왜 '빛의 제국'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말미에 르네 마그리트의 연작이 언급되었다. 이런, 책표지가 바로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늘은 대낮, 집과 그 주변은 한밤.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기영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마리, 현미, 소지 등등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모두 빛과 어두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겉으로는 빛나고 환하지만 내면으로는 음울하고 괴로워하는...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그림을 보고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연유는 이 사회에 있는가 아니면 내 자신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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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7.3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