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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슬란과 류드밀라 ㅣ 비룡소 클래식 7
푸슈킨 지음, 카랄리코프 그림, 조주관 옮김 / 비룡소 / 2004년 7월
평점 :
젊은 나이에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푸슈킨은 외국 문예를 추종하기 급급한 당대에 러시아어를 사용하여 러시아적인 글감과 정신을 담아내면서도 충분히 예술적 감동을 자아낼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이런 연유로 러시아 근대문학의 시조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푸슈킨의 출세작인 서사시로서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글린카가 작곡한 동명의 오페라 서곡(서곡만 유명한!)으로 친숙한 작품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푸슈킨의 위상과 마찬가지로 이 서사시 또한 러시아 문학의 최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이 러시아적인 것을 다루고 있음을 자각하며 이를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곳이 마녀 바바 야가를 태운 / 절구통이 꿈을 꾸듯 걸어가고 / 마법사 코쉐이 왕이 / 황금 위에서 힘을 잃은 곳이었다. / 이곳은 러시아의 혼이 살아 있는 곳이요, / 러시아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P.12)
중세 러시아를 배경으로 민속적 요소에 중세풍의 환상을 결합하고 있어 내용 자체는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를 접하는 것처럼 사랑, 모험, 마법, 꿈, 죽음, 전쟁 등이 작중 내내 펼쳐진다. 발단은 신혼 첫날밤 신부 류드밀라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사건이다. 황당하면서도 엄연한 현실이므로 신랑 루슬란과 블라지미르 왕으로서는 통탄할 일이다.
루슬란 외에 세 명의 기사가 류드밀라를 찾기 위한 경쟁의 대열에 참여하는데, 대왕에게서 사위 루슬란이 믿음을 잃었음을 보여준다. 루슬란과 용사 로그다이의 결투는 미인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목숨마저 내건 역사적 동물적 본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로그다이가 그래도 정정당당하였다면, 음모와 비겁으로 감싼 파를라프는 루슬란을 죽이고 신부를 탈취하였지만 그녀의 잠을 깨우는 데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무능력함을 왕 앞에서 드러냈을 따름이다. 그래도 목숨을 건졌으니 상대적으로 다행이라고 할까나.
의외의 선택을 한 인물은 칸 라트미르였으니, 열두 명의 요부의 유혹에서 파멸로 이어질 뻔한 길에서 순결한 처녀의 도움으로 세속적 욕망을 떨친 채 숲속의 은둔자 생활을 한다. 루슬란과 다른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찾았고 행복에 찬 삶을 누린다.
나에겐 아내만이 소중하오. / 나를 행복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아내입니다. / 아내는 나의 삶이요, 기쁨입니다! / 아내는 나에게 잃어버린 청춘과 평온한 마음과 / 순결한 사랑을 되돌려 주었어요. (P.165)
이 작품에는 루슬란의 모험을 돕거나 방해하는 세 명의 신통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다. 난쟁이 마법사 체르노모르는 자신의 마법을 악한 일에 사용하며, 류드밀라를 납치하여 사건의 발단을 일으킨다. 자신의 형을 죽여 거대한 머리통만 남겨놓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결코 올바른 본성을 지니지 못하였다. 마법의 힘의 근원인 수염을 잃은 그는 궁의 난쟁이로 전락한다. 마녀 나이나는 파를라프를 꼬드겨 루슬란을 죽이게 하며, 체로노모르를 부추겨 루슬란과 핀란드 노인에 대항하게 한다. 그녀와 핀란드 노인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엉클어진 실타래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마녀였기에 목동이자 나중엔 영웅이 된 젊은이의 구애를 거부하였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쭈그러진 노인이 된 마당에 분별없는 사랑과 원망을 품으니 마녀든 마법사든 사랑의 힘 앞에는 누구나 무력하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나이나의 최후를 언급하지 않는다.
핀란드 노인은 일종의 치트키다. 그는 루슬란에 닥친 일을 오래전부터 예상하였으며,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결과를 예언하고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루슬란이 비겁자에게 암습을 당해 죽음을 맞이하자 사체를 부활시키고 마법의 반지를 전해 준 것도 역시 노인이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왔구먼. /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날이 / 드디어 온 걸세. (P.29)
이 귀중한 비밀 반지를 받아라. / 이것을 공주의 이마에 갖다 대면 / 기이한 마법의 힘이 사라질 것이다. / 너를 보고 적들은 혼비백산할 것이다. / 악은 멸망하고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 너희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하게 살 것이다! (P.191)
거대한 머리통을 언급하지 않으면 섭섭하게 생각할 독자가 많으리라. 이 작품에 실린 여러 기이하고 환상적인 일화 중 가장 충격적이며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바로 그다. 난쟁이의 마법과 저주로 몸뚱이를 잃은 채 머리통만 남아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존재로 남은 그의 운명을 떠올리면 동정심이 절로 나지만, 그가 보여주는 세상과 루슬란을 향한 적의는 그의 심성 역시 올바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마치 이승과 저승 사이를 헤매는 원귀라고나 할까. 수염 잘린 난쟁이를 보자 오랜 고통을 끝내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에게 기도할 따름이다.
이 서사시에서 류드밀라의 역할은 아무래도 미미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방심한 거만한 마법사의 뿔 모자를 움켜쥐어 빼앗고, 마법의 비밀을 발견하여 정원에 숨은 채 마법사의 손길을 피하고 루슬란이 올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낙담하여 운명에 절망한 채 자포자기하였다면 그녀는 마법사의 손에 타락하였을 것이며 참다운 사랑을 되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모두 여섯 개의 노래가 끝난 후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본인의 심정을 토로한다. 정치적 이유로 수도에서 멀리 변방의 카프카즈로 추방당한 자신의 암담하고 막막한 현실을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하소연한다. 갓 스무 살의 젊은이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고난이었을 것이지만, 후대의 독자로서는 이것이 그의 작품세계에서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사교계의 풍설에 잊혀진 지 오래다. / [......] / 내 영혼은 전처럼 순간순간 /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 찼으나 / 시의 불꽃은 시들었다. / 감동을 찾아보았지만 소용없다. / 시는 죽었다. / 운문을 즐기던 시절도, / 사랑과 즐거운 꿈을 꾸던 시절도, / 진실한 영감의 시절도 모두 가 버렸다! (P.206-207)
대부분의 동화책 삽화는 형식적이어서 원래 잘 언급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의 삽화는 꼭 밝혀야겠다.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 다수의 채색 삽화는 자체로서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린이 문학에서 삽화가 지니는 역할과 가치에 대한 하나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