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 연대기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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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드 앗 딘의 <집사> 최초 3부작을 구입해 놓고 호기롭게 <부족지>에 도전하였다가 뜨거운 맛을 본 후로는 서가에 잘 비치해 놓고 오랫동안 다시 펼쳐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 방대함과 난삽함에 느낀 당혹감에 비례하여 일반독자 수준에서 이해가 잘 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책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역자도 마찬가지 생각이 있었던 듯싶다.

 

몽골제국사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는 <집사>에 보다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한 이유로 이번에 한 권으로 된 <몽골제국 연대기>를 내놓게 되었다. (P.9, 서문)

 

<집사> 5권을 완역한 김호동 교수가 원전의 내용을 압축 요약하여 몽골제국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출간한다는 소식에 처음으로 북펀딩에 참여하였다. 남들 누구 못지않게 역사를 애호하는 내 마음에 그만큼 <집사>는 커다란 빚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출간 기념 오프라인 북토크에도 참석하였고, 몽골제국에 앞서 유목 제국의 기초 개념을 정리하기 위해 흉노 제국 관련서를 예습 차원에서 읽었다.

 

이 책은 몽골제국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말은 곧 <집사> 5권 가운데, <칭기스 칸기><칸의 후예들>이 핵심을 차지한다는 것이며, <일 칸들의 역사><이슬람의 제왕>은 필요한 범위 내에서 일부만 취급한다. 다만 <부족지>는 대체로 빼놓았는데, 일단 여기를 건들게 되면 늪에 빠질 위험성 때문이리라.

 

칭기스 칸의 일생은 대체로 잘 알려져 있고,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세계 제국을 건설하였는지에 관한 개략적 역사는 새삼스럽지 않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몽골인들 자신의 관점과 목소리로 그들의 찬란한 역사와 건국의 시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데 있다. 14세기 초, 광대한 몽골제국의 뼈대는 아직 굳건하게 남아 있고, 카안 울루스, 즉 원 제국도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이므로 몽골제국은 세계사의 중심이었다. 분명한 한계도 보이는데, 일 칸국의 후기에 편찬된 까닭에 종교적으로 이슬람교에 치우친 관점을 보이며 아무래도 자신들의 조상인 훌레구 및 후손들에 다소간 우호적인 기술을 찾아볼 수 있다.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그의 군대가 몰고 온 파괴가 이슬람권 각 지방에 미치자 창조주께서는 그 같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파괴를 가져온 바로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신의 완벽한 위력과 명령을 분명히 드러내신 것이다. (P.57-58)

 

대제국의 시조와 영웅의 탄생과 관련하여 신화적 요소가 반영되어 있음을 여기서도 보게 되는데, 알란 코아가 한 줄기 빛으로 임신하였다는 내용은 우리네 고대 신화와도 유사성을 보여 흥미롭다. 칭기스 칸의 출생에서도 상서로운 징표가 나타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칭기스 칸은 생전 몽골 초원의 통일에 매진하였다. 여러 부족과의 전투 중에서 특히 옹 칸과의 경쟁을 상세하게 기술하는데 그만큼 옹 칸이 최대의 적수였음과 더불어 칭기스 칸의 부친과 옹 칸이 의형제 관계였음에 더욱 그러하다. 칭기스 칸이 옹 칸에게 적시한 일곱 가지 은혜의 내용이 이를 잘 나타내준다.

 

칭기스 칸은 초원 제국의 전통에 충실하였다. 그는 몽골의 이웃한 적국인 금, 서하 및 카라 키타이를 확실히 제압하고, 특히 금에 대해서는 조공 관계를 맺고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가 정주국가인 금을 정복한다거나 멀리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을 멸망시킬 계획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음을 여기서 새삼 확인할 수 있음은 흥미롭다. 사실상 세계 제국으로의 야망은 호라즘 정복에서 비롯하였다고 해야 한다.

 

이제 내가 가까운 변경의 적들을 일소하고 모두 복속시켰으니, 우리는 이웃이 되어 지혜와 용기에 근거하여 협력의 길을 걷도록 합시다. 그래서 세상의 번영을 가져다주는 상인들이 마음 놓고 오고 갈 수 있도록 합시다. (P.134)

 

종래 몽골제국에 대해서는 칭기스 칸 사후, 크게 중국의 원 제국과 네 개의 칸국으로 사실상 분열되었다고 배웠다. 편역자는 이 책에서 전혀 다르게 설명하는데, 그들이 비록 다툼과 갈등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하나의 가계임을 결코 잊지 않았고, 대칸국의 적통성을 존중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국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쿠릴타이가 개최되면 제국 각지에서 왕족들이 대칸국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들 대형 울루스의 지배자들이나 거기에 속한 몽골인들은 여전히 자기가 몽골제국이라는 더 큰 정치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몽골제국이 네 개의 독립적인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 (P.289)

 

편역자는 울루스 개념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칸국을 울루스로 대체한다. 킵차크 칸국은 주치 울루스로, 차가다이 칸국은 차가다이 울루스로, 일 칸국은 훌레구 울루스, 대칸국은 카안 울루스로 각기 명명한다. 주치와 차가다이 울루스는 칭기스 칸의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정통성을 지니는데, 훌레구의 경우 자신이 무력으로 쟁취한 것이기에 타 울루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훌레구 울루스의 역대 칸들은 카안 울루스의 승인을 매우 중시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헷갈리는 개념인 칸과 카안의 차이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칸은 왕을, 카안은 황제에 해당하는 것. 칭기스 칸도 처음에는 칸이었고 추후에 카안의 자리에 올랐다. 칭기스 칸의 후계자인 우구데이, 구육, 뭉케, 쿠빌라이는 모두 카안이며, 차가다이, 훌레구, 가잔 등은 모두 칸이다.

 

아릭 부케는 울었고 카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 사랑하는 형제여! 이 반란과 분란에서 우리가 옳았는가, 아니면 자네들이 옳았는가?”라고 물었다. 아릭 부케는 그때는 우리였지만 오늘은 당신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P.308-309)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욕망은 혈육 간 애정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의 형제 간 충돌에서 승자는 쿠빌라이 카안이 되었지만 이것은 결과의 사안이지 옳고 그름의 사안은 아닌 것이다. 저자는 쿠빌라이 카안 시기의 카안 울루스의 번영기를 소개한 후 자신의 지역인 훌레구 울루스로 관심을 돌린다.

 

무패의 신화를 자랑한 몽골군이 유일하게 참패한 세력이 바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다. 비록 몽골군의 주력군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제법 규모가 있는 군대였으며, 무엇보다 몽골군과 훌레구 울루스의 후대 칸들이 여러 차례 복수를 시도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라시드 앗 딘의 군주였던 가잔 칸도 원정에 실패하였으니 이는 결국 훌레구 울루스의 국세가 강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몽골제국 중에서 훌레구 울루스가 가장 일찍 몰락한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하겠다.

 

셋째_독자적인 왕국인 카울리(高麗)...의 싱. 그곳의 군주를 이라고 부른다. 쿠빌라이 카안은 자기 딸을 그에게 주었다. 그의 아들이 카안의 측근인데 그곳의 왕은 아니다. (P.359-360)

 

이 책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고려에 대한 기록이다. 카안 울루스에 12개의 지방 행정 단위인 싱이 있다고 하면서 세 번째로 고려를 소개하며, 한편으로는 독자적 왕국이라고 기술한다. 몽골제국에 항복한 고려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자치권은 인정하지만 커다란 틀에서는 몽골제국의 일부라고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김호동 교수는 일반독자의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편의를 도모한다. 우선 지도다. ‘몽골제국 출현 전야의 세계와 몽골 고원의 주요 부족들’(P.48-49)에서 시작하여 칭기스 칸의 대외 원정, 훌레구의 서방 원정, 몽골의 남방 원정 등 14개의 지도를 제공하여 글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 사건을 시각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개인적으로 역사서와 기행문은 지도가 필수라는 생각이다.

 

가계도도 제공한다. 한창 읽다 보면 누가 누구인지, 누구의 자손인지 등 친족 관계가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 편역자는 주요 인물의 경우 조상과 후손의 계보도를 제시하고 있어 혈연 관계를 파악함에 있어 무척 유용하다. ‘칭기스 칸 조상의 계보’(P.28), ‘칭기스 칸의 증조부 카불 칸의 일족’(P.56)을 비롯하여 주치 가문의 계보도, 우구데이 카안의 가계도, 차가다이 울루스 칸 계보도, 주치 울루스 칸 계보도, 톨루이-쿠빌라이 카안의 가계도, 카안 울루스 카안 계보도, 훌레구 울루스 칸 계보도 등 상세한 계보도를 확인할 수 있다.

 

편역자가 공들여서 비록 개괄서로 편집하였지만 원전 자체가 현대 기준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사실과 여러 일화가 혼재되어 있어 다소간 어수선함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존 세계사, 특히 중국사가 카안 울루스, 즉 원 제국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계를 극복하여 세계사적 관점에서 몽골제국의 전반적 면모가 특히 잘 그려져 있음은 뛰어난 점이다. 편역자는 각 장의 서두에 자신의 견해를 조금 전개하고 있을 뿐, 어디까지나 원전의 충실한 전달에 방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관통하는 기조는 어디까지나 저자 라시드 앗 딘의 목소리다.

 

다시 한번 편역자 강호동 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책을 밑받침으로 삼아 언젠가 <집사> 전권 완독에 도전해 보겠다는 결심을 새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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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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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 읽기의 마지막 책이다. 최신작이자 최신 번역작이면서 이때 아니면 앞으로 다시 읽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집어 든다. 원서 제목 <Kvitleik>순백색을 가리킨다고 한다. 번역본 제목 <샤이닝>은 직역과 의역 중간쯤에 해당한다. 표제에 욘 포세 장편소설이라고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는데, 여기서 장편소설이란 자구가 내가 아는 의미와 같은 개념인지 궁금하다. 이 책은 120면이 채 되지 않는데, 소설 본문은 80면 미만이며, 나머지는 부록이다.

 

이 소설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한 남자가 어스름한 저녁에 외딴 숲길로 차를 몰다가 숲속에 갇힌다. 그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 나서 눈 내리는 와중에 숲속으로 계속 걸어들어가고 거기서 순백색의 형체와 마주한다. 작가는 한 남자의 죽음을 단순하고 함축적인 문장을 표현한다. 작가 특유의 압축과 반복이 작품의 긴장감과 심화 효과를 가져오지만 결말이 명료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작가가 이 짤막한 소설에서 그리고자 하는 바는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 남자인 화자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시골 도로를 배회하고 갈림길에서 좌우를 번갈아 갈아타다 막다른 숲길로 들어온다. 그를 압도한 심리 상태는 지루함과 공허함이다.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알아줄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이며, 부모와도 만난 지 오래된 사이임을 독자는 소설 속에서 알게 된다.

 

나를 덮친 것은 지루함이었다, 평소 지루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내가 지루함에 압도당한 것이다. 내가 하려고 한 어떤 일들도 내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무언가를 했을 뿐이다. (P.7)

 

화자는 언제든 선택을 되돌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극단의 길로 나아간다. 숲길 도중에 되돌릴 수 있지만 하지 않았고, 안전하고 따뜻한 차 안에 머물 수 있었음에도 굳이 눈 오는 저녁에 차 밖으로 나선다. 상식적이라면 구원을 청하러 숲 밖으로 나가야 함에도 그는 오히려 숲속으로 들어간다. 뭔가 행동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든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차가운 바위에 앉아 쉬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화자가 숲속에서 마주치는 존재들, 즉 부모님, 검은색 양복 남자, 순백색의 형체가 실체인지 환상인지 화자는 판단하지 못한다. 그에게 이것들은 실체이자 환상을 오가는 존재이다. 그것은 늦가을, 북구의, 눈 내리는, 저녁의, 숲속이라는 올바른 행동과 판단을 내리기에는 불리한 상황에서 화자의 신체와 정신 상태마저 오락가락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정말 화자의 부모님이 맞기나 한 건지 알 수 없다. 화자는 초반에 목소리가 전혀 다르다고 부모님을 인정하지 않다가 문득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한 번도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고 토로한다.

 

나는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아무도 나를 저지할 수 없다. 아무도. 그런데 나는 왜 여기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가.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P.67)

 

화자는 아니라고 일견 부인하지만 그의 언행은 내심 죽음을 맞이하기를 고대한다. 죽음을 향한 충동과 이에 대한 두려움이 반복적으로 그를 압도한다. 그가 움직였다가 멍하니 서 있기를 되풀이하는 것 역시 이에 기인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음에 대한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다. 그는 이대로라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의 수렁으로 나아간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와 순백색의 형체는 과연 무엇일까. 괜히 신비하고 환상적이고 상징적으로 해석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단순하게 저승사자와 죽음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화자의 손을 잡고 죽음으로 친절하게 안내하는 역할이다. 후반부에서 화자는 자신이 맨발임을 깨닫는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도, 그의 부모님도 모두 맨발이다.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이 단계에서 이들은 모두 육신의 존재가 아님을 독자에게 보여주려는 설정 아니겠는가.

 

그것은 완전히 순백색의 알 수 없는 형체다. 순백색의 형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그 윤곽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밝고 하얀 형체. 반짝이는 순백색의 형체. (P.27)

 

죽음을 색으로 구체화할 때 대체로 하얀색과 검정색으로 양분할 수 있다. 영원한 침묵과 소멸이라고 볼 때 검정색이 지배적이지만, 성인과 천사는 또한 눈부신 흰색이 아니던가. 거기엔 육신의 소멸을 초월하는 영혼의 존재와 불멸성에 대한 믿음이 상존한다. 기독교적 가치관은 이에 대해 더더욱 확실하다. 죽음이란 확실히 두려운 현상이지만, 죽음을 자연스럽고 친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도 분명 존재한다. 작가는 화자가 목도한 현상과 죽음을 통해 이것을 말하고자 함인가. 죽음은 단지 소멸이 아니라 세계와 하나가 된다는 것임을.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 (P.79-80)

 

욘 포세의 기존 작품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표현의 압축과 무서울 정도의 반복이다. 기법상으로는 마침표의 거의 부재와 쉼표로의 대치가 두드러진다. 이 점에서 <샤이닝>은 비교적 온건하다. 짧은 분량 탓일 수도 있겠지만 종전의 강박적일 정도의 집착이 여기서는 많이 온화해졌음을 보게 된다.

 

부록으로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을 수록하였다. 작가는 이 연설에서 자기 작품의 큰 특징인 희곡에서의 사이, 소설의 반복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 말과 말 사이의 공간에서 드러나는 실체보다 더욱 커다란 드러나지 않는 실체, 즉 침묵의 의미를. 그리고 작가가 하나의 흐름, 하나의 움직임으로 글이 계속 이어지기를 원하기에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음도 알려준다. 이 연설문은 초심자에게 생경할 수도 있는 욘 포세의 독특한 문학세계에 접근하는 비밀 코드와 같다. 아디오스, 욘 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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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초니에레 - 나남소네트 2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이상엽 옮김 / 나남출판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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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르카는 <신곡>을 쓴 단테의 후배이자, <데카메론> 작가인 보카치오의 동년배 시인이다. 중세 말 르네상스 초기 인물의 시가 현대에까지 절창으로서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이 책은 페트라르카 탄생 700주년을 기념하여 시집 <칸초니에레> 100편의 소네트를 발췌하여 번역하였다.

 

<칸초니에레>366편의 시로 이루어졌는데, 몇 가지 유형의 시도 있지만 대다수를 차지한 시는 소네트다. 소네트 하면 셰익스피어가 떠오르지만, 기실 소네트 형식을 완성한 인물은 바로 페트라르카라고 한다. 4, 4, 3, 3행의 총 14행 형식의 정형시인 소네트의 참모습은 번역시로는 알기 어렵다. 역시나 원문을 봐야 할 테지만 이러한 한계를 유념하고라도 페트라르카에 도전한다.

 

366편은 내용상 서시와 365편의 본편으로 나눌 수 있어 구성상 1년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책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1부와 2부의 구성이 시인이 연모하던 라우라의 삶과 죽음을 경계로 구분한 점도 있어 시인이 시집 구성에 만전을 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페트라르카는 죽음을 목전에 둔 평생을 이 시집을 다듬는 데 틈틈이 할애했다고 하니 <칸초니에레>야말로 페트라르카의 삶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대의 아름다운 두 눈이 나를 사로잡았으니, / 여인이여, 나는 사랑의 포로가 되어, 정신을 잃고 말았다오. (P.36, 3)

 

시인의 눈과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은 여성은 라우라(Laura). 이 시집은 그녀를 향한 시인의 구구절절한 사랑의 심정을 오롯이 바치고 있다. 시인에게 라우라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닮은꼴이자, 영원의 여성상이라는 점에서 파우스트와 그레트헨, 베르테르와 샤를로테와도 멀지 않다. 다만 라우라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쌍방보다는 일방에 가깝다고 해야 하리라. 작중에서 라우라가 시인의 존재를 진지하게 알고 교감을 가졌다는 어떠한 추측도 어렵다.

 

지상에서 대자연과 하늘을 보고자 하는 자는 / 가능한 한 와서 그녀를 찬미하시라, / 내 두 눈에만이 아니라, 미덕을 괘념치 않는 / 눈 먼 세상을 위해 홀로 태양인 그녀를, (P.190, 248)

 

라우라는 자연의 경이로서 시인에 의해 모든 여성 중 최고의 지위에 오르며, 사후 세계에서마저 그곳의 감탄과 찬사를 불러일으키는 극상의 존재다. 그녀의 외모, , 행동 등 일체의 모든 것이 시인에게는 아름답고 사랑스럽기에 그지없다. 라우라는 작중에서 여러 시적 표현으로 변용되는데, 월계수(lauro), 바람(l’aura), 라우레타 등이 그러하다. 특히 월계수는 용법을 확장하여 아폴로 신까지 연계하여 활용한다.

 

나는 고통을 먹고, 울면서 웃는다, / 하니 죽음과 생명이 내게는 똑같이 기쁘지 않네, / 여인이여, 당신 때문에, 나는 이 처지에 있다오. (P.145, 134)

 

사랑은 아름답고 기쁘고 행복한 감정인 동시에 슬픔과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 주거나 무심하게 군다면 이로 인한 상처는 한층 깊은 법이다. 이 책에서 시인은 라우라를 때로 적이라 부르며 투정을 부리는 듯한 어감이지만,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에 극단의 사랑이 증오로 변질되는 경우는 역사에서 간혹 볼 수 있다.

 

시집 전반부의 어느 시편을 들추어도 라우라를 그리는 시인의 애절한 심정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비록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어쩔 수 없는 한탄의 반복일지라도. 그럼에도 독자가 지루함과 포만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표현의 다채로움, 감정의 유동적 변화 등이 적절한 시구의 배치와 잘 어우러져 있기에 시로 쓴 내밀한 일기랄까 편지글을 읽는 경험을 독자가 갖게끔 해서이다.

 

이 시집이 라우라와 사랑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비록 수효는 적더라도 다른 제재의 시작품도 이따금 볼 수 있다. 시인 치노의 죽음을 애달파하거나(92) 특히 당대 교황청의 타락을 비판하는 시편(136, 138)이 눈에 띈다.

 

시인의 삶과 창작의 원동력인 라우라가 세상을 떠나자 이후의 소네트는 그녀를 향한 애탄과 찬미, 그리고 회상이 주 제재로 바뀐다. 이승을 떠나 저승에 가버린 라우라, 생전에 그녀는 시인의 사랑을 몰라준 잔인하고 인색한 주인’(320)이지만 그로 인해 행과 불행의 모든 감정을 경험하게 된 시인은 눈물 속에서 그녀의 천상에서의 사후를 기원하고 축복한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라우라를 향한 시인의 순수하고 헌신적이며 필생의 사랑이기에 가능하다.

 

이제 여기가 내 사랑 노래의 끝이로다, / 늘 쓰던 재주의 영감이 말라 버렸고, / 나의 체트라는 통곡하네. (P.215, 292)

 

슬픔도 언젠가는 끝이 있는 법, 늙고 지친 시인은 더 이상 펜을 들 수 없다. 시상의 영감이 말라버렸기에. 인생을 달관하고 체념한 시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고 창피하다. 한 여성을 향한 사랑에 빠져 신이 부여한 소중한 의무를 소홀히 하였음에. 그는 고해하고 회개한다, 신의 자비를 청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시를 덧붙인다.

 

여러분, 이제 그대들은 산만한 시들 속에서 / 내가 지금과는 다소 다른 사람이었던 시절 / 빗나가던 내 젊디젊은 그 시절에 / 내 가슴을 가득 채우던 그 탄성들을 들으리오. (P.32, 1)

 

시인의 평생에 걸친 사랑의 대상이었던 라우라는 어떠한 여인이었을까. 그가 찬미를 아끼지 않을 만큼 모든 면에서 그렇게 대단한 여인이었는가. 천사와도 같이 완전한 존재인가. 아니면 사랑의 콩깍지에 씌인 것인가. 실제의 라우라와 시인의 라우라가 동일한 인물인가. <칸초니에레>의 라우라는 시인 자신이 빚은 상상 속의 이상형이 아닐까. 그가 부러워하였던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이아처럼.

 

기대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렬하며 애절하다. 페트라르카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당분간 페트라르카를 천착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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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ghbour Rosicky kyung Moon Reading Classic 6
Willa Cather 지음, 박윤기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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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의 작품들을 거의 다 읽었지만, 애매한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표제는 <Neighbour Rosicky>인데, 국내 도서로 분류되어 있고 옮긴이 이름도 있다. 영어독해 교재인 듯싶은데 관련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도서관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았더니 영어 원문과 번역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어쨌든 윌라 캐더의 미독서 작품이므로 마무리하는 심정으로 책을 펼친다.

 

원제에도 없는 좋은 이웃을 옮긴이는 굳이 덧붙여 적는다. 사실 이 문구에 짤막한 단편 내지 중편 소설의 핵심이 담겨 있다. 평범한 농부,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으며, 다섯 아들과 딸 하나를 두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노인. 농장 일에 매진하느라 심장에 무리가 가서 의사한테 경고를 들은 체코 이민자 출신의 노인. 작가는 그를 좋은 이웃이라고 부른다. 어디 작가뿐인가, 의사 에드 벌레이는 그를 이렇게 추억한다.

 

그에게 로시츠키 영감의 삶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였다. (P.120)

 

의사의 주의를 받았지만 장남 루돌프를 돕기 위해 무리하게 잡초 제거 작업을 강행하다 쓰러지고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하는 로시츠키 영감. 그는 루돌프와 폴리 부부가 농장에서 안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리를 하게 된다. 도시 출신인 며느리가 시골에 정을 붙이지 못하자 은근슬쩍 챙겨주고 마음을 다독이는 좋은 시아버지,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먹고살 만한 수준에서 자신과 주변에 따뜻하게 마음을 쓰는 영감. 돈벌이보다는 올바르고 너그럽게 사는 것을 중시하는 노인네.

 

며느리의 요청으로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빈곤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런던의 비참한 삶, 뉴욕의 물질적으로 여유롭지만 정신적으로 공허한 삶. 그가 멀리 서부 평원으로 이주한 이유가 비로소 밝혀진다.

 

대도시는 건축물을 지으면서 사람들을 대지로부터 격리시키고, 사방을 시멘트로 처발라 땅과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시키고 있군. (P.92)

 

도시는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이었고, 망각된 자들이 사는 곳이었고, “버려진 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방이 열려져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었고, (P.119)

 

여러 사람이 로시츠키 영감과 작가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도시는 도시 나름대로, 시골은 시골 나름대로 장단점을 지닌다고. 하지만 적어도 작가와 영감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대지에 뿌리내리는 삶이 가장 건강하고 튼튼한 삶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로시츠키 영감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농장 옆 무덤에서 가족과 이웃의 삶을 함께 호흡하고 먼저 떠난 낯익은 친구들과 땅속에서 편안한 사후를 누릴 것을 기대한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은근하며 따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소설을 읽으면 괜스레 마음이 느긋해지고 기분이 흐뭇해진다. 작가는 굳이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담담하게 로시츠키 영감의 일상을 묘사하고 그의 생각을 기술하면 그 자체로 충분할 뿐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웅변과 화려한 수사를 능가하는 기쁨과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게 좋은 이웃, 로시츠키 영감 덕분이다. 그리고 그의 세상과 삶을 사랑하는 방식 덕분이기도 하다. 며느리 폴리가 시아버지를 향한 호칭이 어르신에서 아버님으로 바뀐다든지, 의사 에드가 영감의 심장 이상을 진단하고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힌다든지 하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로시츠키 영감의 사람을 사랑하는 특별한 재능, 이를테면 음악이나 색상에 대한 감식력과 같은 타고난 능력이리라. 시아버지의 사랑은 은근한 것이지, 유별나게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었다. (P.116)

 

원문이 약 70, 번역문이 약 50면을 차지한다. 잠시 원문을 읽어봤는데, 영어독해를 위한 각주와 설명이 상세하게 달려 있다. 확실히 번역문과는 다른 뉘앙스를 보이는데, 작가는 로시츠키 영감이 원어민이 아님과, 대초원 시골 지역임을 어투와 어휘에서 잘 나타낸다. 문장 자체도 아주 어려운 편이 아니라서 학습 목적으로 접근해도 나쁘지 않다. 서두의 작가 소개와 로시츠키 영감의 공감적 사랑이라는 제목의 작품 해설도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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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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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통해 작가 한강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한강의 책들을 몇 권 집중적으로 읽었다. 동화, 에세이, 시를 제외하고 본격 소설만 꼽자면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여수의 사랑>, <소년이 온다>. 한동안 시들하다가 다시 읽을 생각에 안 읽은 책들을 중고 도서로 차근차근 준비하던 즈음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분명 크게 기뻐할 소식이지만 나만의 숨겨둔 애호 작가가 사라지는 서운함도 어찌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금년도 노벨문학상 작가 독서를 시작한다. 발표 연대 역순으로 첫 번째가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 민주화 항쟁을 제재로 하였다면, 이 소설은 제주 4.3 사건을 제재로 삼는다. 두 편 모두 우리 현대사의 묵직한 아픔을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예민한 사안임에도 작가의 용기를 높이 사고 싶다.

 

<소년이 온다>와 달리 여기서 작가는 직접 사건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화자 경하와, 친구 인선은 아픔을 겪은 당사자가 아니다. 인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대의 참상을 겪은 인물이다. 작가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이것이 4.3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사전 지식 없는 독자라면 한동안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다. 심지어 사건에 대한 직접적 언급조차도 작품이 한참 전개된 후에야 비로소 기술된다.

 

홀연히 제주로 낙향한 인선은 병든 노모를 돌보면서 점차로 사건의 세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하자.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상한 언행의 근원이 고문과 고통의 산물임을 인선이 깨닫게 되었다 하자. 이 모든 것이 인선에게는 깊은 충격과 각성을 주었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 독자는 경하를 의아하게 여긴다. 소설가인 듯한데, 광주 항쟁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세상과의 말 그대로 단절을 시도하기도 한 그는 작가 한강의 분신인가.

 

한강의 문체상 특징으로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을 쓴다. 엄밀하고 상세한 사실적 묘사는 작가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시적 여운과 울림, 그리고 압축과 생략을 통해 작가는 산문 문체의 고유한 개인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에게 있어 사회적, 역사적 사건은 자체로서 그대로 작가에게 투영되지 않는다. 개인적 체현이라는 필터를 거치기에 거대한 스케일의 대하소설과 사회소설을 작가에게 기대하기 어렵지만, 반면 역사성의 내밀한 개인적 감성을 통해 우리는 사건의 본질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이 소설을 줄거리 위주의 서사 구조로 보면 맥락이 닿지 않고 애매모호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현실과 환상이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어 독자는 무엇이 현실이고 어디까지 환상인지 분명히 구별하기 쉽지 않다. 화자가 묻은 새는 진짜 죽었는지 아니면 화자의 상상에 불과한가. 화자와 더불어 4.3 사건과 그들의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인선은 현실인가 환상인가. 나아가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 중산간 외딴집에 찾아온 화자가 보고 듣고 생각한 모든 건 사실인가 아니면 눈 속에 고꾸라져 묻힌 그녀가 실제인가.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 (P.194)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광주 민주화 항쟁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실체가 드러났고 희생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도 이루어졌다. 반면 4.3 사건은 여전히 흐릿한 안개 속에 잠겨 있다. 나조차도 그런 게 있었다는 정도만 알 뿐 사건의 실체는 알지 못한다. 작중에서도 군부 치하에서 일체의 진상 파악 노력이 중단되었다고 언급하였듯이 제주도민의 무차별적 학살은 이념 만능주의와 빨갱이를 향한 적대감, 지역감정 등이 결부되어 희대의 사건으로 확산되었다. 학살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글자 그대로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철저한 발본색원?

 

개인의 존엄성은 집단 속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평시에 한 개인의 죽음은 슬픔과 위엄을 지닌 채 존중되기 마련이지만, 대량의 죽음에서 개개인은 하나의 물건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수많은 해골과 뼈가 제대로 매장되거나 처치 받지 못한 채 낭자하게 굴러다니는 몰골은 인간성의 민낯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P.329)이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어마어마한 죽음을 건드리면서 하필 작가는 사랑을 꿈꾸는가. 누구의 무엇을 향한 사랑인가. 상실한 오빠와 가족을 향한 인선 어머니의 필사적 사랑, 데면데면했던 모녀 간의 관계가 어머니의 무한한 고통을 인식하면서 깨닫게 된 인선의 사랑, 이념과 야만으로 타락하여 소실된 인간성의 회복을 외치는 보편적 사랑. 인선은 자신의 마지막 다큐 영화가 아버지를 위한 것도, 역사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인선이 말했다.

...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P.307)

 

인선이 필사적으로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초조하게 매진하도록 만드는가. 정작 제안자인 화자는 덤덤한데 말이다. 진실과 화해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기에, 지금 이때가 아니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그러한가. 이제 사라진다면 더는 기회가 없다. 아직은 아픈 역사를 땅속에 묻고 작별할 때가 아니며, 작별해서도 안 된다는 절박함의 발로.

 

미약하고 은근하게 시작되어 독자를 어리둥절하고 당혹케 만드는 작품의 전개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밀물의 물결처럼 우리네 마음과 정신을 계속 밀어붙여 후반부에 이를수록 고조되는 감정과 고양되는 영혼의 아픔에 이르게 한다. <소년이 온다>와 마찬가지로 남는 질문 하나. 도대체 인간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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