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 - 색으로 물들인 조선 풍경 예술가들이 사는 마을 17
김소연 지음, 오세정 / 다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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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에 대해 더 읽고 싶어 이 책을 골랐다. 역시 아동 대상 도서인데, 앞서 읽은 책보다는 대상 연령층이 더 낮다. 글쓴이의 문장도 아이들에게 말하듯 더 쉬운 어휘와 구어체를 사용한다. 내용도 조금 더 친절하고 차근차근 설명함으로써 학습 의도가 강하다. 무엇보다 각 장마다 미술놀이를 배치하여 흥미와 동시에 혜원의 그림에 친근감을 느끼도록 한다.

 

부제 색으로 물들인 조선 풍경이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중의적 문구로 다가오는데, 한자 색()의 원뜻에 부합하는 색깔의 의미가 우선적이겠지만, 색정과 정욕의 숨은 의미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야 혜원 그림 세계를 다각도로 조망할 수 있으므로.

 

이 책은 당연히 혜원의 풍속화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그의 특색과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당대의 다른 화가는 물론 서양 화가의 작품과 작법을 비교하여 설명한다. 고흐와 호퍼, 보티첼리, 프라고나르 등에 대한 비교 해설은 혜원의 그림을 조선이라는 시대적, 지역적 한계를 넘어 거시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인상적인 대목은 혜원이 밤의 풍경을 그렸다는 점을 강조한 데 있다. 이것을 고흐와 호퍼의 밤 그림과 비교한다.

 

신윤복은 조선 시대 그 어떤 화가도 그릴 생각조차 못한 밤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렸어. 그리고 아마도 그 솔직함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거겠지. (P.24)

 

이 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을 미술놀이가 차지한다. 화첩에 그림 그리기, 풍속화 재해석하기, 빛 그림 그리기, 슬라임 만들기, 종이 인형 옷 만들기, 주스로 표현하기, 사계절 카드 만들기, 풍속화 패러디, 동물 도장 만들기가 제법 큰 비중으로 수록되어 있다. 혜원의 풍속화를 통한 어린이 미술교육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름 고심한 자취가 역력하다.

 

혜원을 본격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성인 독자에게는 무리겠지만, 눈높이를 낮춰서 어린 독자들에게 혜원의 그림을 소개하고 재미를 느끼게 하기에는 꽤 괜찮은 책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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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 조선의 여인을 그리다 빛나는 미술가 7
최석조 지음, 김민준 그림 / 사계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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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에 관한 책을 읽으니 자연스레 혜원 신윤복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놀랍게도 혜원을 다루는 제대로 된 책은 거의 전무하다. 비교적 근래의 책 중에서 그나마 고른 게 바로 이 책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 도서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유명세에 비해 혜원의 삶은 거의 비밀에 싸여 있다. 그의 아버지가 도화서 화원 신한평이라는 것 외에는. 그가 도화서 화원이고 벼슬살이도 했다는 정보는 오세창의 기록에 따르지만 아무런 증빙이 없다. 그의 아버지가 도화서 화원이었기에 혜원은 화원이 될 수 없는 게 당대 규정이다. 설사 그가 화원이었다고 하더라도 아주 짧은 시기만 보냈을 뿐 자의든 타의든 도화서를 떠났을 것이다. 도화서 화원으로서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있어서다.

 

혜원의 생몰연대 또한 미상이다. 심지어 그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을지 모른다는 견해도 있었을 정도다. 그가 남긴 주요한 작품은 주로 여인네들, 그것도 그네들의 은밀한 모습을 그린 것인데, 이는 남녀 구별이 엄격한 조선 시대에서는 남성 화가가 도저히 그리기 어려운 장면이다. 비록 그네들의 대다수가 기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점들을 이해하니 혜원에 관한 책이 빈약한 게 납득 된다. 이 책을 포함하여 그나마의 책들은 대체로 혜원의 작품 해설 위주다. 그의 그림 독해를 통해 당대 서민들의 생활 모습, 의상, 풍속을 이야기로 맛깔나게 풀어내면 제법 풍성한 내용을 담을 수 있다. 당대 여성의 외모도 요즘과 비교하며 살펴볼 수 있다. 특히나 사극 등의 의상 고증에서 혜원의 풍속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혜원의 그림은 산수화와 동물화도 있지만 <혜원전신첩>, <여속도첩>의 풍속화와 <미인도>가 단연 대표작이다. 남들과 다른 혜원만의 그림 특징은 여인이 주 대상이라는 점 외에도 남녀 사이의 사랑에 관한 작품이 여럿 있다는 점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남녀 간 사랑은 드러낼 수 없지만 결코 인간의 본능은 어쩔 수 없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민은 물론 양반들의 애욕도 드러내지만, 흔히 짐작하는 것과 달리 전혀 풍자적이지 않다. 그는 그저 해학적 시각으로 솔직하게 그려낼 뿐이다.

 

자칫 타락한 모습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는 양반들의 은밀한 생활도 그림의 소재가 되기 시작한 거지요. 산이나 강, 꽃이나 동물 같은 아름다운 자연물에 대한 관심이 인간의 삶으로 옮겨 갔습니다. (P.91)

 

혜원의 그림은 색채적이다. 단원을 비롯한 조선 시대 화가들이 수묵을 위주로 하고 색채의 사용을 매우 제한적으로 하였음에 비하면 혜원은 색채가 주는 효과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음을 알게 된다. 풍속화 속 여인과 <미인도> 속 미인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한 포인트 색깔은 너무나 선명하다.

 

간송 전형필에게 새삼 감사함을 느끼며, 혜원에 대한 본격적 안내서가 나오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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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화가 김홍도 - 붓으로 세상을 흔들다
이충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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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한 우리나라 사람치고 단원 김홍도를 모르는 이는 드물다. 설사 이름은 헷갈리더라도 그의 풍속화 몇 점을 보여주면 대번에 어디선가 봤다고 할 정도다. 그만큼 유명한 조선 후기의 화가이지만 정작 그의 삶과 그림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이 책은 전문 전기 작가에 의한 본격적인 김홍도 전기다. 비교적 최근인 2019년도에 출간되었는데, 이 점은 꽤 중요하다.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화가임에도 중인 신분이기에 그의 삶의 전모는 역사 속에 숨어 있다. 도화서 화원이기에 공적인 활동 내용, 어진화사로 제수받은 몇 가지 벼슬을 통해 그의 생을 단편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계속적 연구와 발굴을 통해 김홍도에 관한 정보는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무엇보다 김홍도의 고향에 대해서 기존 자료에서는 서울이라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안산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근거도 명확하다. 안산시에 단원구와 단원 중고등학교가 있는데 전혀 터무니없지 않다. 김홍도의 대표적 호인 단원에 대해서도 기존의 중국 화가 모방설과 달리 저자는 고향 뒷산의 박달나무 정원에서 가져왔다고 하여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데 훨씬 설득력 있다. 김홍도는 정조의 명으로 선배 화가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과 강원도 지역 봉명사행을 다녀온 후 다시 일본으로 2차 봉명사행을 출발했다가 영남에서 김응환의 사망으로 중단되고 만다. 기존에는 김홍도 혼자 일본 대마도에 다녀왔다는 주장이 대세였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정설이다. 이 책은 이처럼 최신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김홍도의 삶을 출생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매끄럽게 훑고 있다.

 

김홍도는 천부적 재능과 더불어 훌륭한 스승을 만난 행운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안산 시골에서 제아무리 뛰어나봤자 아무 쓸데 없는 재주에 불과했을 그의 솜씨가 표암 강세황과 현재 심사정을 통해 갈고 닦여 일세를 이루게끔 되었음은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그것은 중인과 양반이라는 신분 차이를 넘어 진정한 예인 간의 교류이다.

 

우리는 대개 김홍도를 풍속 화가로 알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김홍도의 작품세계가 실로 방대함을 알 수 있었다. 영조와 정조의 초상화를 그린다든가, 신선도, 산수화, 풍속화, 인물화, 왕실의궤 등 회화의 전 영역에서 그는 최고 수준을 성취해 냈다. 그것은 어느 화가도 이루어내지 못한 위업이다. 그뿐 아니라 글씨와 시에도 능하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의 대표작과 탄생 배경, 그 예술적 특징을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적절한 수준에서 잘 나타낸다.

 

그러나 도설을 완성하고도 도화서로 돌아가라는 명은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 김홍도는 자신이 오래전 강세황과 심사정이 예견하듯 이야기했던 방외화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진을 세 번이나 그리고 몇 차례 봉명사행을 다녀왔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 부질없게 여겨졌다. (P.388)

 

이즈음에서 김홍도에게 안타까운 점은 그의 개인사다. 중인 신분이라는 타고난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어진화사로서 최대 연풍 현감이라는 벼슬까지 올랐지만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명성이 자자한 화가로서 무난하게 관리만 이루어졌더라도 그의 노년은 그리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갈 곳 없어 방황하고, 자식의 학비를 낼 돈이 없다고 탄식하는 단원을 보면 도화서를 향한 미련의 끈을 기약 없이 부여잡고 있는 연약한 인간적 면모가 중첩된다. 차라리 방외화사로서 양반과 부유한 중인들의 주문에 응하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만 몰두하였더라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그동안 중시되었던 정조와 김홍도의 인연 강조에 비판적이다. 김홍도에 대한 정조의 배려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조는 소위 병 주고 약 주고 한 셈이다. 단원에게 찰방직과 현감직을 제수하는 한편, 일방의 제보만으로 그를 파직시키고 도화서에 돌아오게 해주지도 않았다. 관점에 따라서 그에게 공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도화서 화원과 그렇지 않음은 천지 차이다.

 

그동안 많은 미술사가는 김홍도의 성취를 정조의 총애와 연결했다. 임금의 후원으로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 그러나 김홍도에 대한 기록을 살필수록 우리가 그의 삶에 정조의 그늘을 과도하게 드리웠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P.21, 서문)

 

이 책은 김홍도를 중심으로 다루지만 그를 둘러싼 여러 인물, 특히 조선 후기 미술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스승인 강세황과 심사정은 물론 선배 김응환, 신한평과 동문 이인문의 우정까지. 또 다른 유명 풍속 화가인 김득신과 김홍도가 생면부지가 아니며, 신한평의 아들이 혜원 신윤복이라는 점에서 날실과 씨실처럼 당대 회화사의 숨은 면모를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아마 단원 이후 화가의 최대 과제는 단원 넘어서기가 아니었을까.

 

김홍도는 그림에다 자신의 자나 호를 적었는데, 자는 사능이고, 호는 단원, 서호 등 여러 개를 사용하였다. 이 중에서 취화사와 첩취옹이 눈에 띤다. 모두 술에 취한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인생의 말년에 그는 아픔과 괴로움과 불행을 잊기 위해 매일 술에 취해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실의 후 다른 집에 얹혀살다가 제자를 만나러 전주에 가서 끝내 숨을 거둔다. 위대한 예술가의 삶은 대개 비극으로 마치는 것 또한 인생의 아이러니다.

 

김홍도는 이렇듯 쓸쓸하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오죽하면 당대의 문신이던 심상규가 우리나라는 인재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한탄했겠는가. (P.20, 서문)

 

저자는 대중성과 전문성의 경계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 여기서 자칫 삐끗하면 한 마리의 토끼도 잡지 못할 테니. 제아무리 글솜씨가 뛰어나더라도 저자가 김홍도의 예술세계에 문외한이거나 조선 후기 시대상을 해독하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성과를 내기란 불가능했으리라. 반신반의하며 집어 든 책이지만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아울러 이인문과 신윤복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고, 강세황과 심사정의 예술은 어떠할지 궁금증도 생겼다. 그런 면에서 좋은 책이자 잘 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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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옮김 / 수오서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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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모지스 할머니 관련 책을 더 읽는다. 이 책은 모지스 할머니가 1952, 92세의 나이에 출간한 자서전이다. 할머니가 101세의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자서전 이후로도 9년을 더 사신 셈이다.

 

평범한 일생을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세간의 주목을 받아 유명인이 되었을 때 놀람과 기쁨과 얼떨떨함이 혼재된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80세에 첫 전시회를 열고, 93세에 <타임>지 표지모델이 되고 100세에 모지스 할머니의 날선포를 경험한 그녀가 바로 그렇지 않을까. 심지어 이 책이 출간된 당시 그녀는 아직 명예의 절정에 오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어린 시절부터 삶을 회고하는 모지스 할머니의 일생은 가장 보통 가정의 전형적인 여성의 삶 그 자체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일찍부터 밥벌이를 위해 다른 사람 집에서 식모살이하며 가정주부의 자질을 익히는 등 일련의 과정이 그러하다. 의학 기술의 충분하지 못한 수준으로 그녀는 여러 형제자매를 잃어야 했고, 훗날 결혼하고 나서는 열 명의 자녀 중 다섯을 일찍 묻어야 했다. 유아기 죽음이 다반사라고 해도 결코 슬픔이 작지는 않을 것인데 그녀는 삶을 담담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참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물론 나에게도 시련이 있긴 했지만 그저 훌훌 털어버렸지요. 나는 시련을 잊는 법을 터득했고, 결국 다 잘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P.111)

 

남부에서, 그리고 이글 브리지로 돌아온 후에 이르기까지 술회한 할머니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녀만의 삶의 특징을 보게 된다. 그것은 우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다. 자신의 말처럼 그녀는 언제나 부지런함을 유지한다. 버터와 우유를 팔고, 감자 칩 사업을 하고 잼을 만드는 등 그녀는 남편의 경제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적극적으로 노력을 한다. 자수를 놓다가 관절염으로 어렵게 되자 낙담하지 않고 붓을 들어 그림을 시작한 것도 모지스 할머니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덕분에 그녀가 후세에도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만약 그림을 안 그렸다면 아마 닭을 키웠을 거예요. 나는 절대로 흔들의자에 가만히 앉아 누군가 날 도와주겠거니 기다리고 있진 못해요. (P.272)

 

무병장수는 모든 사람의 꿈이지만 그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자신은 멀쩡하지만, 배우자와 특히 자녀가 본인을 앞서 세상과 작별하는 모습을 보는 건 다른 의미에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다. 할머니는 딸과 아들을 앞서 보냈다. 그녀의 붓은 인생의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행복, 불행의 모든 추억을 담는다. 슬픔과 불행을 여과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만을 남겨서 캔버스에 올려놓는다. 그녀의 그림을 볼 때 받게 되는 아스라한 그리움과 은은한 따뜻함, 흐뭇한 즐거움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머릿 속에 떠오르는 대로 자연의 풍경이라든가 낡은 다리, , 여름이나 겨울 풍경, 어린 시절의 추억 같은 것을 그립니다.

나는 언제나 보기 좋고 즐거운 풍경을 그립니다. 알록달록하고 북적북적한 게 좋아요. (P.259)

 

미술사적으로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아마추어의 작품으로 치부되어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에 수록된 70편에 가까운 그림들 하나하나는 보는 이에게 뭉클한 추억과 감정을 되새겨준다는 면에서 높은 의미를 지닌다. 문화가 다른 우리 눈에도 그렇게 보일진대 미국 사람들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발달로 사라져 버린 좋았던 옛 시절의 낭만을 회상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각박한 현대사회일수록 더더욱 커가는 아쉬움이자 그리움이리라.

 

나의 삶을 돌아보니 하루 일과를 돌아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마쳤고 내가 이룬 것에 만족합니다.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합니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P.275)

 

제아무리 평균수명이 연장되었다고 하지만, 고희를 넘어선 나이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란 쉽지 않다. 대개의 경우 더 이른 나이에 활동의 폭과 양을 줄이고 고요하고 평안한 여생을 누리는 준비를 시작하게 마련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 즐거움을 주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것의 결과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자체로서 삶의 기쁨을 찾아 노력하였다.

 

누구나 다 모지스 할머니 같은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아니 기대해서도 안 된다. 다만 나이 들었다고 제풀에 주저앉지 않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삶을 즐기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꾸준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최고의 삶으로 회고하는 건 그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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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스 할머니 -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
이소영 지음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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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모지스 할머니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온라인 중고도서를 구입할 때 배송비 절감을 위해 대충 끼워 넣었던 책이다. 이제 찬찬히 책장을 펼쳐나가면서 뜻밖에 좋은 책을 접할 수 있었음을 기쁨과 행운으로 간주한다.

 

그녀는 76세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세상을 떠난 101세의 나이까지 1,600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중 250점이 100세 이후에 그린 그림일 정도로 삶의 마지막까지 열정이 대단한 화가였다. (P.8-9)

 

모지스 할머니에 대한 소개다. 요즘 인생 이모작 또는 삼모작이니, 백 세 시대라고 일컫는데 그녀는 반세기 이전에 이미 이를 실현한 인물이다. 평범한 여성으로서 아내와 어머니로 살고 남들은 인생 여정의 마지막에 이를 시기에 그녀는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바로 아마추어 화가의 삶을.

 

이 책은 모지스 할머니의 삶을 소개하고, 그녀의 주요 그림들을 삶의 굽이와 연결하여 풀어놓는다. 여기에 글쓴이의 개인적 감상과 소회를 녹여 넣어서 한 편의 아름다운 미술 에세이로 완성하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대표작들을 고화질에 담아내어 그림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 면, 때로는 양 면에 걸쳐 수록한 그림들은 감상하기에 충분한 품질이다.

 

당대 미국민들에게 큰 반향과 인기를 끌었던 모지스 할머니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무엇보다 늦은 나이에 이루어낸 도전과 성취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도 않은 시골 할머니가 심심풀이 삼아 그려내는 그림. 남편도 자식도 이웃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본인도 건강이 좋지 않아 평생 동반자였던 자수마저 할 수 없게 된 그녀. 남들이라면 우울하고 의기소침하게 마련일 텐데 그녀는 망설임 없이 붓과 캔버스로 전향한다.

 

사람들은 늘 내게 늦었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사실 지금이야말로 가장 고마워해야 할 시간이에요. 진정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이죠.” (P.46)

 

우리는 항상 뭔가를 시작할 때 망설인다. 어떻게 하면 안 해도 좋을까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기에 바쁘다. 제일 흔한 게 바쁘다는 이유고, 너무 늦은 게 아닌가 하는 우려다. 모지스 할머니의 사례를 보면 뜨끔하다. 설사 그녀처럼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어떠한가. 정작 그녀도 성공과 명예의 의지를 품고 그림을 시작한 건 아니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 대충 훑어보고 넘기기 어렵다. 다채로운 색감으로 표현한 20세기 전후 미국민의 삶을 그대로 그려낸 민속화인 동시에 풍경화다. 빨래하기, 양털 깎기, 결혼식, 단풍시럽 만들기, 썰매 타기, 마을 축제, 핼러윈, 칠면조 잡기 등 당대인들의 소박한 삶과 일상을 한 편의 앨범을 넘기듯 볼 수 있다. 어른들은 추억의 장면을 회상할 것이며, 아이와 청년이라면 옛날 동화책을 감상하듯 신기해할 것이다. 그림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인물들의 다채로운 장면과 활동에 절로 구석구석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은 멀리서 전체를 보게 만들고, 그다음 그 안에 들어가서 걷고 놀고 만지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녀가 그린 마을은 하나의 생명체 같아서 항상 분주하고 변화한다. (P.176)

 

모지스 할머니를 근현대의 거장 화가와 비교할 수 없다, 착상, 구도, 기법 등 여러 면에서. 그녀는 우리네 같은 평범하며, 단지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한 일반인이다. 그럼에도 당대 미국이 모지스 할머니의 날을 제정하고, 매년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에 많이 그림을 채택하고, 그녀의 죽음에 전국민이 애도하였던 것은 범상하게 볼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보통의 미국인을 대변하는 인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림으로 추억을 회상하며, 그림을 통해 현재와 대화하고 교감할 수 있기에 많은 사람이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거대를 지향하는 세상에서 작지만 소중함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 빠르고 편한 것만 선호하는 풍조에서 낡고 촌스럽고 불편하지만 그 자체가 잊혀진 정서를 떠올리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은 현대사회처럼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놓치기 쉽기에 더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감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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