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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 희곡 선집
조미나 지음 / 누멘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엄밀히 평하자면 이 책은 예이츠 희곡 선집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가 다소 애매하다. 내용상 커다란 관련성이 없는 두 파트를 억지로 한 권의 책으로 합본해 놓았다. 제1부는 <예이츠 희곡선>으로 세 편의 희곡을 번역하였으며, 제2부는 <예이츠의 시세계에 나타난 신비사상>으로 역시 세 편의 논문을 수록하였다. 그래서 ‘조미나 옮기고 지음’이라는 낯선 문구가 등장하였다.
20여 편의 극작품을 남긴 예이츠는 사실주의적 희곡을 거부하고 시와 마찬가지로 신비적이고 상징적인 성격의 작품을 썼다. 그의 삶과 문학에서 극은 시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앞서 ‘디어드러’와 ‘매의 샘에서’를 읽어보았는데, 이 책에서는 ‘성좌에서 온 유니콘’과 ‘배우 여왕’, ‘고양이와 달’을 수록하였다.
예이츠는 무대 장치를 극도로 단순하고 간결하게 처리하며, 텅 빈 듯한 무대는 신비적인 뉘앙스를 풍기게끔 유도한다.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도 상징성을 띄며 고도로 함축적이다. 이런 연유로 그의 작품은 그리 길지 않다. 이 작품들은 예이츠로서는 비교적 드물게 보는 비설화적 희곡이다. 동시에 매우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성좌에서 온 유니콘’에서 작가의 자본주의 및 물질문명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런 평범한 속물이 작중 토마스이며, 존 신부, 앤드류와 마틴은 비전과 환상에 경도되어 있다. 마틴의 꿈에서 나타난 유니콘은 신성하며 세속의 더러움에 물들기를 거부하는 존재다. 마틴은 꿈이 세상을 전복하라는 계시로 간주하여 거지들을 끌어들여 폭동을 일으킨다. 작가는 마틴이 받은 예언이 잘못 해석된 것임을 제시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온 세상이 진흙투성이인데 한 점 오점없이 유니콘이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속세를 떠나는 것이 그 순결함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편이리라. 마틴은 과감히 세상에 도전하였다.
‘배우 여왕’은 드물게 이국적 배경을 택하고 있다. 역시 유니콘이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배우 셉티머스는 유니콘의 숭엄함과 순결함을 적극 옹호한다. 그 역시 유니콘이 현세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며, 이로써 기독교 세상이 끝날 것을 예언한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여배우이자 셉티머스의 아내가 여왕의 역할을 대신하는 장면이다. 데시마는 죽음을 택하였건만 성난 폭도는 진정되고 배우 여왕은 진정한 여왕이 된다. 모든 게 불가항력적으로. 아이러니는 여왕이 수년간 궁에만 은거하고 총리대신을 제외한 누구도 여왕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데 있었다. 얼굴 없는 여왕은 대중들에게 실체가 없는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결국 유니콘의 예언자인 셉티머스는 버림받고 잠자는 아담이 된 반면 엉뚱하게도 데시마는 여왕이 되었다.
‘고양이와 달’은 상징적이면서 상투적인 작품이다. 장님 거지는 성자에게 시력을 요청한 반면, 절름발이 거지는 축복을 청한다. 현대인들은 내면을 외면하고 오로지 외적인 것을 갈구한다. 그것은 물질문명과 속물화의 진전에 따라 더욱 심해진다. 예이츠는 사람들이 잃어가는 고귀한 품성을 회복하기를 열망한다. 절름발이 거지는 육신의 회복 대신 영혼의 구원을 택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육신마저도 온전해졌다. 내용은 일견 진부하기조차 하지만, 고양이와 달이 갖는 상징성은 섣부른 추론을 배제한다.
사실 이 책의 핵심은 제2부에 있다. 책 서두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예이츠의 시 문학에서 신비주의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그의 상징은 단순한 낭만성의 차원이 아닌 문명 전환의 일대 예언임을 주장한다. 즉 그의 시는 거개가 예언시라고. 제2부는 이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이츠는 일찍이 켈트 신화와 전설에 깊은 관심을 쏟았으며, 신비주의 단체에도 가입하여 활동하고 때로는 직접 창단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신비주의적 성향은 서구에 그치지 않고 인도 문명과 선불교도 탐구하여 생각보다 폭과 깊이가 심오함을 짐작케 한다. 그의 시에서 무수한 상징을 배제하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예이츠가 당대 장미십자단을 이끌어 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어느 마법사보다 훌륭한 백마법사였으며 인류의 대스승으로서 2000년을 중심으로 한 문명의 대주기가 끝나는 물고기자리의 마지막 세대인 후대인들을 이해 ‘다이몬(Daimon)’으로서 새 시대를 위한 유언을 남겨 놓았다...” (P.160)
매우 놀라운 주장이다. 예수로 대표되는 남성적 서구문명이 종말을 맞이하고 장미십자단의 소피아가 대변하는 여성 원리가 도래할 것을 예이츠는 예언하고 끊임없이 시로써 추구하였다. 예이츠는 예수의 등장을 알리는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예이츠의 문학에 등장하는 레드 한라한과 광대는 작가의 분신이다. 그러고 보니 ‘미친 제인’ 시리즈의 시에서도 미쳤다는 판단의 주체는 당대 세속인의 시각이다. 영원한 진리를 갈파하는 참된 예언자는 범인의 눈에는 미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이츠의 삶과 문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여성 모드 곤에 대한 인식도 남다르다. 그의 낭만시와 연애시는 세속의 여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예이츠는 실생활의 여인들을 단지 사냥개의 소리로 상징했듯이 성배인 불멸의 미를 추구하기 위한 시적 소재에 불과했지 결코 그녀들이 시의 주체이거나 궁극목적은 아니었다...예이츠의 사랑은 한 여인을 향한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불멸의 장미를 향한 사랑을 위한 방편으로서 사랑의 대상이 바뀐 것은 오로지 불멸의 장미를 여성들 속에서 찾고자 한 까닭이라 하겠다.” (P.192)
평론가들이 예이츠 시의 진수를 ‘존재의 통일’에 두고, 그것은 개인과 사회적 인식의 조화와 관조의 경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저자 역시 ‘존재의 합일’이란 측면을 강조하고 있어 이 점에서는 대체로 언뜻 유사하게 보인다. 다만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예이츠의 상징시는 남녀양성의 원리의 균형을 이룬 ‘존재의 합일’을 통한 불멸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P.195)
저자의 주장은 기존 예이츠 해석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참신성을 보여 준다. 더불어 예이츠 문학에서 간과되어 왔던 신비주의의 영향을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어 그의 시를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침소봉대(針小棒大)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예이츠의 신비주의, 마법에 대한 경도와 장미십자단, 금빛새벽단 등 종교단체 활동 등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도와 사제는 엄연히 다르다. 신비주의에 관심을 보인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과대 해석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저자가 매 페이지마다 언급하는 불멸의 소피아와 예이츠를 연결 짓는 것은 저자의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에 가깝다는 우려가 든다. 그의 시와 희곡에서 소피아는 등장하지 않는다. 장미십자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고 하여 바로 소피아를 예이츠 문학의 절대자로 추앙할 필요는 없다. 세기말 서구의 위기와 기독교 문명의 몰락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는 비단 예이츠 외에도 여럿 있었다. 이들 모두를 소피아 사도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의 예이츠 시에 대한 새로운 시도는 환영할 만한 일이고 충분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시비를 가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부실한 건축물을 짓는 것은 현명치 않다. 현시점에서 저자의 의견이 보다 설득력을 얻으려면 더 많은 연구와 해석의 시도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