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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이 소설을 구입한 가장 큰 이유는 작가가 나와 동시대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7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걸 보니 작품성은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선택의 결과를 한마디로 평한다면? 탁월한 선택은 아니었다.
소설의 핵심적 시대 배경이 되는 1991년 5월. 그때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훈련 초기라 TV나 신문같은 매체는 접근조차 할 수없는 암담한 시기. 한편 덕분에 머릿속은 말끔해졌다. 어느덧 훈련도 중기로 접어들고 드디어 처음으로 훈련소 외부교정을 나가는 날이었다. 열심히 구령에 맞추어 군가를 복창하고 팔 다리를 흔들면서도 모두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기에 여념없었다. 그리고 길가 전봇대에서 '강경대 사건'라는 단어를 보았다. 흠, 근처 강경에도 대학이 있었군. 그런데 무슨 사건이 터졌나? 학내 분규? 그후 강경대 사건은 내 오랜 마음의 빚이었다. 사회가 그리 시끄러운데 신병 훈련을 핑계로 아무 생각없이 그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는. 그것은 역사의 큰 줄기를 망각한 것과 진배없었다.
광고 카피를 보고 옳거니 손뼉을 쳤다. 드디어 잃어버린 의미를 되찾는 순간이구나. 전반부의 운동권 대학생 커플의 소꿉장난에서 시대적 정서상의 동질감을 발견하고 잠시 대학시절을 떠올리기도 하였는데. 후반부에서 급반전을 이루면서 소설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내 눈에는 이길용/강시우가 등장하는 부분부터 지나친 작위성이 개재되었다는 느낌이 계속되었다. 이길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정민의 삼촌. 이들의 조우와 인연이 절묘하게 엮이고 비껴가는 장면에서 갑자기 지나친 주제의식의 과잉으로 문학의 본질적 측면이 훼손됨을 느낀다. 문학은 문학 자체로 빛을 발해야 한다. 작가는 너무 서두르지 않았는가. 좀더 곰삭이는 편이 나았을 듯 하다. 아니면 좀 더 분량을 늘여 여유를 갖고 세부 기술에 할애하였다면, 또는 곁가지를 치고 줄기 그 자체만으로 들이대던가.
전반부의 주인공인 나는, 후반부에서 이길용/강시우의 행적을 그리는 조역으로 물러난다. 결국 이길용/강시우의 행적과 사상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아야하는가. 무슨 의미를? 파란만장한 삶에서 참과 거짓, 장주와 나비가 혼재하는 인생의 분별 불가능성을?
작가는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운동권에 대하여 마음의 부채를 지닌 듯하다. 세계 변혁을 꿈꾸고 사회의 부조리를 일소하는 원대한 희망. 그것이 공산주의의 몰락과 운동권의 퇴조,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개개인이 파편화되고 왜소해지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거대 담론이 자아내는 신비한 색채, 그것에 환상을 품었는가. 어쩌면 작가의 내면에 드리워진 그늘을 햇살에 드러내어 한 시기를 정리하는 의도도 있는 듯.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 모르겠으나 이 소설을 통해 마음의 꺼림칙함을 벗어버리려는 나의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