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힘 설킴 부클래식 Boo Classics 69
테오도어 폰타네 지음, 박광자 옮김 / 부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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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타네는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작가일 것이다. 대표작 <에피 브리스트>와 이 <얽힘 설킴>의 보편적 평가는 고루한 인습에 짓눌려 희생당한 여성의 처지를 부각시키는 데 천착하고 있다. 귀족 청년이 일반 시민계층의 처녀와 사랑을 속삭이다 차버리고 귀족 여성과 결혼한다는 설정은 상투적이면서도 독자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폰타네는 페미니스트였던가.

 

폰타네의 작품은 주로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페미니스트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에피 브리스트>에서 주인공은 분명 희생자다. 늙은 남편 역시 피해자이지 가해자는 분명 아니다. 가해자는 누구일까. 바로 사회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얽힘 설킴>에서도 레네는 외관상 피해자임에도 실상 독자의 시각에 비친 피해자는 보토라고 하겠다. <마틸데 뫼링>에서 동명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결코 따뜻하지 않다.

 

전 누굴 사랑하면 그냥 사랑할 뿐이에요. 그것이면 충분해요. 그 사람한테 더 바라는 것은 없어요. 정말이지 전혀 없어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그 사람이 오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다시 올 때까지 가만히 못 참고 기다리는 것, 이런 것에 저는 행복해요. 이것이면 충분해요 (P.25)

 

나에게는 이 최고의 것이 소박함, 진실함, 자연스러움이다. 그런데 레네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래서 나는 레네를 좋아한다. 이 매력에서 내가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다. (P.135)

 

보토와 레네의 애정은 이해타산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은 전혀 부정적 인물형이 아니다. 그들의 사고와 취향의 지향점은 매우 유사하여 서로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모두 사랑의 결말을 애시당초 인식하고 있었다.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고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 비록 사회는 변화하고 있지만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은 현실화의 장벽이 너무나 크다. 가문의 기대, 재정적 안정, 그리고 사회적 인정 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닌 탓이다.

 

당신은 나를 잘 몰라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이런 순간을 가진 것만으로 행복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런 것은 나는 생각지 않아요. 언젠가 당신은 떠나겠지만...... (P.44)

 

, 하나뿐인 나의 보토. 당신은 나한테 숨기려 하지만, 이젠 끝이에요. 곧 그래요......나는 알아요. (P.127)

 

그렇다면 순수한 사랑이 인정받고 실현되지 못하는 당대의 계급적 인습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게 옳지 않겠는가. 시민계급이 성장했지만 아직 귀족계급과 대등한 수준으로 부상하지 못하였고, 귀족들은 한 가닥 계급의 힘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대.

 

레네는 보토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반복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레네는 보토에게 전부를 바친다. 그녀가 어리숙해서가 결코 아님을 독자는 알고 있다. 순전한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을 갈구해서다. 이것저것 따지고 고민하면 그것은 순전하고 진실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사랑 그 자체로 만족하고 행복한 것, 그것이 레네의 사랑이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하였고, 가슴 아프면서도 보토를 순순히 보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이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가득해 보였다. 소중한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팔짱을 끼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사 이것이 마지막 한때라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후회할 것이 없었다. 이런 하루를 체험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벌써 남보다 나은 무엇을 간직한 게 아닌가? 설령 단 한 번의 일이라고 해도. (P.111)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당신은 나에게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나를 유혹한 것도, 무슨 약속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모두 자유로운 내 결단에서 나온 거예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어요, 그것은 내 운명이었어요. (P.141-142)

 

우리는 레네의 심성과 배려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인들 어찌 연인을 쉽사리 떠나보내고 싶었을까. 울며불며 매달리고 떼쓰면 마음 약한 보토는 아마도 그녀와의 끈을 놓지 못하였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이별을 맞이한다. 그것이 사랑하는 이의 장래와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이 또한 사랑이리라.

 

아름다운 꿈을 꾸었으면 그것만으로도 신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꿈이 사라져 현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불평할 건 없어요. 지금은 감당하기 어렵지만, 그럭저럭 지나다 보면 모든 것을 잊고 다시 밝은 얼굴이 될 거예요. 당신도 언젠가는 다시 행복해질 것이고 나도 아마 그럴 거예요. (P.141)

 

보토의 또 하나의 여인, 케테는 어떠한가. 보토의 눈에 비친 아내는 여러모로 레네와 대비된다. 신분상의 차이는 당연하지만, 성품은 신분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보토는 아내의 언행에 불편함을 지닌다. 그렇다고 케테가 부정적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보토의 벗의 표현에 따르면 케테는 보토에게는 과분한 여인이다. 이렇게 보면 케테는 단지 보토에 맞지 않을 뿐이다.

 

갑자기 그의 웃음에 여러 생각과 불편함이 섞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떤 것과 마주치든 그녀가 사소한 것, 우스운 것에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P.146)

 

나 같은 자연의 사람은 뭐랄까 순수함, 천진스러운 것이 좋아요. 여보, 순수한 마음씨란 정말로 보물이에요. 나는 언제까지나 순수한 마음씨를 간직하겠다고 결심했어요. (P.234)

 

케테의 가벼움과 천진함. 레네의 사려 깊음과 진실됨. 보토의 인간미와 소박함. 개별로 볼 때 세 인물은 차이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좋은 사람들이다. 이 중에서 독자는 특히 보토에게 동정심과 안타까움을 품게 된다. 스스럼없이 시민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으며, 레네 어머니의 무덤을 방문하는 대목은 그의 인성이 어떠한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그를 고민하고 방황하게 만든 동기는 사회와 계급이다. 그는 구름 위 세상이 아니라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있기에 현실적 선택을 취하였던 것이며, 유사한 처지에 놓인 사촌에게도 동일한 조언을 한다. 그것을 비겁하다고 비난하지 말자. 차라리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애정을 지키고 고집대로 하는 것, 그것을 뭐라고 부르던 그렇게 하면 계급, 가문, 자네의 인생과 결별하게 되는 거고, 그러면 흙탕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해도 결국 조만간 스스로 끔찍스럽고 짐스럽게 느껴질 거야. (P.222)

 

레네의 결혼식 광고를 보고 웃는 케테를 보며 보토는 자신보다 레네의 신랑이 낫다고 잘라 말한다. 단지 레네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기데온에 대한 부러움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자신과는 달리 기데온은 레네의 미덕과 함께 흠결마저도 감싸 안으려는 마음을 지녀서다. 레네와 보토, 특히 보토는 크나큰 실수를 하였던 것이다. 회한 섞인 탄식을 들어보자.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만두게. 그렇지 않으면 자네의 삶에는 구름이 끼어 평생 빛과 밝음을 얻지 못하게 돼. 많은 것을 해도 되지만, 영혼을 흔드는 일, 마음에 사무치는 일은 하면 안 되네. 자신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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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자누스 2020-06-03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을 읽어보고 싶네요 https://www.projekt-gutenberg.org/autoren/namen/fontan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