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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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를 다룬 과학소설이다. 온 세계를 뒤덮은 더스트로 인류가 절멸의 위기에 처한 소위 더스트 시대. 몇몇 살아남은 인간은 더스트를 막는 거대한 돔 시티에 모여 살고, 돔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쫓겨난 사람들, 그리고 더스트 내성종들은 밖에서 나름대로 옹색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한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겨우 더스트를 퇴치하고 문명을 회복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 더스트 박멸은 과학기술의 덕택인 줄 알았으나 우연한 계기로 더스트 시대에 이에 저항하고 퇴치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존재가 밝혀진다. 모든 게 모스바나라는 더스트 시대 후기에 풍미했던 독성 덩굴식물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모스바나는 더스트 시대 후기, 그리고 재건 직후의 빈곤한 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우점종이었다. 당시에는 세계 어디에나 모스바나의 덩굴이 가득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불행한 기억, 혹은 겪어본 적도 없는 시대의 절망과 이 식물을 연관 짓는 것인지도 몰랐다. (P.41)

 

이 작품의 화자는 두 사람이다. 전체적으로 이끄는 이는 식물학자 아영이지만, 사건의 핵심은 프림 빌리지의 생존자인 나오미의 증언에 따른다.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은 이희수=지수 씨와 레이첼이다. 전체 3부 구성인데, 1부는 어린 나오미와 언니, 2부는 프림 빌리지 시절, 3부는 아영과 나오미의 만남, 아영과 레이첼의 대면이다.

 

더스트는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가 아니다. 인간의 탐욕과 과학기술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비극이다. 디스토피아 작품의 전형적 설계다. 돔 시티는 인류의 구제 수단인 동시에 제한된 공간과 자원으로 불가피하게 대다수 사람을 돔 밖으로 배제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영구적 돔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돔 안의 사람은 악착같이 자신들을 지키려 극단적 선택과 행동을 한다. 더스트에 저항성을 지닌 내성종 사람과 보통의 사람, 전자는 돔 시티 안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배척당한다. 심지어는 인간 사냥의 대상이다. 동일한 인류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내성종끼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생존이 최우선이기에 인간성을 도외시하곤 한다.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P.226)

 

앞선 과학기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고?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호버카, 드론 외에 무엇보다도 레이첼이라는 인간형 로봇이 있다. 프림 빌리지를 실질적으로 유지하는 원동력이자 온실의 주인, 식물 연구 외에는 일체의 관심이 없지만 지수 씨와 교류를 통해 독성을 낮추는 약과 저항성을 지닌 농작물을 개발한다. 그가 개발한 식물 중 하나가 모스바나다. 훗날 단지 유해식물로만 인식되던 모스바나가 더스트로부터 프림 빌리지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동시에 맹렬한 생장과 전파로 다른 농작물을 살 수 없게 만들어 결국 프림 빌리지를 해체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더스트 폭풍에 살아남으려면 덩굴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덩굴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름다워 보였던 푸른 먼지는 이제 고통의 근원처럼 느껴졌다. (P.230)

 

프림 빌리지. 인류 멸망의 시대에 돔 시티와는 다른 의미에서 인류 생존의 희망이자 외로운 모델이다. 돔 시티 못지않게 프림 빌리지 역시 이중성을 지닌다. 빌리지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외부 침입자는 가차 없이 제거하는 비정함. 나오미 자매가 받아들여진 것은 예외적인 사례다. 차마 죽이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판단이리라.

 

프림 빌리지는 외부적 방해요인이 없었다면 영속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레이첼의 자비에 의존하여 생명줄을 버티고 있을 뿐. 그러기에 내부적 갈등과 작별이 끊임없이 생길 수 밖에 없는는 취약한 구조가 프림 빌리지다.

 

레이첼이 마을의 해체를 원치 않았던 건 이 마음을 자신의 실험실로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럼으로써 지수를, 자신의 옆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거였다. 정비사가 아닌, 지수를 옆에 두고 싶어했던 것이다. (P.339)

 

지수 씨와 레이첼의 관계를 무엇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레이첼을 수리할 때 감정 기능을 활성화함으로써 지수 씨에 대한 끌림을 느끼는 레이첼, 지수 씨가 떠나는 걸 막기 위하여 프림 빌리지가 간신히 버틸 정도로만 작물 개발을 하는 레이첼을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인류에 대한 환멸로 스스로 아웃사이더로 자처하던 지수 씨가 더스트 종식 시대를 살아남아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레이첼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게 되는 걸까.

 

이 책이 중고등학교 추천도서로 지정된 까닭은 무엇일까. 무분별한 과학기술의 폐해, 인류 최후의 순간에도 바래지 않는 인류애, 인간과 로봇의 공감과 공존, 멸절의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분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존재.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모두가 해당한다. 한편 소설은 다소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인상을 준다. 작품 속에 너무나 많은 사건과 요소를 담으려고 하다 보니 원래라면 벽돌책 또는 몇 권으로 나왔어야 할 내용을 한 권에 압축하는 작가의 의욕 과다의 결과라고 하겠다.

 

식물의 기계와도 같은 정밀함과 동시에 난관을 헤쳐나가는 유연함에 대한 찬사가 되풀이되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세계 도처에 적응하고 살아남은 모스바나처럼.

 

저는 모스바나가 더스트와 같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모스바나는 공존과 유전적 다양성을 습득하고 더스트 시대의 흔적을 자신에게서 지우는 것으로 살아남았지요. (P.36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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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 - 제9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2
황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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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왕따 되면 어쩌려고?”

왕따? 왕따 되면 되는 거지. 난 왕따는 겁 안 나.” (P.114)

 

은따든 왕따든, 따를 겁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개는 다수에서 따돌림당할까 소외당할까 두려워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무리에 끼려고 애쓴다. 내키지 않아도 웃고 떠들고 하고 싶지 않은 행동도 함께하면서 말이다. 하물며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는 어떻겠는가. 그런 면에서 은유는 성숙하고 대범하다. 아니 체념과 달관의 경지인가.

 

표제만 보고서는 왕따를 제재로 삼는 작품인 줄 짐작 못 했다. 다현의 생각과 행동은 친구들과 잘 지내기 위한 양보와 배려로 해석하였다. 다른 애들보다는 좀 정도가 더하지만. 친구들이 싫어할까 봐 특별한 감정이 없는 노은유와 말을 섞거나 어울리지 않으려고 무지 노력하는 다현. 친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심부름도, 선물 공세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주변을 뱅뱅 돌며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위안하는 다현을 보면서 점점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온갖 이모티콘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답문은 없었다. 당연한 일인데 조금 서운했다. , 괜찮다. 어차피 마지막 문자는 늘 내 몫이니까. (P.19)

 

내가 하는 말은 아람이한테 잘 스며들지 않는다. 내 말은 탁구공처럼 튕겨져 나오고, 공중에서 부서진다. 그게 내 탓인지 아람이 탓인지 잘 모르겠다. (P.104)

 

일찍이 왕따를 겪은 다현으로서는 어떻게 어울리게 된 이 무리, 다섯 손가락을 결코 떠나고 싶지 않다. 그에게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있기 위해 영혼을 집에 두고 올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때로는 비굴할 정도로 다현의 안간힘에 안쓰럽고 딱한 마음이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한편 다현을 대하는 아람을 포함한 나머지 네 명에 대해서는 반감이 일어난다. 그들의 눈에 다현이는 어떤 존재로 비칠까. 어리숙하게 부려 먹고 심부름시키기 좋은 멤버. 필요할 땐 함께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은근슬쩍 떼어놓아도 부담 없는 멤버. 우리는 다현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결정적으로 설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은유와 모둠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어울리게 된 것에 불만스러운 친구들은 다현을 은따시키고, 유독 다현에게 살가웠던 설아의 속내. 은따로 빌빌거리던 다현을 구제했다는 발언. 그런 다현이 자신들의 요구, 차라리 명령을 따르지 않은 괘씸함.

 

다현은 다섯 손가락으로 있을 때 갖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와 자유로움을 동네신문 모둠 애들을 통해 느낀다. 은유, 시후, 해강. 그들은 상대에게 가식 없이 솔직하였고 이기적으로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을 여전히 갖고 있다. 자신의 처지와 향후 진로에 대한 불안을 품으면서도.

 

세상을 향한 다현의 태도는 블로그를 통해 드러난다. 왕따가 되어 주변과 단절된 그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 체리새우. 그 속에서 다현은 이해타산적 태도를 버리고 온전히 자신에게 솔직하다. 다시금 다섯 손가락에서 따가 된 다현은 재차 블로그를 다잡는데, 과거와 다른 점은 한 뼘만큼 자란 마음의 키뿐만 아니라 그가 완전한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체리새우 블로그를 비공개에서 공개로 전환한 용기를 주었으니, 구멍에 움츠려 숨지 않고 세상에 당당하게 고개를 들겠다는 전환이다.

 

친구는 동등한 관계여야 한다. 그런데 나는 자주 무시당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자초한 듯. 나는 친구를 잃을까 봐 늘 전전긍긍이었다. 선물 주는 버릇, 눈치 보기, 거절 못 하는 것. 스스로를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존중하기 어렸다. 당당해지자! (P.170)

 

은유와 다현 엄마의 말처럼 사는 게 바람직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남들의 시선과 편견에 휘둘리지 않기, 이렇게 되려면 내 속이 꽉 차 있고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기에 쭈뼛거리면 사방을 둘러보고 무리가 있는 쪽으로 뛰어가 안도의 숨을 돌리는 게 아니겠는가. 비로소 외톨이를 모면했으며, 무리에 어울리게 되었다면서 말이다.

 

다현의 새로운 날이 뜻깊게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똑같겠지만, 나아간다면 은유에게 더욱 관심을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 제 나이에 비해서 너무 커버린 그가 다현이와 상생의 관계를 통해 다시 되돌릴 길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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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오브 뮤직 논술세계대표문학 2
마리아 트라프 지음, 이경애 엮음 / 훈민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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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이 작품의 원제를 <트라프 가족 합창단 이야기>로 기억하지 않는다. 뮤지컬과 영화의 대성공으로 우리는 모두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기억할 뿐이다. 이처럼 타 장르의 성공으로 기억되는 원작을 읽게 되면 항상 원작과의 차이점을 은연중에 비교하게 된다. 무엇은 영화 내용과 같고, 어떤 장면은 영화에서 변용을 가하였고 등등.

 

국내에 출간된 모든 번역본은 아동용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나마 아동용이라는 느낌이 비교적 덜하다. 놀라운 점은 익히 아는 영화의 내용은 이 작품의 딱 절반에 해당한다. 예비 수녀 마리아가 트라프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고 가족 모두의 사랑을 얻게 되어 남작과 결혼하게 되며, 나치의 압박으로 생사를 건 탈출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원작의 줄거리를 충실하게 따랐음을 알게 된다.

 

영화가 원작과 크게 차이 나는 점이 일부 있는데 가족의 탈출을 도와주는 인물이 원작에서는 바스너 신부다. 영화에서 남작의 생활 형편은 나치 치하에서도 그렇게 어렵게 그려지지 않지만 원작에서는 어려운 살림을 타개하기 위해 저택을 신학교로 사용하도록 대관한다. 바스너 신부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데 그가 트라프 일가의 음악 교육을 돕는 한편 그들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작전을 기획한다. 알프스산맥 입구에서 일가와 헤어져 오스트리아에 잔류하는 신부의 모습은 마치 순교자와 같은 아우라가 느껴진다. 영화에서 애청하는 여러 노래는 에델바이스를 제외하면 대체로 원작과 무관하게 작곡된 곡이다. 유명한 도레미 송장면도 원작은 상대적으로 담담하고 무난하게 묘사되어 있어 영화 애호가라면 다소 실망할 법하다.

 

전반부가 영화와 원작의 비교에 초점을 두고 보는 재미가 있다면 후반부는 전혀 생소한 원작의 이야기에 관심을 쏟게 된다. 후반부는 가족이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도착하여 고생을 겪다가 가족 합창단으로 성공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후반부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영화가 가공의 이야기를 담은 게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국에서 가족 합창단은 단번에 성공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이 아니다. 문화적 차이와 정식 영주권이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떠돌이 생활을 겪는 가족의 모습. 2급 연주가로서 취급받는 그들이 비로소 미국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이야기는 당대 피난 유럽인의 전형적인 사연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트라프 남작이 귀족 혈통의 자부심으로 가족 합창단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뮤지컬과 영화 제작자가 원작의 전반부만 다룬 까닭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누구나 역경과 고난을 겪는 주인공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극복하는 소재에 마음이 끌린다. 여기에는 마리아와 아이들이 뿜어내는 유쾌하고 밝은 분위기와 아울러 나치 체제가 강요하는 암울한 전쟁 분위기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 탈출이 성공하는 대목까지. 반면 후반부는 가족의 고초는 이해 가지만 반복되는 연주 여행 장면은 배경이 미국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미국 관중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호루라기 소리가 아니라 관심과 사랑이란 말이에요.”

마리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P.57)

 

장르의 차이는 있지만 마리아가 던지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트라프 남작의 죽은 부인에 대한 그리움이 어떠하든 아이들도 자신의 엄마를 여읜 것이며 아이를 돌봐 줄 책무가 남작에게서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트라프 남작은 순전히 자신만 생각한 편협한 사고를 지녔으며 마리아가 그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미국에 가서도 대중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귀족 혈통인 자신에게는 수치로 생각하였으니 유럽의 전통적 사고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남작과 결혼하려는 이본 부인도 자기 본위라는 점에서 남작과 마찬가지다. 자신은 남작과 결혼하려는 것이지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지극히 현대적이라고 하겠지만 재혼남의 아내가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몰지각하고 무책임한 태도이다.

 

트라프 가족은 비로소 자기들의 결함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이 귀중한 몇 분 동안에 청중과 그들은 완전히 일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청중과의 사이를 잇는 다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P.154)

 

미국에서 트라프 가족 합창단은 오랫동안 최고의 연주단체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기획자인 와그너 씨와 샹 씨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건 그들이 유럽의 고답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공연 내내 바흐를 위시한 중세와 르네상스 종교 합창곡, 슈베르트 등의 고전 작품만 무대에 올렸으니 청중들로서는 예술 수준은 차치하고 일단 재미없고 따분하였으리라.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할 가치가 있을지 묻는다면 기꺼이 긍정적으로 답변하고 싶다. 영화를 먼저 접한 독자들은 작중에서 트라프 남작과 아이들에게 가해진 나치의 위압과 협박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원작에서 남작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생존하려면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학교에서는 히틀러와 나치 찬미를 노골적으로 요구하여 트라프네 아이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큰아들 루베르트는 병원의 높은 자리 제안을 받는다. 트라프 남작은 독일 잠수함 지휘를 요구받는다.

 

주인공 마리아의 삶은 원작에서 비로소 확연히 드러난다. 영화에서 예비 수녀 마리아는 남작과 결혼하지만 아직 아내와 엄마다운 모습은 아니다. 경쾌한 처녀로서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원작에서 마리아는 결혼 후 두 딸 로즈마리와 롤리를 낳는다. 미국에 가서는 아들 요하네스를 낳는다. 즉 일가족이 오스트리아를 탈출하기 전에 이미 마리아는 아기엄마였다.

 

작품의 결말은 썩 해피엔딩은 아니다. 남편 트라프는 암에 걸려 미국에 건너온 지 10년도 안 되었는데 사망한다. 마리아 또한 얼마 후 신장병이 악화하여 임종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다시금 트라프 가족 합창단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책의 마지막 단락이 인상 깊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는 동안, 트라프 가족은 스스로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돈도 명예도 아니고 오직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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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가족 논술대비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명작 28
아그네스 서퍼 지음, 이영호 옮김 / 지경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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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페플링가> 또는 <페플링 씨 가족>으로 1906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명작 아동문학으로 소개하고 있어 궁금한 김에 읽어본다. 페플링 씨는 가난한 음악 교사다. 그에게는 일곱 명의 자녀가 있는데 부부는 자녀들은 사랑과 우애가 넘치는 훌륭한 가족으로 키워낸다는 줄거리다.

 

우선 페를링 씨 부부가 재력으로는 부족하지만 인성으로는 등장인물 중에서 독보적으로 돋보이는 모범적 시민임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려고 애쓰며 어려운 처지에서도 솔직함으로 정도를 걸으며, 자녀 훈육에서도 애정과 함께 따끔한 질책도 아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애정 일면에 치우친 요즘 양육관과는 결을 달리한다.

 

일곱 명의 아이들 모두 부모를 닮아서인지 착하고 성실하다. 제각각 개성은 지니고 있지만 결코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는 오토는 친구들의 비웃음을 살까 봐 전나무 운반을 동생에게 맡겨버리는 행동으로 페플링 씨에게서 비겁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가 진짜 비겁한 아이라면 비뚤어진 길로 엇나가겠지만 오토는 그러하지 않다. 플리더도 바이올린에 빠져 규칙을 어기며 부모의 말도 따르지 않지만 결국 절제를 발휘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에게 러시아 장군의 음악 교습을 추천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루돌프 마이어의 제안을 거부하라고 조언하는 카를. 눈싸움하다가 실수로 맞힌 신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며, 끝내 친구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의리를 지킨 빌헬름. 쌍둥이 마리안네와 귀여운 막내 엘제. 일곱 아이가 합심하여 빌헬름의 성적을 감추려다가 들킨 장면은 비록 올바른 행동은 아니지만 그네들의 따뜻한 우애를 찾아볼 수 있다.

 

페플링 씨 아이들은 가난하지만 자연스러운 아이다움을 잃어버린 루돌프 마이어와 꼬마 음악가와 달리 당당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길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것이 페플링 씨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노력하는 자녀교육의 지향점이다. 페플링 부인의 오빠가 어려운 여동생을 돕기 위해 아이 한 명을 데려가 키우려고 하였으나 이를 포기하는 것 또한 평생 변함 없는 우애를 지닌 데다 사랑으로 똘똘 뭉친일곱 아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서이다.

 

거의 모든 아동문학처럼 이 작품 역시 행복한 미래로 끝맺음한다. 페플링 씨는 신설되는 음악 학교의 교장 통지를 받는. 아빠의 명예와 함께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것이며 귀가 어둡지만 성실한 가정부 발브르크도 급여 인상을 약속받는다. 너무 이상적이며 상투적이고 작위적이지 않으냐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장르 특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작품에서 내세우는 교육방식과 가치관이 현대의 그것과 부합하느냐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백여 년 전에 쓰인 가정 소설이라는 한계는 분명 외면할 수 없고 가부장적 권위 강조도 두드러진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인성과 사회윤리의 기본 개념은 변함없음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진부하거나 구태의연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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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말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양장본
김중미 지음, 송진헌 그림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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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TV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유명세를 탄 창작동화다. 언젠가 한 번 읽어볼까 생각만 하다가 우연히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표제에 이끌려 처음엔 어느 시골 마을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전원적, 낭만적 작품으로 생각하였다. 착각이 깨지는 데는 첫 쪽 첫 줄의 단 한 문장으로 충분하였다.

 

괭이부리말은 인천에서도 가장 오래된 빈민 지역이다. (P.9)

 

괭이부리말은 인천 만석동 달동네의 별칭이다. 매립되어 육지가 된 고양이 섬(묘도)에서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동네 이름을 확인한 순간 예상했던 줄거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편으로는 우려도 들었다. 모름지기 동화라면 고정관념이 있다. 세계와 삶의 아름다움과 올바름이라는 긍정적 일깨움을 통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이것이 이 작품에서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

 

확실히 작품의 전반적 기조는 어둡고 우울하고 슬프다. 등장하는 동네 가족들은 대체로 온전하지 못하고 불행하다. 숙자네 가족은 생활고와 아버지의 주취 폭력으로 엄마가 가출한다. 졸지에 어린 숙자가 살림을 꾸려나가는 처지가 되었다. 동준이네는 수년 전 어머니가 가출하였고, 최근에 아버지마저 돈을 벌러 나간다며 집을 떠났다. 동준과 형 동수는 아버지가 남겨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근근이 버틸 뿐이다. 동수는 패거리들과 어울리고 본드 흡입에 의존하는 등 상황은 악화된다.

 

동네 친구들 중에는 그렇게 어머니가 떠난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숙자는 친구들처럼 어머니를 지워 가는 연습을 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P.62)

 

오죽하면 다시 돌아온 어머니의 귀가 사유가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숙자는 안심하고 기뻐한다. 어머니가 다시 가출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숙자 자매와 동준의 천진한 일상으로 겨우 한줄기 길을 헤쳐나가던 작가는 돌연 영호를 등장시킨다. 괭이부리말의 주저앉은 사람들 가운데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앞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영호와 김명희 선생님이다. 이 두 사람이 시간의 순서는 다를지언정 숙자네와 동준이네의 구세주 역할을 하며, 명환이와 훗날 호용이마저 보듬게 된다.

 

나두 고마워. 그리고 명희야, 꼭 고백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이들한테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나한테 아이들이 필요해.” (P.179)

 

영호는 어쩌면 이 동네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개인적 이익보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더 강하고, 피붙이가 아닌 아이들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온정과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우여곡절은 있지만 그를 중심으로 두 가족이 함께 삶을 단단하게 여밀 수 있게 되었음은 순전히 영호의 내재적 힘 덕분이다. 물론 영호도 홀어머니의 죽음 후 천애 고아 처지에서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었으니 일방적 시혜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단단한 빗장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던 것은 동수가 아니라 명희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165)

 

동화의 한계는 김명희 선생님의 역할과 영호와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괭이부리말 출신이면서 동네와 동네의 불량한 아이들에 호의를 갖고 있지 않은 명희야말로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의 삶은 지긋지긋한 동네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분투로 점철되었고 마침내 떠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명희가 괭이부리말 출신으로서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고 교사로서 비교육적 인식을 갖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괜찮다. 나아가 상처받은 아이들을 보듬고 숙자네와 영호네 식구들과 교류를 맺는 것까지도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숙자네 집 다락방으로 이사 오는 설정은 개인적으로 과도하다는 생각이다.

 

작중 인물 가운데 숙자와 동준이가 초지일관 가장 긍정적이고 굳센 마음가짐을 지녔다고 평가하고 싶다. 두 아이가 없었다면 두 가족은 일찌감치 파탄에 맞닥뜨렸을 것이며, 영호나 명희는 아예 개입할 기회도 없었을 테니. 실은 동수는 동준이보다 마음이 여리다. 동수는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고 버텨나갈 자신이 없어서 방황하였다.

 

작가는 이들의 삶이 녹록지 않을 것을 예고라도 하듯이 개심한 숙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숙자네 식구를 한층 힘겹게 만든다. 동수의 회개와, 동수와 명환의 진로 설계로 드디어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새해를 맞이하려는 기대감도 잠시 성탄절 이브에 버림받은 호용이가 영호네 집에 들어온다. 비록 밑바닥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들이 더 낫고 행복한 삶에 이르게 될지 아니면 재차 나락으로 굴러떨어질지 작가는 섣부르게 보여주지 않는다.

 

안개는 쉽게 걷힐 것 같지 않았다. (P.191)

 

동수와 공원 노숙자가 만나는 장면의 마지막 문장이다.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안개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동수와 우리는 좀 더 밝은 앞날을 기대하고 싶다. 그래도 세상이 아직은 살만하다고 하려면 이들이 계속 불행해서는 안 될 것이므로. 마침 민들레 새싹도 움텄고, 눈부신 햇살이 동수가 다니기 시작한 공장을 비추는 가운데 노래를 흥얼거리는 동수가 이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게 됨은 의미심장하다.

 

, , , , 봄이 왔어요......”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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