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의 기원 - 어디에도 없는 고고학 이야기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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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라고 하면, 옛날 유적과 무덤을 파헤치는 우리네 일상적인 삶과는 무관한 분야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저자는 고고학이 인간의 삶과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상아탑에 안주하는 현학적인 학문 분과가 아님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1부 잔치 편에서 다루는 항목은 막걸리, 소주, 김치, 삼겹살, 소고기, , 상어 고기, 해장국이다. 음식과 관련된 내용이다.

 

소주가이 새삼 눈길을 끄는데, 최초의 증류식 소주는 거란에서 만들었고, 세계화에 성공한 것은 몽골제국 시기라고 한다. 추운 지역에서 몸에 열을 내려고 일개 유목민이 마시던 높은 도수의 술이 세계의 술이 된 것은 역시 국력의 힘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셈이다. 김치와 삼겹살 항목에서 유라시아 각지의 절임 채소 요리의 공통성, 우크라이나와 우리나라의 돼지고기의 유사성을 통해 지역을 막론한 민중들의 강인한 생활력과 생존 본능을 우선 꼽는다.

 

우리나라의 특수성이 반영된 항목도 있는데, 경상도 지역의 상어 고기 문화의 역사성을 예시하며 신라 문화는 상어(돔베기) 문화권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언급, 우리나라에서만 도토리묵해장국이라는 음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부 놀이 편에서는 놀이, 고인돌, 씨름, 축구, 여행, 낙서, , 고양이 항목을 다룬다.

 

고구려의 <수렵도>가 실제 사냥 장면이 아니라 일종의 사냥놀이를 하는 모습이라는 분석은 간과했던 사실인데 매우 설득력 있다. 씨름과 축구처럼 신체가 맞부딪히는 스포츠는 격렬한 만큼 거친 폭력성의 해소와 함께 신체 단련의 의미도 지닌다. 다만 그것이 과도하면 흥분과 폭력으로 확대되는 현상을 자주 보게 된다.

 

고인돌이 놀이와 무슨 관계인지 의아했는데, 제의는 엄숙성과 동시에 축제성도 지니고 있다고 하니 이해가 되었다. 현세에서 여행은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면, 내세로의 여행은 영생과 피안에서의 행복을 지향했다는 점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반려동물의 대표격인 개와 고양이 이야기도 재밌지만, 시대를 초월한 낙서 애호의 흔적은 인간 본성이 한결같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기에 해학적이다. 러시아 아이 온핌의 필기 뭉치처럼.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실현하기 위한 본능적 욕망을 품는다. 3부 명품 편의 석기, 실크, 황금, 신라 금관, 인삼, 기후와 유물, 도굴, 모방 항목은 바로 이 욕망을 얘기한다.

 

고급 옷감의 대명사인 실크는 실크로드라는 불후의 유산을 남겼는데, 실크에 열광한 흉노족의 쇠망 원인 중 하나가 실크라는 견해는 참신하다. 물욕하면 바로 황금이 연상되는데, 황금 문화의 역사가 흑해 연안에서 오래전 피어났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우리 고대사도 황금과 무관하지 않다. 신라 금관이 대표적인데, 금관총 발견의 아픈 역사와 함께 복제품 유물 도난 사건의 어처구니없는 시대상이 함께 다루어진다.

 

인삼은 고대부터 명품으로 취급되었으며, 특히 고려 인삼이 최고로 인정받았다는 점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인삼과 관련하여 소개된 두 개의 에피소드도 이를 충분히 입증한다. 다만 역사적으로 청나라의 발전이 인삼 파워라는 견해는 놀랍다. 하물며 인삼이 병자호란의 사실상 원인이라는 주장은 어안이 벙벙할 뿐.

 

명품은 모방과 도굴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모방은 방제경처럼 긍정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도굴은 재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 아닐까. 그런 면에서 도굴의 왕이었던 조조의 무덤이 도굴로 발견되었다는 점은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할지 애매하다. 한편, 지구온난화가 현대 인류 사회에만 영향을 미치는 줄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고고학자는 다르다. 동토 지대에 오랜 기간 보존되어 온 유물들이 온난화의 결과로 녹아서 부패하고 소멸하는 현상에 대한 안타까움의 심정은 다만 헤아릴 뿐 충분히 따라잡기 어렵다.

 

4부 영원 편의 벽화, 추모, 미라, 발굴 괴담, 마스크, 문신, 점복, 메신저 항목은 결국 죽음과 미래에 관한 항목이다. 인간의 죽음은 필연이며 회피할 수 없지만 누구나 벗어나고자 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마찬가지다. 고인을 추모하고 그네들이 저승에서 현세처럼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거대한 무덤과 화려한 부장품, 2의 집으로 그려진 벽화를 보라.

 

기후로 우연히 된 미라가 아니라 의도적 미라 또한 영생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투탕카멘과 레닌의 미라는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의도를 지닌다. 두 사람은 자신의 시신이 오늘날 이렇게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어떤 심정일지 궁금하다.

 

마스크에 관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마스크는 애초에 인간과 신을 중개했던 샤먼의 전유물이었으면서 오늘날 영정 사진의 역할도 했다는 설명은 마스크, 즉 가면의 비일상성을 증명한다. 다만 코로나 시기를 경험했던 만큼 전염병 예방을 위한 마스크는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문신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대에 문신은 부족과 신분을 나타내거나, 훈장처럼 특별한 공적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물론 묵형처럼 먹을 새기는 형벌도 있었는데 모두가 문신의 반영구성에 기인한다. 문신에 대한 요즘 세간의 인식은 나쁜 편이다. 우리 사회는 유교적 가치관이 내재화되어 있는데 문신은 소중한 신체를 훼손하는 행위 아니겠는가. ‘문신충이라는 폄하적 용어도 존재한다. 문신을 개성의 표현으로 인정할지 경계가 참으로 모호하다.

 

과거를 발굴하면서 수많은 유물을 발견해나가면 기존의 역사를 새롭게 쓸 수밖에 없다고요. 그걸 해내는 학문이 바로 고고학입니다. (P.345)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고고학의 의의와 자부심을 토로한다. 이 책은 대중을 겨냥한 고고학 입문서다. 새삼 골치 아픈 학문적 얘기는 제쳐두고, 세상의 다양한 사물과 풍습의 기원을 고고학과 결부시켜 의외성과 함께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풀어놓는다. 굳이 고고학이라는 어휘를 일부러 결부시킬 필요도 없다. 인간과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사항의 기원과 유래를 가볍게 읽어 나가다 보면 절로 고고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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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영 - Mendelssohn : Violin Concerto
오주영 연주 / 유니버설(Universal)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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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에 세계적 콩쿨에서 최연소 우승하여 한창 각광받던 오주영의 20세때 녹음이다. 바이올린 소리가 다소 가녀리지만 세련된 기교와 풍부한 정감을 지니고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한다. 오케스트라와 호흡도 좋고 녹음도 뛰어나다. 마스네와 사라사테도 곡상의 대비를 잘 살려 호연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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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특별판)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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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는 서평이 심히 엇갈리는 소설이다. 한쪽에서는 감동과 극찬이, 다른 쪽에서는 실망과 비판이 날 서게 대립하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우연한 기회에 이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나 처음에는 별로 관심 두지 않았다. 이른바 검증되지 않은 한때의 소설 읽기에 자원을 쏟고 싶지 않았으므로. 양분된 독자평이 오히려 흥미를 끌었다.

 

세평에 휩쓸리지 말고 편견 없는 마음으로 작품을 대하리라 다짐하고 책을 읽어 나갔다. 그래야 나중에 어떠한 작품 평을 해도 떳떳할 것 같아서였다. 초반의 흥미진진한 서사에 몰입하였다. 중반부의 도담과 해솔의 사랑과 방랑, 이별에 마음 아팠다. 후반에 가서 그들의 재회와 이해, 그리고 드러난 비밀 장면에 가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독자의 마음과 작품을 연결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작품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기법과 구성, 표현 등의 미세한 아쉬움은 별다른 흠결이 되지 않는다.

 

너희는 악연이야. 얽혀서 좋을 게 없어. 절대로 연락하지마.”

정미가 거세게 기침하며 도담의 손을 잡아끌었다. (P.84)

 

정미의 말마따나 두 사람의 인연은 결과적으로 악연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두 사람의 행동이 없었다면 두 가족이 풍비박산 나지 않았을 거라고 확언할 수 없지만, 그처럼 남부끄럽게 목숨을 잃는 결말로 나아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자신이 구해 주고 자신을 구해 준 사람. 같은 또래, 그리고 첫사랑. 도담과 해솔은 분리될 수 없는 사이다. 두 사람은 남들이 갖지 못한 비밀의 공유자이자 겪지 못한 비극의 주인공이므로. 너무나 가깝고 친밀한 존재이기에 오히려 지긋지긋해하고 다투며 뛰쳐나가지만, 그들의 과거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다시 있기 어렵다. 자유로워지고 싶지만, 소외되고 싶지는 않으므로. 자기 내면에 가면을 씌운 채 진정한 사랑을 구하는 건 자체로서 가능하지 않은 시도다.

 

해솔과 자신을 과연 무슨 사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은인? 친구? 연인?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잊으려 애썼지만, 사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이름이었다. (P.203)

 

승주의 말처럼 도담에게 승주, 해솔에게 선화는 대용품이자 구명환이다. 상대의 부재 속에 홀로서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불가능함을 확신하기 전에 필요했던. 그나마 선화는 슬퍼하면서도 그들을 받아들인다. 해솔의 마음속에 자신이 자리할 공간이 없음을 일찌감치 알아차렸기에. 독자로서 선화의 행복을 다만 바랄 뿐이다.

 

세월의 때가 묻다 보니 창석과 미영의 관계도 그럴 수 있지 하고 생각하게끔 된다. 세상일이란 게 반드시 나의 뜻과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겪어서일까. 한편 도담과 해솔의 지긋지긋할 정도로 강렬하고 뜨거운 고통과도 같은 사랑에도 공감과 애틋함을 품게 된다. 도담은 사랑의 도덕성을 기대하지만, 사랑이란 애초에 눈먼 존재가 아니던가. 창석의 배신에 치를 떨며 찌그러뜨리려고 마음먹은 것 또한 그가 창석을 너무나 사랑해서다. 이후 도담이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뿌리치는 이유 역시 자신의 사랑관이 무너져서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P.104)

 

이 책의 작가 소개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작가는 영화계 출신이다. 그의 전작을 보면 작가의 배경이 깊게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순전한 문학 관점이 아니라 영화 시나리오로서 접근하면 이 소설의 특성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두 주인공의 명확한 성격 대비. 비현실적일 정도로 치열한 만남, 사랑, 다툼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관계.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한 소설의 여러 장치, 즉 우연성, 주인공의 직업과 사고, 비밀. 주인공을 더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조연의 역할 등.

 

우여곡절 끝에 도담과 해솔은 서로의 손을 맞잡았고 다시 놓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린 나이부터 과도할 정도로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맞닥뜨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으므로.

 

둘은 물결을 가로질러 서로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해솔과 도담은 손을 뻗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P.298)

 

내가 읽은 책은 사랑의 에디션이라고 한다. 20만 부 돌파를 기념하기 위한 특별판이다. 설명 문구처럼 신진 작가의 구간이 역주행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역주행의 대명사가 되었던 몇몇 아이돌 그룹도 아니고. 감상 후의 소감은 뭐랄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내가 근래에 이러한 몰입감을 가지고 소설을 읽어본 게 언제 적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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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데 코르쿠트의 서(書) - 코르쿠트 할아버지의 튀르크족 영웅이야기
이재정 옮김 / 계명대학교출판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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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 서사시>(걷는사람)를 읽었다. 12편의 이야기 중 절반인 6편만을 담고 있다는 점과,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평이한 편집에 일말의 아쉬움이 있었다. 다만 국내 초역이라는 점에 만족하기로 하였다. 우연한 기회에 이미 몇 년 전에 완역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작품의 문학적, 역사적 의의를 다시금 되짚어보면 아래와 같다.

 

<데데 코르쿠트의 서>는 아제르바이잔뿐만 아니라 터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전 튀르크인들이 공통으로 보유하고 있는 구전문학으로써, 고대 튀르크족의 생활 관습, 역사, 지리에 관한 광범위한 지식뿐만 아니라 이슬람 이전 튀르크 사회의 이념과 정치사상, 튀르크족의 삶의 철학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P.8, 머리말)

 

아무래도 이 책과 걷는사람 판본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오구즈족의 영웅서사시이므로 원서는 오구즈족의 언어, 지금으로 치면 아제르바이잔 또는 중앙아시아 민족의 언어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걷는사람 판본은 아제르바이잔 판본을 처음 번역한 것이고, 이 책은 러시아어 번역본을 우리말로 번역한 중역본이다. 즉 완역본 여부와 원전 번역본 여부가 두 책의 큰 차이점이다.

 

번역 저본이 상이하다 보니, 번역 어휘도 같을 수 없다. ‘디르새 칸의 아들, 부가즈 이야기는 여기서 데르세-칸의 아들, 보가치-잔에 관한 이야기, ‘바이배래의 아들, 밤스 배이래크 이야기바이-부라의 아들, 밤시-베이레크에 관한 이야기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바사트가 외눈박이 테패괴쥐를 물리친 이야기데페-게즈를 죽인 비사트에 관한 이야기로 큰 차이를 보인다. 다만 이야기의 줄거리와 내용 전개는 대체로 비슷하다.

 

걷는사람 판본에 실리지 않고, 이 책에만 실린 6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칸르이-코드자의 아들, -투랄리에 관한 이야기’, ‘카즐리크-코드자의 아들, 이예켄크에 관한 이야기’, ‘베킬의 아들, 암란에 관한 이야기’, ‘우슌-코드자의 아들, 세크레크에 관한 이야기’, ‘포로로 잡힌 살로르-카잔을 구출한 아들, 우루즈에 관한 이야기’, ‘외오구즈족과 내오구즈족의 싸움과 베이레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이들 이야기의 배경과 제재는 솔직히 다른 이야기와 특별한 차별성을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무사의 조건, 부모.형제와 같은 혈연의 중시, 기독교도 적국과의 갈등과 전쟁 등. 모두가 살로르-카잔과 그의 아들 우루즈를 중심으로 그의 신하들인 여러 베크의 이야기다. 특히 우루즈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아들처럼 묘사되다가 다른 이야기에서는 용맹한 기사로 등장하여 적에게 사로잡힌 아버지를 구출하는 등 여러 이야기에 일관성 없이 등장하여 다양한 구전에 근거함을 알게 한다.

 

특히 외오구즈족과 내오구즈족의 싸움과 베이레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와 달리 오구즈족이 내오구즈와 외오구즈로 분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어쩌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행위 하나가 종족의 갈등과 분열로 이어지고 끝내 밤시-베이레크와 아루즈라는 두 걸출한 무사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비극을 다룬다. 이 작품의 마지막 이야기로 실렸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정녕 그 이유를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일전에 당신이 재산을 나누어 줄 때 외오구즈족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내오구즈족 베크들만이 있었지요. 바로 그런 이유로 외오구즈족 베크들이 안 온 것이지요.” (P.267)

 

걷는사람 판본에서는 언급하지 않거나 생략된 대목, 그리고 해설은 이 책의 미덕이다. 먼저 머리말에 따르면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친 백양 왕조(아크 코윤루)라고 하며, 지역적 무대 또한 이란과 이라크, 튀르키예, 그리고 카프카즈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 표제에 코르쿠트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까닭은 수록된 12편의 이야기를 코르쿠트 할아버지가 노래로 지어서 후대에 전수하였기 때문이다.

 

걷는사람 판본에서는 완전히 생략된 대목이 우선 서문이다. 몇 페이지에 걸친 서문은 코르쿠트 할아버지를 소개하고 그가 칸에게 한 몇 가지 예언과 신에 대한 영광과, 네 유형의 여인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각 이야기의 마지막 단락도 이 책에만 수록되어 있다. 그것은 코르쿠트 할아버지가 이 노래를 지었음과 함께 그가 말하는 예언 내용이다. 영웅들도 죽음을 맞이하기에 세상은 덧없음을 애상 어린 어조로 일단 말한 후, 그럼에도 칸은 전능하신 신의 은총으로 영원히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예찬한다. 마지막으로 신을 향한 기도로 이야기를 마친다.

 

온 세상이 내 것이라고 말하던 그 베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요? 죽음이 그들을 잡아갔고 땅이 그들을 숨겼습니다. 무상한 세상이 누구에게 남겨졌냐고요? 지상의 삶은 왔다가 가는 것이고, 그 종착점은 죽음입니다. 오랜 삶의 마지막도 죽음과 이별입니다. (P.277)

 

비록 러시아어 중역판이지만, 12개의 이야기를 모두 담은 완역본이라는 점, 서문과 코르쿠트 할아버지의 예언 단락도 모두 수록하였다는 점, 그리고 아동 청소년용으로 평이하게 각색하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였다는 점 등에서 개인적으로 이 책을 높이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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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 돌베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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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국문학과 교수다. , 뭔가 이상하다. 역사학자 또는 사회과학자도 아닌 인문학자가 3.1 운동을 다룬 책을 쓰다니. 3.1 운동을 문학사적으로 조망하려는 책인가 싶은데 책소개나 서평을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누구나 3.1 운동을 알지만 정작 3.1 운동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무엇이 떠오르는가, 민족 대표 33, 유관순 열사, 전 국민의 만세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역사에 비교적 지식이 있는 경우다. 하지만 정작 3.1 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확 다가오지 않는다. 태극기와 만세운동, 비폭력 저항운동이라는 추상적 이미지뿐.

 

저자가 3.1 운동 백 주년에 맞추어 이 책을 쓴 까닭은 분명하다. 역사 속의 한 장면, 박제된 이미지가 된 3.1 운동을 학술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적 온기를 품고 자세히 알아보고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임을. 3.1 운동이 단지 지나간 역사적 한 사건에 그치지 않고 우리 근현대 역사와 문화에 깊은 족적을 남기고 이른바 판을 뒤흔들어 놓은 세기적 사건이었음을. 나아가 오늘날 우리는 3.1 운동의 지대한 영향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3.1 운동의 본질과 계승에는 여전히 소극적임을 저자는 말하고자 한다.

 

주석, 출전 및 찾아보기를 제외하고도 560면에 이르는 두툼한 책의 내용을 쉽사리 이해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1부에서 3.1 운동의 전체적 맥락을, 2부에서는 시대적 흐름을, 3부는 실제 인물과 운동 각론을, 4부는 문학적 연계를 고찰한다. 역사와 대중적으로 유명한 민족 대표 33인과 유관순 열사는 거의 다루지 않는데, 민족 대표의 의미와 비중이 절대적으로 낮다는 점과 유관순으로 전형화된 인물 이면에 가려진 민초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다.

 

31일의 밤을 기술하는 저자의 필치는 세심하며 건조한 객관성에 함몰되지 않는다. 온기를 품은 채 흥분을 배제하면서 최대한 온화하고 담담하게 3.1 운동의 현장과 인물을 그려나간다. 그것은 후대에 비판적 평가 대상이 되는 인물과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연유로 역사와 인문을 결합한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은 것과 같은 깊은 여운을 갖게 됨은 전적으로 저자의 역량이라고 하겠다.

 

3.1 운동은 세계사적 맥락에서는 타당하지만, 국내만으로 제한하여 보면 매우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출현이었다. 강제 병합 이후 독립투쟁은 국지적 활동을 제외하면 사실상 휴면 상태로 접어들었고, 민족적 역량을 결집할 만한 구심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선언만 하면 그것으로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하는 정도였고, 대중적 인식도 독립을 위한 만세인지, 독립에 기뻐한 만세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3.1 운동은 태화관 및 탑골공원에서의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전국으로 계층을 불문하고 확산되어 갔다.

 

독립의 선언이 곧 독립의 현실을 구성한다는 믿음이야말로 3.1 운동의 비밀이다. ‘와야 할 현실도래한 현실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러한 정언명령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감염시킴으로써, 3.1 운동의 대중은 그 스스로 새로운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P.52, 1)

 

강화도 은세공업자 유봉진 사례는 이러한 자발적 주체를 예시한다. 저자는 3.1 운동의 거시적 의의만 천착하지 않고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재료에도 관심을 보이는데, 다종다기한 선언서의 변형과, 운동에서 태극기의 출현 시기와 그것의 실질적 의미, ‘만세구호가 갖는 비일상적 상징성 등이 그러하다. 또 민초들에게 독립은 추상적 전망이 아닌 토지, 종교 및 기타 현세적 소망과도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그것은 일제 식민 통치가 그들에게서 빼앗아갔고 통제함으로써 당대 체제에서는 획득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재화였음도 빠뜨리지 않는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3.1 운동은 사회진화론이 표방한 제국주의 정당화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반박함으로써 향후 인류 보편주의가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다. 약육강식이 불변의 보편적 원리라고 인정될 때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는 사건은 대세 원리에 부합하므로 비난할 명분이 없다. 민족자결주의를 이해했든 곡해했든, 3.1 운동 선언서가 표방하는 인류 보편의 평화와 행복 추구권은 이후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세계인류의 보편주의가 학생과 지식인 사이에서의 동향을 벗어나 일반적인 기류가 된 것은 3.1 운동 이후다. 거꾸로 말하자면 인류 보편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3.1 운동의 이념은 비로소 형성될 수 있었다. (P.211, 2)

 

정신적 차원뿐만 아니라 물리적 기준에서도 3.1 운동의 영향은 지대하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임시정부가 탄생하였으며, 비폭력 평화주의의 한계를 실감한 이후 무장 독립투쟁으로 노선의 큰 방향 전환이 생겼다. 3.1 운동이 외형상 실패하였음은 자명하다. 다만 이것을 독립 쟁취 여부로써만 판단하는 것은 단견이며, 향후 독립운동의 시발점 역할을 하였고 민중 인식을 근대화시켰다는 점을 유념하면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3.1 운동 직후 무력투쟁이 극렬해졌다는 사실은 3.1 운동기, 특히 초기의 비폭력주의가 결코 불가피한 전략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3.1 운동의 비폭력은 체계적이거나 수미일관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P.332, 3)

 

3.1 운동의 장소라고 하면 태화관과 탑골공원, 그리고 아우내장터가 우선 연상된다. 저자는 운동이 전국적이고 거국적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각 지역 사례를 예시한다. 통일된 중심 조직이 없는 만큼 운동의 양상은 지역별로 제각기 달랐고 전개 과정도 상이하였다. 대체로 비폭력 평화운동이었지만 평남 성천처럼 유혈 충돌이 빚어진 사례도 발생하였다. 장터 같은 번화가, 산꼭대기는 물론 다수의 군중집회, 한두 명의 격문과 태극기와 같이 규모도 천차만별이었다. 지방은 유림, 농민, 천도교도, 도시는 학생과 노동자가 만세를 불렀으며, 신분으로는 양반과 평민, 기생 같은 하층민을 포함하여 진주에서는 백정 아낙들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수년 뒤 백정해방운동인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일어난 게 전혀 의외는 아니다.

 

아산보통학교 교사 박경순, 서울 기생 정금죽, 개성 교회전도사 어윤희 사례는 평범한 여성들이 3.1 운동 참여를 통해 정치, 사상적으로 얼마큼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경우라고 하겠다.

 

국문학자인 저자로서는 3.1 운동이 문화계, 특히 문학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4부는 일제강점기 개괄적 국문학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헤이그 밀사 이위종과 몽골 어의 이태준, 김필순 일가, 홍명희의 방랑 등 3.1 운동 이전에 식민 지배에 좌절하여 탈출을 모색하던 청년층은 운동을 통해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또는 대한인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강용흘과 이미륵의 망명 문학은 3.1 운동 후 해외에서 고유성을 기억하고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무단통치 시기 강력하게 억눌렀던 국문학이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계기는 일제의 문화통치 덕분이다. 3.1 운동으로 놀란 일제가 지배 방침을 변경하여 제한적이나마 우리말 교육과 출판을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3.1 운동이 없었다면 일본의 통치 기조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고 우리말은 끝내 말살되고 민족의식조차 미구에 소멸되었을 것이란 뜻이다.

 

3.1 운동 과정에서 민중은 일제의 유혈 진압과 핍박, 고문 등의 참상을 겪었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부정하지 못한다. 게다가 외형상 운동의 실패는 실망과 좌절, 패배 의식을 고취시켰다. 여기서 절망의 나락에 빠질 것인가, 어두운 현실을 명철하게 진단하고 분석함으로써 개선과 발전의 여지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인가, 현재 상태가 어둠의 밑바닥임을 깨닫고 희망의 빛을 확신할 것인가에 따라 문학적 입장은 달라진다. 저자는 김동인과 이광수, 심훈, 염상섭을 전형으로 제시한다. 운동 이전 동인지 문학에서 주도적 역량을 발휘하였던 김동인과 이광수는 오히려 3.1 운동 이후 타협의 길을 걷는다. 그들에게 3.1 운동은 민족의 독립 역량을 결집하고 표방한 긍정이 아니라 죽음 직전 마지막 비명으로 인식되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대표적이다.

 

염상섭의 시각마따나 3.1 운동은 종착점보다 출발점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3.1 운동은 개인적.민족적 층위에서 공히 불회귀적 사건인 동시, 실패냐 성공이냐의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종류의 사건이다. (P.543-544, 4)

 

저자가 4부에 걸쳐 3.1 운동을 조사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3.1 운동의 중대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단지 역사적 사실, 현재와는 무관한 과거의 사건으로 치부하는 시각을 일신하기 위함이다. 역사성의 거대 담론에만 치우쳐 간과하는, 우리네 민중 개개인의 삶과 행동과 선택이 그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를 드러내고자 함이다.

 

3.1 운동을 그 세계사적 맥락으로 되돌리고 3.1 운동에서 토의된 정치.경제.문화적 쟁점들을 오늘에 되살려 보자는 것이다. 3.1 운동은 빛나는 경험이다. 그러나 그 빛은 천상의 순일성이 아니라 지상의 악전고투로 물들어 있다. (P.555, 나가는 글)

 

3.1 운동을 자세히 알고 싶은 호기심과, 국문학자가 3.1 운동을 어떻게 풀어냈을까의 궁금증이 이 책을 읽게 된 동력이었다. 3.1 운동을 다층 다면적으로 이해하고, 개별 인간 차원에서 3.1 운동의 현장을 접근하고 싶다면 읽은 보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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