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 조계종 표준본은 소략하여 친절하지 못하다. 경전의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한 상세한 설명이 있는 책을 찾다가 문득 서가에 이 책이 있는 걸 기억하였다. 이 책은 동봉 스님이 역해한 것인데, 약력을 보면 일찍부터 집필과 방송활동을 꾸준히 하였고 아프리카 사역 활동에도 매진한 분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상의 특징은 한글 번역이 선행하고 한자 원문 수록이 뒤따르며, 이어 해설이 나온다. 한글 번역은 4.4조에 4행 구성 형식을 취하는데, 독송에 용이하도록 역자가 의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경 독경은 대개 한자 원문을 읽게 마련인데, 아무 뜻도 모르는 한자보다는 한글이 훨씬 낫다고 본다. 그래서 이 책은 한자 원문에 한글 독음을 달지 않아 원문을 보여주는 데 의미를 두는 듯하다.

 

경전 해설은 본문에 비하면 이런저런 말을 필수적으로 덧붙이게 마련이다. 그래야 소략한 내용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하여 이해를 높일 수 있고, 여러 가지 예시를 제공하여 뜬구름 같고 추상적인 내용을 독자의 눈높이까지 끌어내릴 수 있어서다. 역자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우선 과학의 시각으로 경전에 접근한다. 종교와 과학이 배치되는 존재인 듯 간주하지만, 역자는 현대과학이야말로 경전의 진리를 이해하고 접근하는데 유용하다고 평하며, 이로써 불교의 종지가 과학적 토대 위에 기반함을 강조한다.

 

불교는 불교입니다. 불교는 과학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교는 매우 과학적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을 도구로 하여 불교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P.348)

 

그리고 원문이 한문이다 보니, 역자는 한자 뜻풀이를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다. 한자를 파자하고 세부 글자의 뜻을 재구성하여 원 의미를 강조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살아있음은 두드림입니다. 사람[]은 한결[]같이 맥박이 뛰고[] 있는 목숨[]’입니다. (P.76)

 

이러한 두 방식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논의에 비해 참신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특히 불교 교리가 전통과학이 아닌 현대과학의 맥락과 닮아있다는 의견은 흥미롭다. 다만 과학 용어와 이론으로 종교를 설명하려 든다면, 불교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아전인수로 비칠 수 있는 우려가 있다. 또한 한자 구성원리를 활용한 뜻풀이의 경우, 금강경의 이차 원전이 한문이니만치 나름 타당성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일차 원전은 산스크리트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무조건 한자에 갇혀 이해 접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 외 자신만의 독자적인 소수설 개진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어 다수설 또는 통설과는 해석의 방향이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독자의 이해와 흥미를 제고하기 위한 차원인지 또는 역자 자신의 감흥을 억누르기 어려워서인지 해설 중간에 운문 표현이 간혹 나온다는 점도 이채롭다.

 

금강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서 왈가왈부하기 어렵다. 이 경전은 고도의 종교적, 철학적, 사유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것을 비교적 평이한 어휘로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언뜻 이해되는 것도 같으면서도, 서로 모순되는 논의를 전개하는 듯하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도대체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가 헷갈릴 수도 있다. 다만 어렴풋이나마 부처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대강 헤아릴 수 있는데, 문장은 간단하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해야겠다.

 

금강경은 특정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과 같은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대상과 한계가 없다. 보살은 물론 부처 자신도 여기에 해당하고, 부처가 가르치는 최고의 설법 자체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부정하고, 긍정과 부정 자체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스스로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려 하셨습니다. 이것이 <금강경>을 접하는 기쁨입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여래라 하여 예외일 수 없으며, 외형의 추구에서도 여래이기 때문에 예외일 수 없다는 말씀은 참으로 우리가 부처님 만난 것을 기쁨 중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행복입니다. (P.362)

 

경전 내용만 보면 부처는 물질보다는 정신을 더 높이 평가한다. 어마어마한 물질적 보시보다도 경전 사구게를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설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반복하여 말한다. 그럼 부처는 물질경시주의자인가 의문이 들 테지만, 역자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물질은 누구나 추구하고 귀하게 여기지만, 여기에 매몰되면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기 어렵기에 이를 경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금강경>이 가난을 가르친다면 나는 솔직히 불자님들에게 <금강경>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을 것입니다. <금강경>은 청빈이 아니라 청부淸富를 가르칩니다. 깨끗한 부자가 되길 권하십니다.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게 가난하다면 가능한가요? (P.269)

 

여하튼 금강경은 흥미롭다. 대승불교의 출발에 가깝다는 불교사의 맥락에서 깊이 헤아려보지 않고, 또한 우리나라 조계종의 의고경전이라는 높은 지위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경전 자체 의 분량이 길지 않고, 용어가 평이하여 읽기와 기본 이해가 어렵지 않다.

 

다만 이 책 하나만으로 금강경을 끝내기에는 못내 아쉬움이 든다. 이 책은 불교 관점에서 스님이 쓴 책이므로 불교의 틀이라는 근원적 한계를 지닌다고 본다. 금강경의 이해가 불교 차원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비불교도의 중생 처지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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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 - 시대를 앞선 발상으로 아르누보 예술을 이끈 선구자의 생애와 작품
로잘린드 오르미스턴 지음, 김경애 옮김 / 씨네21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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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관련 또 하나의 책이다. 이 책은 판형이 289*279mm로 먼저 읽은 재원 출판사의 대형 판형보다도 더 크다. 가장 큰 장점은 수록된 작품 도판이 시원시원하다는 점이다. 재원 출판사의 것이 맛보기 정도라면 이 책은 훨씬 많은 수의 그림을, 보다 생생한 채색으로, 고품질의 용지에 담고 있어 전시회 도록과 비슷한 인상을 풍긴다.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부는 무하의 삶과 작품으로 무하의 생애를 죽 훑어보고 주요 작품 경향을 다룬다. 무하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도 1부만으로 전체적 삶과 작품세계를 전망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무하 작품 인생의 후반부는 <슬라브 서사시>로 대표되는 순수 회화이다. 다만 여러 가지 이유로 대부분의 무하 관련 책은 이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으며, 도판 수록도 매우 취약하다. 그 점은 이 책도 마찬가지인데 확실히 무하는 후반에 슬라브 문화를 그림에 담아내는 데 집중하였음을 그 외 여러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체코 당국은 <슬라브 서사시>를 위한 박물관 건립을 약속했지만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 무하의 기념비는 모두가 무하 스타일을 인정하는 그의 고국의 도시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P.87)

 

여기서 저자는 체코 당국에 쓴소리를 남기고 있으니, 무하에 대한 정당한 인정과 예우를 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것이다. 오늘날 무하 예술의 보존과 홍보를 위한 노력은 그의 자녀가 세운 무하 재단의 공이 크다. 한편 이 책은 비교적 편집이 꼼꼼하고 교정이 잘 되어 있어 신뢰감이 드는데, 딱 한 군데 오기가 있어 아쉽다. ‘성 비누스 대성당’(P.85)성 비투스 대성당이 올바르다.

 

2부는 무하 스타일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무하 예술의 전형은 누가 뭐래도 무하 스타일로 대변되는 상업적인 아르누보 장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무하는 그런 평을 원치 않았겠지만, 1893년에서 1903년 사이에 창작된 포스터, 장식 패널, 광고 디자인 등으로 무하는 당대에 명성을 누렸고 지금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2부에서 연도별 순서대로 창작된 작품을 소개하고 해당 작품의 내용과 특징을 짤막하게나마 분석한다. 단순히 그림명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작품의 창작 배경과, 작품의 세부 사항과 정확한 이해에 실제적 도움이 되는 유용한 설명이라고 하겠다. 무하의 작품 스타일은 분명 개성적이지만, 그가 고립무원에서 창작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된 점도 유익하다. 19세기 후반기에 무하의 앞선 시기와 동시대 화가들의 창작 경향을 통해 무하의 상업 포스터가 등장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였다.

 

1890년대 프랑스 광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선형 예술은 1860년대초 파리에서 발전되기 시작했다. 에두아르 마네는 1863년 자신의 작품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평면적 색채를 사용하고 명암 표현을 생략했으며 세부 묘사를 단순화해 화면의 2차원적 평면성을 두드러지게 했다. (P.91)

 

무하의 상업예술 작품에서 익숙한 화려한 패턴의 배경을 논외로 하더라도 무하의 인물 표현은 평면적이어서 이전 시기의 인물화와 풍경화 등에서 보이던 주류 회화의 사조와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저자는 이 점을 명확히 짚어낸다.

 

무하의 작품세계가 독보적인 까닭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벌였다는 점과, 회화에만 안주하지 않고, 포스터, 광고, 삽화, 조각, 공예, 상품디자인, 의상, 무대장치 등 조형예술의 전반을 두루 섭렵했다는 점에서 다른 미술가들과 차별성을 보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과 기법을 후학도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었으니, <장식 자료집><인물 자료집> 등의 책자가 대표적이다.

 

디자인에 대한 유일무이한 작품집으로 자리 잡은 <장식 자료집>은 유럽 곳곳에서 팔렸고,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P.186)

 

이 책은 알폰스 무하의 삶과 작품세계를 충실히 개괄할뿐더러 그의 실제 작품을 훌륭한 도판으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획이다. 아르누보 예술가로서 무하 스타일을 낳았던 그의 전성기 시절 예술을 이처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하다. 다만 이 책의 상대적 단점은 순수예술가로서 알폰스 무하의 다른 일면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책만의 약점은 아니다. 대중들의 관심은 화려한 무하 스타일에 여전히 매혹당한 채 있어 그 너머를 아직 볼 수 없는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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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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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홈 파티

숲속 작은 집

좋은 이웃

이물감

레몬케이크

안녕이라 그랬어

빗방울처럼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시민의 삶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시장과 자본의 신성성은 불가침의 영역이 되었고, 경제적 여유의 수준은 인간적, 사회적 가치판단의 척도로 자리매김하였다. 더더구나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소시민이 재산 증식을 극적으로 도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 마지막 수단이 되었다.

 

세상사를 지배하는 기본 원리를 경제적 이해관계가 차지함에 따라 재산의 많고 적음, 그리고 부동산, 특히 아파트의 소유 여부에 따라 사회계층이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친척과 친구의 부동산 무용담에 이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부러움과 시기심을 품을뿐더러 왠지 모를 열등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사회의 경제적 흐름에 발맞추지 못한 루저로서의 낭패감이랄까.

 

김애란 작가는 등단 때부터 유달리 소시민의 삶에 천착하였는데, 그것은 삶의 어둡고 괴로움을 묘사하면서도 한줄기 유머로서 빛을 잃지 않았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터일지 김애란의 작풍은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밝음과 유머는 찾기 어려워졌다. 중견 작가인 그는 이제 세상과 삶의 파고에 지치고 싫증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현실을 그 자체로서 냉엄하게 인식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좋은 이웃><빗방울처럼>은 내 집 마련의 사회적 파장을 다룬다. 내 집, 나아가서 빌라보다는 아파트, 아파트도 구축이 아니라 신축으로 경제적 가치를 범접할 수 없는 계급으로 나뉘는 우리네 현실에서 내 집은 단순한 자가의 의미가 아니다. 사회적 위상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상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았을 뿐인데, 남에게 뒤처지는 패배감과 열등감. 게다가 나만 못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사람이 일거에 의기양양하는 장면. 그것은 삶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나아간다.

 

시기니 질투니 하는 말도 모욕적이었지만, 무지니 게으름이니 하는 말도 부당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힘들게 한 건 어쩌면 잘못은 정말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P.120, <좋은 이웃>)

 

젊은 윗집 부부와 시우 어머니를 향한 화자의 양가적 감정은 전세 사기로 일순간 풍비박산 난 가정으로 전락한 지수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빌라 전세 후 아파트 청약 당첨으로 희망찬 내일을 꿈꾸던 찰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남편 수호는 스트레스로 세상을 떠난다. 지수와 수호 부부가 성실하지 못하였던가, 그들이 무모한 꿈을 꾸었던가. 그녀에게 삶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데, 외국인 도배 여자의 어눌한 한마디가 모국인보다 살갑게 다가온 건 차라리 웃픈 현실이다.

 

평범한 소시민의 패배감은 <이물감>에서도 여전하다. 기득권층으로 분류되는 연령대이지만, 기태는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현실에 직면한다. 헤어진 희주를 놓지 못해 그녀의 SNS를 뒤적거리며 잠재적 연인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그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분별없는 우쭐감을 내보인다. 파트너 지수와도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다가 멀어진다. 그의 되새김질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실패한 소시민의 전형으로서 기태의 처지를 한마디로 압축한다.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그것은 신체적 병증이 아니라 마음의 나아가 삶 자체의 증상일 것이다.

 

<레몬케이크> 속 기진은 엄마 선주와 다른 삶을 선택한다. 굳이 장사가 잘될 리 없는 책방을 개업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를 암시한다. 손님도 들지 않는 책방에서 무시했던 돈과 노후는 그녀에게 현실로 다가온다. 돈은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없고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치사한 존재다. 기진의 꿈과 낭만은 현실 앞에서 좌초 지경이다. 돌파구가 될 것으로 믿었던 유명 여행 작가의 행사마저 어처구니없이 취소되자 무력감에 빠진 기진의 눈에 세상사가 전혀 다른 결로 다가온다.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 (P.214, <레몬케이크>)

 

경제적 승자와 패자의 현실과 인식이 절묘하게 엇갈리는 현장이 <홈 파티>. 홈 파티의 주최자와 참여자는 최고경영자과정 동기 출신 모임이므로 사회적으로 나름 한가락 하는 신분이다. 여기에 가난한 여배우 이연의 참가는 사실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등장이다. 젊었던 한때 연극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부의 상류층으로 경제력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세상을 판별하는 모습이 이연의 눈에는 역겹고 위선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술의 힘을 빌린 이연의 결연한 한마디로 끝났다면 이 작품의 결말은 매우 밋밋하였으리라. 이연의 행동 실수 하나는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놓는데, 이연의 연기와 오대표의 만족감의 근원은 다르다. 전자는 홈 파티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한 가장된 액션이며, 후자는 루저가 잘난 체해봤자 결국 그럴 뿐이라는 확신의 미소다.

 

오대표의 얼굴에 잔을 잃은 서운함이나 원망 대신 묘한 만족감이라 할까 승리감이 얼핏 스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마치 오늘 파티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는, 이만하면 괜찮은 계산서가 나왔다는 표정을 지은 까닭이었다. (P.41, <홈 파티>)

 

<홈 파티>와 반대되는 상황에 놓인 소시민 부부의 난처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 <숲속 작은 집>이다. 외국 휴양지에서 한달살이는 하나의 로망이다. 문제는 주택 메이드에게 팁을 주어야 하는지, 준다면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의 사소한 사안으로 불거진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란 화자는 자기 부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엄마와의 관계 설정도 골치 아픈데, 여기서 메이드를 어떻게 대할지도 결코 편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유복한 집안 출신인 남편의 덤덤한 태도와 달리 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메이드를 대하는 화자의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 양태는 결국 금전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미묘한 영향을 예리하게 감지하는 화자의 감수성 덕분이라고 하겠다.

 

평소에도 여러 번 들은, 눈 깜짝할 사이 폭삭 늙어버린 엄마가 내게 보낸 고맙다는 문자를 보자, 이상하게 그 말을 받은 게 아니라 언젠가 내가 상대에 준 무언가를, 아니 오랜 시간 상대가 내게 주었다 생각한 무언가를 도로 빼앗은 기분이 들었다. (P.86, <숲속 작은 집>)

 

우리는 자주 착각한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빛나고 아름다우며 의미 있고 보람찬, 한마디로 행복한 삶이 될 것이라고. 청춘을 지나 중년에 접어들면 우리는 깨닫는다.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음을. 내가 제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다람쥐 쳇바퀴 돌게 되고,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엄혹한 현실임을. <안녕이라 그랬어>의 화자도 연하의 애인과 헤어진 후 어머니의 죽음으로 고향집에 주저앉아 나날을 소비한다.

 

삶의 진부한 현상을 돌파하기 위해 원어민 화상영어 수업을 듣는 화자는 화면 속 강사 로버트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세상과 단절되어 고립된 화자에게 있어 로버트와 대화는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가까운 관계보다는 차라리 낯선 타인에게 진심을 털어놓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 다시 보지 못할 존재이므로 마치 나의 내밀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도 덜 창피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화자와 로버트의 대화가 갖는 은근한 따스함은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화자의 앞날을 알지 못한다. 다만 안녕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처럼 그저 평안하길 바랄 뿐이다. 진부한 말이지만 삶이 아무리 곤궁하더라도 그냥 버텨내길 바라면서.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P.249)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작가를 포착한다. 금전적인 부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사회, 윤리, 문화의 모든 영역을 재단하는 오늘날 세태. 기회에 재빨리 편승해서 안락과 우월감을 누리는 계층과 묵묵히 성실하게 자기 앞길만 걸었을 뿐인데 둘러보니 사회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계층의 대비. 소수의 성공자보다는 다수의 실패자가 대다수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우리네 대부분은 실패자, 패배자, 열등한 사람이기 마련이다.

 

김애란의 작품은 그러한 사회병리 현상을 날카로운 시선과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그려 보인다. 작가는 화자와 독자에게 분명히 이 현상이 잘못임을 말하지만, 섣부른 위로를 더하지 않는다. 안녕이라 말하지만 거기에는 명시적 희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빛을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고, 어두운 동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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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표준 금강반야바라밀경 : 주석본 조계종 표준 금강경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엮음 / 조계종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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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여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만큼 다니시던 절에서 49재를 치르기로 하였다. 이때 가족이 경전을 필사하여 49재 당일에 소각하면 고인을 위해 좋다고 스님이 말씀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 경전 수업 겸 한문 공부를 위해 사경하기로 하였다.

 

이 책을 고른 까닭은 어쨌든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조계종의 소의경전이므로 종단 차원에서 공식 인정한 판본이 표준이라는 판단에서다. 한자 원문에 한글 독음이 실려 있고, 해석이 이어지는 형식이다. 일단 번잡한 해설이 없어 깔끔하고 두껍지 않다. 가끔 각주가 있지만 많지 않을뿐더러 건너뛰더라도 경전 이해에 큰 어려움은 없다. 맨 뒤에 미주와 색인이 있다.

 

여래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은 법이 실제로 없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고 설한다. 수보리여! 일체법이라 말한 것은 일체법이 아닌 까닭에 일체법이라 말한다. (P.64, 구경무아분)

 

대충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일체의 관념, 의식, 집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을 벗어나 보시를 행하되, 보시한다는 의식마저 존재하지 않을 때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아누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를 수 있다. 이때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은 실체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어떤 정해진 법도 아니다. 말장난 같으면서 굉장히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정과 반을 모두 긍정하므로 변증법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 얄팍한 경전이 조계종에서 그토록 중시되는 이유는 몇 장만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부처가 수보리 장로를 비롯한 대중 앞에서 설한 내용으로 요지는 오히려 간단명료하다. 비구를 비롯한 중생들이 오해하지 않고 명확히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부처는 같은 얘기를 몇 차례 반복하여 들려준다. 부처 자신이 이 경전의 중요성을 직접 설파하는 것은 그만큼 여기 실린 내용이 가르침과 깨달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리라.

 

수보리여! 간단하게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한없는 공덕이 있다. 여래는 대승에 나아가는 이를 위해 설하며 최상승에 나아가는 이를 위해 설한다. (P.55, 지경공덕분)

 

이 경전은 다른 불경과 달리 분량이 짧고, 쉬운 어휘를 사용하며, 반복되는 내용도 많다. 그것은 독송용으로 최적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불자가 즐겨 독송한다고 간행사에서도 밝힌 바 있다. 부처 또한 이 경전을 받고 지니고 읽고 외우는(受持讀誦) 행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하다못해 사구게만이라도 설하도록 권장한다.

 

이 책은 매우 함축적이고 단정적인 문장으로 구성되었기에 솔직히 뜻풀이만으로는 부처의 가르침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충분히 알기는 어렵다. 해설본이 불가피하게 필요한 이유라고 하겠다.

 

일체 모든 유위법은 / .허깨비.물거품.그림자

이슬.번개 같으니 / 이렇게 관찰할지라. (P.88, 응화비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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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의 역사 - 천년의 제국, 동서양이 충돌하는 문명의 용광로에 세운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 더숲히스토리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 / 더숲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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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의 역사 개설서다. 동로마 제국은 서양 중심의 세계사에서 주역으로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국가다. 대다수의 서양인은 로마 제국의 최후를,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간주한다. 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로마의 적통으로 본다. 그리스어와 정교가 중심인 동로마 제국은 로마의 후손이지만 방계 정도로만 여길 뿐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콘스탄티노플 함락 정도가 일반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수준이 아닐까.

 

동로마 제국의 출발을 395년 또는 476년으로 볼지 관점은 다를 수 있다. 다만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일단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황제의 죽음으로 기준 삼는다면, 길게는 천 년 이상, 짧게는 천년 가까이 존속하였음은 확실하다. 역사상 일국의 정체가 천년을 버틴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장점은 일단 저자가 그리스인이므로 동로마 제국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서구 주류와 다른 새로운 시각을 보여 줄 수 있음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 책에서 사용하는 비잔티움의 이름과 지명을 기존의 라틴어식, 영어식 표현이 아니라 그리스어식으로 표기했다는 점이다. 비잔티움인들의 주체적 인식을 존중한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또 하나 독자의 쉬운 이해를 위해 관례상 비잔티움이라는 어휘를 사용했지만, 문제가 있는 용어임을 주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비잔티움 제국 또는 문명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제국과 구별되는 별개의 국가라는 인식을 유발해서다. 비잔티움 사람들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로마인임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동로마 제국이 더 낫다.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동서 문화와 민족의 교차 지역이기에 안정된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서쪽으로는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의 계속된 침입, 동쪽으로는 이슬람과 페르시아, 셀주크와 오스만 등이 호시탐탐 아나톨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렸다. 저자에 따르면 장기간의 역병 발생과 지진의 빈발 등 환경적 어려움도 커서 심각한 인구 통계적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는 유지할 수 있었는데,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을 영토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제국의 중세 전성기라고 평하는 점이 새롭고 흥미롭다.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는 새로이 피어난 강력한 로마 제국 자체인 비잔티움 제국이 지성 세계에서도 서방을 압도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P.223-224, 5)

 

동로마 제국과 관련하여 종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사이의 교리를 둘러싼 차이는 교회 간 상호 파문으로 이어졌고, 이는 끝내 가톨릭교와 정교로 기독교가 분파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정교 내부에서도 성상 인정과 파괴를 둘러싼 치열한 종교적 갈등이 제국을 뒤흔들었으니, 가톨릭교와는 달리 정교는 황제가 총주교보다 우위를 점하는 일종의 제정일치 사회여서다.

 

12044월에 일어난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과 약탈은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결정지었다. 도시 자체는 1261년에 탈환되었지만, 함락에 비롯된 정치적.경제적.인구적.문화적 여파는 중세 이후 비잔티움 세계에 남아 있었다. (P.261, 7)

 

이처럼 언어와 종교가 다르니 동일한 문명권이라고 인정하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서구와 동로마를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만들고 동로마의 멸망을 재촉하게 만든 사건이 바로 십자군 전쟁,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무너뜨린 4차 십자군이다. 이슬람 적국이 아니라 어쨌든 같은 기독교 문명권인 동로마 제국이 한순간 무너지면서 60년 가까이 지나서야 겨우 후속 국가인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지만, 이후 동로마 제국은 다시는 예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결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인들은 서방 세계를 믿지 않고 적대시하게 되었고, 쇠퇴한 동로마 제국을 서방 세계는 경시하고 함부로 대하기 시작하여 두 체제의 단합은 요원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여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서방 세계의 구원 의지가 강력하지 않았음을 이를 보여 준다. 그들에게 비잔티움은 이미 다른 세계에 속해 있으므로.

 

저자는 두 가지 독자적 의견을 제시한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이 곧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에게해 섬 지역에 여전히 비잔티움의 영토가 오랜 기간 존속하였기에. 하지만 제국의 수도와 황제가 종말을 맞이했고 응집력 있는 대안세력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멸망이라고 간주하는 게 타당하다고 본다.

 

십자군 전쟁의 단초가 된 알렉시오스 1세의 구원 요청에 대한 해석이다. 보통은 셀주크 세력에 위협을 느낀 황제의 절박한 구원 요청에 교황이 나서서 호소함에 따라 최초의 십자군이 구성되었다고 본다. 저자는 다른 주장을 펼치는데, 당시 셀주크의 세력은 제국의 명운에 위협을 가져올 정도가 아니었고, 황제는 서방의 용병으로 셀주크와 대적하려는 의도 정도였다는 것이다. 거대한 십자군의 움직임은 황제와 동로마 입장에서도 당혹스러운 사태 전개였다는 점이다. 어쨌든 대규모의 군대가 자국 영토를 통과해 간다는 점은 어느 지배자든지 부담스럽게 여길 것은 자명한 일이다. 흥미로운 사안이다.

 

어쨌든 동로마 제국의 멸망에 내부적 책임은 결코 면할 수 없다. 제국이 공국 수준으로 쪼그라들었음에도 지배층은 알량한 권력 다툼으로 국세를 키우기 위한 노력을 등한시한 점은 분명 사실이므로. 다만 그러함에도 동로마 제국의 의의를 과소평가하는 시각은 잘못이다. 비잔티움은 천년을 존속하였다. 저자의 발언처럼 비잔티움 역시 역사의 흐름에 맞추어 변화하고자 했지만 이를 잘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근대 서구 사상가들이 비잔티움 세계를 폄하한 것은 마치 어린이가 할아버지의 현재 모습만 보고 늙고 병든 존재라고 인식하는 편견에 불과하다. 동로마 제국의 큰 흠결은 너무 오래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그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던 동로마 제국의 역사 전반을 충실히 소개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 정치와 군사적 관점에서만 관심을 쏟지 않고, 사회, 경제, 문화적 측면도 균형 잡고 기술하려는 노력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서방에 편중된 시각에서 탈피하여 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천년 제국의 실체를 독자에게 알리고자 한 점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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