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고사 - 19세기 베스트셀러, 서울의 춘향전
이윤석.최기숙 지음 / 서해문집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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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판본과 완판본이 <춘향전>의 대표적인 판본이라면, <남원고사>는 근래 들어 주목받는 이본이다. 다만 입소문에 비해 실제로 접하기는 쉽지 않은 판본이기도 하다. 이는 대중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번역본이 부재한 까닭이다. 현시점에 알라딘에서 ‘남원고사’로 검색해 보면 연구서를 제외하면 모두 세 종류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그마저도 서해문집 판은 품절로 사실상 절판이나 다름없다. 결국 설성경 번역본과 정길수 번역본만이 독자에게 접근 가능하다. 도서관에서 두 가지 번역본을 살펴보았는데,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게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두 책 모두 교주본으로 전문적 주석을 달고 있고, 원문과 번역문을 나란히 수록하여 전문 학술 도서에 가깝다.

 

서해문집의 이윤석과 최기숙 번역본은 필요한 최소한의 주석과 해설을 곁들이고 <남원고사> 본래의 콘텐츠가 지닌 맛을 살리기 위해 깔끔한 번역문을 지향한다. 원문에의 충실성은 헤아릴 수 없지만 적어도 소설로서 가독성과 흥미성의 전달에는 성공하였다.

 

<남원고사>는 주류 판본과 여러 가지 설정과 대목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먼저 춘향의 성씨는 성씨가 아니라 김씨다. 신분이 기생이라는 점은 경판본과 마찬가지다. ‘사랑가’ 대목이 첫날밤이 아니라 광한루의 첫 만남에서 등장하며, ‘십장가’도 실제 매를 맞기 직전에 불린다. 춘향 어미는 거지로 분장한 어사를 끝끝내 박대하고, 춘향이가 풀려난 게 변 사또가 아니라 어사의 수청을 허락한 덕분으로 알고 기뻐한다. 어사가 춘향을 풀어주는 장면에서도 춘향을 구박한 기생들에게 칼머리를 이로 물어뜯어 벗기라는 무자비한 명령을 내리는데 아무리 봐도 어사로서 공정한 처분이라기보다는 사적 복수에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춘향의 성격도 완판본과 유사하지만 한층 강렬하게 그려진다. 불망기를 달라고 똑 부러지게 요구한다든지, 이별 통보에 미친 듯이 분노를 표출하다가 전별주를 건네는 모습, 자신을 잡으러 오는 패두들을 능수능란하게 접대하는 대목에서 다소곳한 요조숙녀와는 거리가 멀다. 본문에서도 춘향의 성품을 이렇게 기술한다.

 

춘향이 본디 사재고 도도하여 매몰차고 꼿꼿한지라 관속들이 꺼리고 싫어하더니 (P.193)

 

주류 판본의 <춘향전>을 읽으면서 항상 아쉽게 느꼈던 점은 변 사또가 암행어사에게 파직당한 이유가 석연치 않다는 점이다. 수청을 거부한 춘향을 감옥에 가둔 이유만으로는 애매하다. 일단 춘향의 신분을 기생으로 간주한다면, 수령은 산하 기생에게 관례상 수청을 요구할 수 있다. 춘향과 이 도령의 관계는 흔하디 흔한 일시적 만남에 불과하다. 물론 춘향은 대속을 해서 기생의 신분을 면했다고 하지만, 이게 실제로 법적으로 인정되는지 여부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변 사또는 불법 행위를 저지른 셈이니 처벌은 당연하다. 한편 자신의 요구가 확실한 불법 행위임을 알고 있는데도 변 사또가 수청을 강요했을까 반문할 수 있다.

 

<남원고사>는 이러한 미비점을 상당 부분 보완하였다. 변 사또가 파직당한 결정적 죄목은 탐관오리라서이다. 어사가 된 이 도령은 전라도를 순행하면서 선비와 농민 등 신분을 물론하고 수령의 정사에 대해 탐문한다. 이 과정에서 남원 부사가 탐학한 인물임을 파악하였고, 생일잔치를 위해 백성을 가렴주구 하는 걸 목도하였으며, 잔칫상에서 변 사또 자신의 목소리로 이를 자랑하도록 조정한다. 어사의 유명한 시구는 이러한 빌드업을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나는 묘리 있는 일이 있소. 심심한 때면 이방 놈과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등록하지 않은 토지를 뒤져내어 단둘이서 똑 반으로 나누니, 그런 재미가 또 있는가? (P.369)

 

<남원고사>는 완판본에 비해서도 분량이 매우 많다. 번역문만 수록해도 400면에 이르는 본격 장편소설이다. 세책본이라는 특성상 분량 늘리기를 의도함과 아울러, 춘향 이야기라는 줄기에 다양한 이야기를 부가하여 다채로운 읽을거리를 추구했을 것으로 본다. 소설의 첫대목은 화창한 봄날을 예찬하며 시작하는 데 풍광 묘사에 그치지 않고 역사와 문학의 전적을 이것저것 끌어와 길게 인용한다. 이어지는 칠언절구의 나열, 이 도령의 화려한 옷차림, 광한루로 놀러 갈 때 남원 지방의 자연과 만물에 대한 온갖 묘사를 열거하는 등 분량을 늘리는 데 주력한다.

 

춘향과 이 도령의 이별 장면에서 정철의 <사미인곡> 전문을 수록하며, 압권은 옥에 갇힌 춘향을 위로한답시고 남원 왈짜들이 와서 벌이는 갖가지 행태다. 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소설을 읽으며, 노름판을 벌이고 놀이를 하다가 끝내 술주정과 싸움으로 이어지는 희화적 장면을 연출하는데, 제법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춘면곡>, <처사가>, <어부사> 거의 전문을 인용하고,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의 한 대목을 삽입하는 등 독자가 흥미롭게 여길 만하다고 생각되면 차입을 망설이지 않는다.

 

<남원고사>의 독자층이 누구일지 생각해 본다. 작중에 상당한 고전과 한문 지식이 필요한 문구와 대목이 많으므로 서민은 읽어도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양반층과 학문을 깨우친 중인 및 부유한 평민층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게다가 흥미성을 전제로 하는 소설이므로 재미와 해학 요소도 아끼지 않는다. 양반층은 서민의 풍속과 세태를 알 수 있으며, 중인과 평민층은 지배층을 향한 기롱과 본인 계층의 실상을 해학적으로 접할 수 있으니 모두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아니겠는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당대의 풍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도령이 방문했을 때 춘향이 갖가지 담배를 내놓는 대목에서 당시 담배가 일대 유행이었음을 알게 되는 점이 전형적이다. 남원 왈짜의 행태를 통해서는 당대 인기 소설과 노름, 놀이 문화의 일면을 헤아릴 수 있다. 아울러 해학성도 새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방자의 인물됨 묘사, 이별 장면에서 이 도령과 마부의 장난, 변 사또의 말 상대인 이 낭청의 이도 저도 아닌 애매모호한 말투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남원고사>라고 이본의 이름을 달리했는지가 이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본의 작자 또는 편자는 널리 알려진 경판본 춘향전의 줄거리를 뼈대로 삼지만, 이 도령과 춘향의 사랑 이야기로만 작품을 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식자층과 서민층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덧붙이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강압적인 지배층과 무력한 서민층의 대결에서 사필귀정의 해방과 쾌감을 느끼도록 하는 데 관심을 집중한다. 이것이 단지 소설 속 꿈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심정 또한 품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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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ㅣ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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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를 읽은 후 자연스레 진 리스의 작품을 펼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 간에 맺어짐의 장벽이 되었던 미친 여인 버사. 작가는 그녀가 단지 말 없는 들러리가 아닌 주체적 인간으로서 정당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숨결을 불어 넣는다. 작가는 왜 이러한 시도를 했을까. 먼저 도미니카 출신인 진 리스 자신과 버사 간 지역적, 민족적 동질성을 느껴서이리라. 영국 남자와 결혼한 크리올 여인이 영국 본토에 와서 처한 곤경과 부당한 대우에 분개한 연유도 있다. 경제적 자유의 박탈과 인종적, 문화적 갈등에 따른 광인 취급.

 

그렇다고 이 소설을 무조건 <제인 에어>와 연계해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선배 작가의 명작은 오로지 이 작품을 탄생시킨 계기였을 뿐 그녀가 그리는 소설 속 인물과 상황은 완전히 독자적이다. 그렇게 볼 때 사르가소 바다를 경계로 대서양 양 끝에 자리한 서인도 제도와 유럽 간 인종적, 문화적, 심리적, 제도적 격차의 광막함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다.

 

그러니 당신들과 이곳 유색인종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누구며, 어디가 내 나라인지,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내가 왜 태어난 것인지 궁금할 때가 많아요. (P.149)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어머니는 크리올이다.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인의 후손. 그들은 농장주로서 식민지 지배층이지만, 노예해방으로 일거에 전락하고 만다. 백인이지만 본토의 백인과는 동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백인. 식민지 흑인과 본토 백인 양쪽에서 배척당하는 어중간한 지위. 유럽인이지만 유럽 문화와 정서보다는 식민지 문화와 정서에 가까움과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그것이 크리올이다. 흑인들은 그들을 ‘흰 바퀴벌레’라고 불렀다.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의 개인적, 사회적 갈등을 다룬다. 우선 식민지 흑인과 지배층 유럽 백인 간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갈등이다.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신분적,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메이슨 씨와 재혼한다. 유럽에서 건너온 신흥 백인 지주인 메이슨 씨는 식민지의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알지 못한다. 그네들의 백인 지배층에 대한 은폐된 혐오의 깊이와 세기를 알지 못한 채 아내의 잇따른 경고도 외면하고 순진하고 무심한 언행으로 일관하다 일순간에 저택은 불타버리고 앙투아네트의 남동생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광기에 사로잡힌다.

 

다음으로 앙투아네트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에서 건너온 남성 간의 인종적 갈등 그리고 남성우월주의를 다룬다. 양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앙투아네트는 가족에 의해 영국 남성과 결혼한다. 이는 상호 간 이해관계가 일치해서인데, 크리올로서는 본토 백인 남성과 혼인으로 인종적 정통성을 보장받고 싶어 했으며, 본토 백인 남성은 신부의 막대한 지참금을 통해 무일푼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실질적 욕망을 지녔다. 여기에 당대 영국 법령은 결혼한 여성의 독립적 법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에 남편의 재산권 독점이 가능하였다.

 

나는 내가 하기로 되어 있는 역할을 연기했을 뿐이다. 그녀와 나는 전혀 아무 상관없는 관계이다.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 나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P.114)

 

여기까지는 당대 현실이 그러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무슨 연유가 되었든 결혼한 두 사람이 무탈하게 잘 살아가면 모순과 불합리가 그나마 상쇄될 수 있으니. 문제는 결혼한 본토 백인 남성(이 작품에서는 로체스터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이 신부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서인도 제도에서 자라난 크리올 문화에 대한 존중과 이해의 노력이 전혀 부재하다면 애정이 차차 생길 수 있다고 기대하기도 난망하다.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 포인트다. 남자는 돈을 바라보고 생면부지의 크리올 여성과 결혼했다는 자괴감과, 유럽인이 아닌 타 인종과 결혼했다는 불편감을 시종일관 되새김질한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 속 앙투아네트의 남편은 다문화에 대한 인식과 이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내게 적개심을 품은 것 같았다. [......] 내가 이 장소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나는 그것을 느꼈다. 나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211)

 

이것은 그가 앙투아네트를 버사라고 호칭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저 자기가 그렇게 아내를 부르고 싶어서 부를 뿐이다. 이를 애칭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게, 애칭은 원래 이름을 귀엽게 표현하는 것이지 이름을 완전히 바꾸는 게 아니다. 이름이 개인의 정체성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남편의 행위는 아내를 대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명시적 폭력에 해당한다. 더구나 옆방에 아내가 있음에도 일부러 하녀 아멜리와 관계를 맺은 것은 공개적 수치와 모욕주기에 불과하다. 아내를 하녀와 동급으로 취급한다는.

 

버사는 내 이름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것은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는 거지요? 그것도 오베아예요. (P.208)

 

샬럿 브론테는 그녀의 소설 속에서 똑 부러진 주체적 여성상을 창조하였다. 제인은 로체스터 씨의 일방적 시혜를 거부하고 대등한 관계에서 결합한다. 이처럼 여성주의적 입장을 명료하게 내세운 작가가 버사를 그렇게 괴물 같은 미치광이로 묘사하였다는 점은 의외다. 작가에게 버사는 자신이 주목하고 관심을 둘 여성이 아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면, 그녀 역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유럽 중심의 제국주의적 시각 말이다. 버사는 식민지의 크리올이기에 토착 흑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당대의 어쩌면 보편적 인식을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그녀가 아무리 영국 순수 혈통의 크리올이라지만, 크리올을 영국 사람이나 유럽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 (P.101)

 

이 작품에서 광기는 서인도 제도의 크리올인 앙투아네트 혈연 속에 흐르는 유전성으로 설명한다. 본토 유럽 백인이 아니고 서인도 제도의 야만성에 오염된 존재로서 말이다. 작중에 로체스터는 끊임없이 앙투아네트를 불인정하고 의심하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그가 그녀에게 갖는 건 오로지 육체적 욕망뿐이다. 오죽하면 필요한 재산을 다 챙겼으니 앙투아네트가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라는 유모 크리스토핀의 정당한 요청마저 단칼에 거절한다. 그에게 앙투아네트는 미쳤건 아니건 간에 이미 자신의 소유물이기에 절대로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존재다. 차라리 망가뜨릴지언정 말이다. 이쯤에서 진짜 광인이 누구인지 헷갈린다.

 

그녀는 미쳤지만 내 것이야, 내 것이야. 신들도, 악마들도, 운명도 다 관심 없다. 그녀가 웃건 울건 혹 두 가지를 다 하건, 그건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해. (P.233)

 

이제 그녀는 단지 유령이다. 구름으로 가려진 잿빛 하늘 아래서 그녀는 단지 유령이야.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절망을 빼곤. (P.239)

 

<제인 에어>의 버사와 달리 이 작품 속 앙투아네트는 무너지지 않는다. 아니, 원작의 버사가 정말로 광녀였는지는 오로지 로체스터의 진술에 의존할 뿐이다. 낯선 이국땅의 저택에 감금된 그녀의 상황에 대해 작가는 원작과는 달리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앙투아네트의 판단과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로체스터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에 대한 인식을 명료하게 가져간다. 자신이 누구이며,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진 리스는 소설 속 로체스터가 아내 버사에게 행한 은폐된 사고와 행위의 기저 원인을 드러냄으로써 제국주의적 백인 우월주의와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의 실체를 폭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편향된 이데올로기가 결국 제인 에어의 창조자인 여성 작가 샬럿 브론테마저 당연한 것으로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한 당대의 현실 인식과 맞닿아 있음을 나아가 보여준다. 종국적으로는 이것이 19세기 당대에 국한한 과거의 유물로 그치지 않고, 작가 당시의 20세기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현상임을 유명한 고전에 빗대어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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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친데
프리드리히 슐레겔 지음, 이영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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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늪에 빠져 있다. 처음 박상화 번역본 <루친데>를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당혹스러움에 마주쳤다. 혹시 번역 이슈인가 싶어 이영기 번역본을 추가로 읽었다. 처음보다는 좀 낫지만 여전히 개운한 느낌은 없었다. 다만 작가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 작품 해설을 통해 그나마 어렴풋이 다가갈 수 있었다.

 

<루친데> 이해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슐레겔의 문학 이론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할 것 같아 <그리스 시문학 연구에 관하여>(박현용 번역본)를 읽었는데 꾸역꾸역 버티다가 3장에 들어가서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역시 번역 비교를 위해 다시금 이병창 번역본(<그리스문학 연구>)을 펼쳐 든 상황이다. 이마저도 요령부득이라면 적당한 선에서 그만둘 수밖에 없으리라. 가볍게 시작했다가 된통 당하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루친데>는 ‘소설 이론에 관한 소설’인 것이다. <루친데>가 갖는 이러한 메타소설적 혹은 초월적 특징은 작가 슐레겔의 자의식적 성찰이 소설 내에서, 그리고 소설을 통해서 작용하면서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184-185)

 

슐레겔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사조의 선구자다. <루친데>가 여느 소설과 다른 근본적 이유는 그의 문학관을 그대로 소설로 형상화해서다. 순전한 예술적 동기에 착안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경향 문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 문학적 감동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낭만주의 문학 이론이 작품 속에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충실하게 투영되었는지가 작품 이해의 핵심이다. 참고로 <루친데>는 1권만 집필된 미완성작이다.

 

13편의 텍스트들 또한 편지, 환상, 성격 묘사, 알레고리, 목가, 대화, 성찰 등 단편적 성격의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인위적으로 잘 정돈된 혼란, 모순들이 만들어내는 매혹적 대칭‘이라는 아라베스크적 특징에 정확히 부합한다. (P.185)

 

이 작품은 머리말을 제외하고 총 13편의 텍스트 내지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크게 남성 율리우스와 여성 루친데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편은 형식 면에서 자유롭고 독자적이며 율리우스가 루친데를 만나기 전까지의 삶과 루친데를 만나서 사랑을 교감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각 편은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재배열되어 있고 ‘남성성의 수업시대’ 만이 서사적 성격을 띠고 있어 독자에게 상대적으로 친숙하게 다가온다.

 

해설에 따르면 슐레겔은 소설을 서사적 산문 텍스트가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혼합물로 규정한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포에지로서 운문과 시적 정신을 지닌 산문 일체를 포괄한다. 이 작품에 다양한 장르 형식이 사용되는 것은 이러한 의도의 반영이라고 하겠다. ‘율리우스가 루친데에게’에서 이러한 다양성과 혼돈을 표방한다. 작가도 독자들의 당혹성을 예상했는지 ‘어린 빌헬미네의 특성’에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참아달라고 특별히 당부한다.

 

슐레겔의 이 작품은 당대 사회적 가치관과 배치되는 주장을 담는다. 감정의 자유로운 발산. ‘몰염치에 관한 알레고리’에서 인간의 특성을 몇몇 여인들의 모습으로 알레고리화한다. 언뜻 보아서 아름다운 여인들이 자세히 보니 천박함이 드러나고, 오히려 몰염치한 여인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여성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도자 위트는 전자를 관습적인 견해로 가짜 친구들이라고 부른다.

 

작가는 ‘무위에 대한 목가’에서 무위와 게으름을 예찬한다. 온화한 고요함 속에서 내적 성찰이 가능하기에, 이에 반대되는 성실과 부지런함은 거부한다. 헤라클레스를 찬미하고 프로메테우스를 폄훼한다. 후자 때문에 인간은 세속적 행위에 매진하게 됨으로써 낭만의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슐레겔에게 있어 진정한 낭만성은 수동성에서만 가능하기에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식물성에까지 다다른다.

 

성실함과 유용함은 인간에게 천국으로의 귀환을 허용하지 않는, 불타는 검을 가진 죽음의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침착하고 온화하게, 진정한 수동성의 성스러운 고요 속에서만 오로지 자신의 전 자아를 기억할 수 있으며 세상과 삶을 관조할 수 있다. (P.53)

 

작가는 낭만성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고 본다. 남성은 천성적으로 사랑을 잘 알지 못한 반면에 여성은 사랑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다. 따라서 여성성을 사랑하고 숭배한다. 율리우스가 삶의 방황을 거듭하다가 루친데를 만남으로써 미숙함과 결핍에서 벗어나 성숙한 삶으로 진입하는 과정이 ‘남성성의 수업시대’에 잘 드러나 있다. ‘변모’에서 율리우스의 변모를 확인할 수 있고, ‘신의와 장난’에서 사랑의 가치를 역설한다. 그리고 모성을 통해 여성성이 완성의 단계에 도달하게 됨을 ‘두 통의 편지’에서 설파한다.

 

후반부의 ‘성찰’, ‘율리우스가 안토니오에게’, ‘동경과 평온’, ‘환상의 희롱’은 모호하여 잘 와닿지 않는 대목이다. ‘성찰’은 사유, 성찰을, ‘율리우스가 안토니오에게’는 우정을 다루는 듯한데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동경과 평온’은 낮의 눈부심은 헛된 동경이며 밤의 평온이 참됨을 알려주려는 것인지. ‘환상의 희롱’은 공허한 오성보다는 순진한 환상의 가치를 상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자신하기 어렵다.

 

이 소설을 슐레겔의 삶에 빗대어 그와 도로테아 간 사랑의 여정과 현상 이야기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을 낭만주의의 완결로 이상화하여 포장한다는 것인데, 부분적으로는 그런 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논거가 미약한 느낌이다.

 

사실 문학사에서 슐레겔은 작가로서가 아니라 문학 이론가로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형 아우구스트와 그가 주창하는 낭만주의 이론에 공감하고 문학잡지에 동참하는 여러 작가에 의해 초기 낭만주의 문학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예전에 읽었던 노발리스의 <푸른 꽃>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슐레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떠오른다. 노발리스는 슐레겔의 절친이자 그의 사상에 열렬한 동조자였다.

 

<루친데>에 담겨 있는 사랑, 섹슈얼리티, 여성(성)과 남성(성)의 성별 관계, 결혼 제도에 관한 언술은 이 소설이 일으킨 충격적인 사회적 파장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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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한 밀 이삭처럼 - 고흐, 살다 그리다 쓰다 ㅣ 열다
빈센트 반 고흐 지음, 황종민 옮김 / 열림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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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는 유명한 화가다. 그의 이름을 어지간한 사람은 누구나 들어봤으리라. 화가이므로 그의 그림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인기는 매우 크지만, 정작 인간 고흐는 잘 알지 못한다. 스스로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갇혔다는 정도.

 

이 책은 고흐 자신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고흐는 평생 동안 동생 테오와 서신을 교환하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화가이자 생활인 고흐의 인간다운 면모를 가감 없이 볼 수 있다. 이 책은 짤막한 문장과 단락을 서신집에서 발췌하였다. 서신을 온전히 수록한 게 아니고, 어떤 서사적 맥락을 갖춘 게 아니므로 고흐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정도를 체감하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한 가운데 고흐가 무엇을 중시하였고 어떤 점에 집중하였고 무슨 마음을 지녔는지를 단편적이나마 접할 수 있음은 의미를 가진다.

 

내가 자연에서 창조한 모든 작품은 불에서 꺼낸 밤처럼 고통을 견디고 완성한 것이다. (P.188)

 

고흐는 살아생전에 화가로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세인의 정당한 평가와 인정이 없는 가운데,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무명 화가로서 그가 자신감을 지닐 수 있었을까. 자신이 정말 예술가의 재능과 역량을 가졌는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는 수없이 자문하고 끊임없이 자답한다. 그래서일까 전편을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화가의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반복적 다짐이다. 그것이 너무 잦아 오히려 연민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내 마음속에 반드시 북돋아야 하는 힘이 들끓는다. 꺼뜨리지 말고 되살려야 하는 불길이 타오른다. 그 불길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지만, 설령 암울한 결과를 불러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P.13)

 

나아가 현세에서는 세속적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자포자기적 심정도 내비친다. 그래야 실망이라도 덜 할 것이라는 자기 위안 아니겠는가.

 

인생은 씨를 맺게 하는 시기일 뿐이며 현세는 열매를 거두는 곳이 아님을 점점 더 뚜렷이 깨닫기 시작한다. (P.73)

 

고흐의 화풍은 독특하여 언뜻 보아도 그의 그림임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는 인상파로 그를 통칭하지만, 정작 고흐 자신이 화가로서 어디에 주안점을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독특한 화풍은 어떤 계기로 나왔으며 무엇을 표현하고자 함인가. 이 글의 몇 단락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색상과 작법에 관한 그의 생각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개성을 강렬히 표현하기 위해 내 멋대로 색상을 구사한다. (P.122)

 

화가 아닌 인간 고흐는 어떤 모습일까. 수입이 없는 그는 동생의 경제적 원조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그림과 생활 모두를 감당해야 했기에 항상 가난에 시달렸다.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자위하지만 궁핍의 그림자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하나, 성인 남성으로서 갖는 성적 외로움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경력 초기에 모두에게 지탄 받는 가정 비스무리한 걸 잠시 영위했을 뿐 이후로는 독신의 삶을 고수하였다. 그것이 자의였을까. 가족과 여성을 향한 그리움과 고독에 대한 사무침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나는 사랑 없이 살 수도 없고 살기도 싫고 살아서도 안 될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 열정이 있는 인간이다. 나는 여자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얼어 죽거나 돌로 변할 것이다. (P.223)

 

가난과 고독 속에서, 화가로서 반신반의의 한 가닥 믿음만을 지닌 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날마다 오직 그림을 그리는 일뿐이다. 그에게 그림은 삶의 목적이자 수단이며, 자체로서 생존의 필수불가결한 원동력이다. 그가 화가를 구두장이에게 비유한 건 그만큼 자신이 노동자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그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음의 방증이리라.

 

살아 있음이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온 힘을 다해 일할 때뿐이다. (P.41)

 

곳곳에 그의 대표작(비록 판형의 한계로 작은 크기지만)도 수록하고 있어 독서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게다가 읽기 어려운 문장도 아니다. 이상하게도 책장을 휙휙 넘기기가 여의치 않다.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 짠하고 답답한 상념이 계속 독서를 방해한다.

 

부록 <고흐의 삶에 대한 짧은 글>은 독자가 고흐의 삶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한 마음 씀씀이다. 인간 고흐를 가까이 대하고 싶지만, 본격적인 서간집은 부담스럽다면 이 책을 통해 그에게 다가가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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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셀라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6
새뮤얼 존슨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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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를 읽을 때 중간에 <라셀라스>가 소개되었다. 이 작품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제인 에어>에서 굳이 언급될 정도면 나름의 가치가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 찾아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철학적 허구’ 또는 ‘철학적 우화’이다. 우리가 소설 작품에서 기대하는 인물의 강렬한 개성과 인물 간의 갈등과 대립, 외부 환경과의 충돌 등의 요소는 여기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인물의 사고와 대화, 행동을 기술하는 작가의 태도는 차분하고 느긋하며, 관점은 지극히 관조적이다. 이 작품을 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소설이 아니라면 어떤 장르로 간주할 수 있을지 애매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왕자가 대답하였다. “나에게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다는 것, 아니 나에게 부족한 게 뭔지 모른다는 것, 바로 그것이 내 불만의 원인입니다.” (P.21)

 

라셀라스 왕자가 행복의 골짜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심리는 싯다르타 왕자와 다르지 않다. 자기의 풍요로움에 대비되는 민중의 고통을 구제하고자 하는 해법을 찾기 위해서가 후자라면, 전자는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 과연 최고, 최선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를 갖는다. 인간은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현재를 파악하는 존재다. 불행이 있어야 행복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건 양지와 음지, 빛과 어둠, 선과 악처럼 우주의 보편적 원리에 해당한다. 절대적 행복은 오직 깨우친 자에게만 해당할 뿐, 속인들은 이를 알기 어렵다.

 

우리네는 왕자의 번민에 쉽사리 공감하기 어렵다. 그건 우리가 완전한 행복을 누린 경험이 전혀 없어서다.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시절에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올바른 이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처지다. 다만 외관상 더없는 지상천국으로 묘사되는 행복의 골짜기로 들어온 사람들의 내심은 모두 이를 후회하고 있다는 시인 이믈락의 발언은 현실을 드러낸다.

 

“진실로 여쭙건대 제가 알기로 왕자님을 모시고 있는 자들 가운데 이 은둔의 처소에 들어온 날을 한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P.70-71)

 

왕자와 공주, 그리고 이믈락 일행이 골짜기를 벗어나 세상을 돌아다니는데, 주로 머물게 된 곳은 이집트다. 이미 서구 문명이 우위를 점하였음을 인정하고 있는 가운데 아비시니아에서 그나마 가까운 문명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왕자 일행은 다양한 유형과 계층, 직업의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리며 관찰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탐색한다.

 

세상 사람들은 겉보기에 모두 행복하고 즐거워 보인다. 웃음 띤 가면을 벗기면 그 아래 슬픔과 고통, 거짓의 참모습이 드러나기에 위선의 껍데기를 꽁꽁 동여매고 한사코 움켜잡는다. 그것을 건드리는 행위는 일종의 역린(逆鱗)이기에 왕자는 젊은 친구들에게서 내쫓김을 당한다. 쾌활한 젊은이도, 부유한 상인도, 은자도, 철학자도, 모든 것을 겪은 노인도 결코 행복하지 않음을 알게 되고, 궁정의 왕좌나 일반 평민의 가정을 살펴보았지만 권력과 지위도 행복을 담보하지 못함을 발견한다.

 

한편 피라미드를 방문하는 도중에 공주의 시녀를 아랍인 도둑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벗인 시녀가 사라지자 공주는 식음을 전폐하고 은둔할 생각마저 품는다. 극도의 슬픔과 절망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음에도 시간의 경과가 마음을 풀어놓게 되는 현상은, 곧 행복의 반대편인 불행마저도 완전하고 절대적인 불행은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은 천문학자다. 명망 있는 학자로 소문난 그를 이믈락이 방문하는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이성의 분별을 상실한 인물임을 발견한다. 물론 학자 자신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몰입하여 평생을 바쳤기에 자신의 인식과 믿음을 철석같이 믿기에 자족적인 상태이다. 왕자 일행과 교분을 나누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비교와 판단의 새로운 근거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음을, 그리고 학문과 진리의 세계에 몰두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쯤에서 왕자 일행과 그가 헤어져야 하지만, 착오를 제외하면 고매한 인품과 현명함을 지닌 노인이기에 함께 지낸다.

 

진정한 행복을 찾는 왕자 일행의 여정 결말은 마지막 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결론이 아무것도 없는 결론’이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자신들 소망이 현실에서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들의 도전은 결과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빈손인 건 아니다. 그들은 행복의 골짜기로 돌아가겠지만 이전처럼 무의미와 권태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헛된 욕망을 품고 방황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마음의 상태이므로, 원효대사의 해골 물처럼.

 

인간은 늙어 죽을 때까지 행복이란 이 세상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임을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이 행복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며 자기도 언젠가는 그런 행복을 얻으리라고 계속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지요. (P.89)

 

사실 작품의 지향과 결론은 심오하거나 색다르지 않다. 우리네가 역사를 거치면서 반복해서 들어왔던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근대의 문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담은 작품이 있는데, <파랑새>가 여기에 해당한다.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곳 우리 주변에 있다. 왕자와 공주는 이걸 비로소 깨달은 반면, 이믈락은 행복의 골짜기에 들어오기 전에 겪은 여러 세상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작중에서 여러 번 그는 절대적인 행복의 부재를 설파한다.

 

작가는 작품의 첫 문장에서 이미 결론을 암시한다. 여정이 시작되기에 앞서 결과가 예견된다면 무척이나 김빠지게 마련이지만, 왕자 일행의 세상 체험이 결론에 이르는 구도의 과정임을 다양한 사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우화가 여늬 작품과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공상이 속삭이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으며 희망의 환영을 열심히 좇아가는 사람들이여, 나이를 먹으면 젊은 날의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며 오늘 부족한 것이 내일이 되면 채워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이여, 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에 관한 이야기에 한번 귀를 기울여보라.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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