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소녀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18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정소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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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청목사에서 출간한 그린 북스 시리즈가 있었다. 청소년 대상의 명작 소설 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개는 익히 아는 작품들이지만 일부 책은 굉장히 생소하였다. 문득 작품 목록을 훑다 보니 <아일랜드의 봄><파란 눈의 아가씨>라는 표제와 작가 E.오브라이언이 궁금해졌다. 두 책은 일찌감치 절판되었고, 각종 도서관에서조차 찾기 어려웠다. 다행하게도 근년 들어 오브라이언의 책이 몇 권 번역되어 나왔는데, <시골 소녀들><아일랜드의 봄>과 같은 책임을 알게 되었다. ‘시골 소녀들’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며, 원제는 시골 소녀들이 맞다. 그린 북스의 경우 표제를 좀 더 그럴듯하게 의역해서 붙인 모양이다.

 

이 소설은 발표 당시 아일랜드 내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한다. 어떤 내용이 외설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윤리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설정은 10대 중반인 화자 캐슬린이 노신사 젠틀먼과 교제하는 대목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원조교제에 가까운데 여기서 그들은 육체관계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이 오래된 마을을 떠나는 게 아쉽지 않았다. 지쳐빠지고 늙은, 바스러지고 무너져가는 죽은 마을이었다. 가게들은 칠을 새로 해야 했고, 위층 창턱의 제라늄은 내가 어렸을 때보다 그 수가 줄어들었다. (P.209)

 

물론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1960년 이전 아일랜드 시골의 궁핍한 삶, 가정폭력과 가부장적 권위가 지배하는 가정의 모습, 캐슬린과 바바가 다니는 수녀원 학교의 과도한 금욕주의 교육 방침 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에 즐거운 마음을 지니지 못하리라. 더블린으로 탈출한 두 사람이 부유한 중년남성과 어울리는 장면 또한 썩 유쾌하지는 못하다. 이런 내용이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닌 이들에게 특히 반발을 유도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캐슬린이 가족과 집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집은 형편없이 쇠락한 가운데 아빠는 술에 의존하고 주기가 차면 부인과 딸을 마구 때린다. 화자는 이미 아빠를 두려워하고 아빠로서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엄마마저 사고로 세상을 떠나니 설상가상이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여 수녀원 기숙학교에 장학생으로 갈 수 있게 되었지만, 학교의 교육 방침과 운영 방식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가혹할 정도다. 공교롭게 최근에 읽은 소설들에서 영국, 독일, 아일랜드로 국가와 종교는 다르지만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은 학생들에게 매우 비교육적으로 훈육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책에서도 감옥으로 표현하고 감옥처럼 묘사한다.

 

캐슬린과 바바는 외모, 성격, 가정형편 등에서 매우 대조적이다. 비교적 유복한 바바는 캐슬린을 시종일관 무시하고 독설을 퍼붓거나 노골적으로 질투하고 나쁜 행동에 동참하도록 꼬드기는 등 어찌 보면 악역에 가까운 역할이다. 그저 수동적으로 당하는 캐슬린의 태도가 이해 안 될 때도 있지만, 결핵에 걸려 떠나는 바바를 바라보며 캐슬린이 품는 감정 상황은 독자가 쉽게 예단하기 어렵다.

 

내 영혼이 살아 발딱거렸다. 황홀감.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것. 살면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P.102)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축은 캐슬린과 젠틀먼 씨에게 있다. 병든 아내를 둔 노신사에게서 캐슬린은 우정 이상의 것을 발견하고 애정으로 나아가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젠틀먼 씨가 적극적으로 어린 숙녀를 유혹하였다는 비난은 온당치 않다. 두 사람은 그저 감정이 합치되었을 뿐이다. 캐슬린은 젠틀먼 씨에게서 아빠에게서 구할 수 없는 부성애를 기대하였을지 모른다. 부유한 노신사가 베푸는 여유롭고 은근하며 안정된 접대와 에티켓에 마음이 쏠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공간에서 손을 잡거나 입맞춤을 하면서 서로 간에 기쁨을 느낀다. 그들은 관계의 진전을 바라지만 서두르지 않기에 내심으로는 바라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두 사람의 최초이자 마지막의 용기 있는 일탈은 젠틀먼 씨의 전보와 함께 날아가 버린다.

 

젠틀먼 씨와는 늘 그런 식이었다. 만사가 완벽해지는 순간, 그는 완벽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멀어졌다. (P.272)

 

난 벌써 슬퍼졌다. 그 누구도 그를 진정으로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너무 초연했다. (P.287)

 

화자 캐슬린은 솔직하다. 자신과 자신의 처지를 옹호하거나 도색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신이 바라보는 주변 환경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의 시각에 자신의 시골 마을은 쇠락하고 영락한 자취가 역력하다. 수도 더블린이라고 나을까? 물론 젊은 사람을 자극하는 상대적 번영과 활기를 인정하겠지만, 그것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도 캐슬린은 노동을 해야 한다. 화장을 하고 화려한 대도시로 돌아다니는 저녁의 삶은, 점원으로서의 낮을 토대로 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키득거리면서, 낯선 승객들에게 어쩌라고식의 표정을 보이면서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내 생각에 우리가 대도시에 도전적으로 맞서는 들뜬 시골 소녀들의 삶을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P.209-210)

 

어쩌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그때까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던 십 대 소녀를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그들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 그들의 시각으로 가면 아래 뒤틀린 당대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캐슬린을 응원하고 옹호하지만 따끔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토록 사랑했던 엄마의 기일을 자신은 잊었지만, 자신이 그렇게나 미워했던 아빠는 기억했음을 보여주면서. 어쩌면 캐슬린은 젠틀먼 씨를 실체가 아니라 실현될 수 없는 공상의 꿈으로서 사랑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을 던지면서 말이다.

 

내가 참 어리석고, 가장 친한 친구였던 히키뿐 아니라 잭 홀랜드와 마사와 브레넌 아저씨 모두에게 의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의 실제 인물들 모두에게. 젠틀먼 씨는 그저 그림자였지만 내가 열망하는 것은 그 그림자였다. (P.2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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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로제 마리 & 라이너 하겐 지음, 이민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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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미술관의 고야 전시회 얼리버드 티켓을 구입한 후 생각하니 정작 고야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화가 이름은 그래도 들어봤는데, 작품은 <옷을 입은 마하><옷을 벗은 마하> 정도만 떠오를 뿐. 이 책을 뒤적거리니 그나마 <사투르누스>도 본 기억이 있다.

 

예습 차원에서 고야 관련 책을 읽으려고 하니, 확실히 저명한 예술가답게 관련 도서도 제법 출간되어 있는데 이 책이 제일 무난할 것 같다. 신국판보다 조금 더 큰 판형에, 100쪽에 못 미치는 얄팍함이 오히려 독서에 부담이 없다. 고급지에 수록 그림도 선명하다. 본문의 글자 크기가 다소 작고 빽빽한 게 불편할 수도 있다. 이 책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삶을 온전히 추적하는 대신, 화가로서 고야의 작품 세계를 시기별로 크게 일곱 개로 특징지어 각각의 장으로 집중하여 다룬다.

 

세속적으로 성공한 화가로서 고야는 무명 시절의 태피스트리 밑그림과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초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는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단지 밑그림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독자적인 예술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자체로도 의의가 있다. 태피스트리 제작자가 제작에 난색을 보일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꼭두각시> 같은 작품에서는 장식성을 넘어서 상징적 비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후기의 고야가 결코 뜬금없이 나온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초상화가로서 대표작에 화가 자신이 슬며시 등장함도 이색적이다.

 

소위 저항하는 지성으로서 고야는 <로스 카프리초스><전쟁의 참화> 판화 연작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고야는 건강상의 위기를 겪고 청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이후 고야의 주요 걸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문득 작곡가 베토벤이 떠오른다. <로스 카프리초스> 단색 판화에 거칠게 표현되는 환상과 악몽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만연한 인간의 악행과 무지, 종교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미적 아름다움을 지고의 가치로 내세우던 당대 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스페인 지배, 왕정복고 이후 시행된 반동 정치에서 무수한 피해를 당하는 계층은 결국 힘없는 민중들이다. 그들 처지에서는 전쟁과 죽음을 일삼는 지배층은 모두 똑같을 따름이다. <전쟁의 참화> 판화 연작은 전쟁과 이것에서 비롯한 온갖 비인간적 만행에 대한 고발이다.

 

노년의 고야는 귀머거리의 집에서 은거하며, 오로지 자신을 위한 작품활동에 매진하는데, 이것이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른바 검은 그림이다. 자식을 잡아먹는 유명한 <사투르누스>는 물론 <산이시드로 순례여행>, <곤봉 결투>를 보면 구원할 수 없는 절망의 심연에 저절로 뭉크처럼 절규하게 된다.

 

어두운 그림들은 교회에 의한 구원의 약속과 계몽주의에 의한 삶의 조건의 향상 모두에 깊은 회의주의를 입증한다. 이는 단지 회의주의가 아니라 절망이었을 것이며, 공허한 하늘에 존재하는 날아다니는 마녀와 악마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P.76)

 

<옷을 벗은 마하><옷을 입은 마하>에서 마하(원래는 마야로 잘못 알았다)가 모델 여성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완전히 틀렸다. 마하는 하류층의 여성을 일컫는 용어로서 남성형의 마호와 짝을 이룬다. 이들이 어떤 유형의 여성인지는 비제의 오페라 여주인공 카르멘을 떠올리면 충분하다.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당당함과 도발적인 태도, 뜨거운 열정을 지닌 여성. 그래서일까, 옷을 벗은 마하는 관객의 시선 앞에서 나신을 드러내면서도 부끄러움 없이 무표정하게 당당한 포즈를 취한다. 이 책에서는 마르시알리다드라고 표현한다. 참고로 당대 스페인에서는 종교적으로 누드화가 금지되어 종교재판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마하의 자유로움은 인습과 속박에 억눌린 상류층 여성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고, 마하의 옷차림이 패션으로 유행하였다고 한다.

 

마호의 상대인 마하는 자신의 도발적인 매력에서 기쁨을 찾는 격정적인 여인을 뜻했다. 뻔뻔하면서도 재치 있게 답해야 했으며, 오렌지와 밤을 팔거나 귀족 가정의 하녀로 생활하며 돈을 벌었다. 대개는 자기의 마호를 먹이고 입혀야 했으므로 일을 열심히 했다. (P.10)

 

말년의 고야는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로 일종의 망명 생활을 한다. 혼란스러운 스페인에서 안전을 기약할 수 없었던 그는 <보르도의 황소들> 석판화 연작에서 투우를 소재 삼는다. 이미 수년 전 <타우로마키아> 판화 연작을 남긴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태생적으로 스페인 사람임을 그림을 통해 입증한 셈이다.

 

고야는 화가로서는 드물게 인문학자의 관심을 끌었다. 왕실과 귀족의 기호에 영합하는 성공한 화가 이면에 자리 잡은 어둠과 비극, 고통, 절망, 환상을 담은 그의 후기작들을 둘러싼 해석은 분분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가 던진 미적 본질에 대한 의문과 화가의 역할에 대한 성찰은 후배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니, 19세기 전후를 풍미했던 당대의 화가를 넘어서 현대까지도 지속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기준을 수립했다. 또한 인간의 가장 어두운 두려움과 야수적인 충동을 눈으로 보이게 했다. 당시 어떤 화가와도 달리, 고야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넓혔다. 19세기의 낭만주의는 처음으로 이를 감지했고, 20세기의 잔혹한 전쟁은 그의 인간에 대한 시각을 공포스럽게 확인시켰다.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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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의 소녀 쏜살 문고
크리스타 빈슬로 지음, 박광자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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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소녀 마누엘라>이다. <제복의 소녀>라는 표제는 <제복의 처녀>라는 영화명에서 가져왔다. 시나리오 작가가 크리스타 빈슬로다. 이 작품은 사실 연극에서 출발하여 영화화되었고, 작가가 이를 토대로 소설화한 것이다. 순서로만 보자면 소설이 가장 마지막이다. 대중적인 인기는 영화에서 얻었는데, 1931년과 1958년 두 차례에 걸쳐 영화화되었고,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로 불린다.

 

소설로만 보자면 이 작품을 단지 레즈비언 성향으로 치부하기는 곤란하다. 전체 6개 장 가운데 전반부 4개 장은 마누엘라의 탄생부터 아버지의 전출과 퇴직, 큰오빠와 어머니의 죽음을 겪기까지 가족사가 이어진다. 후반부 2개 장에서 마누엘라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기숙 학교에 입학하여 폰 베른부르크 선생을 만나게 된다. 크게 보자면 이 작품은 마누엘라의 비극적인 결말로 나아가는 성장 소설의 성향이 강하다. 작가가 연극 및 영화와 다른 방향으로 소설을 쓴 것은 기존 유명세를 끌었던 연극과 영화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성에서 벗어났기에 조금 더 폭넓은 세계를 그리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작품의 레즈비언 성격을 조금 더 언급하자면, 세상에 의지할 데 없는 마누엘라는 폰 베른부르크 선생에 집착한다. 기숙 학교에 오기 전에 프리츠의 어머니 잉에 부인에게 느꼈던 감정과 흡사하다. 그것은 상실한 어머니에 대한 일종의 대안 또는 대체재로 생각할 수 있다. 마누엘라의 순수하고 강렬한 감정을 의식하는 폰 베른부르크 선생 또한 마누엘라를 특별하게 생각하지만 훌륭한 교육자답게 감정을 자제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선생과 소녀의 가벼운 키스 장면 하나만을 확대해석하여 성애적 분석을 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영화와 소설은 지향점이 다르다.

 

렐라는 두 손을 꽉 잡고 결심을 털어놓으려고 뜨거운 얼굴을 그 손에 묻었다. 선생님의 손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대로 있었다. 폰 베른부르크 선생은 두 손으로 눈물에 젖은 렐라의 얼굴을 들어 올려 몸을 숙여서는 떨리는 그 입에 키스를 했다. (P.210)

 

이 소설은 살펴볼 대목이 여럿 있다. 먼저 기숙 학교의 국가주의적 운영 원리다. 이 학교는 아가씨를 프로이센 장교 부인이 될 여성으로 교육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교장 선생 이하 폰 케스텐 선생에 이르기까지 학교 운영진은 철저하게 국가 방침을 맹종한다. 오로지 엄격한 규율과 수동적 순종만 요구될 뿐 개성 발현은 억누르기에 급급하다. 그렇기에 음주 소동을 일으킨 마누엘라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중대한 규율 위반자로 처벌의 대상으로 간주할 뿐이다. 실은 이러한 국가주의적, 전체주의적 성향은 프로이센 국가의 지도적 속성임을 작가는 교장 선생과 폰 케스텐 선생의 대화를 통해 독자에게 알려준다.

 

생각을 하지 마세요, 선생님. 그냥 따르기만 하세요. 우리 프로이센을 강하게 만든 것은 복종이지, 폭식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교장 선생님, 맞는 말씀이십니다.” (P.227)

 

큰오빠와 엄마의 죽음 이후 마누엘라의 방황을 추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빠 마인하르디스 중령뿐이지만, 그는 오히려 가정을 벗어나 개인적 향락을 추구하기에만 바쁘다. 외로운 마누엘라는 프리츠와 사귀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아버지는 그녀를 기숙 학교에 보낸다. 기숙 학교에 보내는 행위가 어떤지 그는 잘 알고 있고 탐탁지 않지만 그에게는 마누엘라를 적극적으로 보살피려는 의사가 없다. 마누엘라가 곤경에 처해 있는 때에 뜬금없이 보여주는 마인하르디스 중령의 눈부신 남국 해변의 사랑 유희는 강한 대비를 드러낸다.

 

이렇게 보면 마누엘라는 사랑하는 대상을 모두 빼앗기고 소외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큰오빠, 엄마, 프리츠와 잉에 부인. 따라서 마누엘라가 폰 베른부르크 선생에 몰입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선택이기도 하다. 우리도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좋아하는 교사가 가르치는 과목에 더 매진하고 수업 시간에 집중한 기억이 있지 않은가.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모든 것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모든 행동은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 그분을 향한 충실한 봉사였다. 모든 것, 그 어떤 것도 모두 선생님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하루가 종소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그분의 목소리에 따라 움직였다. (P.179)

 

마누엘라의 성적 정체성을 헤아려볼 수 있는 표현을 작가는 자주 남긴다. 분명한 건 마누엘라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제약을 받는 여성의 지위에 답답해하고 마음껏 자유를 발산할 수 있는 남성 지향적 감정을 표출한다. 연극에서 남성 역할을 맡았을 때 크게 기뻐하고 열연을 펼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것을 성적 관점에서 파악할 것인지 아니면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남녀평등 지향으로 볼 것인지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마누엘라는 구원을 청하듯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는 여자가 싫어요. 남자가 되어서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요. 교장 선생님께는 말하시면 안 돼요.” (P.189)

 

음주 사건으로 집단 따돌림의 처벌을 받는 마누엘라가 기대할 바는 오직 폰 베른부르크 선생이다. 그녀야말로 허약한 마누엘라가 삶의 의미를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푸라기였으므로. 폰 베른부르크 선생은 교육자이자 성인이므로 마누엘라처럼 선택할 수 없다. 그녀는 교장 선생의 명령과 지시에 결국 굴복하고 만다. 마누엘라의 최후의 간절한 바람을 끝내 외면하면서.

 

한마디만 해 주세요. 작은 소리로요.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라고. 그러면 진정할 게요. 무엇이든 다 하고, 무엇이든 참아 내고, 복종하고, 착해질게요.” (P.278)

 

우리는 마누엘라를 희생자로, 기숙 학교를 가해자로 섣부르게 재단하기 쉽다. 서두에 재산을 탕진하고 아메리카로 떠나는 카이저마르크 중위를 시작으로 작품 속 모든 인물이 모두 피해자다. 일체의 개성과 자유를 억누르고 국가를 최우선시하는 프로이센 체제의. 이 작품의 대단원은 극적이며 상징적이다. 우리는 학교와 학생, 폰 베른부르크 선생의 앞날이 매우 궁금하다.

 

이 작품은 일찍이 청목사의 그린북스 38, <제복의 처녀>(왕수영 역)로 출간되었다. 작가명을 크리스티나 윈스뢰로 표기한 점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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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 국내 최초 출간! 페르시아와 로마보다 먼저 세계 제국의 시스템을 설계한 최초의 제국 더숲히스토리
야마다 시게오 지음, 박재영 옮김, 이희철 감수 / 더숲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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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국가가 아시리아 제국이다. 이전 시대의 히타이트와 고바빌로니아는 아직 왕국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이집트, 페르시아 일부까지 아우른 아시리아야말로 제국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구약성서에도 등장하는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사악한 민족으로 기술되어 있다. 다른 역사 기록이 없었기에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던 아시리아 제국은 수많은 점토판, 기념비의 발견과 해독으로 단순히 무력만 막강한 국가가 아니었음을 알게 해준다.

 

아시리아는 이러한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군사 조직과 기술, 중앙집권적 관리와 초광역 제국 운영, 기록 문화의 보존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다른 메소포타미아 제국들과 뚜렷하게 차별화되었다. (P.10, 감수의 글)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하류의 수메르 문명을 이어 중류의 고바빌로니아 시기를 거쳐 중상류의 아시리아로 주도권이 점차 이동하였다. 히타이트는 아나톨리아에 근거를 두고 메소포타미아 일부를 점령하였지만 결코 주도적 지배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강력한 맞수 엘람 왕국도 결국은 페르시아 남부 지역이 본거지였다.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에서 뛰어난 점은 방대한 문헌 기록의 존재다. 이를 통해 그들의 역사 대부분과 사회생활마저 파악할 수 있다고 하니, 연대를 감안하면 매우 놀랍다. <아시리아 왕명표> 등으로 왕들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아시리아의 명칭은 도시 아수르에서 유래하였고, 이는 아슈르 신과 연관이 깊다. 아시리아인들에게 아슈르 신은 최고 신으로서 훗날 그들은 수메르의 엔릴 신, 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 신과 동일시한다. 참고로 오늘날 시리아의 이름이 아시리아를 의미한다고 한다.

 

기원전 2000년대부터 멸망한 기원전 8세기까지 1,200년간 오랜 기간 존속하였던 국가로서 그네들 역시 도시 국가에서 왕국, 제국의 시기로 발전과 확장, 쇠퇴와 수축의 단계를 거치면서 나아갔음을 이 책에서는 상세한 기록을 통해 보여준다. 중아시리아의 아슈르 우발리트 1세부터 실질적으로 왕국의 시대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으며, 투쿨티 니누르타 1세 시절에는 히타이트 왕국과 바빌로니아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한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샬마네세르 3세를 이어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부터는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인정받는다. 최전성기는 사르곤 2, 센나케리브, 에사르하돈, 아슈르바니팔 시대이다.

 

후대의 쐐기문자 아카드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로 된 저작물에서도 아시리아는 제국의 원형, 또는 가장 오래된 제국으로 간주되었다. (P.174)

 

아시리아의 역사를 조망할 때 눈에 띄는 점은 치밀한 통치 체제이다. 제국을 여러 행정주로 분할하여 관료들이 통치하도록 하였고, 피정복지 주민을 제국 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켜 반란의 가능성을 줄이고, 개척하도록 하였다. 이스라엘 민족도 이때 많이 끌려갔다고 한다. 한편 훗날 페르시아의 역참제도 아시리아가 선도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단순히 군사 대국, 정복 국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도 주목할 만하다. 아시리아 제국 최후의 번영기를 일구었던 아슈르바니팔은 수도 니네베에 거대한 문헌 수집 작업을 개시하였으니, 문화적으로 세계의 중심 국가를 지향했던 그들의 야망을 짐작할 수 있다.

 

아슈르바니팔이 니네베에서 시행한 문서 집대성은 기존의 모든 도서관 규모를 뛰어넘는 세계 최초의 국립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P.338)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유목국가도 아닌 아시리아가 제국의 수도를 계속 옮겼다는 사실이다. 오랜 기간 민족적 근거지인 아수르에 자리 잡았으나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칼후, 두르샤루킨, 니네베로 이전하였다. 추진 이유야 나름 있겠지만, 짧은 기간의 잦은 수도 변경은 제국의 안정성을 저해할 만한 요인이다.

 

바빌로니아 통치는 그 후의 아시리아 제국에 닥친 가장 복잡하고 심각한 정치적.종교문화적 과제가 되었다. (P.160)

 

아시리아의 영락은 바빌로니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의 전성기에 바빌로니아를 지배하였지만, 완전한 점령보다는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빌론이 갖는 문화적, 종교적 중심지를 존중하였는데, 아시리아의 세력이 위축될 때면 바빌론은 반아시리아 세력의 구심점으로 작용하였다. 에사르하돈과 센나케리브의 죽음은 물론 아시리아 멸망의 직접적 원인은 결국 바빌론의 반란이었다. 이는 아슈르 신과 바빌론의 최고신을 동일시하여 문화와 종교 혼합을 도모한 점과 무관할 수 없다. 훗날 신바빌로니아를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페르시아 제국은 바빌론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탓이다.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전쟁은 바빌로니아, 메디아, 이집트와 같은 대국뿐만 아니라 우라르투, 만나이, 엘람 등 여러 세력이 가세한 대규모 충돌이었다. (P.363)

 

최전성기 이후 아시리아의 급격한 몰락은 이 시기 사료 부족으로 명확한 설명이 어렵다고 한다. 아슈르바니팔 사후 20년 만에 제국이 멸망한 사실은 단순히 왕가와 지배층의 분열과 혼란으로 설득하기 어렵다. 내우외환이 겹쳤다고 해야 하는데, 기회를 틈탄 바빌로니아의 반란과 이에 합세한 엘람, 메디아, 이집트 등 강성한 아시리아 제국의 위세에 눌렸던 주변 국가들이 일제히 동맹을 체결하고 사방에서 아시리아를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은 신바빌로니아에게 넘어가고 다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가 갖게 됨을 역사는 보여준다.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자리 잡은 지정학적 특성으로 소위 중동 지역의 역사에 우리는 대체로 무지하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양사도 아니며, 근현대를 지배한 서양사의 영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동과 서아시아 역사를 제대로 모르기에 우리는 그들을 은연중 무지하고 후진적인 민족과 국가로 오해하는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이 책은 현재 구할 수 있는 아시리아 제국에 관한 유일한 역사서로 우리의 역사 이해를 넓혀줄 수 있는 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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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수십억에 달하는 세상 인구 중에는 영웅호걸보다는 갑남을녀, 장삼이사, 필부필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 역시 제아무리 보통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생명력을 불어넣은 점에서 결코 예사로운 인물이라고 볼 수 없다. 작품의 분량에 따라 한 명에서 대하소설은 수백 명까지 인물이 나오지만, 이들이 모든 세상 사람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면 과언이다. 게다가 등장인물 전체가 모두 주인공은 아니지 않는가.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삶만이 소설의 주인공과 소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이들의 삶과 생각과 감정이 오히려 공감을 일으킨다. 인생의 온갖 신분과 환경과 행동과 사고와 감정을 한두 명의 주인공이 독점한다면 아무리 허구지만 너무 작위적이지만, 다수의 인물이 나눠 갖는다면 자연스럽다. 수많은 범부의 평범한 이야기가 차라리 그럴듯하다.

 

그런 조각들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사람 한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P.392, 작가의 말)

 

하물며 우리네 같은 필부들의 삶도 결코 간단하지 않다. 자신의 구구절절한 삶을 글로 풀어놓으면 대하소설이나 대하드라마 못지않을 거라고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세상 사람 모두의 삶은 자체로 타인의 삶과 전혀 동일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정세랑 작가의 이 작품은 독특하다. 오십 명, 작가의 계산 실수로 오십일 명의 등장인물은 자기 이름의 장에서 각자가 짧지만 당당한 주인공이다. 작가는 각기 몇 쪽이라는 제한된 분량 속에서 인물의 생을 전반적으로 훑기도 하지만, 대개는 가장 임팩트 있는 때와 사건을 다룬다.

 

별개의 작품이 아닌 이상 각 장은 어떤 식으로든 연계성을 지녀야 한다. 많은 인물이 드나들 수 있고, 각자가 저마다 사연을 지닐 수 있어야 하며, 성별이나 계층에서 편중되지 않아야 하는 곳으로 작가는 종합병원을 골랐다. 의사, 간호사, 기사, 행정직 등의 원내 구성원과 병원 이웃. 환자, 보호자, 병문안 또는 업무상으로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친지들. 개개의 인물은 남자나 여자, 아이, 어른, 노인으로 나뉠 수 있다. 어른이면 결혼 여부, 결혼했으면 자녀 여부, 나아가 손주 여부를 물을 수 있다. 학력, 건강, 취미, 국적 등 다양한 조합을 고려하면 경우의 수는 수천수만 가지로 확장된다.

 

무심코 한두 장을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앞에 나왔던 인명인데 또는 어쩐지 비슷한 배경과 사건을 다루는 데 하는 느낌이 든다. 이후로는 책장을 앞뒤로 넘기며 그가 누구였던가 하는 숨은그림찾기를 시작한다. 그만큼 이 작품은 사람 간의 관계를 매칭시키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하다. 나아가 작중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결코 나와는 무관하지 않으며,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이 제각기 하나의 소우주를 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작가는 왜 이러한 시도를 하였을까 궁금하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장편소설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사연을 갖고 있는데. 아마도 오십일 편의 장편소설을 작가가 쓰는 게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인식이 있었으리라. 발자크의 인간 희극,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조차도 모든 인간 현상을 반영하였다고 할 수 없으므로.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말은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과 동의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지만, 전후좌우를 둘러보면 타인도 모두 또 다른 주인공임을 보게 된다. 내 삶의 특수성을 주장할 수 있지만, 그것의 상대적 우월성을 내세우기 어렵다. 우리는 보다 겸손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오십일 명의 인물 중에서 독자가 누구를 선호하고 더 공감하게 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 있다. 나로서는 장유라, 배윤나, 홍우섭, 이설아, 한규익, 임찬복, 김시철, 이동열, 방승화, 소현재가 그러하다. 놓인 처지와 사고, 감정과 경험에서 가장 유사한 인물이 누구인가에 따라 독자의 마음이 끌리는 인물은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이들 모두가 전혀 감흥이 없거나 무관하다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공감과는 별도로 각 인물은 제각기 흥미롭다. 브리타 훈겐과 스티브 코티앙의 이야기는 황당하지만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송수정과 장유라가 겪는 슬픔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조희락과 지현, 최대환과 남세훈, 양혜련과 하계범은 내게 미지의 세계다. 이수경과 지연지는 우리네와 다른 인종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거나 실행의 엄두조차 내지 못한 선택을 통한 다른 차원의 삶은 살아간다. 개중에는 딱한 처지에 동정심을 품게 되거나 응원하고 싶은 인물도 있지만, 우리도 결국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확실히 정세랑답다. 대다수의 등장인물이 한날한시, 한곳에 모이게 하는 설정이. 현실적 가능성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당당함이 작가 특유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작가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인물 모두에게 가급적 춤을 추도록 하려고 했는데 실패하였다는 점과 반복하여 등장하는 도마뱀 캐릭터에 관한 언급도 일종의 이스터에그처럼 흥미 유발 장치다.

 

여태껏 이런 유형의 소설은 처음 접한다. 수많은 조각이 모여 커다란 모자이크가 완성되는 느낌이랄까. 하나의 그림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불필요한 조각은 없는 것처럼. 우리네 삶도 결국 다층 다종의 조각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오십일 명의 인물 중에 분명히 나도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이, 우리네 삶으로 인식하고 다가올 때 비로소 삶의 온전한 얼개를 그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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