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들에게 주는 지침 평사리 클래식 2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평사리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걸리버 여행기>를 포함한 풍자문학의 대가 스위프트가 만년에 수년에 걸쳐 쓴 글이다. 최종적으로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가난했던 작가는 먼 친척뻘인 귀족의 집에서 식객 겸 비서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눈칫밥 먹는 처지에서 목격했던 하인들의 행태, 훗날 그가 고용했던 하인들의 경험에서 이런 예리한 탐구가 가능했을 것이다.

 

글은 모든 하인들에게 주는 일반적인 지침과 개별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들로 구성되었는데, 우선 18세기 하인들의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한지 놀랐다. 집사, 요리사, 정복 착용 하인, 마차꾼, 말구종, 재산관리 집사, 문지기, 침실 담당 하녀, 몸종 하녀, 청소 담당 하녀, 버터 제조 담당 하녀, 보모, 유모, 세탁부, 하녀장, 여자 가정교사. 모든 귀족계층이나 중산층이 이들을 다 고용하지는 못하였을 테고, 부의 수준에 따라 전부 또는 일부만을 채용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대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지닌 작가이니만치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이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안내가 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대단히 해학적이고 우회적인 표현으로 시종일관하는 그의 지침은 한마디로 최대한 주인의 등골을 빼먹고 철저히 이기적으로 되라는 것이다. ‘모든 하인들에게 주는 일반적인 지침의 몇 대목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땐 뻔뻔하게 적반하장으로 나가라. 그리고 마치 피해자인 양 행동하라. (P.9)

 

당신에게 특별히 할당된 고유 업무 외에는 그 어떤 업무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라. (P.14)

 

이상하지 않은가? 현대 우리네들의 조언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목소리 큰 게 임자라며, 자기 잘못을 무조건 부인하는 풍조와 유사하다. 내 업무와 타인의 업무는 칼같이 구분하여 절대로 맡고자 하지 않는 게 요즘 세태가 아닌가. 이처럼 18세기라는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은 여전하다는 것을 이 글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하인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이기적인 하인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게 현명하지 못한 주인이다. 고용주로서 피고용인인 하인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홀대하며, 그들이 눈치를 보며 행동을 정할 수 있도록 모범적인 언행을 갖추지 못한 주인들. 결국 하인은 주인의 눈에 들도록 애쓰기 마련이기에 사소한 말,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이에 따라 반응한다.

 

상전의 본을 따라 누구보다도 이런 자들은 더 홀대하는 것이 당신 같은 집사나 식탁 서비스를 담당하는 정복 착용 하인의 임무다. (P.34, 집사)

 

마님께서 도박을 좋아하신다면 당신의 행운은 영원히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적절한 도박은 당신에게 일주일에 10실링 정도의 부수입을 가져다 줄 테니까. 그런 집이라면 나는 가정목사나 재산관리인이 되는 것보다도 오히려 집사가 되는 편을 택하겠다. (P.53, 집사)

 

몸종 하녀 편에 이르러서는 주인의 성적 유혹을 조심하고 사리를 잘 살펴서 선택적으로 대응하라고 조언한다. 당시 하녀들을 대상으로 유사한 사례가 빈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마님의 연애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유독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지침은 하인들 간의 단결과 협력이다. 외란 중에는 내홍은 덮어두는 것처럼, 공공의 적인 주인으로부터 이익을 최대한 쟁취하고 수호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단합하라는 의미다.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당신들끼리는 서로 싸워도 된다. 내 말은, 당신들에게는 공공의 적인 주인님과 마님이 있으며 공통으로 수호해야 할 공공의 목적이 있다는 걸 명심하란 소리다. (P.20, 모든 하인들에게 주는 일반적인 지침)

 

모두의 공익을 위하여 그 내용을 엿들어라. 그리고 모든 하인들이 일치단결하여, 하인 사회를 해칠 수 있는 개혁조치들을 막기 위해 적절한 조치들을 취하라. (P.100, 정복 착용 하인)

 

이 작품은 여러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표제 그대로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인들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처신 요령의 집대성이라는. 역으로 주인들에게 주는 지침으로 볼 수 있다. 하인들의 다양하고 불합리한 행동의 현상과 원인을 간파하여 이들을 적절히 부리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이 글을 실용적인 지침서로 보지 않을 수 있다. 스위프트가 젊은 시절이 아닌 최만년에 이르러 쓴 글에서 굳이 실용성을 염두에 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결국 그의 여타 작품처럼 이 또한 인간과 사회를 향한 우스꽝스러운 풍자가 본령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보면 18세기의 당대와 21세기의 현대에도 근본적인 인간 본성은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틸다 노벨라33 세계 중편소설 전집 2
메리 셸리 지음, 정미현 옮김 / 다빈치 노벨라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메리 셸리가 이 작품을 집필한 해는 1820년이고, 아버지 고드윈에게 보낸 건 1821년이니 그의 나이 23, 24세 무렵이다. 아버지는 출간을 거부했고, 백 년 넘게 묻혀 있다가 1959년이 되어서야 출간이 이루어졌다.

 

마틸다가 남긴 수기 형식으로 작성된 작품의 서사는 외형상 단순하다. 아내를 헌신적으로 사랑한 마틸다의 아버지는 출산 직후 사망한 아내를 못 잊어 가출한다. 마틸다는 외톨이가 되어 냉담한 고모와 시골에서 16세가 될 때까지 고독하고 적막하게 자란다. 다시 돌아온 아버지와 재회의 기쁨을 한껏 누리는 마틸다, 딸에게서 죽은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고 솟구치는 감정에 번민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달라진 태도에 원인을 알고자 다그치는 마틸다와 그가 듣게 된 진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아버지의 가출과 이어진 자살. 이중의 정신적 충격으로 오지에서 홀로 은둔의 삶을 꾸려가다 결국 병으로 죽게 되는 마틸다.

 

메리는 무슨 까닭으로 이런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작중에서 마틸다의 아버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마틸다 또한 사회적, 윤리적 금기를 저촉한 게 두려워 고립을 선택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친구 우드빌의 따스한 조언도 그녀를 절망에서 끌어내는데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잉글랜드의 사회 윤리적 기준으로서는 그들의 죽음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메리가 단지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사랑에 대한 도덕적 단죄를 위해 이 작품을, 그것도 자신의 처지와 흡사한 배경의,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험을 무릅쓴다면, 혹시 메리와 고드윈 사이의 감정이, 마틸다와 그의 아버지와 동일 선상에 놓여있는 게 아니었을까. 다만 전자는 후자와 달리 이성적 틀을 허물지 않고 마틸다의 아버지가 원하였듯이 시간이 해결해 준 지나간 일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작품 외면과 내면의 이야기는 전혀 상반된다.

 

그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고 단조롭던 모습에서 기쁨과 환희로 가득한 눈부신 풍경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내가 느끼는 행복은 내가 장담했던 기대치보다 훨씬 컸다. (P.32)

 

딸이 아버지에게 끌리는 감정을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할 때, 대개의 아버지는 딸에게서 제2의 아내를 찾고자 한다. 너무나 사랑하던 아내가 갑자기 죽었고, 훗날 거의 성인에 다다른 딸에게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할 때 격렬한 감수성을 지닌 마틸다의 아버지는 딸을 이성으로서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성을 통해 거부하려는 내적인 고뇌와 번민과 투쟁이 벌어진다. 마틸다는 아버지와 재회하기 전에는 철저한 고독자의 처지였다. 이제 세상의 모든 사랑을 한꺼번에 쏟아부을 수 있는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깊이와 강도는 독자가 섣불리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다. 교육받고 똑똑한 마틸다지만, 자신의 추궁으로 아버지를 상실하자 죄책감과 한편으로는 되돌릴 길 없는 그리움에 자신을 가두고 만다.

 

내 심장은 죽음의 상처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사는 수밖에 없었다. 겉보기로는 평온한 가운데에도 절망과 우울이 찾아올 때가 많았다. 무엇으로도 쫓아버리거나 극복할 수 없는 어둠이 드리웠다. 삶이 혐오스러웠다. 아름다운 것에 무심해졌다. (P.107)

 

마틸다는 끝내 죽음을 소망하는 단계에 이른다. 우드빌의 부드러운 위로와 친절한 격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음에서 오히려 기쁨과 희망을 찾고자 한다. 그것은 이미 죽은 아버지와 저승에서 재회하여 못다 한 사랑을 완성하려는 바람이 아니겠는가. 마틸다의 글 속에서 죽은 어머니와 만나고 싶다는 문장은 찾을 수 없다.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세상 전부였던 것이다.

 

수의가 나의 웨딩드레스 아니겠는가. 그것만이 아버지와 내가 영원히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어 다시는 헤어지지 않게 될 때 우리를 결합시켜줄 것이다. (P.160)

 

이 중편소설을 읽고 나면 고드윈이 출간을 거부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 마틸다와 작가 메리는 너무나 비슷하다. 작중 화자인 마틸다처럼 작가 메리도 탄생 직후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리고 아버지 슬하에서 홀로 자랐다. 게다가 소설은 아버지가 딸을 사랑한다는 비도덕적인 근친상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독자는 소설에서 작가의 삶을 비교하고 유추하기 마련이다. 고드윈으로서는 그런 불쾌한 시선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마틸다의 짙은 회한과 상념 속에 드리워진 어둡고 고통스러움이 독서를 어렵게 한다.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한 번에 쭉쭉 읽어 나가지 못하고 조금 읽다가 책장을 덮고 한참 후에 다시금 책을 펴 들기를 반복하였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젊은 여성작가가 <프랑켄슈타인>과 더불어 이러한 소설을 썼다는 게 자못 대단함과 동시에 어쩌면 그 나이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지극히 도전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발의 에크베르트 - 독일대표단편문학선 세계단편문학선집 1
루이제 린저 외 지음, 이관우 옮김 / 써네스트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록작품>

노벨레/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칠레의 지진/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금발의 에크베르트/ 루트비히 티크

착한 카스페를과 어여쁜 안네를의 이야기/ 클레멘스 브렌타노

임멘 호/테오도르 슈토름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르투어 슈니츨러

선로지기 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변신 / 프란츠 카프카

/ 볼프강 보르헤르트

붉은 고양이 / 루이제 린저

 

독일 근현대의 대표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대학생 교재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시대별 문학사조별로 대표적인 명작을 선정하였다고 한다. 대충 수록 작품 표제나 훑어봐도 명작들이 나열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편의 작품 중에서 <칠레의 지진><임멘 호>는 앞서 읽은 적이 있어 반가웠다. 클라이스트는 섣부른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자못 비정할 정도로 직진하는 그의 문장은 인간과 종교, 나아가 인간성의 아이러니 자체에 깊은 질문을 던진다. 슈토름의 단편은 청소년 작품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지나가 버린 청춘의 아련한 추억은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이다. 헤엄쳐도 호수 중심의 수련에 다가갈 수 없듯이 우리는 과거를 추억해야지 얽매여서는 안 된다. 라인하르트도, 엘리자베트도 모두 알고 있듯이 말이다.

 

<노벨레>는 괴테의 최후기작으로 표제 자체가 노벨레. 중세의 옛날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배경과 구성인데, 영주 부인의 평화로운 자연 예찬은 마을의 화재로 깨어지고, 예기치 않은 호랑이와 사자의 탈출로 일순간 분위기는 급변한다. 서커스단 아이와 아버지의 노래와 피리 연주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는데 사자의 순종을 비현실로 절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대에서 음악은 자연의 질서를 반영한 예술로서 우주의 본질에 가깝기에 사자가 공명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자가 패배자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힘이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자는 패배자가 아닌 길들여진 자, 스스로의 평화로운 의지에 모든 것을 내맡긴 자처럼 보였다. (P.37)

 

<금발의 에크베르트> 역시 중세풍의 민담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인데, 진주나 보석이 들어 있는 알을 낳는 새의 존재가 한층 설화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금발의 에크베르트라고 해서 여주인공으로 생각하였는데, 그가 기사임을 알게 되었고, 내용은 기사 아내 베르타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전개된다. 친구 발터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후 부부는 자신들의 비밀이 드러날까 두려움에 빠진다. 베르타가 새를 죽인 행동, 에크베르트가 발터에게 총알을 날리고 후고를 의심하게 된 행동 모두 일종의 원죄와 선택의 잘못으로 귀결된다. 베르타가 영혼 속 싸움에서 유혹을 극복하였다면 결말은 더 행복한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것은 제 영혼 속의 기이한 싸움이었으며, 제 마음속에 있는 두 개의 적대적인 정신의 싸움과 같은 것이었지요. 한 순간에는 평온한 고요함이 무척 멋지게 여겨지다가 다시 온갖 놀랄 만한 다채로움이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념이 저를 매혹시켰지요. (P.68)

 

<착한 카스페를과 어여쁜 안네를의 이야기>도 또한 중세 배경의 민담이자 동화에 가깝다. 중편에 가까운 분량에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 구성을 지녀서 작가가 치밀하게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낭만주의 작품답게 두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데,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어는 명예다. 착한 카스페를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까닭은 인륜과 윤리의 충돌에서 비롯됨이다. 어여쁜 안네를의 죽음은 처녀로서 자기 아이를 죽인 죄의 대가인데, 귀족의 유혹에 빠져 명예를 놓친 까닭이다. 손자와 대녀의 명예를 되살리고 헌신하는 노파와 그 이야기를 듣고 사방으로 애쓰는 화자, 비록 안네를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에게 명예로운 무덤을 허락받는 데 성공하였다. 얽힌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명예 회복에 성공하였으니 비극적이지만 비극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순서를 바꿔 <><붉은 고양이>를 먼저 보겠다. 둘 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를 배경으로, 물자 부족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당대 독일 사회를 그리고 있다. 전자는 콩트에 해당하는 매우 짧은 작품인데, 배급된 빵의 양이 적어 배고픔에 한밤중 몰래 빵을 먹는 늙은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이 애절하다. 후자는 굶주림에 여위어가는 가족과 포동포동하게 살이 찌는 고양이의 대조, 이에 분노하는 화자의 고양이 학대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부족한 음식이나마 고양이에게 나누어주고픈 가족들의 마음도, 그런 가족을 보면서 화가 나고 고양이에게 미움과 증오를 품게 되는 화자의 마음 모두 어쩔 수 없다. 이는 시시비비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생과 사의 생존의 사안이므로.

 

나는 고양이에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내 동생들은 굶주리는데, 너는 살이 찐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그런 모습을 더 이상 가만히 볼 수 없어.” (P.299)

 

20세기 전반기의 작가와 작품 세 편이 하이라이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선로지기 틸>, <변신>, 각각 인상주의, 자연주의, 표현주의 사조에 해당한다고 옮긴이는 설명한다. 슈니츨러는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외면과 행동이 아니라, 내면과 무의식에 중점을 두는 작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보면, 남자는 유부녀와 불륜의 내연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은 폭풍우 치는 저녁에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도시 외곽으로 마차를 몰아 둘 만의 호젓한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마차 전복으로 남자는 죽고, 여자는 본능적으로 도망친다. 자신의 정체가 대중에게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게 그녀에게 가장 중요하다. 그녀를 비정하다고 욕하지 말자. 누구나 같은 순간에는 동일한 무조건적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므로. 위험의 순간에 인간은 철저히 개인주의자 나아가 이기주의자가 된다. 그녀가 마차 주변에 남아 서성거린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죽은 남자가 되살아나지 않을 텐데, 그녀는 가족, 명예, 경제적 안정 등 모든 것을 잃게 될 뿐이다. 여기서 입에 발린 사랑의 가치는 현저히 위축되고 만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녀는 마주보이는 벽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는데, 그것은 잔인하게 미소 짓고 있으며,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 본연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고 전율한다. (P.186)

 

<선로지기 틸>은 잔인한 소설이다. 자연주의 사조 자체가 지향하는 인생의 비극적 단면을 철저하게 헤집고 있다. 남들에게 이상하게 여겨진 틸과 첫 번째 부인의 관계가 정신적, 영혼의 측면에서 틸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음을 독자는 그녀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알게 된다. 틸의 서두른 재혼은 전적으로 아들 토비아스를 위한 것인데, 두 번째 부인의 세속적, 물질적 속성은 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꾹 참고 외면하는 틸이 안타까운 동시에 계모에게 학대받는 아들의 모습을 목격하는 틸의 비통함은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진 절망감마저 자아낸다. 틸에게 결별을 고하는 첫 번째 부인의 환영, 그리고 아들의 철길 사고로 인한 사망으로 그는 생존의 이유를 상실한다.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틸이 못된 사람이 아님을 이미 독자는 알고 있다. 두 번째 부인이 악독하지만 일방적으로 매도 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첫 번째 부인의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 부인과 재혼, 계모와 전처의 자식 등 온갖 비극적 요소가 충분히 한데 모였다. 비극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다만 그 정도만이 궁금하였을 뿐.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자 자신이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있는 것을 알았다. (P.227)

 

문학사상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인 시작 문장의 대표격이 아닐까. 카프카의 <변신>이다. 오늘날은 워낙 공상과 환상 문학이 유행하고 있기에 이 정도 설정은 평범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시간을 거슬러 백 년 전의 시도다. 카프카는 파격적 개시에 이어 아무렇지 않게 벌레가 된 잠자의 사고와 행동을 풀어나간다. 몸은 서서히 벌레로 퇴화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인간인 잠자. 그는 가족의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깝고 부끄럽게 여긴다. 가족들은 타인에게 그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긴다. 그를 드러내봤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하기에. 생계를 위해 하숙을 하고, 여동생은 물론 은퇴한 아버지마저 직업전선에 뛰어들지만 벌레 잠자의 존재는 그들에게 점점 무거운 짐으로 자리한다. 잠자에게 서서히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으로 되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특히 그나마 친절했던 여동생의. 여기서 오빠는 괴물로 지위가 완전히 전락한다.

 

엄마 아빠!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두 분은 아마 절 모르시겠지만 저는 잘 알아요. 저는 이 괴물 앞에서 오빠의 이름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말씀드리는데, 우리는 저것을 없애버려야만 해요. 우리는 저것을 돌보고 참고 견뎌내는 등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해왔다고 믿어요. 그러니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할 거예요.” (P.279)

 

독자는 비난할 수 없다. 잠자도 자신의 소멸이 필요불가결함을 인정한다. 누구를 위해? 자신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굶주림과 쇠약함으로 인해 벌레 잠자는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슬퍼해야 할까? 아니다. 마치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막힌 하수도가 뻥 뚫린 듯이 가족은 홀가분함을 느낀다. 새로운 삶의 전망을 꿈꾼다.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 작품이 실존주의의 선구로 일컬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한켠에 벌레와도 같은 구석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것을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기대하지 못하기에 철저하게 숨기려고 애쓴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건 지극히 피상적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이에 있어서도. 작가는 이처럼 무거운 진실을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독자에게 툭 던져놓는다. 마치 알아서 판단하라는 듯이.

 

전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딸이 가장 먼저 일어나 싱싱한 젊은 몸을 쭉 폈는데, 그 모습은 부부에게 그들의 새로운 꿈과 멋진 계획이 실현된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듯했다. (P.2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생의 땅
존 뮤어 지음, 김수진 옮김 / 디자인이음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뮤어는 미국에서 국립공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노력 덕분에 요세미티, 옐로스톤 등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의 자연 에세이 10편을 수록하고 있다. 20세기 전후에 쓴 글이지만 여전히 신선함과 생동감이 넘친다. 그는 주로 미국 서부 지역에서 활동하였기에 이 책의 지역적 배경도 캘리포니아, 알래스카, 오리건, 워싱턴이 중심이 되며 동쪽으로는 옐로스톤과 유타주 정도까지다.

 

그의 글을 읽을 때 미리 유념할 점이 있는데, 일단 이 당시는 관광과 개발 등 인간에 의한 파괴 행위가 제법 있지만 현대처럼 대대적으로 본격화하기 이전이다. 뮤어는 문명이 거의 개입되지 않은 야생 상태의 자연과 동식물을 경험하였다. 알래스카와 요세미티 등과 관련해서 지구온난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뮤어가 경이롭게 발견하고 찬미하고 감동적으로 기술한 만년설과 빙하의 상당수는 사라지거나 멀찌감치 내륙으로 후퇴하였다. <글레이셔만 발견 이야기><알래스카 여행>의 여정을 구글 지도로 비교해 보면 그 역력함에 아련함을 느끼게 된다.

 

만을 둘러싸고 서 있는 산기슭과 다섯 개 거대 빙하의 웅장한 전면도 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이 있는 빙하는 바로 내 발아래에 있었다. 내가 글레이셔만 전체를 조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얼음과 눈과 새로 만들어진 바위로 채워진 고독한 풍경. 그 어둠과 적막과 신비. (P.17, <글레이셔만 발견 이야기>)

 

다섯 개의 거대 빙하가 한 곳에 몰려드는 글레이셔만을 실제로 조망한다면 압도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 같다. 저자의 이름을 딴 뮤어 빙하가 가장 거대하다는데, 강이 아니라 호수의 느낌을 주는 빙하라니. 그조차도 옛날에는 만 전체가 하나의 거대 빙하였다니 사뭇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웅장함. 빙하라면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 이상의 그야말로 극지방에 가야 목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시애틀 지역을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해안선을 따라 글레이셔만 국립공원까지 올라가는 코스를 꼭 체험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압도적인 자연풍광에 우선 매혹된다. 하지만 경치는 계속 보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이때 동식물 등의 다채로운 식생이 뒤따른다면 금상첨화다. 요세미티의 곰, 시에라사슴, 더글러스청설모, 줄무늬다람쥐, 마멋. 오리건의 더글러스전나무, 고귀한 소나무 피너스 램버티아나 소개를 보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이들 지역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주요 동물은 곰과 방울뱀인데, 인간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위험 동물이다. 하지만 뮤어는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며,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과장되었으며 서로 간 존중하면 그다지 위험 요소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뮤어의 글을 읽다 보면 때로는 여행 에세이 또는 가이드북의 인상을 받는데, 실제로도 그런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문장도 간혹 있다. 국립공원은 보호와 관광이라는 이중적 목적을 지닐 수밖에 없다. 자연보호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지역경제라든가 산업적 측면도 외면하기에 곤란하기에 적절한 관리 아래 이루어지는 여행 산업 발전을 위해 그가 에세이로 소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알래스카 여행>,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전형적이며, <요세미티의 동물들><오리건의 숲과 동식물>도 다분히 목적성을 띠고 있다. 뮤어는 인간을 배제한 자연보호를 주창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중심의 자연관도 배척한다. <야생 양모>에 피력하였듯이 인간의 효용 관점에서 자연과 야생을 가치 판단하면 왜곡과 편향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현재의 문명이 가르치는 신조를 보면 세상을 특별히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생각보다 문화와 야생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극복하기 힘든 장애도 없는 것 같다. (P.272-273, <야생 양모>)

 

자연 에세이에 인간적 요소가 추가되면 더욱 빛나게 된다. 저자가 <스무고개 골짜기>에서 자연의 세례를 받은 경험”(P.103)이라든가 리터산 등반 시 암벽에서 운명이 다할 것처럼 꼼짝 못 한 위험담(<가까이에서 바라본 시에라네바다 산맥>), 곰 및 방울뱀과 대치한 이야기 등은 재미와 흥미를 배가한다. ‘풀의 남자데이비드 더글라스 에피소드(<오리건의 숲과 동식물>)도 놓칠 수 없다. 파괴와 약탈의 시기에 그는 존 뮤어와 함께 아메리카 자체를 사랑한 사람이다.

 

현대의 문명인에게 자연과 야생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여가와 휴식, 모험과 체험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문명이 심화할수록 갖게 되는 파편화와 소외감을 치유하는데 자연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이 간섭하고 지배하지 않는 자연은 우주의 본원적 질서를 품고 있어서다. 뮤어는 이 점을 강조하고 역설한다. 국립공원 지정은 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흙과 나무, 바위와 물, 공기와 햇살이라는 형상 안에는 본질적인 영적 세계가 감추어져 있다. 그러니 본질적이라 불리는 것들을 진정 본질적인 영적 세계로 이렇듯 일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곳이 바로 천국이며 천사들이 머무는 곳임을 깨달으라고 말이다. (P.251, <옐로스톤 국립공원>)

 

이 책의 최초 정가 책정 근거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좋은 책을 독자에게 멀찌감치 떨어뜨리는 최고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반면 재책정된 가격은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 지나친 양극단에서 적정성을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물학자의 노트 - 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신혜우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이 다른 식물의 세계책들과 차이 나는 지점은 무엇보다 그림에 있다. 대개 글과 사진으로 구성되기 마련인데, 저자는 글과 그림으로 구성하며 해당 그림은 모두 저자가 직접 그렸다고 한다. 이건 저자가 식물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여 가능하다. 그림이라고 해서 간단한 차원이 아니라 식물도감 수준의 정밀한, 그리고 과학적인 도해 작업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조형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보다 식물의 입장에서 지구에 생존하는 형태, 생태, 진화를 그림에 담습니다. 과학적인 훈련을 통해 식물에 대한 사랑을 조명한 것이 그림이지요. (P.8, 프롤로그)

 

예쁘고 세밀하게 그려진 식물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문득 그림이 더 컸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176면과 177면 사이 펼친 양면 가득 실린 녹나무 그림 같을 수는 없더라도 한 면 가득 커다랗게 그림으로 채웠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건 순전히 개인적 욕심이다. 저자는 식물학자로서 대중이 잘 알지 못하는 식물의 다양한 생태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한층 클 것이기에 글도 놓칠 수 없을 테니.

 

식물에 대해 거의 무지에 가까우므로 소개된 식물 이야기는 생소하면서도 신기하다. 그나마 이름이라도 알고 있어 친숙하다고 착각했던 식물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생경한 면모가 있다는 점은 살짝 놀랄 정도다. 사람은 본성상 동물에 끌린다. 육식에 반대하는 채식주의자는 많지만, 식물은 마구 꺾고 자르고 뽑고 베도 되는 대상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좀처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에게 식물은 일상생활에서는 사물 또는 도구이며, 자연 속에서는 자원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저자는 식물이 생장과 번식을 위해 기울이는 엄청난 노력을, 한치라도 목적에 유리하도록 치열하게 탐색하고 적응하는 모습을 기술한다. 식물이라고 흔히 통칭하지만, 눈에 겨우 보이는 꽃가루와 작은 식물에서 거대한 나무에 이르기까지, 열대에서 극지방, 땅속과 지상에 걸쳐 생존하는 식물의 폭은 광대하다. 광합성을 하지 않는 기생식물과 식충식물처럼 동물성에 가까운 유형도 생존 가능성을 증가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하물며 식물이 품은 맹독에 이르러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제한된 분량에 다양한 식물을 소개하고, 다양한 식물의 면모를 기술하려다 보니 보다 깊숙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한 점은 이 책의 태생적 한계다. 그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부족한 점과 마찬가지 연유라고 짐작한다. 저자는 단순히 식물의 생태를 독자에게 알리려는 목적보다는 이를 통해 식물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도록 애쓰고 있다. 그래야 식물이라는 생명체를 무심코 가볍게 취급하는 관행을 줄일 수 있을 테니. 나아가 식물의 생태에서 지혜와 교훈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 각 장의 매 편 말미에서 저자는 해당 식물들에서 얻을 수 있는 이러저러한 지혜를 우리네 삶에도 유추하고 적용하기를 요청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이.

 

식물은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시간에 꽃을 피우고, 삶의 다음 고리로 연결해갑니다. 사람도 저마다 꽃을 피우는 시간이 다를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찾아올 수도, 어떤 사람은 늦게 찾아올 수도 있겠죠. 중요한 건 일찍 꽃을 피우는 것보다 나에게 맞는 시간에 꽃을 피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아닐까요? (P.39, 이제는 꽃을 피울 시간)

 

몇몇 재밌고 신기한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현대에도 잘 살아남은 원시식물인 고사리, 미래의 사료와 환경 보전의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개구리밥, 솔방울 가습기의 놀라운 원리, 붉은색을 많이 띠는 가을 열매의 이유 등은 신기하다. 국화과 등에 속하는 식물에서 보이는 로제트 잎, 생태적 특성과 환경 조건 등을 고려해 성을 선택하는 식물, 국화꽃 한 송이가 사실은 작은 꽃다발인 두상화서라는 사실, 식물의 이타심 등등. 특히 식물이 동물과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환경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한 루트-브레인 가설과 우드 와이드 웹. 게다가 주변에 흔히 보던 은행나무, 소철, 메타세쿼이아가 자연 상태에서는 멸종위기 종이라니 놀랍다. 수국과 수국백당, 장미는 관상용으로 인간이 계속 개조하여 자연번식이 불가능한 품종이라니 씁쓸할 따름이다.

 

지구에서 오랫동안 진화해오며 살아온 종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주된 이유는 기후변화나 자연선택이 아닙니다. 직간접적인 인간의 활동이 가장 큰 원인이죠. (P.257)

 

인간이 살다 보면 많은 식물과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어떤 식물은 유용하여 우대받고 다른 식물은 무시되고 멸종되는 사례를 완전히 막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연과 생물을 이용 수단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동반자라고 관점을 바꾼다면 이 책에 실린 식물은 물론 인간 자체의 삶도 한층 풍요로워질 것이다.

 

앞서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흥미롭게 읽었지만, 식물 이야기의 비중이 좀 더 높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게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이 좀 더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므로. 확실히 식물학의 더욱 깊고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학술서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저자는 일반 독자에 대한 배려와 교감의 끈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전문 서적류의 건조하고 딱딱함보다는 식물학과 대중의 소통에 무게중심을 두려고 하는 저자의 의도가 나타난다. 그 결과가 <이웃집 식물상담소>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