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류재화 옮김 / 아모르문디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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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프랑스의 역사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문학 평론가이다. ‘알라딘’에서 검색하면 제법 여러 권의 책이 출판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프란시스코 고야에 관한 여타 미술 분야의 도서와는 궤를 달리한다. 그는 고야를 화가의 차원이 아니라 사상가로 인식하고 그의 사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어떤 방향으로 발전했는지를 탐색한다.

 

고야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괴테나 50년 후 등장한 도스토옙스키에게도 뒤지지 않는 심오한 사상가였다. (P.33, ‘고야, 사상가’)

 

고야가 살던 시대를 살펴봐야 그의 그림과 이 책에서 보고자 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고야는 괴테, 베토벤과 동시대 인물이었고,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기를 온몸으로 관통하였다. 평민의 신분에서 출발하여 왕실 수석화가로 출세하였지만, 계몽주의 성향을 지닌 개혁 세력과도 끈끈한 친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미술 애호가는 고야의 회화 작품, 특히 거대하고 화려한 프레스코화, 태피스트리 밑그림, 초상화를 일반적으로 선호한다. 말년의 ‘검은 그림’도 그 충격적 주제와 색감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저자는 ‘검은 그림’을 제외한 일반적 회화 작품은 거의 거론하지 않고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고야가 예술가이자 사상가로서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지 않은 그림이라고 판단해서다. 그것은 생활인으로서 고야가 생계와 출세를 위해 외부의 주문에 응하여 그린 상품일 따름이다. 물론 그것들 가운데서도 다른 화가와는 구분되는 고야만의 독자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유명한 왕실 가족 초상화를 고야처럼 그릴 수 있는 화가가 누가 또 있겠는가.

 

저자는 고야의 삶과 예술세계에서 세 번의 격변이 찾아왔다고 기술한다. 첫 번째는 청각 장애의 발발, 두 번째는 알바 공작부인과의 실연, 세 번째는 나폴레옹의 침공과 스페인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풍파의 시대 상황.

 

병과 새로운 장애로 인해 이제 주문받은 그림이 아닌 다른 것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오로지 내적 필요성과 표현 욕구에 추동되어 그리게 된 것이다. 이 변화는 실로 중대하여, 모든 편지에서 언급된다. (P.66, ‘병과 그 영향’)

 

성공적인 화가로서 잘 나가던 고야를 멈춰 세운 청각 장애는 고야가 자신의 외부에서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업적 수요에만 따라 그리던 그림에서 스스로의 내적 욕구를 표현하기 위해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알바 공작부인과의 실연은 다른 책에서는 지나가는 수준으로만 다루고 그의 그림 세계에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던 요소다. 토도로프는 실연 이후 고야가 이성의 억제에 숨죽였던 비이성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탐험하고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강조한다. 일련의 마녀 그림, 정신이상자, 감옥 등을 그린 그림과, 판화집 <변덕들>이 그러하다.

 

1797년 봄, 감정적 단절은 그를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세계로 향하게 만든다. 그후로 그는 바로 그 자신을 표현하고자 애쓰게 된다. 상상적 형태들이 고삐가 풀린 듯 그의 붓 아래로 몰려든다. (P.85, ‘치료와 재발, 그리고 알바 공작부인’)

 

나폴레옹과 스페인 독립 전쟁, 이후 페르난도 7세의 집권은 정치사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다. 계몽주의 개혁 세력과 보수적인 귀족과 종교의 반동 세력의 대치는 프랑스 군대의 침략으로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념적으로는 프랑스를 지지하지만, 애국심으로는 프랑스에 저항해야 하는 모순에 처한 개혁 세력의 고뇌, 프랑스군의 폭력적 지배가 보여 주는 계몽주의 이념의 한계, 페르난도 7세의 집권 이후 표출하는 반동 정치의 혼란. 여기서 고야는 무지, 종교, 미신, 광기와 같은 비이성의 폭력성과 더불어 이성의 폭력성도 경험하면서 어느 한쪽도 긍정하지 못하는 애매한 상황에 부닥친다. 인간성을 향한 의문과 불신, 고발을 폭로하는 대표 작품이 판화집 <전쟁의 참화>이다.

 

고야는 이제 계몽주의 사상이 침략과 억압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폭력을 막기에는 충분치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계몽주의 사상의 이름으로 나폴레옹 군대는 폭력을 자행했다. [......] 이성의 잠만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각성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P.160, ‘나폴레옹의 침략’)

 

고야 말년의 ‘검은 그림’ 창작 동기와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저자는 이것을 치유 목적의 그림으로 이해한다. 그가 겪은 인간성의 불신과 혐오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그림을 그린 후, 그는 귀머거리의 집을 떠났다는 것이다. 일종의 미술치료인 셈이다. 판화집 <어리석음>도 같은 맥락으로 인식한다.

 

고야가 검은 그림들을 누구하고도, 심지어 친구들과도 공유하려 하지 않은 것은, 이 그림들을 창작하는 행위가 곧 자기 치유의 작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찬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검은 그림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바로 그 그림들을 그렸다. (P.253-254, ‘두 번째 병, 검은 그림, 광기’)

 

치유의 덕택일지 고야 말년의 작품은 보다 밝고 긍정적이다. 주제와 색감, 표현 면에서. 보르도에서 그린 <젖 짜는 여인>이 주는 우아함과 평온함이 눈에 띈다. 활기차고 웃음 띤 노인이 춤을 추거나 맨발로 그네를 타는 말년의 데생 작품은 해탈과 초월의 느낌마저 자아낸다.

 

저자가 고야의 예술세계에서 특히 놀라워하면서 주목하는 점은 공식적 그림과 비공식적 그림 창작을 긴 세월 분리하여 병행하였다는 사실이다. 공식적 세계에는 미술관에서 많은 관람자를 끌어들이는 대다수의 화려한 작품이 속한다. 왕실과 귀족 초상화, 마하 연작, 그리고 1808년 5월 연작이 그러하다. 비공식적 창작에는 판화집, 데생집이 속한다. 오늘날 사상가로서 주목받게 되는 작품은 후자의 영역이다. 특히 저자는 고야의 데생에 주목한다. 단순히 밑그림의 도구가 아니라 일기와도 같이 고야의 내면 사고와 감정을 반영하는 실제적 표현 수단으로 인식한다. 저자에 따르면 고야처럼 이원화된 예술세계를 병행한 예술가는 없었다고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를 잘 알지 못한 때에 다른 유명한 화가와 비교하면 그에 관한 책이 시중에 상대적으로 많이 나와 있다는 점을 의아하게 여겼다. 장애를 극복하고 드물게 장수하며 안주하지 않고 회화와 판화라는 두 영역에서 독보적인 자취를 남긴 점. 나아가 명성이 당대에 국한된 게 아니고 근현대에 와서 더욱 높아갔다는 점, 위대한 예술가를 넘어 사상가로서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는 점을 볼 때 그에 관한 세인의 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사상가 고야를 집중 조명하고 있는 의미 깊은 역작이다. 특히 <변덕들>과 <전쟁의 참화>를 깊이 있게 검토하고 주요 작품을 상세하게 분석함으로써 독자가 놓치거나 간과하기 쉬운 개별 판화를 유심히 살펴보고 이해의 심화를 가능케 한 점은 무엇보다도 커다란 덕목이다.

 

세상은 건강/병, 이성/광기, 낮/밤, 빛/어둠처럼 명확한 대립을 이루는 범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고야는 그림을 통해 그 둘의 상호 침투성과 불가분성을 보여 주고자 애쓴다. 둘을 나누는 경계는 투과성을 띤다. 이성과 비이성은 인간의 특성이며 똑같은 지위에 있다. (P.120, ‘‘변덕들’의 해석’)

 

책 내용이 비교적 전문적이기에 화가 고야를 비로소 알고자 하는 초심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화가 고야의 삶의 전반을 추적하지 않았고, 공식적인 창작 영역도 저자의 관심 범위 밖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러 도판을 수록하였지만, 언급하거나 분석하고 있는 그림 전체가 아니기에 다소 불친절하고 아쉬운 면도 존재한다. 다만 고야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거나, 몇 권의 관련 책의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인간성과 나아가 사회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과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저자가 의도하고 지향했던 결과라고 개인적으로 이해한다.

 

고야가 예견했고 토도로프가 증언하듯,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위험은 뚜렷한 경계 없이 부유하는 ‘미몽’과 ‘꿈’, ‘마술’과 ‘주술’이 아니라, 전체주의 같은 국가적 장치로 일제 소탕하는 가면 쓴 ‘이성’이다. (P.327,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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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의 조문객 ㅣ 쏜살 문고
메리 셸리 지음, 정지현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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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폴란드인의 사랑

보이지 않는 소녀

악마의 눈

불멸하는 필멸의 존재

변신

유프라시아

강변의 조문객

순례자들

꿈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더라도 고딕, 모험, 환상 문학을 선호하는 듯싶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9편의 단편의 면면을 살펴보더라도 개인과 사회의 일상적 단면을 표현하는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악마와 초현실을 다루거나 전쟁, 모험, 난파를 소재로 삼기도 하고 타국을 지역적 배경으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등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다. 여기서도 영국을 제외하고 이탈리아, 그리스, 스위스, 프랑스가 등장한다. 시대적으로도 중세와 현대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의 또 다른 장편인 <최후의 인간>은 하물며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고 있다.

 

먼저 인상에 남는 단편은 <불멸하는 필멸의 존재>와 <변신>이다. 전자는 불멸의 영약을 마셔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 사람의 이야기인데, 누구나 다 바라 마지않는 영생이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님을 말해준다. 나만 홀로 청춘인데, 가족과 친구 모두가 늙고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면, 누구를 사랑하고 교감을 할 것인가, 어차피 그들도 곧 이별할 텐데. 그런 면에서 불멸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고 할 것이다. 카렐 차페크의 <마크로풀로스의 비밀>과 제재 면에서는 비슷하다.

 

죽음을 바랐지만 절대로 죽지 않았다. 불멸의 인간. 야망도 탐욕도 생기지 않았고, 심장을 괴롭히는 열렬한 사랑도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나만큼 오래 살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기에 사랑은 나를 괴롭게 할 뿐이었다. (P.119, 불멸하는 필멸의 존재)

 

후자는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연상시킨다. 그림자든, 육체든 자신에게 속한 고유의 것을 악마와 거래한 치명적인 대가를 여기서 보여준다. 귀도는 방탕한 생활의 극단에 내몰려 보물 상자를 받는 조건으로 자신의 몸을 사흘간 빌려주기로 거래한다. 신의를 지킨다면 그것이 악마이겠는가. 귀도의 몸을 쓴 악마는 개과천선을 위장하고 약혼녀와 결혼식을 치르려 하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영원한 파멸인 동시에 줄리엣의 선한 영혼마저 타락시키는 씻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세상사의 우여곡절은 인생을 결코 평탄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연인 간, 가족 간 무수한 이별과 곡절이 중첩되어 흘러가게 마련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제자리에 돌아오게 될 때 그것은 우연이자 기적이 되게 마련이다. 그것은 비극적 결말로 귀결될 수 있지만 때로는 해피 엔딩을 맞이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악마의 눈>과 <순례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전자는 그리스의 해안가를, 후자는 스위스의 산악 지방을 배경으로 한다. 모험과 약탈, 은혜와 원수, 복수가 켜켜이 쌓이는 가운데, 악마의 눈으로 불리는 흉포한 산적 드미트리는 어릴 때 죽은 줄로 알았던 딸과 손주와 재회한다. 기사 부르크하르트는 사랑하는 딸이 적대적인 이웃 영주의 아들과 비밀 결혼을 하자 배신감에 칩거 생활을 한다. 세월이 흘러 늙은 영주는 모든 은원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화해하고자 하나 이미 방안이 없다. 순례자를 가장한 외손주의 방문과 외손녀와 젊은 공작의 결혼은 독자에게도 출생의 비밀이 주는 쫄깃함과 행복함을 안겨준다.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남녀 간 사랑이야말로 문학과 예술의 근원적 제재가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도 <폴란드인의 사랑>, <보이지 않는 소녀> 그리고 <꿈>이 이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작가의 성향답게 아름답고 순탄한 사랑이 아니다. 음모와 모험, 유령과 환상, 고딕풍의 분위기가 이야기 전반을 감싸고 있어 소재의 진부함을 색다르게 다루고 있다. 전자는 이탈리아, 가운데는 영국, 후자는 프랑스를 각각 지역적 배경으로 한다. 특히 전자와 후자는 폴란드와 러시아의 전쟁, 프랑스의 종교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어 더욱 현실감을 부여한다. 내용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다채롭게 흘러가지만 결말은 동일하다. 사랑의 성취와 승리!

 

그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가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여인을 안았다. 보이지 않는 소녀가 바로 로지나였다. (P.67, 보이지 않는 소녀)

 

그는 위험천만한 침상에서 떨어지려고 하는 그녀의 새털 같은 몸을 떠받았다. 그녀가 눈을 뜨고 연인을 보았다. 운명의 꿈을 꾸는 내내 자신을 지켜보았고 자기 목숨을 구해 준 연인을. (P.248, 꿈)

 

나머지 단편인 <유프라시아>와 <강변의 조문객>도 작품 간 유사성을 지닌다. 이 역시 사랑을 다루지만, 사랑하는 가족의 상실이 주는 슬픔과 영향이다. 전자는 그리스 독립전쟁, 후자는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전자는 적군에 납치당한 여동생을 구출하지만 누이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오빠, 후자는 난파당한 배에서 먼저 구출되기를 거부하고 끝내는 그로 인해 사랑하는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회한에 사로잡힌 딸. 콘스탄틴과 클라리스/엘렌은 누이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한 사람은 무모할 정도의 용기를 전장에서 발휘하고, 클라리스/엘렌은 외딴곳 오두막에 홀로 고적한 은둔의 삶을 영위한다. 두 작품 모두 그들 주위에 머물렀던 사람의 목격과 증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클라리스/엘렌의 슬픔이 독자에게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 육친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자책과 비난과 자기부정의 철저성이 자아내는 극단적인 비극성에 있다고 하겠다.

 

병과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경험이 내 절망에서 독을 빼 주었어. 네가 본 슬픔과 번뇌는 누그러진 아픔과 경건한 희망으로 녹아내렸지. 난 이제 비참하지 않아. 이제는 말이야! (P.194, 강변의 조문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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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 ㅣ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헬스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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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글은 아주 오래전 집중적으로 읽었다. 이후 산발적으로 한두 편 읽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헤세의 자연, 특히 구름 에세이를 다룬 이 책의 접근은 매우 생소하다. 헤세가 그렇게 구름을 사랑하고, 깊은 관심을 지니며 천착하였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구름은 하늘 저 멀리 있기에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과 가까운 존재이다. 흰 구름은 평화로운 자연과 목가적 전원의 상징이다. 반면 먹구름은 폭풍과 재난, 그리고 비극으로 귀결된다. 색으로 말하자면 붉게 물든 석양의 구름이 자아내는 신비로움을 빼놓을 수 없다. 구름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하늘을 떠다닌다. 구름은 정처 없이 떠도는 하늘의 방랑자다. 나그네, 방랑자를 구름에 비유함은 동서양이 공통적이다.

 

너희는 본질적으로 우리와 닮았으니, / 우리 방랑자들, 우리 닻 없는 항해자들을 닮았으니. (P.18, 구름의 노래)

 

방랑자의 모든 슬픔과 기쁨을 / 헤아리지 못한 사람은 / 구름을 이해하지 못하리. (P.81, 흰 구름)

 

헤세의 문장에서 이 모든 것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는 구름을 방랑자와 많이 연결한다. 작가 자신의 삶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은 탓이리라. 그가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자연에 은거한 연유는 모국에 발을 붙일 자리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당대 모국에게 있어 그는 반항아로 간주되었으니.

 

원래 세상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지. 세상은 그런 반골적인 나에게 수없이 회초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나를 죽이지는 못했어.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세상에 저항하며 버텨 왔어. (P.131, 저녁 구름)

 

편자는 헤세를 “구름 관상학자”(P.160)로 칭한다. 한마디로 구름을 보고 읽어낼 줄 안다는 말이다. 그만큼 헤세가 구름을 깊이 관찰하고 애정하여 일반 사람이 간과하는 다채롭고 미묘한 구름의 형상을 파악하였다는 뜻이리라. 구름이 무한한 하늘에 실체감을 부여함으로써 인식 가능한 공간으로 만드는 존재임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확실히 그것을 깨닫는다. 나로서는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견해다.

 

구름은 광대무변의 공간에 실체감을 부여하고, 그 공간을 살아 있게 하고, 측정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우리를 그 공간과 연결시켜 준다. (P.10, 구름)

 

제아무리 아름답고 뛰어난 자연 경관도 오래 보거나 자주 보면 흥미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단순히 아름다움에 열광하지 않는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로잡는 건 그것과 연결된 감정이다. 칼리다사의 <메가두타>에서 구름은 부부간 사랑의 전령이다. 헤세도 구름을 바라보며 첫사랑의 추억을 회상하고, 학생 시절에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겨 외면했던 가슴 아픈 경험을 반추한다. 꿈속에서나마 어머니가 자신을 보며 웃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며 위안 삼는다.

 

구름은 변화무쌍하다. 잠시만 눈을 다른 데 두었다가 바라보면 원래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기에 구름은 덧없음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구름을 쳐다보면 인간은 상념에 젖기 마련이다. 그것은 추억과 회상, 나아가 그리움과 슬픔의 정조다.

 

이처럼 인생무상과 회한에 사로잡히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노쇠와 죽음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구름에 자욱하게 뒤덮인 흐린 하늘은 사람의 마음마저 착 가라앉힌다. 젊은 시절의 방랑과 들뜸도 어느덧 사라지고 열정과 활기마저 쇠진하게 된다. 하늘 높이 흰 구름에서 기쁨을 찾기보다 덧없음에 사로잡히기 쉬우며, 석양의 지는 노을에 오히려 철렁하게 공감하게 되는 때. 헤세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러면서 힘들지만 소소한 기쁨을 구하자고 말한다.

 

나는 늙어 가고 생명이 시들어 가는 과정의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는 것이 몹시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독서나 음악, 자연 속에서 소소한 기쁨을 누립니다. (P.148, 1951년 2월 이름가르트 샤비키에게 보낸 전언에서 발췌)

 

헤세의 시, 산문, 편지, 단편과 장편소설 등에서 구름과 연관된 글만을 폴커 미헬스가 편집한 게 이 책이다. 색다르면서도 흥미로운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구름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안개와 호수, 석양, 푄 같은 온갖 자연 현상을 함께 다루는 자연 에세이다. 몇 편의 시와 산문에 그치지 않고 <페터 카멘친트>와 <유리알 유희> 같은 소설에도 구름에 연관한 대목을 들어가 있더니 헤세의 구름 사랑은 참말이 아닐 수 없다.

 

헤르만 헤세의 서정적인 문장을 오랜만에 접할 수 있었다. 아울러 구름과 자연, 그리고 풍요로운 상념에 젖어 들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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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영혼의 거울 - 개정판 ㅣ 다빈치 art 6
프란시스코 데 고야 지음, 이은희.최지영 옮김 / 다빈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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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1년 출판본의 개정판이다. 처음부터 개정판을 펼쳤다면 다행이고, 혹시라도 구판을 읽을 생각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책장을 덮고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내가 꼭 그러했다. 구판과 개정판은 전혀 다른 책이라고 보면 된다. 기본 콘텐츠는 동일하지만, 판형도 훨씬 커졌고 편집도 완전히 새로 하였다. 구판은 독자의 이해력과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독서에 무척이나 불편하였다.

 

이 책은 크게 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지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네 개의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고야의 주요 회화 작품이 한 영역을 별도로 차지한다.

 

첫 번째 본문은 ‘고야의 삶과, 그리고 예술’로 고야에 대한 약사에 해당한다. 구판에는 이탈리아 미술평론가 마게리타 아부르체세의 글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개정판에는 이 대목이 생략되어 어떤 게 맞는 건지 알 수 없다. 고야의 일생과 예술세계는 앞서 몇 권의 책을 읽었기에 새삼스럽지 않다. 다만 새로운 작품으로 여섯 점의 연작 <산적 엘 마라가토의 체포>를 소개(P.21)하고 있어 관심이 쏠렸다. 후기작으로 <호세 데 칼라산스 성인,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의 현대성을 부각하고 있는 점(P.24)도 흥미로웠다.

 

두 번째는 고야 자신의 육성을 들어볼 수 있는 귀한 자리다. 그가 절친 사파테르에게 보낸 편지를 수록하고 있는데, 100페이지 정도 되므로 꽤 많은 분량이다. 서신 교환은 사파테르가 사망한 18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으며, 온갖 시시콜콜한 개인사부터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고충과 세간의 평판에 대한 의식까지 전반적으로 담고 있다.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대성당의 작업에 매달려 있음을 알 수 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산 이시드로 평원>을 그리느라 고야가 쏟는 에너지와 스트레스가 굉장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주제가 <산 이시드로 평원>으로, 너무나도 어렵고 까다롭다네. 산 이시드로 축일에 왕궁에서 이 그림을 공개할 걸세. 사랑하는 벗이여, 솔직히 이 문제가 끝날 때까지 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걸세. 잠도 자지 못하고 쉬지도 못하지. (P.107, 1788년 5월 31일)

 

고야 자신의 말처럼 아내보다도 더 친근하고 솔직하게 토로하는 표현은 단순한 우정을 넘어설 정도의 끈끈하고 농밀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그토록 사적인 편지가 후대인들에게 공개되었을 것을 알았다면 고야가 이토록 무람없이 문장을 쓰지는 않았으리라.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면 자네와 함께 있고 싶네. 난 자네를 깊이 사랑하고 있네. 자네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걸세. (P.51, 날짜 없음)

 

아! 잠깐만, 자넬 그리워하는 나를 천 번만 안아주게나.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없는 것을 갖게나[여성의 성기 그림]. (P.127, 1797년 10월 10일)

 

세 번째는 고야의 주요 회화 작품 소개다. 이 부분은 일종의 컬러 도록에 해당하므로 용지를 달리하고 있다. 1772년 필라르 바실리카의 프레스코화에서 시작하여 최후기작인 <보르도의 우유 파는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60면에 걸쳐 연대순으로 그의 주요 작품을 순서대로 보여준다. 판형이 커진 만큼 그림 감상에 제격이며, <산 이시드로 평원>, <종교 재판소>, <카를로스 4세 가족>, 1808년 5월 역사화 2편과 <결투> 등은 양면에 걸쳐 시원스레 보여준다. 유명한 마하 작품 2편도 그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핵심은 네 번째 본문에 있다고 본다. 고야의 유명한 판화 연작인 <카프리초스> 80편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각 면에 한 편씩 판화 작품을 싣고 아래에 판화의 제목과 간단한 설명을 소개한다. 얼마 전에 그의 판화전을 관람하였는데, 전시회 도록보다 이 책을 더욱 추천할 만하다.

 

고야가 인간 정신의 어두운 측면과 다양한 삶의 양상들을 관찰하여 그려낸 이 작품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부조리와 강박관념과 동시에 즉각적이며 보기 드문 현실 감각을 드러낸다. (P.199-200)

 

유독 마음에 끌리는 작품은 6번 ‘아무도 모른다’, 12번 ‘이빨을 찾아서’, 24번 ‘구원은 없었다’, 37번 ‘제자가 더 많이 아는 건 아닐까?’, 52번 ‘재단사의 재주’, 80번 ‘때가 되었다’이다. 23번과 24번은 무고한 여인을 등장시키며, 37번에서 42번까지는 소위 당나귀 시리즈라고 하겠다. 한편 <카프리초스>를 상징하는 43번 ‘이성의 꿈은 괴물을 낳는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석보다는 그림 설명 자체가 다른 해석의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곱씹고 싶다.

 

이성으로부터 버림받은 환상은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끔찍한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환상이 이성과 결합하면 예술의 모체가 되고, 모든 경이로움의 원천이 된다. (P.247)

 

마지막 다섯 번째 글은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미술 평론이다. 맞다, <멋진 신세계>로 유명한 소설가다. 그는 고야 작품 전반을 다루지 않고, 후기작에 집중한다. ‘검은 그림’ 연작과 판화집 <카프리초스>, <전쟁의 참화>, 그리고 <어리석음>이 갖는 의미에 주목한다. 이 글은 앞에 실린 <카프리초스> 이해를 위한 해설 성격을 지니고 있어 매우 유익하다.

 

고야가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시대 감각을 지닌 사상가적 면모로서 세상의 미신과 무지, 광기와 폭력, 야만성의 시각으로 정말로 역사와 사회를 인식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판화집 내용은 이를 반박하지 못한다. <전쟁의 참화>에서 고야는 전쟁의 영광과 위세를 배제하고, 전쟁의 이면에 가려진 인간 일반의 비인간성과 인간 개개인의 고통에 집중한다. <카프리초스>에 비해 덜 알려진 <어리석음>을 한층 주목하는 것 또한 흥미롭다.

 

더욱 침울하고 불가사의해진 <어리석음>에 나오는 풍자는 전체적으로 <카프리초스>보다 덜 직접적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비유는 훨씬 더 일반적이고 신비하다. (P.299)

 

이 책을 프란시스코 고야의 입문서로 삼기에는 적절치 않다.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을 지닌 독자가 한층 심화한 이해를 원할 경우에 적합하다. 무엇보다 판화집 <카프리초스>에 크나큰 관심을 지닌 독자라면 만족도가 높을 것이다. 절판된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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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고사 - 19세기 베스트셀러, 서울의 춘향전
이윤석.최기숙 지음 / 서해문집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경판본과 완판본이 <춘향전>의 대표적인 판본이라면, <남원고사>는 근래 들어 주목받는 이본이다. 다만 입소문에 비해 실제로 접하기는 쉽지 않은 판본이기도 하다. 이는 대중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번역본이 부재한 까닭이다. 현시점에 알라딘에서 ‘남원고사’로 검색해 보면 연구서를 제외하면 모두 세 종류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그마저도 서해문집 판은 품절로 사실상 절판이나 다름없다. 결국 설성경 번역본과 정길수 번역본만이 독자에게 접근 가능하다. 도서관에서 두 가지 번역본을 살펴보았는데,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게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두 책 모두 교주본으로 전문적 주석을 달고 있고, 원문과 번역문을 나란히 수록하여 전문 학술 도서에 가깝다.

 

서해문집의 이윤석과 최기숙 번역본은 필요한 최소한의 주석과 해설을 곁들이고 <남원고사> 본래의 콘텐츠가 지닌 맛을 살리기 위해 깔끔한 번역문을 지향한다. 원문에의 충실성은 헤아릴 수 없지만 적어도 소설로서 가독성과 흥미성의 전달에는 성공하였다.

 

<남원고사>는 주류 판본과 여러 가지 설정과 대목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먼저 춘향의 성씨는 성씨가 아니라 김씨다. 신분이 기생이라는 점은 경판본과 마찬가지다. ‘사랑가’ 대목이 첫날밤이 아니라 광한루의 첫 만남에서 등장하며, ‘십장가’도 실제 매를 맞기 직전에 불린다. 춘향 어미는 거지로 분장한 어사를 끝끝내 박대하고, 춘향이가 풀려난 게 변 사또가 아니라 어사의 수청을 허락한 덕분으로 알고 기뻐한다. 어사가 춘향을 풀어주는 장면에서도 춘향을 구박한 기생들에게 칼머리를 이로 물어뜯어 벗기라는 무자비한 명령을 내리는데 아무리 봐도 어사로서 공정한 처분이라기보다는 사적 복수에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춘향의 성격도 완판본과 유사하지만 한층 강렬하게 그려진다. 불망기를 달라고 똑 부러지게 요구한다든지, 이별 통보에 미친 듯이 분노를 표출하다가 전별주를 건네는 모습, 자신을 잡으러 오는 패두들을 능수능란하게 접대하는 대목에서 다소곳한 요조숙녀와는 거리가 멀다. 본문에서도 춘향의 성품을 이렇게 기술한다.

 

춘향이 본디 사재고 도도하여 매몰차고 꼿꼿한지라 관속들이 꺼리고 싫어하더니 (P.193)

 

주류 판본의 <춘향전>을 읽으면서 항상 아쉽게 느꼈던 점은 변 사또가 암행어사에게 파직당한 이유가 석연치 않다는 점이다. 수청을 거부한 춘향을 감옥에 가둔 이유만으로는 애매하다. 일단 춘향의 신분을 기생으로 간주한다면, 수령은 산하 기생에게 관례상 수청을 요구할 수 있다. 춘향과 이 도령의 관계는 흔하디 흔한 일시적 만남에 불과하다. 물론 춘향은 대속을 해서 기생의 신분을 면했다고 하지만, 이게 실제로 법적으로 인정되는지 여부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변 사또는 불법 행위를 저지른 셈이니 처벌은 당연하다. 한편 자신의 요구가 확실한 불법 행위임을 알고 있는데도 변 사또가 수청을 강요했을까 반문할 수 있다.

 

<남원고사>는 이러한 미비점을 상당 부분 보완하였다. 변 사또가 파직당한 결정적 죄목은 탐관오리라서이다. 어사가 된 이 도령은 전라도를 순행하면서 선비와 농민 등 신분을 물론하고 수령의 정사에 대해 탐문한다. 이 과정에서 남원 부사가 탐학한 인물임을 파악하였고, 생일잔치를 위해 백성을 가렴주구 하는 걸 목도하였으며, 잔칫상에서 변 사또 자신의 목소리로 이를 자랑하도록 조정한다. 어사의 유명한 시구는 이러한 빌드업을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나는 묘리 있는 일이 있소. 심심한 때면 이방 놈과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등록하지 않은 토지를 뒤져내어 단둘이서 똑 반으로 나누니, 그런 재미가 또 있는가? (P.369)

 

<남원고사>는 완판본에 비해서도 분량이 매우 많다. 번역문만 수록해도 400면에 이르는 본격 장편소설이다. 세책본이라는 특성상 분량 늘리기를 의도함과 아울러, 춘향 이야기라는 줄기에 다양한 이야기를 부가하여 다채로운 읽을거리를 추구했을 것으로 본다. 소설의 첫대목은 화창한 봄날을 예찬하며 시작하는 데 풍광 묘사에 그치지 않고 역사와 문학의 전적을 이것저것 끌어와 길게 인용한다. 이어지는 칠언절구의 나열, 이 도령의 화려한 옷차림, 광한루로 놀러 갈 때 남원 지방의 자연과 만물에 대한 온갖 묘사를 열거하는 등 분량을 늘리는 데 주력한다.

 

춘향과 이 도령의 이별 장면에서 정철의 <사미인곡> 전문을 수록하며, 압권은 옥에 갇힌 춘향을 위로한답시고 남원 왈짜들이 와서 벌이는 갖가지 행태다. 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소설을 읽으며, 노름판을 벌이고 놀이를 하다가 끝내 술주정과 싸움으로 이어지는 희화적 장면을 연출하는데, 제법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춘면곡>, <처사가>, <어부사> 거의 전문을 인용하고,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의 한 대목을 삽입하는 등 독자가 흥미롭게 여길 만하다고 생각되면 차입을 망설이지 않는다.

 

<남원고사>의 독자층이 누구일지 생각해 본다. 작중에 상당한 고전과 한문 지식이 필요한 문구와 대목이 많으므로 서민은 읽어도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양반층과 학문을 깨우친 중인 및 부유한 평민층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게다가 흥미성을 전제로 하는 소설이므로 재미와 해학 요소도 아끼지 않는다. 양반층은 서민의 풍속과 세태를 알 수 있으며, 중인과 평민층은 지배층을 향한 기롱과 본인 계층의 실상을 해학적으로 접할 수 있으니 모두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아니겠는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당대의 풍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도령이 방문했을 때 춘향이 갖가지 담배를 내놓는 대목에서 당시 담배가 일대 유행이었음을 알게 되는 점이 전형적이다. 남원 왈짜의 행태를 통해서는 당대 인기 소설과 노름, 놀이 문화의 일면을 헤아릴 수 있다. 아울러 해학성도 새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방자의 인물됨 묘사, 이별 장면에서 이 도령과 마부의 장난, 변 사또의 말 상대인 이 낭청의 이도 저도 아닌 애매모호한 말투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남원고사>라고 이본의 이름을 달리했는지가 이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본의 작자 또는 편자는 널리 알려진 경판본 춘향전의 줄거리를 뼈대로 삼지만, 이 도령과 춘향의 사랑 이야기로만 작품을 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식자층과 서민층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덧붙이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강압적인 지배층과 무력한 서민층의 대결에서 사필귀정의 해방과 쾌감을 느끼도록 하는 데 관심을 집중한다. 이것이 단지 소설 속 꿈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심정 또한 품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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