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위로다 - 명화에서 찾은 삶의 가치, 그리고 살아갈 용기
이소영 지음 / 홍익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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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 같은 그림 감상 안내서를 몇 권 읽었다. 저자에 한하면 <모지스 할머니>를 읽었기에 저자가 이 책에서 지향하는 바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림을 통한 인생론, 좀 거창하다면 그림으로 보는 삶의 이야기 정도라고 하겠다. 그래서 저자는 스스로를 아트 메신저라고 정의한다.

 

명화를 보는 것은 나의 사고의 한계를 확장시키고, 내가 몰랐던 나의 과거를 끌어다 주며 때로는 나의 미래를 발견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삶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다잡게 해준다. (P.9, 프롤로그)

 

그림은 까막눈이다. 실기 재주는 처음부터 형편없으며, 안목도 얕아서 작품의 진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전시회를 가본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며, 학창 시절의 교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준이다. 저자는 위축되지 말라고 조언한다. 명화의 기준은 전적으로 내게 달렸다고 한다. 내가 보고 좋은 그림이 곧 내게는 명화라는 것이다.

 

진정한 명화는 내게 유독 착 달라붙는 그림, 그리고 사람들이 설명해주거나 책에서 명화라고 하지 않아도 이유 없이 좋은 그림, 그런 그림들이다. (P.87-88)

 

그림 감상은 순전히 기호이자 선호의 문제다. 구상화를 선호하는 사람에게 추상화를 굳이 들이밀 필요가 없다. 고전과 낭만 시기 그림을 좋아하는 이에게 현대 회화를 무리해서 강요하는 건 마땅치 않다. 그래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것도 모른 채 바라봐도 좋은 그림이 있으며, 알면 알수록 더욱 좋아지는 그림도 있는 법. 나는 후자를 위해서 이 책을 손에 든다.

 

먼저 아는 인물부터 언급하면, 고흐와 모지스 할머니가 반갑다. 르네 마그리트는 생소한데, ‘빛의 제국은 눈에 익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본 기억이 있다. 프리다 칼로도 역시 들어봤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녀의 불행한 삶과 결혼 생활이 더 기억에 남아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화려한 세기말적 그림이 유명한데, 아터제 호수를 배경으로 한 그림은 전혀 다른 화풍이어서 뜻밖인 동시에 마음에 다가온다. 남은 화가와 그림은 나로서는 미지의 영역에 가깝다. 저자의 해설과 안내에 따라 아,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우뚱하며 유심히 그림을 쳐다볼 뿐이다. 마치 책에 실린 작은 사진에서 뭔가 대단한 숨은 포인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처럼.

 

예술 분야에서는 타고난 천재도 많지만, 재능 못지않은 꾸준한 노력으로 일가를 이룬 인물도 많다고 한다. 평생을 꾸준한 습관으로 창의력을 키워 온 르네 마그리트가 인상적이다. 작가 이상과 화가 구본웅의 우정이 빚어낸 자화상, 가족애를 자주 그린 이스트먼 존슨, 우아하고 기품 있는 스타일의 마리 로랑생이 우선 기억에 남는다.

 

저자는 모든 화가가 처음부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한 건 아니며, 몬드리안도 칸딘스키도 피카소도 그렇다고 하면서 방황하는 우리를 안심시킨다.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과 프리다 칼로의 삶을 통해 참다운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자신의 단점을 예술로 승화시킨 툴루즈 로트레크. 어려운 상황을 꿈과 열정으로 극복한 강익중, 수많은 덧칠로 그림을 빛나게 하는 에드워드 호넬. 이들의 이야기는 예술가가 아닌 인간으로서 화가를 바라보게 해주면서 동시에 우리네 삶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안겨준다. 내게는 항상 고흐와 연계되어 떠올리는 화가인 세잔이 입체파와 추상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현대미술의 선구 격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흔히 갖기 쉬운 선입견과 편향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저자는 독자가 그림에서 사람과 삶을 찾아보고, 그림의 의미를 통해 인생을 살펴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 무미건조한 교훈서가 되지 않으려면 저자의 인간적 면모도 함께 녹여낼 필요가 있다.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저자의 학창 시절, 그림 실력보다 그림을 보는 걸 더 좋아했던 자신의 취향과 소절, 남자 친구와 남편 이야기, 회사 생활과 미술교육에 뛰어들었던 경험, 모지스 할머니 같은 자신의 어머니 등등. 이 책 속에 저자 이소영의 개인사가 상당 부분 들어있기에 책장을 덮으면 저자가 마치 가족 또는 친구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다.

 

미술관에 가보는 것도 문득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개방 중인 국공립 미술관이 여럿 있지 않은가. 더 흥미가 생긴다면 세계적인 거장이나 미술관의 특별전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책장과 화면을 통해 보는 그림과 실제 회화는 분명 차이가 날 것이다. 어디 서양화뿐이겠는가. 한국화, 동양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면 내게도 미술적 취향과 안목이 자라나는 날이 있겠지. 그림을 보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마음의 위로와 삶의 나침반을 삼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참고로 내가 읽은 책은 구판이다. 2021년에 저자는 개정판을 냈다. 몇 편의 글이 추가되어 분량이 조금 늘어났고, 글의 배치가 다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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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식물상담소 - 식물들이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
신혜우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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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식물학자다. 앞서 출판한 <식물학자의 노트>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후속작으로 내놓은 게 이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전자는 본격적인 과학책이며, 이 책은 에세이에 가깝다. 저자가 식물상담소를 개소한 후 만난 여러 사람과 사례를 정리하였다. 하다 보면 상담 범위가 반드시 식물에만 국한되지 않기에, 결국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식물 이야기인 동시에 식물을 통해 바라본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식물분류학자이며 식물세밀화가다. 후자는 낯선 용어인데, 책에 수록된 여러 식물과 꽃의 그림과 일러스트는 모두 저자가 직접 그린 것이다. 즉 최대한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여 식물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표현하는 작업도 담당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책의 이야기 자체도 잔잔하게 흥미롭지만, 아름다운 식물 일러스트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낯선 길을 가게 된 배경과 현상을 설명하다 보면 자연스레 저자의 인생사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식물상담소에 찾아오는 여러 상담자가 풀어놓는 이야기에 인생이 빠질 수 없으니. 식물을 관찰하고 키운 경험을 인간사에 비추어보면 적잖은 삶의 깨우침을 받을 수 있다.

 

자신에게 맞는 자리에서 크고 멋지게 자라는 열대식물처럼 우리도 각자에게 맞는 자리에서 비로소 멋진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것 아닐까? (P.25)

 

지금 키우고 있는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면 사랑을 줄여보길 권한다. [......] 사랑한다며 나 자신을 좀먹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도 많다. (P.59)

 

식물은 분명 살아있는 존재이지만, 동물과는 달리 활동성이 즉각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동물에 동정을 품고 보호하자는 사람은 많지만, 자연 전체가 아니라 개별적인 식물 보호 주장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저자는 식물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편견을 깨고자 하며, 인간 중심적 사고의 무지한 오류를 지적한다.

 

대표적인 게 잡초의 개념과 역할에 대한 무시다. 잡초는 인간 관점으로 유용성의 기준으로 분류한 것으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다. 익충과 해충의 개념과 마찬가지다. 자연의 기준에서 잡초는 없다. 좀 더 비장한 시각으로 보자면, 관상 용도로 꽃집에서 파는 꽃다발과 화분도 논의에 오를 수 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과, 화원 및 해당 산업에서는 불편하겠지만, 이는 식물의 생명을 경시하는 행위임은 부인할 수 없다.

 

플랜테리어도 비슷하다. 분명 식물을 좋아해서 하는 경향이지만, 식물을 생명체가 아닌 인테리어의 일부로서 사물로 취급하는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가로수와 정원수도 조경 차원에서 인위성이 개입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일부 농작물 생산을 위한 환경파괴나 그린워싱도 자연과 식물을 산업적으로 보기에 발생한다.

 

식물학자의 눈으로서는 여러 불편한 진실이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은 대중에게 식물과 친근감을 품도록 하는 데 주목적이 있다. 우리가 미처 간과했던 식물의 본성, 아름다움, 진실을 소개함으로써. 화사한 봄꽃을 피우기 위한 겨울눈이 늦여름부터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자연조차도 준비에 충실하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주목 열매를 먹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열매에 독성이 있다는 점에 놀란다. 산수국은 씨앗으로 번식하지만, 우리가 여름에 보는 아름다운 수국은 인위적인 품종이기에 씨앗 번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의외다. 신토불이라고 하지만, 식물에는 국경이 없다는 견해도 참신하다. 야생 회양목이 그렇게 크고 멋지다니. 많은 내용이 저자처럼 식물에 애정을 품은 사람들만 발견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모두가 아는 이런 뚜렷한 변화 외에도 식물은 신비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식물이 간직한 신비롭고 소중한 비밀들은 아마도 식물 곁에서 식물의 사계절을 계속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P.102)

 

실용성이 아니라 순수한 애정으로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없다. 더구나 저자처럼 식물에 빠져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대단한 용기를 지녀야 가능하다. 일반적으로는 집안의 화분, 집밖의 화단, 멀리 나아가면 공원, 수목원, 식물원, 산과 들을 보면서 충분히 만족할 따름이다. 직접 심고 관리하는 행동은 농작물이 아닌 경우에는 보기 드물다.

 

대다수의 사람은 어릴 때 흙과 식물을 주저 없이 만지작거리며 놀던 추억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자연에서 멀어지는 게 현실이다. 추상적, 관념적으로는 자연을 옹호하고 그리워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마련이다. 전형적인 도시인에 가까운 나로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과 식물을 바라볼 때 허투루 넘기지 말고, 조금이나마 관심과 주의를 더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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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THE CIRCLE PRESS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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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작품의 기본 제재로 삼고 있는 아니 에르노는 다시 개인사로 돌아왔다. 등단 이후 개인(<빈 옷장>, <단순한 열정>)과 가족(<남자의 자리>, <한 여자>)을 오가며 글쓰기를 하였던 그는 <부끄러움>으로 개인과 가족을 결합하였다. <세월>은 에르노식 글쓰기가 추구하였던 개인사와 사회사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집대성이자 총결산이라고 칭할 만하다.

 

노년에 이른 누군가가 문득 옛 생각이 나서 사진첩을 뒤적거리다 보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갓난아기부터 꼬마, 청소년, 성년에 이르기까지 시절에 맞추어 달라지는 본인의 모습은 물론 가족과 친구들의 세월의 흐름도 찬찬히 눈여겨보게 된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 나는 몇 살쯤이었고 어떤 상황이었는지 등의 자문이 보편적이라면, 화자는 한발 더 나아가 깊숙한 질문을 던진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어떠하였고, 전 세계적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리고 개인의 삶과 생각이 사회와 세계사의 흐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그녀는 이 세계가 그녀 안에 새긴 것들과 그녀와 동시대를 사는 이들, 아주 오래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슬며시 미끄러져 온 시간을 공동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공동의 기억에 대한 기억을 개인의 기억 속에서 되찾으며, 역사를 경험한 측면에서 표현하기 위해. (P.319-320)

 

세계사란 원체 거시적이기에 민족과 국가 위주로 구성되기 마련이며, 여기에서 특출난 인물이 영웅처럼 등장한다. 평범한 개인은 세계사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보통의 개인의 삶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말인가.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화자 같은 소시민의 어린 시절부터 모든 삶을 회상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거시사 못지않은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함께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억은 성적 욕망처럼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 (P.12)

 

에르노의 기존 작품과 마찬가지로 <세월> 역시 회고적이며 기억을 회상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의미를 찾기에 이는 당연한 동시에 불가피하다. 다만 기억은 항상 불완전하고 편향에 빠지기 쉽다. 화자가 기억의 오류 여부를 반복적으로 자문하는 것은 무오류성과 자기 객관화를 최대한 유지하고자 함이다. 주관성이 두드러지면 개인사를 통한 글쓰기라는 본래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며,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사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 그녀는 시작하는 순간, 늘 같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P.238)

 

처음에는 빛바랜 사진을 차례차례 들여다보면서 추억을 더듬는 화자는 중반부터는 사진과 영상을 함께 참조한다. 지난 세기 후반부터 대중화된 영상매체의 발달로 정적인 사진보다는 동적인 영상을 담고자 하는 욕망이 커졌다. 사진이든 영상이든 화자는 항상 과거를 현재화한다. 옛이야기를 과거형으로 표현하였다면 순전한 회고에 지나지 않는다. 화자는 과거의 사건과 사상을 끄집어내어 현재에도 유효하기를 바란다. 나의 과거사, 남의 과거사가 한데 모이고 현재적 관점에서 의미성을 지니면 그것이 사회사가 된다.

 

작가가 자서전을 썼다면 분명 이 작품이 그것에 해당한다고 믿는다. 에르노식 자서전, “비개인적인 자서전”(P.321). 정확한 연대도, 실명도 드러내지 않지만 독자는 분명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삶을 6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물론 중간에 빼먹거나 살짝 언급만 하면서 간단히 넘어간 시기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굳이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어서라는 것도.

 

<세월>에서 특징적인 점은 역사와의 연계다. 단순히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고 간단히 치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직접 참여한 사회개혁과 정치 변혁의 당대적 사고와, 시간이 흘러 자식 세대의 의식과 빚어지는 두드러진 차이, 그리고 다소간의 실망감의 토로. 자본주의 문명의 고도화에 따른 대량 소비사회의 생소한 만남과 일말의 우려. <<911일 이후>>(P.281)로 표출되는, 공산주의 몰락 이후 새롭게 발생한 국제적 긴장 관계의 현주소 등등.

 

젊은 초대 손님들은 우리가 세상에 등장한 거대서사를 캐내는 일에는 관심 밖이었으며, 전쟁과 사람들 사이의 미움은 그들만큼이나 우리들에게도 끔찍했다. 더 이상 알제리, 칠레 혹은 베트남을 언급하지 않았고, 685월도, 자유로운 낙태를 위한 투쟁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과 같은 시대만을 살았다. (P.200)

 

특이한 건 이 모든 기술이 지극히 담담하고 관조적이라는 데 있다. 개인의 감상과 판단은 객관성의 큰 기조를 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만 나타날 뿐이다. 작가는 철저히 기록하는 태도를 보인다. 20세기 중반, 프랑스 시골에서 태어난 아니 에르노라는 한 여성의 생을, 담백하면서 솔직하게, 더하지도 않지만 덜하지도 않게끔. 그럼에도 결국 개인의 삶은 사회와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작가라고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글로 적나라하게 밝힌 내용이 결국 자신의 체험과 경험을 토로한 것이기에.

 

인간의 개별적 생은 죽음과 더불어 잊히고 소멸하는 운명이지만, 작가는 그것에 보편성과 영원성을 부여하였다. 이 작품은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당연하다. 개인적으로 이전의 어떤 작품도 <세월>이 성취한 지점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아니 에르노의 2022년 노벨문학상도 <세월>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만큼 이 작품이 작가의 문학 경력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이후 여기에 필적할 만한 작품을 과연 쓸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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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성채
생 텍쥐페리 지음, 이상각 옮김 / 들녘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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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주요 작품을 읽고 마지막으로 유작 <성채>를 읽으려고 시도하였다. 현대문화센터 판본인데 몇 쪽을 읽은 후 책장을 고이 덮었다. 워낙 난해하다는 말이 있었지만 당최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택한 게 이 책인데, 이것도 만만치는 않다. 두 번을 거듭 읽어도 어렴풋한 이미지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으므로. 게다가 그것이 올바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 지도 명확하지 않다. 작중 화자는 자칭 베르베르의 왕이다. 그는 부왕의 뒤를 이어 사막의 왕국을 이끌게 되었는데, 국민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북쪽의 오아시스 도시를 정복하고 단단한 성채를 세우고자 한다. 여기서 성채는 이중의 의미로 나타나는데, 현실의 성채와 마음의 성채가 그것이다. 화자는 양자를 혼용하여 사용하는데, 결국 인간의 행복과 번영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요소의 완성으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잘못된 접근이라고 할 수 없다.

 

성채여,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대를 건설하리라. (P.25)

 

이제 제국은 새로운 성채를 건설하고 사막을 옥토로 만들 것입니다. 시간 속에 씨앗은 삼나무 뿌리로 굳건해질 것입니다. 이제 저의 성채를 세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이 상태에서, 사랑을 가지고 일구어가렵니다. (P.295)

 

내용 자체가 구체적 줄거리와 일정한 서사를 갖춘 게 아니므로 반드시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다. 각각의 장과 이야기가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생텍쥐페리가 앞선 소설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삶의 의미와 본질, 죽음과 영웅성에 대한 태도를 포함해서 그의 사상 전반을 살펴볼 수 있다.

 

그대들은 물질에 집착한 인간이 잃어버린 상호간의 유대감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인간에게 주고받음의 미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대들이 오히려 잘 알 것이다. 그게 없다면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P.94)

 

인간은 고립된 개체로서의 삶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인간은 타인과의 유대와 협력 속에서 의무와 책무를 수행함으로써 참된 삶을 찾을 수 있다.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고자 비록 죽음을 무릅쓰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행동하는 모습이 진정한 영웅의 삵이다. 평범한 인간도 현실 안주와 타협을 거부하고 노력, 의지, 행동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의 인간이 진실로 휴식할 수 있는 방법은 주사위 놀이가 아니라 자신이 건축한 성전의 마지막 기왓장을 올리는 순간의 환희, 바로 그런 것이다. (P.143)

 

사회와 연대를 강조한다고 해서 전체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개인 자체의 고유성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그것이 고립과 방종으로 흐르지 않도록 협력과 규율을 지니는 상태를 높이 평가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각성을 통해 대의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때로는 희생마저도 감수하면서 인간과 사회의 완성으로 굳건한 성채를 쌓아나가는 것, 그것이 화자이자 작가의 지향점으로 이해한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성전의 신성함과 바꾸며, 성전은 그들에게 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P.67)

 

화자가 이토록 인간의 완성에 역점을 두는 까닭은 인간 존재가 갖는 생명의 본원성에 대한 인식이다. 유한한 생명체로서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단지 생명 존속에만 연연하다가 삶을 마칠 때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무엇에 있을까. 인간의 다양한 삶의 양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게 바람직한가. 정신적, 신체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고양된 삶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할 것인가 이런 등등에 대한. 작품 말미의 화자에게서 어린 왕자가 자연스레 연결됨은 결코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아아! 이제 홀로 있다는 피로감이 저를 엄습합니다. 순수란 이토록 멀리 있는 걸까요? 그러나 저는 초월함으로써 이루었습니다. 완성 안에서 백성들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나의 별이 되었습니다. (P.298)

 

이 책은 <성채>의 편역본이다. 엮은이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방대하고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발췌하고 구성도 달리하였다. 편역자는 원작의 긴 장을 짧은 이야기로 잘게 나누고 소제목을 추가하였다. 덕분에 각 장은 우화와 아포리즘(잠언)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깊은 함의를 지닌 주옥같은 금언이 곳곳에 넘쳐난다. 이것이 작가의 원래 의도에 부합하는지, 원작과의 상이 여부와 정도는 현 단계에서는 알지 못한다.

 

이 자체로서 유익하고 흥미롭지만 결국 원래 형태로의 <성채>를 다시 읽어야만 할 것 같다. <성채>의 내용을 이제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설사 이해를 못 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성채>의 본모습을 확인하고, 이 책과의 유사와 상이를 알 수 있다면 자체로 소득이 없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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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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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입맞춤>에 이어 가룟[가롯] 유다와 관련된 책이다. 전자는 예수와 유다 간 은밀한 공조로 십자가가 이루어지고, 유다는 치욕을 감수하게 되었다는 견해다. 여기 저자는 다른 의견을 펼친다. 유다가 실존하는 인물인지 부정적이며, 설사 그의 실재성을 인정하더라도 그와 예수의 공모는 터무니없다고 본다. 유다의 도움은 십자가의 가치와 순수성을 저해하기에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다가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예수를, 십자가로 나아가게끔 강제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죄목은 유대교 근본 교리를 위배하였기에 종교적 사유이다. 그런데 반역자를 처벌하는 로마의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건 이상하다. 이 말은 예수가 현실상에서 로마에 저항했다는 의미다. 세계제국 로마에 대항한다면 기독교도는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4대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죽음은 종교적이며, 기독교는 친로마적임을 밝히고, 로마에 저항한 유대민족이야말로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파렴치한 족속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유대민족의 상징 인물로 비열한 배신자 유다를 만들어냈다.

 

구약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인 유대민족은 신약에 와서 예수의 비난과 저주를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끝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부인하고, 죽게 만든 악역이 되었다. 신약의 모순을 비판하는 견해는 일견 타당성이 있기에 흥미롭다. 유다는 예수의 실제 제자인가, 유다는 푼돈에 눈이 멀어 예수를 팔아넘겼는가, 아니면 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 예수를 죽게끔 만들었는가 등 여러 의문이 생긴다. 사탄의 작용이라면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저지해야 하는 사탄이 어째서 유다를 부추겨 예수의 십자가를 강행하게 행동하였는가.

 

1세기 기독교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쓴 게 복음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만 했다. 기독교인에게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민족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그 결과 그들을 상징하는 인물, 가롯 유다를 만들었다. (P.23)

 

다만 유대민족을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유다를 창안하고 이용했다는 견해는 논리적 맥락이 다소 약하다. 로마-유대 전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고 인정하더라도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이 아니었는가. 유대인이라면 기독교도 유대인의 생존을 위해 유대교 유대인 동족을 멸족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한 게 아닌가. 유다와 손잡은 유대민족이 결과적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완성했다면 오히려 칭찬할 일이 아닌가. 애시당초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타당한 주장인가. 이런 의문이 계속 떠오른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유다의 희생이라는 지분을 인정함으로써, 배신자 유다라는 오명을 벗기고 그의 복권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유다가 나쁜 놈이 될수록 기독교가 산다. 기독교가 사는 길 중 하나가 유다를 악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P.61)

 

예수와 유다가 공모를 했든지 또는 망설이는 예수를 유다가 유대민족을 이용하여 강제하였든지 유다가 십자가 진행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게 사실이라면 더 이상 유다를 배신자 취급할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에서는 유다를 인정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건 기독교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다.

 

2부에서 저자는 4대 복음서에 가롯 유다의 인물과 역할이 어떻게 변질하는지 자세하게 파헤친다. <마가복음>에서는 오병이어와 향유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와 제자 간 긴장 관계를 암시한다. 유다의 드러난 배신 동기는 모호하다. 종교적 이유로 해석될 여지도 다분하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걸 우려하였던지 금전적 동기를 제시한다. 다만 그것이 푼돈에 불과하다는 게 애매하다. 돈에 눈먼 배신자가 유대민족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던 예수를 넘겨주는데 그 정도에 만족한다는 게 설득력이 약하다.

 

<누가복음>은 새로운 동기를 도입하는데, 사탄의 등장이다. 사탄이 유다에게 작용하여 배신하게 했다는 것. 이상하다. 사탄의 개입은 앞서 말한 모순을 낳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능력을 초라하게 만든다. 예수가 사탄의 활동을 몰랐다면 무능하며, 알고 방치했다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요한복음>에서는 처음부터 사탄이 유다를 사로잡았고, 예수는 이를 알면서도 제자로 삼고 방치하였다. 전지전능한 예수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어서다. 그렇다면 예수는 유다를 사탄에서 구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십자가에 오를 수 있으니까. 이쯤 되면 유다를 배신자로 치부하기 곤란하다. 유다는 배우일 뿐, 감독은 예수이므로. 이러한 모순을 저자는 아래와 같이 결말 짓는다.

 

유다가 희생자가 되는 순간, 예수가 가해자가 된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기독교 구원교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죽어야 한다. 예수가 살기 위해서는 지난 2,000년 동안 그랬듯, 유다는 오늘도 죽어야만 한다. (P.272)

 

이상 저자의 논리와 견해를 따라가면 신약성경의 여러 모순과 불일치가 분명해진다. 저자의 해석도 날카롭게 틈새를 파헤치고 있어 막연하게 간과하던 복음서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다만 유다의 역할에 관한 저자의 주장은 여전히 추측에 기반하고 있기에 기꺼이 수용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반기독교적 입장을 시종 드러내고 있다. 이는 성경의 내용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방향을 취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내포하고 있다.

 

희생양이라는 원시 시스템, 누군가 나 대신 피를 흘려야 내가 산다는 구원의 교리로 움직이는 기독교는 언제라도 새로운 가롯 유다를 만들 수 있다. 기독교는 지금도 편 가르기에 골몰한다. 희생양은 기독교의 본질이고 DNA. (P.49)

 

인류 역사에 발생한 가장 큰 비극이 뭘까?

예수를 역사로 만든 복음서의 등장이다. (P.274)

 

저자의 분석과 주장은 분명 타당성과 흥미로움을 지니고 있다. 집필 의도가 기획 단계라면 모르겠지만 내용 자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 감정 개입을 통해 객관성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잔인한 입맞춤>과 마찬가지로 다른 근거 제시 없이 성경 자체의 불일치와 주관적 추정만을 근거로 삼는다면 다수의 동의와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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