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지평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3
제임스 힐튼 지음, 이경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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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국 정부는 운남성 중전(中甸)을 샹그릴라[샹그리라]로 개명하였다. 제임스 힐턴의 소설에 나오는 동명의 지역과 여러 면에서 가장 유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제임스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은 어떤 작품인지?

동양 사회에서 이상향의 대명사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서구 사회에서 그것은 유토피아에 해당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상향은 말 그대로 이상향이기에 가치를 지닌다.

힐턴이 이 소설을 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가 사회적, 문화적 혼란에 빠졌을 때다. 소위 이 시기를 문학계에서는 ‘잃어버린 세대’ 또는 ‘길 잃은 세대’로 일컫는데, 전통적 가치관이 전쟁으로 일거에 무너짐에 따른 정신적 위기의 심각함을 지칭한다. 따라서 힐턴의 이 소설도 결국은 서구에서 상실한 이상향의 자치를 동양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모색의 한 과정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하필 샹그리라를 중국 티벳 동부에 비정하였는가? 20세기 초까지 서구는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세계 각지를 재발견하였다. 이제 세계의 웬만한 곳은 모두 탐사가 끝났고, 아프리카와 광대한 유라시아의 내륙 오지만이 미답사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밀림 지대는 문명사회로 설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결국은 이국적인 문화와 종교를 지닌 독자적인 문명지역, 히말라야와 곤륜 산맥의 험준함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죽음의 방패로 둘러싸여 접근이 어려운 티벳 지역이 보다 설득력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작가의 모국인 영국이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인도와 가깝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정보를 얻기 용이한 측면도 있다.

여하튼 이 소설은 인물과 사건이 주인공이 아니다. 샹그리라의 존재가 작품의 핵심이다. 독자는 샹그리라의 위치, 운영, 가치관, 사람들에 대해 마치 미지의 곳을 탐험하는 기분으로 등장인물들과 함께 서서히 접근해 가며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생경하지만 그윽한 분위기에 젖어든다.

등장인물 중 유독 콘웨이가 샹그리라의 후계자로 지목받는 것은 당연하다. 일찍이 옥스퍼드의 수재였던 그는 다재다능한 능력과 출중한 외국어실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의 비인간성에 환멸을 느끼던 중 자신의 지향과 일치하는 샹그리라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의 사고방식은 이미 탈 서구, 친 샹그리라적이었고, 그는 ‘세계의 광기’(P.92)를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는 최고를 이상으로 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에 자주 비속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P.60)

그런 그에게 샹그리라는 점점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존재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샹그리라에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은 거짓없는 진실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는 앞날이 대단히 매력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긴 고요하고 평온한 나날...태양은 떠올랐다가 사라진다...즉 깊은 고요함, 원숙한 예지, 명석한 추억의 매력 등을 얻게 될 것이오...” (P.199)
승정과의 대화에서 승정은 콘웨이에게 샹그리라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주며 그곳에 머물러 일원이 될 것을 권유한다. 승정이 묘사한 모습은 당대 서구의 ‘전쟁이나 욕망과 잔학 행위’와 대조적이다.
“즉 그는 예지에 있어서가 아니라 저속한 정열과 파괴의 의지에서 점차 강화되어가는 나라들을 보았소.” (P.203)

샹그리라의 매력은 너무나 확실하다.
“‘푸른 달’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모든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연못을 스쳐 흘러나오는 하프시코드의 은방울 같은 단조로운 곡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풍경과 음악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P.228)

샹그리라는 단순한 이상향이 아니다. 샹그리라는 인류의 예지와 미덕을 파괴에서 보존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독서와 음악과 명상과 더불어 지내며 멸망해가는 시대의 덧없이 우아한 것을 보존하고 그 저속한 정열이 타버린 뒤 인류가 필요해 마지않는 예지를 찾아 구할 것이오. 우리는 소중히 보존하고 후세에 양도해야 될 유산이 있소.” (P.205)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은 종결되지 않았다. 이미 자체에 더 큰 전쟁의 배아를 잉태하고 있어 세계는 알지 못한 어둠과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다.
“아마 세상이 아직 보지도 못하던 폭풍우가 되겠지요. 무력으로 안전할 수 없고, 권력에 의지해도 구할 수가 없고, 과학의 힘으로도 해명이 안 될 것이오, 모든 문명의 꽃들이 짓밟히고 모든 인간 거대한 혼미 속으로 던져질 때까지 폭풍우는 불어 날뛸 것이오.” (P.252)

세상이 어두울수록 샹그리라의 존재 의의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멋진 곳에서 지내는 삶은 제법 훌륭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콘웨이는 막판에 맬린슨과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 차기 승정으로 샹그리라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로 한 그는 무슨 연유로 그곳을 떠나는가?

샹그리라는 이상향이다. 이상향은 상상과 관념 속의 산물일 뿐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현실 세계에 나타난 그 순간, 이미 이상향의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 샹그리라에 대한 맬린슨의 인식을 단순히 젊은 서구인의 어리석음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상향의 불가능성과 불완전성을 인식하였다.
“이런 곳은 박살이 나야 돼요. 불건강하고 불결해요. 더구나 당신의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만약 사실이라면 더욱 구역질이 나요!...더러워요...” (P.269)

맬린슨과 로첸의 관계에 대하여 듣는 순간 콘웨이는 결심을 한다. 로첸에 대한 단순한 질투심의 표출은 아닐 것이다. 그는 샹그리라가 오래 존속하지 못할 것을 알아차린다. 완벽한 이상세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 그것을 로첸의 행위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는 현실과 최초로 직면했을 때, 모든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꿈이 이미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다...아무리 자신이 분기해보아도 자신의 상상 세계의 회랑이 충격을 받아 비틀려나가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각은 붕괴되고 모든 것이 폐허로 화하려 하고 있었다.” (P.275)

샹그리라에 대한 콘웨이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맬린슨과 로첸과 더불어 탈출을 시도한다. 간난신고 끝에 목숨을 부지하고 정신을 되찾은 후 그는 다시 혼자서 샹그리라를 찾아가려고 시도한다. 그의 시도가 성공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닌가. 언제나 현실과 이상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는 존재. 샹그리라는 머나먼 곳일 수도 있고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다.

제임스 힐턴은 당대 서구인들의 마음을 뿌리부터 흔들어놓는데 성공하였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갈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대중의 호기심에 영합하지 않고 이상향의 미묘한 이중성의 진실을 갈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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