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역사 - 상식으로 꼭 알아야
이경윤 지음 / 삼양미디어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그동안 로마 제국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로마 제국의 역사는 머릿속에 일목요연한 체계 없이 산발적으로 흩뿌려진 상황이었다. 로마 제국의 초기인 왕정과 공화정 시기, 5현제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가 특히 그러하였다.

 

로마 제국 역사 개설서를 찾다가 이 책을 선택한 계기는 일단 너무 두껍지 않아서이다. 1천 쪽이 넘어가는 단권 도서나,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 책은 우선 기본 체계가 든든한 이후에나 도전해 볼 일이다. 이 책은 부제처럼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핵심적 내용만 쉬운 설명과 풍부한 컬러 사진과 도판으로 구성하여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다. 저자가 역사 전문가가 아닌 만큼 깊이 있는 학문적 통찰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만큼 보편타당한 기술을 기대할 수 있다.

 

흔히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를 로마의 시초로 간주하지만, 로마는 스스로를 트로이의 후손으로 간주하였다. 트로이 멸망 후 아이네이아스가 유랑하다가 로마의 모체가 되는 나라 라비니움을 건설하였고, 그 후손 아스카니우스가 새롭게 세운 나라가 알바롱가라고 한다. 다시 로물루스가 고대 로마를 건국한 해가 기원전 753년이라고 하니 라비니움 이후로는 수백 년이 경과한 시점이다. 신화와 과장이 섞였겠지만 로마의 뿌리가 유서 깊음을 보여준다.

 

고대 로마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먼저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으로 바뀌게 된 계기인 루크레티아 사건이다. 그리고 코리올라누스 사건은 귀족 중심의 공화정에서 평민의 권리가 크게 강화된 계기가 되었다. 둘 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제재가 되었으니 흥미롭다.

 

중부 이탈리아의 일개 소국이었던 로마는 점차 패권주의를 지향했으니, 라틴동맹 전쟁과 삼니움 전쟁을 통해 중부 이탈리아를, 에피루스와 전쟁을 통해 남부 이탈리아마저 장악해 버린다. 그리고 지중해로 눈을 돌리게 된다. 에피루스와 전쟁에서 카르타고와 로마가 동맹국이었음은 중요치 않다. 서부 지중해를 움켜쥐려면 카르타고는 꺾어야 할 적이고,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결로 유명한 역사적 장면은 로마의 승리, 카르타고의 멸망으로 끝난다. 이후 마케도니아와 동부 지중해를 걸고 다시 전쟁을 벌여 지중해를 완전히 로마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로마의 팽창주의는 소아시아, 이집트, 프랑스, 잉글랜드, 독일 등으로 뻗어 나갔으니 제국주의적 침략의 본능이 로마에 꿈틀대었다고 하겠다. 팍스 로마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와 같은 문구는 이 당시 로마의 번영과 영광을 잘 드러낸다.

 

급격한 팽창은 내부의 체제를 불안정하게 하였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서 이를 해결할 방안은 강력한 일인 지배만 남게 되었다. 카이사르에 앞서 마리우스와 술라가 있었고, 카이사르의 암살은 옥타비아누스로 이어지는 대세를 결코 막아서지 못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후를 제정 로마라고 부르는 이유다. 마리우스와 술라에서 아우구스투스까지의 급변하는 정치적 격변기는 로마 시대에서 여러 문학과 예술을 통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시기다.

 

저자는 아우구스투스가 긴축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도나우강-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엘베강으로 국경선을 단축하고자 무리하게 게르마니아를 침공하였다고 썼는데, 당시 쓸모도 없는 북방 진출의 이유를 밝혀주기에 흥미롭다. 한편 칼리굴라와 네로로 대변되는 로마제정의 위기는 5현제 시대를 거치며 비로소 안정과 번영으로 접어든다. 정말로 인류가 가장 행복했던 시대인지는 알 수 없으나, 피우스에 대한 평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어떤 역사가는 피우스 재위 기간을 역사에 기록할 것이 없는 시대라 평하기도 한다. 피우스는 실로 로마의 평화를 달성한 황제였던 것이다. (P.308-309)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를 마지막으로 5현제 시대는 끝나고 콤모두스를 필두로 무능한 황제를 잇달아 등장하는데 거론된 이름을 기억조차 못 할 정도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치 제제를 도입한 것은 미봉책이었고, 콘스탄티누스가 힘들게 재통합을 이루었는데, 왜 다시 분할하였는지 알 수 없다. 콘스탄티노플의 건립자,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밀라노 칙령으로 역사상 유명한 이 황제는 로마 제국 영구 분할의 단초가 되었다.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은 편의상 구분에서 별개의 통치 체제로 갈라서게 된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원인 : 농업 기반, 인구, 인재, 군사력 (P.371)

 

저자는 서로마의 멸망 원인을 이렇게 적시한다. 에드워드 기번에게서 비롯한 전통적인 내부 원인론을 따르는데, 로마 제국의 힘이 다해서 외침에 쉽게 무너졌다고 주장한다. 일면 타당하지만 최근의 연구 성과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각종 역사적 사실을 고찰해 보면 로마 제국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내부적 위기 요인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게르만족의 침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물결 앞에서 댐이 무너지듯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내용을 따라 간략히 로마사의 흐름을 되짚어 보았다. 대다수의 역사서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로마제국은 종말을 맞이했다고 서술한다. 이건 매우 서양 편향적인 인식이다. 동로마제국이 라틴어와 라틴족이 아니라 그리스어와 그리스족, 종교도 가톨릭교와 정교로 달라졌기에 로마의 적통이 아니라고 주장함은 아전인수격 해석이다. 기원전 753년을 로마 역사의 기점으로 본다면 서로마는 1,200년을, 동로마는 2,200년을 지탱한 것이니 하나의 국가가 이렇게 긴 수명을 영위한 것은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하다. 게다가 단순한 수명을 넘어 서양문명에서 로마가 차지하는 위상은 대체 불가능할 정도이니 로마 제국은 두고두고 세인들의 관심을 끌 만한 매력적인 역사적 소재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이 장구한 세월을 숱한 위기와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힘겹지만 끝끝내 견뎌낸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부록으로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불리는 고대 로마의 12표법 전문을 수록하고 있어 이채롭다.

 

생각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독서 경험이었고, 이를 토대로 향후 동로마제국 역사서를 훑어보고 기회가 되면 몸젠의 로마사, 마키아벨리의 논고, 로마사의 원형인 리비우스의 저작도 도전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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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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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계기로 알폰스 무하 전시회를 관람하였다. 전혀 모르던 화가였으나 소개글과 예시 작품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내가 회화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다만 초기의 무하가 창시한 독자적인 무하 스타일은 눈길을 끌만큼 화려하였다. 상업적인 포스터와 상품 디자인 등을 한껏 예술적으로 수준을 높여 버렸다. 이렇게 해버리면 매혹당하지 않을 관객이 누가 있겠으며, 후배 상업 화가들은 어떻게 하라는 건지 난감하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나는 잘 몰랐는데, 의외로 아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놀랐다. 사무실 직원 한 명도 관심을 보였고, 처남 친구는 애호하는 화가라고 하였다.

 

알폰스 무하의 삶과 예술을 더 음미하고 싶어져 이 책을 골랐다. 전시회에서도 나름 충실하게 소개가 되어 있었지만, 차분하게 살펴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체코 모라비아 시골 출신의 그가 파리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상업 예술가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미국과 체코에서 일체의 상업성을 배제한 <슬라브 서사시> 연작 등으로 진정한 예술가로 불후의 영예를 거둔 일생은 그 자체가 극적인 선택의 연속이다.

 

무하의 예술적 성취에 있어 우연과도 같은 인연을 제외하기 어렵다.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무명의 그를 후원한 벨라시 백작과 에곤 백작 형제가 없었더라면 그는 계속 변방에 머물러야 했으리라.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배우와 예술가의 성공적인 윈-윈 협력 관계를 보여준다.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 의뢰가 없었다면, 그리고 무하의 장식적인 포스터 작품이 없었더라면 무하와 사라 둘 다 불후의 명성을 남기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스몽다>, <카멜리아>, <메데>, <햄릿>, <토스카>, <로렌자치오> 같은 포스터는 언뜻 유사한 스타일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인물의 표정과 상징, 배경, 장식은 변주를 통해 독자적인 가치를 드러낸다.

 

아름다운 백합의 화관, 화려한 장식, 정돈된 윤곽선 안에 굽이치는 머릿결과 사실적인 표정. 그것은 사라 베르나르를 나타내는 전형인 동시에 아르누보의 독특한 여인 이미지로 자리 잡아 갔다. (P.80)

 

아내 마리 히틸로바와 그의 자녀의 존재도 무하가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걷도록 지탱해 준 원동력이다. 무하 예술의 보전과 홍보에 지치지 않았던 두 자녀야말로 훗날 무하의 예술이 재평가되는 데 일등 공신이다. 미국인 사업가 크레인은 무하가 생활에 일체 신경 쓰지 않고 <슬라브 서사시> 연작에 몰두할 수 있는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무하는 드물게 보는 행운아다.

 

무하는 포스터, 장식 패널, 극장의 무대와 의상, 일러스트, 벽화, 건축, 스테인드글라스, 보석 디자인, 조각, 초상화 이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태양이 프리즘을 통해 그 아름다운 빛을 드러내듯 세계의 영혼은 무하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에 아름다운 스펙트럼을 펼쳐 놓았다. (P.335)

 

무하는 종합예술가였다. 상업 회화 영역 외에도 무대 예술, 일러스트, 공예, 광고, 디자인 등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발휘하였고, 삶의 후반기는 순수 회화에 매진하였다. 통상의 미술가가 한두 방면에만 뛰어난 것에 비하면 그의 예술적 재능과 성과는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원색적인 다른 포스터들과는 달리 파스텔 톤의 투명한 색채와 명암으로 채워진 포스터는 비잔틴식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배경과 화려한 중세풍의 의상으로 이국적이면서도 장식적인 느낌을 주었다. (P.69)

 

무하 스타일로 불리는 대표적인 아르누보 양식으로 일세를 풍미한 무하의 작품 특징은 장식적인 화려함에 있다. 풍성하고 화려한 중세풍의 드레스, 길게 늘어뜨린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관 또는 화관으로 장식한 머리모양, 장식적이고 비의적이고 상징적인 배경이 전형을 이룬다. 주인공 여성은 무심하거나 방심한 자태로, 때로는 유혹적인 눈빛으로 관객을 지그시 응시한다. 개인적으로 전기 작품 중에서는 상업 포스터보다 그의 연작 시리즈가 더 흥미롭다. <사계>, <>, <보석>, <예술>, <>, <시간> 4부작 말이다. 같은 듯 다르게 차이를 보이기 위해 화가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상징적 요소를 한껏 추가하였다.

 

슬라브 서사시는 잘 짜인 각본처럼 각각의 장면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5개의 알레고리적인 테마와 5개의 종교적 테마, 5개의 전쟁 장면과 슬라브 문화에 관한 5개의 장면. 그 중 10개는 체코의 역사에서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슬라브 국가의 역사에서 선택된 것이다. (P.254)

 

체코 국민과 무하가 생각하는 예술의 본령은 아마도 후기작에 있으리라. <슬라비아>, <사과를 든 크로아티아 여인>, <슬라브 서사시> 20, <대지를 깨우는 봄>, <황야의 여인>, 그리고 내가 최애하는 <백합의 성모 마리아>. 단지 민족주의와 지역주의라고 치부하지 말라. 그는 슬라브인으로서 정체성을 되새기면서 주체성을 잃지 않되,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를 지향하였다. 여기서 그는 무하 스타일의 밝고 화려함에서 단순하고 소박하며 색채적인 스타일로 변모하였다. 특히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인류 보편적 사랑을 주제 삼는 작품에서는 신비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그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서 어두운 분위기에서 시대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하면서도 다가올 세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결코 잃지 않았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미완성에 그친 <이성의 시대>, <지혜의 시대>, <사랑의 시대> 3부작이라는 사실 자체가 웅변적이다.

 

1936년부터 인류 보편의 문제를 담고자 시작했던 3부작 <이성의 시대>, <지혜의 시대>, <사랑의 시대>는 결국 미완으로 남았다. 3부작은 그의 생애를 이끌어 왔던 박애적이고 낙천적인 신념을 담아내고 있다. (P.278)

 

이 책은 무하의 삶과 예술세계를 설득력 있고,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주요 작품 대다수의 도판이 가득 실려 있어 어지간한 도록을 능가할 정도로 그림을 보는 재미도 훌륭하다. 1쇄에서 지적되었던 중요한 오류는 2쇄에서 거의 바로잡혔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은 후 상기 오류를 감안하더라도 구매를 결심하였는데, 많은 오류마저 교정되었으니 더 이상 추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 1쇄와 2쇄 오류 교정 비교

내용

1

2

<사계> 연작 중 그림 명칭 오류 (P.94)

봄과 여름 그림이 바뀌었음

교정 O

<네 개의 별> 연작 중 그림 명칭 오류 (P.105-106)

/샛별/금성/북극성

교정 O

(/금성/북극성/샛별)

욥 담배 종이 회사 광고 포스터 중 연도 오류 (P.131)

1986 1896

교정 X

<담쟁이넝쿨><월계수> 중 영문명과 연도 오류 (P.191-192)

Lanel, 1899 Ivy, 1901

Ivy, 1899 Laurel, 1901

교정 X

<슬라비아><뮤즈>의 색감 (P.268-269)

누렇게 되었음

교정 O

<무하의 딸 야로슬라바>의 색감 (P.330)

누렇게 되었음

교정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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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꽃의 살해 - 독일대표단편선
아르투어 슈니츨러 외 지음, 김재혁 편역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수록작품>

어떤 이별 - 아르투어 슈니츨러

민들레꽃의 살해 - 알프레트 되블린

예기치 않았던 재회 - 요한 페터 헤벨

사랑 또는 타락 - 토마스 만

꿈의 노벨레 - 아르투어 슈니츨러

칠레의 지진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라라비아타 - 파울 하이제

 

책의 구성과는 무관하게 작품의 발표 연대순으로 읽었기에 그 순서에 따라 적는다.

 

<칠레의 지진>은 예전에 클라이스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독서할 때 읽은 적 있으며, 최근에도 다른 독일단편문학선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읽었다. 인간 운명의 우연성과 아이러니가 냉엄하게 기술된다. 지진 같은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도 어리석은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음을, 인간의 삶은 기쁨과 고통이 혼재된 형태임을 보여준다.

 

<예기치 않았던 재회>는 짧은 분량으로 세월을 초월한 사랑의 힘을 상투적이지만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라라비아타>도 일전에 읽어본 기억이 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고집쟁이 처녀라는 표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표면상 말괄량이처럼 구는 여주인공이 자신을 짝사랑하는 뱃사공 안토니노에게 무심하게 굴다가 갑작스레 사랑을 고백하는 행복한 끝맺음이다. 그녀의 격렬한 고백이 워낙 급작스러운 데다, 높은 자존감을 내세우던 그녀의 비굴에 가까운 태도 전환이 당혹스러울 정도다. 더욱이 그녀가 아픈 추억으로 갖게 된 결혼과 남자에 대한 냉소적 시각이 일순간에 뒤바뀐다니 여성주의 시각에서는 탐탁지 않게 여길 게 분명하다.

 

이제 아시겠죠, 신부님. 왜 제가 그냥 처녀로 살겠다고 하는 건지. 저를 마구 두들겨 패다가 애무를 퍼붓는 인간에게 예속되기 싫어서예요. [......]” (P.359)

 

<사랑 또는 타락>에서 토마스 만은 남녀의 순결 또는 정조에 대한 세간의 편향적 인식, 사랑의 순수성과 현실성에 대한 기대와 착각의 귀결을 그린다. 순진한 대학생과 아름다운 여배우의 사랑은 순수성을 대변한다. 대학생은 이상 속을 살아가지만, 가난한 여배우는 현실 속을 걸어가야 한다. 배우로서, 여성으로서 생계를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 필요를 그녀는 스폰서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기준으로 분명 타락이지만, 대학생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남의 이야기인 듯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는 화자의 목소리는 애잔하다. 그는 여전히 과거에 분노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당시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는가. 작가는 이렇게 기술할 따름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투와 절망과 슬픔에 겨워 라일락을 잡아뜯는 그의 거친 행동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그 좋은 녀석의 모습은 그에게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P.143)

 

이 책은 슈니츨러의 작품을 두 편이나 수록하고 있다. <어떤 이별>은 초기작이고, <꿈의 노벨레>는 후기작으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어떤 이별>은 남성 화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는 유부녀와 밀회를 즐기는 중인데, 남편의 외출을 틈타 그녀가 뛰어 들어올 때만 사랑을 누릴 수 있다. 그는 언제나 기다리는 처지에 놓여있지만, 그녀를 향한 사랑은 의심할 수 없다. 작품은 그녀가 오지 않는 상황에서 요동친다. 그는 점점 초조해진다. 이건 필시 그녀가 병에 걸린 탓이라는 그의 짐작이 맞아떨어졌고 게다가 중병이란다. 그녀의 집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그녀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의 시신 곁에는 애도하는 남편이 있다. 자신이야말로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며,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함에도, 그는 당당하게 나설 수 없다. 죽은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깨닫는다. 죽음 앞에서 그의 사랑은 유효하지 않음을, 그가 사랑한 건 그녀의 살아있는 육신뿐이었음을.

 

그는 마음 깊이 수치심을 느끼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할 자격도 없었고, 또 죽은 애인이 그를 그곳에서 쫓아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를 부인했다고. (P.44)

 

작가는 사람의 외면과 내면이 얼마나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불륜을 무릅쓸 정도로 열렬한 사랑조차도 한 껍질 벗겨보면 얄팍하고 이기적인 감정에 불과함을.

 

<민들레꽃의 살해>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는바 아니나 지나치다고 할까. 지팡이로 민들레꽃을 난도질한 것에 죄의식을 느끼고 죄책감에 절절매는 주인공. 어릴 적 괜스레 개미를 밟아 죽이고, 개미집에 물을 붓고, 지렁이에게 소금을 뿌려 꿈틀거리는 모습을 즐기던 나. 작중의 피셔 씨에 비하면 나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자행한 셈이 아니겠는가.

 

몸통은 뻣뻣하게 굳어 하늘을 향해 있고, 목줄기에서는 하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P.53)

 

작가는 민들레꽃을 의인화하여 잘려 나간 모습을 사람의 그것으로 간주한다. 진동하는 시체 썩는 냄새에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온 세상이 자신을 비난하는 양 양심에 괴로워한다. 이제 그는 과거처럼 살아갈 수 없다. 그의 안팎에서 그 꽃이 양심의 화신인 것처럼 그를 엿보고 간섭하고 판결 내리므로.

 

그 꽃은 하나의 양심처럼 아주 중요한 일부터 일상의 자잘한 일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P.66)

 

이 책에서 분량과 작품 밀도 면에서 단연 핵심적인 작품이 <꿈의 노벨레>. 모두가 단편 문학인데 이 작품만이 중편이니 일면 불공평하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해진 이 소설에서 슈니츨러는 작중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을 꿈으로 간주하도록 유도한다. 모범적인 가정, 이성적인 부부라는 외형에 숨겨진 무의식과 본능에의 충동, 그것은 낮이 아니라 밤에 꾸는 한 바탕 꿈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과 사회는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끝 대목은 따라서 상징적이다.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 부부는 어떤 꿈을 꾸었는가. 알베르티네가 품은 욕망은 무엇이고, 프리돌린이 밤에 겪은 모험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게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다. 부부 간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마음속에 숨겨진 자신도 모르는 욕망들”(P.151)을 드러내는 순간 프리돌린은 아내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자신이 사랑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알베르티네와 전혀 상반된 실체를 봐서다.

 

그 사람이 나를 불렀다면-그건 내게 분명했어요-나는 거역하지 못했을 거예요. 무엇이든 다 할 각오를 하고 있었거든요. 당신과 아이, 나의 미래까지도 희생할 결심을 거의 굳힌 것이나 다름없었죠. (P.153)

 

프리돌린도 숨은 욕망이 있지만 아내처럼 적극적이고 분명하지 못하였기에 이후 내내 배신감으로 귀가하여 아내를 마주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밤의 방황이 시작된 셈이다. 그의 방황은 아내의 솔직한 토로에서 자극받아 각성한 그의 내밀한 욕망이 불러온 것이기에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타인의 욕망을 민감하게 된다. 마리안네의 고백, 매춘부와의 만남, 가면 가게의 여자애, 그리고 나흐티갈을 통해 알게 된 비밀스러운 모임.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성적 욕망이 가면 아래 무자비하게 활개를 치는 세상. 여기서 가면은 익명성을 보장하는 최후의 장치다. 정체가 탄로 난 프리돌린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지는 수녀의 선택은 그리하여 죽음을 감수하는 헌신이다. 프리돌린은 이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비밀 모임의 세계로 들어간 건 무의식과 욕망의 강력하며 무한한 힘을 나타낸다. 그것이 비록 죽음을 가져올지라도.

 

가면무도회와 이어지는 부부간 대화 이전에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부부의 전형이었다. 그들에게 과연 부족한 점이 있을까 의심될 정도로. 이제 프리돌린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의심한다. 겉보기에 행복한 결혼 생활의 얄팍한 껍질 아래 근간을 뒤흔드는 불안정한 욕망이 얼마나 잠재되어 있는지를.

 

계단에 올라섰을 때 비로소 이 모든 질서와 이 모든 균형과 그의 삶의 이 모든 안정감이 가상이요 거짓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의식되었다. (P.274-275)

 

하지만 우리는 이를 거짓이라 단언하기 어렵다. 꿈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무의식이 의식 아래 숨겨져 있는 것은 그것이 의식으로 올라오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고 있어서다. 무의식의 거리낌 없는 발현은 개인 스스로와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 지구가 지각과 맨틀로 이루어져 있듯이, 우리네 마음도 밑바닥에 꿈과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 된다. 프리돌린은 잃어버린 가면을 통해 알베르티네가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럼요 확실하게 믿어요. 하룻밤의 현실, 그래요, 한 사람의 인생 전체의 현실도 그 사람의 가장 내면 깊은 곳에 담겨진 진리를 뜻하지는 않는다고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으니까요.”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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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전쟁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미래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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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들의 전쟁><영혼의 기계적 조작에 관한 담론>은 앞서 읽은 <통 이야기>와 부분적으로 주장하려는 요지가 중첩한다. 해당 내용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기독교 철폐론에 대한 반론>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종교 상황에 대한, <아일랜드의 현 상황에 대한 소고><겸손한 제안>은 정치 상황에 대한 풍자적 글이다. 스위프트의 처절한 상황 인식과, 좌절감과 아이러니가 수록 작품 전반에 걸쳐 배어 나온다.

 

<책들의 전쟁>

 

우화의 형식을 빌린 산문 작품이다. 주제 의식이 너무나 명료하여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그리스·로마의 고전학문과 현대학문 간 우열 논쟁을 다룬다. 도서관에서 해당 책들이 전쟁을 벌인다는 설정이다. 당대로서는 현대학문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이들 또한 고전학문이다. 데카르트, 베이컨 같은 저자가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이제 이런 논쟁은 무용하다. 21세기의 현시점에서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은 지고의 선으로 인정받는다. 당장 국가와 사회의 경제발전과 개인의 부귀영화를 우선시하는 우리에게 현대학문은 무조건 우월하다. 물론 고전의 가르침과 재인식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게 현대학문을 대체하지 못하므로.

 

이 작품은 고전작가를 추켜세우고, 현대작가를 맹렬히 비판한다. 전자는 꿀을 모으는 벌이요, 후자는 독거미다. 전자는 머리가 아주 가벼운 사람이며, 비평이라고 불리는 악독한 여신의 비호를 받고 있다. 그네들의 대변자인 워튼과 벤트리는 잡종 똥개로 묘사되며, 고전작가의 옹호자인 템플은 그리스 신들이 함께하는 당당한 기사로 묘사한다.

 

스위프트는 시류의 변화를 재빨리 읽어내는 인물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고전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작풍은 오히려 현대학문에 가깝다. 그런 그가 고전학문을 현대학문에 비해 우위를 둔다는 점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의 글을 찬찬히 살펴보면 묘하다. 그렇게 열렬히 지키고자 하는 고전학문 자체에 대한 장점과 유익함을 설파하는 대목은 찾기 어렵다. 상대적으로 현대작가들의 병폐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스위프트는 애초에 고전학문의 우열 또는 옹호에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동시대 작가들의 지적 얕음과 가벼움, 비판만을 능사로 여기는 태도, 저작 관습의 타락 등을 풍자하려는 게 그의 원래 의도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접근하면 이 작품은 더욱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다.

 

그곳에는 또한 그녀[비평]와 자매 사이인 평판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눈을 가리고, 고집스럽게, 현기증이 날 정도로 끊임없이 몸을 돌려대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의 자식들인 소음, 몰염치, 우둔, 허영, 현학, 무례가 놀고 있었다. (P.47)

 

<영혼의 기계적 조작에 관한 담론>

 

종교적 열광주의 혹은 광신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유사한 행태인 듯하다. 어쩌면 자체가 종교의 내재적 속성일지도. 종교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종교 간 갈등과 유혈 분쟁, 같은 종교 내에서 종파 간 다툼 등은 결국 특정 가르침을 절대 선으로 여기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나마 개인이 신앙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열광에 빠진다면 그것을 개인적 사안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이것이 누군가의 인위적 조작에 의한 결과라면 전혀 다르다.

 

이 유명한 기술(즉 종교적 열광을 인위적으로 조작해내는 기술)을 시행하는 업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원칙에 입각하여 일을 진행시켜 나간다. 우리 지각 기관들의 몰락이 성령을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P.97)

 

스위프트는 영국 국교회 입장에서 열광적 행태를 보이는 청교도 등의 비국교도와 신비주의 종파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의 분석은 흥미롭다. 조작자들은 사람들의 이성과 지각을 서서히 마비시킴으로써 광신을 불어넣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내용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 음성, 행동 모두가 한가지 목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숙련된 조작자라면, 고도의 이성을 지닌 일부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사이비종교에 무지각적으로 빠져든 사람들의 예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이러한 수단이 종교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신앙을 넘어 정치, 이념, 사회적 사안은 물론 학문적 영역까지도 효과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데, 조작을 통해 영혼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어서다. 나치와 파쇼를 용인하고 지지한 독일과 이탈리아 국민이 형편없이 무지몽매한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와 종교 갈등으로 혈연 간에 죽음이 난무했던 역사적 경험은 오래되지 않았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스위프트의 지적은 예사로 넘기기 어렵다.

 

성령이라는 선물을 팔아먹는 이 신비라는 것이 사실은 다른 여타 장사꾼들의 행위들과 똑같이 연습과 노력에 의해 숙달될 수 있고, 또 똑같은 훈련에 의해 습득될 수 있는 장사 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P.107)

 

<기독교 철폐론에 대한 반론>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 철폐론이 가당키나 한 주장인지 모르겠다. 합리와 이성의 인식이 성장하면서 기독교에서 불합리성과 신비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당대에 등장하여 제법 세력을 형성하였던 듯하다. 스위프트는 영국 국교회 사제이므로, 여기에 반대하는 논의를 전개하였음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산문 작품도 분위기가 묘하다. 정통주의라면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서 기독교 교리의 본질과 요지, 그것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에 대해 피력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그렇지 않다. 저자의 진의가 표제 그대로 기독교 철폐론에 대한 반론인지 아니면 찬론인지 헷갈린다. 표피와 행간 사이의 엇박자와 묘한 긴장감은 스위프트 특유의 풍자와 아이러니로 인해 발생한다.

 

저자는 우선 자신의 글이 명목상의 기독교를 옹호하는 것이지, 진정한 기독교 옹호는 아니라고 선언한다. 진정한 기독교는 초기 기독교의 순수하고 소박한 신앙을 가리키는데, 그게 아니라면 당대의 기독교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한 모습의 초기 기독교는 이미 현재 우리 나라의 모든 부와 권력의 구도들과 너무나도 맞지 않아 모든 사람들의 동의하에 이미 완전히 포기되어 버리고 말았다. (P.141-142)

 

이후 그는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하는데, 기독교를 철폐할 경우 발생하는 실제적인 이익과 손해를 비교할 때 철폐에 반대한다는 논의를 전개한다. 일요일에 노동할 수 있으니 이익이라는 의견, 각종 파벌과 파당을 없앨 기회라는 점, 인간은 누구나 비난과 멸시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 등이 제기되고, 철폐할 때 교역과 주식의 경제적 측면에서 손해가 크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나아가 저자는 기독교 철폐를 확장하여 종교 철폐에 더 본질에 접근하는 용어라고 제안한다.

 

기독교를 철폐하자는 건가 아니가. 스위프트의 속내는 당대의 기독교는 초심을 잃은 명목상의 기독교로 악폐에 찌들어 있으니, 진정한 모습의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있다. 열광에 빠져들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상 종교 자체를 없앨 수 없으므로 철폐론에 대한 반론으로 기독교 개혁론을 내세운 게 아니겠는가.

 

<아일랜드의 현 상황에 대한 소고>

<겸손한 제안>

 

이 두 산문은 한 쌍으로 간주하는 게 옳다. 영국인이지만 아일랜드에서 태어났기에 스위프트는 비참하고 차별받는 아일랜드에 동정심을 품었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온갖 불공평과 탄압에 신음하는 아일랜드의 상황에 대한 고찰과 함께 이 글에서 잔혹하면서 겸손한 제안을 아일랜드 당국과 영국에 제기한다.

 

아일랜드 사람은 나면서부터 가난과 기아, 탄압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굳이 이렇게 아이를 낳고 키울 필요가 없다. 아기들을 목장의 돼지와 소처럼 사육하고 도축하여 고가의 식용 고기로 제공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태어나느니 못할 불행한 운명의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남은 가족의 삶이나 개선하고, 국가적으로도 효용성을 높이자는 제안이다. 지극히 잔인하며 냉소적인 주장인데 저자는 굉장히 담담하고 실용적으로 접근하여 은근히 설득력 있는 게 아이러니다.

 

어떤 사람도 내게 이 방법 이외에, 우리 나라를 구제하는 다른 방법들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 예를 들면, 우리의 부재 지주들에게 1파운드당 5실링의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 [......] (P.206)

 

다른 개선 방안을 언급할까 봐, 저자는 사전에 차단한다. 보다 실천적이고 효과적이며 합리적인 방안을 죽 나열하면서 이따위 방법은 논외로 하라면서. 일견 허무적이기도 한데, 합리적 제안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통렬한 자기 인식의 반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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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들에게 주는 지침 평사리 클래식 2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평사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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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를 포함한 풍자문학의 대가 스위프트가 만년에 수년에 걸쳐 쓴 글이다. 최종적으로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가난했던 작가는 먼 친척뻘인 귀족의 집에서 식객 겸 비서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눈칫밥 먹는 처지에서 목격했던 하인들의 행태, 훗날 그가 고용했던 하인들의 경험에서 이런 예리한 탐구가 가능했을 것이다.

 

글은 모든 하인들에게 주는 일반적인 지침과 개별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들로 구성되었는데, 우선 18세기 하인들의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한지 놀랐다. 집사, 요리사, 정복 착용 하인, 마차꾼, 말구종, 재산관리 집사, 문지기, 침실 담당 하녀, 몸종 하녀, 청소 담당 하녀, 버터 제조 담당 하녀, 보모, 유모, 세탁부, 하녀장, 여자 가정교사. 모든 귀족계층이나 중산층이 이들을 다 고용하지는 못하였을 테고, 부의 수준에 따라 전부 또는 일부만을 채용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대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지닌 작가이니만치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이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안내가 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대단히 해학적이고 우회적인 표현으로 시종일관하는 그의 지침은 한마디로 최대한 주인의 등골을 빼먹고 철저히 이기적으로 되라는 것이다. ‘모든 하인들에게 주는 일반적인 지침의 몇 대목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땐 뻔뻔하게 적반하장으로 나가라. 그리고 마치 피해자인 양 행동하라. (P.9)

 

당신에게 특별히 할당된 고유 업무 외에는 그 어떤 업무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라. (P.14)

 

이상하지 않은가? 현대 우리네들의 조언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목소리 큰 게 임자라며, 자기 잘못을 무조건 부인하는 풍조와 유사하다. 내 업무와 타인의 업무는 칼같이 구분하여 절대로 맡고자 하지 않는 게 요즘 세태가 아닌가. 이처럼 18세기라는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은 여전하다는 것을 이 글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하인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이기적인 하인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게 현명하지 못한 주인이다. 고용주로서 피고용인인 하인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홀대하며, 그들이 눈치를 보며 행동을 정할 수 있도록 모범적인 언행을 갖추지 못한 주인들. 결국 하인은 주인의 눈에 들도록 애쓰기 마련이기에 사소한 말,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이에 따라 반응한다.

 

상전의 본을 따라 누구보다도 이런 자들은 더 홀대하는 것이 당신 같은 집사나 식탁 서비스를 담당하는 정복 착용 하인의 임무다. (P.34, 집사)

 

마님께서 도박을 좋아하신다면 당신의 행운은 영원히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적절한 도박은 당신에게 일주일에 10실링 정도의 부수입을 가져다 줄 테니까. 그런 집이라면 나는 가정목사나 재산관리인이 되는 것보다도 오히려 집사가 되는 편을 택하겠다. (P.53, 집사)

 

몸종 하녀 편에 이르러서는 주인의 성적 유혹을 조심하고 사리를 잘 살펴서 선택적으로 대응하라고 조언한다. 당시 하녀들을 대상으로 유사한 사례가 빈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마님의 연애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유독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지침은 하인들 간의 단결과 협력이다. 외란 중에는 내홍은 덮어두는 것처럼, 공공의 적인 주인으로부터 이익을 최대한 쟁취하고 수호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단합하라는 의미다.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당신들끼리는 서로 싸워도 된다. 내 말은, 당신들에게는 공공의 적인 주인님과 마님이 있으며 공통으로 수호해야 할 공공의 목적이 있다는 걸 명심하란 소리다. (P.20, 모든 하인들에게 주는 일반적인 지침)

 

모두의 공익을 위하여 그 내용을 엿들어라. 그리고 모든 하인들이 일치단결하여, 하인 사회를 해칠 수 있는 개혁조치들을 막기 위해 적절한 조치들을 취하라. (P.100, 정복 착용 하인)

 

이 작품은 여러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표제 그대로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인들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처신 요령의 집대성이라는. 역으로 주인들에게 주는 지침으로 볼 수 있다. 하인들의 다양하고 불합리한 행동의 현상과 원인을 간파하여 이들을 적절히 부리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이 글을 실용적인 지침서로 보지 않을 수 있다. 스위프트가 젊은 시절이 아닌 최만년에 이르러 쓴 글에서 굳이 실용성을 염두에 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결국 그의 여타 작품처럼 이 또한 인간과 사회를 향한 우스꽝스러운 풍자가 본령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보면 18세기의 당대와 21세기의 현대에도 근본적인 인간 본성은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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