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데 고야 - 붓으로 역사를 기록한 화가 내 손안의 미술관 8
엘케 폰 라치프스키 지음, 노성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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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독서 2탄이다. 부제 붓으로 역사를 기록한 화가는 저자가 아니라 출판사가 붙인 듯하다. 부분적 연관성은 있지만 이 책의 성격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저는 독일어인데, 표제는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겨울>이다.

 

원제와 차례를 보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는 하는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구성은 크게 1벽걸이 양탄자 그림에 일가를 이루다’, 2고야가 그린 사계’, 3붓으로 진실의 얼굴을 그리다이다. 2부가 핵심인데, 특이한 것은 고야의 그림 중 사계, 특히 겨울을 제재로 삼았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고야의 생의 이력을 따르지만 초점은 다소 다르게 가져간다.

 

대가로 성공하기 이전의 고야를 1부에서 다룬다. 마드리드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낙방하고 이탈리아 아카데미에 합격한 고야. 태피스트리, 즉 벽걸이 양탄자 밑그림으로 성공하고, 이어 성당의 천장 벽화를 그리는 단계로 나아간다. 3부의 경우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판화집 <변덕><전쟁의 참화>를 이야기하지만, 깊게 파헤치지는 않는다. 다만 판화집 <변덕>을 당대 도덕 교육을 위한 그림으로 이해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화가로서 고야의 삶 중에서 주목할 점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화법에 도전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도 일흔다섯의 나이에 석판화를 학습한 점을 언급한다.

 

고야의 사계 연작은 이전 책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작품이다. 이 저자는 왜 특히 <겨울>에 집중하였을지 궁금하다. 고야 이전의 사계 그림은 예쁜 장식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도 상쾌하게, 매서운 겨울도 따뜻하게 그려 보는 이로 하여금 흐뭇한 정서를 품게 만드는 그림으로. 고야는 전혀 다르다.

 

고야의 겨울은 정말 겨울답다. 매서운 추위에 몸이 절로 웅크려드는 겨울이다. 고야는 매섭게 휘날리는 눈보라와, 얼음처럼 얼굴을 찌르는 겨울 바람을 붓으로 그렸다. (P.72)

 

단지 겨울답게 추위를 제대로 그렸다고 대단하지 않지 않는가. 저자는 <겨울> 그림 속 여러 요소를 분석하면서 당대 에스파냐 사회와 미술 화풍을 함께 분석한다. 겨울바람을 막고자 옷자락을 뒤집어 쓴 남자들의 펄럭이는 옷자락이 갖는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우하단의 꼬리를 말고 있는 개의 모습이 갖는 그림 속 함의가 어떠한지. 말년의 <>에 이어 <날개 달린 개>까지 이르러서는 당대 사회의 마녀와 광기를 파헤친다. 그것은 에스파냐를 지배했던 가톨릭 교회의 불의와 압제와도 연관된다.

 

에스파냐는 이성과 학식을 갖춘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였다. 모든 국민들이 마녀나 악마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고, 도처에 검은 미신과 마술이 판치는 나라에서 이성의 능력을 설명하는 학자는 기를 펴기 어려웠다. (P.97,99)

 

출세지향적인 고야의 화가로서 경력은 양탄자 밑그림에서 출발하여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치고, 수석 궁정화가가 되어 왕과 왕실의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영광의 절정에 이른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고야가 장수하지 않고 이때 죽었더라면 우리는 고야를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고야의 위대성은 귀가 먼 이후 <변덕><전쟁의 참화>, 그리고 검은 그림연작으로 이어지면서 당대 사회와 종교의 야만과 비이성을 드러내고, 고상한 대의를 내걸지만 실은 수많은 보통사람의 삶을 무너뜨리고 학살을 유발하는 전쟁의 참화를 고발한 데 있다. 나아가 빛과 밝음의 거짓과 위선 속에 내재한 어둠과 근원적 두려움과 공포를 보여준 데 있다고 본다.

 

고야는 두 눈을 똑바로 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고야는 자신이 흘러간 낡은 시대와 다가올 새 시대를 고루 체험할, 역사의 격동기 한복판에서 살아 있는 증인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P.10)

 

장수와 다작의 화가 고야의 그림 중에서 풍경화와 정물화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은 특이하다. 초상화든, 마호와 마하 그림이든, 벽걸이 양탄자 밑그림은 물론, 동판화의 단색 속에서도 고야는 집요하게 사람을 그리려고 하였다. 하다못해 노년의 투우 그림조차도 소와 더불어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역자는 고야를 에스파냐의 역사를 그림으로 나타낸 화가라고 칭한다. 고야가 의식적으로 역사를 담으려고 애쓰지는 않았다고 본다. 고야는 그저 자신이 목격한 당대의 현실, 즉 미신과 종교와 전쟁이 가져온 불의와 비이성과 야만성을 그림으로 충실히 기록하려고 하였다. 그는 분명히 알았다. 이것이 올바른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인류는 분명히 보다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그러한 고야다움의 단초를 저자는 <겨울> 그림에서 읽어내려고 하였다.

 

이 책 역시 미술서적답게 고급지를 사용하고 컬러인쇄를 통해 고야의 그림은 물론, 관련된 선대와 후대 화가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다만 저자의 의도가 명확하기에 이 책이 고야의 전모를 충실하게 담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고야에 관한 기초지식을 가진 상황에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고야 화풍의 일면을 제시하여 관심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유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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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소프라노 원상미 독창회 'Summer Love'

일시 : 2026년 7월 10일(금) 19:30

장소 : 영산아트홀

연주 : 원상미 (소프라노), 이미나 (피아노)

프로그램

  - 그리그, 6개의 가곡 Op.48

             1곡 '인사'

             3곡 '세상의 이치'

             4곡 '비밀을 지킨 나이팅게일'

             5곡 '장미의 시절에'

  - 라벨, 5개의 그리스 민요

             1곡 '신부의 노래'

             2곡 '저기, 교회를 향해'

             3곡 '어떤 멋쟁이가 나와 같을까'

             4곡 '유향나무를 따는 여인들의 노래'

             5곡 '모두 즐겁게!'

  - 바일, 미트볼의 노래

  - 바일, 야간 근무하는 친구에게

  - 바일, 유칼리

  - 바일,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 거슈윈, 날 지켜줄 사람

  - 거슈윈, 내가 사랑하는 그대에게

  - 거슈윈, 슈트라우스의 음악


* 세줄평

성악 연주회는 거의 가지 않는다. 이유는 언어를 알지 못해서다. 이번에 큰맘 먹고 독창회를 찾는다. 연주곡 모두 한번도 들어본 적 없이 낯설다. 그리그의 가곡이 끌린다. 특히 3곡과 4곡이. 바일의 '유칼리'와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가 자아내는 슬픔의 절절함이 느껴진다. 상대적으로 라벨과 거슈윈의 노래는 아직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두 번째 앙콜곡 '서머타임'은 약간의 연출과 어우러져 대미를 장식하기에 훌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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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소녀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18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정소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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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청목사에서 출간한 그린 북스 시리즈가 있었다. 청소년 대상의 명작 소설 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개는 익히 아는 작품들이지만 일부 책은 굉장히 생소하였다. 문득 작품 목록을 훑다 보니 <아일랜드의 봄><파란 눈의 아가씨>라는 표제와 작가 E.오브라이언이 궁금해졌다. 두 책은 일찌감치 절판되었고, 각종 도서관에서조차 찾기 어려웠다. 다행하게도 근년 들어 오브라이언의 책이 몇 권 번역되어 나왔는데, <시골 소녀들><아일랜드의 봄>과 같은 책임을 알게 되었다. ‘시골 소녀들’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며, 원제는 시골 소녀들이 맞다. 그린 북스의 경우 표제를 좀 더 그럴듯하게 의역해서 붙인 모양이다.

 

이 소설은 발표 당시 아일랜드 내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한다. 어떤 내용이 외설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윤리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설정은 10대 중반인 화자 캐슬린이 노신사 젠틀먼과 교제하는 대목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원조교제에 가까운데 여기서 그들은 육체관계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이 오래된 마을을 떠나는 게 아쉽지 않았다. 지쳐빠지고 늙은, 바스러지고 무너져가는 죽은 마을이었다. 가게들은 칠을 새로 해야 했고, 위층 창턱의 제라늄은 내가 어렸을 때보다 그 수가 줄어들었다. (P.209)

 

물론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1960년 이전 아일랜드 시골의 궁핍한 삶, 가정폭력과 가부장적 권위가 지배하는 가정의 모습, 캐슬린과 바바가 다니는 수녀원 학교의 과도한 금욕주의 교육 방침 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에 즐거운 마음을 지니지 못하리라. 더블린으로 탈출한 두 사람이 부유한 중년남성과 어울리는 장면 또한 썩 유쾌하지는 못하다. 이런 내용이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닌 이들에게 특히 반발을 유도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캐슬린이 가족과 집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집은 형편없이 쇠락한 가운데 아빠는 술에 의존하고 주기가 차면 부인과 딸을 마구 때린다. 화자는 이미 아빠를 두려워하고 아빠로서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엄마마저 사고로 세상을 떠나니 설상가상이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여 수녀원 기숙학교에 장학생으로 갈 수 있게 되었지만, 학교의 교육 방침과 운영 방식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가혹할 정도다. 공교롭게 최근에 읽은 소설들에서 영국, 독일, 아일랜드로 국가와 종교는 다르지만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은 학생들에게 매우 비교육적으로 훈육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책에서도 감옥으로 표현하고 감옥처럼 묘사한다.

 

캐슬린과 바바는 외모, 성격, 가정형편 등에서 매우 대조적이다. 비교적 유복한 바바는 캐슬린을 시종일관 무시하고 독설을 퍼붓거나 노골적으로 질투하고 나쁜 행동에 동참하도록 꼬드기는 등 어찌 보면 악역에 가까운 역할이다. 그저 수동적으로 당하는 캐슬린의 태도가 이해 안 될 때도 있지만, 결핵에 걸려 떠나는 바바를 바라보며 캐슬린이 품는 감정 상황은 독자가 쉽게 예단하기 어렵다.

 

내 영혼이 살아 발딱거렸다. 황홀감.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것. 살면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P.102)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축은 캐슬린과 젠틀먼 씨에게 있다. 병든 아내를 둔 노신사에게서 캐슬린은 우정 이상의 것을 발견하고 애정으로 나아가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젠틀먼 씨가 적극적으로 어린 숙녀를 유혹하였다는 비난은 온당치 않다. 두 사람은 그저 감정이 합치되었을 뿐이다. 캐슬린은 젠틀먼 씨에게서 아빠에게서 구할 수 없는 부성애를 기대하였을지 모른다. 부유한 노신사가 베푸는 여유롭고 은근하며 안정된 접대와 에티켓에 마음이 쏠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공간에서 손을 잡거나 입맞춤을 하면서 서로 간에 기쁨을 느낀다. 그들은 관계의 진전을 바라지만 서두르지 않기에 내심으로는 바라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두 사람의 최초이자 마지막의 용기 있는 일탈은 젠틀먼 씨의 전보와 함께 날아가 버린다.

 

젠틀먼 씨와는 늘 그런 식이었다. 만사가 완벽해지는 순간, 그는 완벽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멀어졌다. (P.272)

 

난 벌써 슬퍼졌다. 그 누구도 그를 진정으로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너무 초연했다. (P.287)

 

화자 캐슬린은 솔직하다. 자신과 자신의 처지를 옹호하거나 도색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신이 바라보는 주변 환경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의 시각에 자신의 시골 마을은 쇠락하고 영락한 자취가 역력하다. 수도 더블린이라고 나을까? 물론 젊은 사람을 자극하는 상대적 번영과 활기를 인정하겠지만, 그것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도 캐슬린은 노동을 해야 한다. 화장을 하고 화려한 대도시로 돌아다니는 저녁의 삶은, 점원으로서의 낮을 토대로 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키득거리면서, 낯선 승객들에게 어쩌라고식의 표정을 보이면서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내 생각에 우리가 대도시에 도전적으로 맞서는 들뜬 시골 소녀들의 삶을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P.209-210)

 

어쩌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그때까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던 십 대 소녀를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그들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 그들의 시각으로 가면 아래 뒤틀린 당대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캐슬린을 응원하고 옹호하지만 따끔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토록 사랑했던 엄마의 기일을 자신은 잊었지만, 자신이 그렇게나 미워했던 아빠는 기억했음을 보여주면서. 어쩌면 캐슬린은 젠틀먼 씨를 실체가 아니라 실현될 수 없는 공상의 꿈으로서 사랑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을 던지면서 말이다.

 

내가 참 어리석고, 가장 친한 친구였던 히키뿐 아니라 잭 홀랜드와 마사와 브레넌 아저씨 모두에게 의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의 실제 인물들 모두에게. 젠틀먼 씨는 그저 그림자였지만 내가 열망하는 것은 그 그림자였다. (P.2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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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로제 마리 & 라이너 하겐 지음, 이민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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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미술관의 고야 전시회 얼리버드 티켓을 구입한 후 생각하니 정작 고야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화가 이름은 그래도 들어봤는데, 작품은 <옷을 입은 마하><옷을 벗은 마하> 정도만 떠오를 뿐. 이 책을 뒤적거리니 그나마 <사투르누스>도 본 기억이 있다.

 

예습 차원에서 고야 관련 책을 읽으려고 하니, 확실히 저명한 예술가답게 관련 도서도 제법 출간되어 있는데 이 책이 제일 무난할 것 같다. 신국판보다 조금 더 큰 판형에, 100쪽에 못 미치는 얄팍함이 오히려 독서에 부담이 없다. 고급지에 수록 그림도 선명하다. 본문의 글자 크기가 다소 작고 빽빽한 게 불편할 수도 있다. 이 책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삶을 온전히 추적하는 대신, 화가로서 고야의 작품 세계를 시기별로 크게 일곱 개로 특징지어 각각의 장으로 집중하여 다룬다.

 

세속적으로 성공한 화가로서 고야는 무명 시절의 태피스트리 밑그림과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초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는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단지 밑그림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독자적인 예술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자체로도 의의가 있다. 태피스트리 제작자가 제작에 난색을 보일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꼭두각시> 같은 작품에서는 장식성을 넘어서 상징적 비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후기의 고야가 결코 뜬금없이 나온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초상화가로서 대표작에 화가 자신이 슬며시 등장함도 이색적이다.

 

소위 저항하는 지성으로서 고야는 <로스 카프리초스><전쟁의 참화> 판화 연작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고야는 건강상의 위기를 겪고 청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이후 고야의 주요 걸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문득 작곡가 베토벤이 떠오른다. <로스 카프리초스> 단색 판화에 거칠게 표현되는 환상과 악몽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만연한 인간의 악행과 무지, 종교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미적 아름다움을 지고의 가치로 내세우던 당대 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스페인 지배, 왕정복고 이후 시행된 반동 정치에서 무수한 피해를 당하는 계층은 결국 힘없는 민중들이다. 그들 처지에서는 전쟁과 죽음을 일삼는 지배층은 모두 똑같을 따름이다. <전쟁의 참화> 판화 연작은 전쟁과 이것에서 비롯한 온갖 비인간적 만행에 대한 고발이다.

 

노년의 고야는 귀머거리의 집에서 은거하며, 오로지 자신을 위한 작품활동에 매진하는데, 이것이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른바 검은 그림이다. 자식을 잡아먹는 유명한 <사투르누스>는 물론 <산이시드로 순례여행>, <곤봉 결투>를 보면 구원할 수 없는 절망의 심연에 저절로 뭉크처럼 절규하게 된다.

 

어두운 그림들은 교회에 의한 구원의 약속과 계몽주의에 의한 삶의 조건의 향상 모두에 깊은 회의주의를 입증한다. 이는 단지 회의주의가 아니라 절망이었을 것이며, 공허한 하늘에 존재하는 날아다니는 마녀와 악마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P.76)

 

<옷을 벗은 마하><옷을 입은 마하>에서 마하(원래는 마야로 잘못 알았다)가 모델 여성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완전히 틀렸다. 마하는 하류층의 여성을 일컫는 용어로서 남성형의 마호와 짝을 이룬다. 이들이 어떤 유형의 여성인지는 비제의 오페라 여주인공 카르멘을 떠올리면 충분하다.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당당함과 도발적인 태도, 뜨거운 열정을 지닌 여성. 그래서일까, 옷을 벗은 마하는 관객의 시선 앞에서 나신을 드러내면서도 부끄러움 없이 무표정하게 당당한 포즈를 취한다. 이 책에서는 마르시알리다드라고 표현한다. 참고로 당대 스페인에서는 종교적으로 누드화가 금지되어 종교재판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마하의 자유로움은 인습과 속박에 억눌린 상류층 여성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고, 마하의 옷차림이 패션으로 유행하였다고 한다.

 

마호의 상대인 마하는 자신의 도발적인 매력에서 기쁨을 찾는 격정적인 여인을 뜻했다. 뻔뻔하면서도 재치 있게 답해야 했으며, 오렌지와 밤을 팔거나 귀족 가정의 하녀로 생활하며 돈을 벌었다. 대개는 자기의 마호를 먹이고 입혀야 했으므로 일을 열심히 했다. (P.10)

 

말년의 고야는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로 일종의 망명 생활을 한다. 혼란스러운 스페인에서 안전을 기약할 수 없었던 그는 <보르도의 황소들> 석판화 연작에서 투우를 소재 삼는다. 이미 수년 전 <타우로마키아> 판화 연작을 남긴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태생적으로 스페인 사람임을 그림을 통해 입증한 셈이다.

 

고야는 화가로서는 드물게 인문학자의 관심을 끌었다. 왕실과 귀족의 기호에 영합하는 성공한 화가 이면에 자리 잡은 어둠과 비극, 고통, 절망, 환상을 담은 그의 후기작들을 둘러싼 해석은 분분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가 던진 미적 본질에 대한 의문과 화가의 역할에 대한 성찰은 후배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니, 19세기 전후를 풍미했던 당대의 화가를 넘어서 현대까지도 지속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기준을 수립했다. 또한 인간의 가장 어두운 두려움과 야수적인 충동을 눈으로 보이게 했다. 당시 어떤 화가와도 달리, 고야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넓혔다. 19세기의 낭만주의는 처음으로 이를 감지했고, 20세기의 잔혹한 전쟁은 그의 인간에 대한 시각을 공포스럽게 확인시켰다.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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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의 소녀 쏜살 문고
크리스타 빈슬로 지음, 박광자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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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소녀 마누엘라>이다. <제복의 소녀>라는 표제는 <제복의 처녀>라는 영화명에서 가져왔다. 시나리오 작가가 크리스타 빈슬로다. 이 작품은 사실 연극에서 출발하여 영화화되었고, 작가가 이를 토대로 소설화한 것이다. 순서로만 보자면 소설이 가장 마지막이다. 대중적인 인기는 영화에서 얻었는데, 1931년과 1958년 두 차례에 걸쳐 영화화되었고,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로 불린다.

 

소설로만 보자면 이 작품을 단지 레즈비언 성향으로 치부하기는 곤란하다. 전체 6개 장 가운데 전반부 4개 장은 마누엘라의 탄생부터 아버지의 전출과 퇴직, 큰오빠와 어머니의 죽음을 겪기까지 가족사가 이어진다. 후반부 2개 장에서 마누엘라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기숙 학교에 입학하여 폰 베른부르크 선생을 만나게 된다. 크게 보자면 이 작품은 마누엘라의 비극적인 결말로 나아가는 성장 소설의 성향이 강하다. 작가가 연극 및 영화와 다른 방향으로 소설을 쓴 것은 기존 유명세를 끌었던 연극과 영화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성에서 벗어났기에 조금 더 폭넓은 세계를 그리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작품의 레즈비언 성격을 조금 더 언급하자면, 세상에 의지할 데 없는 마누엘라는 폰 베른부르크 선생에 집착한다. 기숙 학교에 오기 전에 프리츠의 어머니 잉에 부인에게 느꼈던 감정과 흡사하다. 그것은 상실한 어머니에 대한 일종의 대안 또는 대체재로 생각할 수 있다. 마누엘라의 순수하고 강렬한 감정을 의식하는 폰 베른부르크 선생 또한 마누엘라를 특별하게 생각하지만 훌륭한 교육자답게 감정을 자제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선생과 소녀의 가벼운 키스 장면 하나만을 확대해석하여 성애적 분석을 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영화와 소설은 지향점이 다르다.

 

렐라는 두 손을 꽉 잡고 결심을 털어놓으려고 뜨거운 얼굴을 그 손에 묻었다. 선생님의 손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대로 있었다. 폰 베른부르크 선생은 두 손으로 눈물에 젖은 렐라의 얼굴을 들어 올려 몸을 숙여서는 떨리는 그 입에 키스를 했다. (P.210)

 

이 소설은 살펴볼 대목이 여럿 있다. 먼저 기숙 학교의 국가주의적 운영 원리다. 이 학교는 아가씨를 프로이센 장교 부인이 될 여성으로 교육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교장 선생 이하 폰 케스텐 선생에 이르기까지 학교 운영진은 철저하게 국가 방침을 맹종한다. 오로지 엄격한 규율과 수동적 순종만 요구될 뿐 개성 발현은 억누르기에 급급하다. 그렇기에 음주 소동을 일으킨 마누엘라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중대한 규율 위반자로 처벌의 대상으로 간주할 뿐이다. 실은 이러한 국가주의적, 전체주의적 성향은 프로이센 국가의 지도적 속성임을 작가는 교장 선생과 폰 케스텐 선생의 대화를 통해 독자에게 알려준다.

 

생각을 하지 마세요, 선생님. 그냥 따르기만 하세요. 우리 프로이센을 강하게 만든 것은 복종이지, 폭식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교장 선생님, 맞는 말씀이십니다.” (P.227)

 

큰오빠와 엄마의 죽음 이후 마누엘라의 방황을 추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빠 마인하르디스 중령뿐이지만, 그는 오히려 가정을 벗어나 개인적 향락을 추구하기에만 바쁘다. 외로운 마누엘라는 프리츠와 사귀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아버지는 그녀를 기숙 학교에 보낸다. 기숙 학교에 보내는 행위가 어떤지 그는 잘 알고 있고 탐탁지 않지만 그에게는 마누엘라를 적극적으로 보살피려는 의사가 없다. 마누엘라가 곤경에 처해 있는 때에 뜬금없이 보여주는 마인하르디스 중령의 눈부신 남국 해변의 사랑 유희는 강한 대비를 드러낸다.

 

이렇게 보면 마누엘라는 사랑하는 대상을 모두 빼앗기고 소외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큰오빠, 엄마, 프리츠와 잉에 부인. 따라서 마누엘라가 폰 베른부르크 선생에 몰입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선택이기도 하다. 우리도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좋아하는 교사가 가르치는 과목에 더 매진하고 수업 시간에 집중한 기억이 있지 않은가.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모든 것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모든 행동은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 그분을 향한 충실한 봉사였다. 모든 것, 그 어떤 것도 모두 선생님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하루가 종소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그분의 목소리에 따라 움직였다. (P.179)

 

마누엘라의 성적 정체성을 헤아려볼 수 있는 표현을 작가는 자주 남긴다. 분명한 건 마누엘라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제약을 받는 여성의 지위에 답답해하고 마음껏 자유를 발산할 수 있는 남성 지향적 감정을 표출한다. 연극에서 남성 역할을 맡았을 때 크게 기뻐하고 열연을 펼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것을 성적 관점에서 파악할 것인지 아니면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남녀평등 지향으로 볼 것인지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마누엘라는 구원을 청하듯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는 여자가 싫어요. 남자가 되어서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요. 교장 선생님께는 말하시면 안 돼요.” (P.189)

 

음주 사건으로 집단 따돌림의 처벌을 받는 마누엘라가 기대할 바는 오직 폰 베른부르크 선생이다. 그녀야말로 허약한 마누엘라가 삶의 의미를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푸라기였으므로. 폰 베른부르크 선생은 교육자이자 성인이므로 마누엘라처럼 선택할 수 없다. 그녀는 교장 선생의 명령과 지시에 결국 굴복하고 만다. 마누엘라의 최후의 간절한 바람을 끝내 외면하면서.

 

한마디만 해 주세요. 작은 소리로요.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라고. 그러면 진정할 게요. 무엇이든 다 하고, 무엇이든 참아 내고, 복종하고, 착해질게요.” (P.278)

 

우리는 마누엘라를 희생자로, 기숙 학교를 가해자로 섣부르게 재단하기 쉽다. 서두에 재산을 탕진하고 아메리카로 떠나는 카이저마르크 중위를 시작으로 작품 속 모든 인물이 모두 피해자다. 일체의 개성과 자유를 억누르고 국가를 최우선시하는 프로이센 체제의. 이 작품의 대단원은 극적이며 상징적이다. 우리는 학교와 학생, 폰 베른부르크 선생의 앞날이 매우 궁금하다.

 

이 작품은 일찍이 청목사의 그린북스 38, <제복의 처녀>(왕수영 역)로 출간되었다. 작가명을 크리스티나 윈스뢰로 표기한 점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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