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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수록작>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붉은 꽃 속에서
내 여자의 열매
아홉 개의 이야기
흰 꽃
철길을 흐르는 강
<어느 날 그는>
사랑은 묘하다. 생판 남남인 남녀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심지어 부모보다도 더 소중하고 친밀한 관계로 변모시킨다. 남남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거나 사소하여 지나치기에 십상인 미묘한 언행이 순식간에 증폭하여 증오로 뒤바뀌어 철천지원수처럼 갈라서기도 한다. 이 단편에서 그와 민화의 경우가 꼭 그러하다. 상대방의 불충실함에 대한 뜨거운 분노, 상대방을 때리고 흉기로 마구 난자할 정도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성의 상실, 사랑의 콩깍지가 씌었을 때는 몰랐던 상대방의 일상적 참모습에 대한 실망과 환멸.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과 결과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사랑은 권장하고 환영받아 마땅한 현상일까. 작가는 여전히 그렇다고 암시한다.
제아무리 죽일 놈의 사랑이라고 치를 떨지만, 민화를 만나기 전과 후의 그는 완연히 다른 사람이다. 사랑은 반드시 즐겁고 행복함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에 따른 불안과 슬픔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참다운 사랑이다. 동물적으로 무감각했던 그는 이제 비로소 사람이 된 것이다. 감정이라는 인간적 면모를 회복하였으므로. 전선에 맺혀 있는 빗방울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아기 부처>
남녀 사이가 진실한 사랑으로 맺어졌다면 축복과 행복을 누려야 마땅할 정도로 이상적인 모습이다. 작중 화자와 남편의 인연도 그런 줄 알았다. 온몸에 전신화상을 입은 유명 아나운서. 그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보통 아내 화자. 상처를 보듬고 감싸 안아 승화시키는 사랑이란 거룩할 정도로 아름답다. 아마도 부처라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부부의 균열이 생긴다. 남편의 외도에 대해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남편, 아내, 아니면 둘 다. 둘 다인 동시에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감정의 변화를 이성과 도덕으로 완전히 억누를 수 있을까. 설사 그렇다 해도 그것이 바람직한가. 아내의 태도에 실망한 남편이 기댄 자신만만한 젊은 여성 역시 그의 몸을 보는 순간 외마디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가. 남자애의 흰 몸에 맨살을 부비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낀 그녀는 어떻고. 오히려 이런 것들이 진정 인간적인 반응이다.
부처라면 모름지기 속세의 희로애락을 초탈한 존재다. 아기 부처라고 하면, 더없이 맑고 순수한 모습의 부처를 떠올리게 된다. 이 소설의 아기 부처는 다르다. 자신의 손으로 진흙을 주물러서 만든 얼굴이 곧 부처 얼굴이라고 한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빚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부처와 거리가 먼 얼굴이 부처가 되다니.
흙을 덮고 힘차게 밟아 도독한 무덤을 만들었는데, 발을 떼고 나자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 얼굴이 나를 올려다봤다. 일그러진 이마, 입꼬리를 슬쩍 치켜올린 웃음, 차갑게 빈정대는 듯한 눈꼬리가 또렷이 도드라져 있었다. (P.103)
애석하지만 두 사람은 부부 같지 않은 가족관계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 남편은 해결 방안이 없고, 아내는 자신의 섣부른 선택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지고 있으므로. 그들의 일상도 서늘한 겨울을 견디고 봄이 올 수 있을까.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분노를 느끼지도 실망하지도 않는다.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 듯이 그렇게 서로가 견뎌내는 것이 곧 삶이다, 씁쓸하지만.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이 작품 속 부부도 파탄지경이다. 트럭에서 장사하던 아내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아이를 두고 도주해 버렸다. 남편은 아내를 찾는다고 일상을 버리고 아이와 함께 전국 각지를 헤매고 다닌다. 독자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무작정 비난을 퍼붓기 어렵다. 어쨌든 결단의 당시 그들은 순수했으므로, 앞뒤 가리지 못할 정도로. 다만 사랑은 몰라도, 결혼은 곧 생활이라는 점을 몰랐을 뿐. 얼마나 자주 엄마가 푸념과 탄식을 늘어놓았으면 아이도 무심결에 따라 할 정도이겠는가.
해질녘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도, 우리도 알 수 없다. 저물어 가는 해에 컹컹 짖으며 아쉬움에 잠길지 아니면 석양의 황홀한 색채에 감동하며 부르짖을지를. 마찬가지로 엄마와 아내를 빼앗긴 부녀의 감정이 어떠할지 막연한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삶을 내팽개치고 절망과 음주에 허우적대는 아빠의 모습이 보다 인간적이다. 반면 울지도 않고 별다른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은 오히려 비인간적이다.
마지막 수단으로 아이를 죽이고 스스로를 끝내려던 아빠의 실패한 행동은 연민을 자아낸다. 그냥 속 시원히 둘 다 생을 끝낸다면 앞으로의 나락과 고통을 방지할 수 있기에 더 나은 게 아닐까. 이러한 삶이 희망없이 되풀이된다면 그보다 더한 절망과 괴로움이 있겠는지. 그럼에도 희망의 징조를 찾을 수 있다. 여태껏 아빠의 주정을 피해 몸을 한껏 웅크리던 아이가 아빠의 감정을 헤아리기 시작했으니. 공감을 하는 순간 타인은 이제 남이 아니다. 현재 처지가 무섭고 두려우며 앞날이 막막하게 느끼는 건 비단 자신만이 아니기에. 앞으로도 두 사람에게 쉽사리 서광이 비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견디고 헤쳐나갈 것임을 우리는 기약할 수 있으리라.
<붉은 꽃 속에서>
유한한 수명을 지닌 모든 생명체의 본원적인 질문인 동시에 두려움은 죽음이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도, 죽음에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다짐하던 사람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이를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고자 필사적이다. 어쩌랴 그것이 불가피한 속성임을. 싯다르타의 출가와 그의 그것은 동질적이다. 윤이의 상실 이후, 앞집의 할머니도 상여로 나간 이후 볼 수 없게 되고 가깝거나 멀거나 차츰차츰 사라진다, 이윽고는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마저도. 삶과 죽음의 숙명적이고 불가해한 현상을 세속을 떠나 마음과 영혼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결국 종교 아니겠는가.
불빛은 제가 불빛인 줄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았을까. (P.213)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눈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얀 꽃과 붉은 꽃으로 인식되는 영가등과 붉은 등의 행렬은 자체로 신비로운 형상을 이룬다. 시종 차분하고 나직한 어조로 서술되는 이 단편의 정조는 지극히 내밀한 동시에 체념적이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노스님의 쓸쓸한 다비식은 수행자의 현실이자 미래를 보여준다. 명상과 사색은 궁극적으로 자기반성의 존재론으로 귀결되기에 이를 견딜 수 없어 갈림길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수행자는 상행자의 길을 따르게 된다.
<내 여자의 열매>
아내가 갑자기 식물로 변해버린다는 설정은 카프카의 벌레 못지않게 의외의 착상이다. 여기서는 식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남편의 시각으로 서서히 보여준다. 월계수로 변하는 다프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전조 없는 현상은 없다. 도시 속 소시민적 삶을 지향하는 남편과 달리 아내는 도시를 답답해하며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살기를 희구한다. 화분이 놓인 베란다에서 충돌 후 부부는 다시 싸우지 않지만, 더불어 대화도 줄어간다. 아내는 이미 식물로 변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심경은 양가적이다. 청신한 식물로서 아름다움에 새삼 탄복하는 동시에 아내 상실에 대한 외로움에 젖어 든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이 아내의 본성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도 상통한다.
아내가 식물로 변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람과 햇빛과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깨끗한 존재로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타 생명의 희생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어서이리라.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큰소리로 강제하는 남편의 동물성에 대치되는 속성은 식물성임이 타당하다. 완전히 식물이 되어버린 아내와 남편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은 한 움큼의 아내의 열매이다. 남편은 다음 봄에 아내의 재생을 소망하지만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기대하기 희망일 뿐임을.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 동물성과 식물성으로 대비되는 이원적 구조에서 전통과 현대 사회는 항상 전자를 높이 평가하고 후자를 비하하였다. 작가는 이 단편에서 통념적 사회질서를 해체하고 동물성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적인 식물성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이 작품이 뒷날 <채식주의자>를 예견한다면 지나칠까.
<흰 꽃>
서두의 일상만 보면 화자는 지독한 염세와 허무에 빠진 듯하다. 회사에서 사회생활에서 별다른 의의와 동력을 찾지 못한 화자는 제주도로 떠난다. 완도행 여객선에서 우연히 맞닥뜨리는 중년 사내와 과음하는 남녀들, 학생들. 화자의 회상은 아버지의 죽음 후 어머니가 사용한 상복의 흰 리본들, 그리고 어머니상을 치른 후 자신이 패용한 흰 리본들로 이어진다.
작품은 흰색의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다. 화자가 끈질기게 욕망한 밝은 햇빛, 흰 양복을 입은 중키의 사내, 흰 나비와도 같은 흰 리본들, 얼굴이 달떡 같은 계집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 어두운 밥집에서 차츰차츰 밝아지는 환한 햇빛으로. 흰색은 묘한 색상이다. 깨끗하고 순수함의 상징인 동시에 죽음을 직접적으로 뜻한다. 눈부신 햇빛은 악과 대비되는 선을 가리키는 동시에 매우 차가운 공격성을 지니고 있다.
독자가 이 단편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왠지 모를 허전하고 아련한 정서다. 그것은 회상과 추억이며, 외로움과 상실감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기도 하다. 세상에 홀로 선 존재는 독립적인 동시에 고독한 존재이다. 화자가 지향하는 햇빛은 흰 리본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을 넘어 보다 새롭고 밝은 삶을 일신하고자 하는 내밀한 바람이 아니겠는지.
<철길을 흐르는 강>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가 씁쓸하고 어둡고 애잔한 정조를 띠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십 대 여성작가로서는 너무나 침울하고 암담하다. 아마도 이 소설이 가장 전형적이 아닐까. 역시 화자의 회상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독자의 섣부른 예상과는 무관하게 막막하게 흘러간다. 죽은 새를 호주머니에 넣은 채 손아귀에서 썩어갈 때까지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던 화자의 그로테스크한 심적 상태. 마침내 언 땅을 헤치고 죽은 새를 눈물 흘리지 않고 독오른 눈으로 파묻던 화자.
그녀의 가슴 속에는 철길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벗어둔 어머니의 흰 구두가 여전히 남아 있다. 홀로 근근이 견디는 삶에서 그녀는 연인에게조차 가슴을 내어주지 않는다. 모두가 떠나더라도 자신은 여기 남아서 슬픔과 고통 속에서 버티리라. 화자가 팔짱을 끼려 하자 몸뚱이부터 목덜미, 손에 이르기까지 몸 전체가 투명하게 비쳐 보임은 그 끝에 다다르고 있기에 아득하다. 그녀에게 구원은 아니더라도 자그마한 암시나마 남길 수 있을까. 아직은 세상과 삶에 더 붙어있으라고 응원의 차원에서라도. 작가는 이렇게 응답한다.
새떼의 울부짖음이 고막을 찢었다. 참다 못해 소리치려 입을 벌린 순간, 젖은 새새끼들이 일제히 목구멍을 비집고 뛰쳐 날아갔다. (P.312)
<아홉 개의 이야기>
표제 그대로 아홉 개의 짤막한 이야기 모음이다. 언뜻 보면 전혀 맥락이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다시 보면 알지 못한 내적인 공통점으로 연결된 것 같기도 하다. 기억과 추억을 바탕으로 그 차분하고 정적이며 체념적인 정서가 작품 전체를 감아 돈다. ‘첫사랑’의 아련하지만 흐뭇한 서정은 금방 사라지기에 더욱 따뜻하다.
작중 그녀는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며 실제로 떠나기도 한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람’ 속 그녀처럼. ‘푸른 산’과 ‘자유’에서 그녀는 꿈속에서 푸른 산 또는 낯선 길을 홀로 걷는다. 그녀는 외롭고 쓸쓸하지 않다. 어차피 그녀 혼자 가기로 되어 있으므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 자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그녀는 오히려 서늘함을 느낄 뿐이다. 마지막 ‘세월’에서 그녀는 비로소 남자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작가 한강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오래전에 읽은 첫 번째 소설집 <여수의 사랑>은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책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암울하고 슬픈 분위기였던가. 화자와 인물들은 정주하지 못하고 현실과 과거와 꿈속에서 거듭 방황하던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은 온통 체한 듯한 묵직함에 눌려 있다. 무엇이 젊은 작가 한강을 이토록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는가. 원래는 개별 작품을 종합하여 내용을 압축하고 좀 더 통합적인 사고를 해보고 싶었지만 몸도 마음도 피곤하여 그만둔다.
작품 해설은 문학평론가 황도경의 글로, ‘짐승의 시간, 꿈꾸는 식물’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인물의 고통과 상처에 주목함으로써 개인적으로 동의와 공감대를 공유하는 대목도 있고 다른 견해를 갖는 해석도 있다. 작가가 일상에서 추상으로, 산문에서 시의 세계로 옮아가는 과정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우려와 기대를 표명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하다.
다만 <내 여자의 열매>를 통해 구체화한 식물성을 동물성과 대비하여 어머니와 아버지, 여성과 남성, 희생자와 가해자로 양분하는 관점은 지나친 확대다. 수록작 성별 대결 구도한 비교적 분명한 작품에서 남성의 폭력은 반응적, 대응적임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상대에게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행사하는 건 여성이다. <어느 날 그는>의 민화는 다른 남자를 만난다. <아기 부처>의 아내는 남편의 흉터 있는 몸을 피한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에서 아이 엄마는 아이와 아이 아빠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도주한다. 작품 속 남성은 분노와 반감에 공격적, 반항적 행위를 해보지만 결국 두려움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에서 아이의 말이 이것을 명확하게 포착한다.
어쩌면 그동안 아빠는 아이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줄곧 무서움을 참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더욱 무서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P.174)
이 책은 구판 초판본이며, 개정판은 2018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작가에 따르면 작품 배치를 바꾸었고, 몇몇 표현을 손봤다고 한다. 가장 큰 차이는 개정판의 작품 해설 필자는 강지희라는 점이다. 평론가에 따라 분석하는 시각과 내용이 어떤 차별점을 보일지 궁금하다.
펴낸날이 2000년 3월 15일이다. <그대의 차가운 손>과 함께 보유한 한강 책 중에서 유이한 1쇄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