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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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강은 낯설면서 낯설지 않다. 우리는 소설가 한강이 친숙하지만 그의 출발은 시인으로서였다. 이 시집은 시인으로서 그의 유일한 기록이다. 이후 그는 소설에 매진하지만 시적 산문이라는 개성적인 문체로 시인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수록 시들을 죽 일람하며 장르는 다르지만 작가로서 한강의 주제 의식과 문학정신은 거의 동일함을 깨닫는다. 시적 어조는 굉장히 나직하고 읊조리는 듯하며,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를 띤다. 생명과 죽음을 대비하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의 비중이 훨씬 크다. 평탄한 시구 가운데 피와 고통, 폭력, 학살 같은 잔혹함이 무람없이 등장하여 독자를 당혹게 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미처 간취하지 못하는 미묘한 인식은 과연 예민한 영혼과 감각의 소유자답다.

 

그때 알았다 /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 지금도 영원히 /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

밥을 먹어야지 (P.11,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시적 화자는 뭔가를 알아차렸다. 매우 중요한 것이 영원히 지나고 있음을. 화자는 그게 뭔지 말하지 않지만 독자는 그게 뭔지 공감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일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리한 인식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그것은 단순히 무력감의 발현인가. 아니면 결국 시인의 사명으로서 운명인가.

 

하지만 곧 / 너도 알게 되겠지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P.73, 효에게. 2002. 겨울)

 

시인이 죽음을 긍정함은 죽음 자체를 찬미함이 아니다. 그가 처한 삶이, 현실이 초라하고 궁핍하며 부조리에 차 있기에 그는 역설적 대안을 선택한다. 2부에 실린 작품 중에서 유달리 고통과 폭력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피 흐르는 눈> 연작, <조용한 날들 2>가 기억에 남는다.

 

조용한 내 눈에는 / 찔린 자국뿐 / 피의 그림자뿐 (P.58-59, 피 흐르는 눈 4)

 

찌르지 말아요 // 짓이기지 말아요 // 1초 만에 / 으스러뜨리지 말아요 //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P.62-63, 조용한 날들 2)

 

절대적인 폭력과 고통의 현실을 맞닥뜨릴 때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단 두려움에 휩싸인 채 움츠러들기 십상이다. 부정의가 쉽사리 해소되지 못하면 현실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어 차라리 삶을 경시하고 죽음을 긍정하는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시적 화자도 마찬가지다. <심장이라는 사물>에서 <서커스의 여자>를 거쳐 <파란 날><조용한 날들>로 이어지는 1부 수록작에서 이러한 전개 단계를 확인할 수 있다.

 

더 캄캄한 데를 찾아 /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P.15, 심장이라는 사물)

 

, 죽어서 좋았는데 / 환했는데 솜털처럼 / 가벼웠는데 (P.33, 파란 돌)

 

생을 부정하고 죽음을 긍정하는 화자는 <마크 로스코와 나>에서 잉태와 죽음의 현상을 대비하면서 쓸쓸한 감정을 드러낸다. <심장이라는 사물 2>에서는 오히려 반문한다. 죽음이 왜 고통인지를. 화자는 안구가 뚫린 해골을 처연하게 오만하게 응시한다. 그 자신도 뢴트겐 사진이 드러내듯 결국 일개 해골에 지나지 않는가. 인간의 물질적 본질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이처럼 <해부극장> 연작은 보여준다.

 

신도 / 인간도 믿지 않는 / 네 침묵을 기억하는 나는 (P.106, 거울 저편의 겨울 6)

 

시적 화자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매 순간을 어찌 슬픔과 고통으로만 보낼 수 있는가. 민감한 인식과 감성을 달래기에 애쓴다. <괜찮아>에서 괜찮아를 되풀이하며 내면으로 흐느끼는 자아를 토닥이며 위로하는 모습은 차라리 안쓰러울 정도다. 어설픈 화해 시도는 너무나 취약하다. 내면에 응축되어 단단한 돌멩이처럼 자리 잡은 슬픔은 쉽사리 해소될 수 없음을 <그때><몇 개의 이야기 12>는 나타낸다.

 

시인은 무슨 연유로 이토록 철저히 부정적이고 냉소적으로 되었는가. 2부 해부극장에서 독자는 고통과 폭력의 현상을 응시할 수 있었다면, <거울 저편의 겨울> 12편의 연작시로 구성된 4부에서 그 원인을 추론할 수 있다. 거울 저편 세계는 봄도, 여름도, 가을도 아니고 하필 겨울일까. 공격과 학살, 아이 살해가 넘쳐나는 세상은 결국 겨울일 수밖에 없다. 나와 너가 손을 내밀지 않고, 거울을 사이에 두고 완전하게 대립하는 세상. 내가 아닌 비아(非我)는 관용 대신에 적대시하는 세상.

 

시인은 이미 광주와 제주를 문학으로 다루게 될 것임을 운명적으로 예감한 것은 아닐까. 또는 마음속으로 문학적 형상화의 의사를 다짐하였던 게 아닐까. <회상>에서 시기와 형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냄을 보면 적어도 광주는 그러하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러도 /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P.127, 회상)

 

고통과 슬픔이 어긋난 현실에 기인함에도 뿌리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대증 처치만 반복한다면 치료되기 어렵다. 차라리 감각이 무디다면 모르는 체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련만. 순수하고 예민한 인식의 소유자인 시적 화자는 이도 저도 못하는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힘들고 괴롭더라도 원인을 찾아 나서는 고통스러운 여정에 나서야 한다.

 

평론가 조여정의 작품 해설은 다가가기 어려운 시인의 시 세계를 조감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저녁의 소묘><새벽에 들은 노래>라는 연작시의 표제가 갖는 다층성도 비로소 주목하게 되었다. 다만 시인을 언어의 틀에 가두는 일부 지나친 해석은 공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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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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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신작을 기대했던 독자 중 일부는 분명히 실망했을 법하다. 그의 주특기인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였으므로. 개인적으로는 그의 최초 에세이집이기에 오히려 흥미롭게 읽었다.

 

에세이라고 통칭하지만, 이 책은 여러 유형의 글을 담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게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과 수상 소감이다. 중간의 다섯 편은 산문이 아니라 운문인 시다. 후반부는 일기가 중심을 차지한다. 에세이의 미덕은 작가가 굳이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다소간 분장을 했을지언정 변장을 하지 않을 것에 대한 믿음을 작가도 독자도 공유한다.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P.12, ‘빛과 실’)

 

빛과 실은 우선하여 그의 장편소설에 대한 작가 자신의 창작 의도를 밝히고 있어 주목한다. 평론가의 비평, 독자의 소감을 넘어 작가의 육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오독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가슴 서늘한 울림을 전해준다.

 

그가 궤도를 벗어나 <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로 향하게 된 자각은 작가 특유의 예민한 감성과 인식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지만 어쨌든 결코 포기하지 못하고 신뢰의 끈을 되잡기 위한 그의 끝없는 노력은 광주와 제주를 다룬 소설이 참혹함으로 점철하지 않는 바탕이 되지 않았는가.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P.28-29, ‘빛과 실’)

 

여덟 살 아이가 천진하게 적어놓은 사랑의 정의는 사랑과 생명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그리고 이를 파괴하려는 모든 행위에 대한 거부가 자리한다. 작가가 강연문과 소감, ‘출간 후에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기 이전에도 독자라면 그가 얼마나 삶과 생명의 근원에 민감하였는지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외관상 죽음을 지향하는 듯해도 밑바탕에는 올바른 생명의 길에 대한 뜨거운 소망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산문적 인간인지라 시는 잘 모른다. 여기 몇 편의 시는 그저 흥미롭고 이색적일 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한다. 왠지 음울하고 쓸쓸하다는 정도. 작가는 빛이 넘치는 남향을 말로만 원할 뿐 그의 내심은 어둠과 그늘의 북향을 지향한다. 그런 면에서 북향 정원정원 일기는 온전한 사적 기록이다. 독자는 여기에서 작가를 떠나 인간 한강의 내면의 목소리와 일상적 삶의 단편을 공유한다.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 빛이 변하지 않는 (P.69, ‘북향 방’)

 

작가는 이곳 북향집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를 완성하였다. 칠 년 동안 작품도, 작가도 여러 변모를 거쳤으리라 짐작한다. 그는 왜 굳이 북향집을 골랐을까. 그를 사로잡은 온화한 공기의 감각”(P.87)은 무엇이었을까. 이 시기 그는 오히려 밝은 햇빛을 두려워하고 회피하였던 것은 아닐지.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는 강렬한 햇빛의 적나라함은 부담스럽다.

 

한 뼘 북향 정원에서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절실하다. 식물이 잘 자라면 으쓱하다가 해충과 살충제에 정원이 적막해지면 의기소침하는 장면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정원일기는 꾸준하지 않다. 첫해는 꽤 자주 기록을 남기지만, 점점 멀어지면서 나중에는 몇 달 걸러 가끔씩 글을 남길 뿐이다. 어찌 되었든 라일락 향이 그득 풍기는 정원이 되었으니 성공한 셈인가.

 

햇빛.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 (P.167, ‘더 살아낸 뒤’)

 

햇빛의 소중함은 열대보다는 한대가, 여름보다는 겨울이, 남향보다는 북향이 한층 강렬하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마지막 수록작인 시 더 살아낸 뒤는 의미심장하게 해독하고 싶다. 이제 시적 화자는 햇빛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작가의 오랜 독자로서 하루빨리 신작 소설을 가지고 일상으로 복귀하길 희망한다. 이 에세이집이 그 단초가 될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작가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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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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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에 구입한 책인데, 아무리 서가를 뒤져도 찾을 수 없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도서관 신세를 빌린다. 표제 아래 한강 소설로 명시하고 있다. 왜 굳이 소설이라고 강조하는가. 독자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 그것도 시적 산문으로 받아들일 우려 때문인가. 작가의 자전적 성격과 에세이적 요소가 짙게 담겨 있다. 어쨌든 작가는 분명히 이를 소설이라 밝힌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위기 자체는 작가의 의도적 연출이리라.

 

흰 것에 대해 쓰겠다는 화자의 결심은 흰 것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슨 연유로 흰 것에 대한 글을 쓸 마음을 먹었을까. 흰색이 상징하는 의미는 다양하다. 순결, 순수가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눈과 얼음에서는 투명함과 차가움이 연상된다. 극도의 뜨거움은 흰색에 가깝다. 백발과 수의는 소멸, 죽음과 연관된다. 음양오행에 따르면 서쪽은 저승을 가리키며, 색으로는 흰색이라고 한다. 괜히 좌청룡 우백호가 아니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P.10, _)

 

화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변화시키고자 희망한다. 한편으로 흰 거즈 아래 숨는 게 아닐까 망설이는 심정이다. 화자의 바람과 주저는 이후 서술하는 다종다양한 흰 것에 대한 문장을 통해 하나씩 확인해 볼 수 있다.

 

달떡같이 희고 어여쁜 아기에 대한 회고가 반복적으로 서술된다. 스물세 살 산모가 조산하여 두 시간 동안 살다가 삶을 이별한 아기, 화자의 언니.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에도 미처 세상을 겪지 못하고 떠나간 아기 언니를 화자는 계속 의식한다. 그 아기가 무사히 자랐다면 자신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아기 언니와 화자는 대척점에 놓인 관계이다. 화자는 아기 언니에 대해 모종의 부채감을 지니는가. 또는 자신의 힘겨운 삶을 대신 떠넘길 수 있기를 바라는 일종의 대체 인물인가.

 

그렇게 당신이 숨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결국 태어나지 않게 된 나 대신 지금까지 끝끝내 살아주었다면. 당신의 눈과 당신의 몸으로, 어두운 거울을 등지고 힘껏 나아가주었다면. (P.118-119, 당신의 눈)

 

화자는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한다. 한 개인 또는 집단에게, 사회 전체에게, 아니면 국가로부터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결국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로 도망치듯 떠난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절대적 고독감에 휩싸인 그녀. 무상적 사물인 하얗게 내리는 눈에도 날카롭게 반응할 정도의 심정.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P.55, 눈송이들)

 

극도로 자폐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흰 개와 지금 그녀의 처지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니면 화자의 좌절과 고통은 내면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그녀는 왜 모국어 문장, 혹은 몇 개의 단어들이 불쑥 떠올라 혀밑에 고이기를”(P.50, 주먹) 기다려야 하는가. 화자를 작가와 동일시한다면 글쟁이로서 한계에 봉착했다는 자각은 아니었을까.

 

원인이 무엇이든 그녀는 삶에서 상처를 받았고 고통을 쉽사리 잊지 못한다. 아기의 죽음, 유대인 게토에서 학살당한 죽은 어린 형의 넋, 공포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흰 개, 멸치 떼의 신비를 화자에게 알려주고 이태 뒤 세상을 떠난 작은아버지, 무명 소복을 선물로 불태우는 대상인 망자인 어머니. 비슷한 시기에 죽은 대학 동기 두 사람.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83, 각설탕)

 

후반부에서 화자는 치유와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순면의 침대보에서 받는 위로는 절대 이상하지 않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당당할 수 있다면 내외의 고통도 나를 부식할 수 없다. 새로운 회고 속 스물세 살 난 어머니에게서 조산한 아기는 의식하지 못한 채 젖을 물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온다. 화자는 비로소 죽은 아기 언니의 기억에서 벗어나 그녀를 놓아줄 수 있다. 그것이 최선의 작별의 말”(P.128, 작별)이다. 죽지 말라고 하는 중얼거림은 아기에게 뿐만이 아니라 자신에도 해당하는 애절함의 반영이리라.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P.36, 빛이 있는 쪽)

 

이 작품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수많은 단편적인 흰 것들의 이야기는 개별로서 어렵지 않지만, 그것들이 전체로서 갖는 이야기는 다른 차원이다. 작가의 집필 동기를 헤아리기 어렵다. 작가가 화자의 형태로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이 짤막한 소설에서 독자는 자기의 이해와 감정와 염원에 따라 제각기 다른 독해를 얻게 된다. 흰 것들의 이미지와 이야기에 보다 큰 의의를 부여하는 독법도 의미 있다.

 

다만 우리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상실하고 상처받고 세상에 등을 돌려 슬픔과 괴로움으로 함몰하려는 화자. 그 순간 모든 흰 것들의 이미지와 기억과 추억을 통해 빛과 밝음의 세계, 생명의 세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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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역사 - 인도를 지배한 마지막 거대 제국! 황금과 피로 쓴 제국의 역사, 세계를 압도한 찬란한 문명의 절정 더숲히스토리
마이클 피셔 지음, 최하늘 옮김, 이옥순 감수 / 더숲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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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수업에서 무굴 제국에 대해 배운 적 있다. 인도의 마지막 제국으로 악바르 대제 시절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대영 제국에 멸망한 나라. 훗날 무굴 제국이 몽골족의 후예가 세운 나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무굴 제국에 대해 아는 전부다. 그리고 무굴 제국의 역사 개설서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굴 제국은 일정한 엘리트층과 거의 단일 종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린 토착 제국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무굴 왕조는 다양한 문화권과 집단 중에서 취사선택했으며, 왕조 역사 내내 군주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긴장이 계속되었다. (P.24, 들어가며)

 

무굴 제국은 인도의 토착 제국이 아니라는 점이 이 나라의 운명과 사후 평가를 좌우한다. 인도인에게 무굴 제국은 외부세력이다. 본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지역에 거주하던 바부르 일족이 세력다툼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와 힌두스탄을 공략하였다. 대개의 유목 제국은 농경 문화를 약탈하고 물러나는 게 일반적이지만 바부르는 아예 힌두스탄에 자리 잡고 나라를 세웠으니 그게 바로 무굴 제국이다.

 

무굴 제국은 끊임없이 영토 확대를 도모하였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포함하여 북인도 전역을 손에 넣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중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것은 그들의 선조인 칭기즈 칸과 티무르와도 흡사한데, 유목민족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통치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영토 확장은 사상누각에 불과한데, 끊임없이 생기는 반란을 다스리기 위하여 군주는 항상 국토를 종횡무진 누벼야 하기 때문이다.

 

무굴 제국의 황제들은 항상 사마르칸트를 마음의 고향으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힘을 더 키울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잃어버린 고향을 수복하리라 하는 마음은 바부르부터 최소한 샤 자한까지는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지배하는 인도에 온전한 마음을 주지 않았을까. 그런 까닭인지 무굴 제국의 지배층은 결코 인도 토착 문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종교는 이슬람 수니파이며, 언어와 문자는 페르시아를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인도인들은 그저 피지배층일 따름이다. 이것은 몽골과도 비슷한데, 몽골 지배층은 중화 문명에 동화되지 않았고, 뒤에 힘이 쇠락하여 중화에서 철수하였지 결코 민족이 패망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인도인의 불균등한 동화가 무굴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강조한다. (P.415)

 

이러한 평가는 사실 선택의 문제다. 지배 세력이 피지배 세력과 차별적으로 남을 것인지 동화될 것인지. 몽골은 차별하였고, 만주족은 동화되었다. 그렇다고 청 제국이 영속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떠한 정책이든 전성기 시절에는 잘 굴러가서 좋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고 나라가 어지러울 땐 부정적 평가로 돌아서기 마련이다.

 

무굴 제국의 반복되는 왕위 계승권 분쟁을 보면, 이것만이라도 정리가 되었다면 제국이 좀 더 오래 유지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따른다. 분쟁에 따르면 어마어마한 혼란과 무수한 인명의 살상을 말할 나위도 없다. 적장자상속제가 최고의 제도는 아니지만 최소한 왕위 계승권 분쟁을 감소시키는 효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예시가 바로 무굴 제국이 아닐까. 유목 전통의 강인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리라.

 

반세기를 재위한 악바르 황제는 무굴 제국의 최전성기로 일컬어진다. 그는 중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강역을 점령하였고, 무엇보다 이 책의 서술에 따르면 제국의 튼튼한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계급, 군대, 행정, 세금 제도를 마련하였다.

 

악바르의 측근들은 토지세.자기르.지방 행정 제도를 하나로 묶은 체제를 개발하는 한편, 최고위 장령과 관리를 위한 10진법식 계급 구조인 만사브 제도를 만들어 냈다. (P.183)

 

악바르에게 있어 특이한 점은 그의 종교적 관용이다. 그는 순니파 이슬람을 신봉하였지만, 자신의 라지푸트 아내들의 힌두교 신앙을 인정하였다. 지배층에 일정 부분 라지푸트를 허용하기도 하는 등 악바르의 관용 정책은 무굴 제국을 단순한 침략 외세가 아니라 제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위력을 수용하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는 그의 증손으로 무굴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던 황제였던 알람기르(아우랑제브)와는 전혀 다른 방침이었다. 알람기르는 이슬람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힌두교도에게 불리한 조치를 강제하였다. 그의 여러 실책 중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과오에 해당한다. 알람기르의 사후 무굴 제국이 급격하게 무너지게 된 배경은 결국 피지배층의 격렬한 반발에 있다.

 

인도의 대표적 볼거리로 타지마할을 꼽는다. 황제가 죽은 자기 아내를 기념하기 위한 건축물로 알고 있는데, 그 황제가 무굴 제국의 샤 자한임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엄연히 페르시아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영묘, 즉 무덤이다. 무굴 제국은 여러 영묘를 건설하였는데 타지마할이 가장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알람기르(아우랑제브)의 죽음은 곧 무굴 제국의 쇠망기로 이어진다. 그는 중인도를 정복하여 무굴 제국의 최대 영토를 이루어냈지만 그건 속 빈 강정이었다. 저자는 무굴 제국 황제들의 데칸 지방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손실과 정치적 불안정을 지적한다. 알람기르는 샤 자한을 유폐시키고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힌두교를 박해하여 사회 불안을 야기하였고, 무엇보다 자식들의 힘을 빼앗아 섭정들이 황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알람기르의 조치로 왕위 계승권 전쟁을 벌이기 위한 단독적 힘이 왕자들 가운데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굴 제국의 삼백 년 역사를 반분하면 전반기는 개국과 발전, 전성기인 반면 후반기는 쇠망과 멸망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추락의 시기다. 명목뿐인 황제는 섭정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고, 지방은 제각기 독립국을 자처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벵골에서부터 야금야금 인도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우리네 조선 왕조 말기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백 면에 달하는 분량 가운데 부록을 제외한 본문은 약 사백 면 정도다.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계보도 목록, 황제 가계 연표, 핵심 개념들의 부록이 풍성하다. 왕조사 또는 정치사에 치중한 탓에 문화, 경제 관련 내용은 상대적으로 빈약함이 이 책의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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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의 규칙서 KIATS 기독교 영성 선집 8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지음, 권혁일 외 옮김 / KIATS(키아츠)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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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전기>를 읽은 후 자연스럽게 그의 <규칙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타인의 기록이 아닌 베네딕트 자신이 기록한 수도 생활의 규칙. 이로써 우리는 베네딕트 자신의 수도 생활의 실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규칙서>는 대략 삼종이 있다. 분도출판사의 이형우 역본은 <베네딕도 전기>와 같은 형식의 라틴어 원문 수록에, 충실한 해제에 추가된 연구서 느낌이다. 들숨날숨의 허성석 역본은 본문 외에 상세한 해설이 추가되어 분량이 두툼하다. 나로서는 종교적 목적보다는 베네딕트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한 것이므로 제일 작고 가벼운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은 서론과 73 개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장의 분량이 간략한 편이므로 읽기에 그리 부담되지 않는다. 내용 자체도 심오한 종교와 철학적 성격보다는 수도 생활의 실체적 규율에 있으므로 난해하지 않고 직접적, 구체적이다. 73개나 되는 규칙이 있다면 골치 아플 수 있겠지만, 기도와 찬송의 순서, 수도원 내의 위계질서, 주방과 식사, 손님 영접, 입회 절차 등 수도 생활의 전반적인 부분을 두루 다루고 있기에 때로는 이걸 규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정도의 항목도 들어있다.

 

이 학교의 규정을 정할 때, 우리는 가혹하거나 부담스러운 것은 그 어느 것도 세우길 원하지 않는다. (P.18, 서론)

 

베네딕트는 이러한 규칙이 절대로 가혹하거나 무거워서는 안 된다고 새삼 강조한다. 규칙은 어디까지나 수도 생활의 도움을 위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리라. 어쨌든 수도원이라는 단체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기초적인 규율은 불가피하다. 개인 생활에서도 필요할진대 단체 생활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게다가 베네딕트는 은수자보다는 수도원 생활을 보다 권장하는 삶으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충성스럽게 매진해야 하는 작업장은 수도원의 울타리 안과 공동체 안에서 정주하는 삶이다. (P.34, 4)

 

4선한 일을 위한 도구들에 보면 준수해야 할 세부적 지침이 너무 많아 깜짝 놀라게 된다. 설마 이 모든 걸 수도사들이 다 지킬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건가? 그렇다면 지나친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만 보면 어렵겠구나 하다가도 현실 타협을 보이는 사례도 있으니 제40장의 수도사의 포도주 과음을 자제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수도 생활은 세속을 떠나 오롯이 생활 전부를 영적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바치는 삶이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조화 속에 규율을 통한 자기 규제와 상호 권면의 각오. 그러하기에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일이 최우선시되어야 한다. 새벽기도, 낮기도, 저녁기도와 마지막기도를 포함하여 하루에 7차례의 기도 의식을 행하는 동시에 휴식과 독서, 노동을 병행하는 생활은 결코 간단치 않다. 자칫하면 의지가 약해지거나 규율이 무너질 수 있기에 외부인과의 접촉은 최대한 피해야 하며, 아무나 쉽게 수도자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이다.

 

베네딕트는 수도 생활의 가장 큰 덕목을 겸손과 순종으로 강조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없이 낮음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7장에서 겸손의 열두 단계를 차근차근 제시하는 것은 그만큼 겸손이 갖는 중요성을 뜻한다. 수도원장은 가장 덕목이 높은 수도사를 추대해야 한다. 수도원장을 압바스 또는 압빠스라고 하는데, 이는 그가 지위상으로 아버지와 같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의미다. 그러기에 수도원 운영과 규율 유지에 있어 그에 대한 순종은 곧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동격으로 강조한다.

 

순종은 모든 자들이 수도원장에게뿐만 아니라 또한 형제들 서로서로에게 나타내야 할 덕목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순종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P.126, 71)

 

베네딕트는 모든 수도원에 공통적인 규범을 만들기 위해 이 <규칙서>를 저술한 게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과 동료 수도사들이 생활하는 수도 생활이 공공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가 강조하는 제반 규칙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규칙과 자신이 수도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지혜가 결합한 것이다. 그의 규칙들을 통해 우리는 베네딕트 자신의 수도 생활의 모습이 어떠한지 역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탈리아 산속의 한 평범한 수도사인 베네딕트가 작성한 <규칙서>의 영향력은 후대에 매우 커다란 파장을 미쳤다. 오늘날 베네딕트 수도회라는 모임은 베네딕트가 조직한 수도회가 아니다. 그가 제시한 수도 생활의 규칙을 준수하는 수도회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라고 한다. 세속과 종교의 물질적 욕망의 세계와 인연을 끊고, 오로지 영적인 깨달음과 성취만을 간구하는 그들의 절실함과 진지함은 점점 더 욕망으로 넘쳐나는 현대 사회일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 규칙을 기록한 까닭은, 수도원에서 이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우리가 어느 정도의 덕목을 갖추고 있으며 수도생활의 시작점에 있다는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P.128,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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