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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평점 :
<수록작품>
홈 파티
숲속 작은 집
좋은 이웃
이물감
레몬케이크
안녕이라 그랬어
빗방울처럼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시민의 삶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시장과 자본의 신성성은 불가침의 영역이 되었고, 경제적 여유의 수준은 인간적, 사회적 가치판단의 척도로 자리매김하였다. 더더구나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소시민이 재산 증식을 극적으로 도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 마지막 수단이 되었다.
세상사를 지배하는 기본 원리를 경제적 이해관계가 차지함에 따라 재산의 많고 적음, 그리고 부동산, 특히 아파트의 소유 여부에 따라 사회계층이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친척과 친구의 부동산 무용담에 이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부러움과 시기심을 품을뿐더러 왠지 모를 열등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사회의 경제적 흐름에 발맞추지 못한 루저로서의 낭패감이랄까.
김애란 작가는 등단 때부터 유달리 소시민의 삶에 천착하였는데, 그것은 삶의 어둡고 괴로움을 묘사하면서도 한줄기 유머로서 빛을 잃지 않았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터일지 김애란의 작풍은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밝음과 유머는 찾기 어려워졌다. 중견 작가인 그는 이제 세상과 삶의 파고에 지치고 싫증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현실을 그 자체로서 냉엄하게 인식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좋은 이웃>과 <빗방울처럼>은 내 집 마련의 사회적 파장을 다룬다. 내 집, 나아가서 빌라보다는 아파트, 아파트도 구축이 아니라 신축으로 경제적 가치를 범접할 수 없는 계급으로 나뉘는 우리네 현실에서 내 집은 단순한 자가의 의미가 아니다. 사회적 위상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상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았을 뿐인데, 남에게 뒤처지는 패배감과 열등감. 게다가 나만 못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사람이 일거에 의기양양하는 장면. 그것은 삶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나아간다.
시기니 질투니 하는 말도 모욕적이었지만, 무지니 게으름이니 하는 말도 부당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힘들게 한 건 ‘어쩌면 잘못은 정말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P.120, <좋은 이웃>)
젊은 윗집 부부와 시우 어머니를 향한 화자의 양가적 감정은 전세 사기로 일순간 풍비박산 난 가정으로 전락한 지수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빌라 전세 후 아파트 청약 당첨으로 희망찬 내일을 꿈꾸던 찰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남편 수호는 스트레스로 세상을 떠난다. 지수와 수호 부부가 성실하지 못하였던가, 그들이 무모한 꿈을 꾸었던가. 그녀에게 삶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데, 외국인 도배 여자의 어눌한 한마디가 모국인보다 살갑게 다가온 건 차라리 웃픈 현실이다.
평범한 소시민의 패배감은 <이물감>에서도 여전하다. 기득권층으로 분류되는 연령대이지만, 기태는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현실에 직면한다. 헤어진 희주를 놓지 못해 그녀의 SNS를 뒤적거리며 잠재적 연인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그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분별없는 우쭐감을 내보인다. 파트너 지수와도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다가 멀어진다. 그의 되새김질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실패한 소시민의 전형으로서 기태의 처지를 한마디로 압축한다.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그것은 신체적 병증이 아니라 마음의 나아가 삶 자체의 증상일 것이다.
<레몬케이크> 속 기진은 엄마 선주와 다른 삶을 선택한다. 굳이 장사가 잘될 리 없는 책방을 개업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를 암시한다. 손님도 들지 않는 책방에서 무시했던 돈과 노후는 그녀에게 현실로 다가온다. 돈은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없고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치사한 존재다. 기진의 꿈과 낭만은 현실 앞에서 좌초 지경이다. 돌파구가 될 것으로 믿었던 유명 여행 작가의 행사마저 어처구니없이 취소되자 무력감에 빠진 기진의 눈에 세상사가 전혀 다른 결로 다가온다.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 (P.214, <레몬케이크>)
경제적 승자와 패자의 현실과 인식이 절묘하게 엇갈리는 현장이 <홈 파티>다. 홈 파티의 주최자와 참여자는 최고경영자과정 동기 출신 모임이므로 사회적으로 나름 한가락 하는 신분이다. 여기에 가난한 여배우 이연의 참가는 사실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등장이다. 젊었던 한때 연극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부의 상류층으로 경제력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세상을 판별하는 모습이 이연의 눈에는 역겹고 위선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술의 힘을 빌린 이연의 결연한 한마디로 끝났다면 이 작품의 결말은 매우 밋밋하였으리라. 이연의 행동 실수 하나는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놓는데, 이연의 연기와 오대표의 만족감의 근원은 다르다. 전자는 홈 파티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한 가장된 액션이며, 후자는 루저가 잘난 체해봤자 결국 그럴 뿐이라는 확신의 미소다.
오대표의 얼굴에 잔을 잃은 서운함이나 원망 대신 묘한 만족감이라 할까 승리감이 얼핏 스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마치 오늘 파티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는, 이만하면 괜찮은 계산서가 나왔다는 표정을 지은 까닭이었다. (P.41, <홈 파티>)
<홈 파티>와 반대되는 상황에 놓인 소시민 부부의 난처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 <숲속 작은 집>이다. 외국 휴양지에서 한달살이는 하나의 로망이다. 문제는 주택 메이드에게 팁을 주어야 하는지, 준다면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의 사소한 사안으로 불거진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란 화자는 자기 부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엄마와의 관계 설정도 골치 아픈데, 여기서 메이드를 어떻게 대할지도 결코 편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유복한 집안 출신인 남편의 덤덤한 태도와 달리 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메이드를 대하는 화자의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 양태는 결국 금전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미묘한 영향을 예리하게 감지하는 화자의 감수성 덕분이라고 하겠다.
평소에도 여러 번 들은, 눈 깜짝할 사이 폭삭 늙어버린 엄마가 내게 보낸 ‘고맙다’는 문자를 보자, 이상하게 그 말을 받은 게 아니라 언젠가 내가 상대에 준 무언가를, 아니 오랜 시간 상대가 내게 주었다 생각한 무언가를 도로 빼앗은 기분이 들었다. (P.86, <숲속 작은 집>)
우리는 자주 착각한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빛나고 아름다우며 의미 있고 보람찬, 한마디로 행복한 삶이 될 것이라고. 청춘을 지나 중년에 접어들면 우리는 깨닫는다.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음을. 내가 제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다람쥐 쳇바퀴 돌게 되고,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엄혹한 현실임을. <안녕이라 그랬어>의 화자도 연하의 애인과 헤어진 후 어머니의 죽음으로 고향집에 주저앉아 나날을 소비한다.
삶의 진부한 현상을 돌파하기 위해 원어민 화상영어 수업을 듣는 화자는 화면 속 강사 로버트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세상과 단절되어 고립된 화자에게 있어 로버트와 대화는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가까운 관계보다는 차라리 낯선 타인에게 진심을 털어놓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 다시 보지 못할 존재이므로 마치 나의 내밀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도 덜 창피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화자와 로버트의 대화가 갖는 은근한 따스함은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화자의 앞날을 알지 못한다. 다만 ‘안녕’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처럼 그저 평안하길 바랄 뿐이다. 진부한 말이지만 삶이 아무리 곤궁하더라도 그냥 버텨내길 바라면서.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P.249)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작가를 포착한다. 금전적인 부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사회, 윤리, 문화의 모든 영역을 재단하는 오늘날 세태. 기회에 재빨리 편승해서 안락과 우월감을 누리는 계층과 묵묵히 성실하게 자기 앞길만 걸었을 뿐인데 둘러보니 사회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계층의 대비. 소수의 성공자보다는 다수의 실패자가 대다수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우리네 대부분은 실패자, 패배자, 열등한 사람이기 마련이다.
김애란의 작품은 그러한 사회병리 현상을 날카로운 시선과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그려 보인다. 작가는 화자와 독자에게 분명히 이 현상이 잘못임을 말하지만, 섣부른 위로를 더하지 않는다. 안녕이라 말하지만 거기에는 명시적 희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빛을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고, 어두운 동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