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생애 - 위대한 투쟁 거장이 만난 거장 7
로맹 롤랑 지음, 임희근 옮김 / 포노(PHONO)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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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음악을 알고 좋아한 지 오랜 시일이 경과하였고 명곡의 작품 배경과 해설을 통해 그의 삶도 대강 헤아렸다. 이제 새삼 베토벤의 생애를 알고 싶어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의 삶과 음악의 연관성을 보다 체계적으로 조감하고 싶다는 바램과,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의 참모습을 다시금 살펴보고 싶다는 것

 

베토벤을 일컬어 흔히 악성(樂聖)’으로 일컫는다. 9개의 교향곡, 7곡의 협주곡,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16개의 현악사중주곡, 7개의 피아노 삼중주곡, 10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5개의 첼로 소나타 등 그가 남긴 거의 모든 곡은 자체로 서양음악사에서 우뚝 섰으며 후대에 미친 영향력 또한 거대하다.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나 명확하므로 일반인들은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존경하지 그가 난청(難聽)이라는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장애를 극복한 인물이라는 점을 자칫 간과하는 때가 많다.

 

말이 나온 김에 베토벤 작품 목록에서 Op.1(삼중주 세곡)만이 1796년 이전에 발표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Op.2, 즉 첫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은 17963월에 나왔다. 그러니까 베토벤의 작품 전체가 귀먹은 베토벤이 작곡한 것이라는 얘기다. (P.30, 각주)

 

위의 글에서처럼 베토벤의 주요한 거의 모든 작품은 난청 이후에 작곡한 곡들이다. 자신에게 난청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은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삶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정상적인 직업을 갖기 어려우며, 사교적인 생활도 포기해야 하며, 스스로 자신 속으로 위축된 채 인생의 비참함을 한탄하며 지내기에 십상이다. 요즘도 그러할진대 1800년 전후 베토벤이 살던 시대를 떠올려보자. 게다가 그는 음악가다. 귀가 들리지 않는 음악가는 매우 이율배반적 인상을 풍긴다. 그러면 그가 남긴 음악 유산이 결코 범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을 위해 고통받았던 위대한 영혼들을 말이다. 이 총서 유명인들의 삶은 야심만만한 자들의 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불행한 이들을 위해 펴낸 것이다. (P.11)

 

저자는 초판 서문에서 이 책의 저작 의도를 분명히 한다. 그는 이 책이 학문을 위해 쓴 책이 아니”(P.8)라고 개정판 서문에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저자는 오히려 전기 작가들이 쓴 일반적인 베토벤의 전기에 비판적 견해를 나타낸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세밀한 자료들의 죽은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전기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본질적 요소인 인물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존재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놓쳤다고.

 

로맹 롤랑의 이 책에 대해 여러 비판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베토벤을 역경을 극복한 영웅이라는 이미지로 지나치게 미화하였기에 인간 베토벤의 실체를 오히려 가리고 말았다며.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일찌감치 항변하였다.

 

나는 결코 베토벤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그의 면모 전체를 그리려 할 뿐이다. 베토벤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지닌 강력한 균형의 자연적 저울을 형성하는 이 과도한 대조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P.208-209, 부록: ‘1800,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

 

저자는 베토벤을 찬양한다. 때로는 그의 굴곡진 운명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그가 삶에서 금전 면에서나 애정 면에서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였음에 더없이 감상적 표현도 아끼지 않는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으나 베토벤의 생애를 들여다볼 때 동정적이고 감상적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음악가 베토벤이 아닌 인간 베토벤은 딱한 삶을 살다 갔으니.

 

난 혼자였지. 완전히 혼자였어.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세상에 나서볼 수도 없었다. 나는 추방된 자처럼 살 수밖에 없었단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까이 가면 남들이 내 상태를 눈치챌까 봐 말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지. (P.92,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상황이 조금 나아지리라는 희망만 있을 뿐. 이 병만 아니라면 벌써 그리로 갔겠지! ! 이 병에서 놓여나기만 하면 온 세상을 내 품에 안을 텐데! (P.111,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

 

고작 서른 살 무렵에 자살을 각오하고 유서를 남긴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야심만만하고 음악으로 세상을 정복하리라는 자신감을 지닌 그의 앞날이 이렇게 비참함에 빠졌을 줄 어찌 알았을까. 난청 장애가 남긴 영향과 후유증은 이렇게나 심대하였다. 사랑의 동반자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나아졌을 텐데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그는 독신의 처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그는 현실은 밝지 않았다. 우리는 베토벤이 슈베르트와는 달리 죽을 때까지 음악계의 거장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착각하는데 저자는 그렇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매우 가난하였고, 당대인들은 그의 작풍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조카를 둘러싼 가족사도 어수선하였다.

 

그런 베토벤이 인류문명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엄청난 성취를 이루고 후대에 영원한 유산을 남겼으니 그를 영웅이라고 칭하지 않으면 누가 영웅의 자격이 있겠는가. 저자는 오히려 반문할 것이다. 그로서는 찬미의 문장으로 끝맺음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떤 정복이 이만하겠으며, 보나파르트의 어떤 전투가, 아우스터리츠의 어떤 태양이 이 초인적 노력의 영광, ‘정신이 일찍이 이뤄낸 가장 혁혁한 이 승리의 영광만 하겠는가. 가난하고 장애가 있으며 외롭고 고통으로 점철된 듯한 불행한 남자, 세상이 그에게 기쁨을 주길 거부하니 스스로 환희를 만들어내 세상에 가져다준 한 인간의 정신이 말이다. (P.87)

 

이 책은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본문 외에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와 친우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음악과 비평에 대한 베토벤의 단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격적인 전기 문학은 아니며, 그의 삶을 세세하게 포괄하기에는 분량적으로 짧은 편이다. 이러한 한계를 참작하면 거인 베토벤의 삶을 조망하기엔 충분하며, 독자는 저절로 저자의 감상에 젖어들게 된다.

 

한편 부록으로 로맹 롤랑의 다른 저서 중 일부 대목인 <1800,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을 수록하여 다른 번역본과 차별화를 꾀하고 보다 심층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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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끼 사계절 1318 문고 18
게리 폴슨 지음, 김민석 옮김 / 사계절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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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현실에 머무를 때 비해 고난을 겪을 때 사람은 한층 빨리 성숙해진다. 옛사람이 교육적 목적에서 일부러 자식을 집 밖으로 내보내서 머물게 하는 것도, 멀리 여행을 보내는 것도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브라이언의 사례도 의도치 않았지만 같은 결과를 거두었다. 캐나다 삼림지대에 불시착하여 어린 로빈슨 크루소가 된 채 생존을 위해 홀로 분투하였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울먹이던 철부지 소년은 수십 일 만에 당당히 홀로 설 수 있는 성숙한 소년이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호수에서 헤엄쳐 나와 거처를 만들고, 불을 피우고, 열매를 따 먹고 활과 작살을 만들어 물고기와 새를 사냥하기까지 브라이언의 눈앞에 닥친 현실은 가혹하다. 불시착에서 입은 부상, 지독한 모기떼의 습격, 큰 사슴의 막무가내식 습격과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까지. 거대한 늑대와 곰과의 조우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며, 스컹크의 강렬한 방귀는 오히려 해학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 모두가 브라이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상황임에도.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해야만 했다.

동기 부여를 해야지. 내 자신이야말로 지금 내가 가진 전부야. 뭔가를 해야만 돼.’ (P.56)

 

브라이언이 끝내 생존에 성공하고 구조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포자기하지 않고 행동에 나선 덕택이다. 그로서는 절망에 빠지고 자기연민에 좌절한 채 죽음을 기다릴 이유가 충분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한다. 육체적 활동에 집중하게 되자 침울하며 부정적 사고에서 헤어나올 수 있게 되었으며, 실패를 통해 배우고 지속적으로 실력을 향상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연민이 단지 나쁘다거나 틀렸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기 연민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소리내어 울다가 그쳤을 때,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리는 계속 아팠고, 주위는 아직 어두웠고, 여전히 혼자였다. 자기 연민으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P.81)

 

아무런 도구 없이 불을 피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구를 만들고 사냥을 한다는 것도 더군다나 경험 없는 소년으로서는 더욱 난감한 과제이다.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힘들 때 사람은 더없이 나약하고 의기소침하게 마련이다.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보인다. 브라이언 또한 그런 비참한 기분을 겪고 흐느껴 운다, 그게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비록 브라이언은 자기연민이 쓸모없다고 말하지만 자기연민의 효과도 분명히 있다. 극도의 불안과 긴장 상태에서 울음을 촉발하여 마음이 안정되자 그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와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으니.

 

세상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토록 간절히 구조를 기다리던 그를 무심한 비행기는 외면하고 그는 자살할 생각에까지 이를 정도로 절망에 빠졌다. 겨우 심신을 추스르고 장기전에 대비하여 거의 숙달된 경지에 이르러 홀로 사는 삶에 익숙해졌을 때 뜻하지 않게 구조의 손길이 다가온다. 불시착한 비행기 동체에서 간신히 건진 생존 키트의 풍성한 내용물도 미처 써먹기도 전에 말이다. 그의 반응이 덤덤하고 차분함에 오히려 구조자가 당황할 정도였다.

 

비행기가 브라이언을 발견하지 못하고 거 버리고 난 뒤 브라이언은 달라졌다. 좌절한 채 어쩔 줄 몰라하던 브라이언은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새사람으로 바뀐 게 한 가지 진실이었고, 다시는 죽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브라이언은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났다. (P.118)

 

새롭게 거듭난 브라이언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은 큰 사슴과 회오리바람의 습격이다. 이의 결과로 그는 몸을 심하게 다쳤고, 기껏 일구었던 거처의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과거의 그였다면 다시 절망에 빠져 극단적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는 더는 철부지 소년이 아니다. 그는 야생에서 홀로 살아남은 강인한 소년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정말 달라. 나를 칠 수는 있지만 쓰러뜨릴 수는 없어. 날이 밝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야. 나한텐 아직 손도끼가 있어. 처음 불시착했을 때도 손도끼밖에 없었어. 덤벼, 덤비라고! 이게 전부야? 큰 사슴과 회오리바람으로 나를 치는 게 전부야?’ [......] ‘글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모든 게 달라졌어. 난 변했어. 이제 나는 억센 사나이란 말이야. 난 지금 어느 때보다도 강인해.’ (P.150)

 

브라이언은 야생에서 문명으로 돌아왔다.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성장하였다. 홀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그의 모든 노력, 즉 감정과 생각, 행동은 그의 몸에 습관처럼 배었다.

 

많은 변화들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브라이언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신중하게 살펴보고 나서 반응하는 능력을 얻었다. 그런 능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브라이언은 사려 깊은 사람이 되었는데, 그 때 이후로 말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P.183-184)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의 살아온 모습에 부모의 심정은 말할 나위 없다. 이혼한 브라이언의 부모 또한 모처럼 정다운 부부처럼 가족 재회의 기쁨을 누린다. 그리고 다시금 이전으로 돌아간다. 브라이언은 아버지에게 말하려고 하였던 어머니의 비밀, 즉 자동차에 타고 있던 남자와 어머니에 관한 내용을 결국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어린이가 아니다. 부모가 헤어질 수 있고,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자신이 조정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이다. 브라이언이 자연의 세계를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이 세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브라이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상당 부분 행운의 덕분이다. 계절적으로도 한겨울이 아니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그리고 손도끼의 지분도 절대적이다. 그와 항상 함께했던 손도끼의 도움으로 브라이언의 야생 생활이 가능하였다. 로빈슨 크루소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어쨌든 도구의 인간이라는 점을 도외시할 수 없다. 도구 없이는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다. 도구의 힘으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브라이언이 갖게 되었던 희망.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손도끼였으니 이 작품의 표제로서는 합당한 자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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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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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독서가를 풍미하고 ‘OO사회란 유행어를 낳은 유명한 철학책이다. 문고판 크기에 130면이 안 되는 얄팍한 저작, 게다가 원저는 80면에 못 미치고 강연 원고가 2부로 추가된 구성이니 문고 또는 소책자라고 하는 편이 적당하다. 분량상으로는 얄팍하나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깊이 있는 논의 거리를 담고 있다.

 

저자 주장의 요지는 간결하고 논거는 일목요연하다. 핵심적 주장을 변용하여 반복하고 있으므로 저자의 의견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다. 개인적으로 이해한 수준 내에서 거칠게 정리하자면,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하였고 사람도 성과주체가 되었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외부로부터의 강제 없이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할 수 있음의 과도한 긍정성은 신경성 폭력 현상을 낳는데, 그게 현대사회의 특징인 우울증, 주의력결핍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과거의 면역학적 도식으로 파악하면 안 된다. 성과사회의 함정을 개인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자아 피로, 분열적인 피로에 빠진 개인은 창조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활동 과잉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우리-피로, 근본적 피로, 즉 무위의 피로를 회복해야 하며, 이러한 미래사회가 피로사회다.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P.68-69)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P.73)

 

이 책이 획기적인 이유는 현대사회의 고질적 본질을 명쾌하게 분석하고 정리하였다는 점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역자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P.7)라고 밝혔다. 분초 단위로 쪼개서 쉼 없는 자기계발, 멀티태스킹과 시테크, 다이어트와 아름다운 외모 가꾸기 등 사회적 인정을 향한 무한 질주를 하도록 스스로를 옭아매는 긍정성의 과잉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모두 암암리에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항상 뭔가를 하지 않으면 세상에 뒤처지고 낙오될 것 같은 심리적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게 현대인들이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P.54)

 

현대사회에서 자기 긍정, 활동적 삶, 세계를 향한 재빠른 주의는 모두가 높은 평가를 받는 개념들이다. 그래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성과를 극대화하고 소위 성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자발적 강제, 활동 과잉이 후기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특성이라고 간주한다. 외부적 규율은 효율성이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효율성을 한층 극대화하려면 주체의 자발성에 기대야 한다. 스스로의 자발적 의사로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는 실은 강제하도록 규정지어진 성과사회의 산물이므로 사실상 진정한 자유가 아닌 셈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P.103)

 

언뜻 볼 때 피로사회는 현대사회의 병리적 증상을 상징하는, 다소간 부정적 뉘앙스의 표제로 생각하였다. 결론을 보니 완전히 오해한 셈이다. 현대의 성과사회가 부정적이고, 피로사회는 미래에 지향해야 할 긍정적 의미로 저자는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긍정성과 부정성은 이 책에서 어감과 실제 의미가 배치된 채 계속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긍정성은 바람직하고, 부정성은 바람직하지 않은 걸로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저자의 주장처럼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의 기저에 과도한 긍정성이 개입되어 있음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한다. 현대사회의 사고구조는 개인의 선택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노력을 착취보다는 발전의 개념으로 수용한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P.29)

 

2부에 실린 <우울사회>의 주장도 원저와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저자는 나르시시즘과 우울증의 현상과 본질을 분석하여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호모 리베르를 자처하지만 사실은 호모 사케르라고 분석한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가 살아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죽지도 않는 존재라는 게 더욱 암울하다.

 

저자가 인용, 분석 및 비판하는 아렌트, 에랭베르, 아감벤, 벤야민, 한트케 등의 논의는 내게 머나먼 존재이다. 그나마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친근하게 여겨진다. 바틀비처럼 탈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주체적 삶을 회복해야 하는데, 사색적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저자는 깊은 심심함이라는 용어를 통해 과잉 주의에 대비되는 깊은 주의의 의의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깊은 심심함 가운데 사색적 삶을 통해 무조건적 긍정성의 과잉 자극의 흐름을 차단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성의 요소, 즉 아니라고 말하는 행위, 머뭇거림, 분노, 부정적 감정 등이 역설적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수단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P.48)

 

오랜만에 철학 서적, 깊이 음미하고 헤아리는 진지한 유형의 독서. 버겁지만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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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사정관의 시간 - 누구나 쉽게 말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학입시를 둘러싼 미래와 성장 너머의 이야기
김보미 지음 / 책과이음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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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대입은 굉장히 민감한 교육적, 사회적, 정치적 이슈다. 한 사람의 대입 공정성 논란의 후폭풍이 작금의 정권 교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입 사안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주의 주장을 거침없이 토로하기에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도 빈발한다. 그 논란의 중심에 수시모집 학생부종합전형이 자리 잡고 있으며, 깜깜이전형 또는 금수저전형 등으로 온갖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여전히 입학사정관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문제는 늘 여기서 시작한다. 우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일수록 잘못 알기 쉽고, 오해하기 쉽다. (P.57)

 

입학사정관이 뭐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용이한 대답은 학생부종합전형에서 학생부를 평가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개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지만 실은 그들이 하는 구체적인 업무를 다 이해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입학사정관도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오로지 입학사정관 업무를 수행하는 유형을 전임사정관이라고 한다. 전임사정관은 전국에 수백 명 남짓한 매우 마이너한 직업군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우리들은 입학사정관을 잘 모른다. 하지만 입학사정관이 올바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본 자질과 쉼 없는 노력이 필요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대학 입학처는 원서접수 및 합격자발표 시기에만 바쁜 걸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저자는 그렇지 않음을, 일 년 내내 입학처는 입시 준비와 홍보, 시행과 후속 업무로 항상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학마다 규모 및 전형유형에 따라 입학사정관의 필요성과 인원에 차이가 있겠지만 학생부 정성평가가 반영되는 입학전형에서 입학사정관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수능 100%로 신입생을 선발한다면 그때는 입학사정관이라는 직업은 사라지겠지만.

 

기본적으로 학교생활 충실도로 신입생을 선발하자는 주장은 바람직하다. 수능 100% 전형의 문제점은 문제 풀이에 매몰되어 학교생활이 무의미해지고 학교가 학원화되는 경향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공교육 정상화 측면에서 학교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과와 비교과활동을 장려하고 그것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한 후 대학진학에 활용한다면 꽤나 그럴듯한 장면을 눈앞에 그릴 수 있다. 반면 학생부위주전형에 비판적인 견해는 학교생활 초반에 방황하는 학생들이 재기회를 얻기가 어렵다는 점을 언급한다. 내신성적이 나쁘면 만회하기 어렵고, 비교과는 고교 시절 내내 꾸준하게 활동하지 않으면 경쟁력에서 뒤처진다고.

 

학생부위주전형, 특기자전형, 논술전형 및 수능위주전형 등 모두가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해당 전형은 각각의 대상자를 타게팅하고 있다. 수험생 자신이 가진 강점을 토대로 전형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현실은 많은 학생이 자신의 강점을 확신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모든 전형을 다 준비하려고 하니 벅차기 그지없다. 게다가 대학별로 자유롭게 전형 구성을 하지도 못하고 정부 정책 방향에 따라 전형이 쏠린다. 이른바 상위권 대학진학을 계획하는 수험생은 거의 무조건 학생부위주전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평가에서 지원학과와 전공적합성을 중시하는 경우 일찌감치 진로 방향을 잡지 못한 학생들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학생부에서 꾸준하게 지원학과 관련 수업과 비교과활동을 꾸준히 할수록 유리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자신의 꿈을 고등학생 때 명확하게 설정하고 매진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학생이 되어서도 졸업을 앞두고 여전히 갈 길을 몰라 갈팡질팡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학생부종합전형도 궁극의 지향점은 아니라는 게 개인적 견해다. 당초 학생부 자체가 교육용으로 기재와 관리가 이루어진 것으로서 대입 진학용으로 의도한 게 아니다. 따라서 기재항목 자체가 진학용으로 적합하지 않은 예도 있으며 입학사정관이 서류평가에서 보고 싶은 내용이 전부 들어있지도 않다. 고등학교 시기는 그 자체 독자적으로 교육목적이 있으며 완결된 교육 경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고교생활의 모든 것, 즉 교과와 비교과 활동 일체가 대입 진학을 위해 평가받는 구조라면, 결국 고등학교는 대학진학을 위한 중간다리 기능에 불과한 셈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 수행평가, 정기고사, 동아리 활동 및 봉사 활동이 모두 대입의 목적으로 관찰되고 평가된다는 걸 알 때 학생들은 얼마나 심리적으로 피곤할 것이며 순수한 교육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저자는 현행 대입정책의 문제도 언급한다. 대표적으로 블라인드평가이다. 출신학교의 후광효과를 배제한다는 취지로 도입되었지만, 불리한 교육 환경에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학생들을 이해하고 감안하는 걸 원척적으로 차단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자기소개서의 폐지도 대입 제출서류 중 유일하게 학생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한다. 우리네 입시정책은 부정적 이슈가 발생하면 무조건 금지시키기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앞으로 상당 시일이 흘러도 대입은 계속 논란을 낳을 전망이다. 모두를 만족하고 동의할 묘안은 솔로몬도 내놓지 못할 테니까. 더군다나 대입에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우리네 현실에서 대입은 수험생 본인의 것만이 아닌 온 가족 전체의 사안이다. 특히 극성스러운 많은 학부모의 과도한 참여와 개입은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저자가 반복하여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도 대학진학 노력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다. 고교와 대학에서도 여러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회도 학부모도 아닌 학생 자체가 탐색하고 선택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그저 이 책을 통해서 입학사정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왜 그런 일을 해나가는지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P.212)

 

이 책이 갖는 의의는 입학사정관의 정체성과 그들의 역할과 책무를 세상에 알리는 데 있다. 입학사정관이 대입 현장에서 마주친 경험과 생각을 대중과 공유하고, 입학처에서 일하는 그들도 사회인이자 직업인이기에 갖는 애환을 세상에 풀어놓는다. 시중에 입학사정관이라는 명칭을 이용한 상업적 도서가 즐비한 가운데 이 책처럼 결이 다른 책은 더욱 뜻깊고 흥미롭다. 옆자리에서 나직한 어조로 차근차근 들려주는 듯한 저자의 이야기에 빠져들면 멀게만 느껴졌던 입학사정관이 친근한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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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의 두 신사 지만지 드라마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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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 따르면 일부 연구자들은 이 희곡을 셰익스피어의 첫 작품이라고 간주한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구성상의 미숙성이나 개연성의 부족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면 다른 의견이다. 상기 근거는 비단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당대 작가들에도 상당히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므로 이것만으로 주장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를 탈피한 게 우리가 아는 중기 이후의 셰익스피어이다.

 

두 신사가 두 여인과 맺어지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비슷한 패턴의 희극이다. 여기서 관건은 배신이다. 사랑의 배신과 우정의 배신이 동시에 발생하지만, 다시금 원래 상태를 회복하며 행복한 결말이 성립된다. 배신자의 악역은 두 신사 중 한 명인 프로테우스가 담당한다. 그의 본디 성품은 더할 나위 없는 신사임이 친구 발렌타인의 대사로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배신하게 된 계기는 사랑이다. 사랑의 정표를 주고받은 연인 줄리아가 있음에도 그는 발렌타인의 연인인 실비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바람직하진 않지만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다. 본시 사랑은 맹목적인 현상이므로.

 

문제는 사랑과 더불어 양심마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는 실비아를 차지하기 위해 우정을 배신한다. 친구를 추방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며 이전 연인에게서 받은 반지를 그녀에게 선물로 주려고까지 한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실비아를 구한 대가로 그녀의 사랑을 요구하고 거부당하자 폭력으로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획책한다.

 

(프로테우스) 사랑의 본질에는 위배되지만 / 폭력을 써서라도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실비아) , 하늘이시여!

(프로테우스) 폭력을 써서라도 / 당신을 내 욕망에 굴복시키겠소. (P.160-161, 5막 제4)

 

실비아를 강제하는 프로테우스의 눈앞에 발렌타인이 나타나고 그의 배신행위가 일거에 드러난다. 그러자 갑자기 프로테우스는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빈다. 발렌타인은 곧바로 그를 용서하고 우정을 회복하는 증거로 실비아에 대한 사랑을 친구에게 양도하려고 한다. 사랑보다 우정? 실비아의 마음은 어떻게 하려고? 극 중에 프로테우스의 배신을 격렬히 비난했던 실비아가 갑자기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발렌타인) 네놈이 친구라고? / 우정도 사랑도 저버린 비겁한 놈! / 그런 네가 친구라고? 배신자! (P.161, 5막 제4)

 

(발렌타인) 그럼 나도 받아들이지. 다시 한번 / 자네를 진실한 친구로 받아들이겠네. / [......] / 그럼 내 우정이 분명하고 솔직하다는 걸 / 보여 주기 위해, 실비아에 대한 / 내 모든 애정을 자네에게 양도하겠네. (P.162, 5막 제4)

 

다른 황당함 중에서도 최고 압권은 딸과 발렌타인에 대한 공작의 태도 변화다. 둘의 사랑을 인정 못 하고 발렌타인을 맹비난하며 추방령을 내린 게 공작 자신이다. 인제 와서 돌연 발렌타인의 훌륭함을 칭찬하고 실비아와 결혼을 대찬성한다. 산적의 두목이 된 발렌타인이 무슨 큰 공을 세웠다는 건지?

 

(공작) 머리 위에 별이 반짝인다고 / 감히 그 별에 가까이 가려 하다니! / 썩 물러가라, 천한 침입자! / 오만한 노예 놈! 아양 떠는 그런 웃음은 / 너처럼 천한 여인들에게 보여라. (P.92-93, 3막 제1)

 

(공작) 이제 내 선조들의 명예를 걸고 말하네. / 발렌타인, 자네를 여제의 사랑도 / 받을 수 있을 만한 훌륭한 인물로 생각하네. / [......] / 자네의 큰 공에 어울릴 새 작위를 내리겠네. / 자네는 신사요 좋은 가문 출신이야. / 내 딸아이를 가질 자격이 충분해. / 그러니 실비아를 아내로 삼아 데려가게. (P.165-166, 5막 제4)

 

결말의 이런 부분들이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의 근거이다. 긴장감을 점층적으로 고조시키는 방향으로 잘 짜인 극은 제5막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실비아의 도망을 알아차린 후 뒤를 쫓아가는 세 사람 투리오, 프로테우스, 줄리아. 그들의 대상은 하나이지만 그들의 목적은 서로 전혀 다르다, 복수와 사랑, 그리고 방해. 그리고 마지막 장의 프로테우스와 실비아의 대결 장면은 절정인 동시에 대단원이다. 그런데 대단원에 접어들면서 극은 일거에 무너진다. 갑작스럽고 어이없고 황당한 끝맺음은 누가 봐도 희극을 빨리 종결시키고자 하는 애매한 조급함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용서와 화해와 행복한 결말을 향한 무조건적인 종결!

 

이 작품에서 두 신사보다는 두 숙녀가 더욱 돋보인다. 프로테우스와의 헤어짐을 견디지 못해 남장을 한 채 그를 찾아 나서는 줄리아.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의 배신을 목격하면서 너무나 비참함에 어이없어할 뿐인 그녀는 적어도 연인을 향한 사랑의 간절함에서 아름답다. 실비아는 어떤가. 발렌타인과 비밀 약혼한 그녀는 프로테우스의 비열함과 교활함에 굴하지 않으며, 아버지 공작의 결혼 명령도 거부한 채 가출을 감행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연인에 대한 사랑에 충실한 그야말로 사랑의 순결함의 표본이라고 할 만하다.

 

(스피드) 우리 도련님이 굉장한 러버’(lover, 연인)/ 되셨는데, 어떻게 생각해?

(룬체) 언제는 그렇지 않았나?

(스피드) 늘 그렇다고?

(룬체) 네 말처럼 굉장한 러버’(lubber, 바보)란 말일세. (P.70, 2막 제5)

 

두 신사의 하인인 스피드와 룬체의 존재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어찌 보면 기쁨과 즐거움보다 슬픔과 아픔이 지배적으로 되기 쉬운 극 중 상황에서 두 사람이 벌이는 온갖 언어유희와 재담은 긴장을 완화하는 동시에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으로서의 필수적 인물이다. 어릿광대와도 같은 그들의 재치와 해학이 없었다면 이 작품을 희극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확실히 셰익스피어는 말장난에 능숙하다. 말꼬리 잡기처럼 이어지는 언어유희와 더불어 엉뚱하게 이어지는 대화는 초기작부터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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