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여가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34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나남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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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생활>과 이부작을 이루는 작품이다. 여가와 여유를 삶의 중요한 요소로 중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전작이 직접적으로 종교적 삶을 다루지 않는 반면, 이 작품에서는 종교에 초점을 맞춘다. 집필 계기는 동생 게라르도가 입회한 카르투시오 수도회를 방문하고 수도사들과 나눈 종교적 대화의 연속 및 확장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성격으로 기독교 신자라면 전작보다 한층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반면 그렇지 않으면 과다한 종교성으로 흥미가 저하될 수도 있다.

 

종교적 여가의 이점을 알리는 첫 번째 편지수사들에게 당부하는 두 번째 편지로 저작을 구성하고 있는데,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상 각 편이 하나의 기다란 에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간을 가지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P.21)

 

첫 번째 편지는 위 문장에서 페트라르카가 논의를 끌어내고 있다. 참된 이해를 위해서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 즉 세속적 일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다. 그것이 이 책의 표제인 종교적 여가이다. 그는 수도회가 세상과 문을 닫고 엄격한 금욕적 수도를 하는 행위를 기본적으로 찬양한다. 심신을 정결하게 유지하고 여가를 가져야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페트라르카는 자기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에서 여러 부분을 계속해서 인용하여 권위를 부여한다. 무엇보다 빈번한 성경의 인용은 그의 논의가 시종일관 기독교의 가르침 내에서 근거하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수사들에게 주의의 말도 아끼지 않는다. 이처럼 투철하게 수도에 정진하다 보면 그것이 지나쳐 유혹에 빠질 위험도 있다는 것. 결코 안전과 방심에 섣불리 기대하지 말며 항상 조심하며 수도의 원래 소망을 절대적으로 고수하라는 점. 그는 이러한 여가를 단단한 여가’(P.121)라고 부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상가들의 이론을 기독교에 꿰어맞추려고 애쓰는 대목이다. 키케로는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조차 하느님이 세상의 근본이라는 종교 교리를 입증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여러분은 편안하고 나태하며 여러분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여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종교적이고 순명적인 여러분의 독특한 특질을 고려하여 단단한 여가가 필요합니다. (P.121)

 

두 번째 편지는 더욱 직접적으로 수사들에게 향하는 조언이다. 구성면에서 명확한 단락이나 내용 구분 없이 쭉 이어 나가는 서술 형식을 취하고 있어 언뜻 읽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의아할 때가 많다. 부분적으로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고 논리적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전체적 문맥을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옮긴이 해제의 도움을 빌면 페트라르카는 여기서 악마, 세상, 육체라는 영혼의 3대 적의 함정과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한 당부의 말을 재삼재사 풀어놓고 있다. 해제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위 세 가지 유혹은 명확하게 구별되는 요인이 아니다. 서로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에 나름 열심히 구분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페트라르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결국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하는 게 용이하다.

 

우리가 육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어려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하느님 오직 한 분의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P.180)

 

기독교의 근본적 태도는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절대자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고 의존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러한 기준에서 키케로를 비판하며, 암브로시우스를 거룩한 사람으로 일컬으며 찬양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키케로는 자존심과 자의식이 지나쳐 오만함에 가까운 사람에 해당해서이다. 악마와 세상의 사탕발림과 겁박에 흔들리며, 육체와 정욕의 희로애락에 오락가락하는 가련한 우리 인간은 모든 걸 내려놓고 주님의 자비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히에로니무스가 그에게 간청한 것과 같이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이러한 문제들 속에서 살면서 그것들을 명상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알지 말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구하지 마십시오.” (P.267-268)

 

마지막으로 페트라르카는 수사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종교적 여가 속에서 오로지 절대자에게 귀의하라고. 주변의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한눈팔지 말며, 앞으로 계속 나아가라며.

 

<고독한 생활><종교적 여가>를 통해 페트라르카가 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그가 택한 삶의 방식의 정당성이다. 페트라르카야말로 고독한 생활과 여가를 누구보다 누리고 있는데, 기독교 사제로서는 보기 드문 사례다. 그는 자기 삶이 최선이라고 주장하지 않지만, 자신이 주창한 삶이 괜찮다면 따라도 좋다고 제안한다. 이것이 일반 대중과 시민 모두에게 해당하지만, <종교적 여가>에서는 아무래도 선택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수사들은 이미 종교에 헌신하고 매진하기로 선서하였으므로. 그래서 저자는 종교적 기준을 적용하여 종교적 삶에서 여가의 의미를 한층 적극적으로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완성되어야 저자가 부르짖는 여가가 세속과 종교에 무관하게 인정받을 수 있어서일 것이다.

 

매우 종교적인 저작이다. 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 인용은 물론, 비기독교 고대 철학자의 문장도 오로지 종교적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철저하게 재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된다. 특히 성경 문구의 인용은 지나칠 정도로 자주, 그리고 변형적으로 등장하여 비종교인으로서는 읽기가 괴로울 정도다. 처음에는 이러한 각주도 함께 읽어나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성경 관련 각주는 외면하게 되었다. 각주를 계속 의식하다 보면 독서 흐름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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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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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입동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P.269, ‘작가의 말’)

 

작가의 말이 작품집 전체의 내용과 분위기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의 사고사와 아내의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을 바라보며 섣불리 위로하지 못하는 <입동>의 화자 남편.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반려견의 안락사를 둘러싼 소년 찬성의 망설임(<노찬성과 에반>). 아주 오래되어 사랑의 감정조차 메말라진 연인 도화와 이수의 이야기(<건너편>). <풍경의 쓸모> 속 가정을 버린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이선생의 세상사에 물들고 타락하는 모습. 아들의 순수를 믿고자 하는 엄마의 기대를 금 가게 하는 재이의 웃음과 맑은 눈망울(<가리는 손>). 학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교사 남편의 죽음으로 방황하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화자 아내. 수록작 중 <침묵의 미래>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여기에 귀결된다.

 

모두가 삶 앞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하거나 갈 곳 몰라 표류하는 사람들이다. 삶은 그들에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외로운 찬성이 우연히 만난 개 에반,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들인 에반 덕분에 찬성은 심적 안정을 되찾는다. 늙은 그를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며 비용을 마련하는 찬성. 여기까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대로만 계속된다면. 작가는 삶의 아이러니를 에두르지 않고 털어놓는다. 찬성과 에반의 우정이 보여주는 진정의 얄팍함을. 마치 이것이 삶의 실체라는 듯이.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찬성이 선 데가 길이 아닌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쩍쩍 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P.81)

 

겉보기에 다문화 가정을 등장시켜 독자의 시선 돌리기에 성공한 <가리는 손>도 본질은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화자 엄마의 요리 장면이 유독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데, 곧 아들 재이에게 향한 화자의 헌신과 진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나쁜 형들한테 보복당할까 겁먹어서 폭력 장면을 목격하고도 거짓말을 하는 재이. 엄마는 재이의 순수성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마주한 세상 모든 부모는 언제나 그러하다. 마치 학폭 건으로 학교에 가서도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며,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부모처럼. 문득 엄마는 깨닫지만 믿을 수 없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윽고 눈뜬 아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P.220)

 

<풍경의 쓸모>는 어떤가. 작가는 성실히 살려고 나름 애쓰는 강사 이선생과 그의 불성실한 아버지를 대비하여 보여준다. 일찍이 가정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 너무나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이선생에게 아버지는 지향점이 아니라 지양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되묻는다. 가정이라는 영역에서의 도덕성과 올바름이라는 가치 판단을 논외로 한다면 이선생과 아버지 중 누가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교수 임용을 기대하며 교통사고도 대신 뒤집어쓰며 홍삼진액 한 상자를 사 들고 곽교수의 방에 찾아가는 이선생, 그리고 뒤통수를 맞는 이선생. 이선생은 풍경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지만, 아버지는 풍경의 때를 즐긴다. 그에게조차 씁쓸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늙은 아버지. 이선생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하지만, “더블 폴트”(P.183)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입동>, <건너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공통적으로 사랑을 제재로 하고 있다. 사랑의 설레임과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랑의 상실이 핵심이다. <건너편>을 보자. 여기서 도화와 이수는 사랑이 시들어가는 연인의 관계이다. 동거한 지 수년이 경과하고 여전히 구직자 신세인 이수.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자연스레 감정이 그렇게 움직인 것이다. 도화의 마음속엔 일반적인 연인 관계, 함께 앞날을 그려볼 수 있는 남자의 존재가 서서히 떠올랐으리라. 그래서 이수에게 이별을 통지할 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그녀가 깨달았듯이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P.118)이었다.

 

<입동>에서 상실의 대상은 아이 영우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수년간 근검한 생활을 한 부부에게 기쁨도 잠시 아이의 사망은 존재의 의의를 빼앗아 가버렸다. 억지로 슬픔을 견디고 버티려 애쓸수록 상실의 빈자리는 커져만 가고 부부 사이, 주변과의 관계도 어그러진다. 그들 부부에게 잘못을 추궁할 수 있을까, 책임을 지울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벌어진 참극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쨌든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아이의 죽음에도 만사를 내버려 둔 채 그들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P.37)

 

갑작스러운 사랑의 상실은 아이만이 아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화자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일상과 결별한다. 학생을 구하기 위한 교사로서의 책무감, 그것은 훌륭한 자세이지만 아내 처지에서는 의미가 없고 이해할 수 없다. 꼭 그랬어야만 했는가, 남편에게 자신은 무엇인가. 사촌언니의 배려로 에든버러에서 마음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게 된 아내. 외견상 아내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녀 몸의 피부 감기는 실상 그렇지 못함을 보여준다. 허허로움에 불쑥 만난 남자 동창의 몸을 갈구하지만 역시 부질없는 시도. 차라리 몸을 섞었더라면 조금 더 현실 세계로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을까. 마지막 대목에서 아내는 남편과의 화해를 조금이나마 시도한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P.266)

 

마지막으로 <침묵의 미래>는 이 작품집에서 이색적인 소설이다. 일종의 우화에 가까운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 언어, , 사회의 관계를 역설적 시각에서 탐구한다. 중앙 정부는 멸종 위기에 처한 소수 언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종의 언어 동물원을 세운다. 매우 타당한 조치 같지만, 그 외의 곳에서는 소수 언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멸종을 막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멸종을 재촉하는 방안인가.

 

소설이란 게, 나아가 문학 자체가 언어를 토대로 하는 예술 형식이다. 언어가 사라지면 비단 문학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소통 자체가 소멸하게 된다. 엄격한 통제에서도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소녀와 소년이 사랑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건 상징적이다. 언어의 본질은 남남 사이에서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은 무수한 오해와 이해로 이루어져 있다. 그걸 막거나 피하기 위해 통제한다면 언어의 단절, 소통의 부재로 이어진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그 낱말을 좋아했다. (P.145)

 

나로서는 작가가 어떤 배경으로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작품을 썼는지 짐작할 수 없다. 인간과 언어의 근본적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에서 시작하였는지. 인간사를 관통하는 언어적 소통의 여러 현상에 대응하고자 하는 현실적 이유에서 출발했는지. 여하튼 무척이나 독특하고 기묘하며 쌉싸름한 뒷맛을 남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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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3월 18일(화) 19:30

장소 : 영산아트홀

연주 : 이은진 (피아노)

프로그램

  - 브람스, 3개의 간주곡 Op.117

  - 슈만, 간주곡 Op.4

  - 멘델스존, 무언가 Op.19 No.1

                무언가 Op.30 No.6

                무언가 Op.38 No.3

  - 브람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35


* 세줄평

멘델스존 외에 브람스와 슈만의 간주곡은 그다지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조용히 귀를기울이니 브람스 곡이 특히 마음에 와닿는다. 담담하지만 깊은 울림을 지닌다. 슈만의 간주곡은 5곡과 6곡이 귀에 들어온다. 아름답고 흥미롭다. 브람스의 변주곡은 매우 유명하기에 대충은 알지만 전곡을 집중하여 감상한 적은 처음이다. 초반부를 제외하면 역시 쉽지는 않다. 연주자는 절제된 터치와 감성으로 연주회를 깔끔하게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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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 - 민족의 형성과 민족 문화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엮음 / 휴머니스트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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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좌측 상단에 청소년과 함께 살아 숨쉬는-21세기 대안 교과서라는 문구가 이 책의 성격을 대변한다. 이 책이 기획되고 집필되던 2000년초까지만 해도 중등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교과서였던 모양이다. 저자들은 국정교과서의 획일화된 체계와 청소년의 눈높이와 흥미를 끌기에 부족한 주제와 내용서술 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대안 교과서로 모색했다고 밝힌다.

 

현장에서 이 책은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2002년에 초판이 나왔고, 2007년과 2012년에 개정판, 2019년 개정증보판이 각각 출간되었다. 20년에 걸쳐 절판되지 않고 꾸준히 개정판이 나왔다는 게 높이 평가할 만하다. 초판을 개정증보판과 비교해 보면 목차만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기본 뼈대는 동일한 가운데, 도판 자료가 추가되거나 대체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1개의 단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실제 역사 서술은 2단원 우리 역사의 새벽부터 10단원 일어서는 농민들까지다. 1단원은 역사는 왜 배우나요로서 역사 학습의 의미를 밝히며, 11단원은 민족의 형성과 민족 문화로서 앞선 서술한 내용을 토대로 우리 민족과 문화의 정체성을 논의하는 자리로 만들고 있다.

 

본문 내용 자체는 딱히 언급할 만한 게 없다. 중등 교과서이니만치 기본적인 사실 전달에 주력하며, 논쟁적이거나 심화된 내용은 다루지 않는다. 대신 글만으로는 지루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 흥미를 높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풍부하고 큼지막한 사진 자료와 삽화를 매우 많이 수록하고 있다. 거의 장마다 한두 개 이상의 도판이 있다고 보면 되며, 이따금 전면과 양면에 걸친 사진을 담고 있어 보는 눈이 시원할 정도다. 보통의 책보다 큰 판형이니 효과는 더욱 배가된다. 유효적절한 지도의 추가로 구체적 장소의 위치 확인과 사건 전개의 이해를 높이는 점도 칭찬할 만하다.

 

일반적 역사서와 차별되는 점은 독자인 학생의 참여와 의식을 요구하는 항목이다. 본문 학습이 끝나면 저도 저요’, ‘나도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 학생들의 참여를 요구한다. 그리고 연대순의 단조로운 역사 서술을 벗어나 요즘 관점에서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당대를 조망할 수 있도록 세 개의 주제로 특별 꼭지를 추가하고 있다. ‘여성과 역사9, ‘문화재를 찾아서11, ‘청소년의 삶과 꿈’ 9편이다. 다만 중등 역사 교과서에 굳이 여성이라는 항목을 가지고 이렇게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 의문스럽다. 마지막으로 부록으로 한국사 연표를 담고 있어 교과서의 정석을 보여준다.

 

오늘날 중등 역사 교과서는 국정이 아니라 검정도서 방식이다. 이제는 여러 저자와 출판사가 역사 교과서를 발행하고 있으므로 기존처럼 획일화 우려는 많이 감소하였다. 그럼에도 교과서 자체가 갖는 한계성으로 여전히 많은 학생이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문제는 교과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역사를 다루는 방송프로그램과 유튜브에서 만나게 되는 흥미진진함은 결국 활자 매체와 영상 매체라는 포맷의 근본적 차이에 있다. 역사 교과서, 나아가 역사서를 영상 매체와 차별화하는 방안이 무엇일지 지속적 모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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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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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붉은 꽃 속에서

내 여자의 열매

아홉 개의 이야기

흰 꽃

철길을 흐르는 강

 

<어느 날 그는>

 

사랑은 묘하다. 생판 남남인 남녀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심지어 부모보다도 더 소중하고 친밀한 관계로 변모시킨다. 남남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거나 사소하여 지나치기에 십상인 미묘한 언행이 순식간에 증폭하여 증오로 뒤바뀌어 철천지원수처럼 갈라서기도 한다. 이 단편에서 그와 민화의 경우가 꼭 그러하다. 상대방의 불충실함에 대한 뜨거운 분노, 상대방을 때리고 흉기로 마구 난자할 정도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성의 상실, 사랑의 콩깍지가 씌었을 때는 몰랐던 상대방의 일상적 참모습에 대한 실망과 환멸.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과 결과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사랑은 권장하고 환영받아 마땅한 현상일까. 작가는 여전히 그렇다고 암시한다.

 

제아무리 죽일 놈의 사랑이라고 치를 떨지만, 민화를 만나기 전과 후의 그는 완연히 다른 사람이다. 사랑은 반드시 즐겁고 행복함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에 따른 불안과 슬픔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참다운 사랑이다. 동물적으로 무감각했던 그는 이제 비로소 사람이 된 것이다. 감정이라는 인간적 면모를 회복하였으므로. 전선에 맺혀 있는 빗방울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아기 부처>

 

남녀 사이가 진실한 사랑으로 맺어졌다면 축복과 행복을 누려야 마땅할 정도로 이상적인 모습이다. 작중 화자와 남편의 인연도 그런 줄 알았다. 온몸에 전신화상을 입은 유명 아나운서. 그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보통 아내 화자. 상처를 보듬고 감싸 안아 승화시키는 사랑이란 거룩할 정도로 아름답다. 아마도 부처라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부부의 균열이 생긴다. 남편의 외도에 대해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남편, 아내, 아니면 둘 다. 둘 다인 동시에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감정의 변화를 이성과 도덕으로 완전히 억누를 수 있을까. 설사 그렇다 해도 그것이 바람직한가. 아내의 태도에 실망한 남편이 기댄 자신만만한 젊은 여성 역시 그의 몸을 보는 순간 외마디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가. 남자애의 흰 몸에 맨살을 부비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낀 그녀는 어떻고. 오히려 이런 것들이 진정 인간적인 반응이다.

 

부처라면 모름지기 속세의 희로애락을 초탈한 존재다. 아기 부처라고 하면, 더없이 맑고 순수한 모습의 부처를 떠올리게 된다. 이 소설의 아기 부처는 다르다. 자신의 손으로 진흙을 주물러서 만든 얼굴이 곧 부처 얼굴이라고 한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빚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부처와 거리가 먼 얼굴이 부처가 되다니.

 

흙을 덮고 힘차게 밟아 도독한 무덤을 만들었는데, 발을 떼고 나자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 얼굴이 나를 올려다봤다. 일그러진 이마, 입꼬리를 슬쩍 치켜올린 웃음, 차갑게 빈정대는 듯한 눈꼬리가 또렷이 도드라져 있었다. (P.103)

 

애석하지만 두 사람은 부부 같지 않은 가족관계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 남편은 해결 방안이 없고, 아내는 자신의 섣부른 선택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지고 있으므로. 그들의 일상도 서늘한 겨울을 견디고 봄이 올 수 있을까.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분노를 느끼지도 실망하지도 않는다.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 듯이 그렇게 서로가 견뎌내는 것이 곧 삶이다, 씁쓸하지만.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이 작품 속 부부도 파탄지경이다. 트럭에서 장사하던 아내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아이를 두고 도주해 버렸다. 남편은 아내를 찾는다고 일상을 버리고 아이와 함께 전국 각지를 헤매고 다닌다. 독자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무작정 비난을 퍼붓기 어렵다. 어쨌든 결단의 당시 그들은 순수했으므로, 앞뒤 가리지 못할 정도로. 다만 사랑은 몰라도, 결혼은 곧 생활이라는 점을 몰랐을 뿐. 얼마나 자주 엄마가 푸념과 탄식을 늘어놓았으면 아이도 무심결에 따라 할 정도이겠는가.

 

해질녘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도, 우리도 알 수 없다. 저물어 가는 해에 컹컹 짖으며 아쉬움에 잠길지 아니면 석양의 황홀한 색채에 감동하며 부르짖을지를. 마찬가지로 엄마와 아내를 빼앗긴 부녀의 감정이 어떠할지 막연한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삶을 내팽개치고 절망과 음주에 허우적대는 아빠의 모습이 보다 인간적이다. 반면 울지도 않고 별다른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은 오히려 비인간적이다.

 

마지막 수단으로 아이를 죽이고 스스로를 끝내려던 아빠의 실패한 행동은 연민을 자아낸다. 그냥 속 시원히 둘 다 생을 끝낸다면 앞으로의 나락과 고통을 방지할 수 있기에 더 나은 게 아닐까. 이러한 삶이 희망없이 되풀이된다면 그보다 더한 절망과 괴로움이 있겠는지. 그럼에도 희망의 징조를 찾을 수 있다. 여태껏 아빠의 주정을 피해 몸을 한껏 웅크리던 아이가 아빠의 감정을 헤아리기 시작했으니. 공감을 하는 순간 타인은 이제 남이 아니다. 현재 처지가 무섭고 두려우며 앞날이 막막하게 느끼는 건 비단 자신만이 아니기에. 앞으로도 두 사람에게 쉽사리 서광이 비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견디고 헤쳐나갈 것임을 우리는 기약할 수 있으리라.

 

<붉은 꽃 속에서>

 

유한한 수명을 지닌 모든 생명체의 본원적인 질문인 동시에 두려움은 죽음이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도, 죽음에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다짐하던 사람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이를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고자 필사적이다. 어쩌랴 그것이 불가피한 속성임을. 싯다르타의 출가와 그의 그것은 동질적이다. 윤이의 상실 이후, 앞집의 할머니도 상여로 나간 이후 볼 수 없게 되고 가깝거나 멀거나 차츰차츰 사라진다, 이윽고는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마저도. 삶과 죽음의 숙명적이고 불가해한 현상을 세속을 떠나 마음과 영혼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결국 종교 아니겠는가.

 

불빛은 제가 불빛인 줄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았을까. (P.213)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눈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얀 꽃과 붉은 꽃으로 인식되는 영가등과 붉은 등의 행렬은 자체로 신비로운 형상을 이룬다. 시종 차분하고 나직한 어조로 서술되는 이 단편의 정조는 지극히 내밀한 동시에 체념적이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노스님의 쓸쓸한 다비식은 수행자의 현실이자 미래를 보여준다. 명상과 사색은 궁극적으로 자기반성의 존재론으로 귀결되기에 이를 견딜 수 없어 갈림길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수행자는 상행자의 길을 따르게 된다.

 

<내 여자의 열매>

 

아내가 갑자기 식물로 변해버린다는 설정은 카프카의 벌레 못지않게 의외의 착상이다. 여기서는 식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남편의 시각으로 서서히 보여준다. 월계수로 변하는 다프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전조 없는 현상은 없다. 도시 속 소시민적 삶을 지향하는 남편과 달리 아내는 도시를 답답해하며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살기를 희구한다. 화분이 놓인 베란다에서 충돌 후 부부는 다시 싸우지 않지만, 더불어 대화도 줄어간다. 아내는 이미 식물로 변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심경은 양가적이다. 청신한 식물로서 아름다움에 새삼 탄복하는 동시에 아내 상실에 대한 외로움에 젖어 든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이 아내의 본성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도 상통한다.

 

아내가 식물로 변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람과 햇빛과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깨끗한 존재로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타 생명의 희생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어서이리라.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큰소리로 강제하는 남편의 동물성에 대치되는 속성은 식물성임이 타당하다. 완전히 식물이 되어버린 아내와 남편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은 한 움큼의 아내의 열매이다. 남편은 다음 봄에 아내의 재생을 소망하지만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기대하기 희망일 뿐임을.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 동물성과 식물성으로 대비되는 이원적 구조에서 전통과 현대 사회는 항상 전자를 높이 평가하고 후자를 비하하였다. 작가는 이 단편에서 통념적 사회질서를 해체하고 동물성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적인 식물성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이 작품이 뒷날 <채식주의자>를 예견한다면 지나칠까.

 

<흰 꽃>

 

서두의 일상만 보면 화자는 지독한 염세와 허무에 빠진 듯하다. 회사에서 사회생활에서 별다른 의의와 동력을 찾지 못한 화자는 제주도로 떠난다. 완도행 여객선에서 우연히 맞닥뜨리는 중년 사내와 과음하는 남녀들, 학생들. 화자의 회상은 아버지의 죽음 후 어머니가 사용한 상복의 흰 리본들, 그리고 어머니상을 치른 후 자신이 패용한 흰 리본들로 이어진다.

 

작품은 흰색의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다. 화자가 끈질기게 욕망한 밝은 햇빛, 흰 양복을 입은 중키의 사내, 흰 나비와도 같은 흰 리본들, 얼굴이 달떡 같은 계집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 어두운 밥집에서 차츰차츰 밝아지는 환한 햇빛으로. 흰색은 묘한 색상이다. 깨끗하고 순수함의 상징인 동시에 죽음을 직접적으로 뜻한다. 눈부신 햇빛은 악과 대비되는 선을 가리키는 동시에 매우 차가운 공격성을 지니고 있다.

 

독자가 이 단편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왠지 모를 허전하고 아련한 정서다. 그것은 회상과 추억이며, 외로움과 상실감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기도 하다. 세상에 홀로 선 존재는 독립적인 동시에 고독한 존재이다. 화자가 지향하는 햇빛은 흰 리본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을 넘어 보다 새롭고 밝은 삶을 일신하고자 하는 내밀한 바람이 아니겠는지.

 

<철길을 흐르는 강>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가 씁쓸하고 어둡고 애잔한 정조를 띠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십 대 여성작가로서는 너무나 침울하고 암담하다. 아마도 이 소설이 가장 전형적이 아닐까. 역시 화자의 회상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독자의 섣부른 예상과는 무관하게 막막하게 흘러간다. 죽은 새를 호주머니에 넣은 채 손아귀에서 썩어갈 때까지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던 화자의 그로테스크한 심적 상태. 마침내 언 땅을 헤치고 죽은 새를 눈물 흘리지 않고 독오른 눈으로 파묻던 화자.

 

그녀의 가슴 속에는 철길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벗어둔 어머니의 흰 구두가 여전히 남아 있다. 홀로 근근이 견디는 삶에서 그녀는 연인에게조차 가슴을 내어주지 않는다. 모두가 떠나더라도 자신은 여기 남아서 슬픔과 고통 속에서 버티리라. 화자가 팔짱을 끼려 하자 몸뚱이부터 목덜미, 손에 이르기까지 몸 전체가 투명하게 비쳐 보임은 그 끝에 다다르고 있기에 아득하다. 그녀에게 구원은 아니더라도 자그마한 암시나마 남길 수 있을까. 아직은 세상과 삶에 더 붙어있으라고 응원의 차원에서라도. 작가는 이렇게 응답한다.

 

새떼의 울부짖음이 고막을 찢었다. 참다 못해 소리치려 입을 벌린 순간, 젖은 새새끼들이 일제히 목구멍을 비집고 뛰쳐 날아갔다. (P.312)

 

<아홉 개의 이야기>

 

표제 그대로 아홉 개의 짤막한 이야기 모음이다. 언뜻 보면 전혀 맥락이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다시 보면 알지 못한 내적인 공통점으로 연결된 것 같기도 하다. 기억과 추억을 바탕으로 그 차분하고 정적이며 체념적인 정서가 작품 전체를 감아 돈다. ‘첫사랑의 아련하지만 흐뭇한 서정은 금방 사라지기에 더욱 따뜻하다.

 

작중 그녀는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며 실제로 떠나기도 한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람속 그녀처럼. ‘푸른 산자유에서 그녀는 꿈속에서 푸른 산 또는 낯선 길을 홀로 걷는다. 그녀는 외롭고 쓸쓸하지 않다. 어차피 그녀 혼자 가기로 되어 있으므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 자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그녀는 오히려 서늘함을 느낄 뿐이다. 마지막 세월에서 그녀는 비로소 남자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작가 한강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오래전에 읽은 첫 번째 소설집 <여수의 사랑>은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책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암울하고 슬픈 분위기였던가. 화자와 인물들은 정주하지 못하고 현실과 과거와 꿈속에서 거듭 방황하던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은 온통 체한 듯한 묵직함에 눌려 있다. 무엇이 젊은 작가 한강을 이토록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는가. 원래는 개별 작품을 종합하여 내용을 압축하고 좀 더 통합적인 사고를 해보고 싶었지만 몸도 마음도 피곤하여 그만둔다.

 

작품 해설은 문학평론가 황도경의 글로, ‘짐승의 시간, 꿈꾸는 식물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인물의 고통과 상처에 주목함으로써 개인적으로 동의와 공감대를 공유하는 대목도 있고 다른 견해를 갖는 해석도 있다. 작가가 일상에서 추상으로, 산문에서 시의 세계로 옮아가는 과정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우려와 기대를 표명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하다.

 

다만 <내 여자의 열매>를 통해 구체화한 식물성을 동물성과 대비하여 어머니와 아버지, 여성과 남성, 희생자와 가해자로 양분하는 관점은 지나친 확대다. 수록작 성별 대결 구도한 비교적 분명한 작품에서 남성의 폭력은 반응적, 대응적임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상대에게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행사하는 건 여성이다. <어느 날 그는>의 민화는 다른 남자를 만난다. <아기 부처>의 아내는 남편의 흉터 있는 몸을 피한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에서 아이 엄마는 아이와 아이 아빠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도주한다. 작품 속 남성은 분노와 반감에 공격적, 반항적 행위를 해보지만 결국 두려움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에서 아이의 말이 이것을 명확하게 포착한다.

 

어쩌면 그동안 아빠는 아이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줄곧 무서움을 참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더욱 무서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P.174)

 

이 책은 구판 초판본이며, 개정판은 2018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작가에 따르면 작품 배치를 바꾸었고, 몇몇 표현을 손봤다고 한다. 가장 큰 차이는 개정판의 작품 해설 필자는 강지희라는 점이다. 평론가에 따라 분석하는 시각과 내용이 어떤 차별점을 보일지 궁금하다.

 

펴낸날이 2000315일이다. <그대의 차가운 손>과 함께 보유한 한강 책 중에서 유이한 1쇄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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