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성채
생 텍쥐페리 지음, 이상각 옮김 / 들녘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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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주요 작품을 읽고 마지막으로 유작 <성채>를 읽으려고 시도하였다. 현대문화센터 판본인데 몇 쪽을 읽은 후 책장을 고이 덮었다. 워낙 난해하다는 말이 있었지만 당최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택한 게 이 책인데, 이것도 만만치는 않다. 두 번을 거듭 읽어도 어렴풋한 이미지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으므로. 게다가 그것이 올바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 지도 명확하지 않다. 작중 화자는 자칭 베르베르의 왕이다. 그는 부왕의 뒤를 이어 사막의 왕국을 이끌게 되었는데, 국민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북쪽의 오아시스 도시를 정복하고 단단한 성채를 세우고자 한다. 여기서 성채는 이중의 의미로 나타나는데, 현실의 성채와 마음의 성채가 그것이다. 화자는 양자를 혼용하여 사용하는데, 결국 인간의 행복과 번영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요소의 완성으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잘못된 접근이라고 할 수 없다.

 

성채여,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대를 건설하리라. (P.25)

 

이제 제국은 새로운 성채를 건설하고 사막을 옥토로 만들 것입니다. 시간 속에 씨앗은 삼나무 뿌리로 굳건해질 것입니다. 이제 저의 성채를 세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이 상태에서, 사랑을 가지고 일구어가렵니다. (P.295)

 

내용 자체가 구체적 줄거리와 일정한 서사를 갖춘 게 아니므로 반드시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다. 각각의 장과 이야기가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생텍쥐페리가 앞선 소설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삶의 의미와 본질, 죽음과 영웅성에 대한 태도를 포함해서 그의 사상 전반을 살펴볼 수 있다.

 

그대들은 물질에 집착한 인간이 잃어버린 상호간의 유대감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인간에게 주고받음의 미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대들이 오히려 잘 알 것이다. 그게 없다면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P.94)

 

인간은 고립된 개체로서의 삶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인간은 타인과의 유대와 협력 속에서 의무와 책무를 수행함으로써 참된 삶을 찾을 수 있다.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고자 비록 죽음을 무릅쓰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행동하는 모습이 진정한 영웅의 삵이다. 평범한 인간도 현실 안주와 타협을 거부하고 노력, 의지, 행동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의 인간이 진실로 휴식할 수 있는 방법은 주사위 놀이가 아니라 자신이 건축한 성전의 마지막 기왓장을 올리는 순간의 환희, 바로 그런 것이다. (P.143)

 

사회와 연대를 강조한다고 해서 전체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개인 자체의 고유성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그것이 고립과 방종으로 흐르지 않도록 협력과 규율을 지니는 상태를 높이 평가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각성을 통해 대의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때로는 희생마저도 감수하면서 인간과 사회의 완성으로 굳건한 성채를 쌓아나가는 것, 그것이 화자이자 작가의 지향점으로 이해한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성전의 신성함과 바꾸며, 성전은 그들에게 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P.67)

 

화자가 이토록 인간의 완성에 역점을 두는 까닭은 인간 존재가 갖는 생명의 본원성에 대한 인식이다. 유한한 생명체로서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단지 생명 존속에만 연연하다가 삶을 마칠 때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무엇에 있을까. 인간의 다양한 삶의 양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게 바람직한가. 정신적, 신체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고양된 삶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할 것인가 이런 등등에 대한. 작품 말미의 화자에게서 어린 왕자가 자연스레 연결됨은 결코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아아! 이제 홀로 있다는 피로감이 저를 엄습합니다. 순수란 이토록 멀리 있는 걸까요? 그러나 저는 초월함으로써 이루었습니다. 완성 안에서 백성들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나의 별이 되었습니다. (P.298)

 

이 책은 <성채>의 편역본이다. 엮은이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방대하고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발췌하고 구성도 달리하였다. 편역자는 원작의 긴 장을 짧은 이야기로 잘게 나누고 소제목을 추가하였다. 덕분에 각 장은 우화와 아포리즘(잠언)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깊은 함의를 지닌 주옥같은 금언이 곳곳에 넘쳐난다. 이것이 작가의 원래 의도에 부합하는지, 원작과의 상이 여부와 정도는 현 단계에서는 알지 못한다.

 

이 자체로서 유익하고 흥미롭지만 결국 원래 형태로의 <성채>를 다시 읽어야만 할 것 같다. <성채>의 내용을 이제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설사 이해를 못 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성채>의 본모습을 확인하고, 이 책과의 유사와 상이를 알 수 있다면 자체로 소득이 없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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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신아름 피아노 독주회 - "두 번째 낭만이야기" 소나타

일시 : 2025년 12월 8일(월) 19:30

장소 :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연주 : 신아름 (피아노)

프로그램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E장조 Op.109

  - 리스트, 단테를 읽고 : 소나타풍의 환상곡 S.161, No.7

  - 슈만,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 Op.14


* 세줄평

베토벤 작품은 여러 번 들었던 곡이라 아무래도 오늘 연주회의 관심은 리스트와 슈만이다. 단테 소나타를 집중해서 귀기울이니 확실히 리스트다운 흥미로운 곡이다. 시종일관 연주자는 물론 청자에게도 딴짓을 못하게끔 압도적인 힘으로 몰아부친다. 슈만의 피아노곡을 좋아하면서도 소나타는 처음 듣는다. 형식미가 있다보니 다른 곡의 자유분방함과 환상성은 덜하지만 여전히 슈만이다. 역시 3악장이 귀에 확 다가오지만 다른 악장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오늘 레퍼토리인 리스트와 슈만 곡은 앞으로 계속 관심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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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석유리 오보에 독주회 - 여정

일시 : 2025년 12월 5일(금) 19:30

장소 :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연주 : 석유리 (오보에), 배경한 (피아노), 김진훈 (바순)

프로그램

  - 팔라딜, 오보에 독주곡

  - 케클랭, 오보에 소나타 Op.58

  - 파스쿨리, 오보에와 피아노를 위한 "리골레토"의 회상

  - 프랑세, 오보에와 바순, 피아노를 위한 3중주


* 세줄평

오보에 곡은 알비노니와 모차르트 외에 알지 못한다. 파스쿨리의 곡은 선율이 익숙하고 오보에의 다채로운 기교가 돋보여 재미있고, 프랑세의 3중주는 중고음의 오보에와 조화하는 중저음 바순의 매력도 함께 느끼게 해주어 흥미롭다. 케클랭의 소나타는 오보에의 음색과 감성, 기교를 한껏 발산하는 훌륭한 곡이다. 오보에 주자는 물론 피아노 반주자의 호흡도 뛰어나다.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두 번째 앵콜곡인 김효근 작곡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이다. 특별 게스트로 바리톤(이름은 까먹었다)이 나왔는데, 성악과 오보에, 피아노의 어울림인 무척 인상적이었다. 박스석은 처음 앉는데, 연주자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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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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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입맞춤>에 이어 가룟[가롯] 유다와 관련된 책이다. 전자는 예수와 유다 간 은밀한 공조로 십자가가 이루어지고, 유다는 치욕을 감수하게 되었다는 견해다. 여기 저자는 다른 의견을 펼친다. 유다가 실존하는 인물인지 부정적이며, 설사 그의 실재성을 인정하더라도 그와 예수의 공모는 터무니없다고 본다. 유다의 도움은 십자가의 가치와 순수성을 저해하기에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다가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예수를, 십자가로 나아가게끔 강제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죄목은 유대교 근본 교리를 위배하였기에 종교적 사유이다. 그런데 반역자를 처벌하는 로마의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건 이상하다. 이 말은 예수가 현실상에서 로마에 저항했다는 의미다. 세계제국 로마에 대항한다면 기독교도는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4대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죽음은 종교적이며, 기독교는 친로마적임을 밝히고, 로마에 저항한 유대민족이야말로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파렴치한 족속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유대민족의 상징 인물로 비열한 배신자 유다를 만들어냈다.

 

구약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인 유대민족은 신약에 와서 예수의 비난과 저주를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끝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부인하고, 죽게 만든 악역이 되었다. 신약의 모순을 비판하는 견해는 일견 타당성이 있기에 흥미롭다. 유다는 예수의 실제 제자인가, 유다는 푼돈에 눈이 멀어 예수를 팔아넘겼는가, 아니면 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 예수를 죽게끔 만들었는가 등 여러 의문이 생긴다. 사탄의 작용이라면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저지해야 하는 사탄이 어째서 유다를 부추겨 예수의 십자가를 강행하게 행동하였는가.

 

1세기 기독교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쓴 게 복음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만 했다. 기독교인에게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민족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그 결과 그들을 상징하는 인물, 가롯 유다를 만들었다. (P.23)

 

다만 유대민족을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유다를 창안하고 이용했다는 견해는 논리적 맥락이 다소 약하다. 로마-유대 전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고 인정하더라도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이 아니었는가. 유대인이라면 기독교도 유대인의 생존을 위해 유대교 유대인 동족을 멸족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한 게 아닌가. 유다와 손잡은 유대민족이 결과적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완성했다면 오히려 칭찬할 일이 아닌가. 애시당초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타당한 주장인가. 이런 의문이 계속 떠오른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유다의 희생이라는 지분을 인정함으로써, 배신자 유다라는 오명을 벗기고 그의 복권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유다가 나쁜 놈이 될수록 기독교가 산다. 기독교가 사는 길 중 하나가 유다를 악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P.61)

 

예수와 유다가 공모를 했든지 또는 망설이는 예수를 유다가 유대민족을 이용하여 강제하였든지 유다가 십자가 진행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게 사실이라면 더 이상 유다를 배신자 취급할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에서는 유다를 인정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건 기독교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다.

 

2부에서 저자는 4대 복음서에 가롯 유다의 인물과 역할이 어떻게 변질하는지 자세하게 파헤친다. <마가복음>에서는 오병이어와 향유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와 제자 간 긴장 관계를 암시한다. 유다의 드러난 배신 동기는 모호하다. 종교적 이유로 해석될 여지도 다분하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걸 우려하였던지 금전적 동기를 제시한다. 다만 그것이 푼돈에 불과하다는 게 애매하다. 돈에 눈먼 배신자가 유대민족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던 예수를 넘겨주는데 그 정도에 만족한다는 게 설득력이 약하다.

 

<누가복음>은 새로운 동기를 도입하는데, 사탄의 등장이다. 사탄이 유다에게 작용하여 배신하게 했다는 것. 이상하다. 사탄의 개입은 앞서 말한 모순을 낳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능력을 초라하게 만든다. 예수가 사탄의 활동을 몰랐다면 무능하며, 알고 방치했다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요한복음>에서는 처음부터 사탄이 유다를 사로잡았고, 예수는 이를 알면서도 제자로 삼고 방치하였다. 전지전능한 예수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어서다. 그렇다면 예수는 유다를 사탄에서 구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십자가에 오를 수 있으니까. 이쯤 되면 유다를 배신자로 치부하기 곤란하다. 유다는 배우일 뿐, 감독은 예수이므로. 이러한 모순을 저자는 아래와 같이 결말 짓는다.

 

유다가 희생자가 되는 순간, 예수가 가해자가 된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기독교 구원교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죽어야 한다. 예수가 살기 위해서는 지난 2,000년 동안 그랬듯, 유다는 오늘도 죽어야만 한다. (P.272)

 

이상 저자의 논리와 견해를 따라가면 신약성경의 여러 모순과 불일치가 분명해진다. 저자의 해석도 날카롭게 틈새를 파헤치고 있어 막연하게 간과하던 복음서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다만 유다의 역할에 관한 저자의 주장은 여전히 추측에 기반하고 있기에 기꺼이 수용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반기독교적 입장을 시종 드러내고 있다. 이는 성경의 내용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방향을 취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내포하고 있다.

 

희생양이라는 원시 시스템, 누군가 나 대신 피를 흘려야 내가 산다는 구원의 교리로 움직이는 기독교는 언제라도 새로운 가롯 유다를 만들 수 있다. 기독교는 지금도 편 가르기에 골몰한다. 희생양은 기독교의 본질이고 DNA. (P.49)

 

인류 역사에 발생한 가장 큰 비극이 뭘까?

예수를 역사로 만든 복음서의 등장이다. (P.274)

 

저자의 분석과 주장은 분명 타당성과 흥미로움을 지니고 있다. 집필 의도가 기획 단계라면 모르겠지만 내용 자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 감정 개입을 통해 객관성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잔인한 입맞춤>과 마찬가지로 다른 근거 제시 없이 성경 자체의 불일치와 주관적 추정만을 근거로 삼는다면 다수의 동의와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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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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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P.23)

 

작가 특유의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니, 이건 살인미수가 아닌가. 놀라운 점은 잠시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가족이 근처에 산책하러 나갔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기억과는 달리 진짜로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인가. 아니면 분명 중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가장하였단 말인가.

 

그런데 왜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는가. 여기서 작가의 호기심과 의문점은 시작한다. 부부 사이는 사랑으로 맺어진 따뜻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아니던가. 아니 그게 정말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는 행위는 애초에 나오지 말아야 하지 않았을까. 부부 나아가 가족관계의 의미는 무엇일까.

 

당시의 내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를 가두었던 환경, 학교, 가족, 시골 마을의 의미를 규정하는 동시에, 미처 그 모순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내 삶을 좌우했던 법칙, 의식, 믿음, 가치를 찾아보는 것 외에 달리 확인할 길이 없다. (P.47)

 

<단순한 열정>에서 자신의 내면적 욕망과 열정을 노출했던 작가는 이제 다시금 자신의 과거와 가족으로 돌아온다. 열두 살 화자는 우선 우리 동네를 확인한다. 화자가 태어나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삶의 물리적 영역. 여기서 모두가 모두를 알며 누구나 친숙한 처지다. 반면 그렇게 여유롭고 세련된 삶의 양식은 아니기에 우리 동네와 우리 가족은 품위와는 담쌓고 지낸다. 세상 무엇보다 친근하고 허물없는 관계가 가족이지만,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그네들 행동은 거칠고 막무가내다. 화자는 솔직한 서술이 자체로 사회적 계급을 드러낼까 우려한다.

 

화자의 부모는 어린 딸을 사립학교로 보낸다. 그것은 우리 동네를 벗어난 다른 공간에 속하는 장소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우리 동네에 갇혀서 안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립학교가 있는 지역,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속한 사회적 계급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곧 그들이 처해 있는 우리 동네가 사회 계급적으로 하위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 있음이다. 어디 프랑스뿐이겠는가 많은 우리네 부모들도 자신들을 굶주리고 못 배웠지만 자식들은 잘나고 출세하기를 바라기에 허리띠를 꽉 졸라맸다.

 

화자가 사립학교 세상에 적응하고 충실할수록 우리 동네와는 멀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뼛속 깊이 새겨진 우리 동네의 관습과 사립학교 세상과는 완전 딴판이다. 거칠고 난폭한 언행 대신 고상하고 품위 있는 언행이 지배하는 곳, 종교와 교육이 구분되지 않는 종교학교가 갖는 강한 규율성과 윤리적 억압, 같은 학생임에도 모든 면에서 구별될 수밖에 없는 공립학교, 시골, 촌스러움에 대한 경멸적 인식 등. 화자는 이중적 삶을 잘 영위할 수 있었을까?

 

사립학교에서 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누구의 집에도 가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P.106)

 

이 작품의 표제인 부끄러움은 어떻게 발생하였을까. 그것은 화자가 갖는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교육과 문화상 차이에서 비롯한다. 화자가 사립학교의 가치관을 깊이 체득할수록 우리 동네의 저열함이 한층 두드러지게 되고, 이는 곧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부끄러움은 도덕적 감정이다. 내가 설정한 높은 도덕적 목표와 현재의 낮은 도덕적 단계가 나타내는 격차가 클수록 부끄러움의 강도는 높아진다.

 

부끄러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나에게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움 뒤에는 오직 부끄러움만 따를 거라는 느낌. (P.121)

 

그 부끄러움은 근본적이며 영구히 지속되는 감정이다. 극적인 상황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아마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화자의 부모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삶은 오로지 우리 동네에만 속하기에 달리 비교군이 없다. 우리 동네에서는 부부가 상호 존중하지 않고 다투며 미워하는 게 드물지 않기에, 화가 치밀 때 죽이겠다는 액션도 전혀 생소하지 않다. 그것은 사회적 계급의 차이, 나아가 그것이 함의하는 정신적, 윤리적 차이를 명백히 확인해줄 따름이다.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P.137)

 

화자의 부끄러움은 근원적이기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부끄러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수십 년이 지나서 중년이 훌쩍 지난 화자가 이 사건을 회상하면, 당시 어린 화자가 갖는 부끄러움과 같은 감정을 품게 된다. 이는 화자가 세월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뚜렷이 구분되는 계급적 격차를 융화하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도시인이자 부르주아가 된 그녀의 가슴 속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소녀와 부모가 그대로 자리 잡고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화자는 그 분명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후 그 일요일은 나와 이전의 나에 대한 모든 것 사이를 가르는 어떤 장막처럼 남게 되었다. 평소처럼 놀고 읽고 행동했지만 나는 건성으로 살았다. 모든 게 가식적으로 되었다. (P.28)

 

문학평론가 신수정이 쓴 작품 해설을 길지 않지만, 화자가 갖는 부끄러움의 모순된 실체를 다시금 명확히 짚어낸다. 화자는 우리 동네의 계급적 한계를 인식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이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는 외견상 성공했지만 내면으로는 여전히 부끄러움에 얽매여 있다. 한편 옮긴이 해설은 독해에 꽤 유효한 정보를 제공해주는데, 1980년대에 거대 담론의 반작용으로 소시민과 내면의 탐색을 주로 하는 문학적 경향이 나타났고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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