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친데
프리드리히 슐레겔 지음, 이영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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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늪에 빠져 있다. 처음 박상화 번역본 <루친데>를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당혹스러움에 마주쳤다. 혹시 번역 이슈인가 싶어 이영기 번역본을 추가로 읽었다. 처음보다는 좀 낫지만 여전히 개운한 느낌은 없었다. 다만 작가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 작품 해설을 통해 그나마 어렴풋이 다가갈 수 있었다.

 

<루친데> 이해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슐레겔의 문학 이론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할 것 같아 <그리스 시문학 연구에 관하여>(박현용 번역본)를 읽었는데 꾸역꾸역 버티다가 3장에 들어가서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역시 번역 비교를 위해 다시금 이병창 번역본(<그리스문학 연구>)을 펼쳐 든 상황이다. 이마저도 요령부득이라면 적당한 선에서 그만둘 수밖에 없으리라. 가볍게 시작했다가 된통 당하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루친데>소설 이론에 관한 소설인 것이다. <루친데>가 갖는 이러한 메타소설적 혹은 초월적 특징은 작가 슐레겔의 자의식적 성찰이 소설 내에서, 그리고 소설을 통해서 작용하면서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184-185)

 

슐레겔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사조의 선구자다. <루친데>가 여느 소설과 다른 근본적 이유는 그의 문학관을 그대로 소설로 형상화해서다. 순전한 예술적 동기에 착안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경향 문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 문학적 감동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낭만주의 문학 이론이 작품 속에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충실하게 투영되었는지가 작품 이해의 핵심이다. 참고로 <루친데>1권만 집필된 미완성작이다.

 

13편의 텍스트들 또한 편지, 환상, 성격 묘사, 알레고리, 목가, 대화, 성찰 등 단편적 성격의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인위적으로 잘 정돈된 혼란, 모순들이 만들어내는 매혹적 대칭이라는 아라베스크적 특징에 정확히 부합한다. (P.185)

 

이 작품은 머리말을 제외하고 총 13편의 텍스트 내지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크게 남성 율리우스와 여성 루친데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편은 형식 면에서 자유롭고 독자적이며 율리우스가 루친데를 만나기 전까지의 삶과 루친데를 만나서 사랑을 교감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각 편은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재배열되어 있고 남성성의 수업시대만이 서사적 성격을 띠고 있어 독자에게 상대적으로 친숙하게 다가온다.

 

해설에 따르면 슐레겔은 소설을 서사적 산문 텍스트가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혼합물로 규정한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포에지로서 운문과 시적 정신을 지닌 산문 일체를 포괄한다. 이 작품에 다양한 장르 형식이 사용되는 것은 이러한 의도의 반영이라고 하겠다. ‘율리우스가 루친데에게에서 이러한 다양성과 혼돈을 표방한다. 작가도 독자들의 당혹성을 예상했는지 어린 빌헬미네의 특성에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참아달라고 특별히 당부한다.

 

슐레겔의 이 작품은 당대 사회적 가치관과 배치되는 주장을 담는다. 감정의 자유로운 발산. ‘몰염치에 관한 알레고리에서 인간의 특성을 몇몇 여인들의 모습으로 알레고리화한다. 언뜻 보아서 아름다운 여인들이 자세히 보니 천박함이 드러나고, 오히려 몰염치한 여인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여성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도자 위트는 전자를 관습적인 견해로 가짜 친구들이라고 부른다.

 

작가는 무위에 대한 목가에서 무위와 게으름을 예찬한다. 온화한 고요함 속에서 내적 성찰이 가능하기에, 이에 반대되는 성실과 부지런함은 거부한다. 헤라클레스를 찬미하고 프로메테우스를 폄훼한다. 후자 때문에 인간은 세속적 행위에 매진하게 됨으로써 낭만의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슐레겔에게 있어 진정한 낭만성은 수동성에서만 가능하기에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식물성에까지 다다른다.

 

성실함과 유용함은 인간에게 천국으로의 귀환을 허용하지 않는, 불타는 검을 가진 죽음의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침착하고 온화하게, 진정한 수동성의 성스러운 고요 속에서만 오로지 자신의 전 자아를 기억할 수 있으며 세상과 삶을 관조할 수 있다. (P.53)

 

작가는 낭만성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고 본다. 남성은 천성적으로 사랑을 잘 알지 못한 반면에 여성은 사랑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다. 따라서 여성성을 사랑하고 숭배한다. 율리우스가 삶의 방황을 거듭하다가 루친데를 만남으로써 미숙함과 결핍에서 벗어나 성숙한 삶으로 진입하는 과정이 남성성의 수업시대에 잘 드러나 있다. ‘변모에서 율리우스의 변모를 확인할 수 있고, ‘신의와 장난에서 사랑의 가치를 역설한다. 그리고 모성을 통해 여성성이 완성의 단계에 도달하게 됨을 두 통의 편지에서 설파한다.

 

후반부의 성찰’, ‘율리우스가 안토니오에게’, ‘동경과 평온’, ‘환상의 희롱은 모호하여 잘 와닿지 않는 대목이다. ‘성찰은 사유, 성찰을, ‘율리우스가 안토니오에게는 우정을 다루는 듯한데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동경과 평온은 낮의 눈부심은 헛된 동경이며 밤의 평온이 참됨을 알려주려는 것인지. ‘환상의 희롱은 공허한 오성보다는 순진한 환상의 가치를 상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자신하기 어렵다.

 

이 소설을 슐레겔의 삶에 빗대어 그와 도로테아 간 사랑의 여정과 현상 이야기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을 낭만주의의 완결로 이상화하여 포장한다는 것인데, 부분적으로는 그런 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논거가 미약한 느낌이다.

 

사실 문학사에서 슐레겔은 작가로서가 아니라 문학 이론가로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형 아우구스트와 그가 주창하는 낭만주의 이론에 공감하고 문학잡지에 동참하는 여러 작가에 의해 초기 낭만주의 문학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예전에 읽었던 노발리스의 <푸른 꽃>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슐레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떠오른다. 노발리스는 슐레겔의 절친이자 그의 사상에 열렬한 동조자였다.

 

<루친데>에 담겨 있는 사랑, 섹슈얼리티, 여성()과 남성()의 성별 관계, 결혼 제도에 관한 언술은 이 소설이 일으킨 충격적인 사회적 파장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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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한 밀 이삭처럼 - 고흐, 살다 그리다 쓰다 열다
빈센트 반 고흐 지음, 황종민 옮김 / 열림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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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는 유명한 화가다. 그의 이름을 어지간한 사람은 누구나 들어봤으리라. 화가이므로 그의 그림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인기는 매우 크지만, 정작 인간 고흐는 잘 알지 못한다. 스스로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갇혔다는 정도.

 

이 책은 고흐 자신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고흐는 평생 동안 동생 테오와 서신을 교환하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화가이자 생활인 고흐의 인간다운 면모를 가감 없이 볼 수 있다. 이 책은 짤막한 문장과 단락을 서신집에서 발췌하였다. 서신을 온전히 수록한 게 아니고, 어떤 서사적 맥락을 갖춘 게 아니므로 고흐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정도를 체감하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한 가운데 고흐가 무엇을 중시하였고 어떤 점에 집중하였고 무슨 마음을 지녔는지를 단편적이나마 접할 수 있음은 의미를 가진다.

 

내가 자연에서 창조한 모든 작품은 불에서 꺼낸 밤처럼 고통을 견디고 완성한 것이다. (P.188)

 

고흐는 살아생전에 화가로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세인의 정당한 평가와 인정이 없는 가운데,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무명 화가로서 그가 자신감을 지닐 수 있었을까. 자신이 정말 예술가의 재능과 역량을 가졌는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는 수없이 자문하고 끊임없이 자답한다. 그래서일까 전편을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화가의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반복적 다짐이다. 그것이 너무 잦아 오히려 연민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내 마음속에 반드시 북돋아야 하는 힘이 들끓는다. 꺼뜨리지 말고 되살려야 하는 불길이 타오른다. 그 불길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지만, 설령 암울한 결과를 불러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P.13)

 

나아가 현세에서는 세속적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자포자기적 심정도 내비친다. 그래야 실망이라도 덜 할 것이라는 자기 위안 아니겠는가.

 

인생은 씨를 맺게 하는 시기일 뿐이며 현세는 열매를 거두는 곳이 아님을 점점 더 뚜렷이 깨닫기 시작한다. (P.73)

 

고흐의 화풍은 독특하여 언뜻 보아도 그의 그림임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는 인상파로 그를 통칭하지만, 정작 고흐 자신이 화가로서 어디에 주안점을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독특한 화풍은 어떤 계기로 나왔으며 무엇을 표현하고자 함인가. 이 글의 몇 단락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색상과 작법에 관한 그의 생각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개성을 강렬히 표현하기 위해 내 멋대로 색상을 구사한다. (P.122)

 

화가 아닌 인간 고흐는 어떤 모습일까. 수입이 없는 그는 동생의 경제적 원조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그림과 생활 모두를 감당해야 했기에 항상 가난에 시달렸다.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자위하지만 궁핍의 그림자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하나, 성인 남성으로서 갖는 성적 외로움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경력 초기에 모두에게 지탄 받는 가정 비스무리한 걸 잠시 영위했을 뿐 이후로는 독신의 삶을 고수하였다. 그것이 자의였을까. 가족과 여성을 향한 그리움과 고독에 대한 사무침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나는 사랑 없이 살 수도 없고 살기도 싫고 살아서도 안 될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 열정이 있는 인간이다. 나는 여자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얼어 죽거나 돌로 변할 것이다. (P.223)

 

가난과 고독 속에서, 화가로서 반신반의의 한 가닥 믿음만을 지닌 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날마다 오직 그림을 그리는 일뿐이다. 그에게 그림은 삶의 목적이자 수단이며, 자체로서 생존의 필수불가결한 원동력이다. 그가 화가를 구두장이에게 비유한 건 그만큼 자신이 노동자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그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음의 방증이리라.

 

살아 있음이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온 힘을 다해 일할 때뿐이다. (P.41)

 

곳곳에 그의 대표작(비록 판형의 한계로 작은 크기지만)도 수록하고 있어 독서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게다가 읽기 어려운 문장도 아니다. 이상하게도 책장을 휙휙 넘기기가 여의치 않다.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 짠하고 답답한 상념이 계속 독서를 방해한다.

 

부록 <고흐의 삶에 대한 짧은 글>은 독자가 고흐의 삶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한 마음 씀씀이다. 인간 고흐를 가까이 대하고 싶지만, 본격적인 서간집은 부담스럽다면 이 책을 통해 그에게 다가가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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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셀라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6
새뮤얼 존슨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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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를 읽을 때 중간에 <라셀라스>가 소개되었다. 이 작품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제인 에어>에서 굳이 언급될 정도면 나름의 가치가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 찾아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철학적 허구또는 철학적 우화이다. 우리가 소설 작품에서 기대하는 인물의 강렬한 개성과 인물 간의 갈등과 대립, 외부 환경과의 충돌 등의 요소는 여기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인물의 사고와 대화, 행동을 기술하는 작가의 태도는 차분하고 느긋하며, 관점은 지극히 관조적이다. 이 작품을 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소설이 아니라면 어떤 장르로 간주할 수 있을지 애매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왕자가 대답하였다. “나에게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다는 것, 아니 나에게 부족한 게 뭔지 모른다는 것, 바로 그것이 내 불만의 원인입니다.” (P.21)

 

라셀라스 왕자가 행복의 골짜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심리는 싯다르타 왕자와 다르지 않다. 자기의 풍요로움에 대비되는 민중의 고통을 구제하고자 하는 해법을 찾기 위해서가 후자라면, 전자는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 과연 최고, 최선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를 갖는다. 인간은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현재를 파악하는 존재다. 불행이 있어야 행복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건 양지와 음지, 빛과 어둠, 선과 악처럼 우주의 보편적 원리에 해당한다. 절대적 행복은 오직 깨우친 자에게만 해당할 뿐, 속인들은 이를 알기 어렵다.

 

우리네는 왕자의 번민에 쉽사리 공감하기 어렵다. 그건 우리가 완전한 행복을 누린 경험이 전혀 없어서다.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시절에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올바른 이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처지다. 다만 외관상 더없는 지상천국으로 묘사되는 행복의 골짜기로 들어온 사람들의 내심은 모두 이를 후회하고 있다는 시인 이믈락의 발언은 현실을 드러낸다.

 

진실로 여쭙건대 제가 알기로 왕자님을 모시고 있는 자들 가운데 이 은둔의 처소에 들어온 날을 한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P.70-71)

 

왕자와 공주, 그리고 이믈락 일행이 골짜기를 벗어나 세상을 돌아다니는데, 주로 머물게 된 곳은 이집트다. 이미 서구 문명이 우위를 점하였음을 인정하고 있는 가운데 아비시니아에서 그나마 가까운 문명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왕자 일행은 다양한 유형과 계층, 직업의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리며 관찰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탐색한다.

 

세상 사람들은 겉보기에 모두 행복하고 즐거워 보인다. 웃음 띤 가면을 벗기면 그 아래 슬픔과 고통, 거짓의 참모습이 드러나기에 위선의 껍데기를 꽁꽁 동여매고 한사코 움켜잡는다. 그것을 건드리는 행위는 일종의 역린(逆鱗)이기에 왕자는 젊은 친구들에게서 내쫓김을 당한다. 쾌활한 젊은이도, 부유한 상인도, 은자도, 철학자도, 모든 것을 겪은 노인도 결코 행복하지 않음을 알게 되고, 궁정의 왕좌나 일반 평민의 가정을 살펴보았지만 권력과 지위도 행복을 담보하지 못함을 발견한다.

 

한편 피라미드를 방문하는 도중에 공주의 시녀를 아랍인 도둑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벗인 시녀가 사라지자 공주는 식음을 전폐하고 은둔할 생각마저 품는다. 극도의 슬픔과 절망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음에도 시간의 경과가 마음을 풀어놓게 되는 현상은, 곧 행복의 반대편인 불행마저도 완전하고 절대적인 불행은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은 천문학자다. 명망 있는 학자로 소문난 그를 이믈락이 방문하는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이성의 분별을 상실한 인물임을 발견한다. 물론 학자 자신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몰입하여 평생을 바쳤기에 자신의 인식과 믿음을 철석같이 믿기에 자족적인 상태이다. 왕자 일행과 교분을 나누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비교와 판단의 새로운 근거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음을, 그리고 학문과 진리의 세계에 몰두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쯤에서 왕자 일행과 그가 헤어져야 하지만, 착오를 제외하면 고매한 인품과 현명함을 지닌 노인이기에 함께 지낸다.

 

진정한 행복을 찾는 왕자 일행의 여정 결말은 마지막 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결론이 아무것도 없는 결론이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자신들 소망이 현실에서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들의 도전은 결과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빈손인 건 아니다. 그들은 행복의 골짜기로 돌아가겠지만 이전처럼 무의미와 권태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헛된 욕망을 품고 방황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마음의 상태이므로, 원효대사의 해골 물처럼.

 

인간은 늙어 죽을 때까지 행복이란 이 세상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임을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이 행복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며 자기도 언젠가는 그런 행복을 얻으리라고 계속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지요. (P.89)

 

사실 작품의 지향과 결론은 심오하거나 색다르지 않다. 우리네가 역사를 거치면서 반복해서 들어왔던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근대의 문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담은 작품이 있는데, <파랑새>가 여기에 해당한다.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곳 우리 주변에 있다. 왕자와 공주는 이걸 비로소 깨달은 반면, 이믈락은 행복의 골짜기에 들어오기 전에 겪은 여러 세상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작중에서 여러 번 그는 절대적인 행복의 부재를 설파한다.

 

작가는 작품의 첫 문장에서 이미 결론을 암시한다. 여정이 시작되기에 앞서 결과가 예견된다면 무척이나 김빠지게 마련이지만, 왕자 일행의 세상 체험이 결론에 이르는 구도의 과정임을 다양한 사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우화가 여늬 작품과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공상이 속삭이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으며 희망의 환영을 열심히 좇아가는 사람들이여, 나이를 먹으면 젊은 날의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며 오늘 부족한 것이 내일이 되면 채워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이여, 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에 관한 이야기에 한번 귀를 기울여보라.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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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명 : 인상주의를 넘어 -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선

기간 : 2026.5.28-8.23

장소 :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관람일자 : 2026년 8월 18일(화)


* 관람평

전시회명과 같이 인상주의부터 이후 현대미술까지 회화사를 조망하고 있다. 미국 디트로이트 미술관 컬렉션에서 52점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전시회 끝부분에 미술관 소개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쿠르베의 '시냇가에서 잠든 목욕하는 여인'을 필두로, 마네, 르누아르, 드가, 고흐, 세잔, 마티스,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귀에 익숙한 유명화가들의 작품이 줄줄이 이어진다. 전시회 포스터에 등장하는 르누아르의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과 '앉아 있는 목욕하는 여인'은 역시 르누아르답다. 무용수만 그리는 줄 알았던 드가의 말탄 사람들과 여인의 초상 그림은 신선하다. 고흐의 '오베르의 우아즈 강가'는 독무대로 꾸며져 있는데, 해당 미디어아트도 상영한다.


개인적으로 마티스와 피카소로부터 표현주의에 이르는 현대회화의 소개가 충실해서 유익하였다. 다리파와 청기사파, 독자적 활동 화가부터 기존에 생소했던 화가와 사조, 특징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피카소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책 읽는 소녀', '앉아 있는 여인'. 더 이른 시기의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파리파로 모딜리아니도 나온다. 목이 긴 초상화 '여인'가 전형적이다.


유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르네상스, 고전 중심의 그림이 아니라 현대회화를 선구적으로 컬렉션한 그들의 혜안이 부럽다. 전시작품 수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근현대 회회사를 일목요연하게 조망하고 충실한 설명을 덧붙여 이해를 돕는 기획도 좋게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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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0
송성욱 풀어 옮김,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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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은 어지간한 국민 모두라면 대강은 그 내용을 알고 있기에 새로울 것이 없다. 나 또한 판소리를 통해 여러 차례 감상했기에 더더욱 친숙하다. 분명 예전에 책으로도 읽었을 테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제대로 된 판본으로, 정식으로 읽는다. 이 책은 두 종류의 <춘향전>을 수록하고 있다. 하나는 경판본 <춘향전>이며, 다른 하나는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 굳이 두 종류를 읽을 필요가 있을지 의심을 품을 수 있지만, 등장인물과 사건 및 구성 등 모든 면에서 차이를 보이며 춘향전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짐작하게 해주기에 비교 감상이 필요하다. 학자들은 경판본이 완판보다 앞선 판본이라고 하는데, 몇 줄만 읽어봐도 알아차릴 수 있다. 부록으로 <열녀춘향수절가> 영인본을 실었는데, 실효성에 의문을 표한다.

 

<춘향전>의 배경은 판본에 따라 다르다. 경판본은 조선 인조, 완판본은 조선 숙종 시절을 시대 배경으로 한다. 판본이 다르다고 굳이 임금을 바꿀 이유가 있을까마는 아무래도 인조보다는 숙종이 그나마 낫다. 작중에 태평 시절이어서 백성들이 격양가를 부르는 설정이 있는데, 인조 때는 잇따른 내란과 두 차례의 호란으로 나라가 쑥밭이 된 시절이므로 이때를 태평성대라 칭하기에는 낯간지러웠는지 슬그머니 숙종으로 옮긴다.

 

<춘향전>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이몽룡과 성춘향이다. 완판본은 주인공의 이름을 분명히 제시한다. 반면 경판본은 분명 춘향의 이름은 밝히는데, 이몽룡은 없다. 단지 사또 자제 이 도령만 시종 등장할 뿐이다.

 

무엇보다 차이는 춘향의 신분이다. 경판본에서 춘향은 기생이다. 관기에게 수절이 타당하지 않지만, 후에 대비정속하여 기생 신분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렇기에 신관 사또가 수청을 강요하는 건 엄연한 불법이다. 완판본의 경우 춘향은 퇴기 월매와 양반 성 참판 사이의 딸이다. 춘향 어미는 기생이지만, 춘향이는 기생이 아님을 아전들이 반복하여 신관 사또에게 고한다. 기생이 아닌데도 수청을 강요하는 건 역시 불법이다.

 

춘향 어미의 이름도 경판본에 없다. 그냥 춘향 어미일 뿐이다. 방자야 고유명사가 아니므로 논외로 하지만, 향단이의 존재는 경판본에 아예 없다. 완판본에 비로소 나타난다. 춘향이와 일대 대결을 벌이는 신관 사또의 이름, 변학도 역시 완판본에만 이름이 나온다. 경판본은 그냥 신관 사또다. 이처럼 경판본과 완판본은 배경과 인물 설정에서 여러 차이를 보인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친숙한 <춘향전>은 완판본을 기준 한 것이며, 판소리 또한 완판본에 가깝다.

 

이몽룡과 성춘향은 소설 서두에 군자이자 요조숙녀 그리고 재자가인의 대명사로 설정한다. 하지만 경판본의 이 도령을 보면 군자라고 하기 어렵다. 자칭 타칭으로 이른 나이에 바람둥이임을 부인할 수 없다. 너무했다고 생각했는지 완판본에서는 아예 해당 대목을 빼버렸다.

 

네 만일 간다면 우리 도련님이 바로 바람둥이라. (P.192, 방자)

 

기생집에서 온갖 좋은 술에 취하고 절대가인과 연분 맺어 맑은 노래 묘한 춤으로 세월을 보냈다. (P.194, 이 도령)

 

완판본에는 춘향이를 아예 선녀가 환생한 것으로 설정한다. 그만큼 신분과 인물, 성품이 빼어나다는 뜻이다. 하지만 경판본의 춘향이가 훨씬 의연하고 담대하다. 이 도령과 이별 대목이 판본에 따라 현격한 대조를 보인다. 경판본의 춘향이는 의연하고 담담한 게 이별을 감수한다. 완판본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무엇 때문에 자기를 버려두고 가냐고 이 도령을 향해 맹렬하게 퍼붓고 바닥에 주저앉아 신세 한탄을 그치지 않는다. 관점에 따라서는 더 인간적이고 극적인 인간성의 표현으로 상찬할 수 있겠지만, 서두의 칭찬이 머쓱할 따름이다.

 

존귀하신 도련님께 그것은 어찌 재앙 아니리오? 사람 대접을 그리 마오. 사람을 대하는 법이 그런 법이 왜 있을꼬. 죽고지고 죽고지고. 애고 애고 설운지고. (P.77)

 

<춘향전>은 민중에게서 비롯하였기에 내용에 해학적이거나 외설스러운 대목이 심심찮다. 경판본에서는 사랑가와 허 봉사의 꿈풀이 대목이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분량이 짧은 이유도 있다. 반면 완판본은 이 도령의 천자풀이, 사랑가, 농부가, 기생점고 대목이 대표적이며, 어사출도 대목도 경판본보다 훨씬 극적이다. 해학성 못지않게 비애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도 있다. 십장가, 옥중가, 이 도령이 춘향의 편지를 보는 장면 등이 여기에 속한다. 모두 다 판소리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완판본의 두드러진 특징은 식자층을 독자층으로 의식한 점이다. 곳곳에 등장하는 한시가 그러하며, 유교적 가치와 인물의 언급이 그러하다. 무엇보다 춘향이가 감옥에서 순임금의 두 왕비인 아황과 여영을 방문하는 꿈을 꾼 게 상징적이다. 민중에서 출발한 춘향 이야기의 인기가 양반층에까지 이르렀기에 이에 걸맞은 내용 보강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춘향전>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은 춘향의 수절과 이 도령의 어사출도 간 시기상 간극이다. 이 도령 부친의 후임이 바로 변학도다. 변학도가 사또가 되어 가장 먼저 한 게 기생점고이고, 춘향이를 붙잡아 온 행동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이별로부터 불과 몇 개월 후에 벌어진 사건인데, 그동안에 이 도령이 공부에 매진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임명되어 남원으로 내려와 춘향이를 구했다고 하면 너무나 촉박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하나 더 언급하자면, 변학도가 어사에게 파직당하는데 죄명이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분명 춘향이를 옥에 가둔 건 잘못이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현직 부사를 파직한다는 건 월권이다. 지나가는 말로 변학도가 가렴주구를 하는 탐관오리의 전형이라고 하는데, 독자가 이를 심정적으로 수용하기에는 변학도의 악행 묘사가 거의 없다.

 

경판본 <춘향전>을 문학의 시각에서 보면 빼어나다고 하기 어렵다. 완판본은 내용도 추가되고 훨씬 더 인간적인 면모의 인물과 장면이 있기에 재미는 쏠쏠하지만, 명창의 성음을 통해 오락성과 비극성이 극대화된다. 판소리계 소설의 특징이다. 문학으로서 <춘향전>은 그럼에도 우리 고전소설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으니, 재자가인의 결합 기대, 신분 상승의 욕구, 탐관오리의 응징, 걸쭉한 해학미 등 작품을 통해 주 독자인 민중층이 일종의 카타르시스와 보상을 구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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