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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기보다 잊혀졌어요
마리 로랑생 지음, 이혜연 편역 / 수오서재 / 2026년 4월
평점 :
마리 로랑생 전시회에 가기에 앞서 화가의 삶과 그림 세계를 알고 싶었다. 전시회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도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이 책은 시중에 유통중인 마리 로랑생 관련 유일한 서적으로서, 그녀의 유일한 자전적 저서를 편역하고, 95점의 대표작 도판을 수록하였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마리 로랑생의 글은 그의 첫 책이자 유일한 저서인 <밤의 수첩>을 편역해 구성했음을 밝힌다. <밤의 수첩>에는 마리 로랑생의 산문, 시, 단상들이 담겨 있다. (일러두기)
이 책의 장점은 화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과 상대적으로 큰 판형과 고급용지로 담은 풍부한 도판이다. 단점은 기본적 개요 외에 수록작에 대한 별도의 설명 없이 도판이 연대기적으로 나열되어 있어 본문과 그림이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다.
처음 9면에 걸쳐 그녀의 생애를 소개한 글을 담고 있는데,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이었고 야수파와 입체파의 득세하던 사조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 화풍을 유지 발전하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운 나쁜 결혼으로 뜻하지 않게 망명 생활을 겪어야 했으며, 디자이너 니콜 그루와의 동성애적 동반자 관계를 장기간 유지하였음도 알게 되었다. 여기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폴리네르의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말년의 그녀는 나치 정권에 모호한 입장을 취하여 전후 부역 판정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유언이 가슴에 다가온다.
마리 로랑생은 서양미술사에서 흔히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상을 그리던 관습에서 벗어나,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그들의 모습과 여성성을 담아낸 최초의 여성 화가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P.14)
그녀의 그림은 대부분 여성을 소재로 한다. 남성은 거의 배제되거나 개인적 친분이 있는 극히 예외적 존재만을 그렸다. 작품 속 여성은 남성의 시각과는 전혀 무관한 순전히 여성 화가의 시각에 비친 여성적 인상이다. 현실의 여성이라기보다 신화와 환상 속의 여인처럼 가볍고 투명하며 시공을 부유하는 듯한 가냘프고 섬세한 모습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육감적 여성은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아폴리네르와 열정적 사랑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이미 동성애적 성향을 내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여성 간의 편안하고 친밀한 분위기, 비슷한 취향과 부드러운 대화는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그녀의 글의 도처에서 이를 찾을 수 있다.
연대순으로 수록된 그림을 보면 초기에는 입체파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1912년 <가구가 딸린 집>에서 비로소 그녀의 개성적 화풍이 펼쳐지기 시작함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 속 여성은 검은 윤곽선으로 신체를 표현한 가운데 긴 팔과 긴 손가락, 날아갈 듯 발끝을 세우고 있다. 얼굴형도 뾰족한 인상을 주는 가운데 눈은 세부 묘사 없이 검정색만으로 그리고 있다. 주변에는 대체로 악기가 등장하고, 개 또는 말과 같은 반려동물도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후기로 가서는 검은 신체 윤곽선이 사라지고 얼굴형도 부드러워지며, 비교적 화려한 색도 간혹 사용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한 눈에 봐도 마리 로랑생의 작품임을 알아 챌 수 있을 정도의 특색은 여전하다.
수록된 그림들 가운데 인상에 남는 작품을 두서없이 나열하면, <가구가 딸린 집>,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 무도회>, <춤>, <조각배>, <삼미신>, <다이애나 여신>, <성의 삶>, <곡예를 하는 소녀>, <세 소녀>, <개가 있는 풍경>, <무희들>, <세 명의 젊은 여인>이다. <자화상>, <코코 샤넬의 초상>, <키스>처럼 대표작으로 알려진 그림은 그렇게 와닿지 않는다.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기보다 /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보다 / 죽었어요. / 죽었다기보다 / 잊혀졌어요. (P.84, 진정제)
이 책이 마리 로랑생의 화첩을 넘어서는 가치는 그녀 자신의 글을 담고 있어서다. <밤의 수첩>을 발췌 편역이기에 글의 온전한 모습을 알기 어렵지만, 그녀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여성성의 의미, 아폴리네르와 관계와 일화, 어릴 적 아버지와 얽힌 육식 양 추억 등은 그녀 작품을 해석하는 단초 역할을 담당한다. 이 책의 표제도 그녀의 시에서 한 대목을 가져온 것이다.
<밤의 수첩>이 제대로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전기도 <마리 로랑생, 사랑에 운명을 걸고>라는 제목으로 역시 오래전에 나왔다가 단종되었다. 부록으로 연보가 실려 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1983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마리로랑생미술관을 설립했다고 한다. 앞서 보았던 알폰스 무하도 그렇고, 일본의 문화적 저력을 다시금 보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