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버지니어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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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에 이은 울프 두번째 소설이다. KTX에 놓고 내린 <자기만의 방>을 포함하면 세번째 도전에 해당한다. 울프는 만만한 작가가 결코 아니다. 역자의 해설을 통해 보더라도 울프는 자신을 지적인 작가로 각인시키려고 노력했던 듯 하다. 당시의 일상적인 여성작가와는 구분되는.

울프 글은 먼저 뚜렷한 플롯 내지 스토리가 부재하다. 이를 서사구조의 파괴라고 하는데 지난 세기 초에 등장하였던 소위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연유다. 외적인 사건은 이제 부차적 역할을 수행할 뿐이요 인물 내면의 사고와 의식이 수면에 떠오른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적 배경은 단순해지게 되었다. 누구처럼 하루 동안의 배경으로 장편 소설을 뽑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울프는 그리 극단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댈러웨이 부인>도 시간적으로 이틀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수미일관한 일개 흐름을 지니고 있다. 댈러웨이 부인(클러리서)에게서 셉티머스 부부, 피터 월쉬 등으로 작가의 관심은 마주치는 인물의 내면세계로 헤엄쳐 들어갔다 불쑥 빠져나온다. 나비가 꿀을 찾아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오르듯이. 어느책에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의 구조성을 비판하는 주장에 대한 반박을 이와 같이 묘사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결코 마르지 않는 꿀물을 찾아 헤매는 한마리 나비. 여기서 구조와 형식을 논하는 것은 감성이 메마른 자의 부지없는 미련일 뿐.

오랫동안 울프는 페미니즘 문학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것이 내가 울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고. 이제 그 시각은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권두언처럼 울프의 문학이 '인간주의 문학'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히 <등대로>에 비하면 기법적으로 원숙해 졌지만 문학적 감흥은 일지 않는다. 느끼는 문학에서 이해하는 문학으로의 변모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한계인 듯. 그래도 문학에 소위 재미가 빠지면 사람들은 문학을 왜 읽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권말해설은 '삶과 죽음의 화해로운 공존' 이라고 하여 속물로 간주당하기도 하는 클러리서와 전쟁의 상흔으로 괴로워하는 셉티머스의 엇갈린 삶의 행로를 비교하여 이것을 작품의 주요한 모티브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클러리서가 피터 월쉬 대산 리차드를 택하여 댈러웨이 부인이 되는 것을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작가가 진정으로 이러한 주제의식을 품은채 글을 썼는지 알 수 없다. 아니면 꿈보다 해몽이라는 속담이 적중하는 경우.

작품중에서 셉티머스도 피터 월쉬도 그리 긍정적인 인간형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차라리 리차드가 단순하지만 상대적으로 건전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킬먼양에 비하면 그녀가 속물로 미워하는 댈러웨이 부인은 독립성을 가지고 본인의 인생을 선택하였으며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당한 안주인으로의 자태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황홀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울프는 페미니즘을 모더니즘과 결합시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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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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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 버지니아 울프 전집 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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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지 않은 분량에 여유로운 행간이었는데 완독에 의외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스토리가 복잡하지도 않은데.

사실 스토리 자체는 단순하다. 연극 상연과 그 전후로 포인쯔홀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그리고 있다. 스토리가 단순한만큼 오히려 내용의 복잡성은 만만치 않다. 작가의 말처럼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전작들에서 한두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 독창성 여부에 대해서는 해설에서처럼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작가의 작품에만 국한하자면 구성 해체에는 성공한 듯 싶다. 한 문장도 쉽사리 독파를 허용하지 않는다. 문장 하나하나가 싯귀처럼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 더우기 평범한 대사와 혼재된 고전의 무수한 인용은 영국 문학에 대한 지식없이는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각주라도 인용의 출처를 밝혔으면 하는 한줄기 아쉬움.

이쯤에서 작품의 의도가 궁금하다. "나를 버리고 우리로 대치하자"라고 작품 구상에서 언급했다고 한다. "우리가 비록 다른 역할들을 행하지만 똑같다"는 목사의 연극 총평이 이를 가리키는가?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획일적인 의미를 지니지는 않을 것이다. 각각의 개성과 차이가 인정되고 존중되는 우리. 2차세계대전이 광분하는 시절. 나치와 파쇼가 전횡하는 시기. 그것은 소박하지만 절실한 바램이었을 것이다. 연출자 라 트롭양이 일탈의 존재로 묘사되지만 부정적으로 여겨지지 않는게 그런 연유다. 담배를 피워대며 술집에 들어가고 동성애자("침대와 지갑을 같이 썼던")임에도 말이다.

'막간'은 말 그대로 막과 막 사이를 가리킨다. 결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부분이 아니다. 연극이 상연되는 동안 관객은 자신을 잊고 무대에 빠져든다. 사이버 공간의 실재화, 반면 막간에서 사람들은 다시금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무대위와 아래 중 진정한 삶의 반영은 어디일까? 비약한다면 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가, 누가 나비고 누가 장주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작가가 최종적으로 타이틀을 변경한 것은 가벼운 변덕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버지니어 울프의 대표작은 대개 <등대로>와 <댈러웨이 부인>을 꼽는다. 그만큼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즉 탁월한 작품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작가가 의욕에 지나치게 충만하여 작품의 구조 해체에 치우쳐 문학 자체의 본질 획득에 실패한 데 연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곱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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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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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조광조 죽고... 개혁도 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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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동료가 한 번 보라고 주어서 그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단순한 축약본이 아니라 만화 형태이므로 딱딱함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환영받을 만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글로 번역할 경우 320쪽짜리 책 41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를 축약하여 전달하고자 하면 불가피하게 편집자의 자의성이 개입되는데, 이게 때로는 약이 되지만 독이 되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싫어하는 것도 그 지나친 자의성이 거슬렸던 탓이다. 어쨌든 저자는 방대함 중에서 정치사에 한정하여 작가의 주관적 개입이 도저할 것이라고 일찌감치 선언하였고 그 결과는 꽤나 흥미로웠다.

역사적으로 중종시대는 사화로 물든 시기의 한복판이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실권이 없어 공신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조광조를 중용하다가 다시 이를 내치다가 마침내는 김안로라는 희대의 간신을 잉태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혼돈의 극치였다. 작가는 이와같이 반정공신세력과 조광조, 김안로로 이어지는 시대 흐름을 종축으로 삼고 중종의 심중을 횡축으로 삼아 당대 정치사를 명쾌하게 그리고 있다. 모델링의 장점이 바로 현상의 단순화를 통한 이해의 증대가 아니었던가.

작가의 말마따나 중종에게는 성군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아무 욕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신하에 의해 쫓겨난 임금, 이는 언제든 자신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종에게는 왕좌를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차대한 과업이며, 조광조는 주군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향년 38세의 나이, 며칠후면 내 나이가 그리 된다. 조광조는 비록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지만 후대에 성인 소리를 들으며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으니 무익한 생은 아니리라.

작가의 쾌도난마에만 함몰되지 않는다면 무척 흥미롭고 유익하게 볼 수 있다. 문득 작가의 나머지 책들도 손에 들고 싶다. 그나저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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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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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윤내현 지음 / 지식산업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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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우리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하였다. 공중파 방송사에서 경쟁적으로 방영하는 드라마들-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은 바로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더우기 이들 프로그램은 그 스토리를 기존 학계의 정설보다는 재야사학 내지 야사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어 생경한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리고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처럼 강단사학계와 재야사학계간에는 심연이 존재하고 있다. 그 심연의 한복판에 바로 고조선의 문제가 얽혀있다. 저자는 정통 강단사학계 출신이지만 통설과 다른 가설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오랜동안 학계에서 소위 '왕따'를 당했다. 선배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정보기관에 투서까지 하는 등, 어찌보면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을까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다.

저자는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 고대사에 접근하게 되었고, 기존 학설에는 한계점이 잇었다고 한다. 고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 이어져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멸망되고 한사군이 설치되는 과정은 심각하게 역사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 역사의 시초부터 잘못 이해되어 우리 민족은 초기부터 중국의 지배를 천여년간이나 받는 열등한 민족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걸 그렇다고 강변하는 것은 잘못이다. 단군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으므로 역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인류의 고대사는 사라져야 한다. 트로이도 발굴되기 전까지는 한갓 호메로스가 전하는 신화에 지나지 않았다.

강단사학계는 학문탐구에 있어 좀 더 개방성을 보여야 한다. 재야사학계의 주장이 때로는 터무니 없다고 하더라도 '철학'이니 '문화'니 '경제'니 하는 어휘에 집착하여 사료를 외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대로 사료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정말로 합리적 증거와 추론에 갑능 두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영역에서 만주와 중국을 아우르는 초대국까지 시각에 따라 고무풍선과 다름없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을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WTO가 생기고 UR이 열리때 예상과는 달리 여전히 지역적 블록의 벽은 견고하고 민족적 자존심은 무너뜨리기 어렵다.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프리드만은 세계화의 궁극적 승리는 올리브 나무를 어떻게 잘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설파한다. 올리브 나무가 렉서스를 덮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만큼 인간적 가치, 전통의 가치는 커다란 힘을 갖고 있다. 민족주의가 곧 수구주의는 아니다. 민족주의가 나치와 파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민족주의는 우리가 자신감을 갖고 타인을 상대하고 긍정적인 발전을 이루는 엔진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가 통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그리고 그것이 순기능을 하도록 바로잡자는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에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종전의 분열적 시각이 아닌 통합된 역사적 시각은 올바른 역사 교육에서 나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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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12.2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
윤내현 외 지음 / 지식산업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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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윤내현의 저서이다.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가 비교적 가벼운 성격-내용은 그러하지 않지만-의 저작이라면 이 책은 본격적으로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 그것도 혼자만이 아니라 고대 복식사와 고인돌 연구자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서.

먼저 나는 고조선에 대한 윤내현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음을 밝혀둔다. 단군조선이 만주와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이며, 초기 연대를 올려잡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자조선과 이를 뒤집은 위만조선의 강역은 단군조선 전체가 아니라 서부 변경 지역이라는 등등. 민족적 자존심을 달래는 그의 가설을 따라가자면 무한한 즐거움과 자긍심이 샘솟는 것을 억제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저자가 순수한 학문적 자세로 고조선 연구에 매진하였듯이 나 또한 보다 비평적 시각으로 접근하고 싶다.

우선 윤내현의 고조선 강역 연구는 다른 연구자와는 달리 매우 철저한 문헌 고증을 통하여 사실에 꽤 근접하고 있다. 타연구자가 무시하거나 빠뜨리거나 곡해하는 부분을 그는 철저히 파고들어 바로 중국사료로써 고증하고 있다. 이로써 고대의 요수와 요동이 지금의 랴오허와 랴오둥과는 다름을 명쾌히 집어내고 있다. 그외에도 그의 고조선 연구는 남들과 구분되는 독창적이면서도 탄탄한 논리적 배경을 지니고있어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저자가 다른 곳에소 토로하였듯이 학문적 문제를 비학문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들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고조선이 수도를 4번 옮겼다는 주장은 아직 근거가 취약하게 다가온다. 여기에 기반한 고조선의 영역 팽창도 한반도-만주-한반도라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또 위만조선의 멸망에 대한 상세한 고찰과 단군조선의 멸망과정은 어찌되었는지에 대하여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물론 이 책은 고조선의 '강역'에 집중하는 관계로 논의에서 빠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여하튼 이 책에서의 윤내현의 연구만 가지고는 고조선 논의를 매듭짓지는 못하리라 여겨진다.

한편 박선희의 복식을통한 고조선 연구는 꽤나 흥미롭다. 기존 문헌에 치우친 연구와는 달리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그의 글을 토애 나는 비로소 고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 본토보다도 선진적인 문화를 전개했을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문화가 중국과는 초기부터 뚜렷이 구분되는 독자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 고대사는 지나치게 문헌에만 치우친 점이 없지 안았다. 부족한 사료를 파헤치다보니 글자 한 자의 해석에 목매달고 절대시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 고고학과 가타 학문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려면 사학도는 보디 폭넓은 시각을 배양하는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논란은 많지만 천문기상학적 관점에서 고대사를 재조명한 것은 참으로 갈채를 보낼만한 시도이다.

하문식도 고인돌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에 접근하고 있는데 앞의 두 저자에 비해서는 상관성이 다소 처짐을 느끼게 한다. 특히 만주와 북한의 고인돌에 집중하여 남한의 고인돌은 생략하고 있어 한반도 남쪽이 진짜로 고조선의 강역에 속하는지 궁금증을 해소하기 어렵다.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할 듯싶다.

이 책 하나로써 고조선의 강역에 관한 모든 논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오히려 이 책의 주장은 또다른 논쟁의 출발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새롭고 보다 합리적인 가설 제시와 반론은 학문발전의 기본 동력이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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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12.2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