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층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8
고다 로한 지음, 이상경 옮김 / 소화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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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근대문학이 서구의 모방과 추종에서 비롯되었음은 분명 사실이다. 외국의 강력한 힘에 굴복하여 개방한 일본으로서는 앞서가는 서구를 뒤쫓는데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고다 로한의 이 작품은 위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대세에 영합하지 않는 의연함을 보여주는 점에서 유독 두드러진다. 전통적 소재를 다루며 고유 가치의 미덕을 드러내 보이는데 주력한다.

 

소설의 도입부도 인상적이다. 작중 화자는 작가도, 작중 두 주요 인물인 겐타와 주베도 아니다. 겐타의 아내 오키치, 주테의 아내 오나미의 독백으로 작중 현실과 인물의 상황이 소개된다. 분량이 많지 않은 만큼 비교적 간단한 플롯에서 사건과 인물간 갈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린다.

 

겐타와 주베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겐타는 큰형님으로 불리며 목수 집단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로서 실력과 인품 면에서 뛰어난 인물임을 작중 내내 볼 수 있다. 간노지의 중건을 지휘하였으며, 오층탑의 견적도 받았으니만치 그가 탑을 세워도 훌륭하게 해냈을 것이다. 주베는 같은 목수지만 남들로부터 느림보라고 멸시받는 처지다. 남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않은데다 일할 때는 느려서 기한을 놓치기 일쑤다. 그런 그가 로엔 큰스님을 찾아가서 자기가 탑 건립을 맡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다.

 

주베는 정말로 변변치 못한 인물인가? 주베의 아내는 이렇게 한탄한다. “어떻게든 우리 남편 솜씨를 반만이라도 남들이 알아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을 텐데.” (P.17)
주베 자신의 말이다. “이 주베는 끌과 손자귀를 쥐면 겐타 님이나 누구라도, 먹줄을 잘못 치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주베는 만에 하나라도 뒤지는 일은 틀림없이 틀림없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P.30)
겐타도 인정한다. “자네가 솜씨가 있으면서도 불행히 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네. 자네가 평소에 박복한 것을 입 밖으로 내진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울고 있는지도 알고 있네.” (P.59)

 

주베가 주변 사람들의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층탑 건립공사를 맡고 싶어 하는 까닭은 목수로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바램이다. 자신이 결코 실력 없는 하찮은 느림보 녀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로엔 큰스님은 탑 모형을 보는 순간 이를 깨닫는다.

 

이후 과정은 로엔 큰스님의 중재와, 겐타와 주베의 타협과 갈등의 반복이다. 겐타는 대승적 차원에서 윗사람의 관대함으로 탑 건립을 결국 양보한다. 주베는 공동 작업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맡기를 고집한다. 오로지 순전한 자신의 실력과 노력으로 탑을 세우기를 고집한다. 소위 쟁이로서의 자존심. 단 한 마디, “아무래도 주베 그렇게 하는 것은 싫습니다.” (P.61)

 

우여곡절 끝에 탑 건립공사를 맡아서 진행하는 와중에 피습으로 부상을 당하는 주베. 며칠 안정을 취하라는 아내의 당부를 뿌리치며 내뱉는 말에서 그의 절박함과 치열함이 배어나온다.
“만에 하나라도 일을 그르쳐서는 큰스님, 텐가 큰형님께 얼굴을 들 수가 있겠는가? 이봐, 살아 있어도 탑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말야, 이 주베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맡은 일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당신 남편은 살아있지 않은 거야.” (P.131)

 

이 소설에서는 일본의 과거와 오늘을 지배하는 미덕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한결같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장인의 자세. 자신의 일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정신적 태도. 대승적 관점에서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며 보다 큰 공동의 선과 가치를 위해 협심하는 마음가짐. 여기에 로엔 큰스님처럼 드러나지 않은 명인과 재주를 발견하고 알아주는 안목의 가치.

 

이러한 미덕은 일견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회사 경영이 어려워 부도가 나서 회생이 불가능할 때 대표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죄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국내 기업에서 보기는 어렵다. 조그만 음식점을 몇 대째 이어서 가업으로 이어나가는 후손들과 조금만 맛집으로 소문나면 반짝 대박을 기대하며 무리수를 두거나 자식에게는 고생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우리네 사람들과 비교해 보라. 진정한 장인정신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고다 로한은 이 소설에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하여 보여주고 강조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이다. 비록 근대화를 위해서 서구화를 지향하더라도 무분별하게 휩쓸릴 것이 아니다. 불가피하더라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마음을 유지하자. 이것은 편협한 국수주의와 묵수(墨守)적 태도와는 다른 차원이다.

 

작중 인물에 부정적 유형이 없다는 게 또 하나의 특색이다. 겐타 부부와 주베 부부, 성인과도 같은 로엔 큰스님, 물론 간노지의 몇몇 인물들은 일부 아쉬운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세키치조차도 겐타에 대한 존경과 충성의 염(念)을 품고 피습을 저지른 것이지 성품 자체가 악한 인물이 아님은 세키치와 오키치 간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간노지 오층탑 건립이라는 고덕(高德)한 보시를 서로 맡고자 벌이는 긍정적 인물들. 도중에 다툼과 불화가 있었지만 마침내 이루어진 오층탑 앞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 간의 화해와 대단원. 인물들을 둘러싸고 사건을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고유의 전통적 가치들. 다소 작위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내용과 구성임에도 훈훈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역시 작가의 탁월한 솜씨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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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름
후타바테이 시메이 지음, 이여희 옮김 / 태동출판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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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사에서 최초[1887년 발표]의 근대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먼저 언문일치를 처음 구현하였다는 점이다. 근대 이전에는 말할 때 쓰는 어투와 글 쓸 때 쓰는 어투가 확연히 구분되었다. 일본어에서 언문일치는 문장을 ~だ 또는 ~です로 끝맺음을 가리킨다. 지금에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불과 백여 년 전에야 주창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 문체에 관한 사안은 원문에서는 명확히 체감할 수 있겠지만 번역문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이니 그렇다고 알고 넘어간다.

 

근대성은 정신 면에서는 서구 합리주의, 물질 면에서는 자본주의의 영향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며 시작한다. 근대성이 문학에서 발현되면 바로 사실주의로 대변된다. 대지에 단단히 두 발을 딛고 두 눈으로 바라본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것이 아름답든 아니면 추하든 창작의 기본 토대로 삼고자 한다.

 

문학사적으로는 그러하다는 뜻이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작품으로 생존하려면 현재의 독자에게 소구할 수 있는 미덕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감동이 되었든 아니면 재미가 되었던지 간에.

 

형식 면에서 두드러지는 특색은 작가가 화자로서 소설 중에 등장하여 작품 전개 방향을 주도하거나 작중 인물에 대한 주관적 감정을 노출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렇게 근세의 통속소설인 희작(戱作)의 어조를 차용한 점에 대해서 근대성의 불완전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나로서는 독자에게 친숙한 어조를 사용하여 흥미를 유도하고 전통의 무조건적 배격 내지 단절이 아니라 부분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화자의 주도적 개입은 판소리계 소설과도 일정 유사성을 보인다.

 

내용 면에서 애정 소설인 동시에 사회 소설임이 곳곳에 드러난다. 결정적으로 분조의 내심 묘사와 전개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는 심리 소설이기도 하다. 작품의 내부 축은 우쓰미 분조와 오세이 간 애정의 형성과 혼다 노보루의 개입으로 인한 단절이라는 삼각관계이다. 외부 축은 우쓰미 분조의 관계(官界) 취직과 면직, 부조리한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이 담당하다. 내외를 연결하고 아우르는 것이 19세기 후반 일본 사회의 세태와 풍속에 대한 풍부한 묘사이다. 여성들의 헤어스타일과 패션, 서구문물 유입에 따른 문화와 관습의 변화 등이 비교적 세밀하게 언급되어 있어 이채롭기조차 하다.

 

아무래도 독자 입장에서는 애정 관계의 변화가 흥미가 당긴다. 분조의 눈에 비친 오세이는 외모와 언행, 지성의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완벽한 여성상이다. 작가와 독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일개의 원숭이처럼 그저 유행이나 쫒는 여자가 되었다.” (P.37)
“오세이는 실로 경망스럽고 가벼운 여자이다.” (P.249)

 

분조도 나중에야 깨닫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오세이는 개화의 겉멋에 취한 평범한 여성에 불과한데, 분조는 여기에 자신의 마음 속 이상형을 투사하여 요조숙녀의 가면을 씌우고 이에 흐뭇해하였던 것이다.

 

분조와 노보루는 소설 첫 장면에서 자못 친구 사이로 등장한다. 분조와 달리 노보루는 외향적이며 처세에 능란하다. 다소 능력이 있지만 성격적으로는 비열하며 호색한으로서 그에 대한 분조의 평가는 매우 혹독하며, 노보루와 오세이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혐오가 강렬해짐을 알 수 있다.

 

7장의 당고자카로 국화구경을 가려는 장면에서 동행을 거부하는 분조를 노보루가 놀리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 분조는 입안으로 “바보같은 놈”을 두 번 되뇌는데 처음은 노보루에게 향한 것이지만 나중은 자신을 향한 비난이다. ‘바보같은 놈’은 분조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미하는 상징적 어휘다. 개화와 근대의 물결에서 깊은 사려와 진정한 배려 같은 종래의 덕목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이 분조의 비극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분조의 처신에 답답하기 그지없다. 과감하게 오마사의 집을 나와서 독립생활을 구하였다면 종국적으로 분조 자신을 위해서 좋았을 텐데. 처음에는 오세이에 대한 일말의 미련이 작용하였다. 나중에는 수렁에서 오세이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의식이 가출을 막았다.

 

“이렇게 오세이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만 아니라 저버리면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분조” (P.281)

 

분조의 우유부단과 불행동을 손가락질하기는 쉽지만 자신을 분조의 입장에 놓고 보면 뾰족한 대안을 찾기가 힘들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의 독자적 예술작품으로 이 소설은 비교적 성공적이다. 독자로 하여금 책장을 빨리 넘기고 싶게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 작품은 작가의 고심참담과 심사숙고의 산물이 아니다. 젊은 작가가 일필휘지의 경지에서 휘갈겨 쓴 글이다. 그럼에도 형식과 내용에서 많은 즐길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천우(天佑)의 발로라고 하겠다.

 

※ 부록으로 두 편의 작가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어 작가와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
    - 나의 언문일치의 유래
    - 내 반생의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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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지혜 - 꽃에서 펼쳐지는 탄생과 소멸의 위대한 생존 드라마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성귀수 옮김, 조영선 그림 / 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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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이후 마테를링크는 에세이, 특히 자연관찰 부문에 몰두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들은 곤충 3부작 외에 1907년 작인 <꽃의 지혜>이다.

 

목차와 해설, 연보 등을 모두 포함해도 160쪽 밖에 되지 않는 데다 활자와 조판도 여유롭고 원작에 없는 예쁜 꽃그림 삽화도 풍부하게 들어가 있어 실제 글의 분량은 부담 없는 편이다. 아담하고 예쁘장하여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

 

책이니만치 내용을 외면할 수는 없다. 마테를링크는 꽃을 포함한 식물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뜨릴 것을 주문한다.

 

이동이 자유로운 동물에 비해 뿌리로 땅에 천착하여 온 삶을 감내하는 식물의 천형(天刑). 좌절과 포기 대신 삶에의 무한한 본능을 이루기 위하여 끝없는 노력과 지혜를 발휘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근원적 본능은 (개체의) 생존과 (종족의) 번식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고자 분투하며 짝짓기와 출산에 혈안이 되는 현상은 다 연유가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이러한 꽃들의 사례를 소개하여 우리네 인식을 각성시키고자 한다.

 

“우리 인간의 기술적인 영감이라고 해봐야 바로 엊그제 일이지만, 꽃의 재능과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세월을 이어 온 것입니다.” (P.82)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채로운 지성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동일한 수준의 희망과 이상을 좇아 매진하는 것 같습니다.” (P.103)

 

가루받이, 즉 수분(受粉)을 위한 꽃들의 치열하고도 다각적인 의지적 연구와 고안은 식물의 수동성과 정태성이라는 선입견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사실로 비친다. 그들의 기발하면서 정교하기 그지없는 수분 장치를 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다.

 

통발의 기압과 수압으로 조절되는 밸브 장치, 꽃자루를 스스로 끊어버려 삶과 생식을 교환하는 나사말의 수꽃, 비터멜론의 경이적 씨앗 분사력 등 예는 한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작가는 난초를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운 지혜의 증거로 추천한다. 오르키스 마쿨라타, 피라미드 난초, 카타세툼, 개불알꽃, 두레박난과 같은 난초과 식물의 자세한 수분 전략과 전술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명료하면서 섬세한 필치로 기술된 글을 읽자면 파브르의 곤충 못지않은 감명을 느끼게 되고, 과연 식물들도 이성과 지혜를 갖춘 존재라는 주장에 무작정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테를링크가 심혈을 기울여 꽃의 지혜를 설파하는 이유는 마지막 장에 드러난다. 바로 인간의 참다운 지혜에 대한 논지로 안내하기 위해서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과 꽃들이 살아가도록 하는 본질적 기운과 원리는 동일함을 발견하고 자만을 벗어던지고 더 겸손해지자고 말이다.

 

“꽃과 우리가 서로 닮았고, 꽃이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으며, 꽃의 방법과 습성과 관심과 성향과 욕망이 우리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 우리가 억누를 수 없는 본능으로 희구하는 모든 것은 저절로 그 당위성을 확보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삶의 곳곳에 꽃의 지혜가 만개할진대, 어떻게 그 삶이 악과 죽음, 어둠과 허무에 대한 승리의 몸짓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P.142)

 

이 책의 미덕은 반복하자면 간결한 가운데 꽃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알려지지 않은 신기한 사례들을 독자에게 소개하여 새삼스레 관심의 조명을 비추는 데 있다. 작품이 쓰여진 시기가 지금부터 근대 자본주의가 정점을 향해 달음박질치던 백 년 전임을 염두에 두면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고 인간 위주의 관점을 탈피하고 자연에 눈 돌릴 것을 주창한 작가의 선구적 혜안에 탄복할 따름이다. 그것도 거창하고 단조로운 논설이 아니라 꽃을 제재로 한 얄팍한 에세이를 통해서.

 

여기에 더해서 원작에 없는 수채화풍의 아름답고 세밀한 꽃 그림들은 글을 통해서는 막막할 수도 있었던 꽃들을 눈앞에 생생하게 살려내어 책에 한층 격조를 높이고 있다. 이는 꽃 사진을 게재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한마디로 여러 면에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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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생활
모리스 메테를링크 지음, 김현영 옮김 / 이너북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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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파랑새>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로 유명한 마테를링크(예전에는 메테를링크로 알았는데 외국어표기법이 변경된 모양이다)는 후기에 이르러 에세이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 작품을 포함한 곤충 3부작 외에, <꽃의 지혜> 등 자연관찰에 남다른 흥미를 지닌 듯하다.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게 그의 삶을 살펴보면 언제나 은둔과 고독을 지향한 것을 알 수 있다.

 

<꿀벌의 생활>에서 작가는 양봉가의 시각으로 꿀벌을 관찰하면서 보고 듣고 읽고 깨우친 사항을 차근차근 적고 있다. 이미 한 세기도 더 경과된 1901년에 발표하였지만, 내용에 전혀 진부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양봉 벌꿀의 생태와 양봉가의 양봉 방식이 본질상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음에 기인한다.

 

우리가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주로 접하게 되는 동물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야생 동물의 세계다. 생활 주위에 친숙한 존재인 개, 고양이 등의 애완동물과 소, 닭, 양, 염소 등의 사육동물은 호기심과 흥미를 자아내는 대상이 아니다.

 

이 책을 보면 이러한 선입견이 매우 그릇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문 양봉가나 동물학자가 아닌 중에서 분봉의 기이한 열광, 벌집 건축의 우수성, 여왕벌들 간 생존을 건 혈투, 결혼 비행과 수벌의 비극, 대대적인 수벌 살육과 같은 신기하면서도 비극적이며 당혹스러움을 자아내는 행태 등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백하지만, 모든 일벌들이 암컷임을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최후이자 최상의 지위를 자부한다. 자연을 깊이 관찰한 애호가일수록 자연 앞에서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를 절감한다고들 한다. 대자연이라는 호칭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외경과 겸허함을 드러내는 존칭이다. 마테를링크도 마찬가지다. 꿀벌의 생태를 소개하는 틈틈이 그는 꿀벌의 지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의견에 대항하여 꿀벌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과학적이며 행동 하나하나가 꿀벌 종의 미래를 염두에 둔 것이 밝히고 있다. 그들과 대비할 때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상대적 우수성과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회의적이기조차 하다.

 

“나는 지금 다른 생물에게도 우리와 다른 어떤 지성이 있고, 그들이 우리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인간이라는 하나의 작은 존재로서 다른 존재의 정신적인 영역에 대해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뿐이다.” (P.37)

 

“우리는 인간에 대해 말할 때에도 꿀벌에 대해 말한 것 이상의 것을 말할 권리가 없다. 우리도 어쩌면 단순히 고통에 대한 공포, 쾌락에 대한 이끌림을 따르고 있을 뿔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가 지성이라 부르는 것 역시 동물의 본능이라 부르는 것과 그 기원이나 사명에서 다르지 않다.” (P.51)

 

꿀벌의 속성 중에서 전체를 위한 개체의 희생은 매우 철저하다. 집단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무수한 희생도 그들은 기꺼이 감내하는 듯하다. 그 무자비함은 진화 단계에서 일정부분 불가피한 측면을 지니지만, 지나치게 무게중심을 두면 인류가 겪은 전체주의의 악령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기본 가치는 개인과 사회의 적절한 조화와 배분에 있다.

 

작가는 꿀벌 사회를 지탱하는 집단의지를 ‘꿀벌의 정신’으로 부른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지성체계처럼 작동하여 개개의 꿀벌들이 벌집의 번영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끝내는 자아 희생을 감내하도록 통제한다. 그것이 우리의 눈에는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으로 비치겠지만 섣부른 비난과 멸시를 퍼붓지 말자고 한다. 인간보다 더 크고 우월한 외계의 이방인이 우리를 관찰할 때 인간도 결코 꿀벌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자연 이해는 편협하며 단편적이다. 현상의 일면 만을 흘끗 보아놓고 마치 핵심을 간취한 것처럼 기고만장해서는 자신만의 성을 구축하기에 바쁘다. 인간을 제외한 타 동물, 특히 곤충류는 이성적인 고민 없이 전적으로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원시적 발달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도처에서 인간을 뛰어 넘는다. 인간이 자족하고 방심하는 순간 자연은 예기치 않은 변화무쌍한 변이성을 보여준다. 자연 법칙은 인간 의도에 부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종(種)의 생존과 불멸을 위해 꿀벌은, 자연은 지고의 노력을 경주한다. 인간의 평가에 그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꿀벌은 여름의 영혼이다. 꿀벌은 풍요의 시기를 알리는 시계다. 가볍게 날아다니며 향기를 내뿜는, 민첩하게 움직이는 날개다. 그리고 춤을 추는 지혜로운 빛이고, 흔들리는 빛의 속삭임이며, 몸을 쭉 뻗고 엎드려 쉬는 대기의 노래다. 그녀들이 나는 모습은 진정한 환희, 눈에 보이는 작고 확실한 음표다.” (P.42)

 

작가의 꿀벌 찬미는 아름다운 애정으로 가득하다. 애정은 꿀벌의 행동 양식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솔직한 이해에 토대를 두었다. 마테를링크는 자연과학적인 꿀벌의 한계와 약점을 분명히 인식한다. 부풀린 기대와 헛된 희망을 자신의 애정물에 불어넣지 않는다. 꿀벌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하면서 그녀들을 사랑한다. 조심스레 단언컨대 인간끼리의 바람직한 사랑 방식도 이에서 멀지는 않을 것이다.

 

※ 옮긴이의 약력을 보건대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의 의도와 문체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번역에 임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로 자자한 작가의 명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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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 신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9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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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로 소위 대중미술서로 대박을 친 저자의 후속작이다. 예기치 않은 전작의 성공을 거둔 저자는 다음 저작을 쓰는데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전작과 유사하되 식상하지 않으면서 재판의 혐의를 피하는 묘책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무난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후속작이다. 상대적으로 참신성과 혁신성은 떨어지지만  좀 더 진지한 이론적 면모에 대한 고민과 아울러 회화를 넘어선 여러 미술 장르의 관심도 보여준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사안이다. 그림에 대해서 사전 및 배경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하여도 그림이 저절로 가슴 속에 확 다가오지는 않는다. 화가 및 작가들의 반복되는 습작과 운동선수들의 끊임없는 연습처럼 체화시켜야 분야에서 일가를 이룰 수 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미술 감상에서 행하는 것은 실제 감상행위를 가리킨다. 그림을, 조각을, 건축을 보지 않고 감상능력이 증대될 것을 기대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알면 관심을 갖게 되고, 다음 수순으로 자주 접하다 보면 더 잘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다. 그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잘 봐야죠. 귀 기울여야죠. 어느 순간 보이는 것이 전과 다르고, 들리는 것이 전과 다른, 돈오의 경지가 옵니다.” (<잘 보고 잘 듣자>에서)

 

동양화에서 바라보는 자연과 인간의 의의는 분명 서양화와는 다르다. 저자의 설명처럼 산수화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산과 물 뿐만 아니라 어진 자와 슬기로운 자를 의인화[요산요수(樂山樂水)]하고 있다. 산수화는 산수를 그리되 심상화된 산수를 그린다는 것이다. 심상 또는 뜻, 정신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옛 초상화는 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압도적으로 강인한 표현으로 유명하지만,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전신(傳神), 즉 이형사신(以形寫神)을 매우 중시한다. (<정신을 그리다> & <초상화의 삼베 맛>에서) 외모를 초상화 주인공의 입맛과 지위에 걸맞게 잘 꾸미는 게 아니라 생생한 내면세계를 얼굴에 여하히 잘 불러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외적, 내적 가면을 벗어던진 소위 생얼의 재현이 지상목표였다는 것이다. <송인명 초상>과 <유척기 초상>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처럼 회화에서 문화적 배경은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지닌 미적 감정은 소속된 생활 공동체의 지배적인 관념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집적이 은연중 투사되기 마련이다. 그림 속 잉어는 출세를, 해오라기와 연꽃은 과거급제를 상징하는 것은 문화코드를 모르면 도저히 함의를 파악할 재간이 없다. (<물고기와 새>에서) 단원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와 조숙의 <숙조도(宿鳥圖)>를 관통하는 정서는 저자의 표현대로 거칠고, 성글고, 스산하고, 허허로운 맛이다. (<가난한 숫에 뜬 달> & <조선의 텃새>에서)

 

노력을 요할지라도 보면 읽히는 그림은 얼마나 행복한가. 장승업의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나 유운홍의 <부신독서도(負薪讀書圖)>처럼 스토리가 있는 그림은 이야기를 파악하면 더 이상 생경하지 않다. (<음풍과 열정> & <보면 읽힌다>에서) 뚜렷한 이야기가 없더라도 감상하는 나와 그림 간에 대화가 가능한 작품도 존재한다. 이때 그림은 더 이상 낯선 타인이 아니다.

 

20세기에 발흥한 추상화는 여전히 난해하고 당혹스럽다. 추상화는 그림과 감상자 간 이야기와 대화를 스스로 거부한다. 추상화에는 그림 속의 대상(인물, 사물 등)이 부재한다. 회화 자체의 자율적인 존재가치를 부르짖는 것이 추상화다. 도구, 표현, 색채, 구도 등에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그림의 본질과 화면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화면이여, 말하라> & <달걀 그림에 달걀이 없다>에서) 그림이 본래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색채가, 화면의 배치가,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면 표현 기법 자체가 비로소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주목 받는다. 무엇이 회화의 본질인지는 미지수다. 소위 형식과 내용의 고전적 갈등의 전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과도한 구상중심주의에 대한 극단적 반작용이 추상화로 드러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에 있어서 내용을 담지 않은 형식의 독자적 가치와 생명력의 영속성에 대한 주장이 지속적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움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림이 나날이 어려워지고 이해 불가능하게 되면서 그림보다 말이 더욱 중요해지는 기현상이 생겼다. 아무도 정답을 모르므로 큰 목소리로 남보다 먼저 외치는 사람이 해석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모든 예술의 감상과 비평은 독단과 편애의 결과라고 한다. (<불확실한 것이 만든 확실 – 서원> & <미술 젓가락 사용법>에서) 하물며 추상화의 영역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만인의 유언과 찬미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자신 만의 안목을 가지고 찬찬히 살피고 주의 깊게 생각하는 태도에서 좋은 그림을 구별하고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미술 젓가락 사용법>에서) 외화내빈하는 겉치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제대로 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울러 과도한 의미와 상찬을 덧붙이는 데도 있다. 옹기도, 전통 기와도 우리네 시대에 와서 슬픈 운명을 맞이하였다. (<생활을 빼앗긴 생활용기 – 옹기> & <그저 그러할 따름 – 기와>에서) 반대로 물 건너간 막사발은 다완으로 승격하여 일본의 다도를 완성한 선승 센노 리큐의 깊은 철학적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일본의 국보로 추앙받고 있다. 가난과 유적(幽寂)의 미학이라고 한다. (<물 건너간 막사발 – 다완>에서)

 

미술(또는 예술)의 역할 내지 위상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싶다. 미술은 높이 떠받들고 외경해야 할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네와 더불어 일상 속에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게 마땅한 존재인가. (<말과 그림이 싸우다>에서) 무엇이 우리네 삶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해줄 것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네 민화 재발견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저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덜 세련된 것이 주는 만만함과 예상에서 벗어난 일탈, 그곳에서 솟아나는 유머와 너름새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라도 다 즐거운 감동을 안기나 봅니다.” (<어리숙한 그림의 너름새>에서)

 

이쯤에서 저자가 극찬한 최순우의 글을 읽고 싶다. (<‘봄 그림’을 봄> & <아름다움에 살다 아름다움에 가다>에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아는 눈과 느끼는 마음을 그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서나마 조금이나마 맛보고 싶은 소박한 바램을 터무니없는 과욕으로 치부해버릴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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