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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층탑 ㅣ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8
고다 로한 지음, 이상경 옮김 / 소화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일본 근대문학이 서구의 모방과 추종에서 비롯되었음은 분명 사실이다. 외국의 강력한 힘에 굴복하여 개방한 일본으로서는 앞서가는 서구를 뒤쫓는데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고다 로한의 이 작품은 위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대세에 영합하지 않는 의연함을 보여주는 점에서 유독 두드러진다. 전통적 소재를 다루며 고유 가치의 미덕을 드러내 보이는데 주력한다.
소설의 도입부도 인상적이다. 작중 화자는 작가도, 작중 두 주요 인물인 겐타와 주베도 아니다. 겐타의 아내 오키치, 주테의 아내 오나미의 독백으로 작중 현실과 인물의 상황이 소개된다. 분량이 많지 않은 만큼 비교적 간단한 플롯에서 사건과 인물간 갈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린다.
겐타와 주베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겐타는 큰형님으로 불리며 목수 집단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로서 실력과 인품 면에서 뛰어난 인물임을 작중 내내 볼 수 있다. 간노지의 중건을 지휘하였으며, 오층탑의 견적도 받았으니만치 그가 탑을 세워도 훌륭하게 해냈을 것이다. 주베는 같은 목수지만 남들로부터 느림보라고 멸시받는 처지다. 남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않은데다 일할 때는 느려서 기한을 놓치기 일쑤다. 그런 그가 로엔 큰스님을 찾아가서 자기가 탑 건립을 맡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다.
주베는 정말로 변변치 못한 인물인가? 주베의 아내는 이렇게 한탄한다. “어떻게든 우리 남편 솜씨를 반만이라도 남들이 알아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을 텐데.” (P.17)
주베 자신의 말이다. “이 주베는 끌과 손자귀를 쥐면 겐타 님이나 누구라도, 먹줄을 잘못 치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주베는 만에 하나라도 뒤지는 일은 틀림없이 틀림없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P.30)
겐타도 인정한다. “자네가 솜씨가 있으면서도 불행히 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네. 자네가 평소에 박복한 것을 입 밖으로 내진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울고 있는지도 알고 있네.” (P.59)
주베가 주변 사람들의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층탑 건립공사를 맡고 싶어 하는 까닭은 목수로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바램이다. 자신이 결코 실력 없는 하찮은 느림보 녀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로엔 큰스님은 탑 모형을 보는 순간 이를 깨닫는다.
이후 과정은 로엔 큰스님의 중재와, 겐타와 주베의 타협과 갈등의 반복이다. 겐타는 대승적 차원에서 윗사람의 관대함으로 탑 건립을 결국 양보한다. 주베는 공동 작업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맡기를 고집한다. 오로지 순전한 자신의 실력과 노력으로 탑을 세우기를 고집한다. 소위 쟁이로서의 자존심. 단 한 마디, “아무래도 주베 그렇게 하는 것은 싫습니다.” (P.61)
우여곡절 끝에 탑 건립공사를 맡아서 진행하는 와중에 피습으로 부상을 당하는 주베. 며칠 안정을 취하라는 아내의 당부를 뿌리치며 내뱉는 말에서 그의 절박함과 치열함이 배어나온다.
“만에 하나라도 일을 그르쳐서는 큰스님, 텐가 큰형님께 얼굴을 들 수가 있겠는가? 이봐, 살아 있어도 탑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말야, 이 주베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맡은 일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당신 남편은 살아있지 않은 거야.” (P.131)
이 소설에서는 일본의 과거와 오늘을 지배하는 미덕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한결같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장인의 자세. 자신의 일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정신적 태도. 대승적 관점에서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며 보다 큰 공동의 선과 가치를 위해 협심하는 마음가짐. 여기에 로엔 큰스님처럼 드러나지 않은 명인과 재주를 발견하고 알아주는 안목의 가치.
이러한 미덕은 일견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회사 경영이 어려워 부도가 나서 회생이 불가능할 때 대표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죄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국내 기업에서 보기는 어렵다. 조그만 음식점을 몇 대째 이어서 가업으로 이어나가는 후손들과 조금만 맛집으로 소문나면 반짝 대박을 기대하며 무리수를 두거나 자식에게는 고생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우리네 사람들과 비교해 보라. 진정한 장인정신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고다 로한은 이 소설에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하여 보여주고 강조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이다. 비록 근대화를 위해서 서구화를 지향하더라도 무분별하게 휩쓸릴 것이 아니다. 불가피하더라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마음을 유지하자. 이것은 편협한 국수주의와 묵수(墨守)적 태도와는 다른 차원이다.
작중 인물에 부정적 유형이 없다는 게 또 하나의 특색이다. 겐타 부부와 주베 부부, 성인과도 같은 로엔 큰스님, 물론 간노지의 몇몇 인물들은 일부 아쉬운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세키치조차도 겐타에 대한 존경과 충성의 염(念)을 품고 피습을 저지른 것이지 성품 자체가 악한 인물이 아님은 세키치와 오키치 간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간노지 오층탑 건립이라는 고덕(高德)한 보시를 서로 맡고자 벌이는 긍정적 인물들. 도중에 다툼과 불화가 있었지만 마침내 이루어진 오층탑 앞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 간의 화해와 대단원. 인물들을 둘러싸고 사건을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고유의 전통적 가치들. 다소 작위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내용과 구성임에도 훈훈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역시 작가의 탁월한 솜씨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