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
후타바테이 시메이 지음, 이여희 옮김 / 태동출판사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일본문학사에서 최초[1887년 발표]의 근대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먼저 언문일치를 처음 구현하였다는 점이다. 근대 이전에는 말할 때 쓰는 어투와 글 쓸 때 쓰는 어투가 확연히 구분되었다. 일본어에서 언문일치는 문장을 ~だ 또는 ~です로 끝맺음을 가리킨다. 지금에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불과 백여 년 전에야 주창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 문체에 관한 사안은 원문에서는 명확히 체감할 수 있겠지만 번역문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이니 그렇다고 알고 넘어간다.

 

근대성은 정신 면에서는 서구 합리주의, 물질 면에서는 자본주의의 영향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며 시작한다. 근대성이 문학에서 발현되면 바로 사실주의로 대변된다. 대지에 단단히 두 발을 딛고 두 눈으로 바라본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것이 아름답든 아니면 추하든 창작의 기본 토대로 삼고자 한다.

 

문학사적으로는 그러하다는 뜻이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작품으로 생존하려면 현재의 독자에게 소구할 수 있는 미덕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감동이 되었든 아니면 재미가 되었던지 간에.

 

형식 면에서 두드러지는 특색은 작가가 화자로서 소설 중에 등장하여 작품 전개 방향을 주도하거나 작중 인물에 대한 주관적 감정을 노출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렇게 근세의 통속소설인 희작(戱作)의 어조를 차용한 점에 대해서 근대성의 불완전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나로서는 독자에게 친숙한 어조를 사용하여 흥미를 유도하고 전통의 무조건적 배격 내지 단절이 아니라 부분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화자의 주도적 개입은 판소리계 소설과도 일정 유사성을 보인다.

 

내용 면에서 애정 소설인 동시에 사회 소설임이 곳곳에 드러난다. 결정적으로 분조의 내심 묘사와 전개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는 심리 소설이기도 하다. 작품의 내부 축은 우쓰미 분조와 오세이 간 애정의 형성과 혼다 노보루의 개입으로 인한 단절이라는 삼각관계이다. 외부 축은 우쓰미 분조의 관계(官界) 취직과 면직, 부조리한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이 담당하다. 내외를 연결하고 아우르는 것이 19세기 후반 일본 사회의 세태와 풍속에 대한 풍부한 묘사이다. 여성들의 헤어스타일과 패션, 서구문물 유입에 따른 문화와 관습의 변화 등이 비교적 세밀하게 언급되어 있어 이채롭기조차 하다.

 

아무래도 독자 입장에서는 애정 관계의 변화가 흥미가 당긴다. 분조의 눈에 비친 오세이는 외모와 언행, 지성의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완벽한 여성상이다. 작가와 독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일개의 원숭이처럼 그저 유행이나 쫒는 여자가 되었다.” (P.37)
“오세이는 실로 경망스럽고 가벼운 여자이다.” (P.249)

 

분조도 나중에야 깨닫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오세이는 개화의 겉멋에 취한 평범한 여성에 불과한데, 분조는 여기에 자신의 마음 속 이상형을 투사하여 요조숙녀의 가면을 씌우고 이에 흐뭇해하였던 것이다.

 

분조와 노보루는 소설 첫 장면에서 자못 친구 사이로 등장한다. 분조와 달리 노보루는 외향적이며 처세에 능란하다. 다소 능력이 있지만 성격적으로는 비열하며 호색한으로서 그에 대한 분조의 평가는 매우 혹독하며, 노보루와 오세이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혐오가 강렬해짐을 알 수 있다.

 

7장의 당고자카로 국화구경을 가려는 장면에서 동행을 거부하는 분조를 노보루가 놀리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 분조는 입안으로 “바보같은 놈”을 두 번 되뇌는데 처음은 노보루에게 향한 것이지만 나중은 자신을 향한 비난이다. ‘바보같은 놈’은 분조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미하는 상징적 어휘다. 개화와 근대의 물결에서 깊은 사려와 진정한 배려 같은 종래의 덕목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이 분조의 비극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분조의 처신에 답답하기 그지없다. 과감하게 오마사의 집을 나와서 독립생활을 구하였다면 종국적으로 분조 자신을 위해서 좋았을 텐데. 처음에는 오세이에 대한 일말의 미련이 작용하였다. 나중에는 수렁에서 오세이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의식이 가출을 막았다.

 

“이렇게 오세이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만 아니라 저버리면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분조” (P.281)

 

분조의 우유부단과 불행동을 손가락질하기는 쉽지만 자신을 분조의 입장에 놓고 보면 뾰족한 대안을 찾기가 힘들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의 독자적 예술작품으로 이 소설은 비교적 성공적이다. 독자로 하여금 책장을 빨리 넘기고 싶게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 작품은 작가의 고심참담과 심사숙고의 산물이 아니다. 젊은 작가가 일필휘지의 경지에서 휘갈겨 쓴 글이다. 그럼에도 형식과 내용에서 많은 즐길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천우(天佑)의 발로라고 하겠다.

 

※ 부록으로 두 편의 작가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어 작가와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
    - 나의 언문일치의 유래
    - 내 반생의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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