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의 생활
모리스 메테를링크 지음, 김현영 옮김 / 이너북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희곡 <파랑새>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로 유명한 마테를링크(예전에는 메테를링크로 알았는데 외국어표기법이 변경된 모양이다)는 후기에 이르러 에세이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 작품을 포함한 곤충 3부작 외에, <꽃의 지혜> 등 자연관찰에 남다른 흥미를 지닌 듯하다.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게 그의 삶을 살펴보면 언제나 은둔과 고독을 지향한 것을 알 수 있다.

 

<꿀벌의 생활>에서 작가는 양봉가의 시각으로 꿀벌을 관찰하면서 보고 듣고 읽고 깨우친 사항을 차근차근 적고 있다. 이미 한 세기도 더 경과된 1901년에 발표하였지만, 내용에 전혀 진부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양봉 벌꿀의 생태와 양봉가의 양봉 방식이 본질상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음에 기인한다.

 

우리가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주로 접하게 되는 동물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야생 동물의 세계다. 생활 주위에 친숙한 존재인 개, 고양이 등의 애완동물과 소, 닭, 양, 염소 등의 사육동물은 호기심과 흥미를 자아내는 대상이 아니다.

 

이 책을 보면 이러한 선입견이 매우 그릇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문 양봉가나 동물학자가 아닌 중에서 분봉의 기이한 열광, 벌집 건축의 우수성, 여왕벌들 간 생존을 건 혈투, 결혼 비행과 수벌의 비극, 대대적인 수벌 살육과 같은 신기하면서도 비극적이며 당혹스러움을 자아내는 행태 등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백하지만, 모든 일벌들이 암컷임을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최후이자 최상의 지위를 자부한다. 자연을 깊이 관찰한 애호가일수록 자연 앞에서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를 절감한다고들 한다. 대자연이라는 호칭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외경과 겸허함을 드러내는 존칭이다. 마테를링크도 마찬가지다. 꿀벌의 생태를 소개하는 틈틈이 그는 꿀벌의 지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의견에 대항하여 꿀벌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과학적이며 행동 하나하나가 꿀벌 종의 미래를 염두에 둔 것이 밝히고 있다. 그들과 대비할 때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상대적 우수성과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회의적이기조차 하다.

 

“나는 지금 다른 생물에게도 우리와 다른 어떤 지성이 있고, 그들이 우리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인간이라는 하나의 작은 존재로서 다른 존재의 정신적인 영역에 대해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뿐이다.” (P.37)

 

“우리는 인간에 대해 말할 때에도 꿀벌에 대해 말한 것 이상의 것을 말할 권리가 없다. 우리도 어쩌면 단순히 고통에 대한 공포, 쾌락에 대한 이끌림을 따르고 있을 뿔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가 지성이라 부르는 것 역시 동물의 본능이라 부르는 것과 그 기원이나 사명에서 다르지 않다.” (P.51)

 

꿀벌의 속성 중에서 전체를 위한 개체의 희생은 매우 철저하다. 집단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무수한 희생도 그들은 기꺼이 감내하는 듯하다. 그 무자비함은 진화 단계에서 일정부분 불가피한 측면을 지니지만, 지나치게 무게중심을 두면 인류가 겪은 전체주의의 악령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기본 가치는 개인과 사회의 적절한 조화와 배분에 있다.

 

작가는 꿀벌 사회를 지탱하는 집단의지를 ‘꿀벌의 정신’으로 부른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지성체계처럼 작동하여 개개의 꿀벌들이 벌집의 번영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끝내는 자아 희생을 감내하도록 통제한다. 그것이 우리의 눈에는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으로 비치겠지만 섣부른 비난과 멸시를 퍼붓지 말자고 한다. 인간보다 더 크고 우월한 외계의 이방인이 우리를 관찰할 때 인간도 결코 꿀벌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자연 이해는 편협하며 단편적이다. 현상의 일면 만을 흘끗 보아놓고 마치 핵심을 간취한 것처럼 기고만장해서는 자신만의 성을 구축하기에 바쁘다. 인간을 제외한 타 동물, 특히 곤충류는 이성적인 고민 없이 전적으로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원시적 발달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도처에서 인간을 뛰어 넘는다. 인간이 자족하고 방심하는 순간 자연은 예기치 않은 변화무쌍한 변이성을 보여준다. 자연 법칙은 인간 의도에 부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종(種)의 생존과 불멸을 위해 꿀벌은, 자연은 지고의 노력을 경주한다. 인간의 평가에 그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꿀벌은 여름의 영혼이다. 꿀벌은 풍요의 시기를 알리는 시계다. 가볍게 날아다니며 향기를 내뿜는, 민첩하게 움직이는 날개다. 그리고 춤을 추는 지혜로운 빛이고, 흔들리는 빛의 속삭임이며, 몸을 쭉 뻗고 엎드려 쉬는 대기의 노래다. 그녀들이 나는 모습은 진정한 환희, 눈에 보이는 작고 확실한 음표다.” (P.42)

 

작가의 꿀벌 찬미는 아름다운 애정으로 가득하다. 애정은 꿀벌의 행동 양식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솔직한 이해에 토대를 두었다. 마테를링크는 자연과학적인 꿀벌의 한계와 약점을 분명히 인식한다. 부풀린 기대와 헛된 희망을 자신의 애정물에 불어넣지 않는다. 꿀벌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하면서 그녀들을 사랑한다. 조심스레 단언컨대 인간끼리의 바람직한 사랑 방식도 이에서 멀지는 않을 것이다.

 

※ 옮긴이의 약력을 보건대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의 의도와 문체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번역에 임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로 자자한 작가의 명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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