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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 신개정판 ㅣ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9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로 소위 대중미술서로 대박을 친 저자의 후속작이다. 예기치 않은 전작의 성공을 거둔 저자는 다음 저작을 쓰는데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전작과 유사하되 식상하지 않으면서 재판의 혐의를 피하는 묘책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무난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후속작이다. 상대적으로 참신성과 혁신성은 떨어지지만 좀 더 진지한 이론적 면모에 대한 고민과 아울러 회화를 넘어선 여러 미술 장르의 관심도 보여준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사안이다. 그림에 대해서 사전 및 배경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하여도 그림이 저절로 가슴 속에 확 다가오지는 않는다. 화가 및 작가들의 반복되는 습작과 운동선수들의 끊임없는 연습처럼 체화시켜야 분야에서 일가를 이룰 수 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미술 감상에서 행하는 것은 실제 감상행위를 가리킨다. 그림을, 조각을, 건축을 보지 않고 감상능력이 증대될 것을 기대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알면 관심을 갖게 되고, 다음 수순으로 자주 접하다 보면 더 잘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다. 그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잘 봐야죠. 귀 기울여야죠. 어느 순간 보이는 것이 전과 다르고, 들리는 것이 전과 다른, 돈오의 경지가 옵니다.” (<잘 보고 잘 듣자>에서)
동양화에서 바라보는 자연과 인간의 의의는 분명 서양화와는 다르다. 저자의 설명처럼 산수화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산과 물 뿐만 아니라 어진 자와 슬기로운 자를 의인화[요산요수(樂山樂水)]하고 있다. 산수화는 산수를 그리되 심상화된 산수를 그린다는 것이다. 심상 또는 뜻, 정신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옛 초상화는 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압도적으로 강인한 표현으로 유명하지만,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전신(傳神), 즉 이형사신(以形寫神)을 매우 중시한다. (<정신을 그리다> & <초상화의 삼베 맛>에서) 외모를 초상화 주인공의 입맛과 지위에 걸맞게 잘 꾸미는 게 아니라 생생한 내면세계를 얼굴에 여하히 잘 불러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외적, 내적 가면을 벗어던진 소위 생얼의 재현이 지상목표였다는 것이다. <송인명 초상>과 <유척기 초상>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처럼 회화에서 문화적 배경은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지닌 미적 감정은 소속된 생활 공동체의 지배적인 관념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집적이 은연중 투사되기 마련이다. 그림 속 잉어는 출세를, 해오라기와 연꽃은 과거급제를 상징하는 것은 문화코드를 모르면 도저히 함의를 파악할 재간이 없다. (<물고기와 새>에서) 단원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와 조숙의 <숙조도(宿鳥圖)>를 관통하는 정서는 저자의 표현대로 거칠고, 성글고, 스산하고, 허허로운 맛이다. (<가난한 숫에 뜬 달> & <조선의 텃새>에서)
노력을 요할지라도 보면 읽히는 그림은 얼마나 행복한가. 장승업의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나 유운홍의 <부신독서도(負薪讀書圖)>처럼 스토리가 있는 그림은 이야기를 파악하면 더 이상 생경하지 않다. (<음풍과 열정> & <보면 읽힌다>에서) 뚜렷한 이야기가 없더라도 감상하는 나와 그림 간에 대화가 가능한 작품도 존재한다. 이때 그림은 더 이상 낯선 타인이 아니다.
20세기에 발흥한 추상화는 여전히 난해하고 당혹스럽다. 추상화는 그림과 감상자 간 이야기와 대화를 스스로 거부한다. 추상화에는 그림 속의 대상(인물, 사물 등)이 부재한다. 회화 자체의 자율적인 존재가치를 부르짖는 것이 추상화다. 도구, 표현, 색채, 구도 등에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그림의 본질과 화면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화면이여, 말하라> & <달걀 그림에 달걀이 없다>에서) 그림이 본래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색채가, 화면의 배치가,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면 표현 기법 자체가 비로소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주목 받는다. 무엇이 회화의 본질인지는 미지수다. 소위 형식과 내용의 고전적 갈등의 전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과도한 구상중심주의에 대한 극단적 반작용이 추상화로 드러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에 있어서 내용을 담지 않은 형식의 독자적 가치와 생명력의 영속성에 대한 주장이 지속적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움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림이 나날이 어려워지고 이해 불가능하게 되면서 그림보다 말이 더욱 중요해지는 기현상이 생겼다. 아무도 정답을 모르므로 큰 목소리로 남보다 먼저 외치는 사람이 해석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모든 예술의 감상과 비평은 독단과 편애의 결과라고 한다. (<불확실한 것이 만든 확실 – 서원> & <미술 젓가락 사용법>에서) 하물며 추상화의 영역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만인의 유언과 찬미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자신 만의 안목을 가지고 찬찬히 살피고 주의 깊게 생각하는 태도에서 좋은 그림을 구별하고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미술 젓가락 사용법>에서) 외화내빈하는 겉치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제대로 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울러 과도한 의미와 상찬을 덧붙이는 데도 있다. 옹기도, 전통 기와도 우리네 시대에 와서 슬픈 운명을 맞이하였다. (<생활을 빼앗긴 생활용기 – 옹기> & <그저 그러할 따름 – 기와>에서) 반대로 물 건너간 막사발은 다완으로 승격하여 일본의 다도를 완성한 선승 센노 리큐의 깊은 철학적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일본의 국보로 추앙받고 있다. 가난과 유적(幽寂)의 미학이라고 한다. (<물 건너간 막사발 – 다완>에서)
미술(또는 예술)의 역할 내지 위상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싶다. 미술은 높이 떠받들고 외경해야 할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네와 더불어 일상 속에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게 마땅한 존재인가. (<말과 그림이 싸우다>에서) 무엇이 우리네 삶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해줄 것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네 민화 재발견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저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덜 세련된 것이 주는 만만함과 예상에서 벗어난 일탈, 그곳에서 솟아나는 유머와 너름새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라도 다 즐거운 감동을 안기나 봅니다.” (<어리숙한 그림의 너름새>에서)
이쯤에서 저자가 극찬한 최순우의 글을 읽고 싶다. (<‘봄 그림’을 봄> & <아름다움에 살다 아름다움에 가다>에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아는 눈과 느끼는 마음을 그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서나마 조금이나마 맛보고 싶은 소박한 바램을 터무니없는 과욕으로 치부해버릴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