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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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은 오웰의『1984』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두 작품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자리잡았고,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정치사회적으로도 자주 인용되는 텍스트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두 작품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들이 살던 시대는 "감독관들, 설계자들, 감시자들이 없이는 미래의 사회라는 것을 생각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디스토피아적 각본과는 정반대로, 이러한 결과는 독재나 종속, 억압이나 노예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체제'가 사적 영역을 '식민화'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옳게 혹은 그릇되게) 받고 있는 족쇄와 사슬이 근본적으로 녹아버린 데서 발생하였다. 질서의 경색은 인간 주체의 자유가 만든 인공물이자 침전물이다. 이 경색은 '브레이크를 푼' 전반적 결과이며 규제 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재정·부동산·노동시장을 풀고 조세 의무를 풀어준 결과이다. (13쪽)


바우만은 우리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액체근대, 또는 유동하는 근대로 규정한다. 그가 바라본 현대 사회는 단단하고 굳건했던 질서들이 액화된 사회, 공적인 것들이 사적 문제에 침식된 사회, 그로 인해 대문자 정치(Politics)는 사라지고 생활정치만 남은 사회, 아고라가 없는 사회다. 과거 비판이론은 사적인 자율성을 공공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지만, 이제는 역으로 사적인 것이 넘쳐나는 생활세계에서 공공 정치가 자신의 기능을 되찾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웰과 헉슬리의 시대를 지배했던 여호수아 담론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액체근대』에서는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라는 다섯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유동하는 근대를 고찰한다. 각각의 테마가 명료하게 나뉘어 논의되는 것은 아니어서, 각 장의 테마가 아닌 다른 테마들이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구성이 허술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섯 개의 테마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체 근대의 질서가 액화되면서 해방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의 개인적 부담, 이 두 가지는 생산자 주체가 소비자로 전환되면서 도래한 소비자주의와 연결된다. 이는 일이 갖고 있던 위상이 훼손되어 "소비자의 미학적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주는 능력 여부로 평가"되는 현실과도 관련되며, 자유와 책임의 무제한적 제공 아래 불안에 빠진 개인을 유혹하는 공동체주의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왜 현대 사회의 개인은 소비(쇼핑)에 집착하는가? 그것이 불확실성의 시대와 범람하는 사적 자유, 그리고 무한한 기회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본보기, 생계에 필요한 기술과 같은 자기계발의 방법들도 쇼핑한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 조만간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세상에 "무한한 목표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소비는 멈추지 않고 만족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바우만이 비유한 대로, 고체 근대(생산자 사회)가 지향했던 것이 "건강"이라는 기준이었다면, 액체 근대(소비자 사회)가 지향하는 것은 "균형 잡힌 몸매(fitness)", 즉 콕 집어 정의내릴 수 없기에 도달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액화되고 이동성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공간은 여전히 무겁고 부동적(不動的)이며, 그로 인해 한때 정복의 상징이었던 공간의 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고체 근대 시기에 자본과 상호 결속을 유지했던 노동은 몸이 한결 가벼워져 전지구적으로 노는 자본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늘날 자본은 여행가방에 서류케이스, 휴대폰, 노트북만 담고 가볍게 이동한다. 거의 어디에서든 잠깐 머물 수 있고, 원하면 아무 때나 훌쩍 떠나면 된다. 반면에 노동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곳으로 예상되었던 그 장소는 예전의 확고함을 상실하였다. (95쪽)


이런 점에서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러나 그 골조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좀더 정확하게는, '불확실성의 원천에 근접함'을 추구하는 일은 하나의 단일한 목표인 즉시성으로 좁혀지고 집중되었다.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이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그들만큼 빨리 움직이지 못하거나, 자유자재로 떠나지 못하는 범주의 사람들이 피지배자들이다. 지배는 도망가고, 결속을 끊고, '다른 어딘가에 있을' 능력과 이것들을 실행하는 속도를 결정할 권리에 있다. (193쪽)


그러니까 즉시성에 근접한 지배자란 소프트한 자본을 쥔 자를 말하며, 자본을 쥔 지배자는 더욱 더 가벼워지기 위해 노동이 소요를 일으킬 힘을 빼앗고 이동을 막아버린다. 대표적인 것이 합병, 감원 전략 같은 것들이다. 이를 막을 굳건한 질서는 이제 없다. 설령 누군가 막으려고 해도, 신속하게 빠져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끊임없이 자본과 이에 근접한 자가 도망가지 않을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 이 책이 출간된 지 15년이 넘었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과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비슷하다.


그러나 자본은 전례 없이 초지리적이고, 가볍고, 모든 짐을 훌훌 벗어던진 채 실물 기반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이미 달성한 공간적 이동성은 지리적 구속을 받는 정치집행 주체들을 위협하여 순순히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도록 굴복시킬 정도가 되었다. 지역적 유대를 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다는 위협(암묵적이어서 그저 추정만 되는)에 대해, 책임감 있는 정부라면 그를 통해 이득을 얻고 정부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이 투자를 그만두겠다는 위협을 거두어들이도록 가능한 모든 정책을 실시하면서 최대한 신중하게 사안으로 다루어야 한다. (...) 역설적이게도, 정부들은 자본이 떠나겠다는 사전통고를 촉박하게 하거나 아예 통고조차 없이 훌쩍 떠날 자유를 확연히 보장해주어야만 자본을 제자리에 붙들 희망이 있다. (240-241쪽)


모든 것이 영구적 불확실성으로 귀결되고, 유대와 동반 관계마저 소비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불안에 떨고, 자신에게 부과된 선택의 책임에서 회피하고자, 그리고 소속감을 통해 불안에서 해방되고자 공동체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우만이 보기에 현대(아마 90년대 후반일 것이다)의 공동체주의와 공동체들은 자기 주변에 산재한 문제들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개인의 부담을 잠시 벗게 해주는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 또는 "카니발 공동체"이며, 개인의 고독을 해소해주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 "화약고 공동체"다. 이러한 (가짜) 공동체들은 '민족성'과 결합하여 희생양을 찾고, 폭동을 통해 카니발 의식을 치른다(바우만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예로 든다).


짐 보관소/카니발 공동체 들이 지닌 한 가지 효과는, 이것들이 흉내내고 있고(오도하는 방식으로) 맨 처음부터 복제하거나 만들어보겠다고 약속한 '진짜'(즉, 포괄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공동체로 모아지는 것을 제법 효과적으로 피해간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미처 분출되지 못한 사회성의 충동들을 집약하는 대신 분산시킴으로써, 극히 어쩌다 한 번씩 드물게 일어나는 조화롭고도 합심을 이룬 집단적 행동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그러나 허망하게 구제책을 찾으면서 고독을 영구화하는 데 기여한다. (319쪽)

 

그렇다면 이미 막을 수 없을 만큼 액화된 시대에 사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바우만은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하는 사회학의 임무를 답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거리를 두고 시간을 내는 것", 그리고 "장차 닥칠 숙명을 초래하는 복잡한 원인의 그물망을 알아내는 것"이다.


몇 달 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저지르는 행동을 악한 행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아마 '악의 평범성'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나는 그때 프리모 레비의 말을 인용하면서 모르는 것,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논지의 발언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죄'라는 말이 너무 격했던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와 지금의 내 생각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 세상에 던져졌다면, 그리고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 주변의 문제가 무엇인지 관심을 두고 지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비록 '즉시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문제들, 뉴스들은 "가장 빨리 상하는 상품"이 되었지만, 적어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문제에 대한 자기 주관을 세울 만큼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바우만이 생각하는 '사회학의 쓸모'일 것이고, 하루에도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수도 없이 보도되는 현실에서 사회학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요청되는 이유일 것이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질문 없이 "TINA(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주문"을 외우는 행위는 오늘날의 액체 근대 사회에서 겪게 되는 불행들을 보지 않겠다는 안이의 소치다.

사회학을 하는 길에서 `참여`와 `중립`을 선택할 여지는 없다. 참여하지 않는 사회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대놓고 밝히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부터 철두철미한 공동체주의적 입장까지 오늘날 통용되는 수많은 사회학 상표들 한가운데서 도덕적 중립 입장을 취하려 한다면 이는 헛된 노력이다.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글이 지닌 `세계관`의 효과나, 인간의 개별적 혹은 연대의 행동에 그 세계관이 미치는 여파를 부정하거나 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다른 인간들이 나날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의 책임을 저버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사회학이 하는 일은 그러한 선택들이 진정 자유로운지, 인류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유가 유지되는지, 더욱 더 자유로워지는지 잘 살펴보는 일이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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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웰과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이 있었던 건, 예브게니 짜마친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요. <우리들>을 보면 오웰과 헉슬리가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대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 2016-08-28 01:09   좋아요 0 | URL
저도 짜마친의 <우리들>이 그 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를 듣고 진짜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아마 9월에는 구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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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다 읽고 나서 오는 저릿한 감정은 말로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모르겠다는 양희에게 난 반했다. 덤덤한 수준을 넘어선 부동(不動)의 관계가 내게 주는 떨림. 자신의 청춘을 바친 기업에 팽()당한 뒤 살아가는 필용, 그는 다른 메뉴로 바뀌지 않고 사라져 버린 피시버거인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은 그냥살고 있는 양희의 모습은 비웃질 않는 나무 그 자체 같다. 삶을 마주하는 자세는 서로 다르지만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한낮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런데 문득 조중균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돌아가는 길에 필용은 맥도날드에 더 이상 피시버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고 아예 사라져버린 그 메뉴란 것에 대해. 만약 피시버거가 사라지지 않고 뭔가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면 불쾌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주 결연하게 사라졌단 말이지. 이제 맛볼 수조차 없게 아주 그냥 끝. 다신 맛 못 봐, , 끝이야, 아주 없어, 이렇게. A가 유사한 A'B가 된 것이 아니라 AA인 채로 사라져버렸다는 건 햄버거 같은 정크 푸드의 역사에서도 아주 비장한 신이었다. (11)


필용과 양희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필용이 앞으로 펼쳐질 인생,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이겨내야 할 어려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야 갖게 될 성취와 인정에 대해 상상하며 지냈다면 양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양희에게는 현재라는 것만 있었다. 하지만 그 현재는 지금 생생하게, 운동감 있게 펼쳐지는 상태가 아니라 안개처럼 부옇게, 분명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게 풀풀 흩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뭔가 생활 자체가 그랬다. (15-16)


사랑한다며?”

,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렇잖아.”

,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22)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구요.”

필용은 양희 뒤에 서서 양희에게로 손을 뻗어보았다. 닿지는 않았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손이 닿을 수도 있었지만 필용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간절함으로, 연민과 구애의 감정이 뒤엉킨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걸, 자기 자신만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필용은 말없이 르망에 올라탔다. 문산까지 오는 동안 필용이 전율했던 사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 뻥 뚫린 것처럼 없어지고 말았다. 필용은 울었다. 울면서 무엇으로 대체되지도 좀 다르게 변형되지도 않고 무언가가 아주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38)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필용은 가로수 밑에 서서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구고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43)


3. 정용준, 선릉 산책

 

대성당같은 엔딩은 현실에 없다. 잠시나마 한두운을 이해했다고 여겼던 착각은 정해진 시간이 넘어서자 무너진다. 장애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오만이 아닐까. 그랬기에 결말은 모르겠다.”의 연속일 뿐.

 

4. 장강명, 알바생 자르기

 

문득 채만식의 치숙을 생각했다. 전적으로 은영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작가노트에 나온 것처럼 “‘교활한 서민층 어린애한테 걸려 고생하는 착한 중산층 여자 이야기냐’”고 읽을 수 있겠지만,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은영은 치숙만큼이나 신빙성 없는 화자다. 전체 구조에서는 을이지만 자기보다 못한 병의 입장인 혜미(대화체를 제외하면 그녀는 항상 이름이 아닌 여자아이로 불린다)에게 하는 행동은 유사-갑질과 다르지 않다. 더한 것은, 은영 부부가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퇴직금과 4대 보험료를 받으려 하고, “어시스턴트가 아닌 어드미니스트레이터로 기록된 서류를 받기 위해 따지는 혜미를 욕할 수 있을까. 단지 밀린 월급을 달라고 했을 뿐인데 동전 더미를 던져주는 현실에서, 혜미는 자기 나름의 생존법을 배운 것뿐이다. 사장과 은영의 입장에서 싹싹하지도 않고 나서서 일하지도 않는 혜미가 못마땅했겠지만, 이런 시각은 알바생들을 양산한 구조를 은폐하고 감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은영의 시점으로 풀어낸 건 그동안의 장편에서 보였던 작가의 중립적인 시선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건 자기도 몰랐잖아.

-?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걔도 알바를 열 몇 개나 했다며.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걔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본 적 없잖아? (170)


6. 최정화, 인터뷰

 

그를 나락으로 가라앉혔던 인터뷰의 원본. 항상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어느 호프집에서 인터뷰의 사본을 각색해본다. 한 남성의 허위와 위선, 그리고 불안. 그를 이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단둘이 남게 되자 나타나는 공감의 결여. 그리고 이를 간파한 남자의 불안이 또다른 사본을 만든다. “아니, 남자였습니다.” 하고.


최정화의 소설 속에서 인간은 내면과 사유가 결여된 공허한 존재이다. 그들은 정합성 없는 사회(언론)를 신봉하고, 타인들의 환심을 사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이 실존의 전제조건이 된다고 했지만, 최정화가 그려낸 불안한 현대인들에게는 개심이나 구원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이런 회의주의로 말미암아 최정화는 이전 시대의 대표적 작가들과 구별된다. (261)


7. 오한기, 납치

납치라는 모티프가 작품 내용과 상관없이 계속 반복되면서, 떠올린 모티프를 소설로 만드는 데 실패한 작가의 ()일상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이후 두 번째인데, 전에 읽은 게 더 나은 것 같다. 왜 그의 소설 속 화자는 모두 (실패한) 소설가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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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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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삼각관계가 있다. '우현-순미-나(기현)', '그-어머니-아버지'. 삼각관계라고 정의할 관계는 아니지만, 이 3자 관계는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어떻게 보면 이들 사이의 이야기를 통속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문장은 단단하고 강렬하다.


두 다리가 잘려나간 형을 사창가에 데려다주는 화자가 있다. 소설은 이 두 형제의 사연을 천천히 되짚으면서 시작한다. 우현과 순미 사이의 사랑과 이를 질투하는 나. 결국 '나'의 치기로 우현은 군대에 끌려가 두 다리를 잃었고, 순미도 잃었다. 그리고 이 셋은 모두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있다. 그녀가 평생동안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 민들레 식당에서 처음 만난 둘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세상은 그 둘을 갈라놓았고 그가 임종을 맞이할 때가 되어서야 재회한다. 그리고 어머니만을 사랑했던 아버지는 그 과거를 알면서도 평생 그녀와 함께한다.


닮지 않은 듯 보이지만 닮은 두 관계에서 주목할 점은, 이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식물, 정확히 말하면 나무에 있다는 점이다. 우현이 산책하며 바라보는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 거대한 물푸레나무. 숲 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 소나무를 휘감고 있는 때죽나무. "식물과 교감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한다며 식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그의 사랑을 표상하는 야자나무.


그 열매가 태평양을 건너왔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그것이 무슨 상징처럼, 예컨대 두 사람의 숨찬 사랑처럼 여겨지는 것이어서 숙연해졌다고 했다. 사랑을 걸었다고 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그 나무에다 전이시켰던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나무가 정말로 자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니까......" 그 말을 할 때 어머니는 울컥 속에서 치미는 무언 가를 삼켰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지만 보란 듯이 하늘을 향해 서 있는 한 그루의 야자나무가 그녀의 눈시울을 축축하게 하고 있었다. 상징목이라는 단어가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처럼 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177쪽)


화자인 '나'는 자신이 형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다시 사진을 찍으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순미와 다시 만나도록 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어머니의 숨겨진 사랑 이야기, 순미의 숨겨진 상처와 대면하게 되고, 동물적인 충동과 욕망 속에 살았던 그는 점점 그들의 식물지향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때의 식물은 무동성(無動性)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인 나무, "좌절된 사랑의 화신"으로서의 나무를 말한다. 세상이 사랑을 허락하지 않아 나무가 되었다는 수많은 (우현이 수집한) 신화들 속에서, 그리고 삶에서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나무가 되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는 순미의 꿈을 통해 작가의 식물지향성, 아니 나무지향성은 세상의 동물지향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끝에 "기후도 풍토도 다른" 야자나무가 자라는 공간, 남천이 있다. 작가가 지향하는 나무-인간의 모습은 그의 단편 제목처럼 '신중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순미와 우현이 마침내 재회했는지는 결말에 나와있지 않다. 그들은 남천에서 재회했을까. 하지만 나는 재회하지 못했을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사랑은 결국 소나무와 때죽나무의 모습이어야 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통속적이고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건 작가의 문장이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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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6-1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요즘 이 책 읽고 있어요 ^^

아무 2016-06-13 17:19   좋아요 0 | URL
저도 <생의 이면> 읽은 뒤에 반해서 열심히 찾아읽고 있습니다 ㅎㅎ 어느 책을 읽어도 특유의 강철같은 문장이.. 여태껏 왜 몰랐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
 










『자기만의 방』을 구매할 때 끝까지 고민했던 것은 민음사본을 살까, 펭귄클래식본을 살까였다. 고민했던 이유 중 하나는 두 책의 구성이 달랐기 때문인데, 민음사본은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펭귄클래식본은 「자기만의 방」과 「여성의 전문직」이 수록되어 있었다. 결국 민음사본을 주문하고 펭귄클래식본은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는데,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연락이 왔다. 책을 빌리러 가면서 나는 내가 이제 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학교도서관의 경우 희망도서 신청 후 수령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일주일이었다).


「자기만의 방」 부분은 따로 읽지 않았는데, 민음사본을 읽는 데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굳이 비교를 해봐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뒤에 실린 주해만 확인해 보았는데, 민음사본의 주보다는 이쪽이 더 자세했다. 하지만 「여성의 전문직」이 생각보다 짧아서 민음사본을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난 아무래도 「자기만의 방」보다 「3기니」에 더 손이 가기 때문이다...


「여성의 전문직」에서 울프는 여성 작가로서 자신이 부딪혀야 했던 심리적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녀는 그것을 "가정의 천사"라고 부른다. 그것은 문화 안에서 소위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강제되었던 성격적 특질들의 총칭이다. 동정심이 많고, 헌신적이며, 가정생활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자기희생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그 천사/유령은 그녀가 비평을 쓰려고 할 때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저명한 남자가 쓴 소설을 비평하려고 손에 펜을 쥐자마자, 천사는 내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서는 속삭였습니다. "아가씨, 당신은 젊은 여성이에요. 당신은 남자가 쓴 책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호의를 베푸세요. 부드럽게 대하세요. 듣기 좋은 말을 해주세요. 기만하세요. 당신의 성이 가진 모든 기술과 책략을 동원하세요. 당신이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세요. 무엇보다 순수함을 지키세요." (161-162쪽)


그녀는 천사에게서 벗어나고자 그의 목을 죄고, 잉크병을 던짐으로써 그를 죽이려 한다. "자기 자신만의 정신이 없다면, 또한 인간관계와 도덕, 성에 관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고서는 한 편의 소설도 비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울프를 비롯한 여성 작가들이 소설을 쓸 때마다 부딪쳐야 했던 것은 남성들이 규정하는 '여성'이라는 관념이었다. 이 관념의 벽 앞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낚싯줄처럼 빠져나가고, 그들은 예술가로서 곤경에 빠진다.


그녀는 실제로 가장 어렵고 심각한 곤경에 처했습니다. 비유 없이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육체에 관한 어떤 것을, 여성으로서 입 밖에 내기에는 적절치 않은 정욕에 관한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성이 그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남자들이 충격을 받을 거라고요. 자신의 정욕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여성에 대해 남성이 할 법한 말을 의식하자마자 그녀는 무의식이라는 예술가로서의 심적 태도에서 깨어났습니다. (...) 남성이 이러한 측면에 대해 의식적으로 자신에게는 많은 자유를 허락한다 해도, 그러한 자유를 누리는 여성에 대해서는 극도로 엄격하게 비난하는 자신의 태도를 자각하거나 통제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165-66쪽)


사실 지금도 이런 시선은 유효하다. 남성의 욕망은 남성성의 발현이 되지만 여성의 욕망은 여성성의 상실로 규정되는 것, 그것은 여전히 순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모습이 아닌가? 욕망에 솔직해지는 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과연 순수라는 이름의 프레임에서 욕망이 정말 '동등하게' 자유로운지는 의심스럽다.


울프는 여성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겪었던 모험 중 "가정의 천사"를 죽이는 일은 성공했지만, "하나의 육체로서 경험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남성 중심 사회의 시선이 내면화되어 또다른 제약으로 남은 것이다. 자신의 사례를 통해 그녀가 묻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성의 전문직 중 가장 자유롭다고 인식되었던 작가가 받는 제약이 이렇다면, 다른 전문직은 얼마나 더 심할 것인가? 그럼에도 전문직에 진출한 여성들이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환영과 장애물"을 규정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논지다.


글이 발표된 시기를 보면 순서는 「자기만의 방」→「여성의 전문직」→「3기니」인데, 이 글은 양성성을 추구했던 「자기만의 방」과 차이를 강조했던 「3기니」의 과도기에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녀는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것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3기니」를 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전문직」에는 구체적인 대안이 없고, 「자기만의 방」과 「3기니」의 대안은 현실성이 없어보인다. 그러나 나 자신도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식만 가지고 있을 뿐. 울프의 시선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여전히 사회는 은연중에 규정된 성 역할을 강요하고, 혐오의 언어는 나날이 과격해진다.


+) 밑줄은 책 말미에 수록된 미셸 배럿의 해설로, 1993년에 쓰여졌다.

우리는 울프의 개념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현대 페미니즘이 맞닥뜨린 주요 딜레마를 발견할 수 있다. 때때로 `평등/차이 논쟁`으로 요약되는 이러한 딜레마는 페미니즘이 부당한 현실에 맞서 평등주의를, 더 나아가 `양성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지, 아니면 더 나은 가치의 사회와 국가조직을 추구하기 위해 남녀의 현존하는 차이를 발판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관련되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예술에서 양성적인 이상을 지지하는 편에서 차이의 힘을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편으로(여성은 사회적인 `아웃사이더`라고 단언하는 것에서 이러한 입장이 특히 두드러진다) 옮겨 간다. (170쪽)

울프의 주장은 유물론적이지만, 환원적인 경향이 덜하다. 울프는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한다고 본다. (..) 울프의 표현을 따르자면, 작가가 처한 물질적인 상황이 작가의 `시각`을 결정한다. 1940년 브라이턴 노동자교육협회에서 주최한 연설에서(이 연설문은 여성의 이해관계와 노동자계급을 연관시켜 보는 흔치 않은 중요한 글이다), 울프는 작가의 시각이나 관점은 그가 받은 교육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계급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175쪽)

페미니즘에서는 이른바 `평등`을 강조하는 고전적인 주장이 바로 울프의 이러한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 울프가 차용한 양성적 정신론은 다른 이들이 성적 차이를 발견하는 곳에서 성적 상보성을 발견한다. (..)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자신이 사는 시대가 특히 이러한 이상적인 양성성 모델을 적대시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선거권 운동은 남성의 기성 사고에 이의를 제기했고, 여성과 남성 모두 "성 의식"을 강화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울프는 작가에게 그러한 `성에 대한 의식`은 재앙에 가깝다고 결론을 내린다. (180-181쪽)

버지니아 울프가 사유했던 개념 가운데 많은 것들(정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완결성, 시야, 진리 등등)이 내포하는 의미는 오늘날에는 미적 판단과 주체의 동일성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시되는 것들이다. 울프는 소설에서 단일한 모순 없는 동일성이라는 가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 하지만 그러면서도 울프는 파편화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배치되는 어떤 알 수 없는 자신의 기질을 버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현대에 우리가 상대적인 관점에서 특수한 역사와 문화 환경의 소산으로 보는 `자유`, `진리`, `상상력`과 같은 개념을 별다른 문제 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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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0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면 남성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일단 환영합니다. 다만, 여성이 공인이면 남성들이 인정해주는 반면 일반 여성이 그러면 ‘김치녀’라고 무시합니다. 나머지 반응이 아예 무시하는 겁니다.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자세를 헤픈 태도로 여깁니다. 여기서도 ‘김치녀’로 무조건 대입시킵니다. 잘 해도 김치녀, 못 해도 김치녀.

아무 2016-06-02 17:21   좋아요 0 | URL
어떤 행동을 하든 씌워지는 프레임이 같다는 게 더 무섭죠 사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 남성을 지칭하는 언어는 무표적인데 왜 여성을 지칭하는 언어는 유표적일까.. 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돌아다니는 언어에 비하면 얌전한 수준이라는 게 더 안타깝습니다..
 
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의 초대 지식인마을 34
김석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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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어차피 이 책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그건 내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제 이야기를 해야될 것 같다. 이 책의 부제는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면 '무의식에로의 초대'로 나오는데, 내가 받은 책의(난 3월 초에 알라딘 중고샵에서 이 책을 구매했다) 부제는 '무의식의 초대'다.




이런 까닭에 마음 한구석에 뭔가 찜찜한 구석이 가시지 않았다. '무의식이 초대'하는 것과 '무의식으로 초대'받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지 않은가... 혹시 파본?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프로이트'보다 '라캉'에 초점을 둔 것이었는데, 오히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설명이 쉽게 되어 있어서 몇 가지 오해를 풀 수 있었다. 특히 1차 정신 기구 모델과 2차 정신 기구 모델의 차이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기에 충격이 좀 컸다. 그동안 상담이론 등에서 정신분석에 대해 이따금씩 듣거나 심리학 교양수업을 찾아 들을 때도 '의식-전의식-무의식'과 '이드-자아-초자아'가 서로 다른 모델이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상담이론에서 정신분석학이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데도 원인이 있는 듯하다. 교육학 쪽에서 주목받는 심리 분야는 학습에서는 인지주의, 상담 쪽은 인본주의다)


라캉의 경우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장을 나누어서 각각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읽으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이 매우 돋보였으나, 애초에 개념 자체가 어려운 것이기에 어느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다. 나로서는 이번 독서를 통해 '상상계'가 'imagine'의 의미보다 'image'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에 의의를 둬야 할 듯하다. 이러한 오해는 세 가지 계를 이해할 때 들었던 체스 게임의 비유를 내가 잘못 해석하면서 발생한 것인지도. 그 외에도 오이디푸스 단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욕구/요구/욕망의 차이를 정확히 아는 것, 자아와 주체가 얼마나 다른지(맨 처음 통상적인 의미로 두 개념을 이해했다가 매우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 등 라캉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지적해 둘 것은 프로이트와 같이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보니 프로이트와의 차이가 부각된다는 점, 그리고 주로 언어의 문제와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본 라캉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초대', '만남', '대화', '이슈'로 구분되어 있는데, 두 인물의 사상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건 '만남'이다. '초대'는 그야말로 프롤로그에 가깝고, '대화'는 프로이트와 라캉이 대화를 나누는 가상 장면을 설정하여 두 인물의 차이점을 부각시켰다. '이슈'는 성차와 관련해서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의 관점을 비교해 놓았는데,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이 부분을 참고하면 좋겠다. 나로서는 관심이 많이 가는 이슈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이 책만 읽고 '나 프로이트 좀 안다'고 젠체할 수는 있겠으나, 라캉은 아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보다 심화된 수준에서 논의하고 있고, 그의 사상 전반을 다루고 있지만, 이 역시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개념들은 이런 것이다 정도에서 정리될 수 있겠다. 나 역시 라캉을 '공부'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지만, 아직 나의 언어로 정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인 '학습'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로쟈의 인문학 서재』). 앞으로 몇 번 더 읽어보며 확인해야 도달할 수 있을 장소이리라. 다행인 것은 책 말미에 프로이트와 라캉의 사상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핵심어들의 정의와, 깊이 읽기 위한 추천도서들이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다른 책을 읽으면서 개념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하며 읽을 수 있게 되어 좋은 참고서를 얻은 느낌이다. 다른 책을 읽는 데 좋은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른 책들은.. 살레츨이라든가, 지젝이라든가, 지젝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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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17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에로의 초대’보다는 ‘무의식의 초대’가 어감상 좋아 보여요. ‘무의식에로의 초대’에 글자 한두 개 빼고 읽으면 ‘무식에로의 초대’가 되잖아요. 무식과 에로의 묘한 결합... ㅎㅎㅎ

아무 2016-05-17 16:21   좋아요 0 | URL
`에로의`라는 조사 자체가 원래 없는 말을 억지로 만든 듯한 어감이 있습니다. 조사 3개를 연달아 붙여버리니.. 그냥 `으로의`처럼 2개로만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요. 그래도 무의식의 초대 보단 못한 면이 있죠.. ㅎㅎ
무식과 에로..ㅋㅋㅋ 최근에 롤리타를 읽어서 그런지 `에로`라는 단어가 심상치 않게 다가옵니다 ㅎㅎ 무식에로의 초대라는 제목도 나중에 교양서 제목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